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대체로 쉬운 언어로 쓰였는데, 그럼에도 무슨 말인지 쉽게 와 닿지 않는 시가 있다. 자꾸 읽어보게 되는데, 그래도 모르겠다.


  그 중 한 시가 바로 '옷 벗는 나무'다. 나무가 옷을 벗는다?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이 시집에 실린 다른 시들을 찾아보니 어느 쪽으로도 가능하다. 뭐지 이게?


한 그루 나무를 그린다. 이롭겠지만 / 마침내 혼자 살기로 결심한 나무./ ... / 요즈음에는 내 나이 또래의 나무에게/ 관심이 많이 간다. / 큰 가지가 잘려도 / 오랫동안 느끼지 못하고 / 잠시 눈을 주는 산간의 바람도 / 지나간 후에야 가슴이 서늘해온다. / 인연의 나뭇잎 모두 날리고 난 후 / 반백색 그 높은 가지 끝으로 / 소리치며 소리치며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그림 그리기4'에서. 12쪽)

                                            

그리던 나무를 아무래도 지워야겠다. // 혼자서 멀리 떠나야만 / 길고 편한 잠 이룰 수 있는 것 알면서 / 땅에 떨어지기 싫어하는 / 낙엽이 있다면 어쩌겠냐. ('그림 그리기 5'에서. 44쪽)


벌판에서 혼자 떨던 나무도 / 저 멀리 다음해까지 / 옷 벗어던지고 혼절해버렸구나. /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겨울 기도 2'에서.62-63쪽)    


눈을 뜨고 꿈꾸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열매를 거두는 일은 어차피 내 몫이 아닌 다음에야 / 여름이 가기 전에 꽃잎을 눈부시게 다 뿌리고 / 세상의 자초지종에 태연하고 싶었다.('영희네 집'에서 97쪽.)


그러나 서울 가로수는 냉혈 식물인가, / 해마다 눈부신 장식으로 봄을 빛내다가 / 때가 되면 주저없이 입던 옷도 벗는다. / 두 눈 부릅뜨고 우리를 보는 / 늙고 지혜로운 선각자처럼.('서울 가로수'에서. 98쪽)                             


그럼 그냥 감으로 시를 읽어야 한다. 나무가 옷을 벗는다? 이는 계절적으로 보면 가을이란 말이고,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지점이란 성숙의 과정을 거쳐 결실을 맺은 때라는 말이다.


또 나무가 옷을 벗는다는 말은 가리지 않고 모두 보여준다는 말일 수도 있다. 나무가 숲을 이루는 경우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숲 속에 들어가면 너무도 울창한 나무로 인해 하늘을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한쪽으로 해석하자. 이번에는 나무가 옷을 벗는다는 말을 가리는 것을 치운다로 보자. 그래도 이 시가 잘 이해 안 되기는 마찬가지지만.  


옷 벗는 나무


왕이여,

당신의 슬픔은 遺傳이다.

사방에서 눈치보며 숨죽이는

당신의 아까운 겨레들,

숨죽이고 몸 흔드는 겨레의 눈들,

아무리 타일러도 옷 벗고 나서는 나무들.


왕이여,

높은 산 주위에는

낮은 나무들 허리 굽혀 살고

낮은 산 둔덕에서

크고 곧은 나무가 허리 펴고 산다.

당신의 슬픔은 유전이다.

천천히 넘어지는 무리의 나무들.

아무리 가지쳐서 불태워도

한세월의 어두운 王道의 하늘.


마종기,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1996년 재판 2쇄. 16쪽.     


'왕이여 당신의 슬픔은 유전이다'가 1연과 2연에 반복되고 있다. 슬픔이 유전이라는 말과 '어두운 왕도의 하늘'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하늘이 맑지 않다.


즉 왕도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왕도를 정치로 바꾸면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방에서 숨죽이며 눈치볼 수밖에 없다. 왕도가 아닌 패도(覇道)의 시대는 그렇다. 그러니 나무들이 옷을 벗을 수밖에 없다. 보라고, 하늘을 보라고, 지금 이 하늘이 과연 왕도의 하늘이냐고?


