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으며 먹먹해지는 순간이 있는데, 이 시집이 그랬다. 가끔은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마음이 찡해지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나왔다.

 

  세상에! 싱그러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십대에 이렇게 세상 쓴맛을 알아버리다니.

 

  무한한 가능성으로 현재보다는 미래를 꿈꾸며 자신의 몸을 한껏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는 십대에, 조숙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다. 조숙이 아니다.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우리 십대는 이미 늙어버렸다. 세파에 찌들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세파 속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제 자리를 잡으려 애면글면 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십대가 최저임금 인상으로 도처에서 짤리는 계약직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반대로 최저임금이 인상되었음에도 한 명도 자르지 않고 부담을 조금씩 나눠가짐으로써 모두가 일할 수 있게 된 아파트 공고문 앞에서 뿌듯한 마음을 지닌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붙어 있는 알림을 읽다가 / 경비 아저씨를 단 한 명도 자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리 아파트 좀 멋진 걸, 이라고 아주 잠깐 생각했다' ('최저 임금 인상에 대한 알림을 읽고' 부분. 34-35쪽)

 

이 시집에 나오는 십대는 밝고 명랑한, 세상 걱정 하나 없을 그런 십대가 아니다. 이미 세상의 편견과 압박에 시달리는 십대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손님이 아닌 아르바이트생으로 갔을 때 받는 불합리한 대우에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손님보다 알바생, 50-51쪽)

 

무엇보다 이 시집에서 화자는 십대 중에서도 학교 다니지 않거나 특성화고등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평범하게(?우리나라에서 과연 학창시절을 평범이라는 말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하고,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과 같다는 말이 있으니, 학교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런 공간에서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을 지키며 지내는 학생을 평범하게 학창시절을 했다고 하자... 사실, 우리나라 학교에서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한 학생들은 정말 비범한 학생들이다.) 지내는 다른 십대들보다 더 예민하게 자신을 인식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신분이 없어진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가? 아직도 학생 때는 교복으로 구분하지 않는가?

 

'교복과 교복 사이'라는 시를 보면 그렇다. 버스 안에 다양한 교복이 있을 때 알게모르게 서열이 작동한다. 저 학생은 무슨 학교, 저 학생은 무슨 학교 하는 식으로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소위 명문고와 그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 그나마 인문계라고 하는 학교로도 진학하지 못한 학생으로...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평준화 시대에도 차이를 부각시키는 일이 생기고 있다)

 

'버스 안에서 내 교복 보고 수군덕대는 거 알아'(교복과 교복 사이 중. 48-49쪽)하면서 이미 사회이 서열을 익혀버린 십대. 그런 십대가 내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그러나 거기에 함몰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다. 이 시의 화자는 '문제아였던 나는 고등학교에 갈 수 있을지가 문제였거든 / 너희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 / 그 힘으로 계속 너희들과 같은 버스를 타는 거라고 / 그러니까 버스 안 서열은 그냥 대충 넘어갈래'(교복과 교복 사이 중. 48-49쪽)라고 한다.

 

자기 자리에서 비교라는 틀에 갇혀 무덤을 파고 있지는 않다. 그 점이 희망을 보게 한다. 그런 희망을 지니게 하는 존재는 꼭 있다. 어떻게든 만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만남이 바로 우리 삶을 희망으로 지탱하게 해준다.

 

  숙제

       - 이상한 나의 선생님 3

 

담임이 집에 가는 길에 쪼그려 앉아 꽃 하나를 보고 가라고 했다

 

다 둘러봐도 꽃 비슷한 것도 없었다

 

그냥 쪼그려 앉아 눈을 땅으로 내리꽂았다

 

신발들이 무심히 밟고 지나가는

 

보도블록과 보도블록 사이

 

초록이 가득한 한가운데 아주 작은 하얀 꽃 하나가 살랑거렸다

 

꼭 나 같았다 눈물이 찔끔 났다

 

유현아, 주눅이 사라지는 방법. 창비. 2010년. 78쪽.

