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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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술라]를 읽었다. 번역으로 읽었으니, 영어 원문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번역문으로도 참 변화무쌍한 문장을 구사하고, 작품의 구조가 특정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하게 이것이다라고 말을 할 수가 없지만, 읽고 나서 마음에 묵직하게 무언가를 남기는 작품이었다. 미국 흑인들의 생활, 역사. (흑인이라는 말을 그냥 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표현보다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흑인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는데, 이번엔 [재즈]다. 재즈가 흑인 음악에서 출발했다고 들었는데, 딱딱한 형식에 갇히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연주하는 음악이 바로 재즈라고 들었는데, 제목만 보고서 흑인 음악에 관련된 이야기인가 보다 착각했다.


읽어보니 재즈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브루스라는 말은 좀 나오기는 하는데, 그렇다면 왜 제목이 재즈일까?


당시 - 이 작품의 배경이 1926년 경이다- 흑인의 삶은 백인에 의해 차별받는 삶이었을 것이다.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지만, 짐 크로법이라든지 해서 흑백분리가 일어났던 시대고, 백인에 의해 흑인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던 때였다.


그런 때 흑인들의 삶은 어땠을까? 비참함, 그것뿐이었을까? 아니다. 그들 역시 백인들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갔다. 즉 삶의 형태는 인종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사랑하고 갈등하고 욕망하고 좌절하고.


누군가 백인의 삶은 이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않듯이 흑인의 삶도 그렇다. 이것이 재즈와 비슷한 점이 아닐까?


삼각관계(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의 반복이 이루어질 것 같지만, 아니다. 변주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통해 서로의 삶을 재정립해 나간다.


도카스-조-바이올렛의 관계에서 펠레스-조-바이올렛의 관계. 얼핏 같은 구조를 지닌 갈등이 나타나고, 비슷한 상황이 전개될 것 같지만, 아니다. 다른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를 작가의 말을 빌리면 '즉흥성, 독창성, 변화, 이 소설은 그러한 특징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특징 자체가 되고자 했다.' (358쪽. 작가의 말에서)고 할 수 있다.


하여 이 소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술자인 나(아마도 작가로 추정할 수 있는)가 나오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재즈는 다음에 어떻게 변주될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다음이 나온다.


마찬가지도 이 소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나'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그 인물들도 자신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다른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수시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술자 또한 수시로 바뀐다. 어떤 때는 조가, 또 다른 곳에서는 바이올렛이, 또 도카스가 그리고 펠리스, 여기에 도카스의 이모인 앨리스 역시 서술자로 등장한다. 이들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다른 인물들이 한 이야기와 중첩되기도 하고, 그 인물들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이렇게 하나가 아닌 여러 구조는 작가가 '이 소설에서는 구조가 의미와 동등할 것이다. 그 시도는 기교를 노출하거나 감추고 규칙들을 넘어서 실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단순히 음악적 배경이나 혹은 음악에 대한 수사적인 언급을 원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음악의 지성, 관능성, 무질서, 다시 말해 그것의 역사, 범위, 그리고 현대성이 현현될 작품을 원했다.' (359-360쪽. 작가의 말에서)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한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을 만나게 된다. 또한 그것들이 모여 소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정해져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이 모여 새로운 길을 만든다.


도시로 온 조와 바이올렛이 겪은 일들에 도카스와 같은 다른 인물이 끼어들고, 이 사건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과거의 사건들이 소환되고 있다. 하여 처음에는 이미 벌어진 사건,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과거 회상의 이야기일지 모른다고... 단순한 구조일 거라는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서술자인 '나'는 '나는 누가 다른 누구를 죽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걸 묘사하기 위해 기다렸다. 사건이 발생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과거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 없이 홈을 따라 끊임없이 돌아야 하는, 이 세상 어떤 힘도 바늘을 붙들고 있는 대를 들어올릴 수 없는, 혹사당하는 레코드와 같다. 나는 그렇게 확신'(337쪽)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재즈는 그러한 변화없는 틀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이 문장은 바로 실재하는 삶은 고정된 삶이 아닌 변화무쌍한 삶임을 깨닫게 한다.


'이제 내가 보는 그들은 미래의 오후 햇살에 윤곽선이 흐릿하게 번진 움직임 없는 묵화가 아니다. 지나간 과거와 미래의 당위 사이에 붙들린 존재가 아니다. 나에게 그들은 실재하는 존재다.' (346쪽)


이미 정해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은, 인생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즉흥적으로 독창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관계 속에서... 그러한 관계가 만들어가는 삶. 그것을 1920년대 흑인들의 삶을 통해서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오랜만에 읽은 토니 모리슨의 소설. 특정 인종의 삶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여러 면을 경험하게 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소설 제목이 된 '재즈'는 소설의 내용, 구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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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아치기'


  먼저 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치기 위해 들어오는 상대에게 펀치를 날리는 일. 


