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하는 철학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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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철학이 없어." 또는 "그 사람은 철학이 있어." 또는 "그 정책에는 철학이 없어." 또는 "그 정책에는 철학이 있어."

 

흔히 하는 말이다. 여기서 쓰이는 철학이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는 문맥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일관성으로, 어떤 경우에는 진리로 쓰이기도 한다.

 

일관성이나 진리, 같지 않을 것 같은 용어가 한 단어에서 쓰이는 것은 그만큼 철학이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뜻이 단순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일관성이란 자신이 생각이나 행동을 변함없이 꾸준히 유지한다는 뜻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 무엇이 없다면 일관성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 그것을 신념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신념은 어디에서 오는가? 옳다는 믿음에서 오지 않을까? 옳다는 믿음으 어디에서 오는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해보면 결국 일관성은 진리와 연결이 된다.

 

진리라고 생각하기에, 믿기에 일관성을 지니고 살아가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철학은 진리의 문제가 되는데...

 

사람이 태어나서 의식을 갖게 되면서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남에 대한 질문도 하게 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질문도 하게 된다.

 

왜? 왜? 어떻게? 어떻게?

 

그러한 질문들이 앎으로 나아가고 앎은 다시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앎과 행동은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알고도 행하지 않을 때 그를 철학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으니 말이다.

 

참 별거 아닌 거 같은 질문이 별거로 존재하게 되고, 누구나 질문하는 문제가 특정한 사람만이 질문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이다. 우리 교육이 그렇다. 도대체 우리는 철학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던가? 아니 철학을 가르치려고 했던가?

 

철학이 우리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교 교육에서 철학을 너무도 홀대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어쩌면 철학을 홀대했다고 하기보다는 철학을 너무도 위대한 그 무엇으로 인식해서 감히 가르치고 배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철학은 특정한 어떤 뛰어난 사람들만이 하는 학문으로.

 

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갈까? 도대체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를 늘 고민한다. 이것이 철학이다. 좋은 삶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일테고, 그러한 진리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그렇게 살아가려는 노력을 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철학을 서양에 국한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이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동서양의 모든 철학을 아우르는 것은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하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동양철학에 대한 작업, 이슬람 철학에 대한 작업은 다른 사람들이 할 몫이라고 이해하면 이 책은 유럽 중심의 철학에 대해서 명료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책이다.

 

총 스무 명의 철학자가 나온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크레티우스, 스토아학파,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 몽테뉴, 데카르트, 파스칼,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테르, 디드로, 루소, 흄, 칸트, 헤겔, 토크빌, 마르크스, 니체

 

이 중에 마키아벨리와 토크빌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평소에도 철학자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이고, 이 둘도 이 책을 읽어보면 왜 철학자로 다루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철학적 내용은 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으니, 언급은 삼가하고...

 

그들의 생애와 철학을 연결지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한 사람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그를 알기 위한 책 소개와 그와 연결되는 다음 철학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책을 더 쉽게 읽게 하고 있다.

 

철학.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지금도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때 비록 서양철학자에 국한되었지만 그들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안다면 지금 여기서의 우리 고민을 우리 스스로 해결하는데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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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철학 -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사카이 다카시 지음, 김은주 옮김 / 산눈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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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두려움과 함께 한다. 두려움은 공포와 비슷한 감정이라고 한다면 폭력은 이 공포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폭력은 일방향적이 아니다.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폭력이 있으며,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폭력도 있다. 아래로 내려오는 폭력이 지배의 폭력이라면, 위로 올라가는 폭력은 저항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둘 다 폭력이라고 한다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떤 폭력은 정당하고, 어떤 폭력은 정당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여기에 폭력은 무조건 옳지 않다고 하면 이 둘의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고찰해보아야 한다.

 

지배하는 폭력이 단순한 물리력 뿐만이 아니라, 공포를 수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복종하게 한다. 이러한 지배하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또다른 폭력일 수가 없다. 그것은 폭력의 재생산일 뿐이다.

 

그렇다면 저항의 폭력은 비폭력이어야 하는데, 이 비폭력은 무력함이 아니다. 오히려 비폭력은 힘을 바탕으로 한다. 힘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비폭력은 지배층에게 이용당하기만 할 뿐이다.

