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학교 안의 인문학 1~2 세트 - 전2권 학교 안의 인문학
오승현 지음 / 생각학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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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

 

  거울, 펜과 노트, 교복, 성적표, 책상과 의자, 급훈, 가방, 출석부, 시계, 태극기, 교과서, 게시판

 

  총 12개 사물이다. 그냥 사물이 아니라 학생들과 늘 함께 있는 학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 존재에 의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규정당하고 있는지, 아무런 생각없이 지낼 수도 있지만, 이들에 대해서 생각하면 우리들 삶에 더 깊이 들어갈 수가 있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들이지만, 그 사물들은 바로 우리들 삶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거울은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우리를 비춰주는 역할을 하니까 말이다. 단지 비춰주는 역할을 해서 우리를 반성하게 하면 좋은데, 비교를 하게 만들어 삶을 힘든 지경에 이르게 한다. 그게 문제다.

 

이 중에 학교에서 지금은 없어진 것이 무엇일까 찾아보니, 세상에 없다. 게시판 정도가 없어졌을라나? 대부분의 학교에 사물함이 들어오고 게시판을 만들 공간이 부족해지다 보니, 게시판은 아주 적게 축소되거나 없어지거나 했다. 그것뿐이다.

 

또 있나? 급훈? 내가 알기론 많은 학교에서 없어졌다.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은 급훈도 있었으니, 세상에 그런 급훈을 버젓이 걸어놓고 교육이랍시고 했다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이 책에서는 그래도 유교 윤리에 가까운, 전근대적인 급훈을 예로 들어 비판하고 있지만, '미팅할래? 미싱할래?'와 같은 노동을 무시하는 급훈도 있었으니... 이런 것이 학교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반교육적이다. 그러니 이런 것들은 사라져야 한다.

 

한데 없어지지 못한 것들, 아직도 살아남은 것들, 한때 사라졌다가 다시 부활한 것들, 교복. 성적표 등등. 그래 이것들을 통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이 아마 학교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늘 만났던 이런 존재들을 통해 각인되었을 수도 있다. 그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곁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148쪽. 오찬호가 쓴 [우리는 차별에 반성합니다]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는데, 오찬호가 쓴 책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다. 반성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화 [동주]의 마지막 부분에 송몽규가 절규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말. 그래 차별에 반성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책 제목도 또 내용도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다. 그래서 더 슬프게 읽었던 책이다. 제목을 쓰는데, 작가인지 또는 편집자인지의 희망이 들어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214쪽. 한국에서는 만 19세가 되어야 투표를 할 수 있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책이 2019년에 출판이 되어서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투표 연령은 만18세로 하향 조정이 되었다. 이제는 생일이 지난 고3 학생들도 투표를 할 수 있다. 2020년 1월에 선거법이 개정되었다 *****

 

 

2권

교실, 도서관, 음악실· 미술실· 체육관, 탈의실, 교문, 운동장, 복도, 교무실, 화장실, 식당, 계단, 학교의 안팎

 

이번에는 공간이다. 학교 건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교 건축은 너무도 획일적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어느 도시를 여행해도 어느 건물이 학교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다 똑같기 때문이다.

 

이런 학교에서 창의성을 기른다고? 답답한 노릇이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겨들어야 한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건축계의 금언이 있다. 오늘날 학교 건축은 학교 교육의 딱딱함, 획일성 등을 정확히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9쪽)

 

'~인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반영한 것이다라고 해야 옳다. 학교의 건축에서 창의적인 학생이 나온다는 것은, 체제에 반항하는 특출한 개인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도대체 이렇게 획일적인 건축물에서 무엇을 바라나? 아무리 발달한 기계들을 들여와도, 학교의 틀인 건축을 바꾸지 않으면 그게 그거인 교육이 될 가능성이 많다. 여기에 필요한 시설들이 다 있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책에서 제시한 12개의 시설 또는 공간 중에 여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특히 탈의실은 없는 학교가 많다. 있더라도 형식적인 학교도 많고.

 

체육복으로 갈아 입을 때, 교실에서 갈아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탈의실은 있더라도 유명무실하다. 너무 멀리 있어 가기가 힘들다. 탈의실보다 더 심한 건 몸을 씻을 시설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한여름에 체육 활동을 하고 씻을 장소가 없어서 땀난 몸 그대로 다음 수업을 받아야 하는 학생들이라니.

 

체육이 끝나고 다음 시간까지 10분. 씻을 장소가 있어도 씻을 시간이 없다. 시간 역시 너무도 획일적이어서 교과목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니 탈의실과 샤워실이 없는 것이 정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교육 현실에서는.

