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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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릴린 먼로일까 생각했다. 뜬금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마릴린 먼로, 섹시 심벌로 유명한 미국 배우 아니던가. 우리나라하고 인연이 있다면 6.25전쟁 때 방문했다는 정도.


소설 속에서 마릴린 먼로는 사진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많은 것을 함의한다. 마릴린 먼로를 남성들이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자신들의 환상에 맞았을 때만이다. 마릴린 먼로가 주체적으로 행동할 때는 온갖 비난을 쏟아부었다.


그것은 마릴린 먼로는 남성들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행동해야 하는 사람. 그런 존재가 마릴린 먼로였다. 즉,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사람으로만 존재해야 했다. 결코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이어서는 안 되었다.


소설은 이 점을 마릴린 먼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라는 말은 다른 존재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존재로만 있겠다는 말일까? 아니다. 마릴린 먼로를 통해 여성들이 겪는 억압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단지 여성들만이 아니라 다르다는 이유로, 약하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배제당하는 존재들을 드러내고자 이런 제목을 붙였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사라진 사람(셜록)으로부터 메시지가 온다. 그 메시지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소설의 서사다. 서술자는 둘. 한 명은 성형외과 의사인 구연정, 또 다른 한 명은 윤설영. 


셜록의 친구인 설영은 셜록이 사라지기 전 8개월 간의 기억이 없다. 분명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을 터. 소설은 이 기억 상실의 공간을 메우는 일로 내용이 전개된다. 그 상실의 부분을 채워주는 존재가 성형외과 의사인 구연정이다.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은 곧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깨달아가는 여정이다. 소설 속에서 선택과 배제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선택과 배제를 누가 하는가?


누가 선택하고 누가 배제하는가? '하다'란 말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다. 위계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으로 국한시키면)


그런 사람들은 누구인가? 권력을 쥔 사람, 경제적 부를 축적한 사람, 명예를 획득한 사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이것도 아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도 다시 위계가 나뉜다. 바로 성별에 의해서.


위계의 피라미드 가장 윗층에는 권력을 쥔 이성애자 남성이 속한다. (나머지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같다고 가정하자) 중간층에는 권력을 쥐지 못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이성애자 남성이 속한다. 하층은 또 나뉘는데, 이성애자 여성이 하층의 맨 위를 차지한다. 그 밑에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자리잡는다.


(성별로 나누지 않았을 때의 위계는 여기서 생각하지 말자. 전쟁이 났을 때 또는 위급상황일 때 어떤 존재들이 가장 피해를 입는지 살펴보면 이 위계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위계의 피라미드는 시시때때로 작동한다. '위계에 의한~'이라는 말이 붙은 억압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럼 마릴린 먼로는 어디에 속할까? 하층에 속한다.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라고 불리는 배우도 그들의 위계 속에 있을 때만 선망의 대상일 뿐이다. 위계를 벗어나고자 하면 곧장 배제와 탄압이 들어온다.


'선택하다, 배제하다'라는 말의 상대 편에 '선택당하다, 배제당하다'라는 말이 있다. 주체적으로 생동하지 못하고 다른 존재에 의해 행동을 하게끔 당하는 상태. 피동이나 수동이라고 부르는 상태다.


위계의 밑에 있는 사람들은 선택하지 못하고, 배제하지 못하고 선택당하고, 배제당한다. 소설은 바로 그 점을 보여준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다르다는 이유로 선택당하고 배제당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렇다고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비록 지금은 선택당하고 배제당하지만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능동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배제당한 존재인 도영의 말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 말이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라는 말의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 강아지가 한 마리일 때는 힘이 약하잖아요. 근데 호랑이가 욕심껏 먹어서 강아지들이 오히려 더 많아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강아지들이 힘을 합칠 수가 있었대요. 강아지들이 힘을 합쳐서 호랑이를 물리쳤대요!"(371쪽)


이때 호랑이에게 먹히는 강아지들이 바로 마릴린 먼로다. 그러니 마릴린 먼로임을 인식했을 때 힘을 합칠 수가 있다.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되고, '마릴린 먼로들'이 된다. 그럴 때 선택당하고 배제당하는 존재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다고 똑같이 선택하고 배제하는 존재로 살아가지 않는다. 마릴린 먼로들은 선택과 배제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안는 존재가 된다.