 

힘을 바탕으로 하는 비폭력, 이것이 역사 속에서 나타난 순간이 있었으니, 그것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종차별 운동, 말콤 엑스의 운동, 간디의 운동 등등이다.

 

이들은 지배의 폭력에 맞서 비폭력의 저항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비폭력은 다른 세상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세상이 가능함을 인식하는 것은 비폭력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러한 비폭력은 현실적으로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게 된다.

 

1부에서 이러한 비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2부나 3부에서는 폭력의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가장 큰 폭력인 전쟁, 이를 전면전과 게릴라전으로 나누고 있으며, 또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도 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폭력에서 벗어나는 길은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상호신뢰로 뭉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결국 공포란 나만이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 또 나 이외의 사람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테다. 하여 저자는 미디어도 비판하고 있다. 미디어들이 사건들을 계속 내보냄으로써 불안감을 조성하고, 이러한 불안감이 폭력에 대해서 관용적인 모습을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배의 폭력은 두려움과 공포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면, 저항의 폭력은 믿음과 사랑을 회복하여 함께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그래서 비폭력 직접행동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그것은 명백하다. 비폭력 직접행동. 나만이 아닌 우리가 함께 하는, 서로가 서로를 믿는 그런 관계의 회복. 그것이 바로 폭력의 철학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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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 깊이 읽기 - 동양의 정치적 상상력
위중 지음, 이은호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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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풀'

 

이것이 이 책의 원래 제목이라고 한다. 바람은 군주이고, 풀은 백성이다.

 

또다른 제목은 '동양의 정치적 상상력'이다. 그만큼 이 책은 '상서'를 읽으면서 정치를 생각한 책이다.

 

상서는 서경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니까, 결국 서경을 통해서 동양의 정치적 사고의 원형을 탐구하는 책이다.

 

상서 50편을 읽으면서 각 편의 내용을 곰곰이 생각하고, 그것을 정치와 연결시킨 독후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정치의 관점으로 읽은 상서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에 상서의 원문이 없다는 사실이다. 글쓴이가 독후감의 형식으로 쓴 글이기에 상서를 읽지 않았으면 그냥 글쓴이의 주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글쓴이가 주장하고 있는 글읽기와 모순된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는 서경을 함께 펼쳐놓고 읽는 것이 좋다.

 

서경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읽기가 곤란하다면(대부분의 사람은 읽을 수가 없다. 과거 경전의 한문은 참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한문 교육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왔다. 옛날 우리나라 책들을 한문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역시 한문으로 된 책은 읽지 못한다. 해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의 해석도 힘든데, 그 글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현실이 슬프다) 한글로 풀이해 놓은 책을 펼쳐 놓고 읽으면 된다.

 

적어도 원문을 알아야 그 원문에 대한 해설을 읽으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 책은 그냥 죽 읽어도 된다. 상서의 순서대로 자신의 감상을 펼치고 있기에 상서가 역사 순으로 편집되어 있어 이 책만을 읽고 이렇게 상서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구나 해도 된다.

 

옛날 동양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구나 하면 된다.

 

하늘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에서, 군주의 힘을 어느 정도 빌린 방백으로, 그러한 방백의 힘을 다시 빌린 제후로 가는 과정이 상서의 정치 권력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제후의 힘이 강성해진 시대가 바로 춘추전국시대이고, 이 상서는 춘추전국시대가 막 시작될 무렵 끝나게 된다.

 

그러므로 상서의 정치적 상상력은 하늘로 대표되는 진리를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명을 받은 사람은 성공해서, 그를 도울 현명한 사람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지만, 현명한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오직 저만을 믿어 제 멋대로 행하는사람은 하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하늘이 다른 사람에게 천명을 주어 그를 멸망시킨다는 내용.

 

한 사람의 성인이 세상을 다스릴 때의 행복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면 갈수록 세상은 혼탁해지는 모습이 상서에 나타나 있다. 이는 이미 세상은 성인 한 명으로는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반증이 아닐까 싶다.

 

나라가 교체되지만 갈수록 성인의 힘은 미약해지고, 그래서 현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갈수록 이러한 현인도 줄어든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현인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다고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세상은 혼란으로 치닫고, 이것이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에 이르게 된다.

