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동화 - 설재인의 로봇 동화 다시 쓰기 FoP Classic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정보라 옮김 / 알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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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는 아이들이 읽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릴 때 동화를 읽고 자란다. 아무리 동화를 읽지 않는다고 해도 이야기로는 들었을 것이다. 기억 속에 있는 동화들이 최소한 한두 편은 있는데...


예전 동화에는 잔혹한 내용도 있었다. 또한 특정 인물을 나쁘게 묘사한 부분도 있었고... '계모' 하면 악인이었는데... 그래서 현실에서도 계모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물론 동화에 나온 이야기는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데 겪게 되는 과정들을 이야기로 만들어냈다고 하는 베텔하임의 이론을 만나고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어린 시절 아직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할 때, 주인공을 괴롭히는 인물로 계모가 나오면, 계모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가 없다. 현대처럼 이혼을 하는 가정이 30%가 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이런 동화들은 아이들에게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동화들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하고, 그런 간접 경험이 계모와 실제 생활하는 데서는 좋은 쪽으로 발현이 될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문해력이 걱정되는 요즘 시대에,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고수하는 것은 고려해 봐야 한다.


이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바로 스타니스와프 렘처럼 로봇을 등장인물로 동화를 쓰는 것이다.


그가 쓴 [로봇 동화]에는 로봇들이 등장한다. 로봇이라고 삐걱대는 기계들이 아니다. 인간처럼 또는 인간보다 더 지능이 뛰어난, 감수성 역시 뛰어나고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로봇들이 등장한다.


이런 로봇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에 대해서 겪게 되는 온갖 일들을 간접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즉 내가 실생활에서 겪지 못할 일들을 이런 동화들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고, 이를 다시 현실의 삶으로 갖고 올 수 있게 된다.

 

동화 하면 교훈을 떠올리지만, 교훈보다 먼저 와야 할 것은 재미다. 흥미가 있어야 읽고, 읽어야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생각을 하거나 성찰을 하게 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흥미와 재미. 동화의 기본 요소다. 그렇다면 이 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로봇 동화]는 이 두 가지에 성공했는가? 하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다.


동화라고 하지만, 이 책은 어른들이 읽어야 한다. 우선 과학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물들의 이름에서, 또 그들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어느 정도 과학과 기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이 동화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우리는 굳이 과학적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 작품이 존재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이 없는 아이들에게도 이 동화들이 읽힐 수 있다는 것은, 굳이 이 동화에 나오는 내용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 된다. 이런 광활한 세계, 이런 보이지 않는 세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이 펼쳐내는 다양한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이 동화들은 제 몫을 다하게 된다. 자, 그러면 이 로봇 동화를 읽으면서 현대 과학기술에 어떤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을까?


바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고, 자신을 위해서 만들었지만 자신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내용을 지닌 동화들이 있다. 이 책 후반부에 실려 있는 '세상이 살아남은 이야기, 트루를의 기계'에서 그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점 말고도 인간 세상의 모습을 로봇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 동화들도 꽤 있으니... 천천히 한편 한편 읽어보면 좋겠다.


마지막에 설재인의 <로봇 동화> 다시 쓰기는 '착각과 말로'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다. 로봇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읽다보면 무슨 로봇들을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특히 아이들을 키우는 어른들의 모습이 우리가 비판하는 로봇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솔라리스]와 [이욘 티히의 우주일지], [우주 순양함 무적호]를 읽고 스타니스와프 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이번 [로봇 동화]를 읽으면서 오래 전에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지만, 현대에서도 여전히 유용한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높은 요즘 그의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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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 - 혹은 옛날 옛날 열한 옛날에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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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 신데렐라'에 이어 리베카 솔닛이 쓴 이야기다. 기존에 있던 이야기를 솔닛이 바꿔서 쓴.


이 이야기에서는 '옛날 옛날 한 옛날에'로 시작하지만, 곧 시작 부분을 바꾼다. 한 아이가 있기 위해서는 부모가 있어야 하니, '옛날 옛날 세 옛날에'로 바꾼다. 그러다 과연 이렇게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이루는 존재들은 더 많다. 요정들도 있고, 다른 등장인물도 있고, 하여 솔닛은 '옛날 옛날 열한 옛날에'라고 한다.


이미 시작부터 하나의 이야기는 하나로 끝나지 않고 여러 이야기와 함께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해방자 신데렐라'와 같이 삽화는 아서 래컴의 그림으로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어, 특정 인종을 대변하지 않고 있으니, 그 점도 기억할 만하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를 '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로 바꾸고, 공주도 중세시대의 특권계급인 공주가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동생이 있다고 설정하고, 언니가 잠잘 동안 동생이 활동하는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다.