설영이, 연정이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은 다름을 인정한다.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사랑이 된다. 또한 이 사랑은 배제된 사람들에게 배제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연정과 설영이 서로 소통하는 트위터 비공개계정 이름이 왓슨들이다. 왓슨은 셜록 홈즈가 사건을 해결할 때 같이 있으면서 그가 어떻게 사건을 해결했는지를 기록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기록이 중요하다. 기록은 남는다. 기억은 지워질 수 있어도 기록은 남는다. 기록은 결국 사건을 해결하게 한다.


그들이 계정 이름을 왓슨들이라고 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건의 전모를 기록해두겠다는 결심. 단지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기록을 통해서 변해간다. 자신들의 삶을 찾아간다. 


소설은 이렇게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그 과정을 통해서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추리 소설의 기법을 택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만연하는 '위계에 의한 폭력'이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연정이 성형외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사라는 이유로 특별한 까닭없이 당하는 일들과 설영이 박사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대우, 그리고 일본인 남성 신바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받는 배제는 소설 속 사건이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음을 생각하게 한다.


하긴 우리가 힘이 있다고 여기는 직업에서도 성별이 얼마나 위계로 작용하는지는 몇 년 내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선택과 배제가 일어났고, 얼마나 많은 마릴린 먼로들이 있었는지를...


법을 통해 정의를 구현한다는 사법부에서 벌어진 온갖 성추행들, 사람을 살린다는 의사를 양성한다는 의대에서 벌어진 성추행들, 이렇게 사회적 위계에서 위에 있는 집단들에서도 다시 위계를 나누어 폭력이 행사되고 있는데, 사회적 위계에서 아래에 있는 집단들에서랴.


그러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을 없던 것으로 묻어버리는 일이 없게 기록하는 왓슨들이 필요하다. 이런 왓슨들로 많아져 배제당했던 사람들이 배제당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소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게 된다. 박진감 있게 전개되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느끼는 현실감, 그리고 분노. 단지 분노에 머물지 않고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선택과 배제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 작동해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소설이다. 그러므로 왓슨은 바로 '사랑'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소설 뒷부분에 있는 설영이 하는 말,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건 하수나 하는 일이죠."(376쪽)

이것이 이 땅의 왓슨들이 하는 말이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게 한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을 쓴 작가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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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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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깨달았다. 아, 이 소설들을 한 편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 캐나다 판 '여자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고.


각 소설들이 독립적이지만 읽다보면 연결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래, 주인공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어린 여자아이부터 죽음을 앞둔 여자까지, 여자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 잘 표현되고 있다.


제목이 된 소설 '도덕적 혼란'부터 보면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이 나온다. 그녀는 도덕적이다.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남의 어려움을 쉽게 넘기지도 못한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남자와 함께 산다. 여기에 그 남자의 공식적인 아내에게서 이런저런 간섭을 받는다. 마치 우리나라 옛날 '첩'처럼. 


소설을 읽다보면 이렇게 살아갈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착하다는 말을 넘어서서 이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삶이 아닌가 하기도 한다. 세상에 같이 사는 사람의 아들들이 온다고 주말 내내 나가 있어야 하기도 하고, 그 아이들에게 이것해라, 저것해라 하는 부인의 간섭을 받는 삶이라니...


하지만 여자는 자기 할 도리를 다한다고 한다. 남자는 그러한 일에 일절 간섭을 하지 않는다. 간섭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여자에게 미룬다고 보면 된다. 자신이 나서서 정리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들이 지니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여자 (작중 이름은 '넬'이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서는 '넬'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는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삶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물론 부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양 하고 있겠지만) 여기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결코 능동적이지 않은데, 그렇다고 완전히 수동적이라고 볼 수도 없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넬.


