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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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책을 고른 이유는 단 하나다. 한강 작품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강 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작품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빅이슈]를 읽으면서 그곳에서 소개한 한강 작품이었기에 구해 읽게 된 것.


물론 황순원이라는 작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이기도 했고, 교과서에서 그의 '소나기'와 '학'은 물론이고 '목넘이 마을의 개, 독짓는 늙은이' 또는 '움직이는 성' 등도 알았고, 읽은 적이 있으니, 황순원 작가의 이름을 단 문학상을 탄 작품이라면 하는 믿음도 있었다.


읽은 소감은 당연히 좋았다다. 그리고 수록된 작품들도 좋았고. 어느 하나 그냥 넘길 수 없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물론 단편 소설이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경우가 많아, 내가 그 작품을 읽었던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읽는 순간과 읽은 뒤에 내 마음에 남아 나를 이루는 한 요소가 되어 있다고 믿고 있으니.


한강 작품은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이다. 이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은 순간일 수 있다. 사실 눈 한 송이는 금방 녹는다. 아주 짧은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녹아버린다. 그렇지만 그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이 아주 길어질 수 있다. 안 녹는다고 느낄 정도로...


제목만으로는 순간인지 영겁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 인생을 순간이라고 보기도 하고, 아주 긴 시간이라고 보기도 하니 말이다.


소설에는 영혼이 등장한다.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 그 영혼은 맑은 영혼이다. 원망을 하는 영혼이 아니라 세상을 잘살고 간 영혼이다. 그런데 세상을 잘살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소설은 바로 '잘살다'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결혼을 하면 퇴직을 하게 하는 회사. 결혼을 해도 버티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나가게 만드는 회사. 그것을 바라보는 동료들.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닐 수 있다. 선명한 악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회사를 설립한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면 되지만, 그는 그 회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료들이 나올 뿐이다. 동료라고 하지만 사건을 대하는 자세는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같은 사건이란 없다. 모두가 자신의 처지에서 다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여기서 과연 '잘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 삶이 있을까?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남을 배려하는 삶. 그러나 그 배려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또 과연 그 배려를 남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을 삶을 살아갈 뿐. 그것이 '잘산다'는 의미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한 사람, 잘살려고 한 사람은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한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용납하기 힘들다. 사고든 질병이든 그들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떠난 사람을 추모하면서 우리는 '잘살았다'는 말을 하게 된다.


자, 이들이 잘살았던 기간은 짧았는가, 아니면 길었는가?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그들은 잘살기 위해서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졌을 테고, 그 시간은 무척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을 한 다음에는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행동의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 지니는 시간은 어떠할까? 그들을 보는 시간이 짧을수록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을 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그냥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잠깐 생각하고 잊어버리지 않을까. 


반대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는 시간이 긴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의 삶에 대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는 시간, 행동으로 나아가려는 시간, 그러는 시간 동안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은 무척 긴 시간이 될 것이다.


해결이 안 되었으므로, 아직도 진행 중이므로, 그러한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 동안은 괴롭고 힘들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시간. 나에게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생각을 한다.


다른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이 되면 하고,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한강의 작품을 계속 음미하련다. 이 작품도 한강의 다른 작품들처럼 마음에 남아 쉽사리 나가지 않는다. 자꾸 곱씹게 만든다. 이것이 문학의 효용성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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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콜하스 창비세계문학 1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황종민 옮김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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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집이다. 모르던 작가였는데, 관심도 없었고, 오에겐자부로의 소설을 읽다가 이 작가의 '미하엘 콜하스'라는 작품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민중반란... 


역시 좋은 작가는 다른 작품을 소개하고, 읽게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구입해 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읽고 싶은 마음이 없던 소설이었는데... 작년 겨울과 올 겨울, 유난히 춥다. 날씨가 아니라 마음이... 마음을 더욱 춥게 하는 존재들이 있고, 그런 마음을 녹여주는 존재들이 있기에 이제는 읽어야지 하고 읽기 시작.


여러 작품이 실려 있는데, 반전이 일어나는 작품도 많고, 인간의 본성을 하나로 정리할 수 없다는 내용을 주는 소설도 있지만, 제목이 된 소설 '미하엘 콜하스'가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허균이 쓴 '호민론'이 생각났으니... 그냥 불만을 품고만 있으면 원민에 불과한데, 불만조차 없는 항민은 말해 무엇하랴마는, 원민이 생기면 호민이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된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 하는 질문에 딱 어느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대 속에서 영웅이 탄생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격동하는 시대에,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이니까.


