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즐기는 법 딱지책 3
박일환 지음 / 단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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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렵게 여기거나 쉽게 여기는 사람으로 잘 나뉘지 않고 그냥 읽는 사람이 많은데, 시는 어떤 사람들은 즐기고, 어떤 사람들은 어려워 한다. 그래서 시를 즐기는 사람보다는 시에 거리를 두는 사람이 더 많다. 우리 도처에 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 유명한 곳에 가 보라. 그곳에는 시가 적혀 있는 곳이 최소한 한 군데 정도는 있다. 유명한 시인의 시비가 있기도 하고, 지역 특색을 드러내는 시가 적혀 있는 비석들이 있기도 하고, 또 시를 적어놓은 팻말들을 전시해 놓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는 주변에서 시를 자주, 많이 만나게 된다.


서울같은 경우는(다른 대도시의 전철을 타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지하철 역, 스크린도어에 시가 적혀 있는 곳이 많다. 유명 시인의 시도 있고, 시민이 쓴 시도 있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시를 읽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토록 시는 내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시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학교에서 시험용으로 시를 배워서 그런가, 시에서 꼭 정답을 찾아내려고 하고, 정답을 찾기 힘드니 시가 어렵고, 어려우니 자연스레 멀리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시에 정답이 있을까?


모든 문학에, 예술에 정답이 있을까? 아니다. 작품은 작가가 이렇게 썼다(만들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작가가 미처 깨닫지 못한 점들이 작품에 드러날 수도 있다. 사람은 무의식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또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읽는 사람에 의해서 다르게 해석되고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마음에 쏙 들어오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시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가게 하려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데... 시에 대한 여러 측면들을 살펴보면서 시가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되고 있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듯, 시 또한 그런 셈이긴 하지만 없어도 그만인 게 아니라 있으면 좋은 거라는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시가 사라지면 세상이 지금보다 더 어두워질 것 같기는 합니다.' (21쪽)라고 하면서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어떤 시를 읽어야 할까 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시를 우선 읽기를 권한다. 시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알고 있는 시인의 작품부터 읽든지, 교과서에 실린 시인의 다른 시를 찾아 읽든지, 시를 모아놓은 시집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시 또는 시인을 찾아 더 읽든지 등등, 다양하게 하지만 여러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읽다보면 마음에 드는 시를 발견하게 되고, 시를 더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에서 질문을 찾아내고, 은유의 힘을 느껴보며, 시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시를 깊고 넓게 읽으면서 '나쁜 시'를 멀리하게 될 수 있다고 한다. '나쁜 시'에 대한 규정이 좀 모호한데, 우리 삶을 왜곡된 방향으로 이끄는 내용의 시는 나쁜 '시'라고 할 수 있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만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는 '나쁜' 시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만 조심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시를 읽고, 더 다양한 시를 읽는 태도를 지닌다면 그때는 홀로 읽기도 좋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읽는 것도 좋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내 생각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덧붙일 수도 있고, 나와 다른 해석이나 이해를 알게 되어, 시의 다양성을 경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자는 시를 즐길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쉽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시대가 각박할수록 시를 읽는 사람이 줄어들 수는 있지만, 시대가 각박할수록 시를 읽는 사람이 늘어날 수도 있다. 시를 통해서 위로를 받고,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며,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 시 한편 품고 사는 것도 즐거운 삶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해주는 책이다. 시를 어렵게만 여겼던 사람, 시가 무슨 필요야 하는 사람, 한 번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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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늙은 아이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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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 [증언들] 얼마나 살벌한가? '미친 아담 시리즈' 역시 살벌하다. 새로운 역사, 그러나 우리가 겪는 현실을 다른 세계에 구현한 듯한 그런 소설 세계 속에서 전율을 느끼곤 했다. 대단한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


그런 애트우드가 최근에 펴낸 작품집이다. 소설집이라고 해야 하는데, 연결이 되는 작품도 있지만 연결이 안 되는 작품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작품들은 노년에 이른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삶의 우여곡절을 겪고 이제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 곁에 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남겨진 사람. 그런 사람의 감정이 잔잔하고 애잔하게 펼쳐지고 있다.


