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을 고른 이유는 오직 하나.

 

제목에 카프카가 들어 있기 때문.

 

카프카에 관심이 있었을 때 검색어를 카프카로 놓고 검색을 해보면 많은 책들이 뜨는데, 시집 제목에 카프카가 들어간 시집이 두 권이 있었다.

 

언젠간 읽어야지 하면서 사게 된 시집인데...

 

"카프카의 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카프카 작품 중에서 "성"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성"이라는 카프카의 소설은 결코 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성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루는 절대의 세계에,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늘 안개에 쌓여 그렇게 헤매면서 어디론가 가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리의 세계가 분명 존재한다고, 눈에 보인다고 생각하고 가는데, 가도가도 그 곳은 저 멀리에만 있고, 그곳은 또 뿌연 안개에 쌓여 있어 실체를 의심하게도 하는데...

 

그래도 그곳은 눈에 보이니 없다고 할 수도 없고, 하여 우리는 갈 수밖에 없는데...

 

진리의 세계를 향한 여정, 가야만 하는, 그러나 갈 수 없는 그런 세계에 대한 탐구, 그것이 카프카 소설이었다면, 이 시집에서는 그런 세계에 대한 시적인 추구가 이루어지고 있어야 하지 않나.

 

제목이 된 시 '카프카의 집'을 본다.

 

카프카의 집

  어느 낯선 세계, 공기조차도 고향 공기의

 어떤 요소도 갖지 않은, 낯섦으로 질식할 듯

한 곳, 미친 유혹들 속에서, 그저 계속 갈 뿐

                                                  - <城>에서

 

저녁 어둠이 안개에 젖을 때

만종 종소리는 낮은 곳으로 잦아들고

한사코 사물을 밀어내치려 해

집의 낯익은 현관 문고리를 잡고서도

여기가 어디던가,

묻게 한다.

 

불그스레한 가등 불빛 아래

포도 돌바닥이 번들거릴지라도

끝내 고독했던 사람은

여전히 그늘진 모퉁이에서 서성대며

그의 집에 붙은 포스터의

얼굴 또한 춥고 그로테스크하다.

 

다만 헤매다닐 뿐.

(굴뚝에서 한가롭게 풀려나는 연기

나무 끝에 오도마니 올라앉은 둥지

가족의 웃음 소리)

그 성은 멀고 머어

이방인의 집은

비어 있다.

 

밤이 더 싶어선 안 된다. 프라하여.

불안은 언제나

한걸음 앞서 스멀거리지만

보헤미아 처녀여

귀가를 서두르지 말라

머리카락카락 물 미립자 방울 맺히기 전엔.

 

신중신, 카프카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8년 초판. 66-67쪽

 

상당히 몽환적이다. 무언가 도달했음에도 도달하지 않았음을, 가야 하지만 갈 수 없음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다. 마치 카프카의 "성"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이 시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럼에도 가야한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우리는 늘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 가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이렇게 카프카를 느끼기도 했지만, 또 하나 시집에서 반가운 제목을 만났다. '풀잎'

 

이 시에서 김수영의 '풀'을 느낀 건 나만의 착각일까. 진리의 세계에 사람은 혼자 갈 수가 없음을, 함께 가야만 함을, 어쩌면 이 '풀잎'이라는 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풀잎

 

풀잎이 한들바람에 흔들린다

천둥 뇌우 속에서 한결 명징해진다

혼자이면서 여럿으로

씨를 여물게 해 흩뿌리고

풋풋한 목숨 면면히 이어간다

 

풀잎은 죽음 곁에서 새 움이 돋아나고

꿈꾸지 않으면서

꽃을 피운다

흔들려 바람을 부르고

흔들리지 않으므로 나비의 요람이 된다

 

풀잎이 숲을 만들고

강바닥이 마르는 걸 막아준다

새벽에는 이슬에 젖어

태어난 아이가 힘찬 울음을 터뜨리도록

노래한다 한 소절마다의 엽록소로

 

풀잎은 항구하게 원시의 힘

농경의 고단한 쟁기질과

타오르는 풀무의 불길.

마침내 민초(民草)가 주인임을 터득시키는

민주주의의 지반이 된다.

 

신중신. 카프카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8년 초판. 80-81쪽   

 

자, 내가 원하는, 가야만 하는 세계는 어디인가. 그곳으로 나만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풀잎'들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뉴스에서, 또 신문에서 대통령이 한 말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공기업 노조 개혁방해 용납 안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말.