왕자가 등장해서 공주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공주는 100년이 지나면 자연스레 깨어나게 했으며, 또 왕자 대신 불새로 인해 오게 된 아틀라스라는 인물도 만들어 낸다.


여러 이야기가 합쳐져 이 이야기를 이루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강한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그냥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으며, 갇힌 성에서 나올 때 자신의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나오게 되니, 능동적인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가장 능동적인 존재는 동생인 마야다. 언니가 잠들어 있을 때 나타난 늑대를 그림을 통해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하는 존재. 아틀라스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솔닛은 이야기를 통해서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남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인물들.


홀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인물들. 그리고 남 위에 군림하는 인물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의 힘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솔닛처럼 시대에 맞는 이야기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야기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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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정이현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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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소설이 실렸다. 사랑에 관한 짧은 소설이라는 주제로 정이현이 쓴 '우리가 떠난 해변에'가 있고, 이별에 관한 짧은 소설이라는 주제로 임솔아가 쓴 '쉴 곳'이 있으며,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로 정지돈이 쓴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가 있다.


주제는 분명히 다르다. 사랑과 이별이 다르고, 이별과 죽음이 다르다. 하지만 이 셋은 사람이 겪는 일에 속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 또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에 사랑,이별,죽음은 반드시 있다.


어느 하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이성에 대한 사랑,이별,죽음이든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이별,죽음이든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다.


첫소설인 정이현 소설에는 '사랑'이 세 가지로 나온다. 사랑을 종류로 나눌 수는 없지만, 서술자의 사랑은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한다. 끝난 사랑에서, 다른 사랑을 인터뷰하러 가는데, 그 사랑 역시 끝나가고 있다. 다만, 서술자의 사랑도 그렇지만 한 쪽에서는 사랑을 끝내지 않으려 한다. 더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랑.


그리고 명확히 표현되지 않지만 또 하나의 사랑이 나온다. 인터뷰 할 대상들의 사랑에 감동받은 사람의 사랑.


하지만 사랑의, 마음을 울리는 그 사랑은 지속되지 못한다. 변하게 된다. 변하는 과정 자체도 사랑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인생이 과연 그런가?


좋았던 점이 안 좋은 점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던 점들이 서로를 밀어내는 요소로 작동하지 않는가? 그런 변화까지도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면, 사랑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는다. 서술자가 병원에서 서성거리며 소설이 끝나듯이.


마음을 울리던 사랑, 이제는 덤덤해진 사랑, 여기서 더 나아가 서로를 견딜 수 없게 하는 사랑, 그래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랑. 그러나 그런 사랑이 과연 다른 사랑인가? 나중의 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삶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랑은 어쩌면 이렇게 짧을지도 모른다. 순간 순간 변해가기 때문에... 


임솔아의 소설도 그렇다. 짧은 소설이다. 분명한 이별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많은 이별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의 나와 이별, 내가 알던 사람들과의 이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이별.


함께 살고 있지만 살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 변화를 이별이라고 하자. 관계를 더욱 좋게 만드는 이별도 있지만, 관계를 좋지 않게 변화시키는 이별도 있다. 


소설 속에서는 함께 살지만 너무도 다르게 사는 부부가 나오고, 그들을 가끔 와서 지켜보는 서술자가 있다. 자, 이들은 무엇과 이별해야 하는가? 도시 생활,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견딜 수 없어서 시골로 온 남편과 사람들과 관계맺기를 잘하지 못해서, 오히려 도시 생활에서 일시적인 만남의 기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아내. 그리고 이들에 의해 키워지다시피한 남편의 동생 서술자.

                                                                

하지만 이별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늘상 겪어야 하는 일이다. 소설의 말미에 "걱정 마. 아무렇지도 않아."(70쪽)라는 말처럼, 이별 역시 우리 삶에서 아무렇지도 않아야 한다. 그게 삶이다.


정지돈의 소설은 SF적인 요소가 있다. 물론 최근에 읽은 [죽음의 죽음]이란 책에서 이미 냉동인간에 대해서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이 소설이 꼭 상상에 불과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고 하고 싶다.


세계에서 냉동인간이 있고, 냉동방식이 온몸을 냉동하는 방식과 두뇌(머리)를 냉동하는 방식이 있다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 택하고 있는 방식은 두뇌를 냉동하는 방식이다. 자, 실현불가능한가? 냉동까지는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 실현이 안 되는 일은 냉동에서 부활(? 냉동을 죽음이라고 하면 냉동에서 해동되는 것은 부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과연 냉동인간을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이다.


뇌-의식만을 되살린다면, 과연 그는 살아난 것일까? 또한 그렇게 육체 없이 깨어난(?참 어떤 말을 써야 할지 헷갈린다) 사람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소설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죽음이란 무엇인가? 아니,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소설의 결말이 반전을 이루고 있어서 이 질문이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짧은 내용, 요즘 이루어지고 있는 의과학기술과 관련지어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소설인데...


