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엔 날들이 많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커다란 사건으로 기록되는 날들. 

4.19혁명의 열기에 군인들이 찬물을 끼얹은 날. 

처음에는 기대도 있었다지만, 확실한 건 이렇게 군대에 의해 쿠테타가 일어나는 역사는 정상적인역사가 아니라는 것. 

이 중심에 박정희가 있다. 

그 이후 18년 동안 우리나라를 통치하게 되는 사람. 

과유불급이라고, 적당한 때에 정치에서 물러났다면 지금과 같이 논란의 중심에 서지는 않았을테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지도 않았을텐데... 

그에 대한 평가는 엄정하게 해야 한다. 공과를 확실히 따져야 한다. 하여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되, 거부할 것은 거부해야 한다.  

우리 현대사에 부정적인 역향을 주었다고 판단하지만, 내가 하는 이 판단과는 다르게 우리나라 발전을 이룬 사람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아, 기념관을 짓자고 하는 사람도 많으니... 

아직도 박정희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21세기 우리는 박정희를 완전히 극복해내야지만... 공화국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음, 국가를 말하다에서 이야기하는 공화국은 박정희의 유산을 떨쳐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위해서는 박정희를 알아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왜 아직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벗어나는지... 절실하게 고민해야 한다. 

최상천이 쓴 "알몸 박정희" 

꼭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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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란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존재를 일컫는 말이 아닐까 하는데, 과연 이 땅에 스승은 존재할까. 

단지 시간과 공간에 매인 계약관계로 끝나고 마는  관계로 전락하고 말지 않았는가. 

한 때 양정자의 '중학교 선생'이란 시를 읽고 참 슬프다.  

어린아이에서 사춘기로 고통스럽게 진입해 들어가는 

번민 많은 아이들을 가득 싣고 

슬픔의 급행열차가 잠시 멎는 

시골의 쓸쓸한 간이역 같은 중학교 

거기 몇 십 년씩이나 서서 

손을 들어 달리는 그 기차를 멈추게 하고 

멎은 기차를 또다시 출발시키는 

해마다 늙어가는 기차역원같은 

돈도 명예도 없고 

있었던 실력도 오랜 세월 쓰지 않아 녹이 다 슬어버린 

허름한 중학교 선생 

스치며 지나가는 아이들이 속력은 너무 빠르고 바빠 

몇 년 지나면 마침내 

아무도 찾지 않고 잊혀지는 중학교 선생 

양정자 시집, 아이들의 풀잎노래, 창작과 비평사에서 

그러나 현실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듯 금방 잊혀지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사들이 있지 않은가. 물론 스승이란 교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분을 스승이라 일컫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요즘은 학교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니 스승의 날 하면 학교 교사, 또는 교수 중에서 찾는 경우가 많으니...  

 진정한 스승이란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고, 제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인류의 스승이라 할 공자도, 예수도, 서가도, 마호메드도 제자들이 없었다면 스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꼭 위대한 인물들 말고도 우리 주변에서 남 모르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그런 사람을 알아보고 가까이 할 수 있는 자세를 지닌 사람, 그 사람은 스승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즉 진정한 스승은 없다고 단정짓지 말고, 나 자신이 스승을 찾을 제자의 자세를 지녔는지, 그리고 그런 스승을 뛰어넘을 각오를 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반걸음 앞서 가기-선생 노릇1 

딱 반 걸음만 앞서가야지.  /  의식하지 못해도 / 늘 눈 앞에 보이게. /
하는 행동 하나 하나 / 모두 보이게. / 강요하지 않고, / 빨리도 가지 않고, /
늦게도 가지 않고, / 오직 반 걸음, /
겨우 저 정도야, / 금방 따라 잡을 수 있을 걸 / 하게 해야지. /
그래서 반 걸음 / 손을 내밀면 / 언제든 /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게, / 손 잡고 함께 / 함께 /
갈 수 있게, / 반 걸음만 / 겨우 / 반 걸음만 앞서 가야지, /
그 힘든 길을.

예전에 이오덕 선생님의 책을 읽고 교사의 자세란 어떠해야 하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지금의 대안학교의 시초가 이오덕 선생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죽어 있는, 판에 박힌 글쓰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아이들의 감정과 생활이 살아있는 글쓰기를 하셨던 분. 엄혹한 시절에도 본인의 교육관을 지키려 노력하셨던 분. 그 분의 책 중에 "내가 무슨 선생노릇을 했다고"가 생각난다.  

아마도 이오덕 선생님은 딱 반걸음 앞서간 스승이지 않을까. 

이런 이오덕 선생님 말고, 또 한 사람, 원주에서 생활을 했으나,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된 분. 비록 학교 교사노릇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이웃에서 우리들보다 딱 반걸음 앞서가면서 삶의 귀감이 된 분. 장일순 선생님. 책으로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그 분의 삶과 말을 기록한 그 책들은 내게 충격이었다. 이 분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었구나 하는 생각. 길가에 핀 꽃을 보고 자신을 부끄러워한 분. 서민의 생활에서 진리를 찾으셨던 분.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았으나 그래서 드러난 분. 한 번 읽어보자.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한 분은 제도권 교육에서 애쓰셨던 분이고, 한 분은 제도권 교육 밖에서 애쓰신 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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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언제 부처가 왔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부처는 왜 우리에게 왔을까에 대한 깨달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불교하면 상당히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찰들이 도시에 보다는 깊은 산 속에 있어서 호젓하고, 왠지 시간을 내야지만 갈 수 있는 곳으로 인식이 되고(물론 이는 조선시대 배불숭유 정책 때문에 절이 산 속으로 쫓겨가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되지만), 불경은 아무나 읽지 못하는 어려운 책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불경이 과연 어렵기만 할까. 