 

나라빚이 많고, 공기업들이 방만하게 운영해 와서 경영이 악화되었음에도 흥청망청 예산을 낭비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책임이 노동자에 있다? 과연 그럴까? 노동자가 개혁 방해세력일까? 경영을 제대로 못 한 것은 경영자의 책임이 아닌가.

 

평생동안 일만 하던 사람들을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해서 이렇게 다르게 대우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리석게도 카프카의 [변신]이 떠올랐다. 아니 [변신]이라고 하기보다는 카프카의 그 작품 주인공인 '그레고리 잠자'가 떠올랐다고 하는 편이 맞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보니, 그레고리는 가족을 위해서 일한 죄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성향도 죽이고 일을 한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음을 발견한다.

 

자신을 죽이고 일한 대가가 벌레가 된 것이다. 그 벌레는 그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아니다. 그는 이미 이전의 그레고리가 아니라 벌레일 뿐이다.

 

보기에도 흉측하고 가족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그래서 가려야만 하는, 없애야만 하는 존재. 이전의 그의 모습은 가족에게 상관이 없다. 지금 그의 모습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가족에게 필요 없는 존재다.

 

여기에 외부 손님이 있다. 그의 가족을 생활하게 하는 경제력을 지닌 외부 손님들. 그 손님들에게 이 벌레는 장애일 뿐이다. 손님들에게 벌레는 가려져야 하는 존재, 즉 알려져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그들에게 벌레의 존재가 알려진다면 가족들은 살아가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가려져야 한다. 그래서 그를 도와주고 지지해주야 하는 가족들은 그를 귀찮아 하고, 사라졌으면 하는 존재로 여기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

 

무언가가 연상이 된다. 그레고리는 노동자다. 그들은 일만 한다. 그는 늘 같은 일을 한다. 그럼에도 상황이 변하니 그는 같은 존재가 되지 못한다. 꼭 필요한 존재에서 없어져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

 

경제성장의 주역이라던 노동자는 이제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었다. 여기에 다국적기업으로 표상되는 외국 기업들에게는 그들의 고임금은 투자를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예전에는 저임금으로 외국 투자를 이끌어들였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외국의 투자를 막는 요소가 된 것이다.

 

마치 [변신]의 그레고리가 가족에게 꼭 필요한 존재에서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의 가족의 생계를 도와줄 손님들을 쫓아버리는 존재가 되었듯이, 지금 우리 경제의 주역이었던 노동자들이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1900년대 초반에 살았던 카프카가 이런 노동자의 현실을 감안해서 소설을 쓰지 않았을텐데, 세계 명작이란, 세계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는 작품이란 이렇게 다양하게 시대에 따라서 또 사람에 따라서 해석이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난 어리석게도 요즘 이 소설을 우리 사회에서 느끼면서 섬뜩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나도 이렇게 ‘그레고리’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레고리’처럼 대우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안 되지 않는가.

 

아니겠지.

아니라고 자위를 해본다.

그래야만 하지.

‘그레고리’는 무력하게 죽음의 세계로, 내쳐짐의 세계로 갔지만... 바우만의 용어로 하면 그레고리는 '쓰레기'가 된 삶이 되어 폐기되어 버렸지만,

우리는... 노동자들은... 

그렇게 ‘그레고리’처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카프카가 미리 경고한 것 아닌가. 난 그런 생각이 든다.

 

카프카의 [변신]을 2014년에 우리나라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정만...

 

이름만 들었던 시인이다. 한수산 소설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고 힘든 세월을 보내다 돌아가셨다는.

 

그의 시집을 구해서 읽어본 기억이 없고, 그의 시도 기억에 없다. 다만, 이 구절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만 머리 속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정지용 문학관에 갔을 때 역대 정지용 문학상을 받은 시인들과 시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박정만도 있었다. 어떤 시로 받았는지, 정지용 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던 시가 어떤 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헌책방에서 발견한 박정만 시집. 시집으로 발간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손에 들었다가, 박정만 시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시집 한 권으로 되겠나 싶어, 그 헌책방에 있는 박정만 시전집을 고르게 되었다.

 

값은 좀 비싸지만, 정가에 비하면 헌책방이라 60%정도이 가격으로 살 수 있기에 골라들게 되었는데... 700쪽이 넘는 책이기에... 읽기에 수월하지는 않았다.

