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없는 세계에서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김주영 지음 / 우리학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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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기후 위기가 기후 재앙으로 넘어가고 있다. 해마다 겪게 되는 기후 재앙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지만, 여기에 대한 대응책은 서류에 그치고 말 뿐이다. 그나마 서로 합의된 사항도 정작 지켜야 할 나라들이 지키지 않고 있는 현실이고.


처음에는 발전이 덜 된 나라에서 피해가 더 심해지겠지. 그리고 이것이 점점 퍼져나가겠지. 그렇게 되면 지구에 인간을 위한 환경이 파괴되고,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 되겠지. 하긴 누군가는 화성으로 이주하면 된다고 하고 또 어떤 누군가는 바다에 자신의 피난처를 만들면 된다고 하니...


같은 재앙이라도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지금처럼 지속되는 성장 우선주의, 특히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사회는 극복할 수 없는 재난으로 다가올 것이다. 지구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럼에도 지구는 살아남겠지. 이 지구라는 별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까. (아, 신이 인간을 위해서 지구를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통하지 않겠지만) 


자, 우리 인간을 지구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존재들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식물이다. 식물이 없으면 인간은 방독면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라. 방독면을 쓰고, 나무들이 독을 뿜어대는 그런 환경을.... 이것 역시 인간이 초래한 결과다. 그렇지만 이렇게 인간이 초래한 결과를 바꾸려 하는 존재 역시 인간이다.


이 소설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식물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죽였다고 자책하는 이언이라는 아이로부터.


환경이 파괴되고, 땅에서는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 온실 속에서 또는 수경 재배로 식물이 근근이 자랄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 식물을 자라게 하는 일은 사람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학교에서도 그런 교육을 하고 있고.


이런 재난 상황에서도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놓고도 의견이 갈라지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약탈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도 있다.


소설은 이런 환경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어떻게 해야 식물 없는 세계에서 식물 있는 세계로 갈 것인가? 다시 땅에서 식물이 자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대립하던 것처럼 보이는 집단들이 실제적으로는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식물이 자라게 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지니고 있고, 그런 목표를 실천하는 방법을 꼭 하나로 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으로, 함께 협력하는 것으로 소설은 전개되고 있는데...


이런 과정 속에서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하던 주인공을 중심으로 식물을 잘 키우는 능력을 지닌 두 인물과 이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두 할머니가 등장한다.


각자가 자신들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식물을 자라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이, 약탈자들의 위협이 다가오고, 결국 약탈자들의 침입을 받은 그 공동체는 자신들의 수확물을 모두 빼앗기고 만다. 엄청난 재난 상황이다.


재난 상황에서 좌절하고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더 나아갈 것인가? 소설은 약탈자들의 침입에 대비한 두 집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의 방식이 다르지만 재난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는 둘 다 도움이 됨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재난 상황에서 협동하는 모습을 통해 재난 민주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의 잘못을 탓하고 네 탓이요, 네 탓이요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현명하게 해결할까를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재난 민주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희망의 싹이 돋아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고 있는데... 소설 속 재난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면 소설 속 상황이 현실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되겠지만.


앞이 예측될 때 준비를 해야 한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그 준비가 무엇일까? 우리 역시 식물을 심고 있지 않은가. 지구는 푸른 별이니 물의 푸름만이 아니라 식물의 푸름도 지구의 푸름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희망을 주는 소설. 특히 청소년이 주인공이 되어 그들이 살아갈 사회를 이끌어가려는 모습... 그렇게 이 소설은 희망을, 우리들에게 푸른 씨앗을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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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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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왜 '암스테르담'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전개다. 도대체 암스테르담은 언제 나오는 거야? 그러다 끝부분에 가면 아, 이래서 제목이 암스테르담이구나 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이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장소가 암스테르담이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남에 의해서.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파국을 향해 달리면서도 그것이 자신들이 파멸로 가는 길임을 알지 못한다.


그냥 자신들의 일에 취해 있을 뿐이다. 즉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자신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데, 자신들의 그러한 허상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제대로 보인다. 오로지 자신들이 보지 못할 뿐이다.


한 여인의 죽음으로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드러난다. 죽은 여인의 숨겨진 애인들 셋과 그 여인의 법적 남편.


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할까. 자신의 허상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역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죽은 여인인 몰리의 애인이기도 한 정치인을(가머니) 파멸시키려는 편집국장 바먼과 위대한 음악가라고 착각하고 사는(사실은 어느 정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과연 그의 음악적 재능이 현실과 동떨어져서 발휘될까 하는 점은 소설을 읽어가면서 그가 현실 세계와 부딪히는 장면에서 재능이 허상이고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클라이브, 그리고 외무장관까지 올라간 정치인 가머니가 그들이다.