정치가 잘 될 때는 굳이 옷을 벗을 필요가 없다. 하늘이 잘 보이므로. 하지만 패도 정치가 이루어질 때는 옷을 벗어야 한다. 누가? 바로 주변에서 나름대로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 충언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


이 나무들이 옷을 벗는 이유는 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하늘을 보지 않고 나무를 베어낸다. 나무를 쓰러뜨린다. 잘 자란 아름드리 나무들을. 


보이지 않게 한다고, 막는다고 어두운 하늘임을 모를까? 


옷 벗는 나무들, 하늘을 보여주려 하는 나무들. 그 나무들을 찍어내기만 하면 결국 슬픔은 유전될 수밖에 없다. 지속될 수밖에 없다.


나름대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는데,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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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각박해지고 있다. 치안 만큼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수없이 벌어지고 있는 총기난사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아직 저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우리 사회는 그래도 무차별 살인이 많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는데...


  대낮에 거리에서 백화점에서 학교에서 상해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죽거나 다치거나.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의 표출일 수도 있고, 특정한 개인에 대한 앙심 때문에 벌인 일일 수도 있지만...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는 멀어진다. 그 멀어진 사이로 법이 강화되어 들어온다.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법이라는 틀로 강제하게 된다. 그냥 법, 법 하는 사회로 변해가는데...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법이 각광을 받는다. 어지러운 사회일수록 제자백가 중 법가(法家)들이 판을 장악하게 된다. 법은 점점 강화되고, 그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는 멀어진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한 개인이 한 개인을 어떻게 할 권리는 없다.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존재도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인데... 그런 마음을 지녀야 하는데... 법을 작동시키기 전에. 법으로 사람 관계를 만들어 가기 전에.


조태일 시집을 읽었다.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 시에서 잔뜩 묻어난다. 그 중에 산 속에 홀로 피어 있는 꽃. 개복숭아꽃. 우리가 먹는 탐스러운 복숭아보다는 못하다고, 야생 상태의, 질이 떨어지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접두사 '개-'가 붙은 꽃. 이 시집 제목이 된 구절이 바로 이 개복숭아꽃이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연등' 1연에서)다.


'연등'이라는 시다. 연등이 무엇인가? 희망을 담은 등 아닌가, 희망을 함께 느끼는 등 아닌가? 절에 가면 많이 걸려 있는 소망들. 그런 바람들.                                                     


하지만 이 시에서는 '저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라고 한다. 홀로, 마치 김소월이 쓴 '산유화'에서 '저만치'를 연상시키듯이.


하지만 혼자 타오르고 있었다고 해서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희망을 잃은 시대에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희망을 피어올리고 있다고 해야 한다.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 바로 희망 아니던가. 조태일의 시 '연등'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연 등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

개복숭아꽃 저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연분홍꽃

점, 점, 점, 점점이 불 밝혀

화르르 화르르 몸 섞고 있었네.


사월 초파일날 켠 연등보다

더 환했네. 더 고왔네.


오래도록 내 숨결

내 스스로 가빴네

내 스스로 황홀했네.


조태일,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창작과비평사. 1999년 2쇄. 32쪽.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또 저만치 있더라도, 홀로 있더라도 희망은 희망이다. 희망을 잃지 않는 삶, 사람과 사람 사이를 법으로 메꾸기보다는 배려와 존중, 서로 인정하고 도와주는 마음으로 채우는 그런 시대에 대한 희망,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전히 희망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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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사람책'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렸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일은 당연한 일.


  그 영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좋은 책이든 좋지 않은 책이든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영향을 받듯이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그냥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면서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에 누구의 삶도 소중하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겨우'라는 말을 쓴다. 시인이 국립국어원에서 낸 표준국어대사전을 공부하고, 그에 대해서 책도 냈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뜻풀이를 그대로 가져와 본다.


'어렵게 힘들여, 기껏해야 고작'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그렇다면 시인의 말에서 하는 '겨우'는 무엇일까? 둘 다에 해당하겠다. 


