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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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발표 시기와 지면에 따라 내용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전체적으로 통하는 무엇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읽으면서 그 무엇을 찾는 일이 읽기를 더 재미있게 한다.


읽는 사람마다 '그 무엇'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내게 이 소설집에서 찾을 수 있는 '그 무엇'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가는 경계'다.


첫소설에서도 그렇다. 물론 천선란 소설이 SF소설이라는 평을 듣는 만큼 외계생명체의 존재나,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과는 다른 존재들이 등장하지만, 그런 존재들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를 인식하게 해주는 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즉, SF소설 자체가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과 공상의 경계라고 하면 허황된다는 느낌을 주니까,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라고 하면 좋을 듯하다. 


처음에 실린 '흰 밤과 푸른 달'에서는 바로 지구를 떠나는 존재들이 나온다. 다른 생명체와 싸우기 위해 더욱 강하게 진화(?)된 인물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지구인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외계 생명체가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지만, 외계 생명체가 없는 지구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된 이들에게 선택지는 외계로 나가는 것이다.


자, 이들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가야 한다. 자발적이든 강요가 되었든 이들은 다른 세계를 향해 갈 수밖에 없다. 지구에 사는 우리들이 지구 밖으로 눈을 돌리는 일... 그런데 지구가 살 수 없어진다면, 당연히 우주로 가야 한다.


지금도 환경, 생태 문제로 지구가 견딜 수 없게 된다면? 하고 화성으로 이주를 꿈꾸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우주로 날아가는 새'라는 소설을 보면 지구를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이미 인간에 의해서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던 새들과 연결지어, 작가는 인간 역시도 그렇게 우주로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푸른 점'이라는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연상시키는 소설. 그러나 태양계를 벗어나는 보이저호에서 보내온 사진은 푸른 점(지구)는 없다.


소설에서는 지구는 이미 푸른 점이 아닌 보이지 않는 행성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푸른 점이어야 한다. 즉, 진실보다 믿음이 중요하다(106쪽)는 인물의 말처럼, 사람은 믿음을 잃지 않아야 살아갈 동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갈 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다. 바로 자신들의 믿음을 공유하는 것. 그런 믿음의 공유가 인간들을 지구가 아닌 다른 우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여전히 우주에서 지구와 같은 행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듯이. 또 지구와 다른 행성에서도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듯이.


우주라는 공간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 내부에서도 가능하다. 공간이 아니라 인간에게서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자, 무엇이 그 사람을 결정하는가? 내가 나임을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나와 남의 경계는 무엇인가? 또 남이 내가 될 수 있는 경계는 무엇인가? 


작가는 '기억'을 말하고 있다. '옥수수밭과 형'이란 소설에서 '사람은 다른데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이란 주인공의 질문에 형은 '그래도 같은 사람이지.'(117쪽)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소설 속의 나는 여러 형을 만난다. 물론 여러 형을 동시에 만나지는 못한다. 같은 기억을 지니고 있는 형은 순차적으로 내게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그 형들은 내게는 형이 된다.


같은 사람인데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으면?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옥수수밭과 형'에서는 다른 인물들이 모두 형이 되는 남이 내가 되는 문이 열렸다고 한다면, '제, 재'라는 소설에서는 내가 남이 되는 문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육체 안에 있는 다른 기억을 지니고 살아가는 '제와 재'. 이들은 같은 인물일까? '제'에게는 '재'는 다른 사람일 뿐이다. 즉 제의 세계와 재의 세계는 다른다. 그렇지만 이들은 한 몸에 있다. 이 세계와 저 세계가 한 몸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


이를 좀더 확장한 소설이 '두 세계'라는 소설이다. 소설 속 인물이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자신을 옥죄고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 세계가 아니다. 아예 다른 세계, 즉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고 싶어한다. 어떻게 해야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그 문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단절이다. 이 세계의 끝남. 그런데 이 세계의 끝남이 완전한 끝이 아님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소설은 본래 인물이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는 배에 타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설의 결말이 죽음으로 끝난다. 그 세계에서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아예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해야 하는 일...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전혀 다른 시공간에 나타나게 된다. 다른 존재의 몸을 빌려서. 그렇다면 이 세계에 있는 존재는 또 어떤가? 다른 세계, 즉 밖을 꿈꾸는 인물들은 죽음으로 다른 세계로 간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굳이 육체적인 죽음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세계의 종교들이 대부분 거듭남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저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를 넘는 과정을 거치는 과정이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천선란은 소설을 통해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다른 세계를 잇는 존재는 이 세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 세계에 발을 딛고 있으면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소설 제목은 '노랜드'다.