가머니의 성적 취향이 드러나면서 이들의 관계를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왜 가머니의 성적 취향이 문제가 될까? 그의 성적 취향과 정치적 활동은 별개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도 버넌은 그러한 관점을 취하지 못한다. 그는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이 정치인으로서 훌륭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신문을 통해 폭로하려 한다. 


물론 신문 발행부수를 올리려는 목적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몰리의 애인이라는 점에서 질투심도 작동하고... 그렇다면 그가 정치인은 공인이라고 생각하고,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사생활에서도 책임이 있다고 여긴다면, 자신이 그러한 가십거리를 기사로 내보내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것이 그가 파멸하게 되는 이유다.


클라이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악상을 위해 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것을 무시하려고 한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문제와 동떨어져 있다는 발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그의 그러한 점을 경찰서에서 범인을 지목하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버넌과 클라이브는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게 되면서 죽음을 이끌어내게 된다. 마찬가지로 가머니 역시 사퇴하게 되고...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이것이 몰리의 남편인 조지의 음모가 작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부인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의 허상이 현실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제공한 사진이 세 사람을 모두 파멸로 이끌게 되니, 결국 승자는 조지다. 이렇게 소설은 처음에 친구들의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그 관계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또 겉으로는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상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모습이 드러난다.


겉으로만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위기 상황이 되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된다. 이것이 바로 소설이 보여주는 점이다. 위선으로 만들어진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음을...


결말까지 가야 작중 인물들의 모습과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하기 힘든데, 후반부로 갈수록 소설의 윤곽이 잡히면서 더욱 흥미로워진다. 


그러면서 과연 내가 추구하는 삶, 내가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떤지 생각해 보게 된다. 허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형식적인 관계로 남들과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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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문학 선집 1 - 1898년~1920년대 중반 여성문학의 탄생 한국 여성문학 선집 1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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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여성문학의 탄생이라고 했지만, 사실 여성문학은 예전에도 있었다. 알려진 것만 해도 조선시대에 한시를 쓴 사람부터 가사 작품에는 여성이 쓴 작품들이 꽤 있었으니, 근대 여성문학의 탄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여성문학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여성이라는 자각을 담은 문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조선시대 문학에도 여성의 자의식을 담은, 여성이라서 겪는 어려움을 표현한 작품들이 꽤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남녀평등이라는 개념이 사회에서 통용이 되고, 실현이 되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으니,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등장으로 이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것들이 서서히 여성들도 할 수 있는 일로 인식되고, 또 실제로 한 여성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책은 한국 여성문학 선집 7권 중에 첫번째 권이다. 근대 들어 여성들을 중심에 놓는 글쓰기를 다루고 있다. 처음부터 여성문학이라고 하지만 이 책에는 주장하는 글도 있고, 잡지의 창간사도 실렸다. 물론 소설과 시, 희곡도 실렸으니...


통상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라고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이 1917년에 나왔는데, 여기에 결코 뒤처지지 않게 여성문학도 나왔다. 즉 근대 들어서는 남성과 여성의 활동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문학에 여성들이 뒤늦게 참여한 것이 아니라 근대문학에는 남녀가 거의 동시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성의 참여가 동시성이 있다고 해도 인정을 동등하게 받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단적인 예가 바로 김동인의 [김연실전]이다. 여기서 김동인은 당시 신여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비꼬고 있는데, 그만큼 여성들은 근대 들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비슷한 시기에 작품 활동을 했더라도 편견을 지닌 시각으로 판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편견을 딛고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 있다. 이 책에서 다룬 김일엽, 김명순, 나혜석이 바로 그들이다. 나혜석이 쓴 [경희]만 하더라도 1918년에 쓰였다. 이는 [무정]과 별 차이가 나지 않게 발표되었다는 점이고, 여기서 신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경희의 고민과 결단이 잘 드러나 있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동등한 인간이라고... 남성 여성이기 전에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이들은 자신들의 글에서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으로 독립이 되어야 하나, 물질적 독립 이전에 먼저 정신적으로 독립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주체로 설 수 있는 마음, 정신을 지녀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각종 단체를 세우고, 다양한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김일엽이 쓴 '우리 신여자(新女子)의 요구와 주장'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믿습니다. 정신상의 굴복은 물질상의 굴복에 반(伴-따르는)하는 것임을. 그러기에 완전히 정신상의 자유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또 물질상의 자유를 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질적 자유의 욕구는 먼저 정신적 자유의 동경으로 우리의 두뇌 중에 나타나는 것이로소이다. 그리고 열렬한 정신적 자유의 동경이 있은 연후에 진실한 물질적 자유의 욕구가 생기는 것이올시다. 하므로 우리는 신시대의 신여자로 모든 전설적, 인습적, 보수적, 반동적인 일정의 구사상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234쪽)