 

상고시대에는 법이라는 제도보다는 사람의 덕이 더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면 천명이 작아지는 후세 시대에서는 덕보다는 법과 같은 제도가 더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인들도, 또 노자, 장자, 묵자와 같은 사람들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지 않았을까.

 

이제는 추상적인 도(道)나 덕보다는 눈에 보이는 제도가 더 중시되는 사회가 되었으니, 이러한 고전을 읽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제도에 도나 덕을 담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직까지도 사람을 중시하는 사회가 동양 사회이니, 이것은 이러한 고전의 정치적 상상력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얘기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직도 사람, 사람 하는 그 모습이 우리 동양의 오래 된 전통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고전을 읽는 방법을 알려준 책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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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강설 사서삼경강설 시리즈 6
이기동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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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별 거 아니고, 오히려 진부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젊은시절, 앞만 보고 내달리던 그 시절엔 고전이란 과거의 유물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고전하면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고리타분하고, 웬지 상투를 튼 아저씨들이 공자왈 맹자왈 한다든지, 아니면 현실과는 상관없는 구름 따먹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도 쉽다.

 

또 이제는 스마트한 시대가 되어서 고전은 정말로 고리타분한 옛것,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기념품이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하지만 고전이란, 고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대의 검증을 거쳐 이겨냈다는 이야기다.

 

여러 시대에 걸쳐 수많은 검증을 거쳐 사람들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인정을 받은 것들이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고전은 박물관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 곁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고전이란 예나 지금이나 도덕적인 소리, 옳은 소리라는 인식만을 지니고 그래서 고전을 배운다는 것은 삶의 즐거움을 어느 정도는 포기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고전을 공부함으로써 삶이 더욱 즐겁고 풍요로와질 수 있는데... 마치 요즘 어려운 시대에 인문학 공부의 붐이 일어나듯이 말이다.

 

우연히 서경을 펼쳐들게 되었다. 서경, 4서 5경 중의 하나. 그냥 지식으로만 외우고 있었던 이 책은 그래도 논어나 맹자는 한 번쯤 호기심에서라도 읽어보기라도 하지만 서경은 그냥 책 제목만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서경에 대한 관심은 최근에 "상서 깊이 읽기"란 책에서 비롯됐다. '상서'가 서경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기도 했고, 여기에 나오는 '바람과 풀'의 이야기를 김수영의 '풀'이란 시에 대입한 글을 읽은 적도 있기에 그렇다면 마음 먹고 서경을 한 번 읽어보자 한 것.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이야기다. 이 중에 주나라의 이야기가 가장 길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요, 순, 우, 탕이라는 임금과 주문왕, 주무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냥 왕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천명을 이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주나라까지의 역사를 통해 후세인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책이다.

 

군주와 신하, 백성의 관계를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데...

 

어쩌면 이 책을 지금의 정치가들이 읽는다면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정치란 이래야 한다는 주장이 잘 나타나 있다.

 

공자가 본받고 싶어했던 주공의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결국 주공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정당성을,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또 전 나라인 은나라 신하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이 말들을 통해 정권교체기의 정치가들이 자신이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는 지침으로 삼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경에 나오는 바람과 풀의 비유보다는 당태종이 말했다는 물과 배의 관계가 더 백성과 군주의 역할과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바람이 제대로 불지 않을 때 풀들이 얼마나 힘들지는 바람과 풀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바람에 기뻐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꺾이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는 풀들의 모습, 그러나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다시 자신들이 몸을 꼿꼿이 펴는 풀들.

 

이것이 어찌 옛날의 모습만이겠는가.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서경은 정치가들의 필독서이기도 하겠지만, 나와 같은 일반 국민들이 필독서이기도 하겠단 생각이 든다.