  한 방에 역전하기. 또는 극적인 역적을 바라는 행위일 수도 있다. 당하고만 있을 수 없기에 온 힘을 실은 펀치를 날리는 일.


  적중해야만 한다. 적중하지 않는 순간, 그 다음 나는 상대의 펀치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여 카운터펀치는 힘과 속도, 그리고 정확성이 필요하다. 공격해야 할 때와 방어할 때를 아는 것. 공격해야 할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민첩성, 폭발력. 


삶에서 카운터펀치를 날릴 만큼 위기에 처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디 삶이 뜻대로 되던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공격하는 수많은 것들. 그것들이 나를 툭툭 건드리고 톡톡 치고 때로는 세게 때려 나를 휘청거리게 하지 않던가.


금속도 피로가 쌓이면 깨지게 되는데, 삶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렇다면 더이상 깨질 정도까지 당하지 않도록 카운터펀치를 날려야 한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삶에서 누구나 이런 카운터펀치 한 방쯤은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력하게 당하다 쓰러지기보다는 한 방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삶을 파고들어 나를 점점 줄어들게 만들고 있는 시대에, 나는 내 삶을 위해 한 방을 지녀야 한다.


다만, 그 카운터펀치는 길게 자주 써서는 안 된다. 길면 카운터펀치가 아니라 단순한 공격이고, 자주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 한 방. 아주 짧게. 순간적으로 강한 타격. 그리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카운터펀치 아니겠는가.


김명철 시집을 읽으며, 도대체 제목이 된 시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찾는 것 그만두기로 했다. 그것 역시 시인이 지닌 카운터펀치일 테니.


그러면서 우리가 카운터펀치를 날려야 할 때를 이 시를 읽으면서 찾아야 한다고... 카운터펀치는 기회를 엿보다 날리는 단 한 방이니까. 그렇게 내 삶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 중 쫓아내야 할 것에 날릴 수 있는 카운터펀치. 하나쯤 지니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틈


몸과 마음을 단단히 여며도

당신은 아무도 모르게 습격당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전면적이어서

낮과 밤 뼈와 살을 구분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은행알과

육삼빌딩과 모난 돌과 핸들 꺾인 세발자전거와

지표를 뚫고 올라오는 지하철 탄 사내가 여자가 당신을 습격해온다


빈틈없는 생활

방심하지 않는다 해도

어느 틈엔가 당신에게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틈은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당신은

저항하다 마침내 붙들리고 만다


그 틈으로 당신의 절반이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당신은 마지막 일전을 치를 수도 투항할 수도 없다

틈은 처음에 은밀하게 찾아와서 그러나 나중에는

당신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김명철, 짧게, 카운터펀치. 창비. 2010년. 112-113쪽.


나를 완전하게 장악하기 전에 치를 수 있는 마지막 일전, 그것이 바로 카운터펀치 아니겠는가. 그러한 기회를 놓치면 '완벽하게 장악당'할 수밖에 없다.


방심하지 않아도 나를 파고드는 틈. 그러한 틈을 인식하려고 해야 한다. 내가 다 빠져나가기 전에. 적어도 그 전에 카운터펀치 한 방은 날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기에 이기지는 못해도 종료 소리와 함께 골을 넣는 버저비터와 같이, 그렇게 내가 내뻗은 카운터펀치로 내 삶의 주체가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버저비터'-60, 61쪽- 참조. 시인의 시에서는 버저비터는 성공하지 못하고 말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본다. 시도조차 하지 못하면 더 힘든 삶이 될 테니.


그래서 나는 내게 언제든 뻗을 수 있는 한 방, 카운터펀치를 간직하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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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미 마인 워프 시리즈 8
배리 B. 롱이어 지음, 박상준 옮김 / 허블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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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읽기 시작하자 손에서 놓기 싫어졌다. 그냥 한번에 쭉 다 읽고 만 소설. 중간에 남겨 놓기에는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드는 소설. 그만큼 전개가 빠르고, 다음이 궁금해진다. 여기에 우주의 다른 종족이 적대 관계에서 공존의 관계로 가는 내용도 그렇고.


우주 팽창을 시도하는 지구와 드랙 행성이 전쟁을 한다. 이때 두 행성의 조종사들이 파이린 행성 4호에 불시착한다. 추락이라고 해도 좋고. 두 조종사는 처음엔 적대하지만 그 행성에 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파도의 위험 앞에서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좀더 넓은 땅으로 이동한 뒤에 동굴에 살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함께하는 두 존재.


