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 문학동네 시인선
최승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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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발간한 시집이 199권이 넘었다.  50권, 100권, 200권째는 그동안 시집을 냈던 시인들의 시를 모아놓은 시집을 (50권은 기념 자선, 100권, 200권은 티저 시집이다) 냈고, 또 두 번 이상 시집을 낸 시인들이 있으니, 총 시인은 200명이 채 안 된다.


그럼에도 시집에는 시인의 말들이 실렸으니, 시인의 말이 그들의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도 해줄 수 있고, 때로는 시의 이해를 방해할 수도 있다.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시인의 말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때로는 시인의 말이 한 편의 시처럼 다가올 때도 있다.


그런 시인의 말을 만나면 반갑다. 그리고 기쁘다.


하지만 가끔 시인의 말이 시를 이해하기 힘들게 할 때도 있다. 이럴 때 시인의 말은 '사족'에 가깝다. 물론 대부분 시인의 말은 화룡점정이라고 해야겠지만, 가끔은 도대체 시도 난해한데, 시인의 말은 그런 난해함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하는 그런 시인의 말은 사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공연히 뱀발을 그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예전에 문학의 갈래를 정리하는 글에서 시는 '세계의 자아화'라고 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즉 시는 자아의 외적 대상을 자아로 끌어들여 자아로 말하는 문학이라고 해석해도 된다. 그렇다면 시는 세계를 자신에게로 끌어온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아로 들어온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즉 존 버거의 말을 빌리면 세계와 자아의 거리를 없애는 것.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 사람과 동물, 사람과 식물, 동물과 식물 등등 존재하는 것들의 거리를 없애는 것이 바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의 말을 읽으면서 시와 다른 존재와의 거리를 느끼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런 시인의 말이 바로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동네에서 펴낸 이 책, 시인의 말 모음집은 또 한편의 시집을 읽는 것처럼 읽어도 좋다. 대부분의 시인의 말이 '사족'보다는 '화룡점정'에 가까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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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숲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천선란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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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등장인물들이 겹친다는 점에서 '연작소설'이라고 한다. 각 소설마다 주인공은 다르지만, 이들은 한 공간에서 함께하고 있다.


'바다눈, 우주늪, 이끼숲'이렇게 세 편이 실려 있는데 공통된 공간은 지하세계다. 인류가 지상에서 살기 힘들어져 건설한 지하 세계.


이 지하세계는 철저하게 통제되는 사회다. 세 편을 읽다보면 연결되는 점이, 이들의 머리에는 칩이 심어져 있어서 이들이 어딜 가나 확인이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지하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는 특정 약물을 섭취해야 한다.


이 약물을 섭취하지 않으면 정신개조를 받으러 끌려간다. 이는 인간의 의식까지도 통제가 되는 사회라는 말이다. 이동의 자유는 있을지라도 모든 것이 감시받는 사회, 하다못해 통신까지도 감청이 되는 사회고, 허락되지 않은 아이는 낳아서는 안 되는 사회다.


하지만 이런 사회에서도 다른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저항이라고 해도 좋은데, 이런 저항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발견과 모험'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바다눈'에서 은희와 마르코의 대화에 이 말들이 나온다. 그리고 이 말들은 다른 두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들은 기존 세계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며, 그곳으로 나아가려는 모험을 한다. 물론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한다.


"모험과 도망."

하나는 대범했고 하나는 조급했다.

"발견과 추방."

하나는 위대했고 하나는 초라했다.

"미지의 세계와 타락한 세계."

하나는 신비로웠고 하나는 두려웠다.

"우린 산 채로 묻힌 거야."

우리의 세계는 조급하고, 초라하고, 두려웠다. (83쪽. '바다눈'에서)


하지만 은희는 사라진다. 목소리를 잃었다고(팔았다고) 하지만 사라질 필요가 없을텐데, 사라짐은 타락한 세계로부터의 추방과 도망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은희는 엄마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파는 모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타락한 세계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발견을 통해 모험으로 나아갔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래서 남아 있는 마르코가 친구인 소마를 위해서 모험을 하는 '이끼눈'으로 연결이 된다.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의조. 의주의 쌍둥이인 의조는 둘 중 하나만 인정받는 사회에서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나 있는 존재가 없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약물로, 통제로 없는 존재로 만들어도 있는 존재는 나름대로 있음을 증명하게 된다.