 

너무도 잘 알려진 나태주의 '풀꽃'라는 시를 연상하게 하는 이 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떠해야 하는지, 특히 십대 때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렇듯 유현아의 이 시집은 이런 저런 시들이 청소년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어서 읽으면서 다 다른 존재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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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07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십대가 쓴 시.
지금 K를 생각한다를 옆쪽에 두고, 소개해주신 시들을 읽었는데 같이 봐야겠네요. 이런 친구들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kinye91 2021-10-07 12:44   좋아요 1 | URL
십대를 거쳐왔지만 잊거나 잃고 있었던 그 시절 느꼈던 감정들을 청소년시집들이 떠올리게 해요. 어른이 쓴 시든, 십대들이 쓴 시든 말이에요. 저는 아직 k를 생각한다를 읽지 않았는데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존중이 존중을 부르고, 배려가 배려를 부른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은 일방적이지 않다.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더 그렇다. 학교에서 학생을 대하는 태도를 보라. 그들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기 보다는 가르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가.

 

  그래서 학생들은 아직 미성숙한 존재니까, 그들을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육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왜? 나이에 따라서 성숙, 미성숙을 따질까? 학생들이 과연 미성숙하기만 할까? 어쩌면 학생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는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이장근 청소년 시집을 읽다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 꼭 학생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대하는 태도는 이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슴도치도 자기 자식은 함함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예뻐해주는 존재에게 가시를 들이대지는 않기 때문이다.

 

  고슴도치

 

살살 쓰다듬는 손에는

털이 되고

 

덥석 잡으려는 손에는

가시가 되고

 

이장근, 불불 뿔, 창비. 2021년. 14쪽.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지만, 이들을 어떤 자세로 대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살살 쓰다듬을 수 있어야 한다. 덥석 잡으려고 하지 말고.

 

어디 이런 일이 청소년들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우리 모두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고 있으니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짧은 시를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살살 쓰다듬어 주는 그런 사회가 되는 그런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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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 제목은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다. 학교에는 고래가 살까? 살지 않는다. 고래는 멀리 멀리 떠나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학교에서 고래를 찾을 수 있다고, 아이들은 고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멀리 쫓아버린 고래를 아이들에게 찾으라고 한다.


  고래, 바다 생물을 넘어 우리가 꿈꾸는 그 어떤 모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이 교사였던 만큼 학교에 관한 시들이 이 시집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교사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교육에 관한 이야기 등을 시로 썼다. 마지막 5부에는 너무도 슬픈 아직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 두 편의 시를 보면서, '이런 농담'은 이런 상황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손에 흙 안 묻히고 깔끔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심어주는 학교. 그런 학교에서 우등생이란 결점 없는 학생일 터.


  장래 희망


아이들의 꿈에는

도무지 땀 흘리는 게 없다.

땡볕에서 얼굴이 시꺼멓게 타는 건

도무지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손에 물을 묻히거나 기름밥 먹는 건

작업복 걸치고 먼지 뒤집어쓰는 건

도무지 격에 맞지 않는다고

농부가 되고 어부가 되고 화부가 되는 꿈

석공이 되고 목수가 되고 잡역부가 되는 꿈

도무지 돈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의사가 되거나 법관이 되거나

책상에 앉아서 펜대를 굴리거나

아이들의 꿈에는

도무지 흙을 묻히는 게 없다

밑바닥이 되는 꿈

다리가 되고 허리가 되는 꿈

세상을 눈물로 색칠하는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최기종,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삶창. 2015년. 66-67쪽.


  이런 농담


이런 아이가 있었다

너무 착실하다고나 할까

정도가 지나치다고나 할까

1년 내내 결석 지각 조퇴 한 번 안 하고

교칙도 칼같이 지키고

지시 한 번 어긴 적도 없는

이런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아이보고

내일은 10분만 지각하라고 하니까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번쯤 결석해도 좋다고 하니까

그 아이 하는 말이

"선생님! 선생 맞아요?"


최기종,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삶창. 2015년. 71쪽.


'이런 농담'에 나오는 아이는 흙을 묻히는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그는 펜대를 굴리거나, 의사가 되거나 판, 검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잘살 것이다. 다만, 그는 도무지 흙을 묻히고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렇게 사는지...


