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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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한국어]에 이어 읽은 책이다. 연이어 읽어야 더 잘 이해가 된다. 작가의 삶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급 한국어]가 미국에서 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과정,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나타나 있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이 나와 있다.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니 당연히 한국어는 초급에서 중급으로 올라가야 한다. 즉 글쓰기 실력이 달라진다. 또한 한국에서 주인공은 결혼을 한다. 이제 인생은 원가족과 자신이 살아왔던 것에서 다른 가족과 사람의 결합으로 나아간다. 


역시 이런 삶도 처음이라 초급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홀로 살 때와는 좀 다른 단계로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인생도 이젠 중급에 다다랐다고 하자. 여기에 아이도 태어났으니...


초급인 삶이 중급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른 삶을 보아야 한다. 자신의 삶도 떨어뜨려 놓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방법이 무엇일까? 바로 자서전 쓰기다.


자신의 삶을 글로 써보는 것. 글로 쓰는 순간 자신의 삶을 바깥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내 삶을 바라볼 수 있으니, 이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삶과 또 다른 삶이 겹쳐지게 된다. 자연스레 초급에서 중급 인생으로 넘어간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결혼을 하기 전에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았다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점과 선을 넘어 면이 되는, 어쩌면 입체에 이르는 삶을 살게 된다. 


내 삶에 다른 사람의 삶과 아이의 삶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설은 주인공이 대학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는 내용과 자신의 가족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첩되면서 전개된다. 


글쓰기 강의가 삶과 연결이 되고, 자신의 삶이 글쓰기와도 연결이 된다. 그렇게 소설은 주인공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다른 인생을 보여준다.


그 인생을 통해 우리는 초급 인생에서 중급 인생으로 넘어갈 수 있다. 자서전을 쓰지 않더라도 소설이라는 다른 인생을 통해서 다른 삶을 엿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초급 한국어]에서 작품집을 내지 못했던 주인공이 작품집을 내게 된다. 그의 글쓰기 역시 초급에서 중급으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어쩌면 작가 이력에 나와 있는 작품 제목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작품 제목을 비교하면서 와, 이 작가는 정말 자신의 삶에서 소재를 따와 이렇게 소설을 썼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가령 [체이서]라는 작품은 [체이싱 유]라는 작품으로 나오고, [사자와의 이틀 밤]은 [호랑이와의 하룻밤]으로 나온다. 그래서 작가의 사생활을 엿보는 듯한 느낌도 주기 때문에 더욱 쉽고 편하게 읽히기도 한다.  


아무튼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를 연달아 읽으면 더 소설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따로 따로 읽어도 괜찮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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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13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중급 단계이시군요 ㅋㅋ

kinye91 2024-11-13 16:55   좋아요 1 | URL
하하. 이 중급이 더 재밌더라고요.
 
초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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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처음 살아간다. 모든 이에게 이번 삶은 처음이니, 우리들은 모두 초급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세월이 흐른다고 초급에서 고급이 될까? 잘 모르겠다. 그 나이 때의 경험을 모두 처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하는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세상에, 실패하지 않는 인생이 있을까? 오히려 그 실패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지 않을까.


인생은 모두 초급이지만, 초급들이 쌓이고 쌓여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 그렇지만 초급답게 엉성하기도 하고, 예측을 잘 못하기도 하는, 아는 길임에도 헤맬 때가 있는데, 아예 알지 못하는 길에 들어섰다는 느낌.


소설은 그러한 인생을 빗대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초급에서도 모두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초급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이름은 작가와 같다. 작가와 같은 등장인물이면 너무도 쉽게 작가와 동일시하게 된다. 그것을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누구나 소설의 등장인물이 겪은 일들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작가가 되고 싶어하지만 많은 실패를 하게 되고, 미국에 유학을 왔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으며, 한국어 강사 자리를 얻지만 그것도 계약직이고 다음 계약을 맺지 못하게 되는 주인공. 미국에 있는 학생 20명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만 그들에게 가르치는 한국어는 그야말로 '초급'


여기서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는 내용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삶과 만나게 된다. 낯선 언어를 배울 때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인사말이 아닐까 한다.


인사말. 이는 관계를 맺는 언어이고, 나와 너를 연결시켜 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인간관계의 처음에는 인사말이 등장한다. 언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고... 물론 모어는 엄마, 아빠와 같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 관한 말들부터 배우지만.


