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들 - 존 버거의 예술론
존 버거 지음, 톰 오버턴 엮음,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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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예술론이라는 작은 제목이 붙어 있지만, 예술론이라기보다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글들이라고 하는 편이 좋다.


존 버거 자신이 지닌 사상을 글로 잘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에 관한 글도 있지만, 예술에 관한 글에서도 존 버거의 사상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장소에 관한 열 가지 속보'라는 글을 보면 존 버거의 사상을 더 잘 알 수 있는데...


그는 그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누군가가 묻는다. 당신은 아직도 마르크스주의자요?' (291쪽)


'그렇다. 나는 무엇보다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이다.' (298쪽)


참 오랜 만에 보는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말. 한 때 우리나라에서 금기시 되었던 말.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는 순간, 국가보안법에 걸려 감옥에 가야 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 말을 이렇게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라니...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주의는 이제 한물 간 사상이라고 생각하는데,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같은 사상으로 보지 않고, 다른 의미로 파악하면, 공산주의를 현실에 적용하려던 마르크스주의인데, 현실 적용에 실패했다고 해서, 이념의 기초가 되는 마르크스주의까지도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그가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존 버거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약자에 기반한, 약자와 함께 하는 사상이기에, 그는 그 주의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약자의 눈으로 본다. 


약자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한다. 그러니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임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조차도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는 말이 있으니, 존 버거의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가 말한 교조적인 마르크즈주의가 아니라, 현실에서 약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많은 글들이 실려 있는데, 읽다보면 약자들에 대한 존 버거의 관심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세계화를 통한 금융자본주의의 지배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하는 글들도 많고.


예술이 사회와 독립해서 홀로 존재할 수 없듯이, 예술가들도 사회와 관계없이 지낼 수 없듯이,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사회를 바로보는 관점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돌이켜봐야 한다.


아마도, 존 버거의 이 책은 그러한 눈을 지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중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위한 선물'이란 글은 마음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혁명이 무엇인지, 어떤 혁명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우리나라도 '촛불 혁명'이라는 말을 쓰는데... 결과는?


한 편의 글을 더하면 '돌멩이'란 글을 통해 엄청난 비극을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는 존 버거의 따스한 눈길을 만날 수 있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하는 글이다.


한편 한편 읽어보면 참으로 생각할 것이 많은 글들이다. 존 버거의 사상이 잘 드러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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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 고전영화 읽기 - 내 아이 감성 영재로 키우는 영화 이야기
조수진 지음 / 호밀밭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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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영화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감독 가운데서 세계적인 감독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여럿 있고, 배우 중에서도 세계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만큼 우리나라 영화가 세계에 많이 알려졌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미나리'라는 영화로, 감독이 한국계이고, 우리나라 배우들이 참여했고, 윤여정 씨가 조연으로 세계에서 수많은 상을 받고 있으니, 가히 한국영화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영화는 아직은 학생들에게 그리 권장되지 않는다. 내 학창시절, 학교에서 소설을 읽으면 공부 안 하고 쓸데없는 짓 한다고 야단을 맞았다. 야단 맞는 정도가 아니라 책은 압수 당하고, 지금은 거의(?-완전히라고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라진 체벌까지도 당해야 했는데, 아마 지금 학생들 중 대다수는 영화를 본다고 하면 공부 안 하고 이상한 짓 한다고 야단맞지 않을까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공부 하면 대학입시로 수렴된다. 모든 공부는 대학으로, 대학 입학과 관련 없는 공부는 - 사실 대학 입학과 관련 없는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수시'라는 제도는 각자 능력있는 학생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 아니겠는가. 다만, 이것이 또 변질돼서 문제지 - 이상한 짓, 딴 짓, 공부에 방해가 되는 짓으로 치부된다.


아직도... 참... 그러니 세계적인 감독이 나와도, 세계적인 배우가 나와도, 여전히 우리는 '헐리우드 키드'를 벗어나지 못하게 미국 헐리우드 중심의 영화를 주로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영화가 전부가 아님에도, 다른 영화를 만날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학창시절에는.