'두 세계'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근무하는 곳이 '노랜드'인데 땅이 아니다 또는 땅이 없다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곳. 이곳에서는 현실의 땅이 아닌 소설 속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것을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라고 한다면, 이 세계에 착 발붙이고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 떠 있는 존재들이 나와야 한다. 그렇게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떠 있는 존재들이고, 이런 존재들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 소설들이 흥미진진하다. 재미도 있고, 무언가를 생각할 수도 있게 하고...작가의 말에서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듯 가끔은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으리라 믿으며 두 번째 소설집을 엮어 당신께 보낸다'(418쪽)고 하고 있다.


사랑을 하고 싶어,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는다는 말에 동의한다. 물론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소설에 나타나는 삶들을 내 삶들과 연결지으면, 소설은 결국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경계'라고 할 수 있으니...


이쪽 저쪽을 다 살필 수 있는 소설. 지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가는 일이 될테니... 이런 경계의 체험, 새로운 문을 발견하는 일은 지치기도 하지만, 그 지침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있으니...


작가의 말처럼 소설을 읽자. 이 소설은 작가가 말한 세 가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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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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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집이다.


주인공들은 대체로 젊은이들이다. 대체로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방광, 나의 지구'에 등장하는 인물은 중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젊은이가 겪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을 대변한다.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날 그날 먹고 살기 바쁜, 자신의 미래를 점치기 힘든 그런 사람들.


미래를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라고 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고통이 미래에도 계속 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미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현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좌절한다.


집을 구하기도 힘들고, 결혼을 하기도 힘들며, 가족들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놓인 젊은이들이 이 소설집에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아주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지도 않는다.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기에는 그런 삶이 만연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래가 불투명할지라도 그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너희 미래는 없어!'라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고단한 삶일지라도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소설집의 제목이 된 소설 '젊은 근희의 행진'을 봐도 그렇다. 요즘 추세에 맞게 유튜브 방송을 하는 근희. 그런 근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문희. 하지만 문희가 아무리 못마땅하게 여기더라도 근희는 근희의 생활이 있다.


이 점을 근희의 편지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잣대로 평가하지 말라는, 그런 평가는 편견으로 이루어지고 더욱 강화될 뿐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아달라는 근희의 편지. 그것이 바로 기성세대의 눈으로 청년들을 평가하지 말라는 의미다.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의 관점(그것이 옳다고 여기면서 젊은이들의 행동을 잘못되었다고 재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을 고수하면서 젊은이들에게 훈계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훈계는 훈계가 아니라 잔소리, 또는 꼰대짓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삶을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만큼 이 소설집에서는 200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잘 그려지고 있다. 그런 젊은이들의 모습, 힘들지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기성세대들이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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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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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우리나라 고등법원에서 위안부 피해 배상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2차소송 항소심이라고 하는데, 일본이 피해 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이상하다. 아직까지도 이런 재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재판 결과가 나왔음에도 일본은 배상을 하지 않고 있고, 일본이 해야 할 배상을 우리나라 정부가 기금을 걷어 보상을 하겠다고 하기도 하니, 도대체 누가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우리나라 정부도 책임이 있다. 비록 이 정부 들어 일어난 일이 아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럼에도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조선을 잇는 나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부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배상을 하는 것과 달리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아내려는 노력을 정부가 해야 한다. 피해당사자들, 또는 시민사회단체에 맡길 일이 아니다. 정부가 나 몰라라 하는 모습은 책임 방기라고 할 수 있다. 미래 운운하면서 과거를 지우는 일을 하려는 정부는 국민의 정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니 재판부가 피해자들에게 일본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게 한다. 정부가 일본 정부에 배상을 하라고 할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재판부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계속 모르쇠로 나올 테고, 우리나라 정부 역시 일본 정부에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럴 때 김숨의 소설을 읽었다. [한 명]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들이 한명 한명 돌아가시고, 이제 한 명만 남은 상황. 그런 상황이라는 뉴스를 본 할머니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등록된 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면 위안부의 피해 상황을 증언할, 피해배상을 청구할 분들이 없어져, 없던 일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 비록 정부에 등록을 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을 수 있다. 소설은 그 점을 보여준다.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할머니.


할머니는 한 명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삶을 회상하게 된다.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 온갖 험한 일을 겪었던 자신의 삶. 자신의 이름을 잃고 일본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그곳을 벗어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던 그 시절을.


어려운 시절을 겪어왔지만, 자신의 잘못도 아니지만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살아온 세월들. 지우려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고, 잊으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그 참혹한 과거들을 현재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할머니.


