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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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불현듯, 어라 이 소설집에 '안녕 주정뱅이'라는 소설은 없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제목은 '안녕 주정뱅이'지만 그러한 제목을 가진 소설은 없다. 그렇다면 이런 제목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야 한다. 


분명 공통점이 있으니 이런 제목을 붙였겠지. 주정뱅이라는 말부터 생각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주정쟁이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하긴 '-뱅이'라는 말에 높임의 뜻은 없을테니, 그렇다고 '-쟁이'라는 말에도 높임의 뜻은 없을텐데, 주정쟁이는 '주정을 부리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 그냥 그러한 속성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제목에 '주정뱅이'라는 말이 있으니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술과 관련된 일들을 겪은 사람들이리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생각을 해보니, 인물들 모두 술을 마시고 그로 인해 어떠한 일들을 겪게 된다. 


우리 인생에서 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는 하지만 소설집에 실린 소설 모두가 술과 관련이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읽다보니, 술로 인해 우리는 뜻하지 않은 일들을 겪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어디 우리 인생에서 뜻하지 않는 일이 술로만 일어나는가. 인생 자체가 뜻하지 않은 일들의 연속 아니던가. 그러한 우연들이 겹쳐 인생을 이루고 있으니.


술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소설은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연작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술과 비슷하게 뜻하지 않게 벌어지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안녕'이라는 제목이 들어갔나 보다.


'안녕' 우리가 인사할 때 주로 쓰는 말 아닌가. 이는 주정뱅이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인생에서 뜻하지 않게 겪게 되는 일들을 외면하고 회피하지 않고 그것들을 마주보겠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층'에서, 230쪽)


당연히 내 탓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게 다가온 일이다. 이미 내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내 탓은 아니잖아요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마주해야 한다. '안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면서 내 삶을 지속해야 한다.


그러한 받아들임, 소설집의 첫소설인 '봄밤'에서 아프게 다가온다. 지독하리만큼 힘든 상황임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분자를 키워가려고 한다. 분모가 어려움, 안 좋음이라면 분자는 할 수 있음, 좋음이라고 한다.


분자와 분모가 같으면 1이 되겠지만, 우리 인생은 불확실한 분모 쪽이 클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분모 쪽은 우리의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어느 순간 뜻하지 않게 훅 치고 들어오는 불행들, 사건들... 불확실한 분모를 어찌할 수 없다면 인생에서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어디인가? 바로 분자 쪽 아니던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 상대에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려고 하는 것. 그것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부분을 하는 일. '안녕 주정뱅이'하고 술을 맞이하는 일이다.


'봄밤'에서 영경이 하는 말.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봄밤'에서, 25쪽)


수환이 하는 말.


'분모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분자라도 늘려야지.' ('봄밤'에서, 32쪽)


이런 장면 아니겠는가. 이것을 꼭 상대방과의 관계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안녕 주정뱅이'라고 하는 순간이, 내게 찾아오는 온갖 불행들, 내 책임이 아닌 것 같은 수많은 일들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면서, 그것이 내 탓이 아니잖아요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일로 바꾸는 때가 된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분자를 늘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분자를 늘리는 인물들만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인생은 그렇지 않으니까. 다만 작가는 분모에 들어갈 수 있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카메라, 층'은 이런 점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자, 이런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고. 그것은 어찌할 수 없다고. 어찌할 수 없으니 그냥 포기할 것이냐고. 아니라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하여 '봄밤, 이모'에서는 어찌할 수 없음에도 분자를 늘리는 사람의 모습이 펼쳐진다. 나머지 소설들에서는 분모에 해당하는 일들과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하여 분모에 해당하는 삶이든, 분자에 해당하는 삶이든 모두 우리 삶의 일부임을, 그것들이 우리 삶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술을 마시는 경우가 기분이 좋아서, 또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등등 다양한데, 술이 외부에서 내게 들어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일들과 같다. 그 일들이 때로는 나를 좋게도, 나를 좋지 않게도 하지만 한번 마신 술이 다시 나가려면 시간이 필요하듯이 그러한 일들도 시간이 필요함을. 