'젊어서는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굴리려고 했다 /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돌아보니 / 겨우 옆으로 살짝 밀어놨을 뿐이다'


여기서는 '기껏해야 고작'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 겨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그런 겨우를 위해 당신이나 나나 참 애쓰면서 여기까지 왔다 // 앞으로 겨우를 갸륵하게 여기기로 했다 / 그런 겨우를 위해 당신이나 나나 참 애쓰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고 있으니, '기껏해야 고작'인 인생을 위해서 '어렵게 힘들여' 살아왔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 '겨우'를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힘들여 살아왔던가. 그러니 겨우라고 비관하지 말자. 삶은 겨우 '여기'까지 왔을 뿐이니까.


그러니 이 '겨우'를 찾아내는 일. 이것이 바로 삶이고, 우리가 사람책을 읽는 이유 아닌가 싶다. 어떤 사람에게도 '귀를 접'을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일.


시인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존재를 보고 우리에게 알려주듯이,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의 삶에서 '겨우' 이룬 것들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귀를 접다


   책을 읽다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으면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위쪽 귀를 조금 접어둔다


   삶은 읽으면서 동시에 쓰는 거라는 걸

   앞서간 이들로부터 진작 배우긴 했으나

   책을 읽다 귀를 접는 건

   읽는 힘이 쓰는 힘을 불러오기 때문이겠다


   돌아보면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은

   비문투성이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되고

   표지를 덮듯 관 뚜껑을 덮고 사라졌을 때


   누군가 나라는 책을 들추다

   살짝 귀를 접는 페이지들이 있을까?


   내 귀는 잘 접히지 않아

   늘 소란이 들끓는 시간을 살며

   우물쭈물 여기까지 왔다


   접히지 않는 귀를 지그시 눌러본다

   바깥 소리 대신 내 안의 소리를 담아

   제대로 된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다


박일환, 귀를 접다. 청색종이. 2023년. 124-125쪽.


이렇게 시인의 시를 읽다보니 내 삶에서도 귀를 접는 부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나를 읽는다면, '겨우' 이렇게 살아온 내 삶에서도 귀를 접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삶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도 그런 삶을 살도록 '더 많은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책 역할을 하고, 그들에게서 귀를 접을 부분을 발견하고 내 삶에 옮겨오려고 노력하듯이, 내 삶도 누군가에게는 귀를 접고 옮기려고 노력하게 만들 수 있다면, '겨우'인 내 삶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시가 이렇게 내 삶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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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새'를 생각한다.


  말과 당나귀가 교접하여 태어난 동물. 힘이 세어 일 부리는 데는 적격인 동물.


  죽어라 일을 하고는 자신의 후손을 남기지도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동물.


  노새다. 일하는 동물이. 그런데 이런 노새 생각이 많이 난다. 요즘엔 특히 더.


  노동자를 노새 취급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경제성장, 선진국. 누구 덕인가?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 노동자들이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평생을 일했는데, 노후가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일할 때는 열심히 열심히, 더 많이 더 많이 하라고 하더니, 막상 일을 놓으면 네 생계는 네가 책임지라는 식.


후손을 낳지 못하는 노새와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


양성우 시집을 읽다가 직접적으로 '노새'를 언급한 시 두 편을 발견하고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21세기가 되기까지 죽어라 일만 하고 살아온 노동자들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노새 일기


오늘도 천리를 걸었읍니다

큰 짐에 눌리고 굵은 채찍에

속으로 울며불며

입술 깨물며

지는 잎 산비탈 억새밭 지나

물을 건너 흙먼지 아득한

길,

오늘도 천리를 걸었읍니다. (예전 표기 그대로 쓴다. 요즘엔 '걸었습니다'라고 쓰지만)


양성우, 그대의 하늘길, 창작과비평사. 1996년 8쇄. 96쪽


   노새의 꿈


끝도 갓도 없이 쌓이는 궂은일 속에서도

골고루 나누는 기쁨으로 넘치도록 행복하고

그리고 드디어 내가 사는 이 땅 위에

나란히 엎드려 가는 모든 이들과 함께 등 따숩고 배부르며,

오직 사랑을 위한 옳고 곧은 일 하나로

누구나 공연히 사람 손에 함부로 따돌림받지 않는

맑고 밝은 세상에서 내 맘대로 날개 펴고 살고 싶습니다.