 

바람과 함께 하는 방법을, 또는 바람을 이기는 방법을, 그 바람이 좋은 바람이 되게 하기를 우리 역시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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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 - 행복할 경우 읽지 말 것!
아르튀르 드레퓌스 지음, 이효숙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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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였던가, 치르치르 미치르가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가. 결국 파랑새는 자신들의 곁에 있다는 그 도덕적인, 당연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

 

이 동화를 간단하게 줄이면 행복은 마음 속에 있다가 되고, 이를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원효대사의 한 마디,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가 되고, 의학자인 프랭클의 말로 하면 행복은 의미를 찾는데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깨달음을 얻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인생의 의미, 또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어느 정도 인생을 산 나이 든 사람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네가 뭘 알아? 네가 인생을 살아봤어?"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쓴 사람, 그것도 용감하게 제목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라고 붙인 사람, 또 작은 제목으로 '행복할 경우 읽지 말 것!'이라고 한 사람은 젊은 사람이다. 책에 있는 작가소개에 정확히 나와 있지 않은데, 20대 중반이라고 한다. 책 내용에서 유추하면 기껏해야 25세이다. 25세란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직장도 갖지 못했을 확률이 높은, 그래서 인생경험이나 사회경험이 거의 없다고 여겨지는, 이런 나이대의 사람이 이런 제목의 책을 쓰면 '웃기는 소리'나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는 소리를 듣기 쉬울텐데...

 

인생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아는 것이 나이와 비례하지는 않는데, 또 역사를 살펴보면 큰사상을 이룩한 사람들은 이미 젊은시절에 그것을 이루었는데, 예수도, 부처도 그리 나이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였으니, 나이를 따지지는 말자.

 

그냥 책을 읽으면 된다. 어쩌면 작은 제목은 당연한 말이 된다.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을 이미 행복한 사람이 일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에 눈길이 가고, 손에 드는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일테고, 이들은 지금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책의 도움을 얻으려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책을 읽으며 행복에 대한 답을 얻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읽은 다음 "뭐야, 이거. 도대체 뭔 소릴 한 거야?"할 테다.

 

무슨 철학적인 내용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구체적인 방법론도 없고, 그냥 자신의 일상을 책에 담고 있다.

 

기대했던 "행복론" 또는 이상하게 당위적인 말로 너무도 지당한 말로 행복은 이런 거야 하는 말도 없다.

 

20대 젊은이의 일상이 책에 담겨 있을 뿐이다. 다만 그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불행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

 

요즈음의 생활양태에 맞게 이 책의 전개는 무지 빠르다. 그리고 편제도 보통의 책처럼 글자가 많이 배열되어 있지도 않다. 그림과 글이 적절히 어울리고 있으며, 글은 짧은 편에 속한다.

 

속도감이 느껴진다.

 

20대에 권태를 느끼고 은퇴를 생각하는 친구에게 자살을 이야기한다. 은퇴와 자살이 무엇이 다르냐고 하면서. 어짜피 끝 아니냐고.

 

하지만, 이는 직선적인 사고다. 출발에서 이미 끝을 보고 달리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그러나 출발에서 끝을 볼 수는 없다. 인생은 직선이 아니기 때문이고, 인생은 단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출발하여 끝으로 가는 과정은 숱한 일들로 채워져 있다. 이 일들은 정해져 있지 않다. 많은 경우 우리가 우연이라고 하는 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 우연들에 대해 우리는 그냥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해석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행복에서 멀어진다. 즉, 행복은 인생의 과정이다. 이쪽도 저쪽도 모두 존재하는. 그러한 과정들이 모여 우리는 삶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삶이라는 직업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시간의 뒤를 볼 필요는 없다. 시간의 뒤를 보면 해석이 개입하게 되고, 이는 자책과 후회로 연결되게 된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앞을 보면 된다. 그리고 그 순간에 충실하면 된다.

 

어짜피 출발점은 이미 지났고, 끝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 무수한 일상들 속에 있다. 그리고 이 일상속에서 삶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은 바로 행복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일은 바로 그 순간은 다른 것을 잊고 책에 집중하기에 행복해진다. 행복하게 된다. 또한 이 책을 놓는 순간은 그 순간으로 다 읽었다는 만족감에 행복해 진다. 결국 이 책을 읽었다는 행위 자체가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지 않을 정도로 자신이 행복하기에 역시 행복하다. 참 재미있는 제목이다. 읽거나 읽지 않거나 우리는 모두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한 번 읽어 보자. 무엇이 행복인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책도 있구나 하자.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도 행복이니까... 

 

결국 우리의 일상이 바로 행복이다. 바로 파랑새다. 그 파랑새가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이 있다. 그걸 알아차리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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