그 시간 동안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대면할 수 있는 자세를 지녀야 함을.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에서 분모와 분자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모습임을 이 소설집은 생각하게 한다. 


그렇지. 나도 내 삶에서 어찌할 수 없는 분모에 모든 힘을 쏟아붓기보다는 분자를 어떻게 키울지에 힘을 써야겠다. 이것이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문학을 만나는 일은 분자를 키우는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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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6 - 볼라뇨 20주기 특별합본판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송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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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뇨가 죽기 직전까지 썼던 소설이라고 한다. 완성작이냐 미완성작이냐는 비평가들에 따라 다르지만, 작가가 죽기 전에 5권으로 분리해서 출간했으면 했다는 말을 했다고 하니, 구성은 완성된 작품으로 봐도 될 듯하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단 한 권으로 출판이 되었지만 (편집자는 내용 상으로 한 권으로 출간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겼다고 한다) 5부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5부로 구성된 내용과 다섯 권으로 나눠서 출판했으면 한다는 작가의 말이 통하기 때문에, 이 작품을 굳이 미완성작이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작가가 구성이나 표현을 좀더 다듬었을 수는 있겠지만)


제목부터 이게 뭐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2666이라니... 숫자가 나열된 제목인데, 도대체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해설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데, 해설 역시 딱히 이거다라는 설명을 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그냥 미지의 숫자로 남겨두자. 다만, 볼라뇨가 쓴 다른 소설인 [부적]에 2666년의 공동묘지라는 말이 나오니, 묘지와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로베르토 볼라뇨, 부적, 열린책들. 김현균 옮김. 2010년. 초판. 88쪽)


그렇다면 무엇이 묘지인가? 바로 약자들의 삶이 묘지와 같다는 말이다. 이 책의 4부에는 이러한 묘지와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수많은 살인사건. 그러나 대부분 죽어가는 사람들은 여성들이다. 여성들이 죽어나가고 있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않는다. 지속된다. 경찰들은 무능력하고, 고위층들은 마약밀매업자나 다른 집단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에게 약자들의 죽음은 그냥 죽음일 뿐이다. 이런 모습을 작가는 법의학 보고서처럼 펼쳐 보여줄 뿐이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아니 밝힐 수가 없다. 이는 특정한 범인이 아니라 사회가 살인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회를 묘지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공간으로 이런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산타테레사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면, 1,2,3,5부에서는 다른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1부에서는 비평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유럽 사람들이다. 유럽, 바로 제국주의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했던 나라 아닌가. 이들에게는 그들이 추종하는 작가의 행방이 중요해서 산타테레사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약자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 의해서는 묘지가 보이지 않는다. 묘지 역시 그들에게는 공원이 될 뿐이다.


그러나 묘지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이방인이 될 수 없다. 이방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2부에 등장하는 아말피타노가 이런 상황이다. 그 역시 산타테레사에서는 이방인이지만 같은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완전히 그곳에 동화될 수는 없지만 위험은 감지한다. 그의 딸인 로사에게 그곳을 떠나도록 하는 것이 그런 모습이다.


3부에 등장하는 인물은 흑인이자 미국 시민인 페이트다. 그 역시 산타테레사에서는 이방인이다. 그렇지만 흑인이라는 조건이 산타테레사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감할 수가 없다. 그 역시 어느 정도는 약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미국 시민이다. 그곳에서 일을 해결할 수는 없다. 다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할 뿐이다. 이렇게 3부까지 여러 인물을 통해서 산타테레사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 4부에서 산타테레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준다. 끔찍한 지옥도. 그곳은 약자들에게 묘지와 같은 곳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 묻힐지 모르는 곳. 그렇게 사람들이 묻히는 묘지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진실이 묻히는 묘지라는 의미도 지닐 수 있다. 이곳에서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5부에 나오는 아르킴볼디 이야기는 앞부분에 등장하는 비평가들이 산타테레사로 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가 왜 산타테레사로 가게 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과정이 서술되기 때문이다.