살면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짤막한 분량에 담고 있는 소설들이다. 길이는 짧지만 생각하도록 하는 깊이는 길고도 깊은 그런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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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 Vol. 1 얼음 SF 보다 1
곽재식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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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소설집니다. 1호니까, 앞으로 2,3호 하는 식으로 공통 주제를 가지고 여러 작가들이 참여를 하겠지.


주로 장르소설이라고 하는 작품들이 실릴테고, 그 주제에 관한 다양한 내용의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재미를 주겠다.


'얼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이 말은 여섯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는 뜻. 여기에 서론과 결론 격의 글이 있으니 총 여덟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여섯 편의 소설은 내용이 다 다르다. '어름'이라고 하지만 이 '얼음'을 가지고 무한 변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곽재식이 쓴 '얼어붙은 이야기'

구병모가 쓴 '채빙'

남유하가 쓴 '얼음을 씹다'

박문영이 쓴 '귓속의 세입자'

연여름이 쓴 '차가운 파수꾼'

천선란이 쓴 '운조를 위한'


'얼어붙은 이야기'에서는 권력의 문제를 생각할 수도 있다. 죽음에 앞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멈춘다는 상상. 시간을 얼리는 거다. 그 시간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택을 하게 한다. 자신의 목숨을 선택하게 한다? 선택은 거의 자명하다. 제 목숨이다. 그런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근데 얼음과 어떻게 관련이 되냐고? 소설에서 얼음 조각처럼 생긴 치명적인 물질이 나온다. 아이스라고... 그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얼리는 일이 소설에 전개되고 있다. 물질적인 얼음이기도 하지만 이는 관계의 얼음이기도 하다. 


불통의 시대가 바로 얼음의 시대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고,


'채빙'은 얼음이 녹으면서 세상에 나온 사람의 이야기인데, 인간들의 탐욕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 다음에 실린 소설은 섬뜩하다. 인육을 먹는 식인이야기가 나오는데, 세상은 온통 얼음으로 덮여 있다.


그렇기에 먹을거리는 없다. 사람들은 죽은 시체를 먹는다. 아니, 죽은 시체를 묻을 수가 없다. 죽은 시체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 살아남을 수 없다. 세상이 각박해지면 사람은 사람을 죽인다.


그런 모습을 이 소설이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무섭다. 가족간에도 신뢰가 형성되지 않는 사회, 그런 디스토피아라니...


이 소설보다는 '귓속의 세입자'는 조금 강도가 약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지 못하는, 너무 한 곳으로 우 몰려다니는 얼음과 정반대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월드컵 축구 경기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러나 그 속에서 서로가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차가운 관계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특정한 시공간에서는 하나처럼 움직이지만 오히려 단단한 얼음 알갱이처럼 서로 붙어 있어도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차가운 파수꾼'은 디스토피아 세계다. '얼음을 씹다'에서 인육을 먹는 세상이 펼쳐지지만, 이 소설에서는 열기로 사람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 펼쳐진다. 그런 열기로 가득찬 세상을 유지해주고 있는 존재, 선샤인이라는 역설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존재.


하지만 그도 세상의 열기 속에서 자신의 차가움을 점점 잃어간다. 이 차가움이 옅어지면 사는 곳은 붕괴하고 만다. 이때 차가움을 계속 유지시켜주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따스함이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희생.


결국 세상을 유지하는 것은 사람들 밑바탕에 깔려 있는 믿음과 희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운조를 위한'은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눈으로 덮인 날 소를 죽인 주인공 운조가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내용.


시공간을 이동하는 내용이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을,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해체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얼음'


차가움을 지니고 있지만 따스함도 지니고 있다. 단단한 고체이기도 하지만, 물렁한 액체가 되기도 한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체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존재가 얼음이다.


같은 얼음이라도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서 긍정적 역할도 부정적 역할도 한다. 물과 공기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은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얼음'이라는 주제도 지금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들은 짤막한 소설이지만, 그 짤막함이 얼음이 우리에게 선득한 느낌을 선사해주듯이 우리 정신에 어떤 자극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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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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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감탄을 하게 된다. 차페크야말로 '혜안(慧眼)'을 지닌 사람이구나 하는.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해체하고 있기도 하지만, 다루는 내용이 공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실 인간 세계에 딱 적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롱뇽. 말을 할 줄 아는, 도구를 다룰 줄 아는 동물. 이런 동물을 이용한다면 인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될까?


괴물로 불리는 이 도롱뇽을 상업으로 이용하는 인간이 등장하고, 도롱뇽들의 우수한 일처리 덕분에 사람들은 도롱뇽을 더욱 이용하게 된다. 인간이 하던 일을 도롱뇽에게 맡기고 (마치 로봇에게 맡기듯이, 이런 내용은 차페크가 쓴 '로섬의 유니버셜 로봇(R.U.R)'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들에게 상어를 퇴치할 수 있는 무기까지 제공한다.