하지만 드랙인인 쉬간은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아이의 이름은 자미스. 이 자미스를 키우는 지구인 데이비지. 손가락이 셋인 드랙인과 손가락이 다섯인 지구인이 함께 지낸다. 그러면서 서로의 유대를 키워가는데... 우주선을 발견하고, 그 행성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우주선을 찾아가는데... 우주선이 지구나 드랙의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부상을 당한 데이비지는 자미스를 홀로 보낸다. 그리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데이비지는 적응을 하지 못한다. 두 행성은 휴전을 했지만 서로에게 적대적인 감정은 어쩔 수가 없다. 데이비지는 여기서 드랙에 봉사한 인물로 취급받는다. 그러다 결국 자미스를 찾아 떠나는 데이비지. 드랙 행성에 갔지만 자미스는 없다. 지구인을 사랑한다는 죄로 갇혀 지낸다. 자미스 집안의 도움으로 자미스를 데려오고, 데이비지는 다시 파이린 행성 4호 동굴에서 살면서 자미스의 후손들을 돌본다.


내용은 참 단순하다. 그런데 미지의 행성에 불시착한 두 행성의 조종사들이 갈등을 겪다가 화해하는 장면에서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휴먼드라마가 되나? 작가는 낯선 행성에서 적대하는 둘은 쉽게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공동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목표 속에서 둘이 협력하지 않으면 둘 다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이것이 '오월동주'라는 사자성어로도 남아 있지 않은가.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협력할 수밖에 없는 관계.


그런데 이 관계가 길어지면서 변화가 생긴다. 적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이다. 함께한 위험에서 둘은 서로를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언어를 배운다. 물론 지구인인 데이비지는 드랙 행성의 경전인 '탈만'을 읽을 수 있게 되고.


상대의 종교를 상대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함께하는 사이가 양성공유인 드랙인인 쉬간이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다른 행성인을 키우게 된 데이비지. 


이제 이야기는 아이와 데이비지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는 처음부터 우호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 데이비지가 양육자가 되니까. 호기심 많은 자미스는 이것저것 물어본다. 아는 만큼 대답해주는 데이비지. 이때 자미스의 질문이 왜 자신은 손가락이 셋인데 데이비지는 다섯인가이다.


행성의 차이. 다윈의 말로 하면 진화의 결과이리라. 단지 진화의 결과일 뿐, 손가락의 숫자로 우열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 서로의 행성에 맞게 적응했을 뿐, 그러므로 데이비지는 자미스에게 자미스는 자신과는 다른 존재임을 알려준다. 그러면서 서로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장면.


전쟁 중이지만 이 행성은 전쟁과는 상관없다. 자연과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을 극복하면서 유대감을 형성한 자미스와 데이비지. 이들이 우주선을 발견하고 찾아간 다음은 다시 전쟁 상황과 유사하다.


전쟁은 끝났지만 적대감은 여전하다. 전쟁의 상흔은 각자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증오와 분노를 남기게 된다. 여기에 상대를 인정하는 존재들은 배신자 낙인이 찍힌다.


평화로울 것 같은 세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꾸만 자신을 밀어내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지구는 데이비지를, 드랙 행성은 자미스를 밀어낸다. 적을 인정한다는 이유로. 


적을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이제 평화의 시대가 되었는데, 서로 교류를 하는데... 그런 교류를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적대감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소설의 후반부가 보여주고 있다.


다시 적대적인 환경에 놓인 두 사람은 자미스가 어린시절을 보낸 동굴로 가기로 한다. 물론 자미스의 집안도 재산을 모두 처분해 그 행성으로 오고. 여기서 평화롭게 지내는 데이비지.


그렇게 소설은 모두 행복한 생활을 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게 끝난 듯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데이비지나 자미스가 지내는 장소가 지구도, 드랙 행성도 아닌 파이린 4호 행성이라는 점이다.


표면적인 적대 행위는 끝났지만 내면에서 지속되는 적대감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행성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즉, 전쟁으로 인한 상흔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쉬간과 데이비지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장면, 자미스가 전적으로 데이비지를 신뢰하는 장면은 큰 감동을 준다. 이렇게 적대하는 종족 또는 존재들 사이에서도 평화와 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면, 아직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평화와 공존의 길을 가아함을 알 수 있다.


그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그 쉽지 않은 길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뒷부분이다. 두 행성의 전쟁이 휴전을 한 다음에 데이비지가 겪는 일들. 이것은 평화와 공존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단 생각이 든다.