환풍구로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의조. 그런 의조가 나중에는 이 지하 세계를 폭발시키겠다고 결심한다. 그렇다. 타락한 세계는 더이상 존재하면 안 된다. 그러나 아직 타락한 세계는 굳건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은 실패하고,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은 물거품이 되며, 노동 근무 조건도 열악해서 언제든지 사망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이끼숲'에서 유오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죽는다. 그런 유오의 클론을 데리고 유오가 가고 싶어하던 지하 1층 돔으로 가려고 하는 친구들.


그 친구들은 모두 조급하고, 초라하며, 두려운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친구들은 소마를 돕는다. 유오의 클론과 함께 식물들이 있다는 돔으로 소마를 가게 하려고.


한명 한명 자신이 맡은 일을 통해 소마를 지하 1층의 돔으로 보낸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식물들은 죽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이 닫힌 세계를 나와 지상으로 가는 것. 


지상에 나온 소마는 온몸이 이끼로 덮이지만 비로소 자신이 닫힌 세계에서 나왔음을 인식한다. 그렇다. 그들은 지하 세계라는 곳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고 모험에 성공한 것이다. 비록 밖으로 나온 사람은 소마 하나지만, 모두가 함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소설은 암울한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자신들의 삶을 찾아가는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유오의 죽음으로 자신을 유폐시켰던 소마가 친구들과 함께 유오의 클론을 데리고 지상으로 가는 장면은, 닫힌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그를 벗어나려는 존재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마르코가 파업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들에게 동조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안락은 홀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해야 한다.


닫힌 세계를 열린 세계로 만드는 일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닫힌 세계에 갇혀 사는 삶이 바람직하지 않음은 이 세 편의 소설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지금 있는 곳에서 다른 곳을 꿈꿀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그런 존재들로 인해 세상은 열린 세상이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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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안전가옥 오리지널 8
천선란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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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상황에 처한 세 사람이 있다. 수연, 완다, 난주


외롭다고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다르게 행동한다. 그것이 자신의 의지든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았든.


하지만 외롭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이 외로움을 견디고 없애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얻지 못하면 다른 동물들이나 식물들에게서 그것을 얻으려고 한다. 온갖 '반려'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은 그런 이유이리라.


소설은 이 외로움에서 시작한다. 외로움을 파고드는 존재가 있다. 외로움의 끝이 죽음인데, 이 소설은 죽음을 뱀파이어로 설정한다. 


뱀파이어는 밤에 움직인다. 사람의 인생에서 밤이란 어려움, 고통, 외로움, 끝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라는 말은 밤을 끝나게 해주는 존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밤을 끝나게 해주는 존재, 즉 현재의 외로움에서 나를 해방시켜주는 존재.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재의 끝이기 때문이다. 이 끝을 


하지만 외롭다고 모두 죽지는 않는다. 외로움에 대처하는 방식이 다르다. 누군가는 작중 인물인 서난주처럼 외로움에 먹혀 그것에 자신을 맡길 수도 있지만 수연이나 완다처럼 외로움과 함께 하면서 그것을 이겨내려고 할 수도 있다.


세 인물이 중심축이지만 수연과 완다에게는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외로움에 먹혀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수연에게는 은심 할머니와 선배 형사 은경이 있었다면, 완다에게는 완다를 입양한 모리스와 클레어가 있다. 그리고 완다와 함께하는 뱀파이어 릴리가 있었다. 이것이 이들이 외로움에 먹혀버리지 않은 이유다.


그렇다면 뱀파이어로 상징되는 죽음도 사람들에게는 상반된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사람들을 한없는 공포로 몰아넣는 죽음과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잘살아가게 하는 죽음.