 

내 취향하고는 좀 거리가 있는 시들이 많았고, 또 특정한 시기에 엄청나게 많은 시가 쓰여졌기에, 그 시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비슷해서, 특히나 시의 느낌이 너무도 어둡고 죽음을 연상시켜서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읽는데 꽤나 오래 걸렸는데...

 

한 시인의 전 생애가 담겨 있는 시전집을 주마간산식으로 읽을 수는 없는 일.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맘이 내킬 때마다 손에 들고 읽었으니...

 

어둡다. 그가 받은 고문이 시에서도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 한 시를 보면 이렇다.

 

수상한 세월1

 

그 막막하고 깊은 어둠 속에서

군화 신은 아이들이 내 몸뚱어리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상처를 내고

나이팅게일 그려진 안티플라민을 주었어.

 

1981년 5월. 국풍(國風)이 여의도에서 흐느끼던 날.

 

박정만, 박정만 시전집. 해토. 2005년 초판. 603쪽

 

그렇다. 남들은 축제라고, 그것도 관제 축제지만, 흐드러지게 놀 때 그는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그 고문의 후유증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다 세상을 뜨고 마는데...

 

그런 고통들이 시에 오롯이 나타난다. 그래서 어둡다. 죽음이 늘 시에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는 좀더 좋은 세상을 기대한다. 그 기대가 이루어질 때까지 살지 못하지만 말이다.

 

시인이 고문을 받는 시대... 이제는 없다. 그러나 아직도 필화가 일어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가끔은 질서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될 때가 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제는 그러면 안 되는데...

 

2010년이 넘은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날.

 텔레비전에서 특집으로 방영해주는 영화 몇 편을 보았다.

 영화관에 가서 보아야 했으나 놓친 영화 몇 편과 이미 보았 음에도 또 보고 싶었던 영화 몇 편.

 

 그 중에 가슴을 울리는 영화는 역시 "7번 방의 선물"

 

 이 영화는 다시 보아도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볼 만한 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내용의 사실성이야 차치하고서라도 영화 내용만으로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레 눈물샘에서 눈물이 물 흐르듯 흘러내릴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재판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과연 재판이 공정한가? 인간이 인간을 재판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럼에도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재판이 필요하다면 그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의 몸을 구속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까지 재판은 이루어져 있다. 몸을 구속하는 것이야 잘못되었다는 판결이 나면 풀어주고, 그 동안의 고생을 보상해줄 수도 있겠으나,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나중에 잘못되었다고 판명이 되더라도 되돌릴 수 없다.

 

불가역성. 그것이 바로 사형제도의 문제이고, 재판의 무서운 점이다. 우리나라 아직도 사형제도가 존속되고 있는 나라인데... 15년이 넘게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아서 사실상 사형폐지국이라고 하나, 법이 사형을 유지하고 있기에, 대통령이 사형집행에 서명을 하는 순간, 15년간 지켜온 사형 미집행국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영화 "7번 방의 선물". 되돌릴 수 없는 결과...

 

이 영화에도 변호사가 등장한다. 국선변호사. 돈이 없거나 변호사를 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자신을 변호할 수 있게 나라에서 선임해준 변호사. 대개는 성의 없이 변론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국선 변호사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니...

 

오히려 일부러 국선 변호사가 되기를 자청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까... 왜냐하면 변호사란 힘없고 억울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닌 사람도 꽤 있으니까.

 

그럼에도 이 영화의 국선 변호사는 정말로 지지리도 자기 역할을 하지 않으려 애쓴다. 마지못해 맡았을 뿐이라는 점이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보이고, 또한 권력에 밀착해 있음이 보이고, 그리고 피의자의 혐의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최근에 나온 영화 "변호인"과 대조되는 모습을 보이는 변호사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이런 변호사가 실제로는 없겠지만, 영화에서처럼 존재하는 변호사가 있다면, 우리는 영화 "변호인"의 변호사와 영화 "7번 방의 선물"의 변호사가 공존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어떤 변호사가 우리의 권익을 위해 변론을 해줄 것인지 어떻게 아나? 변호사들은 도대체 어떻게 자기들의 위치를 자리매김 했을까? 이런 의문이 든다.

 

하여 설날에 본 영화때문에... 예전에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박원순이 쓴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두레

 

부제가 '한국인권변론사'이고 더 작은 제목은 '가시밭길을 선택한 변호사들'이다.

