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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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들 모음집이다. 역시 보니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반전이 일어나는 작품. 그 특유의 유머와 풍자가 들어있는 소설들.


소설집에 실린 소설 중에 돈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설이 있는데, 그렇다. 우리는 자본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성장, 성장하는 것은 바로 이윤을 남기는 일이고, 이윤은 곧 자본이 추구하는 기본 목표이니, 이러한 자본에 잠식당한 삶은 다른 것을 볼 수 없게 한다.


하지만 다른 것을 보아야 한다. 소설 '탱고'에서처럼 자본에 둘러싸인 삶들 속에서도 자본이 아닌 즐거움을 추구하는 모습, 그러한 모습이 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점을 보여주는 소설도 있는데...


다른 소설들보다 마지막에 실린 '사기꾼들'이라는 소설이 마음에 남는다. 사기꾼들. 우리가 생각하는 남을 등쳐먹는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다. 두 화가가 등장한다. 한 화가는 보통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 또 다른 화가는 평론가들에게 인정받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


쉽게 이야기하면 달력에 들어가는 듯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무엇인지 모를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두 화가는 자신에게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좋은 그림이라고 해도, 비평가들이 훌륭한 그림이라고 해도 그들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 점을 감춘 것이 바로 사기꾼과 같다고 여기고.


그렇지만 예술이 그러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예술 아닌가. 당신은 왜 저 사람처럼 그리지 않느냐고 하는 말이 통용될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예술가의 세계 아닌가.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지금도 세계에서 뛰어난 화가로 일컬어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보라.


둘의 사이가 좋았던가. 둘이 서로의 그림을 그렇게 훌륭하다고 인정했던가. 속으로는 인정했을지 모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그다지 좋은 평을 하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으니...


예술은 그러한 것이다. 자기만의 것. 자기만의 표현이 있고, 자기만의 관점과 기법이 있다. 그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그것이 사기일 것이다.


표절이 가장 엄격하게 금지되고 처벌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따라서 예술은 다른 사람을 따라해서는 안 된다. 자신만의 길, 그 길을 가는 것.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를 비교한다. 누가 더 좋은가? 누가 더 잘 그리는가? 문학으로 치면 누가 더 잘 쓰는가?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오히려 이러한 비교가 예술가들을 나락으로 몰지 않는가.


예술가는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혼신의 힘을 다해 했을 때 작품은 그것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작품을 사기라고 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활동을 한 것이기에.


그 점을 이 소설의 뒷부분에서 잘 보여준다. 다른 사람의 평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자신들은 안다. 자신의 작품이 지닌 의미를, 훌륭함을. 


이를 거꾸로 생각하면 자신들의 작품이 지닌 한계를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한계를 알고 있음에도 굳이 언급하지 않으면 그것을 사기라고 할까? 아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예술가가 제 작품은 이 점이 부족해요 하면 겸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다른 의미를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러니 굳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지닌 한계, 부족한 점, 자신이 무엇을 못하는지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면 되고, 다른 예술가들이 잘하는 것을 인정하면 되는 것 아닌가.


비교가 불필요한 곳. 오히려 비교가 작품이나 작가를 망치는 곳, 그곳이 바로 예술이라는 장 아니겠는가. 


이 '사기꾼들'이라는 짧은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보니것 역시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고.


이런 예술의 장이니 '표절'이 범죄 취급받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이윤을 위해 남을 따라하고, 그것을 감춘 것이니. 자신의 한계를 말하지 않은 것과는 다른 차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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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0-1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트 보니것, 에세이를 재밌게 쓰던데 소설은 어떨지 궁금하군요.

kinye91 2025-10-17 17:51   좋아요 1 | URL
소설도 에세이만큼이나 위트와 풍자가 넘쳐난다고 생각해요. 저는 커트 보니것의 에세이와 소설 둘 다 좋더라고요.

yamoo 2025-10-18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니것 소설 10권 있는데 아직 3권밖에 안 읽었어요! 세상이 잠든 동안...이거 저도 읽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생각이 안나네요..ㅜㅜ 보니것의 대표작 <제5도살장>을 읽어야 하는데...아직까지 못 읽고 있네요..하~

kinye91 2025-10-18 11:56   좋아요 1 | URL
저는 요즘 보니것 소설을 찾아 읽고 있는데 제5도살장 좋았어요.