 

계단 역시 마찬가지고. 폭력이다. 계단은. 몸이 멀쩡한 사람에겐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리를 다치거나 다른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계단은 그야말로 거대한 장벽이다. 엘리베이터가 의무적으로 설치되어 있어야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우선 구석진 곳에 있고, 또 잠가 놓는 경우가 많아, 이용하려면 별도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이렇게 누구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부족한 것이 학교 현실이다.

 

이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학교 안의 인문학이라고 하지만, 이건 인문학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당연히 갖추어야 할 것인데, 학교라면, 적어도 교육을 하는 장소라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선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인데도 나 몰라라 한 것이 교육 당국들의 행태 아니었나 싶다. 오히려 다른 데는 돈을 물 쓰듯 하면서,...

 

머리말을 계속 인용한다. 너무도 가슴이 아픈 말이기 때문에.

 

학교는 교사와 학생의 삶이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깨달음으로 전해지는, 소통과 성장의 배움터여야 한다. 삶과 앎이, 생활과 배움이 겉돌지 않고 스미고 짜이는 배움터가 되어야 한다. (11쪽)

 

이런 배움터가 되기 위해선 학교에 있는 시설들, 건물들이 바뀌어야 한다. 매일매일 생활하고 있는 장소가 학생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바뀌어야 하는데, 지독하게 바뀌지 않는 학교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1926-2016)는 [부의 미래]에서 "기업이 시속 100마일로 가장 빠르게 변한다면, 비정부단체는 90마일, 가족은 60마일, 노동조합은 30마일, 관료조직은 25마일, 그리고 학교는 10마일의 속도로 변한다"고 했어. (115쪽) 

 

참, 마음이 아픈 지적이다. 그럼에도 학교는 여전하다. 변하지 않는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원격수업이다 뭐다, 이 참에 학교를 바꾸어야 한다,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컴퓨터 또는 온라인 화상 수업을 하겠다는 것 말고는 없다.

 

오히려 이 참에 학교 건축이라는 틀을 바꾸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숫자도 과감하게 줄여 밀집도를 낮추고, 지나치게 많은 수업량도 줄이고, 학교에 학생들을 위한 시설들을 더 많이 들여오고, 자율적으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은 없다. 그냥 온라인 화상 수업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구조가 바뀌지 않고는 교육 혁신은 없는데... 그러니 혁신학교 지정을 반대하는 학부모, 학생들이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틀은 그냥 놔두고 예산을 좀더 줘서 혁신을 한다고 하는데, 무엇이 혁신이 되겠는가? 과감하게 학교라는 틀부터 바꾸는 것이 혁신일 텐데...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대다수가 거치는 학교라는 공간이 어쩌면 교육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공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니 말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부터 손대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썼지만, 사실 이런 책은 교육 관료들이 읽어야 한다. 학교에서 관리자라고 하는 교장, 교감부터, 교육청 관료들, 그리고 교육부 장관, 여기에 거의 제왕적 권력을 쥐고 있는, 장관들이 대통령이 입만 바라보고 있는 경우도 많으니 대통령이 읽어야 한다.

 

학생들 수준에 맞는 책이 아니라 그들이 읽어야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나라 교육관료들은 토플러의 말에서처럼 25마일의 속도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교육)관료이기 때문에 이들은 채 5마일로 안 되는 속도록 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학생들도 당연히 읽어야 한다. 교사들도. 그리고 그들이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변하기를 기다리면 절대로 학교는 변하지 않는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지 깨닫는 공부. 그래서 함께 그런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공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읽을 만하다. 아니, 읽어야만 한다.

 

*****37쪽 유대계 독일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라고 하는데,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나고 자랐으니, 체코 소설가라고 해야 하지 않나? 다른 자료를 찾아보면 카프카가 살던 당시의 나라를 살려 오스트리아-헝가리 국적의 소설가라고 하는데... 독일 소설가라고 하는 것은 좀 그렇다. 물론 카프카가 독일어로 소설을 썼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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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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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책이다. 그가 직접 그린 스케치와 그것을 그리게 만든 일을 글로 적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은 자기 만족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말을 걸 뿐만 아니라 함께 가려고 한다.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20쪽)


그렇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말을 걸기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동행하기 위해서다. 비가 올 때 우산을 홀로 쓰는 사람이 아니라, 또 우산을 함께 쓰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줄 수 있는 사람, 비가 그칠 때까지 그 비를 맞으며 함께 견뎌주는 사람이 바로 존 버거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으면 아주 사소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음을,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을 생각하게 된다.


사소함에서 중요함을 보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억압에 저항하는 일이고, 또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보이지 않는 끈을 보게 되는 일이고, 머리 위에 있던 유리 천장을 깨뜨리는 일이다. 그건 바로 저항이다.