결국 완다가 만나는 릴리나 수연이 나중에 만나게 되는 그레타와 같은 뱀파이어들은 삶을 더 잘살게 해주는 뱀파이어-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곁에 있어요."

수연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조심하세요. 그들에게서 인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로운 자들을 홀로 두지 않는 거예요."  (296쪽)


즉 삶 곁에 있는 죽음은 외로움을 발판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마치 그것밖에 없는 양. 소설에서 뱀파이어는 자신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해줬다고 말한다.


하지만 외로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죽음일까? 아니다. 외로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누군가 함께해주는 모습이다.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그러니 뱀파이어의 방식은 잘못됐다. 작가가 뱀파이어를 등장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겠다. 뱀파이어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으니..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죽이는 존재, 초월적인 힘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에게는 해롭고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니. 죽음도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죽음을 삶의 다른 면으로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경우도 있으니... 사람들을 대하는 서로 다른 뱀파이어를 등장시킨 것도 한 면만을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외로움은 이런 뱀파이어를 부른다. 외로움은 이 세상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뱀파이어가 온다. 


이런 은유로 소설을 읽을 수도 있지만, 살인사건에서 세 사람의 현재와 과거가 겹쳐지면서 점점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누가 범인일까? 왜 살인을 저지를까? 어떻게 살인을 막을 수 있을까? 세 인물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갈까?


처음에는 전개가 좀 느리다고 여겨졌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속도가 붙는다. 사건의 전모와 인물들의 관계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점점 흥미를 더해간다. 


그리고 결국 사건은 해결된다. 해결되지 않는다. 수연의 입장에서는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 된다. 도저히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는.


소설을 읽으면서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가 아니라 '낮에 함께하는 사람(존재)'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무엇인가와 함께할 때 외로움을 이겨내거나 최고한 외로움과 함께할 살아갈 수 있음을. 그래서 어려울 때만 찾는 것이 아니라 즐거울 때도 함께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소설을 읽으며 생각한다.


뱀파이어라는 환상적인 존재를 등장시켜 외로움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 소설이다. 천선란의 다른 소설에서 느꼈던 따스함은 덜하지만, 그래도... 무척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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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제목만 보고, 우리들 서정(사랑과 비슷한 우리들 마음을 울리는 그러한 감정들이라고 좁게 서정을 생각하며)을 노래하는 시들을 모아놓았나 했다. 그런데, 시집 제목이 된 시는 그게 아니다. 서정시를 쓰는 시인도 감시를 받아야 했던 시절.


  감시 목록 파일 이름이 서정시였다는 거다. 살벌한 시대에는 서정시조차도 저항시가 되는 세상이니.


  아니, 서정을 노래하는 시들은 독재에 대항하는 시들일 수밖에 없다. 독재는 개인의 서정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런 서정시들이 널리 퍼진 사회에는 독재가 깃들 수 없으니까. 그러니가 서정시는 독재에 대항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왜 이리 죽음이 많이 나올까 했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한 죽음들과 시인 개인사에 얽힌 죽음으로 읽힐 수 있는 시들까지. 세상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집에서 두 단어가 마음 속에서 자리 잡았다. '기슭'이라는 말과 '대각선'이라는 말. 두 말의 공통점을 '경계'에서 찾는다.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곳이자, 이곳과 저곳을 나누는 곳. 그것이 바로 기슭과 대각선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죽음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기슭과 대각선을 핵심으로 본다면, 죽음의 대각선 너머, 또는 죽음의 기슭에는 삶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삶을 사각형이라고 하고 대각선을 그어보면, 한쪽은 삶이고 한쪽은 죽음이리라. 그리고 삶과 죽음은 사람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될테고. 이 대각선은 삶 쪽에서는 죽음과 이어지는 기슭이 될 것이고, 죽음 쪽에서는 삶과 이어지는 기슭이 될 테다. 


결국 기슭은 대각선이다. 그리고 대각선은 우리가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을 대비해서 볼 수 있게 해준다. 꼭 삶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기슭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다. 기슭에 있을 때 어떠해야 할까.