페크pek0501 2025-10-19 17:01   좋아요 1 | URL
제5도살장, 저 읽었어요. 완독했죠. 그러니까 보니것의 소설을 제가 읽은 거네요.
와!.. 이젠 저자와 책 제목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지점에 제가 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 기억력이 엉망인 것은 너무 책을 많이 알고 있어서라고 애써 합리화, 해 봅니다. 합리화하지 않으면 제가 너무 바보 같아서...ㅋ

kinye91 2025-10-20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책을 너무 많이 읽으신 것 같아요. 그러다가 가끔 읽은 책 또 읽는 것은 아닌지... 저는 그런 의심이 들 때도 있거든요.
 
가장 파란 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9
토니 모리슨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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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읽고 싶단 생각을 하다가도 선뜻 손에 잡지 못하는 이유는, 무언가 마음에 묵직하게 들어앉은 무거움 때문이다.


쉽지 않다. 편하게 읽기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극이 마음에 남아 글을 읽기 힘들게 한다. [빌러비드]도 그러했고, [술라]도 그러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어쩌면 '읽어야만 해'라는 당위가 나를 자꾸 토니 모리슨의 소설로 이끄는지도 모른다.


왜냐 토니 모리슨이 소설에서 펼쳐 보이는 세계가 지금도 진행 중이기 때문에... 소설 속 흑인들(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 책에서도 흑인이라고 하니, 그냥 흑인이라고 하자)이 겪었던 일들을 지금 흑인들이 겪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다른 나라의 인권 문제를 툭하면 걸고 넘어가는 나라에서 여전히 인종에 따른 차별이 있다는 사실.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 그러니 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읽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토니 모리슨의 소설에서는 흑인 중에서도 더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기 때문에.


속된 말로 하면 징글징글한 억압 속에서 그럼에도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 그런 모습들. 하지만 그 삶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가장 파란 눈'. 무엇일까 생각해 볼 필요 없이 백인들이 지닌 파란 눈을 의미한다. 흑인소녀 페콜라가 원하는 것은 '가장 파란 눈'.


당시 소녀들이 가지고 있던 인형들이 하얀(분홍빛 피부라고 나온다) 피부에 금발, 파란 눈을 했다고 하고, 인기 있던 소녀배우들이 그러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니, 아름다움의 기준이 백인에 맞춰져 있었던 것.


이런 현실에서 아름다움이란 상대적인 것이라고, 너도 아름답다고 하는 말은 결코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말이다. 직접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아름다움의 기준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도 한참 자랄 나이인 어린 시절에. 하여 토니 모리슨은 직간접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정해지고, 그것이 아니라면 아름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가치 기준을 백인의 기준에 맞추는 어른들의 모습도. 어린 시절의 흑인 소녀를 서술자로 하면서도, 페콜라의 엄마와 아빠도 역시 소설 속에 중요하게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이 왜 페콜라가 '파란 눈'을 원하게 되었는지, 또한 그것이 어떤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백인들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을 토니 모리슨은 '그녀는(페콜라의 엄마) 신체적 아름다움을 미덕과 동일시하면서 정신을 빈약하게 하고 구속하고 자기비하는 산더미처럼 쌓아올렸다. ... 영화를 통해 교육 받고 나니, 눈에 들어오는 얼굴마다 절대적 아름다움이라는 저울 위 특정한 범주에 넣는 일을 안 하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저울은 은막에서 그녀가 오롯이 흡수한 것이었다.'(152쪽)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백인들의 가치를 자신의 가치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자식들에게도 대물림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니야, 너는 너야." 라고 한다고 그 말이 먹힐 것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소설 속 페콜라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자신이 파란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믿지만, 그것은 미쳤기에 가능한 일이다. 즉 페콜라가 소망하는 일은 정신을 잃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때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운동이 있었다. 이는 백인의 기준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에는 기준이 여럿 있다는 것. 그러니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는 것. 즉 백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너 미쳤구나, 너는 너 자체로도 아름다워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런 인식을 강요하는(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회를 인식하고, 사회의 기준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만드는 일도 함께해야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했다. 성형천국이라는 말을 듣는 우리나라. 의사들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의사들이 성형에 매진하는 경우가 많은, 성형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사회 현실이.