 

영화 "변호인"과 "7번 방의 선물"을 함께 본 사람이라면 그 영화 속의 변호사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험난한 길을 자처했던 변호사들이 이야기니까.

 

이들로 인해서 억울한 사람들이 조금은 줄었을테니까.

 

가장 좋은 사회는 변호사가 없는, 즉 재판이 필요없는 사회이겠지만, 그런 사회가 되기 전에 우선 제대로 돈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변호사들이 넘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때 두려움을 지니고 재판을 할 수 있는, 그래서 정말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관심을 가지고 혹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재판. 그것을 돕는 변호사, 그런 사람들로 충만한 우리 사회였으면 좋겠다.

 

지금도 재판은 넘치고 넘쳐 재판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뉴스를 보는데 충격적인 보도가 나왔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 가운데 노인 빈곤율이 1위란다. 무려 50%정도의 노인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고 한다.

 

바우만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 이렇게 소비자 사회로 전환이 되고,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가난조차도 이제는 나라가 책임을 져주지 못하는, 사회복지에서 노동복지로 전환이 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나라는 더 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선거에서 노인복지를 강조하고, 모든 노인에게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하겠다고 하는 나라에서 빈곤에 허덕이는 노인이 아직도 많다고 하니...

 

여기에 어떤 보도에서 폐지 줍는 노인들의 평균 월 수입이 26만원 정도라고 하는데... 이나마 고물상이라고 하는 곳, 재활용센터의 운영 세금이 올라, 노인들에게 폐지 대금으로 지급하는 돈이 줄어들거라고도 하던데...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풍요로움은 굶주리는 사람 모두를 먹이고도 남지 않는가. 그럼에도 골고루 분배가 되지 못하고, 음식 쓰레기로 버려지는, 또 사용 가능한 물품들이 그냥 폐기물이 되고 마는 현실 아니던가.

 

가난 구제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일텐데...

 

사회복지가 확립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는 형제라고 생각하면, 우리 모두의 생활은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정현종의 시집을 읽다가 이거네.. 이 시가 지금 우리 현실이네... 그럼 이런 현실에서 이런 사람은 없나?

 

정말로 이런 사람, 이런 정치가가 필요하네 하는 생각을 했다.

 

가난이여

-인도시편 1

 

석가모니는 저 가난을 구할 길 없어

스스로 헐벗었다

정치로도 경제로도 무슨 운동으로도

국가 해 가지고는 더더구나 안될 게 뻔하니

지상에 가난은 영원할 터이니

저 버림받은 가난을 어쩌나 어쩌나 하다가

도무지 그걸 구할 길 없어

스스로 ...... 헐벗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알몸이 빛났다

 

그리고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년 5판. 95쪽

 

이 시에서 말하는 가난이 단지 물질적 가난만을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선 물질적 가난에 국한시켜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난해진 사람이 있다. 세상에 어떤 정치,경제,국가로도 가난을 해결할 수 없어 스스로 헐벗었다는 석가모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말을 한 예수와 통하는 것이다. 즉,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는 사람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영혼이 가난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나도 가난해야 한다. 마치 중생이 병들어서 자신도 아프다던 유마거사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려가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그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시는 석가모니를 들어서 가난에 대해서는 함께 가난해지는, 그들과 함께 할 때만이 가난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의 것을 모두 놓아버리는 경지.

 

이 경지에 도달했을 때 빛나는 사람이 된다. 그것이 바로 석가모니의 삶이었다. 예수의 삶이었다.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들과 함께 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물질적 가난, 정신적 가난을 극복하지 않겠는가.

 

다 내려놓아 더욱 빛나는 사람.

 

지금 사람들은 다 내려놓지 않아도 된다. 다만 내려놓은 모습을 보여주기만 해도 좋다. 적어도 함께 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만 해도.. 이렇게 노인 빈곤율이 소위 잘사는 나라라는 OECD국가 중 최고를 기록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정현종의 이번 시집에서는 선(禪)의 냄새가 많이 난다. 불교적인 분위기가 많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리고 뒤에 인도시편이 몇 편 있는데...

 

굳이 불교라고 하지 않아도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물질적, 정신적 허영을 버리라는 것 아니던가.

 

그래 모두가 조금은 가난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모두가 조금은 부유해지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