그러니 도덕적 혼란이다.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 모른다가 아니라, 여자들에게 강요되는 도덕적인 굴레들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통이란 말이 폐지된 사회에서도 여성들에게는 여전히 예전 도덕이 강요된다. 남자에게는 그럴 수 있지라고 넘어가는 일들도 여자에게는 비난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넬'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는데, 다른 작품들에서도 남자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래브라도의 대실패'에서 아버지가 등장할 뿐. 


이 소설집의 대부분은 여성 화자가 중심이다. 그리고 여성들의 삶이 중심을 이룬다. 직장을 가졌어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상태. 여기에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부분 여성이 처리해야 하는 상황. 


이혼 문제마저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남자와 함께 살면서 그 사람의 감정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생활. 그런 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모습.


어린 시절에는 동생을 보살펴야 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돌보고, 아이를 낳으면 다시 아이를 양육해야 하고, 이제 나이 든 부모가 있으면 그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여자의 삶.


소설집 첫 작품이 '나쁜 소식'인데,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는 여인들이 주인공이다. 첫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다.'(26쪽)


여기에 마지막 작품인 '실험실의 소년들'에는 엄마가 남겨둔 종이에 "완벽하게 아름다운 날!!!'(382쪽)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그들의 삶에 고난이 많았을지라도 그들 역시 아름다운 날들을 지나왔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날들을 기억한다. 하지만 삶에서 몇 안 되는 아름다운 날이 아니라, 아름다운 날들이 더 많은 그런 삶들을 여성들이 누려야 한다. 이런 구절이 나오는 까닭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여기에 이제 여성들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인 존재임을 말하면서 이 소설집은 끝난다. '나쁜 소식'으로 시작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여성이다. 그 점을 마지막에 실린 '실험실의 소년들'에서 '소년들의 운명은 이제 내게 달려 있다'(384쪽)고 여성 서술자가 말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이제 여성은 남성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남성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주체로서 등장하게 된다. 


결국 캐나다 판 '여자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집에서는 여성이 삶의 주체로 우뚝 섬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편 따로 떼어서 읽어도 무방하지만 전체를 다 함께 읽는 것이 훨씬 작품을 이해하는데 좋겠단 생각이 드는 작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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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적 킬러의 고백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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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술술 읽힌다. 글들이 긴박하고 빠르게 사건을 이끌고 간다. 잠시 망설임 틈도 없이 내용이 전개된다. 짧은 호흡으로 글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 새, 끝에 이른다. 이런 결말이 나버렸네. 이렇게 결말이 나는군 하고 소설 읽기를 끝낸다.


두 편의 소설이 길지는 않다. 중편 소설 두 편이라고 봐도 좋다. 하나는 책 제목이 된 '감상적 킬러의 고백'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악어'다.


둘 다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제목에 킬러란 말이 들어갔으니 당연히 살인이 나온다. 킬러다. 의뢰받은 사람(소설에서 이 킬러는 표적이라고 한다)을 죽이는 일. 그는 깔끔하게 처리한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 이것은 자신의 킬러 생활이 끝나는 것으로 나아간다.


킬러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생활을 없앤다는 말이다. 그런 킬러가 다른 사람과 비슷한 생활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과 비슷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킬러로서 지녀야 할 차가움을 잃는다는 말이니.


하여 그는 마지막 의뢰를 끝으로 실업자가 된다. 마지막 의뢰, 멕시코 사람을 표적으로 받았을 때 든 느낌. 그리고 그가 한 말. 마약을 공급하던 사람인데, 그는 주로 미국에 싼 값으로 마약을 공급한다. 이유는? 미국을 타락으로 이끌려고. 미국에 당한 멕시코 사람들을 위해서.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라틴아메리카의 비극을 지나치듯이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세풀베다가 사회적 현실을 눈 감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킬러가 등장하는 이 소설도 예외는 아니다. 킬러는 무감각해야 하지만, 왠지 라틴아메리카 사람을 표적으로 삼는 일에는 망설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소설에서 자신의 생활을 파탄내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 결론이 나기까지 소설은 빠르게 진행이 된다. 킬러의 입장에서 서술이 되면서. 