그렇게 만드는 은막(텔레비전, 영화, 각종 인터넷 매체 등등)이 성행하는, 너무도 당당하게 '전과 후(before, after)'를 보여주는 광고들. 그러니 아름다움의 기준이 이미 정해져 있고, 너는 그런 기준에 미달하니 성형을 해서라도 거기에 도달해야 해라는 암묵적인 강요.


특히 연예인들을 통해 내면으로 파고드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에도 파고들어 있지 않은가. 우리 역시 소설 속 페콜라와 비슷한 경험, 생각을 하지 않는가.


추하다고 놀림을 받고, 성형을 하면 그것에서 벗어나 남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소설 속 페콜라는 파란 눈을 가질 성형을 하지 못한다. 가난한 흑인 집에서,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집에서 그러한 일은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엉뚱한 사람을 찾아가 소원을 말하지. 하지만 이 소원을 듣는 사람도 백인이 아닌 백인성을 추구하는 혼혈인이다. 이렇게 사회 전체가 특정 기준을 따르려고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스레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성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페콜라처럼 자신은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에 좌절에 빠지지 않을까. 그러면 안 되는데... 라고 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소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사회 분위기가 그러한데,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텐데...


토니 모리슨의 [가장 파란 눈]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 사회를 생각하게 되니... 쉽게 읽을 수 없는 소설임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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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 - 한국과학문학상 대표작가 앤솔러지
김초엽 외 지음 / 허블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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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놓은 작품집이다. 다섯 작가의 소설을 엮었는데, 김초엽, 천선란, 김혜윤, 청예, 조서월이 참여했다.


과학문학상 작품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SF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장르 소설이라고 하는데, SF소설이라는 용어에 영어가 들어가 있다면, 과학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는 과학적인 상상력이 담긴 소설이라고 더 쉽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첫소설이 김초엽의 '비구름을 따라서'라는 소설인데, 이 소설에는 여러 우주가 나온다. 다른 우주에서 온 물건을 모으는 사람. 다른 우주를 상상하고, 그 우주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 가끔 우리도 그런 상상을 하지 않나. 여기 사는 나 이외에도 다른 우주에 사는 내가 또 있다는.


같은 나일 수도 있지만 다른 나일 수도 있는데, 그런 우주를 상상한다면, 지구에 머물렀던 시선을 광활한 우주로 돌릴 수 있다. 또한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고. 그렇다. 나는 어떤 하나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여러 존재로 늘 변화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물건은 당연히 지구상에서 인간들 또는 다른 존재들이 만든 것이지만, 가끔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지 않은가. 그것들에 상상을 붙인다면, 다른 우주를 상상할 수 있고, 그렇게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것들이 우리 곁에 있을 수도 있음을.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그렇게 넘어온 물건들은 사소한 것들이다. 흔한 것들, 그래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 그렇다면 소중한 존재는 이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넘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소중하다는 것은 자신이 잃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초엽의 소설을 읽다가 이런 경우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 가끔 어떤 물건이 없어졌는데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어느 순간 어디에서 나오겠지 했는데, 끝까지 찾지 못하는 경우, 이런 경우를 다른 우주로 그 물건이 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물건들은 어느 순간 내게는 소중함이 아니라 무심함으로 대했던 것들이었을 것이고, 진짜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은 그렇게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모으는 사람, 다른 우주에서 온 것들을 발견하는 사람은, 익숙한 것에서도 낯섬을 찾고, 고정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신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생각. 이것이 김초엽 소설을 읽으며 든 생각이었다.


천선란 소설에는 좀비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좀비들(?)을 통해서 이상하게 사랑을 느낀다. 너무도 사랑하는 존재들. 그래서 떠날 수 없는 좀비. 좀비가 되어 과거를 잊을 수 있기에 기록으로 남겨놓는 사람. 그런 사람과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 그들을 좀비라고 한다면... 참...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중에 좀비보다 더한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좀비하면 과거를 잊은, 오로지 피에만 반응하는 그런 감정이 없는 존재로 생각하는데... 그래서 서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좀비가 되면 물어뜯으려 덤벼들기만 하는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좀비에게서 사랑을 발견한다.