교회가 우리 곁에 존재하듯이 절도 바로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가. 

부처님의 전생을 다룬 본생담을 읽으면 재미있고, 또 유마경을 읽으면 세상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마음을 알게 되어 좋고, 수타니파타를 읽으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고, 법구경을 보면 짤막한 구절 속에 진리들이 담겨 있어, 언제 어디서 어느 때고 아무 구절이나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리는데도 좋다. 

나는 불교는 이런 점들 외에도 내 마음이 곧 부처다. 모든 일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말들 때문에도 좋아한다. 사람이 깨달음의 유무에 따라서 부처도 될 수 있다는 말, 얼마나 좋은가. 

이런 불경들 중에서 금강경을 보면 불교를 좀더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남회근의 "금강경 강의"를 아주 재미있게, 그리고 감동 깊게 읽었다. 한 번 읽어볼 일이다. 

이는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읽어도 되는 책이다. 굳이 불교를 종교로 보지 않고 철학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경에 거부감이 있으면 종교학자인 오강남의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세계종교 둘러보기"를 읽자. 이책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종교학자로서 편견없이 다른 종교를 들여다본 노학자의 업적이 잘 드러난 책들이다. 

하지만 한 번은 남회근의 금강경 강의에 도전해 보아야 한다. 금강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부처님 말씀에 가까운지 모르지만, 나는 이 책이 불교의 진수에 많이 다가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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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년 5월6일자 1면 기사 제목이다. 

"서울 ㅊ 고 도넘은 '성적 카스트' 최상위권 16명 특혜수업  학생에 교사 선택권까지" 

그리고 8면의 기사 

"기숙사도 상위권 한정 ... 성적 따라 알짜(1~50등)-예비(51~100등)-잉여(100등 밖)" 

 

아이들의 다양성은 생각도 않고 오직 성적만으로 일렬로 줄을 세우다니. 

학벌 타파란 말이 나온 지가 꽤 지났음에도 이놈의 학벌은 더 강화가 되고 있다는 느낌만 든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해주는 것이 교육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무조건 성적으로 줄을 세워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곳에 진학하게 하는 것으로 교육의 소임을 다했다고 여기는 이 풍토는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교육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정말로 교육이란 무엇인가? 배움이란 무엇인가? 

우리 삶에서 학벌로 인한 차별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한 때 모든 이력서에서 학력란을 없애라고 한 사람도 있었는데...  

서울대를 폐지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는데... 

사립대를 국립대로 전환시켜 평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학벌, 나부터 없애도록 노력해야겠다. 

김상봉의 학벌사회, 읽어보자.

아직도 이런 현실이 우리나라 교육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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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011년 4월 30일) 한겨레 신문 1면에 난 기사 제목이다. 

"서울 지하철노조, 민주노총 탈퇴" 

과반수(94.9%)가 투표에 참여하여 과반수(53%) 찬성으로 민주노총 탈퇴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 노조는 (가칭) 국민노조를 만들어, 한국 노총- 민주노총과 더불어 노동계를 대표하는 제3노조가 되겠다고 한다. 노동절을 바로 앞둔 시점에서 노조가 또 갈라지다니.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노조의 힘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단결해도 일을 해결할까 말까 하는 때에 이래저래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왜 노조원들은 대동소이(大同小異)라는 생각으로 한 조직에 들어가되,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그 속에서 논쟁과 토론으로 더 나은 방향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까.  

밖에서보면 그들이 그들일텐데... 상대의 눈에는 어짜피 노동자일뿐인데, 이들은 자꾸 자신들을 근로자와 노동자, 사무직과 생산직, 정규직과 비정규직, 전투적 노동자와 타협적 노동자로 나누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직만을 지니려고 한다. 

백년도 넘은 과거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외침이 공허하게 울려퍼지고 있다. 그 선언에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시작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역시 하나의 유령이 떠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바로 경쟁만이 살길이라는 신자유주의. 

선언의 마지막은 "노동자가 혁명 속에서 잃을 것이라곤 쇠사슬 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이다"라고 했는데, 공허하다. 지금 혁명을 운운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동키호테 소리를 들을 뿐이요, 세계를 얻기는커녕 비정규직이라는 불안만을 얻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단결은 요원하다. 오히려 분열이 되고 있으니. 

아직도 그 선언은 유효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방현석이 쓴 "아름다운 저항"이라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에 관한 책이 생각났다. 지금의 우리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과 피눈물이 있는지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한국노동운동사"라는 조금은 오래된 책들도 생각났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 치열하게 싸워왔던 과거, 이 과거는 역사 속에만 존재하지 않고 바로 지금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며, 우리 미래세대에게도 닥칠 현실이다. 

잊지 말고, 더 나은 삶을 위한, 누구도 불행한 사람이 없는 사회, 그게 사람이 살만한 사회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선 약자에 대한 배려, 약자의 삶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회, 약자들은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해가려고 노력하는 사회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근로자의 날이 아닌 노동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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