제목이 그 점을 암시해주고 있다. [숲속의 늙은 아이들]이라니.. '늙은'이라는 말과 '아이들'이라는 상반되는 낱말이 하나로 묶여 있다.


 이청준이 쓴 동화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를 연상시키고 있는데... 점점 나이 먹어가면서 어린이가 되어 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그런 할머니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 그려진 동화.


  이 소설집은 그렇다. 바로 그렇게 이청준 동화에서 나온 할머니처럼 이미 세상에서 물러난 노인들이 나온다. 그것도 주로 여성 노인들이다. 어떤 노인들은 여전히 여성들이 차별받는 세상에 분노해, 여성들에게 걸맞는 직위를 주고자 노력하기도 하고 (비행 -심포지엄), 죽은 조지 오웰과 인터뷰하는 내용도 있으며(망자 인터뷰), 자신의 어머니를 소재로 한 듯한 (물론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애트우드의 어머니가 정말로 이랬다고 하면 곤란하다) 소설(나의 사악한 어머니) 작품도 있다. 이 작품에서 사악한 마녀처럼 묘사한 어머니를 통해 나중에 어른이 된 인물이 사춘기의 딸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이용하는 장면은 웃음을 머금게 한다.


함께 늙어가는 친구, 엉뚱한 상상으로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지만 그 친구와 헤어질 수 없는, 그런 세월을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하는 소설(역겨운 이)을 보면서 함께 늙어 온 친구란 이런 관계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물론 여성을 중심으로, 여성이라서 당하는 핍박에 대한 소설도 있고,(조개껍데기사(死)) 여성을 핍박하는 남성에 대해 복수를 하는 여성의 이야기도 있다. (참을성 없는 그리젤다)   


하지만 이 소설집의 앞과 뒤로 넬과 티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장면들이 참 잔잔하다. 그리고 애잔하다. 마음을 찡하고 울린다.


특히 소설집의 뒷부분에 티그가 떠나고 난 뒤에 홀로 남겨진 넬의 이야기. 어디를 봐도 티그의 잔영이 남아 있는, 집 안 곳곳에서 티그가 남긴 것을 찾으면서 자신의 삶들을 돌아보는 그런 넬의 모습은 삶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의 모습을 한 편의 사진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죽은 티그의 말을 통해서 그들의 인생이 행복했음을 보여준다. 


'고마워요. 우리는 장거리 달리기를 잘해 왔어요. 당신은 괜찮을 거예요.'('나무 상자'에서. 412쪽)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소설집의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좋다. 다만, 1부 티그와 넬과 3부 넬과 티그는 꼭 읽어야 한다. 서로 연결이 되는 소설이기도 하고, 넬과 티그가 함께 살던 시기가 1부라면, 티그가 떠나고 남겨진 넬의 이야기가 3부니까. 


넬과 티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렇게 함께하는 부부의 모습이 얼마나 좋은가를 느낄 수 있었다. 서로의 단점을 지적하기보다는 감싸주면서 자신이 잘하는 부분에 집중하는 그런 관계. 그러면서도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약해져 가는 상대의 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움과 동시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최선을 다해 서로를 사랑하는 그런 모습을 소설에서 느낄 수 있다.


함께 살았던 시절의 행복과 그 행복을 반추하는 넬의 모습이 마음 속으로 들어와 박힌다. 넬의 그 모습 속에서 잔잔하면서도 애잔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시녀 이야기, 증언들]에서 느낄 수 없었던 잔잔함. 사랑이 표내지 않고 흘러나오는 그런 소설들이다.


늙음으로 어린이가 되어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넬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마음을 따스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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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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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작가가 직접 등장한다. 그렇다고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된다. 소설이니까. 그 점을 명심하고 읽으면 소설가를 등장시켜 작품을 전개해 나가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소설가가 직접 등장해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은 예술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소설과 시와 음악, 그리고 영화, 연극이 나온다. 사진까지 치면 다양한 예술이 나오는데, 그런 예술들이 융합되어 일본 현대사와 한 개인의 아픔이 융합되고 있다.


일본은 패전국이다. 지금은 패전국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지만, 그들도 패전이 된 다음에는 미군에 점령당한 경험이 있다. 점령군으로서의 미군. 하지만 일본인들은 점령군인 미군에게 어떤 반항도 하지 않는다. 