  깊이있는 저항은 부재하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고, 미래에는 그 정의가 세워질 거라는 희망과 함께한다. 하지만 이 희망이 저항이 이루어지는 첫번째 이유는 아니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팔을 들고,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인간 사슬을 만들고, 소리치고, 글을 쓰는 것)은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저항은 영(零)으로, 강요된 침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항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만약 이루어진다면, 작은 승리가 된다. 그 순간은, 다른 순간들처럼 지나가겠지만, 지울 수 없는 가치를 얻는다. 그 순간은 지나가지만, 이미 출력이 되었다. 저항의 본령은 어떤 대안, 좀 더 공정한 미래를 위한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아주 사소한 구원이다. 문제는 이 사소한이라는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시간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85-86쪽)


이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저항이 아니다. 저항은 바로 현재의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소함은 삶에서 중요함이 된다. 저항을 하는 순간이 바로 사소함을 중요함으로 만든다. 그것은 저항하는 삶이 소중함을 잘 보여준다.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남들에게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사소함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내 삶이 지닌 사소함은 남들 눈에 비치는 사소함일 뿐이다. 내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삶일 수 있다. 즉, 내 가치판단 기준으로 남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 부분을 그렇게 읽게 된다. 그러므로 무슨 대의, 명분을 앞세울 필요가 없다. 그냥 내 삶이 요구할 때 저항하는 것이다. 


존 버거의 이 책은 '벤투의 스케치북'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벤투가 뭐지? 하는 생각을 했다. 벤투라는 사람이 누굴까? 했는데, 스피노자다. 우리는 스피노자라고만 알고 있지, 그의 긴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베네딕투스(벤투) 데 스피노자라고 알려진 철학자 바루흐 스피노자(1632-1677)는' (11쪽)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에서 스피노자도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존 버거는 스피노자와 이렇게 드로잉을 한다는 공통점을 말하고 있다.


단지 드로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는 스피노자의 글이 많이 나오고 있다. 존 버거의 그림과 글과 스피노자의 글이 어우러져 있다.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모습,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함을 이 책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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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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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사람에 대한 예의'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가 제목이 되었다. 왜? 당연한 일이 비범한 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고위관료라는 인간들이 국민들을 개, 돼지에 비유하기도 하니, 그들 눈에는 국민들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나 보다.

 

아니, 그들은 국민들을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권세 있는, 소위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사람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들은 사람이되, 자신들과는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사람인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자신들도 사람이라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면 주제 넘다고, 지금은 너희들 권리를 주장할 때가 아니라고, 오히려 이기적이라고 몰아댄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제목을 단 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람에 대한 예의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또는 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진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과 동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대우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노력이 바로 사람에 대한 예의다. 우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선에 두고 다른 것들을 먼저 앞세우지 않아야 한다. 다른 것들로 사람이라는 본질을 가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과연 그것이 실패일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마친 이런 글이 있다.

 

패배를 실패로 착각해선 안 된다. 패배가 상대와의 싸움에서 진 것이라면 실패는 나와의 싸움에서 진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졌다면 실패한 게 아니다. 패배한 것이다. 정정당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겼다면 그건 실패한 것이다. (72쪽)

 

참 좋은 말인데, 패배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파멸로 가는 것이 지금 우리 현실이 아닐까? 이 아름다운 패배, 실패하지 않는 패배를 할 수 있는 집단이 있을까?

 

노동자들은 패배하면 곧 죽음이다. 이들이 해고는 죽음이다라고 외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패배하지 않으려 기를 쓰고 싸우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패배란 곧 실패다. 이들에게 패배는 사회에서 밀려나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하는데...

 

말은 쉬운데 실천은 어렵다. 아름다운 패배. 사회적 약자들에게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들 개개인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한 개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 집단으로 보면 아름다운 패배가 될 수 있다.

 

전태일의 운동은 패배했다. 그러나 실패는 아니다. 분명하다. 전태일의 패배로 우리 사회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운동, 누가 패배라고 하는가? 우리 사회가 지금 형식적인 민주주의나마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운동 덕분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라기보다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아름다운 패배가 있다. 이들은 이런 패배를 통해서 사회를 조금씩 조금씩 바꿔간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던 집단, 관심없던 집단들을 자신들의 주변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패배는 다른 국면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런 모습을 이 책에선 '지더라도 개기자'고 했다. 언뜻보면 이해 안 되는 말이지만, 패배가 실패가 아니란 말과 같다.

