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계절에 잠시 큐큐퀴어단편선 6
천선란 외 지음 / 큐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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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큐큐퀴어단편선6]이다. 앞서 발간된 1-5를 읽어보지 않고 이 소설집부터 읽게 된 이유는 천선란의 작품을 전부 읽겠단 욕심이 있어서였다.


빠져드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하고, 그것에 행복해 하기도 하는데, 지금은 꼭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작가가 꽤 있다. 그만큼 소설 세계에 빠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수록된 작가와 소설은 다음과 같다.


천선란 '검은 혀', 이반지하 '잉글리시 켐퍼', 오호두 '모노의 봄',

 서장원 '흰 밤', 정보라 '지향', 박선우 '사랑의 방학'


소설을 기획한 의도에 맞게 '다름'을 다루고 있다. 퀴어란 말 자체가 다름이라는 말인데, 이 책의 제목이 된 '서로의 계절에 잠시'라는 제목의 소설은 없다. 그런데 서로의 계절이라는 말에는 이미 '다름'이 들어 있다. 그리고 '잠시'라는 말에는 내 것으로 만든다는, 영원히 소유한다는 그러한 개념이 들어있지 않다.


다름은 하나가 아니고, 영원이 아니며 그러므로 지속이 아니라 순간이고 변화다. 순간이고 변화면 그것이 어떻게 유지될까 하는데, 아니다. 바로 만남의 순간에 충실한 것이다. 그 만남의 순간에 상대의 과거-현재-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만나고 있는 존재, 그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혀가 검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다양한 인종, 민족이라는 이유로 차별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나와 상태가 다르다고 내가 잘하는 것을 못한다고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가, 왜 다름을 그냥 인정해주지 않는가.


마지막에 실린 '사랑의 방학'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학교 다닐 때 만약 방학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공부하는데 최선을 다해도 방학이 없으면 그 관계가 지속이 될까. 그리고 방학이 끝나고 나면 방학 전과 후가 같은 존재일까. 학생은 같은 학생이라고 하겠지만 분명 방학이라는 기점을 통해 달라진 학생이 된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존재는 없다. 세상에는 다 다른 존재들이 있다. 이들 존재들이 관계맺는 순간, 그것이 바로 서로의 계절에 잠시 머무르는 순간이다. 그렇게 관계를 맺는데, 그런 관계가 지속되더라도 같음을 유지하면서 지속되지 않는다.


관계의 지속이 변하지 않음의 영원함이 아니다. 관계의 지속은 오히려 다름의, 변화의, 순간 순간의 모습을 서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점을 '사랑의 방학'이라는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퀴어단편선'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퀴어라는 말이 지닌 의미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변했으니까. 그렇게 퀴어란 변하지 않음이 아니라 변함이니까. 순간순간 변하는 존재들, 그러한 변화를 통해서 맺어가는 관계는 내 틀 안으로 상대를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신도 상대의 틀로 완전히 들어가서는 안 된다.


경계에서 서로 맞물리는 삶. 이 경계는 수축과 팽창을 지속하면서 새로운 선을 만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이 소설집이 말하는 것이리라.


하여 이 소설집에 실린 첫소설 '검은 혀'를 쓴 천선란의 작가 노트에서 한 구절을 빌린다.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낯선 이방인이다. ...타인의 세계를 너무 쉽게 이해하려 들지만 않으면 된다.' (37쪽)


이것이 바로 '서로의 계절에 잠시'라는 말이리라. 타인의 세계만이 아니다. 자신도 타인과 마찬가지다. 자신은 이렇다고 규정짓고, 변하지 않는 무엇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도 자신에게 외계인이다. 그러니 자신을 다 이해했다고, 나는 이런 존재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내가 모르는 '나'가 많이 있으며, 그러한 '나'는 순간적으로 변화고 방금 전의 '나'와는 '다른 나'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박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모노의 봄'이다. 멀리 멀리 숲의 끝까지 가서 모노는 기존과는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이 소설집은 다른 존재들과 어울리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 바로 자신을 하나로, 변하지 않는 존재로 규정짓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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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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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나는 시간대는 셋. 하나는 만엔 원년이라고 할 수 있는 1860년. 이때 농민봉기가 일어난다. 폭력이다. 둘은 패전 직후. 우리나라로 치면 해방직후다. 이때는 조선인 부락을 습격하는 일본인들의 모습. 또다른 폭력이다. 셋은 1960년. 미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 이것 역시 폭력 시위다.


