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서 구한 시집. 예전에 '한산시'라는 제목은 많이 들어봤는데, 우연히 헌책방에 누워 있던 이 책을 발견했다. 물론 내가 발견한 책은 최근에 (2002년을?) 나온 이 책이 아니다. 


  1970년에 출간된, 불교 홍법원에서 출간한 책이다. 물론 번역자는 김달진이다. 시인이었기에 선시를 잘 번역했겠다 싶은 마음도 들었는데...


  깊은 산 속에 살며 시를 지은 한산, 그리고 풍간과 습득의 시를 모아놓은 책이다.


  예전 책이라 글자가 세로로 쓰여 있다. 하지만 위에 한자 원문이 있어서 좋다. 원문의 한자를 다 읽지는 못하지만 간혹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으니.



이렇게 되어 있다. 한 번에 주욱 읽을 수가 없다. 한 편 한 편 읽으면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니...


읽으면서 나도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깨끗해지기를 바라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있으니...


곁에 두고 계속 읽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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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의 '만인보'


  한때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시인인 고은이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들을 시로 표현했다. 역사적 인물부터 동네 사람들까지. 그리고 제목을 '만인보'로 붙였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던 시였다. 고은이 추문으로 배척당하기 전까지는.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러한 추문에 휩싸였다는 사실 자체로도 고은에게는 치명상이었다. 그래서 '만인보'도 만 사람을 채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 이 시집을 만났다. '입국자들' 


제목에서 벌써 이주민임을 알게 된다. 입국이라는 말이 나라에 들어온다는 뜻이고, 이는 해외여행을 갔다고 왔다는 말이 아니라, 국적이 다른 사람이 그 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왔다는 뜻으로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1부 '국경 너머'에서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한 민족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두 나라가 된 북한. 한 민족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갈등이 심한 지경에 처해 있으나, 여전히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그들에 대한 이야기


2부 '사막 대륙'은 몽고에서 온 사람들 이야기. 우리와 외모가 비슷하지만 점점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살기 힘들어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 이야기.


3부 '이주민들'은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이야기다. 우리나라에 입국한 사람들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특히 농촌으로 시집온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이야기를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4부 '귀환자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간 사람들 이야기다. 그들이 금의환향을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여기서 부상을 당해 돌아간 사람들, 기껏 송금했으나 그 돈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오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렇게 이 시집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런데 내용이 밝지가 않다. 우리가 이주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시들이 대부분이다.


이주민들을 같은 사람으로 대우했는가? 그렇지 않음이, 그들을 이윤을 생산하는 도구로, 또는 가족을 잇는 존재에 더 우선을 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이주민들을 막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다문화 사회로 전환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주민이라고 하기 전에 우리나라에 사는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과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우리 사회 역시 더 풍요로워지고. 그런 점을 생각하게 하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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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국적이 중국이다. 중국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돌아가셨다고 한다.


참조 기사 : 조선족 대표시인 김철 별세,향년 91세 - 모이자 뉴스 (moyiza.kr)


  고향은 남한에 있는 곡성이라고 하는데, 일제 시대에 중국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조선의 말과 글을 잊지 않았고, 조선의 말과 글로 시를 썼다고.


  중국에서는 꽤 알려진 시인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시집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1997년에 발간된 이 시집을 통해 그가 추구했던 시세계를 어느 정도 맛볼 수 있다.


이 시집은 그가 북한을 방문하고 느낀 점을 쓴 시다. 남한과 북한에 속하지 않고 중국 국적을 지니고 있는 시인이 통일을 염원하면서 쓴 시.


시집 말미에 있는 후기에서 시인은 '나는 내가 두 번의 북녘땅 기행에서 보고 들은 더 많은 것을 싣고 싶었다'(163쪽)고 썼다. 많은 이야기를 시를 통해 하고 싶었지만, 이 정도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그러면서 그는 '남녘엔 풍요의 비극이 휩쓸고, 북녘엔 빈곤의 비극이 천지를 뒤덮어'(163쪽)라고 하고 있는데, 이후에 남녘도 IMF라는 비극을 겪게 된다. 물론 지금은 극복해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지만.


북한은 지금도 힘든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의 말이 다시 30년이 지나서도 의미를 잃지 않고 있으니, 이야말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남북이 교류를 하던 때, 시인이 바라던 대로 남한 사람들도 금강산을 갈 수 있었고, 개성도 갈 수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고, 풍선을 이용해 서로를 자극하고 있으니...


시인이 바라던 통일은 아직도 멀리 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시집에 실린 이 시를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낙지발에 걸려 있는지도, 낙지 발에 있는 그 빨판이 남과 북을 꽉 움켜쥐고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낙지 발의 빨판은 우리가 충분히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이겨내야만 하지 않을까. 이제 고인이 된 시인은 그것을 바라고 있지 않을까.


         낙지


  반세기 만에 만나는

  동생을 주려고

  함흥 사는 언니는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낙지 한 마리를 들고 왔다


  깡마른 낙지를 사이에 두고

  떨구는 눈물은

  낙지보다 더 찝찔하고


  서로 다른 이야기는

  낙지발에 걸려서

  시종 엇갈리기만 하는데


  정성은 고마워도

  차마 들고 살 수 없는 그 낙지

  우리는

  여덟 개 낙지발에 걸려

  서로의 아픔에 뼈마디가 저린다


김철, 북한기행, 문학사상사, 1997년 초판 2쇄. 88쪽.


지금 우리는 낙지발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낙지발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오래 가게 해서도 안 되고.