아르킴볼디의 삶을 통해 또다른 지옥과 같은 모습이 펼쳐진다. 이번에는 라틴아메리카가 아니라 유럽에서 벌어진 지옥의 모습. 그것은 세계대전을 통해 겪는 사람들의 비참함이 아르킴볼디의 모습을 통해서 펼쳐진다. 그렇지만 그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약자들은 묘지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과 달리 소설을 통해 벗어난다. 


아르킴볼디가 겪은 일들이 라틴아메리카의 약자들이 겪는 일들과 다르게 펼쳐지는데, 이런 서술이 제국주의 중심부의 사람들의 처지가 라틴아메리카의 사람들의 처지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약자들이 겪고 있는 지옥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이런 지옥도를 펼쳐보이는 것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약자들이 겪는 일들을 외면할 수 없는 작가의 책임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고 아주 방대한 소설이지만 읽을수록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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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프라하 도시 산책 시리즈
최유안 지음, 최다니엘 사진 / 소전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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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아름다운 도시라고 했다. 체코에 있는. 아직은 가보지 못한 곳.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고 마음 먹고 있는 곳.


체코 하면 떠오르는 작가는 세 명이다. 카프카는 물론이고, 밀란 쿤데라, 그리고 카렐 차페크. 이 중에서 체코어로 작업을 한 작가는 차페크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쿤데라는 말년에 프랑스에 살면서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고 하고, 카프카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으니.


그럼에도 카프카는 체코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생활은 거의 프라하에서 이루어졌다. 나중에 병에 걸려 요양원을 왔다갔다 하지만, 직장도, 작업도 모두 프라하에서 이루어졌으니... 어떤 언어로 작품이 쓰였느냐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고 본다.


한때 체코하면 카프카였고, 카프카하면 [변신]이었는데, 이제 장소는 범위를 좀 좁혀도 되고, 작품은 더 넓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카프카를 체코라고 넓게 보지 않고 프라하로 한정해서 봐도 된다는 것. 장소는 프라하, 그렇다면 프라하에 가면 카프카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당연히 프라하 곳곳에 카프카의 정취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의 얼굴 조각이나 흉상도 그렇고, 카프카 박물관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카프카 관련 장소를 가보고 만다.


그래, 프라하까지 가서 카프카만 쫓아다녀서야 되겠는가. 거기다 프라하에 머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텐데... 


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 카프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만 프라하에 머물면 무언가가 빠진 느낌을 들테다. 그 빈구석을 채워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작가인 저자가 또다른 작가인 카프카를 프라하에서 만난다. 그가 걷던 길, 그가 살던 집, 그가 어떤 마음으로 지냈을지를 직접 그곳에 가서 지내면서 찾고 느끼고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카프카에 대해서. 또 카프카를 통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사진작가의 사진도 훌륭해서 책을 통해 프라하를, 카프카를 충분히 만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마음에 드는데, 무엇보다 카프카의 작품과 그가 살던 장소를 연결지어서 설명해주고 있는 부분이 좋다. 또한 작가로서 카프카와 공감하는 부분을 설명하는 부분도 좋고.


카프카의 생애에 걸친 장소가 프라하라면, 프라하에 가서 카프카의 흔적을 찾아 느끼고 오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또 카프카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가 아닌가.


이 책을 읽다보면 그래서 카프카의 작품을 [변신]에서 다른 작품들로 확장할 수 있게 된다. [소송]이라든지, [성]처럼 잘 알려진 작품도 있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도 있지만, 카프카를 [변신]의 작가로만 국한시키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은 프라하는 깊게, 카프카는 넓게 만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런 작가를 지니고 있는 프라하라는 도시가 부럽다는 생각도 하고. 물론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작가들의 생가를 복원하고, 그의 문학관을 세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생가나 문학관들이 천편일률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언가 아쉬움이 있었는데...