초급 한국어에서 배우는 인사말은 "안녕하세요"다. 자, 무엇이 안녕한가? 처음에 주인공은 'welcome'이라는 말 밑에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학생들이 정확한 뜻이 뭐냐고 물어보자, 영어로 번역하면서 'Are you in peace?'라는 말을 쓴다. 이것이 학생들의 웃음을 유발하는데, 학생들은 자신들이 본 영화 '스타워즈'에서 요다가 한 말을 떠올리면서 '평안하냐?'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왜 하필이면 안녕하세요이고, 그것이 영어 peace와 연결이 될까? 평화, 평안? 안녕하세요라는 말에는 그만큼 불안정한 사회의 현실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불안정 속에 던져졌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로의 불안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관계를 맺게 되고, 이것이 평안으로 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 관계를 지나면 이제 다른 말들로 넘어가게 된다. 서로의 안녕을 확인했기에,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것. 이렇게 초급 한국어는 다른 말들로 넘어간다. 그래봤자, 초급이다.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는 과정과 더불어 등장인물이 겪어온 일들이 겹쳐지게 된다.


한 학기 동안 강의하는 과정에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겹쳐지는데... 학창시절, 가족관계, 그리고 유학와서 한 일들 등등.


마지막에 그는 기말시험을 본다. 그리고 그의 미국 생활도 초급으로 끝난다. 그는 재계약이 되지 않았기에 귀국해야 한다. 


귀국하기에 앞서 공항에서 그는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그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나는 내가 사랑했던 모국어의 단어 하나를 영원히 잃었음을 알게 되었다'(182쪽)고 한다. 


그 모국어의 단어 하나는 '엄마'로 추정이 되고, 이제 엄마를 잃었다는 말은 인생이 다른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비록 모든 인생이 초급이라고 할 수 있지만, 10년 단위나 20년 혹은 30년 단위로 끊는다면 초급에서도 다른 단계가 있듯이, 인생도 그렇게 다른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짧게 짧게 끊어지는 장들과 문장들로 인해, 빠르게 읽힌다. 읽기에 속도가 붙는 만큼 주인공이 미국에서 생활하는 기간이 짧음을(3년 정도 머물렀다고 하는데, 인생에서 3년은 짧은 기간이다) 보여주고 있기도 하단 생각이 든다. 여기에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고 배우는데 긴 문장은 소용이 없으니...


이렇게 짧은 초급 한국어, 인생도 초급, 하지만 그 짧음들이 이어지면, 모이면 길어지고, 커다란 덩이가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은 그것이 우리 인생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의 인생에 빗댄다면 초급 한국어는 그가 작가가 되지 못하고 미국에 머둘러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역시 미국에서 가르친 학생들이 초급 한국어에 머물러 있듯이, 자신 역시 글쓰기에서 초급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다른 단계로 갈 차례다.


[중급 한국어]가 나왔던데, 어떻게 이야기가 이어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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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08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 학습지인지 착각할듯요^^

kinye91 2024-11-09 04:5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처음에 책이름만 보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설명 읽고 소설이구나 했죠.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
에두아르도 라고 외 지음, 신미경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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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뇨라는 작가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 흥미를 지니게 되었는데, [부적]을 읽으면서 이 작가 소설 더 읽어도 좋겠단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 볼라뇨에 대한 글을 묶어 놓은 책이 있다고 해서 구입하게 되었는데, 구입할 때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터무니 없이 책값이 싸다는 생각만 했다. 가격에 대해서 더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그의 작품을 읽은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책 뒷표지에 있는 가격을 다시 보니, 어라 가격이 이상하다. 이렇게 1원 단위에서 가격에 책정되는 경우가 있던가. 보통 100원 단위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고, 요즘은 1000원 단위에서 가격을 결정하던데... 책값이 2,666원이라니...


처음엔 이 가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볼라뇨 소설을 읽지 않았으니까. 그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뒤 남겨진 작품이 [2666]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이 [2666]이었으니, 이제는 모를 수가 없다. 볼라뇨를 기념해서 가격도 2,666원으로 정했다는 사실을.


방대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번역도 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직 읽지 않은 사람으로서 볼라뇨 작품 세계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기는 그렇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을 다 읽지는 않아도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볼라뇨라는 작가가 만만한 작가는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 작품만이 아니라 볼라뇨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 여기에 우리나라 사람들 글도 실려 있다. 긴 글들이 아니라 볼라뇨에 관한 짧은 글들이지만 이 글들에서 볼라뇨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시도 썼다는 사실, 그리고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인프라레알리스모(내장 사실주의)'라는 경향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도 있다. 리얼리즘을 넘어서 밑바닥 생활의 모습이나 거리의 언어 등을 날것 그대로 작품에 담겠다는 의도로 쓰인 용어라고 한다.