아무리 비극적 상황에 처했더라도 사랑은 그런 비극을 넘어설 수 있음을, 좀비에 대한 관점의 변화라고 해야할까. 여하튼 사랑을 느끼게 하는 좀비 이야기 '우리를 아십니까'


김혜윤의 '오름의 말들'은 과학소설이지만 우리 현실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졌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존재들을 아무런 망설임없이 희생시키는 존재들. 그런 모습을 우리 사회에서도 보여준 이들이 있었는데...


이런 이들이 있다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 '오름'이라고 이름지은 외계생명체들과 대화하기 위한 노력, 그러한 노력이 일거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지원이 끊기고 심지어는 그런 존재들을 구경거리로 삼으려는 존재들. 그런 존재와 정책에 맞서는 '오름'과 대화하려는 사람들. 


그래서 이 소설은 슬프다. 여전히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기에...


청예의 '아모 에르고 숨'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를 복제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결말에 반전이 있는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일 수도 있음을... 진정한 사랑은 구속이 아니라 해방임을, 상대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는 일일 수도 있음을.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면 복제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과연 복제인간은 인간의 대용품인가? 복제인간을 폐기한다고 하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런 용어를 쓰는 것 자체가 문제임을...


조서월의 'I'm Not a Robot'은 지금 이 시대에 인간임을 증명하게 하는 캡챠에서 비롯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이 된 이 문구를 인정받기 위해 숫자는 물론이고 사진 속에서 제시된 과제를 제대로 수행해야만 한다. 그런데 가끔 제시된 과제를 제대로 이해 못할 때가 있다. 여기서 착안한 소설이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지만 외진 곳에 홀로 떨어져 있기에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쓴 소설을 보내야 하는데, 번번이 로봇이 아니라는 인증에 실패하는 사람. 오히려 그런 인증을 할 수 있는 로봇.


외진 곳에서 쓸쓸한 풍경 속에서 인간과 로봇이 소통하는 모습이 이 소설에 보이는데, 황혼녘 쓸쓸함 속에서 서로를 위하는 모습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앞으로 더 많은 기술이 발달하면 이렇게 인간임을 내가 입증하지 못하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예전에 나 자신임을 인증하기 위해 핸드폰이 꼭 필요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핸드폰을 지니지 않았는데, 핸드폰으로 문자 인증을 해야지만 나 자신임을 인증할 수 있다고... 세상에 나라에서 발행한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것으로는 안 된다고... 그래서 결국 나 자신임을 인증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런 경우가 바로 캡챠에서 발생할 수 있다. 하긴 어떤 사람들은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지 못해 결국 원하는 것을 사지(먹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으니, 이것이 과연 인간을 위한 기술발전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다섯 편의 소설들. 각자 다른 배경, 인물,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공통된 무엇을 찾으라고 하면 '소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소통'은 곧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임, 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 그러면서 나의 일부분과 상대의 일부분이 함께 하는 일 아니겠는가.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라는 제목이 그러하지 않은가. '토막 난'이라는 말에서 다름을, '안고서'라는 말에서 함께함을 생각할 수 있으니...


다섯 작가의 작품, 즐겁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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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칼
정보라 지음 / 아작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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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간적 배경은 외계 행성. 지구인으로 추정되지만, 읽다 보면 복제인간으로 밝혀지고. 자신의 행성이 아니라 복제인간을 무한 제조해 다른 행성을 침략하는 제국의 모습.


하지만 복제인간은 인간이 아닌가. 원본과 복제인간? 둘은 같은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 다른 존재라면 복제인간도 인간이니 존중받아야 하고, 같은 존재라면 같은 존재이기에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에서 복제인간은 본래 인간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나? 원래 인간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고, 생체정보도 같은 존재인데, 그런 존재를 수단으로 삼는다고? 