이러한 사상을 작품에 담아 활동하기 시작하는 때, 바로 근대다. 그리고 이 근대에 자신들의 문학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이 등장했다. 개화기(애국계몽기)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무슨무슨 '소사(召史)'로 나오는 여성들이 있지만 곧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종속된 존재가 아닌 주체적인 존재로 서게 되었다는 의미고, 아직은 물질적 독립을 이루기 힘든 시기이기는 하지만 독립된 생활을 해야만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각이 일어난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독립하려고 해도 앞선 여성들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그러한 여성들을 과거의 여성으로만 보려고 하는 남성들도 많고... 이런 현실이 김명순의 희곡 [두 애인]에 잘 나와 있다. 


같은 여성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동경했던 남성들에게는 버림받은 신여성의 모습. 그러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려는 모습이 이 희곡에 잘 나와 있다. 이제 이러한 여성들은 사회에서 당당한 주체로 서게 된다. 그 다음 시대에... 하여 1930년대에 가면 우리 문학사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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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폭격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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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나? 제목이 맛집 폭격이라 경쾌하게 진행이 되는 소설이고, 음식과 관련이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읽으면서 그건 아니다라는 생각. 오히려 사회소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맛집과 폭격을 연결지어서 생각하게 하는 소설.


전면적인 전쟁까지는 가지 않았다. 서로 미사일을 쏘아 폭격하고 있는 수준이다.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 이런 대응을 고민하는 조직으로 에스컬레이션 이원회가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듯이 폭격도 이런 수준의 대응을 하는 조직. 한번에 비약하지 않고 서로가 용납할 수 있는 수준까지 벌이는 폭격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맛집들이 폭격된다. 폭격 목표로는 별로 쓸모가 없는 곳인데, 그냥 무작위 폭격이었고, 거기에 우연히 맛집들이 속했다고 하면 될 일인데 무언가 이상하다.


주인공 민소의 사적인 경험과 얽힌 맛집들이 폭격 당한 것. 그렇다면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 소설은 민소가 폭격의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과 그와 같이 합류한 윤희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결말까지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폭격으로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고, 그런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들에 의해서 폭격은 멈추지 않는다. 자신들의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에. 


하지만 에스컬레이트로만 폭격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 더 강한 폭격이 일어날 수 있다. 그때면 전쟁이다. 이제는 작은 일에서 시작한 것이 전쟁으로 번진다. 국민들의 안위, 그것은 안중에 없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면 될 뿐.


이상하게 낯익은 이야기 아닌가? 죽어나가는 것은 국민들이지만 위에 있는 힘 있는 자들은 오히려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거기다 별것 아닌 아주 사소한 갈등이 전면적인 전쟁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는 현실이...


그런 과정을 소설은 맛집 폭격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민소와 윤희나가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순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럼에도 결말은 보여주지 않는다. 무언가 더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만 짐작하게 할 뿐이다.


결국 작은 일에서 시작한 폭격이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지고, 이렇게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 파국으로 치닫게 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정부고,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 국민들은 살 터전을 잃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격을 작가가 예상하고 있지는 못했겠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이나 레바논에 미사일을 날리고, 반대로 하마스나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을 날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런 모습은 정부(헤즈볼라나 하마스도 일종의 정부라고 보면)가 어느 정도 통제를 하고 있어서 부분적인 폭격으로 끝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정부는 끄떡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 소설에 나오는 정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전쟁으로까지 확대하지 말고도 이 소설은 작은 일이 큰일이 되는 과정을 우리 정치에 비춰보면 된다. 이 소설에 거울상이 나오는데, 이는 같은 존재라는 말이다. 즉 너는 나의 거울이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힘과 속도를 조절해서 대응을 해야 한다. 에스컬레이션 위원회처럼 어느 정도 대응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실천해야 하는데... 


어느 순간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강력한 대응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고 만다. 그렇게 되면 파국이다. 되돌릴 수 없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소설에서는 에스컬레이션 위원회지만 이 위원회가 소설 속에서 과연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들도 정부의 조직 중 하나에 불과하다. 결국 결정은 권력자가 내리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조직의 의견을 무시하다가는 소설에서처럼 파국이 일어날 수 있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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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배명훈 지음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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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이라는 책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100명으로 축소해놓고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분류를 한 책이었다. 이렇게 축소를 해 놓고 보면 우리 세계의 분포를 쉽게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는데...