이 소설에는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현실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감출 수 없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반면 '악어'란 소설은 자본이 환경을 파괴하고, 원주민들의 삶을 파탄내고 있음을 살인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보호해야 할 동물을 죽여 밀수입하면서 환경을 파괴하는 자본의 횡포. 그런 자본의 횡포에 맞서는 원주민들. 그런 갈등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살인 사건을 쫓아가는 형사(보험사 직원)에 의해 사건의 전모가 하나하나 밝혀질 뿐이다.


빠른 속도로 사건은 결말에 이르지만, 이 과정에서 환경보호를 위한다는 자본가의 딸이 지닌 이중성을 만나게 된다. 원주민들을 도와주지만 결코 원주민이 될 수 없는 사람. 그러기에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삶터를 지키기 위해 이국 땅까지 와서 환경을 파괴하는 사람을 죽이지만, 자신들도 돌아가지 못하고 죽게 된다.


결국 파괴된 환경에서는 원주민들 역시 삶을 영위하기 힘든 것이다. 그들이 몇몇 자본가들을 처치한다고 해도 삶터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그만큼 자본은 깊숙이, 치명적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악어'란 소설을 통해 세풀베다는 그 점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국가가, 자본이 자행하는 환경 파괴, 또는 삶의 방식을 파괴하는 일은 몇몇의 복수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개인적인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풀베다의 이 두 소설을 읽으면서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넘어서 집단이(또는 사회가) 함께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킬러가 표적을 없앤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또 개인적으로 한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복수를 행한다고 해서 원주민들의 삶 또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개인보다는 좀더 넓고 깊은 해결책을 제시해야 함을 두 소설에 나오는 살인들을 통해서 세풀베다는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경 파괴, 전쟁 등을 보라.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정 개인을 없애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제도와 구조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개인들이 모여 더 큰 힘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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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 문학동네 시인선
최승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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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발간한 시집이 199권이 넘었다.  50권, 100권, 200권째는 그동안 시집을 냈던 시인들의 시를 모아놓은 시집을 (50권은 기념 자선, 100권, 200권은 티저 시집이다) 냈고, 또 두 번 이상 시집을 낸 시인들이 있으니, 총 시인은 200명이 채 안 된다.


그럼에도 시집에는 시인의 말들이 실렸으니, 시인의 말이 그들의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도 해줄 수 있고, 때로는 시의 이해를 방해할 수도 있다.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시인의 말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때로는 시인의 말이 한 편의 시처럼 다가올 때도 있다.


그런 시인의 말을 만나면 반갑다. 그리고 기쁘다.


하지만 가끔 시인의 말이 시를 이해하기 힘들게 할 때도 있다. 이럴 때 시인의 말은 '사족'에 가깝다. 물론 대부분 시인의 말은 화룡점정이라고 해야겠지만, 가끔은 도대체 시도 난해한데, 시인의 말은 그런 난해함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하는 그런 시인의 말은 사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공연히 뱀발을 그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예전에 문학의 갈래를 정리하는 글에서 시는 '세계의 자아화'라고 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즉 시는 자아의 외적 대상을 자아로 끌어들여 자아로 말하는 문학이라고 해석해도 된다. 그렇다면 시는 세계를 자신에게로 끌어온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아로 들어온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즉 존 버거의 말을 빌리면 세계와 자아의 거리를 없애는 것.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 사람과 동물, 사람과 식물, 동물과 식물 등등 존재하는 것들의 거리를 없애는 것이 바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의 말을 읽으면서 시와 다른 존재와의 거리를 느끼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런 시인의 말이 바로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동네에서 펴낸 이 책, 시인의 말 모음집은 또 한편의 시집을 읽는 것처럼 읽어도 좋다. 대부분의 시인의 말이 '사족'보다는 '화룡점정'에 가까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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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숲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천선란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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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등장인물들이 겹친다는 점에서 '연작소설'이라고 한다. 각 소설마다 주인공은 다르지만, 이들은 한 공간에서 함께하고 있다.


