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뻔한 질문이다.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니. 당연한 말 아닌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데, 이 질문 앞에 한 문장이 더 있으면 쉬운 대답이 나올 수 없다. '사람이 죽었는데'라는 문장.


  누군가에게 닥친 비극 앞에서 그냥 일상을 유지해도 될까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양, 당신은 사랑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관심도 없는 사람, 그들은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죽음과 자신의 삶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은 남일뿐.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고 질문하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그 사람은 사랑을 지니고 사는 사람. 그러니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손미 시집을 읽으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너무도 많은 죽음과 또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있음을, 우리는 죽음 속에서도 삶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슬픔을 잊지 않지만, 그렇다고 슬픔 속에만 매몰되지 않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다. 다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는 질문을 마음 속에 품고 있어야 한다.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밤을 두드린다. 나무 문이 삐걱댔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가축을 깨무는 이빨을 자판처럼 박으며 나는 쓰고 있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해 이 장례가 끝나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뻣가루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나왔는데 식도에 호스를 꽂지 않아 사람이 죽었는데 너와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될까. 사람은 껍질이 되었다. 헝겊이 되었다. 연기가 되었다. 비명이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는 비극. 다시 사람이 되는 것. 다시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케이크에 초를 꽂아도 될까. 너를 사랑해도 될까. 외로워서 못 살겠다 말하던 그 사람이 죽었는데 안 울어도 될까. 상복을 입고 너의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 밤을 두드리는 건 내 손톱을 먹고 자란 짐승. 사람이 죽었는데 변기에 앉고 방을 닦으면서 다시 사람이 될까 무서워. 그런 고백을 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계속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묻는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나무 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해도 될까.


손미,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민음사. 2020년. 1판 5쇄. 35쪽.


이렇게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아파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도 된다. 그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남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죽음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 죽음과 더불어 삶이 지속된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은 없어야 한다. 피지도 못하고 사그라지는 죽음은 없어야 한다. 그렇게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런 죽음이 많으면 우린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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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함을 칭송하는 경우는 많아도, 두려움을 칭찬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두려움은 나약함이고, 남에게 드러내면 안 되는 결점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삶창 131호를 읽다가 '두렵다고 말하라(박총)'는 글을 읽고 '맞아, 그래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앞뒤 재지 않고 행동하지 않게 한다. 신중함, 두려움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물론 두려움에 먹히면 안 된다. 용감함에 먹혀서도 안 되지만, 두려움에 먹히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다만,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두려워 해야 한다.


남에게 해를 끼칠까 봐 두렵다는 말, 좋은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한번 더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남에게 해를 끼칠까 봐 두렵다는 말을 자기 합리화 하는데 쓰면 안 된다. 그것은 두려움에 먹힌 모습이다.


두려움을 지니지 않은 사람, 이런 사람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쪽으로 밀고나간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약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사람들이 나약한 사람일까? 신념으로 총을 들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과연 나약한가? 그들이 총을 들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겪는 일들은 나약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그들은 총을 들지 않는다.


다른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그런 두려움이 다시 용기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 문장 '두렵다고 말하라. 두렵다는 말을 들으라. 그리고 함께 걸어가라'(40쪽)이 마음 속에 박힌다.


삶창 이번 호를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다른 존재들이 살아가는 모습 등을 만나면서, 또 시를 통해서 삶을 만나게 되어서 좋았는데... 이인휘의 산문 마지막 부분이 마음을 울린다.


과연 그때 그 장면이 과거에만 머물고 있을까? 이런 말들이 지금도 통할까 봐, 두렵다.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몇 십 년을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인휘 산문을 읽으면서 들었으니... 


"난 공장 다니는 아이들 싫어. 그리고 그 모자 너무 창피해.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길 바랄 테니 다시 찾아오지는 말아줘." (102쪽)


지금 말로 하면 초등학교, 그때 말로 하면 국민학교 때 사귀었던 아이가 돈이 없어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등공민학교 교복을 입고 찾아왔을 때 부유한 집안 딸이었던 아이가 한 말.


경제적 차이로, 학벌 차이로 이렇게 단절이 되는 사회, 이젠 그런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기어나오는 느낌이지. 그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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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떨어짐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떨어짐이 죽음을 의미한다면,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자, 죽음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가을에 떨어진다면 열매를 맺을 수도 있었을테라고 조금 위안을 하기도 합니다. 


  무릇 생명이란 나고-자라고-죽고를 반복하는, 그 개체는 유일한 존재로 이것을 반복하지 못하지만 생명이라고 하는 전체를 보면 이러한 반복이 계속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섭리라고 하지요. 그런 자연의 섭리에 따라 때가 되어 세상을 뜨게 되면 슬프지만 마음을 상하게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죽음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죽음의 의식'이라는 시인데요... 앨런 긴즈버그와 부크월드라는 사람. 자신의 죽음을 지인들에게 알리고 죽었다는 그 사람들. 시인은 그래서 이들은 가을을 만끽하고 드디어 떠났다고 할 수 있다고 여겼나 봅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둘 다 인생을 마감하는 큰 행사의 하나인 죽음 앞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이 위엄스럽고 또 유쾌해 보여 좋았다.'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9쪽)


하지만, 가을이 되기 전에 떨어지면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라고 할 수 없지요. 우리는 너무도 많은 이렇게 이른 죽음을 만났습니다. 최근에는 더욱 더 많은 죽음을 만나게 되었지요.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지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으로,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우리는 진정한 애도를 표하고, 또 그런 죽음을 일으킨 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애도와 책임은 따로 갈 수가 없습니다. 책임을 지게 하지 않고는 진정한 애도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니 애도를 하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이 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가을. 결실, 풍요로움을 만끽해야 할 때, 오히려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요즈음, '메멘토 모리'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죽음은 삶의 친구로서 늘 삶의 곁에 있지만, 죽음이 나타나는 때는 삶이 충분히 충족되었을 때여야 합니다.