이렇게 볼라뇨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는 글들이 많다.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엿볼 수도 있고, 그의 작품 세계를 훑을 수도 있으며, 그에 대한 평가, 또 그가 당대 문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글들도 실려 있다.


볼라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책값이 정말 말도 안되게 싸지 않은가. 그의 작품 제목이 [2666]인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 뿐이다.


이 책을 토대로 볼라뇨의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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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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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짧은 소설이 이렇게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니... [맡겨진 소녀]도 그랬지만 이번 소설은 더한 울림을 준다. 아, 아, 아~ 무엇일까? 무엇이 자꾸 소설을 생각하게 할까?


우리 삶이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사소한 것들을 신경쓰지 않고 살아온 것도 사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 알게 모르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그것이 앞으로의 내 삶의 방향을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 그것을 자신은 깨닫지 못하더라도. 또한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행복을 유지해주고 있는 사소한 것들을 잘 모르고 지낸다는 것. 


그러다 어느 한 순간 행복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작은 행복에 더 연연하게 된다. 그것마저 잃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펄롱처럼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22쪽)고 하기 때문이다. 잃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가린다. 귀를 막는다. 입을 다문다.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시민의 삶. 소시민의 행복은 그렇다. 하지만 정말 그런 삶이 행복할까?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게 된 펄롱에게는 그것을 무시하고 가족과의 행복에 안주하느냐 아니면 수녀원 또는 수도원과 척을 지게 되더라도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것을 행하느냐의 갈림길에 선다. 이때 펄롱은 자신을 돌봐주었던 미시즈 윌슨과 네드를 생각하고, 자신의 엄마를 떠올린다. 미혼모였던 엄마를 수녀원에 갇힌 세라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그런 엄마를 받아들여줬던 미시즈 윌슨과 자신을 키워줬던 네드를...


그래서 그는 결국 수녀원에서 세라를 데리고 나온다. 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나중 일이다. 그때 세라를 데리고 나오면서 그가 한 생각이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119쪽)


자, 마음은 가벼워졌다. 비록 그의 앞길에 불행과 어려움이 밀어닥칠지라도, 그는 오히려 행복하다. 왜냐하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21쪽) 고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짧은 소설 안에 펄롱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지금 가족과 지내는 단란한 생활을 펼쳐보이고 있다. 그러한 소소한 행복이 펄롱으로 하여금 세라를 구하게끔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소한 친절, 행복들이 모여서 지금의 그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120쪽) 


이렇게 깨달은 펄롱이 어려움에 처한 세라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앞에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펄롱은 최악의 어려움을 건너갔기 때문에 견뎌낼 것이다. 자신을 이룬 사소한 것들의 행복을 배신할 수 없기에... 


아, 이렇게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 사소한 것들이고, 그런 것들로 인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불행을 무시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왜냐하면 남들도 그러한 사소한 것들, 조그마한 친절이나 도움 등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짧은 소설이다. 제목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지만 알고보면 이 사소한 것들이 바로 우리들의 삶을 만들어낸다. 우리들의 행복을 유지시켜주는 요소들이다. 그러니 사소한 것들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눈, 귀, 입을 지녀야 한다. 무엇보다 그것들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소설은 끝장을 덮으면서 더 큰 울림으로 마음을 울린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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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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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한때는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던 나라. 지금은 미국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경제도 어려워 미국으로 넘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나라. 그런 멕시코에서도 학살이 있었다는 것. 소설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볼라뇨 소설을 읽기 시작하다. 어느 책에선가 볼라뇨란 작가에 대한 소개를 보고 흥미를 갖게 되었는데, 그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소설로 구현해 냈다고 해서 어떤 작품일까 꼭 읽어봐야지 했다.