콜하스 역시 마찬가지다. 영주의 터무니없는 횡포. 그러나 그는 우선 참는다. 아니 참을 수밖에 없다. 아직은 힘없는 백성 아닌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규정대로 하려고 한다. 하지만 힘없는 백성은 규정대로 해도 당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하인이 매를 맞고 쫓겨나고, 맡겨두었던 말은 비루먹은 말이 되어 있었으니... 배상을 요청해도 끄덕없는 상태. 그 역시 속절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기서 멈출 수는 없다. 부당함. 이것을 그냥 넘어갔을 때는 더 힘든 탄압이 이루어지니까. 항의를 하려고 한다. 우선 제도에 맞는 항의를 한다. 아내가 탄원서를 가지고 가지만, 부상을 입은 아내는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제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


콜하스는 더 참지 않는다. 참아서는 안 된다. 그는 무장봉기를 한다. 처음에는 소수다. 하지만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성을 점령하고 불을 지르고... 권력자들은 공포에 떨게 된다.


여기까지, 성공이라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파괴가 아니다. 정당한 대우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손해 배상을 하면 그는 더이상 폭력을 행사할 생각이 없다. 이것이 민중들의 정서다. 하지만 언제 힘있는 자들이 사과를 하고 잘못을 스스로 바로잡은 적이 있던가.


계속되는 갈등 속에서 그는 루터를 찾아간다. 그가 믿는 종교 지도자. 하지만 여기서 종교의 민낯이 드러난다. 루터는 오히려 콜하스를 야단친다. 그럼에도 콜하스는 루터를 통해 지배층과 타협을 하려고 한다.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기만 하면 무장을 해제하고, 재판을 받겠다는 것.


그 과정에서 콜하스는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권력자들의 위선, 그들이 민중들을 대하는 태도 등이 소설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 정의로운 민중의 대표자인 콜하스. 그를 호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민중들의 지지를 얻는 과정이 이를 잘 드러낸다.


소설은 콜하스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콜하스의 자손들은 잘 살게 되었으며, 권력자들의 말로가 별로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소설의 결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실패한 듯이 보이는 민중봉기가 민중들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이러한 각성된 민중들을 예전과는 같이 대할 수 없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는데...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모습을 보이는 지배층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은 결국 민중들에 의해 폭로가 되고, 까발려진 그들의 본모습으로 인해 그들은 예전과 같은 권력을 행사할 수 없음을 소설은 보여준다.


결국 권력은 민중으로부터 나옴을, 콜하스라는 말장수를 통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 시대는 한두 명의 호민이 아니라, 국민들이, 시민들이 모두 호민인 사회여야 하고, 그런 사회에서는 지배층이 독단적으로 군림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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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1-27 0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에 겐자부로 때문에 이 책을 샀어요.

kinye91 2025-01-26 23:50   좋아요 1 | URL
그래요. 저랑 같군요. 좋은 작가는 줗은 작품을 이어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2024 오월문학총서 1 : 시 2024 오월문학총서 1
오월문학총서간행위원회 엮음 / 문학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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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광주민주화운동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숱한 거짓말 속에서 진실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입 다물라고 윽박지르던 시절. 그런 시절이 지난 다음에는 당신들 덕분에 민주화 되었다고, 감사하다고, 헌법에 그 정신을 기록하겠다고 말을 번지르하게 하더니, 없던 일로 해버리는 엄청난 말 솜씨들.


말, 말, 말... 진실에서 벗어난 그 말들이 사람들 가슴을 후벼파고 있는데... 어쩌면 그 말들을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정치인들... 그런 정치인... 여기 시에 나오는 정치인일 수도 있다.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정치인. 제 말을 필요에 따라 요리조리 바꾸는 정치인.


'간간 TV에 나와 / 좋은 말 자발자발 잘하던 정치인 / 5·18광주민주화항쟁을 / 헌법 전문에 넣겠다고 한 대선 공약은 / 호남표 의식한 선거용이었다는 말 / 뱉었다 속내 들켜버린 뒤 / 황급히 그 입으로 / 그 말 철회한다고 다시 썰 풀지만,' (박철영, '5월을 생각하며' 중에서. 오월문학총서1, 시. 문학들.2024년. 313쪽)


선거용이 따로 있지, 희생으로 민주화를 이룬 그 운동을 자신의 표를 얻는데 이용해 먹다니.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효용성이 없어졌다고 그런 말을 실천에 옮길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한 정치인. 


정치는 말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했는데,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정치인들이 판치는 세상은 과연 정치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생각나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비상계엄이라니.... 도대체 2000년대에 비상계엄이라니... 국가가 비상사태에 이르렀다는 판단, 누구의 판단? 자신의 정치권력이 위태로워지니 그것이 비상사태?