그래서 이 책은 참 반갑다. 엄마가 아이와 함께 고전영화를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내용. 실제로 그렇게 한 결과를 가지고 책을 냈다고 하니, 공부라는 개념이 대학 입시를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서 너무도 반갑다.


또한 이 책은 요즘 영화도 이야기하고, 또 함께 보기도 하지만, 기초부터 시작해서 좋다. 고전영화, 물론 고전영화라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고, 꼭 고전영화부터 봐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럼에도 요즘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고전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역사, 영화의 기법, 영화 감독, 영화 음악 등등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좋다.


영화를 본다고 표현하지 않고 읽는다고 표현한 것 역시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다. 기초가 탄탄하면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더 깊고 넓게 감상할 수 있다. 본다는 말과 읽는다는 말이 합쳐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기초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영화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또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감독과 영화는 무엇인지, 우리나라 예전 영화는 어땠는지 등등을 엄마와 아들이 함께 보본 결과, 또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한 결과를 책으로 엮어냈으니, 우리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고전영화의 세계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고전영화 읽기라는 제목에 걸맞게 헐리우드에 편중되지 않아 좋다. 세계 여러나라의 영화를 골고루 다뤄주고 있다. 그만큼 영화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좋은 책이다.


너무 어렵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아서 청소년들이 읽기에 좋다. 영화에 관심 있는 청소년이라면 자신이 그동안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했던 것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을 것이고, 고전영화라면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옛날, 그것도 지금은 보지 않아도 될 잊어야 할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그렇지 않음을, 고전영화를 통해서 재미도 느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영화를 더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폭을 확장해주는 역할을 하니, 이 책을 통해 많은 영화를 만나고, 또 자신의 경험도 넓혀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덧글


읽다보니, 우리나라 영화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년도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있을 수 없는 년도가 나와 버려서... 이 부분은 수정해야 할 듯하다.


71쪽. 우리나라 영화 전래 시기는 대략 1897년에서 1903년으로 본다. 1897년 소설가이며 영화감독인 심훈이 신문에 글을 쓴 것과... 로 되어 있는데...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심훈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록수]를 쓴 심훈일테고, 그는 1901년에 태어나서 1936년에 세상을 떴으니, 그런 심훈이 1897년에 신문에 글을 쓸 수가 없다. 이 부분은 알 수가 없으니, 찾아서 수정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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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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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귄의 글들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다. 그래, 그렇지 감탄하면서 읽는다. 자꾸 르귄의 책을 찾아 읽게 된다. 소설도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이렇게 수필이나 서평을 쓴 글을 통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다.


페미니즘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르귄은 여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동등한 인간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아는 것'이라는 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여자들에게 무엇을 배우느냐는 질문에 답해 볼까요? 제가 첫 번째로 내놓을 거대한 일반화는 우리가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운다는 겁니다' (149쪽)


바로 이거다. 우리는 남성인 인간, 여성인 인간, 성소수자인 인간 등으로 자라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남성의 가르침은 이렇지 않다고 한다. 


'남자들의 가르침은 현 상황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여자들의 가르침은 개인적이기에 더 전복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152쪽)


이런 말을 보면 여성들이 수동적이라고 하는 말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치고 배운다면 세상이 인간을 가르고 차별하는 모습을 보면 그것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전복적이 된다. 이것이 바로 여자의 가르침이다.


국가, 사회, 집단에 개인을 매몰시키지 않는다. 국가, 사회, 집단은 개인이 존재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데, 남자들의 가르침은 국가를 위해, 사회를 위해,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고, 개인을 내세워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경향이 많다. 이런 경향 속에서 여성의 주장은 집 안으로 국한되기 일쑤다.


하지만 르귄은 아니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가르침이 결국은 국가, 사회, 집단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것, 그것의 바탕은 바로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다고 한다. 명심할 말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는 문학과 장르 문학을 비교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비교가 아니라 대조라고 할 수 있다. 문학에 비해 장르 문학은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는 주장.