다른 나라 다른 행성을 침략하지 않아도 인간의 몸을 침략했다는 이유로 그것은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를 거시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무한한 팽창을 위해 다른 존재들을 수단으로 삼는 행위, 이것이 제국주의 아닌가.


하여 외계 행성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지구에서 벌어졌던 제국주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다른 종족 - 사실 읽다 보면 다들 지구인들의 변종에 불과하다 - 과의 전쟁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복제와의 문제도 발생한다.


복제인간을 무한 증식하는 것, 이것 역시 제국주의임이 확실한데, 이를 소설에서는 '그녀'와 '녹색 옷'의 여자가 잘 보여준다. 이들 역시 복제인간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은 그들 자체로 독립된 존재이다.


독립된 존재로 사랑을 하고 또 살아가려고 하고 있으니, 하지만 제국은 이들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복제인간을 여전히 수단으로, 도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국주의를 쉽게 물리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제국주의에 굴복할 수도 없다. 저항,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은 그래서 여운을 길게 남긴다.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을 멈춘 것처럼 머리 속에 그려진다. 이러한 장면 때문인지 이 소설을 가지고 웹툰으로 재창작하면 좋겠단 엉뚱한 생각도 한다.


웹소설들을 웹툰으로 재창작하듯이, 이 소설, 웹툰으로 그려지면 환상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그러면서 장면 장면마다 갈등이 잘 나타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만큼 소설은 전투 장면이 많고, 또 박진감 넘치게 진행이 된다. 복제인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기도 하고, 팽창만을 추구하는 제국주의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작가의 말을 통해 우리 역사에서 '나선 정벌'이라는 외국에 나가 전쟁을, 대리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을 한 때를 떠올려도 되는데, 소설에서 포로들이 하얀 외계인과 전쟁을 하러 가서 싸우는 장면에서 청나라의 요청으로 러시아 군대와 싸웠던 조선인들을 생각하게도 된다.


힘이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제국의 뜻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가 희생당하는 모습. 그런 점을 '그녀'를 비롯한 사람들이 제국의 포로로 전쟁에 동원되는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전쟁이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여기는지를, 전쟁터에 보내지만 치마를 입혀 보낸다는 설정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은 제국주의의 기본 모습이며, 전쟁으로 인해 여성들이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모습이 빈번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굳이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사실 작가의 말에 '나선 정벌' 이야기가 없으면, 이 소설은 외계에서 벌어지는 자신들이 복제인간임을 모르는 복제인간들과 외계 다른 종족의 전쟁으로 읽게 된다 - 흥미로운 소설이다. 


'그녀'가 첨단 무기들이 있는 시대에 칼을 지니고 다니고, 그 칼을 끝까지 간직하고자 하는 것은, 칼이 바로 자신의 과거, 자신이 살아온 경험들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칼을 지니고 있는 한 '그녀'는 복제인간이건 아니건 독립적인 개인으로서의 '그녀'인 것이다. 


이러한 독립적인 '그녀'는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하고, 단지 생명의 유지를 위해 자유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자유인으로서의 그녀가 선택한 삶이다. 이러한 삶에 제국주의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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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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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을 보면 다윈을 떠올린다. 다윈이 진화론을 펼치게 만든 곳. 갈라파고스. 학교 다닐 때 핀치 새에 관하여 배운 적이 있다. 고립된 섬에서 다르게 진화한 새. 이 새를 통해 진화의 고리를 발견했다고. 


그럼 소설 제목이 갈라파고스면 뭘까? 이 섬에서 일어나는 일? 진화와 관련 있는 사건?


보니것의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풍자에 놀라기도 하는데, 이번에 그는 인간의 뇌가 일으키는 사건을 문제삼고 있다. 지나치게 큰 뇌라고 하는데, 이때 지나치게 크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조차도 위협할 만큼 인간을 지배하는 뇌라는 말로 해석하면 된다.


이 소설에서 갈라파고스로 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여행을 기획한 사람들도 있고, 화려한 유람선에 (군함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부유하거나 유명한 사람들을 태우고 갈라파고스를 여행하려는 계획.