그래야 슬퍼하지만, 마음을 상하지는 않게 되겠지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 마음이 상처로 패인 상태입니다. 좀 다독여야 하겠지요.


우연히 이시영 시집을 만났습니다. 제목이 나를 끌었지요.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제목처럼 이 시집에는 죽은 존재들이 많이 나옵니다. 박홍주 대령, 조용수 사장,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당사자들, 외국 사람으로는 아옌데 칠레 대통령 등등. 이들의 죽음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많은 죽음에 빚지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시들 중에 마음을 울리는 시가 있었습니다. 봄날에 활짝 핀 목련. 얼마나 화사한가요? 이제 막 봄을 맞아 인생을 꽃피우기 시작할 때. 그런 봄날, 그래서 이 시는 더 슬픕니다. 


봄날


  목련이 활짝 핀 봄날이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불법 체류 노동자 누르 푸아르(30세)는 인천의 한 업체 기숙사 3층에서 모처럼 아내 리나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목련이 활짝 핀 아침이었다. 우당탕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갑자기 들이닥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다자고짜 그와 아내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 시작했다. 겉옷을 갈아입겠다며 잠시 수갑을 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푸아드는 창문을 통해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떨어져 숨지고 말았다. 목련이 활짝 핀 눈부신 봄날 아침이었다.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1쪽)


이렇게 좋은 날이 가장 좋지 않은 날, 축제의 날이 죽음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존재들을 가슴에 묻고 영원히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집니다.


그 결의가 사람들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시인이 말한 '평화'란 시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


  내가 만약 바람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풍이 되어

  저 아기다람쥐의 졸리운 낮잠을 깨우지 않으리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9쪽)


더 말이 필요없는 시입니다. 더 말을 할 수 없는 때입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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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시집. 오래 된 시집. 지금은 상상도 못할 억압의 시기. 그러나 시는 억압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시를 썼다는 이유로 온갖 탄압을 받았던 시대가 그 시대다. 불온함을 갖게 한다고. 시에는 불온함이 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 시는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신에게 맞춘다. 신영복 선생이 온달과 평강공주에 대한 글에서 썼듯이... 


어리석은 우직함. 그것이 시일지도 모른다. 그런 시를 어떻게 대했나, 구광본 시집에서 '경고'란 시를 만났다.


민중의 나라가 과연 이런 나라일까? 상상을 억압하면서 과연 민중의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시는 이런 경고를 통해서 민중의 나라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구호만 있는, 그야말로 삶에서 떠난 말들만 난무하는 나라가 아니라, 진정 삶을 풍요롭게 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는 앞에서 열거한 일들도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중의 나라다. 따라서 시에서 말하는 민중의 나라는 구호만 민중의 나라일 수밖에 없다.


경고


  이곳에서 시를 찾는 자나 하늘을 노래하는 자 혹은 날개 달린 동물들에 대하여 상상력을 발동한 자 그리고 꿈의 세계를 기웃거린 자는 다가오는 민중의 나라에 대한 반역자로 판단하여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임


- 구호만 남아 있는 이 도시의 시장 백


구광본, 강, 민음사. 1989년 11판. 24쪽.


표현의 자유.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시를 찾고, 하늘을 노래하고, 날개 달린 동물들에 대하여 상상력을 발휘하고, 꿈의 세계를 기웃거려야 한다.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한다.


말로만 자유, 평등, 공정, 정의를 외치는 나라가 아니라, 삶에서 실현되는, 이를 바탕으로 다른 세상을 꿈꾸는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한다.


구호만 남아 있는 이 도시의 시장은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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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는 당시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는데 그 유령은 시대를 대변하는 유령이라고 할 수 있다면, 지금 유령은 나타나지 말아야 할 망령에 불과하다.


  망령의 출현. 그것은 바로 현실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


  도처에서 예전에 사라졌던 망령이 부활해서 실제 존재들을 억압하고 있는데...


  그런 망령이 나타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망령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망령의 출몰, 아니, 망령이 우리를 옥죄고 있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헌책방에서 구입한 이 시집에서 우연히 망령을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망령을 철저하게 눌러놔야 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1989년 시집이니 꽤 오래 된 시집이지만, 그럼에도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 '고인돌'은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하지 않나 싶다.


                      고인돌


               죽는 일이 제법 무섭기는 하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보다

               세상 더 무서운 일은 없다


               죽음이나 두려움에 관한 한

               우리보다 몇 곱절 훤했던 옛 사람들

               한 번 죽은 사람은 아주 보내버리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고인돌을 세웠다


               누운 사람 양편에 받침돌을 세우고

               일어설 생각일랑 꿈에도 못하도록

               어마어마한 뚜껑돌을 덮어놓은 것이다


정진명, 머나먼 DMZ. 문학과비평사. 1989년. 97쪽.


그렇게 눌러놓았어야 하는데... 다시는 나오지 못하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망령이 출몰하고 있다.


아니 망령을 불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불러낸 망령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생각한다.


망령은 망령이 있을 자리로 가야 한다. 망령이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망령을 제자리로 보내고, 다시 이곳으로 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옛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뚜껑돌을 덮어놓'았듯이. 그렇게.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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