 

개기는 것은 불필요한 행위로 보인다. 개겨봤자 달라지는 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개겨서 과연 달라지는 게 없는가. 달라지는 게 분명히 있다. 개기는 사람 자신이다. 개기면서 결심이 단단해지고 확고해진다. 다시 싸워야 할 때 웬만한 충격엔 흔들리지 않는다. 실패의 의미도 달라진다. 실패했을지언정 원칙을 지키고 주장함으로써 가치 있는 실패가 된다. (73쪽)

 

이런 자세를 지녀야 한다. 내 삶에 원칙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선은 있어야 한다. 그 선을 나 스스로 넘어섰을 때 패배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 이점에서 정치권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특히 국회의원 선거. 이승만 정권 당시 사사오입은 욕할 가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강행이 되었는데, 그보다 더 세련된(?) 비례대표 위성정당이란 것을 만든 야당, 여당.

 

이들에게 패배란 실패다. 그래서 이들은 정당하지 못해도, 비록 꼼수란 소리를 들어도 성공하려 한다. 원칙을 지키고 주장하는 실패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바보 소리를 듣는 정치인은 이제는 없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를 하면 과연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을까? 국민을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이미 원칙을 잃고 자신들의 의석수만을 생각하는데... 그들에게는 정치권력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좋은 삶에 대한,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사람에 대한 예의'는 없다.

 

여기에 최근 계속 언론을 타고 있는 검찰들의 모습. 또 다른 재벌들의 모습을 보면 과연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이들에게는 좋은 삶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거나 또는 기득권을 지켜주는 직업이 전부는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에 나온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이들만이 아니다. 곧 수능을 보는 전국의 수험생들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그들이 왜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 그것은 바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직업이 전부는 아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에 직업도 있는 것이다. 직업은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방편일 뿐이다. 삶을 직업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직업을 삶에 맞춰야 한다. (194쪽)

 

이 말이 통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좋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이다. 자신과 다르다고 배제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글 한편 한편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사람에 대한 예의에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진영논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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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안 수업 -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가
윤광준 지음 / 지와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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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테니까.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같은 사물이라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많을까? 그다지 많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기 보다는 하루하루의 생활에 빠져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삭막한 삶이라고 할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아름다움도 우리들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에도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듯이, 삶에 여유가 없으면 아름다움을 느끼기 힘들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살아간다는 말보다 살아진다는 말이 어울리는 삶이 된다.

 

그러니 아름다움을 느끼는 삶은 우리들에게 중요하다. 삶을 살아가게 될 테니 말이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삶의 자세가 바뀌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삶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심미안 수업이라고 하지만 딱히 어떤 비결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우선은 경험해야 한다. 한번으로 끝나는 일회성 경험이 아니라 두번 세번 네번 반복되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한다.

 

자꾸 경험해야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지식만으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함으로써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장소성이 중요하다. 어느 장소에서 경험하느냐가 중요하다. 미술, 음악, 건축, 사진, 디자인 분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국악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국악 하면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여기는데, 국악을 직접 현장에서 들었을 때 그것도 한옥에서 하는 공연을 보았을 때국악이 이렇게나 아름답구나 하고 느꼈다는 것. 이것은 바로 그 장소와 아 름다움이 접목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책으로 아무리 보아도, 해설을 아무리 읽어도 미술관에 가서 또는 전시회에 가서 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 자신의 눈으로 현장에서 봤을 때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건축의 경우에는 이런 말이 기억에 남는다. 좋은 건물에서는 데이트가 잘 된다는 말. 좋은 건물이 내뿜는 그 무엇이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것. 아름다운 것 사이에 사람들이 있을 때와 추한 것들 사이에 있을 때 사람들 관계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생활용품들에서도 이러한 아름다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디자인이 하는 역할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자신의 외부에서만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우선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자신의 삶에 여유를 두어야 한다. 삶의 여백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그러니 심미안을 기르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에게만 책임을 두어서는 안된다.

 

사회적으로 개인이 삶에 여백을 둘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런 여백을 아름다움을 찾는 것으로 채우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삶 도처에 있는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들어올 수 있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 심미안이 길러질 수 있다.

 

이 책, 심미안 수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겠지만, 사회 역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서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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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잎사귀처럼 - <사이보그 선언문>의 저자 다나 J. 해러웨이의 지적 탐험, 다알로고스총서 2
사이어자 니콜스 구디브.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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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 해러웨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자신의 삶과 저서에 대한 대담임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배경지식의 부족.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세상을 단순화해서 보지 말라는 것. 세상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은 단순화했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

 

아주 작은 존재조차도 엄청난 복잡성을 지니고 있으며, 아주 크고 복잡한 존재라도 단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모두 있고, 모두 없을 수 있음을. 경계를 지니고 있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경계임을 생각하게 된다.

 

어렴풋이 이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짐작할 수는 있지만, 헤러웨이의 사상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이 책을 통해서 뭔가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한 생각은 착가이었다.

 

다만, 해러웨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가 주장한 것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단순하지 않음을 짐작하게 되었다는 데 의미를 둔 읽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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