그러면서 여전히 자신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집단들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인데... 왜 이 난리냐고 하는 뻔뻔함.


그에 부화뇌동하는 집단들. 정치인들. 말이 바로 서지 않은 사회에서 비뚤어진 말들, 자신의 이권만을 챙기는 말들만 난무하는 세상. 그런 세상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다.


그래서 광주민주화운동이 더 생각이 났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여전히 진행 중임을 깨닫고... 그러다가 이 시, 에고, 무슨 전두환의 환생인지, 단어만 몇 개 바꾸면 똑같은 논리겠구나, 이들은 양심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양심이 없는 것이구나, 확신범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설마 이 시를 곧이곧대로 믿고, 옳습니다 하는 그 정도의 문해력을 자랑하는 사람은 없겠지... 없어야겠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왜 자꾸 그런 생각이 들까?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역사를 또 반복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이제 그러한 과거는 과감하게 끊어내야 하지 않을까. 죄에 걸맞는 처벌을 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래야 다시 이런 말을 하는 족속과 비슷한 자들이 정치를 하는 일이 없겠지.


학살자의 시점 - 이창윤


"이거 왜 이래" /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반란이자 폭동이었어 / 당시 헬기 사격은 없었고 / 광주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도 않았어 / 나는 발단부터 종결까지 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어 / 살인 진압 발포 명령자가 아니야//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 왜 나만 갖고 그래 / 나는 보안사령관으로서 폭동을 진압했을 뿐이야 / 계엄군이 발포하고 대검으로 광주 시민을 무참히 살해했다니 / 이게 말이나 돼? / 군사반란과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 죄목으로 / 내게 사형을 선고한 건 / 가당치 않은 판결이었어 / 결국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특별사면되었잖아//


혹자는 말한다지 / 단죄되지 않은 악은 계속 되살아난다고 / 5·18 망언의 덫은 2019년에도 극우정치의 제물이 되어 / 역사의 발목을 비튼다고 / 반란수괴 전두환 / 발포명령자 전두환 / 학살자 전두환//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민주주의의 아버지 / 대한민국을 수호하려 했던 애국자며 영웅이라고 우겨댈 거야 //


수천 번 죽어도 씻을 수 없는 / 피비린내의 참혹한 과오를 향해 / 무수한 돌팔매 날아들지라도


273-274쪽.


햐, 이거 단어 몇 개만 바꾸면 누가 한 말과 비슷하지 않나? 끼리끼리라고 참 잘 통하지 않나. 양심이 아예 없는 확신범들이 정치를 한답시고 나섰을 때 겪게 되는 일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이 모양이니, 이름을 바로잡겠다던 공자의 말은 말을 바로세워야 한다는 성인들의 말은 이들에게 절대로 가닿지 않은 말들일 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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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창녀의 노래 - 송기원 소설선집 송기원의 시와 소설 3
송기원 지음, 진형준 해설 / 살림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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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송기원 작가의 부음을 들었다. 1947년 7월 1일에 태어나 2024년 7월 31일에 세상을 떠난 작가. 내 젊은 시절, 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인도에 갔다는 얘기도 들려오고, 그 다음의 작품들은 내게는 관심 밖이었는데...


그럼에도 젊은 시절에 읽었던 작가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작품을 하나쯤은 곁에 두고 싶었다. 그의 작품 역시 지금의 나를 만드는 한 요소였기에.


어떤 책을 살까 하다가 읽어본 기억이 없는 제목인 '늙은 창녀의 노래'를 선택했다. 사실 지금은 어떤 작품을 읽었고 어떤 작품을 읽지 않았는지 가물가물하고, 구분도 잘 되지 않지만, 이 작품은 아주 생소하게 다가왔으니 분명 읽지 않았으리라.


'월행'이나 '아름다운 얼굴'은 읽은 기억이 있는데, 내용은 잘 생각이 나지 않고, 그래서 읽기로 하고 구입한 소설집.


읽으면서 역시 송기원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읽었던 소설과는 다른 울림을 준다고나 할까. 특히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상처를 입은 인물들이 나온다. 그 상처를 어떻게든 떨쳐내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일. 결국 상처를 받아들이게 되는,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는 과정이 드러난 소설들이 실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상처일까? 시대의 아픔으로 인한 상처도 있을 것이고, 가족사로 인한 상처도 있을 것이고, 그밖에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처가 자신을 한 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부끄러움. 그것을 감추고 싶지만, 잘 안 될 때, 사람은 위악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 해설에서는 그것을 상처와 자기혐오라고 하는데, 혐오라는 말이 강한 부정의 뜻을 지니고 있다면 부끄러움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혐오하는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혐오는 결국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감추려고만 하면 그것이 상처가 되고, 그러한 상처가 자기 혐오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때 나타나는 것은 위악이다. 위악으로 똘똘 뭉친 사람. 강하게 나가지만 한없이 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런 인물들이다. 위악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러나 상처로 인해 자신 속으로 꽁꽁 숨어버리려 하는 인물들.