'바다눈, 우주늪, 이끼숲'이렇게 세 편이 실려 있는데 공통된 공간은 지하세계다. 인류가 지상에서 살기 힘들어져 건설한 지하 세계.


이 지하세계는 철저하게 통제되는 사회다. 세 편을 읽다보면 연결되는 점이, 이들의 머리에는 칩이 심어져 있어서 이들이 어딜 가나 확인이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지하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는 특정 약물을 섭취해야 한다.


이 약물을 섭취하지 않으면 정신개조를 받으러 끌려간다. 이는 인간의 의식까지도 통제가 되는 사회라는 말이다. 이동의 자유는 있을지라도 모든 것이 감시받는 사회, 하다못해 통신까지도 감청이 되는 사회고, 허락되지 않은 아이는 낳아서는 안 되는 사회다.


하지만 이런 사회에서도 다른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저항이라고 해도 좋은데, 이런 저항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발견과 모험'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바다눈'에서 은희와 마르코의 대화에 이 말들이 나온다. 그리고 이 말들은 다른 두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들은 기존 세계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며, 그곳으로 나아가려는 모험을 한다. 물론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한다.


"모험과 도망."

하나는 대범했고 하나는 조급했다.

"발견과 추방."

하나는 위대했고 하나는 초라했다.

"미지의 세계와 타락한 세계."

하나는 신비로웠고 하나는 두려웠다.

"우린 산 채로 묻힌 거야."

우리의 세계는 조급하고, 초라하고, 두려웠다. (83쪽. '바다눈'에서)


하지만 은희는 사라진다. 목소리를 잃었다고(팔았다고) 하지만 사라질 필요가 없을텐데, 사라짐은 타락한 세계로부터의 추방과 도망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은희는 엄마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파는 모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타락한 세계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발견을 통해 모험으로 나아갔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래서 남아 있는 마르코가 친구인 소마를 위해서 모험을 하는 '이끼눈'으로 연결이 된다.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의조. 의주의 쌍둥이인 의조는 둘 중 하나만 인정받는 사회에서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나 있는 존재가 없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약물로, 통제로 없는 존재로 만들어도 있는 존재는 나름대로 있음을 증명하게 된다.


환풍구로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의조. 그런 의조가 나중에는 이 지하 세계를 폭발시키겠다고 결심한다. 그렇다. 타락한 세계는 더이상 존재하면 안 된다. 그러나 아직 타락한 세계는 굳건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은 실패하고,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은 물거품이 되며, 노동 근무 조건도 열악해서 언제든지 사망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이끼숲'에서 유오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죽는다. 그런 유오의 클론을 데리고 유오가 가고 싶어하던 지하 1층 돔으로 가려고 하는 친구들.


그 친구들은 모두 조급하고, 초라하며, 두려운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친구들은 소마를 돕는다. 유오의 클론과 함께 식물들이 있다는 돔으로 소마를 가게 하려고.


한명 한명 자신이 맡은 일을 통해 소마를 지하 1층의 돔으로 보낸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식물들은 죽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이 닫힌 세계를 나와 지상으로 가는 것. 


지상에 나온 소마는 온몸이 이끼로 덮이지만 비로소 자신이 닫힌 세계에서 나왔음을 인식한다. 그렇다. 그들은 지하 세계라는 곳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고 모험에 성공한 것이다. 비록 밖으로 나온 사람은 소마 하나지만, 모두가 함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소설은 암울한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자신들의 삶을 찾아가는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유오의 죽음으로 자신을 유폐시켰던 소마가 친구들과 함께 유오의 클론을 데리고 지상으로 가는 장면은, 닫힌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그를 벗어나려는 존재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마르코가 파업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들에게 동조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안락은 홀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해야 한다.


닫힌 세계를 열린 세계로 만드는 일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닫힌 세계에 갇혀 사는 삶이 바람직하지 않음은 이 세 편의 소설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지금 있는 곳에서 다른 곳을 꿈꿀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그런 존재들로 인해 세상은 열린 세상이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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