마을(도시) 전체가 한 작가와 관련이 있고, 마을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 아직은 우리나라에는 부족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서울만 해도 알려진 작가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도 많지만, 과연 그곳을 잘 찾을 수 있을까 하면 그렇지 않다.


물론 프라하도 전쟁으로 개발로 카프카의 흔적이 많이 지워졌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기억하고 보존할 수 있는 카프카 관련 장소들은 후세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도 찾아볼 수 있게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이 책을 통해서 받았다.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카잔차키스가 크레타 섬에서 기념되고 있듯이 그렇게. 우리 역시 작가들을 그렇게 마을과 관련지어서 기억하고 보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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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우어
천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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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소설을 읽을 때 늘 기대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따스함. 따스함으로 인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모난 마음이 둥글어지면서, 다른 존재들에 대한 공감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천선란의 소설을 읽는 일은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일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 속, 인물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바라볼 수 있는데, 그것이 분노나 증오, 또는 몰이해가 아니라 사랑과 포용, 이해로 다가오면 소설을 읽는 일은 즐겁다. 결말이 비록 비극으로 끝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비극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 따스함이라는 씨앗을 남겼으니까. 그 씨앗이 언젠가는 싹이 틀 테니까.


여러 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공통점은 역시 따스함이다. 이 따스함이 천선란 소설을 계속 읽게 만든다. 또한 이러한 따스함은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서도 이 따스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따스함은 다른 존재들에게로 퍼져나간다.


공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마음이 함께 울리는 상태.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뼈의 기록'이다. 


로봇이 등장하는데, 이 로봇이 하는 일이 장례지도사다. 세상에 사람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는 로봇이라니... 반려 동물을 넘어서 반려 로봇이 나오는 세상이지만,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삶의 끝자락을 로봇에게 맡기다니...


로봇이 함께한다고 해서 사람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나? 오히려 로봇보다도 못한 인간들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로봇을 보면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 편견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례를 치르고 휴식 시간에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 청소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로봇. 그 사람과 마음이 통하는 로봇. 그 사람이 죽자 평소에 뜨거운 것을 싫어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주로 관을 보내려는 로봇. 규칙을 어긴 로봇을 폐기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그 로봇을 옹호하고 도와주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공감이고 공명이다.


그렇다. 우리가 관계를 맺는 존재들을 어떠하다라는 인간의 관점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고정불변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들이 변해가듯 다른 존재들도 변할 수 있음을. 그것이 비록 로봇일지라도.


이렇게 천선란의 소설에는 다른 존재들이 나오지만, 그 존재들을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는다. 공존하는 모습. 아니, 공존해야만 하는 모습을 천선란의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과도 공명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인간끼리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공명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서프 비트'에서 만날 수 있다. 인간치고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태어난다.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영웅처럼,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겨야 할까. 아니면 우리와 함께 살아가지만 다른 모습을 지닌 존재로 봐야 할까? 


영화 [X맨]을 보면 돌연변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들의 다른 반응이 나온다. 또한 돌연변이들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나오고. 그 영화와 연결이 될 수도 있지만, 천선란의 소설은 그들을 영웅시 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능력을 아직 다 깨닫지 못한 인물을 내세워서 그렇겠지만,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냥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들과의 공감, 공명이 바로 우리 삶을 더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서프 비트'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이들은 그 다른 능력을 우리들의 삶에서 소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해결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인물은 물 속 쓰레기를 치우는 일에, 밤에도 낮만큼 잘 보이는 눈을 지닌 인물은 길 잃은, 또는 위험에 처한 동물을 구해주는 등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내지 않고... 이러한 존재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는데...