이제 적수가 없는 도롱뇽들은 무한 번식을 한다. 기하급수적으로 자신들의 수를 늘린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도롱뇽에 대해서 위기의식을 갖지 않는다. 당장 편안한 삶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롱뇽들이 무한 번식할 때까지 소설은 다양한 형식으로 전개된다. 신문 기사를 인용하기도 하고, 논문을 인용하기도 하면서, 소설이 기존 글쓰기의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고 하듯 내용이 전개된다.


그러다 이제 자신들이 살 곳이 작아진 도롱뇽들이 인간에게 땅을 요구한다. 인간의 땅을 메워 자신들의 서식지를 넓히겠다는 것. 이때부터 도롱뇽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전쟁, 이것은 '로섬의 유니버셜 로봇(R.U.R)'에서도 나오는 소재다. 그만큼 차페크는 전쟁의 위협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느낀 점을, 소설, 희곡을 통해서 그 과정으로 나아가지 말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인류는 세계전쟁에 휩쓸리게 된다.


다행히(?) 차페크는 전쟁의 심화과정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전쟁은 어김없이 벌어진다. 그리고 인간들은 참패한다. '로섬의 유니버셜 로봇(R.U.R)'에서 로봇들에게 인간들이 참패하듯이.


소설의 마지막에는 이제 도롱뇽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선장을 자본가에게 소개해준 문지기가 후회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사업 구상을 하는 사람에게 자금을 댈 사람을 소개해줬을 뿐이다. 그런데 그 일이 인간의 멸망이라는 결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작은 일이 얼마나 커다란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지, 처음 시작은 개인의 작은 욕심에서 (선장의 진주를 얻겠다는, 진주를 얻는 대가로 도롱뇽들에게 상어를 물리칠 무기 또는 수중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다는, 그는 그 약속을 철저히 잘 지켰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시작된 도롱뇽의 이용이 결국은 인간들의 무한 욕망을 자극하게 되고, 인류의 무한 욕망이 결국 인류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


소설의 끝에 도롱뇽에게 당하는 인간, 하지만 작가가 등장한다. 소설 속에 직접 작가를 등장시켜 작품을 어떻게 쓰라고 하는 장면을 서술하고 있는데... 도롱뇽과 도롱뇽이 전쟁을 하게 한다.


결국 지구에서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소설 창작 당시의 암울한 현실에서 차페크는 어쩌면 전쟁이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1차세계대전을 겪고도 인간들은 2차세계대전을 일으켰으니 말이다. 그런 다음 국제 평화를 위해서 국제연합을 창설했지만, 과연 전쟁이 없어졌는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인간과 인간의 전쟁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전쟁도 지금 벌어지고 있지 않나? 인간의 탐욕이 일으킨 전쟁들 아니던가. 그럼에도 여전히 기술로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차페크가 등장시킨 도롱뇽은 인간이 자연에 가한 행위의 결과가 아닐까? 그 결과를 보여주는 소설이 이미 나와 있는데, 우리는 이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차페크의 혜안에 놀라기만 한다. 이런 소설이 1930년대에 나왔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상력에 감탄하기만 한다. 카프카, 쿤데라에 이어 더 많은 작품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였다.


덧글


로봇이라는 말이 '로섬의 유니버셜 로봇(R.U.R)'에 나온다. 그래서 나도 로봇이라는 말은 이 카렐 차페크가 만들어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희곡은 형 요세프(요제프라고도 한다)와 함께 썼다고 하고, 로봇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은 형 요세프라고 한다. 이 소설 역자 해설에 이렇게 나온다. 명심해야겠다.


'<로봇>이라는 단어의 창시자는 카렐 차페크가 아니라 카렐과 수많은 작품에서 공동 작업을 했던 형 요세프 차페크였다. 카렐 차페크 자신이 옥스퍼드 사전 편집진에게 자필 메모를 보내 정정을  요청한 사안이니 우리로서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419쪽)


이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구절. 주한 체코 대사를 역임했다는 야로슬라프 을샤 주니어가 쓴 작품 해설에도 '차페크와 함께 작품을 집필한 형 요세프 차페크가 만든 단어 <로봇Robot>이 세계적인 고유명사로자리잡았기' (406쪽)이라고 나오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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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10-24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두기만 하고 계속 미루고 있는 책이에요.
살짝 들여다봤는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난이도가 좀 있는 편일까요?

kinye91 2023-10-24 12:58   좋아요 1 | URL
제 생각엔 그리 어렵지 않은 소설이에요... 처음 전개가 낯설어서 그런데 읽으면서 상황이 그려지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