이런 미군에게 보호를 받고 성장한 한 여배우가 있다. 이 여배우를 중심으로 소설가인 클라이스트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미하엘 콜하스 계획'을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하기로 한다. 즉 그의 작품인 '미하엘 콜하스'를 각 나라에 맞게 각색하여 상영하겠다는 것.


본래 한국에서 하기로 했는데, 김지하의 투옥과 더불어 한국에서는 할 수가 없게 되고, 이를 일본에서 하기로 했다는 것. 김지하 석방 운동에 관여했던, 또 여러 작품을 발표했던 오에 겐자부로에게 시나리오를 맡기고 싶다는 것. 여배우로 출연하는 이미 오에 겐자부로도 알고 있던 '사쿠라' 씨와 만나고 오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 '사쿠라' 씨는 오에가 좋아했던 에드가 알렌 포의 '애너벨 리'라는 시를 인용한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던 것. 거기서 하얀 옷을 입고 있던 소녀. 그리고 그 영화를 어린 시절에 봤던 오에. 하지만 무언가 고통에 시달리는 사쿠라.


내막은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촬영 도중에 여학생들의 사진을 몰래 찍던 서양 작가의 활동이 밝혀지고, 영화가 무산될 때 사쿠라가 처음 나왔던 영화의 다른 버전을 보게 된 것. 거기서는 사쿠라를 보호해줬던 사람의 행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공개되지 않았던 것은 어린 소녀의 몸을 유린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쿠라 씨는 그렇게 유린 당했던 것.


한국은 이렇게 일본에 유린당했던 과거가 명확하게 드러났지만, 일본은 미국에 당한 것들이 이 영화의 다른 버전처럼 아름답게 미화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인데... 진실은 소녀를 유린하는 미군처럼, 일본 역시 미국에 알게모르게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더 나아가야 한다. 30년이 지난 뒤, 그들은 다시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이번에는 내용이 바뀐. 민간 전승에서 이어지던 내용을 계승해서.


일본에서 일어났던 민중반란, 그리고 그들을 이끌었던 여성, 메이스케 어머니에 대해, 사쿠라 씨가 충격을 받았던 애너벨 리의 영화 끝부분에 나오는 음악을 차용해서 하기로.


결국 작품 속의 작품에서도 여성은 유린을 당한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더 한발 나아간다. 너희가 우리를 유린했지만 우린 꺾이지 않는다고... 우린 더 나아갈 거라고. 그런 다짐을 보여주는 넋두리로 영화를 찍기로...


결국 소설은 시와 소설, 영화와 음악을 통해 한 개인이 치유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미하엘 콜하스'라는 클라이스트의 작품을 통해서 반항하지 못하고 있던 일본의 당시 모습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미하엘 콜하스'는 남의 나라 일인 것처럼 여기는 일본 사회.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도 이러한 '미하엘 콜하스' 늘 있어 왔음을... 그것을 메이스케 사건을 통해 드러내고 있으며, 이런 저항의 중심에 여성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여성은 부차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자신을 변화시키는데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살아가서, 결국 역사의 주역이 되고 있음을, 사쿠라와 메이스케 어머니의 존재를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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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멜라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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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편의 수상작이다. 다 다른 결을 지니고 있는 소설들. 다양한 소설을 맛볼 수 있는 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다. 


김멜라, 이응 이응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김기태, 보편 교양

김남숙, 파주

김지연, 반려빚

성해나, 혼모노

전지영, 언캐니 밸리


한편 한편이 모두 여러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 중에서 김멜라 소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응 이응이라니. 이응 이응을 붙여서 '응'이라고 해야 하나 '0ㅣ0'이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 소설이 성을 다루고 있으니 '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읽으면서 문정희가 쓴 시 "응"이 생각나기도 했고... 이 시 구절 중에 '너와 내가 만든 / 아름다운 완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때 '응'에서 이응 이응은 너와 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김멜라 소설은 이와 다르다. 오히려 빌헬름 라이히의 '성'에 대한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성적 억압이 파시즘을 유발한다는 라이히의 주장. 그래서 성적 욕구의 해소가 중요하다고 하는 그의 주장이 어쩌면 이 소설과도 통할지도 모른다.