그러니 우리 상대를 나와 다른 너로 선을 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겹치는 경계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어떤 존재들과도 겹치는 경계가 있음을, 그 경계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공감, 공명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음을 천선란의 이번 소설집 [모우어]를 통해 생각한다.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했다는 것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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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장민 외 지음 / 허블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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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편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과학문학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과학적인 내용을 가미한 소설들이다. 영어로 SF소설이라고 해도 좋겠다. 최근에 이런 경향의 작품들이 많이 읽히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공상이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겠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현실에서도 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작품을 통해서 경험하게 해준다.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작가가 만들어낸 세상은 그냥 허구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세상은 현실 속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삶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니 이러한 소설들을 허무맹랑한 소설이라고만 생각하지 말자. 처음에 실린 작품 '우리의 손이 닿는 거리'를 보면, 인간이 우주를 개척하기 위해서 거대한 로봇을 만들어낸다. 이 로봇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중추신경계와 연결되어 인간의 몸을 확장한다.


즉 우리는 확장된 몸으로 우주에 나가게 된다. 무려 18미터 짜리 로봇(몸)이다. 18미터의 몸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의 행동은 어떻게 될까? 거기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물론 진화를 생각하면 수천 년 또는 수만 년이 걸리겠지만, 그러한 유전적 진화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조건에 맞게 신체 활동을 조절하게 된다.


커다란 유기체가 된 인간. 그런 인간은 본래 인간의 몸과 같은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들이 로봇 옷을 벗었을 때 자꾸 부딪히게 된다. 그들의 감각은 로봇을 입었을 때의 감각과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치면 괜찮겠지만 시간이 달라진다. 


보통 인간의 몸으로 겪는 시간과 거대 로봇을 입고 행동하는 인간의 몸으로 겪는 시간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단위가 달라진다고 해야 하나. 이것이 문제가 된다. 인간의 욕망이 더 거대한 로봇을 원하게 되고, 인간의 시간은 점점 길어진다.


즉, 수명의 연장이 자연스레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축복일까? 재앙일까? 과연 이러한 거대 로봇과 인간의 신경이 연결될 필요가 있을까? 소설은 이 점에서 할 수 있으니까 한다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과연 인간은 할 수 있으면 다 해야 하는가? 그것이 거대 로봇을 계속 키워서 인간 신경망의 속도로를 늦추는 쪽으로 발전한 소설의 결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바람직한가? 우리는 할 수 있는 일과 가치의 균형을 생각해야 하지 않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 번째 소설 '개인의 우주'를 읽으면 더 잘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백 년이라고 잡아도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도 짧다. 그럼에도 인간은 저 먼 우주를 탐구하려 한다. 비록 자신이 결과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후대가 결과를 만날 수 있을 테니.


개인이라는 인간에서 인류라는 종으로 넘어가면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을 무한히 할 수 있다. 당장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더욱더 '가치'의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다. '가치'를 윤리라고 해도 되리라. 첫번째 소설에서 계속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과학기술과 윤리 아니겠는가.


이런 균형이 깨질 때의 모습을 '하늘의 공백'에서 만나볼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들이 일관된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현재의 과학기술을 반영하는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는 공통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로봇이 주인공인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결말의 반전이 기가 막히다. 과연 그런 세상이 행복한 세상일까? 읽어봐야 반전의 묘미를 알 수 있으니, 더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들이 어떻게 분류되고 억압받는지를 '피폭'이라는 소설에서 만날 수 있으니, 일종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소설인 '피폭'을 읽어보면 좋겠다.


마지막 작품인 '달은 차고 소는 비어간다'는 다중우주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인간이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물론 다중우주가 있다면, 거기에 개입하는 순간 우주가 달라질테니...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겠지만.


다섯 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할 수 있으니 해야 한다'는 신념을 고수해야 하는가? 할 수 있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해버려서 위기에 빠진 적은 없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좋은 생각거리가 된다. 다른 세상을 만나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미리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소설은 준다. 이 작품집들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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