그러나 세계는 인간의 통제불가능한 뇌로 인해 위험에 빠지게 되고, 원인 모를 질병으로 대다수의 사람이 불임이 된다. 여기에 경제난으로 세계는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하여 여행이 취소되고 폭동의 혼란 속에서 우연찮게 배에 탄 사람들이 갈라파고스 제도의 한 섬인 산타로살리아 섬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 이제 이들은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된다. 새로운 인류로 진화하게 된다.


다윈이 갈라파고스에서 핀치 새를 보고 진화론을 생각했음에 소설은 갈라파고스의 한 섬인 산타로살리아 섬에 사람들을 떨쳐두게 된다. 남자 하나와 여자 여럿. 그리고 이들은 다시 대륙으로 나가지 못하는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니... 여기서 인류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소설에서 보니것은 인류는 손이 퇴화하고 지느러미가 발달한 거의 어류와 비슷한 종으로 진화한다고 말하고 있다. 백만 년이 지난 후에 인류의 뇌는 아주 작아지고 손은 없어지고, 바다에 자신들의 생명을 맡기게 되는 종이 되는 것.


이런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이끌어가지 않는다. 백만 년 후라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인류가 이미 그렇게 변했다는 것을 유령이 된 서술자를 통해 말하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종횡무진 왔다갔다 하면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인류가 인류를 파멸에 이르는 무기들을 개발했고, 그것들이 우연히 사용될 수 있음을, 인류의 파멸이 어떤 큰 결심과 결정적인 순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연찮게 일어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가 인류를 파멸하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뇌가 하는 역할이고, 이러한 뇌를 잘못 사용하는 인간들이 있음을 냉소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하여 그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쓰는 말을 이 소설에서도 반복하고 있다. 물론 [제5도살장]에서는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을 쓰고 있다면 이 소설에서는 '에이, 할 수 없지 뭐.... 어쨌든 그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 제목은 아니었잖아.'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다른 지식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을 예로 들고 있다. 이는 그가 과학기술이 위험하고, 인류가 반드시 추구해야 할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반전 사상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를 서술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해병대 출신의 서술자. 그는 스웨덴으로 망명해 배를 만들다 죽는다. 그리고 유령이 되어 인류가 파멸하고 새로운 인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백만 년을 통해 지켜본다.


이렇게 인류의 파멸과 새로운 인류로의 진화를 다루고 있지만 이 소설은 공포를 자아내지 않는다. 가볍게 웃음을 유발하면서 우리를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이 풍자의 힘이다.


보니것 특유의 풍자. 반전 사상, 인류를 위협하는 과학기술 만능주의, 잘못된 지도자의 위험성 등을 날카로운 풍자, 그러나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웃음으로써 잘 비판하고 있다.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 '백만 년 전, 사람이 하던 일을 최대한 많이 기계에게 넘기려는 그 이해하기 힘든 열의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뇌가 전혀 쓸모없다고 다시 한번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49쪽)라는 말.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일을 모두(그렇다. 많이가 아니라 모두다) 넘기려고 하고 있다. 하다못해 인간의 독특한 영역이라는 예술까지도 넘기려 하고 있으니, 보니것이 오래 전에 비판한 모습, 우리의 뇌를 이렇게 스스로 쓸모없다고 인정하는 꼴이 아니겠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면서 이런 뇌를 가진 인간들이 능력 없고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갈 지도자를 선택하는 모습. 그것을 갈라파고스에 갈 선장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으니... 지금 우리 사회에도 적용이 되는 말이다.


소설 속의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야 않겠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대로 가면 인류는 서로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반전, 평화주의자가 된 것도 그러한 전쟁을 겪었기 때문인데, 서술자 역시 베트남 전쟁을 겪은 인물로 설정해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여전히 세계는 전쟁 중인데...


그가 소설에서 '나는 이제 백만 년 전 내가 살았던 시대를 '바람직한 괴물들의 시대'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 시대를 살던 괴물 같은 인간들 대부분이 몸보다는 인격 면에서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이었기 때문이다'(94쪽)고 하고 있는데,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1986년이다. 과연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더 나아졌는가? 작가의 말을 반박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한 때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 속처럼은 아니겠지만 인류 역시 파멸의 길로 한걸음 더 다가갈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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