'이응'이라는 기계가 소설에 나온다. 성적 욕망을 해소해주는 기계다.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하면 된다. 하지만 이 기계로 인해 성적 불만은 해소된다.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성적 만족을 취할 수가 있다.


그런 이응이라는 기계를 한 축으로 하면서도 또 할머니를 등장시켜 죽음과 삶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죽음과 성이라는 것이 연결될 수도 있음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데...


사람이 가장 원하는 욕구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바로 '성과 죽음' 아닐까. 하지만 할머니를 통해서 죽음 역시 인간이 해소해야 할 무엇이라고 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쌓아둔 응어리. 그것들을 계속 쌓아두면 삶이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그런 응어리들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과학기술의 힘으로 '이응'을 만들어 성적 욕구를 해소한다고 해도, 기계만으로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어쩌면 그 이유로 소설에서 '위웅'(우리-we-의 포옹)이라는 모임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상대를 존중하면서 상대와 함께하는 그런 모임.


개인의 욕구를 해소해주는 기계 '이응'과 함께 서로를 느낄 수 있는 모임인 '위옹'이 소설에 함께 나오는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욕구가 다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기계 속에서 상상을 통해 해소될 수 없는, 관계를 통해서 해소되어야만 하는 욕구들이 있음을,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제목이 그냥 '이응'이 아니고 '이응 이응'이 아닐까. 단수가 아닌 복수. 관계 속에서 만들어가고 해소하는 그런 상태.


공현진의 소설은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김기태 소설은 입시 교육에 찌든 학교 교육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단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육, 또는 교양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준다.


다른 소설들도 할 말이 많지만, 그 중에 한 소설을 더 덧붙인다면 성해나의 '혼모노'라는 작품이다. 일본어로 된 제목이지만 '진짜'라고 번역할 수 있다. 가짜가 아닌 진짜. 그러나 우리 삶은 대부분 진짜를 흉내내는 가짜로 이루어져 있지 않나. 


오죽하면 자신의 진짜 모습이 어떤 건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하지 않나. 소설에서는 무당이 나온다. 신과 접신한 존재. 신이 들어와 신의 말을 전달해주는 무당이 진짜 무당인가, 신의 말을 흉내내는 무당은 가짜 무당인가. 답은 뻔할 것 같다.


신의 말을 전달해주는 무당이 진짜 무당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지? 예측의 적중도로 알 수 있나?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는 정해져 있는가? 


신이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뒤에도 처절하게 굿을 하는 박수 무당을 통해서 진짜와 가짜를 생각해 보게 된다.


자신의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박수 무당을 통해 과연 신은 누구에게 깃들어야 하는지, 아니 굳이 신이 깃들지 않더라도 그렇게 처절하게 굿을 하는 무당을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이 소설집은 오래 전에 사놓고 지금에야 읽었다. 오래 전에 산 이유는 단 한 가지. 어차피 읽을 소설인데, 작가들이 발표하지 않은 짧은 소설들을 모아 놓은 부록을 덤으로 준다고 해서 산 것.

한편의 소설을 읽고 그 부록을 읽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부록의 표지와 그 부록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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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8-20 1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기태 작가의 행보는 놀랍네요~~~2년전인가 신춘문예 당선, 작년에 이상문학상 우수상, 젊은 작가상 수상, 올해 신동엽 문학상 수상! 본인도 숨가쁘실 듯..ㅎㅎ 물론, 작품 좋더라고요!

kinye91 2024-08-20 11:39   좋아요 1 | URL
김기태 작가 이름은 많이 들었어요. 요즘 많이 읽히는 작품을 쓰는 작가더군요. 이 수상집에 실린 작품도 좋아서, 이 작가의 작품들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페크pek0501 2024-08-20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하신 책을 갖고 있습니다. 사 놓고 아직 못 보았어요. 2024 신춘문예 당선소설집을 읽고 있는데(어찌나 작품 수가 많은지) 몇 작품이 남아 이걸 다 읽고 그걸 읽을 생각입니다.^^

kinye91 2024-08-20 16:09   좋아요 2 | URL
저도 부록 때문에 미리 사놓고, 천천히 읽었지만, 소설에 시효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천천히 여유 있게 읽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죽이고 싶은 아이 - 2021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죽이고 싶은 아이 (무선) 1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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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두 친구. 남들이 보기에 친해 보이기도 하고,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남들의 눈에 비친 이 아이들의 모습 중에 어떤 것이 진실일까? 과연 둘 사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