무섭다고, 두렵다고 눈을 감아야 할까? 그냥 벌벌 떨면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있어야 할까? 아니다. 시인이 시집에서 수많은 죽음을 이야기한 것은 죽음의 대각선 너머에 있는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기슭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슭에서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90-91쪽)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 발을 멈추고 구름에게라도 물었어야 했다 / 산을 내려오는 산에게 / 길을 잃고 머뭇거리는 길에게 물었어야 했다'('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3연)


그러면서 '모든 무서움의 시작 앞에 눈을 감지는 말았어야 했다'(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8연 2행)고 한다. 


'대각선의 길이'(118-119쪽)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어디론가 불려가는 것들 / 불려가면서 다른 존재를 불러오는 것들 / 종종걸음으로 / 수평선과 수직선을 가로질러 아주 멀리 가는 것들 / 짧은 궤적을 남기며 사라지는 것들' ('대각선의 길이' 7연)


이것이 '기슭과 대각선'이 지닌 공통점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동전의 양면처럼 한 면을 볼 때 다른 면을 볼 수 없게 되는데, 이 기슭과 대각선은 한쪽 면과 다른쪽 면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볼 수 있을 때 선택은 우리 몫이다.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100-101쪽)는 시도 있지만, 기슭과 대각선을 생각하는 우리들은 '부사'(꾸밈말)가 아닌 '동사'를 좋아해야 한다. 경계에서는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집의 마지막 시('서른세개의 동사들 사이에서')는 결국 기슭과 대각선에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서른세개의 동사들 사이에서


  빛의 옥상에서

  서른세개의 날개를 돌려라

                   

  오다 가다 오르다 내리다 흐르다 멈추다 녹다 얼다 타오르다 꺼지다 보다 듣다 생각하다 말하다 삼키다 뱉다 잡다 놓다 울다 웃다 주다 받다 묻다 답하다 밀다 당기다 열다 닫다 떠오르다 가라앉다 부르다 사라지다 넘다


  서른세개의 동사들 사이에서

  하나의 파도가 밀려가고 또 하나의 파도가 밀려올 것이니

  세상은 우리의 손끝에서 부서지고 다시 태어날 것이니


  기다리지만 말고 서른세개의 노를 저어 찾아라

  세계의 손끝에서 마악 태어난 당신을


(* '서른세개' 시인이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창비. 2021년. 초판 6쇄.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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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에 속삭이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5
임철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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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이 나에게 건넨 말]을 읽다가 알게 된 소설이다. 임철우 작품은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땅'과 '봄날'은 읽었으니 어느 정도 믿음이 가는 작가였고.


그런 임철우 작가가 6.25와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어 4.3을 다룬 소설을 썼다기에 읽어야지 하고 있었다. 마침 [4.3이 나에게 건넨 말]에서 이 소설을 다뤄주었으니, 꼭 읽어야지 하는 결심을 하고 구입.


뜸을 들이다 읽기 시작. 먼저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4.3은 비극이니까. 어떤 슬픔이 몰려올지 모르니 마음에 어떤 각오를 하고 읽기 시작. 


주요 인물은 셋이다. 은퇴한 뒤 제주도에 내려가 사는 한(민우), 그런 한민우에게 언뜻언뜻 나타나는 정체 모를 아이들 몽희(몽구, 몽선), 그리고 한민우에게 그 아이들에게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윤(천엽). 여기에 한 존재를 더하면 개 망고.


제주도에 내려와 사는 한에게 이상한 느낌이 드는 일이 잦다. 왜 그럴까? 망고도 이상한 행동을 하고. 꿈 속에서도 아이들이 보이고. 그러다 장 가는 할머니들을 태우게 되는데, 여기서 윤씨 할머니에게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1948년에 벌어졌던 비극에 대해서. 그리고 왜 자신에게 그 아이들이 보이는지를 몽희의 입을 빌려 독자에게 알려준다. 무심한 사람은 절대 볼 수 없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을 소설에서는 '아파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어떤 마음이 아파하는 마음일까? 몽희의 말을 빌리면 아파하는 마음은 바로 이렇다. 이 아파하는 마음이 아파하는 마음과 공명하게 된다.