최후로 남은 한 명을 만나러 가면서 소설은 끝난다. 그렇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한 명이 돌아가셨다고 해도 역사의 증언은 끝나지 않는다. 한 명은 또 다른 한 명이 나타남으로써 역사의 증언을 계속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명 속에는 우리 역사가, 수많은 위안부들의 삶이 들어 있다. 그래서 한 명은 한 명이 아니다. 위안부 모두가 되고, 우리 역사가 된다. 우리가 절대로 외면해서는 안 되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소설은 전개된다. 과거의 비극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풍길이라는, 소설의 끝부분에서 한 명을 만나러 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할머니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는 결코 한 명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그렇게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책임을 묻게 된다. 아무리 책임을 회피하려 해도 회피할 수가 없다. 그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과거를 묻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소리는 말이 안 된다. 과거는 미래로 가기 위한 발판이다. 결코 과거를 지워서는 안 된다. 과거는 미래가 실현되었던 현재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한 명]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소설과 더불어 영화 [귀향]을 보면 좋겠다. 이 소설을 영상으로 표현한 것이 영화 [귀향]이라고 할 수 있을테니... 여기에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에서 발간한 [60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기다림]도 읽으면 좋다.


60년, 이제 70년이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기다리도록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기다림의 의지조차도 일본 정부가 아니라 우리 정부가 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한 편의 소설이 이렇게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한 명의 사람이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 한 명은 한 명이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서 그 일을 겪었던 모두가 된다. 소설 역시 우리 역사의 일부가 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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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채집가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5
로이스 로리 지음, 김옥수 옮김 / 비룡소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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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으로 태어난다.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주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공동체가 있다.


장애인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죽게 내버려야 한다. 그것으로 끝이다. 사회에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그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소설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지워진 시대. 권력자들에 의해 사회가 운영되는 사회. 키라는 엄마를 잃는다. 엄마가 죽은 뒤, 키라의 집은 불태워졌으며, 키라는 공동체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런데 위원회에서 키라를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불러들인다. 키라의 재주가 수놓고 염색하는 재주가 그들의 통치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해에 한 번 노래를 통해서 그들의 과거를 들려주는 행사를 하는데,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지팡이와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른다. 공동체의 역사에 대해서, 파멸과 재건에 대해서.


그런 의식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가 셋이 있다. 지팡이를 만드는 사람, 옷을 수선하는 사람,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


이들은 어릴 적에 가족을 잃고 불려와 살게 된다. 집에서 쫓겨나 죽음에 이르게 된 지경에 처한 키라는 위원회를 자신의 은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지내면서 무언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노래를 부르는 조는 자기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 오직 그들이 필요로 하는 노래만 연습하게 된다. 


목수 재질을 지닌 토마는 자기가 만들고 싶은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원회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 수리를 하게 된다. 어릴 적 자신을 감싸고 있는 영감이 떠나가는 것을 느끼는 토마.


키라 역시 마찬가지다. 수를 자신이 놓고 싶은, 손이 가는 대로 하지 못하고, 가수의 의상을 수선하는 일에 온 시간을 보내게 된다.


먹고 자고 지내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지만, 이들은 시키는 일을 하는 존재로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들과 반대로 어린 아이인 맷은 자유롭게 생활한다. 얼핏 부랑아로 느껴질 정도로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맷은 키라를 위해 파랑을 채집하기 위해 떠난다.


누구도 가지 말라고 했던 마을의 경계 너머로. 그 너머에서 맷은 키라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아버지와 함께 파랑을 가지고 온다. 키라가 살던 마을에서는 결코 만들 수 없었던 파랑을.


그리고 키라는 어느 정도 진실을 깨닫게 된다. 진실을 깨달은 키라가 선택하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묘미다.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남아 진실을 알리고, 미래를 만들어가려고 하는 키라. 그렇다. 회피하지 않는다. 비록 절름발이로 태어났지만 키라는 누구보다도 세상을 똑바로 걸어가려고 한다.


파랑 채집가라는 소설은 획일화된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면서 주어진 대로만 하라고 하면 암울하다. 


적어도 노래하고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 키라와 토마는 이를 예술가라고 지칭했는데, 이런 예술가들에게 자유는 절대적이다.


자유를 빼앗긴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할 수 없다. 이는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키라가 목격한 가수의 쇠사슬은 자유를 잃은,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밖에 할 수 없는 예술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키라는 이를 거부한다.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 세상이 온전해 보이지만 겉으로 장애가 있는 자신보다도 더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옷을 통해서 미래를 바꿔가겠다는 결심을 한다.