첫작품으로 [부적]을 읽기로 하다. 멕시코에서 일어난 학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았다. 멕시코 대학에 군대가 진입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체포해갈 때 화장실에 숨어 13일을 버틴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람을 소설에서는 아욱실리오라는 여성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아욱실리오의 생각이 여러 곳으로 뻗쳐 나가는 모습을 소설은 표현하고 있다. 즉 아욱실리오의 독백이 소설의 주를 이룬다. 우루과이 사람인 아욱실리오가 멕시코에 도착해서 겪게 되는 일. 이렇게 라틴아메리카는 특정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라틴아메리카라는 대륙을 공통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공포물이다. 탐정 소설, 누아르 소설, 호러 소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고, 그래서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잔혹한 범죄 이야기다.' (9쪽) 


이미 소설의 시작에서 선언하고 있다. 잔혹한 범죄 이야기라고. 누구의 범죄. 멕시코 독재 정권의 범죄. 1968년 9월에 멕시코 대학에 난입하고, 10월 2일에 학살이 일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은 멕시코에서 벌어진 학살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화장실에 갇힌 아욱실리오가 그곳에서 나올 때까지 시집을 읽으면서, 그 시들을 외우면서 또 화장지에 시들을 쓰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과정. 라틴아메리카의 생활이 생각을 통해서 드러나고, 여기에 칠레에서 일어난 1973년 피노체트의 쿠테타(또다른 9.11이다)까지도 언급이 된다. 이것들이 직접 묘사되지 않고 생각 속에서 펼쳐진다.


그렇지만 그 생각들을 통해 라틴아메리카가 겪고 있던 현실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가 있게 되는데, 독재 정권의 탄압이 바로 잔혹한 범죄가 될 것이고, 그럼에도 문학은, 예술은 부적처럼 사람들을 살아남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내가 들은 노래는 비록 전쟁과 희생당한 라틴 아메리카 젊은 세대 전체의 영웅적인 위업에 관한 것이었지만, 나는 다른 무엇보다 용기와 거울들, 욕망 그리고 쾌락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노래는 우리의 부적이다.' (180쪽)


주인공인 아욱실리오가 환상 속에서 듣는 노래. 끌려가는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 비록 그들은 죽음을 향해 가지만 노래는 살아남아서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미래를 이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문학(예술)은 독재 정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예비하는, 독재 정권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해주는 부적에 해당한다는 것을 소설은 말하고 있다. 문학(예술)을 아무리 죽이려 해도 문학(예술)은 죽지 않음을 아욱실리오의 예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러한 문학(예술)의 부적 역할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 시인 김남주를 떠올렸다. 아니, 자연스럽게 아욱실리오에 겹쳐 김남주가 떠올랐다. 이 소설과 연관지을 수 있는 김남주의 시가 있을까 찾아보다 '시인의 일'이란 시를 만났다.


'수천의 시민을 학살하여 / 양키의 이익을 지켜주고 / 그 대가로 세자책봉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 장군인 너의 일이라면' (김남주, '시인의 일' 1연. 김남주 시집.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년 초판. 304쪽.)으로 시작하는 시.


첫연에서 바로 너의 일은 독재다. 잔혹한 범죄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일이다. 이런 이에게 동조하는 이들도, 찬양하는 이들도 모두 너희들, 그들의 일이다. 결코 시인은 하지 못할 일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일을 할까? 바로 이런 일들로부터 보호해주는 부적 역할을 해야 한다. 


부적은 악으로부터 사람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문학(예술)은 잔혹한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사회를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지켜주지는 못할지라도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아욱실리오처럼 화장실에서 꿋꿋하게 버티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아욱실리오가 화장실에서 시를 읽고, 외우고, 쓰는 일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감옥에서 시를 쓰면서 저항 정신을 잃지 않았던 김남주 시인을 생각하게 된다. 김남주 시인에게도 시는 부적이었다.김남주 시인은 이렇게 시인의 일을 말한다. 바로 '부적'과 같은 일이다. 이 소설에서 아욱실리오가 하는 일이다. 기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 부적은 멈춤이 아니라 전진이다.


'시인인 나의 일은? / 이 자가 저질러놓은 죄악 / 그 하나하나를 파헤쳐 / 만인에게 만인에게 만인에게 고하고 / 일깨워 민중들 일어나 단결하게 하고 / 자유의 신성한 피의 전투에 / 나아가자 나아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노래하는 일.' (김남주, '시인의 일' 마지막 연. 김남주 시집.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년 초판. 305-306쪽.)


하아, 어디 김남주 시인뿐이랴. 이런 '부적'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작품 중에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만이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이 이렇게 아욱실리오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한 '부적' 역할을 하고 있으니, 여전히 우리나라는 독재자들의 잔혹한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전체가 아욱실리오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 그리고 언뜻언뜻 언급되는 멕시코와 칠레의 학살,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는 정신이 소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볼라뇨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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