내 두껍고 질긴 굳은살 겹겹이 저미는

이 긴 고삐 가시굴레를 모조리 벗고

얼씨구나 네 굽으로 곳곳의 기름진 흙을 차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스로 즐기는 일 속에서

나 또한 남들과 어울려 밤낮으로 땀에 절며

늘 넘치도록 행복하고 싶습니다.


양성우, 그대의 하늘길, 창작과비평사. 1996년 8쇄. 100쪽.


'노새 일기'에서 '노새의 꿈'으로... 과연 노새의 꿈은 실현되었는가? 긍정적인 답을 하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노새는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노새가 아니다. 노새여서는 안 된다. 노새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생활을 누리는, '노새의 꿈'에 나오는 그런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한데...현실은... 


최일남이 쓴 소설 '노새 두 마리'가 생각난다. 죽어라 일을 하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 아버지를 노새에 빗댄 소설. 그 소설과 양성우 이 시들을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노새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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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희상 시는 어렵지 않다. 어려운 말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읽기 편하다.


  읽기 편한 만큼 짧은 시도 많다. 물론 산문시에 해당하는 시들도 있다. 그리고 삶에 관한 많은 일들이 시로 표현되어 있다.


  시인이 겪었음직한 일들도 시로 나와 있는데, 그 중에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시도 있으니...('사진 안에 내가 있다' 60-61쪽)


  하지만 이 시집을 읽으면 무엇보다도 시란 무엇인가, 책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책을 통해 인간은 인간답게 된다고 하면 오만일까? 아니, 책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존재들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배움을 주는 존재. 무엇에게도 배울 수 있으니, 그런 존재는 바로 책이다. 이 시집 마지막에 실린 시가 그런 울림을 준다.


 마지막 말


신은 없다

그러니, 책을 의지하면서 살아라


윤희상,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 강. 2021년. 106쪽.


신은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러나 책은 보인다. 아니, 보이지 않는 존재조차도 책이 될 수 있다. 책은 무궁무진하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다른 영향을 미친다.


그 중에 가장 큰책(물질적으로 크다는 의미가 아니라, 많은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 자연이다. 자연은 늘 인간과 함께 해 온 책이었다.


시인은 말한다.


  땅이 책이다


책을 읽지 못하면서 사는 것이 안타깝다는 농부에게

내가 말했다


별말씀을요

괜찮아요

땅이 책이잖아요 


윤희상,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 강. 2021년. 27쪽.


땅은 책이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그런데 이런 책을 멀리하는 사람이 있다. 멀리할 뿐만 아니라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또 읽으려고 하지 않고 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다. 책은 읽어야 하는데, 무슨 땔감으로 쓰듯이 한번 쓰면 그뿐이라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땅을 죽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책을 없애는 사람들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사람책'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종이로 된 책만이 아니라 사람도 책이 될 수 있음을, 하긴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는 공자의 말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스승이 된다는 말, 시인의 말대로 하면 사람이 책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 사람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악서가 양서를 구축한다.' 특히 사람책에서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어야 하는데, 반면교사가 아니라 그냥 교사가 되는 사람책들이 있다. 참 안 좋은 영향을 주는,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고 고쳐야 하는데, 와, 저렇게 해도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책.


그래서 시집에서 한 시인의 '마지막 말'이란 시에서 '책에 의지하면서 살아라'는 말을 의지할 수 있는 책을 읽으면서 살아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든다.


책도 책 나름이다. 악서가 양서를 구축하면 안 된다. 사람책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반면교사라는 말이 통하기 위해서는 '반면'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요즘같이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반면'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기를 바라면서... 시집을 읽는다.


사실 이 시집을 사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윤희상 시인이 쓴 '소를 웃긴 꽃'이라는 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례를 훑어보다 발견한 '소설가 최인훈 선생님 묘소를 내려 오면서'를 읽고서다.


내게도 최인훈이라는 작가는 그의 소설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사람책이었기 때문. 물론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이 시집에 실린 최인훈에 관한 시.


  소설가 최인훈 선생님 묘소를 내려오면서


  어느 해 선생님 댁의 거실에서, 

  선생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이 생간난다


  생각해봐라 우리가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말했을 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니 우리가 프랑스를 예술의 나라라고 말했을 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니


윤희상,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 강. 2021년. 38쪽.


그래, 적어도 사람책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사람책을 가까이 한다면 '반면'을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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