드랙 행성의 경전인 '탈만'을 인용하는 많은 구절들이 나오는데, 이는 우리가 다른 경전들에서 만날 수 있는 구절들이다. 그만큼 모든 종교는 통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길이 꼭 하나만은 아니라는 점, 그 무수한 길들을 인정하고 자신도 자신이 찾은 평화와 공존의 길을 가야함을 '탈만'이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재미와 생각을 둘 다 잡을 수 있는 소설. 왜 이 소설이 발표되자 많은 상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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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5-08-27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드랙이랑 말 안 통하거는 거랑 애 낳는 거까지 보고 일단 덮었거든요. 근데 재밌단 말이죠? 다시 읽으러 갑니다!!! 갑자기 너무 읽고 싶어졌어요. ㅎㅎㅎ

kinye91 2025-08-27 16:27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재미있게 읽었어요.
 
오즈의 양철 나무꾼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12
L. 프랭크 바움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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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모험의 주인공은 양철나무꾼이다. 물론 다른 인물이 나온다. 방랑자 우투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나와 이곳저곳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방랑자.


이 우투가 양철나무꾼을 만나고 허수아비와 같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양철나무꾼이 예전에 결혼을 약속했던 니미 아미를 만나 결혼을 하기 위해서다.


사랑하는 마음을 잃었지만 친절한 심장을 지니고 있던 양철나무꾼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우투로 인해 생겨났는데, 여행을 하다가 유프 부인의 마법에 걸리고 역시 마법에 걸린 폴리크롬을 만나게 된다. 가까스로 탈출한 그들은, 오즈마의 도움으로 마법에서 풀리고, 니미 아미를 찾아 계속 여행을 간다. 여기에 또 흥미로운 인물이 하나 등장하는데, 양철나무꾼과 똑같은 양철인간이 등장한다. 파이터 대위라고, 그 역시 니미 아미와 결혼을 약속한 관계라는 것.


결혼을 약속했으면 지켜야 할까? 결혼에는 친절과 의무가 따르겠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이 둘은 니미 아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자고 하면서 함께 여행을 하는데... 니미 아미는 이미 결혼했다. 그것도 자신들의 예전 몸조각들로 이루어진 인물과.


초프티라는 인물인데, 이 인물을 보면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인간의 신체조각으로 만들어진 인간. 다른 점은 프랑켄슈타인에서 피조물은 만들어지자 마자 버려졌지만, 오즈의 마법사에서 초프티는 자신의 세상을 찾아 스스로 나왔다는 점. 


다른 존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인간의 환상을 이렇게 실현시켜주고 있는데... 이미 행복하게 살고 있는 니미 아미를 괴롭게 할 필요가 있을까?


이들은 깔끔하게 물러난다. 그들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그렇게 이들은 여행을 하면서 서로 돕고 희생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함께함 아니겠는가.


때로는 갈등을 하기도 하지만 더 돈독한 관계가 되는 것, 자신을 위하기도 하지만 상대를 위해 희생하기도 하는 것. 상대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 되는 것. 이러한 연대가 바로 우정이다.


우정은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으니, 모험을 통해서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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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몸으로
김초엽 외 지음, 김이삭 옮김 / 래빗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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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여성 작가 여섯 명이 세 가지 주제로 소설을 썼다. 주제를 셋이라 했지만, 이는 3부로 나뉘었기 때문이고, 실질적인 주제는 하나다. 바로 '몸'


우리 몸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고 있는 소설들인데, 3부는 각각 '기억하는 몸, 조우하는 몸, 불가능한 몸'으로 되어 있다.


'몸'에 대해 이야기는 하는 것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우리 인간은 몸만으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정신만으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을 움직이는 작용을 하는 것이 뇌라고 해서, 뇌만 보존하고 작동하게 한다면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대로 몸은 있는데 정신이 없다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순간순간만을 살아간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몸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 속의 몸은 과연 인간인가? 첫소설 김초엽이 쓴 '달고 미지근한 슬픔'에서 양봉을 하는 단하는 자신을 찾아온 규은의 질문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26쪽)라고 말한다. 이 답이 이상하다. 단하는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물리적 몸이 없는. 그래서 통속의 뇌조차 도지 못하는 부유하는 데이터에 불과해.'(30쪽)라는 그들의 존재에서도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 존재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몸은 무엇인가? 데이터가 실재하는 몸과 같은가?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서 혼란에 빠지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이런 세계에서도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을 그들은 찾아나선다.


데이터의 집합은 실재하지 않는가? 아니, 데이터의 집합이라는 실재가 있는 것 아닌가. 우리 인간을 나중에 데이터로 분해하고, 그것들을 다시 재조합하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연결이 된다.