이런 인물들이 결국은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이 소설에 잘 드러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상처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다시 월문리에서'이고, '사람의 향기'이며 이 소설집의 제목이 된 '늙은 창녀의 노래'다. 


끝까지 가 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심연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발견하는 것.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로 표현한 송기원.


어쩌면 이들의 삶은, 아니 '늙은 창녀의 노래'에 나오는 늙은 창녀의 삶은 진흙 속의 연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밑바닥 인생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작가. 그 작가가 바로 송기원이다.


말이 필요없다. 읽어보면 안다. 사람을 끝없이 끌어내리는 상처가 그 상처로 인해 다시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도 있음을. 정말 오랜만에 읽은 송기원 소설. 


끝이 끝이 아님을, 끝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집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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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페스토 Manifesto - ChatGPT와의 협업으로 완성한 'SF 앤솔러지'
김달영 외 지음 / 네오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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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지피티. 이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인공지능. 사람들은 거부하지 못하리라. 왜냐? 편리하니까. 그런데 이 편리함이 우리의 불편함을 없애준다는 장점을 넘어,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불편함을 참지 못한다는 말을 조금 바꾸면 길게 생각하기를 싫어한다는 뜻이 될 테니, 생각을 하지 않음은 그냥 빠르게 빠르게 주어진 대로 결정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주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편리함이 과연 우리를 좋은 쪽으로만 이끌어갈까?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모든 정보가 한 곳에 집중이 되고, 언제든지 돈만 내면 그런 정보를 받아보고, 그것도 내가 검색하지 않고 몇 명령어만 치면 컴퓨터가 검색해서 알려주는 시대에, 그 정보에 대한 판단을 어떻게 하지? 판단도 인공지능에 맡기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인공지능이 대부분 영어로 작동이 된다면?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언어들이 많은데, 몇 언어만 남고 나머지 언어들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챗지피티도 영어로 명령어를 칠 때 더 자연스럽게 더 많은 정보를 잘 정리해 주고 있다는데, 이 책에서도 작가들이 챗지피티와 소설 작업을 하면서 영어로 명령어를 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발전은 언어의 다양성도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


영어로 많은 자료가 집적되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영어에 지지 않기 위해 한글로 된 자료도 많이 집적하자고 주장하기는 좀 그렇고... 참, 여러 생각이 드는 책이다. 아니 소설이다. 


이 소설에 인공지능이 많이 등장하고, 그것들이 지닌 한계와 성과가 은연 중에 드러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챗지피티를 이용해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새롭기는 하지만, 이렇게 쓰인 소설이 과연 감동을 주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아직은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수필을 읽는다는 느낌. 그냥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고만 있을 뿐, 소설이 주는 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반전 등은 그리 새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작가가 여러 번 수정을 하기도 했지만, 이 책의 기본 방침은 챗지피티가 쓴 내용을 작가가 완전히 바꾸지는 않는다였을 테니.


소설을 읽으면서 그냥 무난하다는,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긴장감 같은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아직 한글로 된 자료가 많이 집적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영어로 쓴 것을 다시 번역기를 통해 한글로 번역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나온 소설들이 다 집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을 단순히 짜깁기한 것이 소설은 아닐테니...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아직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챗지피티가 더 많은 소설들을 집적해서 명령어만 입력하면 한 편의 소설이 나온다고 한다면 작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챗지피티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그것에 그치는가? 그러면 작가는 누구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방향인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챗지피티를 이용해 작업을 한다고 하는데, 이런 작업이 보편화되면 시간을 두고 생각하고 고치는 과정이 명령어를 입력하는 과정으로 대체되고, 그러한 명령어 입력이 나름대로 고심의 시간을 갖게는 하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고 쓰고 고치는 과정을 거치는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짧은 시간일 것이다.


빠르고 짧은 시간에 완성품을 내놓는 것. 그런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될 수많은 일들을 압축해서 경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감정이입을 하면서, 때로는 공감을 하면서 곱씹고 곱씹어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챗지피티와 협업을 통해 소설을 쓴다는 발상, 그러한 작업을 책으로 내었다는 데서 이 책은 의미가 있는데, 인간이 홀로 할 수 있는 일을 인공지능과 함께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삐딱한 생각도 한다.


정말,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러한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우리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가가 합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어뿐만이 아니라 인간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정의가 바뀔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점에서 이 소설집이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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