소설은 1960년대로부터 시작한다. 주인공이 거쳐온 시대를 거쳐 그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니, 그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는 지식인의 부끄러움 - 해설에서는 수치심이라고도 하는데 -이 나타나 있다.


전후 일본, 이제 경제발전이 되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본이지만 지식인들은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고, 또한 과거 자신들이 벌인 전쟁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지니고 있었으리라. 그것이 그들을 수치심 속에 살게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패배시킨 나라에 의존하는 모습. 그러한 수치심을 만엔 원년에 일어났던 농민봉기와 연결짓는다. 농민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일으킨 봉기. 폭력이긴 하지만, 농민들을 누르고 있었던 것 또한 폭력 아니던가. 커다란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 여기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농민들. 학살당하는 농민들. 그들을 지도했던 서술자의 증조부의 동생은 행방불명이 된다. 홀로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여 그 후손들은 수치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패전 직후 제자리를 잡아가는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는 골짜기 일본 사람들. 이들에 의해 조선인 한 명이 죽게 된다. 과연 정당한 폭력인가? 자신들의 패전에도 잘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증오심을 품는 것은 그간 자신들이 조선인들에게 가했던 폭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여 서술자의 형 S는 두번째 습격에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는 폭력을 폭력으로 이어가는 것에 반대했던 것이다.


첫번째 조상은 폭력 저항을 주도하다 사라지고, 두번째로 형은 폭력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에 다시 세월이 흘러 1960년대 동생 다카시는 마을 청년들을 선동해서 조선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을 습격한다. 또다른 폭력이다. 이 폭력은 양쪽으로부터 자신을 몰아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겠다는 동생 다카시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런 폭력을 추적하면서 서술자는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사실. 그런 폭력이 아니라 폭력을 끊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대에 동생 다카시에 의해 벌어진 폭력은 더이상 다른 폭력을 부르지 않는다. 조선인 주인은 그 일을 무마하고 자신이 할 일을 한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던 둘째 형도 마찬가지다. 그 형 역시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양쪽 어디에 서지 않고 폭력의 한 가운데에 자신을 놓아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농민 폭동, 아니 혁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을 주도했던 증조부의 동생은 어떤가?그는 폭력을 통해서 얻은 것도 있었지만, 많은 농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거기에 대한 책임. 결국 지하 골방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으로 참회를 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참회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그는 글을 통해 누구도 죽지 않는 혁명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이는 오에겐자부로가 폭력이 아닌 평화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 그이기에 일본의 재무장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오키나와 노트]나 [히로시마 노트]와 같은 폭력으로 인해 피해를 본 장소를 찾고 그런 민중들에게 지지를 보내게 된다.


만엔 원년의 폭동이 정당한 폭력이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점, 혁명은 어떠해야 하는가, 혁명을 이끄는 사람을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행동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고민하고 번뇌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끝까지 민중을 책임진다는 것이 자신의 죽음으로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죽음은 자신의 두려움, 책무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자신이 행한 결과이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남들에게는 그러한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에 나온 친구의 자살 모습이 바로 그런 점을 보여주지 않을까.