늦었지만 김철 시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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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을 보고, 안 살 수가 없는 시집이었다. 전태일. 잊혀지지 않는 이름.


  이런 전태일을 기리는 시집이기도 하겠지만, 당신이, 우리 모두가 전태일이라고 하는 시집이라니, 어찌 안 사겠는가.


  읽으면서 숱한 전태일들을 만났다. 예전에 알던 이름들을 시집에서 발견하고는 과연 그 시대에서 얼마나 나아진 세상으로 왔는가 하는 생각도 하고.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날. 시인은 자신의 아내가 이날 태어났다고 했다. 역시 노동자로, 또다른 전태일로 지내게 되는 자신의 아내가 태어난 날.


그런데 전태일의 분신으로부터 지금 노동자들의 현실은 어떤가? 당시에는 없던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생겨서 노동자끼리도 계급이 나뉜 사회가 되지 않았나.


중대재해처벌법이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는지는 의문이고,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출근했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


불의의 사고로, 아니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로 죽음에 이른 많은 청년노동자들. 노동자들. 이제는 힘도 없어진 노동조합. 그런 노동조합을 여전히 강성 노조라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니.


시집을 읽으면서 제자리 걸음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얼마 전에 청계천에 갔다가 전태일 동상 앞에 선 적이 있다.


전태일이 원하는 세상이 왔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데, 또다른 전태일들이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전태일들이 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전태일 동상 앞에 놓여진 작은 꽃다발. 그렇게 우리는 전태일을 잊지 않고 있지만, 진정 전태일을 잊을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닐까.


그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그가 바라던 노동자들이 법대로, 사람답게 대우받으며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좋은 세상 아닌가. 그것이 바로 전태일들을 만들지 않는, 전태일을 잊는 방법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전태일 동상 앞에서 자신을 선전하는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는 그런 세상이.


표성배 시집 [당신이 전태일입니다]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이 시집에 나온 한 시... 아, 정말, 이렇게, 우리가, 또, 전태일들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시.


젠장, 전태일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아니, 우리가 전태일일 수밖에 없다. 이런 시가 여전히 쓰이고 있으니... 이런 시를 쓰게 하는 세상이니. 그가 과연 전태일 동상 앞에 설 자격이 있을까? 


전태일은 살아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서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반대한다며

묵념하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정작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120시간 노동이라며

주 52시간제 폐지를 생각했을까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것이라며

4백만 손발 노동자 등에 칼을 꽂으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을까

기업의 일자리 창출을 방해하는

일체 규제를 없애겠다

임금 체계를 연공서열에서 직무급제로 바꾸고

해고가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겠다

임금 차이가 없으면 정규직 비정규직이 

큰 의미가 없다며

수많은 젊은 노동자 미래를 짓밟고

150만 원 받고도 일할 사람 많다며

최저임금제 폐지를 생각했을까

하루에 일하다 죽어가는 노동자가

육칠 명이나 되는데도

중대재해처벌법을 폐지하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온몸으로

검은 장벽을 걷어 내고자 했던 전태일 동상 앞에서

노동조합을 미래 약탈 세력이라고

언론노조를 강성 노조의 전위대라 씹으며

죽은 전태일과 살아 잇는 전태일을

갈라치기하며 쾌재를 불렀을까

2022년 3월 10일 새벽

그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된 날

이 땅,

살아 있는 전태일은 전의를 불태우고

죽은 수많은 전태일이 일제히 부활했다


표성배, 당신이 전태일입니다. b판시선. 2023년 초판. 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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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 '신동엽의 좋은 언어'라는 말을 생각한다. 언어면 언어지, 좋은 언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나쁜 언어가 있다는 말인데...


얼마 전에 끝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너무도 많은 말들이 오갔다. 그런데 그 말들 중에 좋은 언어가 얼마나 되었을까? 오히려 국가의 선량(善良? 選良?)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썼던 언어는 '선량'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았다. 한자어 어느 쪽을 쓰든 이번 총선에서 난무한 말들은 절대로 '선량'이 아니었다.


한 국가의 정치를 좌우하는, 4년을 국민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자신을 뽑아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이렇게 수준이 떨어지다니...


단지 수준만 떨어지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수준이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쓰는 언어는 나쁜 언어였고, 혐오 발언이 넘쳐났다.


사람이 사람을 혐오하면서 정치를 하면, 그것은 상대를 받아들이고 상대와 함께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버렸다는 말이 된다. 그냥 상대는 배제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런 대상과 협치를 할 수 없다.


나쁜 언어들이 넘쳐나는 현장에서, 좋은 언어는 설 자리를 잃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는 이르다. 아직 22대 국회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썼던 나쁜 언어, 혐오 발언들을 직시하고, 좋은 언어에 대해서 고민을 할 시간은 있다.


한 달이라는 (지금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 시간 동안 과거를 반추하면서, 미래를 만들어가려 해야 한다.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들이 썼던 나쁜 언어들을 좋은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좋아진다. 정치를 한다는 말, 이름을 바로 세우겠다는 말, 그 말은 곧 좋은 언어를 쓰는 사회를 만든다는 말이다. 공자의 정명(正名)은 바로 좋은 언어를 쓴다는 말이다.


삶이보이는창 137호, 봄호를 읽으면서 우리에게 봄이 온다는 것은 바로 좋은 언어를 쓰는 사회라는 생각을 한다.


좋은 언어가 우리를 봄으로 이끈다. 봄은 좋은 언어의 세상이다. 그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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