그래서 '이런 농담'은 '장래 희망'을 비튼 시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어떤 장래 희망을 갖게 해야 할까? 아니,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도록 해야 할까? 장래 희망을 직업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쪽으로 만들어가는 일. 큰일이 아니라 작은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그렇다면 '이런 농담'에 나온 학생은 학교라는 틀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아도 마땅한데, 씁쓸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무언가 인간적인, 실수를 하면서 또 실수를 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지내는 인간적인 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선생이 지각하라고 하면 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지각하라고ㅡ, 결석해도 된다고 하는 말은 사람은 빈틈이 있어야 다른 사람과 더 잘 연결된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래야 흙을 묻히는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흙을 묻히고 사는 사람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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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과'라는 말로 붙어 있으니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근대 학교를 의미하리라. 근대 학교 제도가 산업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질의 노동력을 양산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학교 교육과정은 산업 노동에 맞게 구성되었으며, 교과과정 역시 산업문명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짜여졌으며, 학교에서 알게모르게 주입되는 내용은 산업문명을 체화하도록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학교가 그렇다면 이제 산업문명을 넘어 제4차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이 시대에는 과거의 학교제도는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교육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교육 내용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제4차산업혁명에 맞게 학교를 재구성하자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교육부도 스마트미래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온갖 전자기기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가 각종 전자기기로 최신화된 학교일까?


녹색평론은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는 산업문명이 끝나가니 제4차산업혁명기에 어울리는 학교를 만들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는 무엇일지, 인류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이 필요할지를 성찰하자고 한다.


일례로 이번 호에 실린 로웰 몽크의 글 '컴퓨터, 희극적이고 위험스러운 교육도구'는 우리나라 교육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 스마트미래학교라고 해서 각종 스마트 기기들을 학교에 들여와 그를 통해 교육을 한다는 발상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적절하게 융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이 글의 제목처럼 될 가능성도 많다.


여기에 다시 문명 대전환이 필요하고, 그러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심성보, 문명 대전환을 위한 교육혁명)을 싣고 있다. 이 글이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갈 길이 멀어도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는 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심성보의 글은 지금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이다. 그는 '생태교육학 운동'을 주창하고 있으니, 그 점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지금 코로나19가 생태계 파괴로 인한 전세계적인 재앙이라는 데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으니, 미래 교육은 생태교육 쪽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생태교육은 비판적 의식을 함양하는 교육이 될텐데, 비판적 의식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 꼭 제도권 학교에서만 이루어져야 할까? 오히려 제4차 산업혁명과 생태교육학이 만나는 지점이 제도권 학교라는 거대 권력을 해체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점은 박민형의 글 '학교 없는 대안 교육, 어디 없을까'를 참조하면 된다.


그렇다고 학교를 모두 해체할 수는 없다. 학교와 학교라는 이름을 버린 교육 기관(장소, 단체?)이 함께 공존하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대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과연 대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기업이 원하는 노동자를 제공해주는 역할에 그쳐야 하는가? 아니면 대학은 스스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인간, 그리고 함께 자유롭게 사는 사회를 추구하는 인간을 양산해야 하는가? 닉 콜드리의 글 '대학,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항문화'를 읽으면서 그 점을 생각해도 좋다.


이제 코로나19로 4단계가 되어도 기존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수를 확대했다.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한다. 그러나 학교는 과연 변했는가? 코로나19 이전의 학교와 코라나19가 한창인 지금의 학교, 또 코로나19를 이겨낸 다음의 학교는 같아야 하는가?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학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교육의 본질을 살릴 수 있는 학교 교육에 대해, 학교 환경에 대해 논의하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과밀, 거대 학교로는 감염병 시대를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겪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라는 제목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녹색평론 180호, 김종철 선생에 대한 추모글들도 읽을 만하지만 지금 현안과 관련해서 이런 학교에 관한 글들 읽고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과 연결지어서 이보 모슬리의 '민중의이름으로(6)' 실린 글을 곱씹어 보자. 우리 권리를 남에게 이양하고 손을 놓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욕으로 동기가 부여된 사람들은 보통 선함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들 중 최량의 인간이라도 부도덕하고, 사람을 조종하는 데 능하며, 더 나쁜 경우에는 지독하게 사악하다. 개인적 야심은 교활함과 이중성에 통달하게 만든다. 야심가들은 "나는 공익을 위한다"고 말하고, 스스로 가장 먼저 그 말을 믿는다.