르귄이 쓴 소설은 SF소설이라는 장르 소설로 흔히 분류한다. 그리고 SF소설은 문학에서 청소년들이나 읽는 작품으로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주장에 르귄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세상에 문학과 장르 문학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그 많은 문학의 종류에 장르 문학이 속할 뿐인데... 이쪽 저쪽 편가르기를 하면 그것은 이미 문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사람을 남성, 여성, 기타 다른 성으로 나누어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 잘못되었듯이, 문학도 이런 문학, 저런 문학 나누어 구별짓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SF소설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를 꾸며낸 소설이 아니다. SF소설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통로다. 나니아 연대기나 앨리스 이야기를 보면 다른 세계로 인물들이 갈 수 있는 통로가 나온다. 그 통로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


SF소설도 마찬가지다. SF소설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다양한 면을 인식하게 된다. 오히려 SF라는 특성때문에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차분하게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도 있다. 미래의 세계나 과거의 세계를 현재로 데려오는 '타임머신'의 역할을 SF소설이 한다. 그래서 SF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실적이지 못한 SF소설에 대해서는 르귄 역시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그러니 문학과 장르 문학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겠는가? 르귄이 그러한 구분을 참지 못하고 이 책의 여러 글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또한 이 책에는 다양한 서평이 들어있고, 다양한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드는,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가들도 있다. 그렇게 르귄은 또다른 작품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특히 주제 사라마구. '눈 먼 자들의 도시'는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 처음 '페스트'와 함께 떠올랐던 작품. 인간은 이제 어느 한 순간에 자신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게 되는데, 그때 우리는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소설이었는데...


이 책 곳곳에서 르귄은 사라마구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그 중에 하나. '존엄의 예: 주제 사라마구의 작업에 대한 생각들'이라는 글을 보면 그에 대한 생각이 너무도 잘 드러나 있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읽던 르귄은 그 작품에 압도되어 읽기를 멈춘다. 작가를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 그리고 사라마구의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그가 쓴 소설들을 죽 읽으면서 사라마구에 대한 믿음이 생긴 르귄은 다시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읽는다. 그러면서 그 작품이 왜 좋은지를 느끼게 된다. 마찬가지로 '눈 먼 자들의 도시' 이후에 나온 작품들도 찾아 읽고.


이런 태도다. 작가를 만나고 작품을 읽게 되면 그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다. 작품을 더 읽고 싶어진다. 찾아서 읽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르귄의 작품을 하나하나 찾아 읽기 시작한다. 르귄이 '사라지는 할머니들'이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이제는 통용되지 않는 세상을 위해.


'나는 여자들의 소설을 문학 정전에서 한 권씩 한 권씩, 한 명씩 한 명씩 배제하는 흔한 기법이나 수법을 네 가지 알고 있다. 이 수법들은 폄하, 누락, 예외화, 그리고 질송이다. 이 넷이 쌓여 지속적으로 여자들의 글을 주변으로 밀어낸다.' (160쪽)


이 말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다면 여성작가란 말도 사라지겠지. 문학을 무슨 무슨 문학으로 구분짓는 것도 사라지겠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르귄의 책이다. 그래, 이렇게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책. 다른 작가, 다른 작품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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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5-08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좋은 주말 되세요~

kinye91 2021-05-09 08: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5-08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kinye91 2021-05-09 08: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5-0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kinye91 2021-05-09 10: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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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귄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 달랑 세 권. 그럼에도 이 작가에게는 사람을 끄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르귄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읽고 싶어지니 말이다. 아마도 "배앗긴 자들'이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이 책은 르귄의 수필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 중에서 예술가의 자의식을 이야기한 이런 구절.