결말에서 단하는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슬픔.'(66쪽)을 느끼는데, 이는 인간의 확장형에 대한 고민과 연결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김초엽이 김원영과 함께 슨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나타난 고민들과도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데이터의 집합이 아니라 늘 새로운 신경조직을 재조직하고 과거를 잊는 인간은 어떤가? 과거를 기억할 수 없게 되는 인간, 시간이 지나면 뇌가 재조직되기에 언어조차도 자신이 있는 사회의 언어를 익히고 그전의 언어는 잊는 인간.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인간의 정의에는 '지속성'이 전제되어 있지 않을까. 즉 사회적 관계라는 말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기억을 통한 유대관계의 형성이 전제되어 있을 텐데...


순간만 있고, 기억은 없으니 과거가 없는 인간에게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순간순간 존재하는 곳의 필요성에만 맞춘다면 그것은 과연 어떨까? 저우원이 쓴 '내일의 환영, 어제의 후광'은 그런 점을 생각하게 한다.


'언어'가 바로 기억과 지속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주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흥미로운 관점의 소설이었다.


2부에 실린 소설들은 '윤회'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물론 SF작품으로 안드로이드가 죽음을 만나는 장면을 쓴 김청귤의 '네, 죽고 싶어요'는 인간의 유한성, 그것이 축복임을 생각하게 한다. 죽음이 없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을까?


안드로이드로 수리만 잘하면 죽음과는 상관없을 존재도 인간처럼 유한한 세상에서 사랑하고 사랑받고 결국은 죽음으로 소멸하려는 마음을 지니게 되는, 우리의 유한성이 지닌 행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인데... 


청징보가 쓴 '난꽃의 역사'는 전통 소설의 기이담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윤회가 분명하게 드러난 소설. 그러나 단순한 윤회가 아니라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특정 시기로 돌아갈 수 있는 시대가 설정되어 있다.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부모를 만난다. 그러나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우리가 많이 보는 시간 여행 소설(영화)들이 과거에 개입하기도 하는데, 이 소설은 과거에 돌아가 지금의 현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시간 여행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바꾼다면,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몸은 무엇인가? 과거의 몸이 나인가, 현재의 몸이 나인가. 과거의 몸이 지금의 나로 꾸준히 성장하면서 변화해온 과정, 삶이 몸에 쌓이는 과정 없는 내 몸은 과연 내 몸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내 몸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윤회'도 '시간 여행'도 아닌 그런 소설.


3부에 나오는 몸들은 불가능한 몸인데, 이는 우리가 이런 몸을 지니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이다.


천선란이 쓴 '철의 기록'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이 결국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고통에 대한 감각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 낸다. 그러한 몸이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통이 전혀 없는 몸. 그런 몸을 지향하지만, 고통이 없다면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삶이라는 말리 죽음 때문에 더욱 의미를 지니듯이, 행복 역시 고통으로 인해 더 크게 다가오는데... 인간의 몸에서 통증 또 정신에서 고통을 느끼는 마음을 제거한다면 그런 세상이 과연 좋은 세상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고통을 감각이라고 하면 감각을 잃은 몸이 인간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그러한 감각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감각을 잃은 몸을 '빼앗겼던, 죽여야 했던 몸'(258쪽)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몸을 되찾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우리들 삶에 수많은 감각들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함을 생각하게 하는데... 이러한 감각들을 서로 공유하고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점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왕칸위가 쓴 '옥 다듬기'다. 머리에 칩을 심으면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상대와 내가 감정을 서로 공유할 수 있다는 옥. 또 그러한 감정을 잘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옥. 하지만 이것은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또한 칩으로 인해 우리의 감정을 통제한다는 것이, 서로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일까? 소설에서는 다양한 부작용이 나오고, 그것들이 지닌 문제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인류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아가겠지.


지금 인공지능이 학습을 통해서 인간의 수준과 비슷한 어쩌면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인공지능에 인간의 감정까지 담을 수 있다면, 이 감정들을 서로 공유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 인간은 무엇인가?


그러한 칩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몸이 과연 지금 인간의 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바라는 우리의 몸은 어떤 것인가?


총 3부로 나뉘어 우리 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집인데, 지금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더 많이 논의가 되어야 하는 문제이지 않을까 한다. 이제는 단지 '사이보그'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내 몸의 주체가 바로 나라는 생각을 지니고 살아왔던 인간에게 당신 몸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들... 어쩌면 그런 세상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지도, 그래서 단순히 소설 속 상황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좀 섬뜩하긴 하지만....


이런 점에서 좋은 소설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읽기에 편했고, 읽는 재미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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