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또 다른 존재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있다. 존재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기준에 닿지 못하면 없애야 한다고 하는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 잘 돌아가는 유토피아 같지만, 실상은 디스토피아에 불과하다.


권력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사회. 그런 사회는 자신들의 치부를 꽁꽁 감추어둔다. 겉으로는 원활하게 잘 돌아가는 사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하지만 그렇다도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 무언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부족함을 때우기 위해 아직 어린 아이들을 자신들의 수하로 거둬 이용하려 하지만,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들은 아직 왜곡된 시선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키라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부족함이 도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으로 인해서 다른 면에서는 넘쳐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소설은 어린 키라를 통해서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지, 또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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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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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이다. 그렇게 분류한다. 하지만 그런 분류가 무색하게, 이 소설은 정서를 다루고 있다. 그것도 로봇을 주인공으로 해서.


로봇에게도 감정이 있을까? 로봇은 입력된 값만을 출력한다고 하지만, 아니다. 로봇들도 입력된 값을 넘어서 출력을 할 때도 있지 않은가. 즉, 입력한 대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자구를 파괴해, 거의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죽고 사막만 남은 상태. 함께 지내던 인간 랑이 죽자, 로봇 고고는 길을 떠난다.


과거로 가는 땅을 찾아 간다. 랑과 함게 지내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서. 이미 자신과 함께 하던 존재가 죽었는데도, 자꾸만 고장난 영상처럼 함께 지냈던 때가 떠오른다고 로봇 고고는 말한다.


어떤 일일 있을 때마다 떠올리는 랑과의 일들. 그것은 바로 랑의 부재를 충만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랑은 곁에 없지만 영상을 통해서 고고와 함께 한다. 그리고 고고를 삭막한 사막을 넘어 과거로 가는 땅으로 향하게 한다.


랑의 죽음으로 랑과 알고 지내던 지카는 바다로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고고는 거부한다. 고고는 랑과 함께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인간 버진을 만나 고쳐준다. 인간들에 의해서 예언자로 대우받던 버진. 그러나 그런 종교인에게도 지구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없다. 그 역시 고고와 함께 할 수 없다. 고고는 계속 길을 떠난다. 이미 떠난 랑과 함께 하기 위해.


사막을 여행하는 고고는 다른 로봇을 만난다. 알아이아이라고 하는 로봇, 트랙터로 사막에 길을 내는 로봇이다. 자신의 주인이 맡인 일을 하기 위해 망가지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는 로봇. 그러나 사막에 길을 내기는 힘들다. 힘들지만 알아이아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냥 일을 할 뿐이다. 자신의 주인이 올 때까지.


알아이아이가 일을 하는 방식은 곧 주인과 함께 하는 방식이다. 고고에게 영상으로 랑이 계속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알아이아이에게 고고는 자신의 팔을 하나 떼어준다. 길을 제대로 내게 하기 위해서. 알아이아이와 헤어진 고고는 다시 길을 떠나다 사막의 폭풍에 휩쓸린다. 그러다 외계 생명체인 살리를 만난다.


살리가 자신을 고칠 수 있다는 점을 알지만 고고는 살리를 따라가지 않는다. 고쳐짐이 목적이 아니라 랑과 함께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고고는 기억의 땅으로 간다. 그 곳에서 랑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결국 고고가 하는 여정에서 깨닫는 것은 자신에게도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있다는 것. 그것을 인간의 관점에서만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면 그것이 바로 감정이고 정서가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고고가 만나는 네 인물, 지카-버진-알아이아이-살리.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고고는 함께 했던 랑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예전의 고고가 아니라 감정이 있는 로봇 고고로.


네 인물을 도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카는 새로운 문명을 찾아 떠나는 인류가 될 테고, 버진은 길 잃은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종교적 믿음을 상징하고, 알아이아이는 과학기술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하려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지구는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는데ㅡ 이때 외계가 등장한다. 지구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답은 그곳에 있지 않다. 바로 자신에게 있다. 그러므로 고고는 사막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오히려 사막에 있는 과거로 가는 땅으로 간다. 과거로 가는 땅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잇는 땅이고, 그것은 부재를 충만으로 채우는 장소가 된다.


사막을 통과해가면서 다른 존재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고고는 성장해 간다. 그 성장이 인간이 통상 말하는 성장과 같지는 않지만,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니 이는 분명한 성장이다. 


무척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고고가 로봇이 아니라 바로 성장하고자 하는 우리들이라고 여기니 더더욱 재미있는 그런 소설. 부재, 비어 있음이 채움, 충만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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