예술이 갖는 의미는 과학적 의미와 다르다. (68쪽)


글쓰기는 위험한 입찰이다. 무엇도 보장되지 않는다. 운에 맡겨야 한다. 나는 기꺼이 내 운을 걸었다. 그리고 그 자체를 너무 좋아한다. 내 글이 오독되고 오해받고 오역되더라도. (69쪽)


이보다 더 작가 의식을 드러낸 구절이 있을까 싶다. 그렇다. 글쓰기는 자신을 던지는 모험이다. 입찰이라고 하는 표현을 하면 낙찰이나 유찰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도 모험이다. 자신을 이해하는 독자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기나긴 여정을 떠나는 모험.


그러니 르귄이 자신의 글이 잘못 읽히더라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 작가들이 이렇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우선. 독자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독자를 먼저 생각하면서 글을 쓰는 작가를 르귄은 좋아하지 않는다. 


예술은 해설이 아니다. 예술가는 예술을 할 뿐 설명하지 않는다. 내 생각은 그렇다. (69쪽)


이런 작가의 작품은 한 방향으로 고정되지 않아서 좋다. 어떤 방향으로 해석해도 좋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다른 생각이 들 수 있다. 르귄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젊었을 때와 나이 들어서 읽었을 때 다르게 느꼈다는 것으로 예술의 힘을 알 수 있다.


무의미한 보상의 끝없는 순환에 갇힌 인간의 상상력은 굶주림에 갇혀 회생 불가능해진다. (76쪽)


자,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이유는 자신이 또는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고 싶어서다.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건 일종의 보상이다. 무의미한 보상이 아닐지 몰라도 이렇게 보상을 바라고 작품 활동을 하다보면 결국 상상력의 고갈을 부른다. 


상상력의 고갈은 진부한 이야기만을 반복하게 된다. 그렇게 쉬운 길을 택하게 되면서 자신을 변명하게 된다. 르귄이 이렇게 지적한 것처럼.


용이함은 경솔함과 그럴싸함만 낳는다. (76쪽)


용이함, 편리함, 쉬움. 이런 것만 추구하면 어려움을 배제하게 된다. 그런데 쉬운 길로만 가면 결국에는 모두가 파멸하는 입구로 들어서게 된다. 성장, 성장, 발전, 발전 하고 외쳐왔던 인류가 지금 어떤 지경에 처해 있는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지구는 어려움에 빠져 있으며, 인류는 곤경에 처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고의 전환을 이루어야 하는데.. 르귄은 그것을 양을 추구하던 세계에서 음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마침내 시작한 '인류의 지배와 무한의 성장이라는 목표를 인류의 적응과 장기적 생존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사고의 전환이 바로 양에서 음으로의 전환이다. 그 사고에는 덧없음과 불완전함에 대한 수용도 포함되며 불확실성과 임시변통에 대한 인내도 포함된다. 물과 어둠, 그리고 땅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39쪽)


이렇게 사고의 전환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르귄이 자신의 예술관을 관철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남들이 보지 않으려 하는 것도 본다. 남들이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말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벌거벗은 임금님'에 등장하는 어른들처럼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눈 감고 있다. 보이는데도 보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본 것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냥 눈 감아 버린다. 그래서 세상은 더더 나쁜 쪽으로 간다. 


우리의 왕이 벌거벗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 한 아이가 왕이 벌거벗었다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의 버릇없는 내적 꼬마가 지껄이기를 참고 기다릴 셈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벌거벗은 정치인들을 아주 많이 보게 될 것이다. (199쪽)


이 구절을 읽고 얼마나 마음이 뜨끔했는지... 정말, 벌거벗은 정치인 투성이인데, 우리는 그들에게 벌거벗었다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옷을 입은 양 말하고 행동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그들을 탓하기에 앞서 눈 감고 지내는, 아니 눈 뜨고도 못 보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지금까지 나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그들에게 분노만 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구절이 있다.