  국가 건설은, 법이나 기관을 세우는 일이 일반적으로 그렇지만, 권력과 야심을 억눌러서 그런 것들이 공익을 거스르는 쪽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서 행동하게 만드는 예술이다. (178쪽)


  유권자들이 이러한 권력들을 '집단으로' 직접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무도 그럴 시간도, 주의력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이 권력들의 활동에 한계를 정하고 결정하는 일에 주동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하지 않다면 의미 있는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 (179-180쪽)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내년 선거를 앞두고 많은 정치가들이 '공익'을 내세우면서 '국민'을 들먹이면서 출사표를 던졌다. 이들이 '공익을 위해서 행동하게' 만들려면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투명하게 정보가 공개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의미 있는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정착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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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학적인 표현이 제법 많은 시집인데... 


  가령 소금쟁이를 '저수지의 옷을 수선하는 수선공'(92쪽)이라고 표현한다던지, '쥐의 여행'라는 시에서 고스톱 치는 장면을 '아버쥐, 똥 먹어/아버쥐, 그냥 죽어/아버쥐, 쌌네'라는 표현에서 아버지 대신 아버쥐라고 한 표현도 재미있는데,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 '아버쥐, 인분 드시죠/아버쥐, 그만 작고하시지요/아버쥐! 사정하셨습니다'(85쪽)라는 표현에서는 안 웃을 수가 없다.


  부모 자식 간에도 상(성)스러운 말이 오가는 고스톱 치기에서, 쥐가 등장하고, 그 쥐를 통해서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이런 재미 있는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 시인데, 이는 웃음이 점차 사라지고 소위 썪은 미소(썩소)만이 넘치는 사회에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제공하고 있는 시들이 많다.


그럼에도 슬픈 시들도 많은데, 집값을 위해서 죽음까지도 단합하는 모습을 그린 시 '공범'(87쪽)에서는 박완서의 소설 '옥상의 민들레꽃'이 떠오르기도 한다. 죽음보다 집값을 우선하는 물신시대. 그런 시대를 시를 통해서 비판하고 있는데... 


이런 시도 있지만 이 시집에서 '페로몬'이라는 시를 읽으면 장인수 시인은 우리에게 웃음 페로몬을 내뿜어, 그 웃음으로 자신을 따르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시집 제목이 된 유리창이라는 시는 정지용의 유리창을 떠올리지만, 정지용의 유리창이 자식을 잃은 슬픔을 담고,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비통함을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하고 탄식이 절로 나오게 하지만, 장인수의 유리창은 그 죽음을 승화하고 있다. 물론 장인수 시에서 죽음은 새들의 죽음이다.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 새들. 그러나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한다.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는 다시 살아나 / 유리창을 마음대로 통과하며 살아간다고 한다/산맥과 달님도 마음대로 뚫으며 날아다닌다고 한다' (23쪽)


그러니 그의 시는 죽음이라고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이 있다. 그 다음이 있으니 우리는 절망에서 허우적대서는 안된다. 비극을 딛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시인은 우리를 이끈다. 


    페로몬


카페이 앉아 있는 남녀 고등학생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남녀 고등학생

담배를 피우고, 이어폰을 꽂고, 만화책을 보고 있는 

그들에게서

성페로몬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하나님을 갈구하는 예배당에 모인 신자들의

영혼에서도

주님을 향한 길안내페로몬 향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나의 몸에 돼지 수컷 페로몬을 바르면

암컷 돼지들이 난리를 피우며 따라붙을 것이다

이끌림의 에너지인 페로몬 향기처럼

생애의 물꼬가 터졌으면 좋겠다


장인수, 유리창, 문학세계사. 2006년 초판 2쇄. 93쪽.


보통 어른들이, 특히 교사들이 일탈행위라고 하는 고등학생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지 않고 성페로몬이 발동했다고 하고, 종교적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서도 페로몬을 발견하며, 자신에게도 그런 페로몬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시의 화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우리에게 페로몬을 발산해 그 페로몬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존재.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시를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삭막한 시대에는 더더욱 '생애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도 시를 읽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시를 읽으며 나도 모르는 세계로 들어설 때가 있으니, 시인들은 이렇게 페로몬을 발산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인수 시집을 읽으며 그 페로몬이 시인만의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페로몬을 지니고 있음을... 그래서 그 페로몬으로 다른 사람을 이끌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페로몬에 이끌려 함께 가기도 한다.


함께 함. 이게 바로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 아니겠는가. 그러니 우리 서로에게 긍정 페로몬을 발산했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를 이끌며 사는, 아니 굳이 이끌 필요도 없다. 그냥 함께 있어도 좋은 페로몬을 내뿜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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