배명훈의 [타워]는 오래 전에 나온 소설이다. 2009년에 출간이 되었는데, 2020년에 새로운 신판이 나왔다. 나는 구판으로 읽었지만, 목차를 살펴보니 달라진 것이 없으니, 구할 수 있는 책으로 읽으면 될 듯하다. 물론 내용을 개작했는지는 살펴보지 못했다. 최인훈 작가 같은 경우는 [광장]을 수차례 개작했는데...


개작 여부를 떠나서 구판을 읽어도 지금 현실을 대입할 수가 있다. 이럴 수가.. 이 소설집이 SF소설로 분류가 되니, 다른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소설이 시대를 넘어 계속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6편의 단편소설이 묶여 있다. 다 '빈스토크'라는 타워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빈스토크가 무엇인가?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하늘까지 솟은 콩줄기에서 따온 이름으로, 674층 높이에 50만 인구가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 타워에 대한 설명을 좀더 보자.


첫작품인 '동원 박사 세 사람-개를 포함한 경우'에 나오는데, '1층부터 12층까지는 층 구분이 없는 커다란 정원이었다. 그 위로는 백화점이나 쇼핑몰, 영화관 같은 상업 시설이 21층까지 이어졌는데 거기까지는 외국인도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중간지대이면서 또한 비무장지대였다. 그리고 22층에서 25층까지가 경비실 구역이었는데 말하자면 빈스토크 육군 이천이백 명 중 이천여 명이 주둔한 국경지대인 동시에 여섯 개의 출입국 사무소가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30쪽)라고 설명이 된다.


26층부터 여러 시설들이 있는데, 각 층이 수평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없고, 다양한 높낮이로 건설되어 있어서, 엘리베이터가 꼭대기층까지 한 번에 올라갈 수는 없다고 한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면서 연결이 되니, 각 층은 빈스토크라는 한 국가에 속한 지역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이 [타워]에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축소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 중에서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정치와 노동, 사상이 이 소설에 나타나고 있는데...


권력의 위선, 노동자들의 힘든 삶, 윗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일하는 중간 관리자들의 모습, 시위와 시위를 진압하는 사람들, 다른 나라와의 전쟁 또는 갈등, 비정규직 문제 등등이 이 이 [타워]에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소설 [타워]는 우리 사회를 한 건물로 축소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읽으면서 우리 현실을 계속 반추하게 되는데, 꼭 우리나라만이 아니라도 이 지구를 축소해놓은 모습까지도 발견하게 되니, 특히 '서리아에 부합하는'이라는 소설이 그렇다.


지금까지도 종교로 인한 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종교가 아니더라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있으며, 비정규직들은 죽음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주해 가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도 만만치 않으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점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럼에도 [타워]에는 사랑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사랑으로, 상대에 대한 인정, 존중으로 함께하고 있음을 이 소설집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데... 자살폭탄테러를 연상하게 하는 '샤리아에 부합하는'이라는 소설에서도 이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작동을 한다.


마찬가지로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인간의 사랑이 서로를 결속시켜주고 결국 삶을 지속하게 해줄 수 있음을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에서도, '엘리베이터 기동연습'에서도 만나게 된다.


그렇다.'빈스토크'처럼 외부와 차단된 건물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온기가 되어주고 있음을, 그것이 그들을 무너져버린 바벨탑이 아닌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임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이 빈스토크를 우리나라로, 또 지구로 확장을 하자. 확장을 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권력? 돈?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자신의 온기를 나누어주는 삶. 그런 자세들이다. 그것이 우리를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게 한다.


삭막할 것만 같았던 [타워]의 삶이 따스한 인간의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이다. 사랑은 별 것 아니다. 자신의 온기를 남에게 조금 나누어주는 것. 아니 자신의 온기와 다른 사람의 온기가 함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 온기를 나눌 줄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권력의 정점에 서는 사회는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이미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사회, 그것이 사랑이고 자비, 인(仁)이 아니겠는가.


SF소설이라는 이 [타워]를 통해, 아니 소설 속 '빈스토크' 사람들을 통해 이 온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부록에 실린 '엘리베이터 기동연습'에 나오는 책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는, '카페 빈스토킹-[520층 연구] 서문 중에서'를 꼭 읽자.


온기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우리는 그런 장소를 갖고 있는지, 그런 장소의 상실이 우리를 온기 잃은 인간으로, 즉 삭막한 인간으로 만들어내고 있음을 명심하자. 이건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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