분노가 모욕과 무례의 올바른 대처법이긴 하지만 현재의 도덕적 풍토에 따르면 자신의 생각을 꾸준하고 단호하게 표현하며 도의적인 행동을 할 때 가장 큰 효과를 보게 되는 것 같다. (214쪽)


바로 이 말. 그들에게 벌거벗었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그것이 왜 벌거벗은 모습인지를 보여줄 수 있게 꾸준하고 단호하게 도의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한다. 그냥 분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된 권리는 분노를 통해 강력히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분노로는 권리를 잘 이행할 수 없다. 권리는 집요하게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 (215쪽)


지금까지 권리를 찾기 위해 분노를 모아 사회 변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 더 집요하게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사회 정의의 실현은 지지부진하니말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책에 나온 르귄의 말을 가슴에 새기기로 한다. 나도 우리나라가 이런 나라였으면 한다. 


나는 진실을 중요시하고 선을 나누는 행동이 내 나라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취급받지 않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나라가 남의 나라처럼 느껴지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186쪽)


이렇게 사회, 정치를 생각하게 하는 글들도 있지만, 고양이 파드와 지내는 소소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르귄의 수필집... 소설만큼이나 마음에 드는 글들이 많다. 


여기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너무 필요한 문학상'이라는 제목을 단 글을 읽으면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 문학상을 두고 벌어졌던 일과 관련지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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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지영의 섬진 산책
공지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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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공지영. 이름이 꽤 알려진 사람. 소설로도 그렇고, 사회 참여글로도 그렇고, 다른 이유로도 그런 사람. 젊은 시절에 공지영 작품을 몇 권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리고 공지영이 쓴 '수도원 기행'을 읽는 적도 있고. 최근에는 '의자놀이'를 마지막으로 공지영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글을 참 잘 쓴다고 느꼈는데, 그런 공지영이 섬진강변에 자리를 잡고 산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섬진강도 좋고, 지리산도 좋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


참 한적하고 여유로운 유유자적하는, 그야말로 자연친화적인,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 책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거부하게 만든다. 처음에 이런 말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죽어도 될 이유를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의 굴곡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가 있을까 싶다.이 문장 하나로 공지영이라는 사람이 다사다난했던 삶을 살았구나 하고 느낄 수가 있다. 그러다가 '사람이다'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표현에 눈길이 머문다.


과거형이다. 과거형이라는 말은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아니, 죽어야 할 이유는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책의 제목처럼) 살아야 할 이유를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래서'라는 말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어울리게 공지영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통해서 드러내 보인다. 


공지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살아간다. 세상을. 주변이 바뀌지 않아도, 주변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자신의 현재에 집중한다.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간다가 된다. 자신의 삶에서 겪었던 수많은 고통들은 이제 삶의 무늬로 되살아난다. 그렇게 되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겠지만 그 과정들을 거쳐 지금의 공지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후배들의 고민에 덧붙여 이야기한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들을 겪었겠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려움들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이제는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지금-여기-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려 한다. 우리는 자꾸 오지도 않을 미래를 걱정하고, 바꾸지 못할 과거 때문에 괴로워 하며 산다. 또 자신이 바꿀 수 없는 남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짧은 생인데...


그러니 '지금-여기-나 자신'을 늘 생각해야 한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 어려움이 있다고 그 어려움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러면 '그 또한 지나가게 되라라'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바로 지금-여기에서.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으니. 그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바로 '지금-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세 명의 고민하는 후배들이 나온다.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치는 고민들이다. 그런 후배들의 고민에 대해 공지영은 자신이 살아온 길들을 보여주면서 그 고민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우리들 삶을 성찰하도록 한다.


거창한 말이 아니라 바로 일상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마음을 열게 하고 있다. 그래서 '공지영의 섬진 산책'이라고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섬진 산책과 더불어 '마음 산책'을 하게 된다.


세상이 그래서가 아니라 세상이 어떻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점점 행복해지기로 했다"는 책 표지의 말마따나 우리 행복해야 한다. 그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가끔 잊는 그것,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것.


이 책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된다. 자ㅡ, 내게 죽을 이유가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살아야 할 이유가 30가지도 더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내 행복은 남이 줄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지금-여기'에서 가장 소중한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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