친구란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고 한다면, 친구라는 말에는 이익이라는 말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관계, 그런 관계를 맺고 지내는 사이를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친구 사이에서는 친해 보인다는 말도, 이용한다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냥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친구 사이를 사람들이 다르게 평가하는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테다. 그 이유를 찾아가는데 이 소설의 핵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위악과 위선'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싶어졌다. 주연이는 위악, 서은이는 위선. 그렇게 딱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아니, 소설 속 서은이는 위선이 아니라 선함을 지닌 아이다. 


그런데 그런 선함이 가장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바로 주연이와의 관계에서다. 선함. 능력 없는 선함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남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 


"넌 착하니까 ...:란 말 속에서 그런 힘없는 착한 사람을 이용하려는 태도가 숨어 있다. 하지만 이런 착함을 남에게 보여줄 때도 있다. 무언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착함으로 무장할 수도 있는 것. 이것을 '위선'이라고 해도 좋다.


서은이는 착하다. 본성이 착하다. 가난한 집에서 살지만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는다. 남에게 군림해 본 적도 없다. 그렇게 착한 아이를 대부분의 영악한 아이들은 무시한다. 대놓고 따돌릴 수도 은근히 따돌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대응을 하지도 않는다.


이때 서은이에게 다가온 주연. 집이 부유하고,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주연이는 서은이의 친구가 되어 준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운동화나 옷도 준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의 마음을 주는 법을 잃었다.


기대에 찬 부모, 자신들의 결핍을 딸에게서 충족하려고만 한 부모 밑에서 자란 주연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잘 모른다. 늘 받고만 살았기 때문에 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기에,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악으로 대응한다. 속으로는 한없이 약한데, 그 약함을 감추기 위해서 '악'을 가장한다. '위악'이다.


그러니 주연은 서은이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마치 군림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군림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군림이다. 자신의 뜻대로 서은이를 움직이게 하는 것.


이것은 주연이 생각하기에 '위악'이지만, 서은에게는 '악'이다. 견딜 수 없는 행위이다. 지금은 없어서 참고 있지만, 언젠가는 참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마음을 감춘 '위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았으련만, 주연은 그것이 '위악'인지 알지 못하고 좋은 행동, 친구를 위한 행동이라고 착각을 한다. 


왜? 서은이가 마치 그것을 진심인양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주연이 앞에서 서은이는 '위선'이었으니까. 진실을 감추고, 지금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관계. 그것을 지탱해주는 것은 바로 주연이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 '위선'이 필요하다.


자, 어떤 사람이 더 약한가? '위악'은 약한 자신의 내면을 감추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다. '위선'은 자신의 착하지 않음을 감추기 위해서 겉으로 꾸며내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내면의 강함은 '위악'보다는 '위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집안의 경제 형편과는 다르게 내면은 서은이 훨씬 강하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겉으로는 강한 것 같은 주연은 내면의 약함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위악'으로 나타날 수밖에.


이 둘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은 바로 이 '위악과 위선'을 판단하려 한다. 아니 그들은 '위악과 위선'을 판단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과 선'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소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주변인들에게 보인 모습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악과 선, 위악과 위선'을 우리가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음을.


무엇보다 친구라는 관계에서는 이러한 '위악과 위선'이 작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친구란 그렇게 꾸며 보이는 관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들을 드러내고,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과연 '친구'가 있는지를 묻게 한다. 두 아이를 둘러싼 다른 아이들을 봐도 그렇고... 두 아이의 관계도 그렇다. 이는 두 아이의 관계를 통해서 학교 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한다.


우정을 키우는 장으로서의 학교. 옛말이다. 지금은 '위악과 위선'이 판치는 관계들만 있는 학교가 아닌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2권이 나왔던데,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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