'혼자서 길을 걷다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람. 그건 십중팔구 특별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표식이야.' (63쪽) 그런 마음이 '아파하는 마음'(64쪽)이라고 한다. 


어쩌면 4.3을 직접 겪은 천엽도 그런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살아온 세상을


'아버지도 나도 지옥에 갇혀 있었다는 걸. 단지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하필 그 지옥에 함께 있었다는 죄뿐이라는 것도요…….'(168쪽) 라고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옥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아니, 신조차도 무엇을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지옥 아닌가. 그래서 지옥을 없앨 수 없는 신이 그나마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만든 곳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제주 신화를 빌려서 이야기하는 서천꽃밭 아닐까. 아이들만 갈 수 있다는.


아이들은 지옥에 가기에는 너무도 순수하니까, 현세의 지옥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그나마 안주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서천꽃밭도 아무나 볼 수는 없다. 서천꽃밭을 볼 수 있는 어른은 바로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살아온 역사가 바로 지옥이었음을 깨달은 윤씨 할머니는 어느 정도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한이 찾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과거를 다시 현재로 불러내오는 용기. 그것은 바로 아파하는 마음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굳이 불경 중 '유마경'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세상이 아프면 사람도 아플 수밖에 없으니... 그 아픔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옥도 천국처럼 여기고, 지옥에서 잘살려고 악마처럼 변해가겠지만,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지옥을 지옥으로 느끼기에, 그 지옥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몽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남다르게 '아파하는 마음'을 가졌으니까. 그런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을 가진 이들만이 우리들의 존재를 알아보고, 감지하고 또 공감할 수 있어. (205쪽)

 ...만일 당신이 언젠가 그 눈을 갖게 된다면, 당신은 그 순간부터 지상을 떠도는 수많은 불행한 혼들의 슬픔, 절망, 원망, 분노, 고통과 직접 마주쳐야만 해.

  진정으로 두려움 없이 마주할 수 있을 때라야만, 당신은 그들의 검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검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검은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테니까…….'(206쪽)


그냥 아파하는 마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아픔이 주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파하는 마음들이 함께 할 수 있다.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더한 아픔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적 상처는 반드시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치유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픈 마음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공감. 진실한 사과. 그리고 행동의 변화. 소설은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관광의 섬인 제주도에서 마냥 나만의 즐거움만을 찾지 말라고... 제주에 배어 있는 역사적 아픔을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므로

그 섬에 가거든, 돌담 그늘에 누운 어린 혼들의 고단한 잠을 함부로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고즈넉한 마을, 이끼 낀 돌담길을 지나거나, 바람찬 들녘의 구불구불한 밭담 사이를 걸을 때나, 혹은 오름 기슭 외진 골짜기에서 이름 없는 돌무더기들과 마추지거들랑.


부디

목소리 발소리를 낮추고

가만가만 지나가기를…….'(224쪽)


이렇게 소설은 가만가만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인 한민우가 아이들을 볼 수 있듯이 그렇게 우리 역시 들을 귀, 아파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그것이 우리가 4.3을 기억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그것이 바로 지옥에서 벗어나 서천꽃밭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게 되는 방법이라고.


이제 봄이 다가오고 있다. 다시 4.3이 올 것이다. 역사의 한 순간으로 지나치는 날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그런 아픔이니.


임철우의 이 소설. 우리에게 '아파하는 마음'을 전달해주고 있다. 함께 공명하자!



덧글


그런데 읽다가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1948년. 기축년 그해 겨울.'(83쪽)이라고 나오고, 또 '1948년 12월 중순.'(140쪽)이라고 나와 몽희네가 죽은 해는 1948년으로 봐야 할 것 같은데, 1948년은 기축년이 아니라 무자(戊子)년 아닌가. 이게 헷갈린다. 찾아보면 기축년은 1949년으로 나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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