진실을 말한다는 것, 진실을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것이 어떠한 폭력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 어쩌면 진실은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더 힘든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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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라 - 2024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
김아인 지음 / 허블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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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전세계가 팬데믹을 겪었다. 아마도 이러한 질병이 코로나19로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한다. 암울한 현실이 반복될 수도 있다. 이것이 인간과 다른 존재들의 거리가 무너진 데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거리의 붕괴는 바로 인간이 추구한 과학기술에 있다.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 예측하지 못하는 질병을 유발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옥죄게 된다.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자 하는 일들이 인간을 더 힘들게 하는 역설. 그럼에도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


이제는 인공지능이다. 이보다 더한 기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지금도 쓰이고 있는 기술을 더욱 밀어붙이고 있다. 인간 냉동기술.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


예로부터 있었다. 영생을 추구하기 위한 많은 방편들, 약물들을 발견 또는 개발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데도 모두 실패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니까. 아니, 유한해야 하니까. 그것을 깨뜨렸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없다.


이 지구에 죽지 않은 인간들이 계속 태어나고 살아간다면? 과연 지구가 버틸 수 있을까? 우주를 개척하면 된다고? 하지만 우주 역시 무한하지 않다. 죽음이 없는 존재는 무한증식할 수밖에 없다. 그들을 채울 공간이 있을까? 


이런 상상은 하지 않는다. 육체를 지닌 인간이 무한하다면 문제가 되니, 소설은 육체를 소멸시키고 영혼(정신)만 남긴다. 인간을 데이터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유한한 공간에 무한을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뇌 또는 영혼, 정신이 데이터로 남아 있다고 살아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하지 말자. 그렇게라도 인류를 살아남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라는 질문은 윤리, 철학과 연결되는 질문이다.


소설은 그 질문은 독자에게 남겨두고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육체와 분리된 정신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보존하는 기술이 있다면? 지금 냉동기술이 사실 그러한데, 지금보다 발전한 모습이 무엇이냐면, 이 소설에서는 냉동된 육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정신은 데이터화되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세대에 전염병을 치유할 수 있는 치료제가 나오면 육체를 깨어나게 해서 계속 살아가게 하면 된다. 여기까지가 소설에서 나온 과학기술의 발전이다.


이런 과학기술을 토대로 운영되는 집단은 권력을 지닌다. 인간에게 신과 같은 위치에 선다. 과학기술이 신이라면 이를 다 받아들일까? 세상에서 신을 섬기는 자들 중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학기술을 파괴하는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집단들. 


또한 과학기술이 이윤으로만 쓰이는 것을 막고, 많은 사람을 구하는 쪽으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본래 추구했던 목표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여기는 집단도 있다. 그리고 인간의 유한한 생명을 받아들이고, 무한을 추구하는 행위가 잘못되었으니 그러한 과학기술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자, 당신은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소설 속 인물인 페이, 하라바야시 가스미, 황신부는 이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자신이 어떤 입장에 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웨이쉬안이 있다. 거대 기술 회사에서 장의사로 일하는(장의사라고 하기보다는 정신이 추출된 나머지 육체를 처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 웨이쉬안. 그가 페이의 죽음 이후에 겪게 되는 일들이 바로 이 다양한 관점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엮이면서 겪게 되는 일이다.


소설은 어떤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페이도, 가스미도. 다만 웨이쉬안 스스로 결정한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은 어떤 세상을 살아가려 하는지를...


그는 자신의 선택과 같이 남들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삶도 선택되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한다. 스스로 결정하도록. 거대과학기술 회사인 AE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던 페이의 삶, 육체를 보존하면서 정신과 연결시키는 기술을 개발한 가스미, 그러한 기술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하는 황신부. 이들 역시 자신들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웨이쉬안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길을 놓아두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내 삶을 결정하듯이,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결국 세상은 더욱 발전할 것이고, 온갖 과학기술이 나올 것이다.


그러한 세상에서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온전한 내 몫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고, 어떤 집단의 이익에만 종사해서도 안 되며,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인류가 대처할 수 없는 감염병이 유행하는 디스토피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현실에서 상용되고 있는 기술들도 있으니, 그것이 꼭 먼 미래의 일은 아니라는 생각. 그래서 더더욱 선택의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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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2 : 환상의 나라 오즈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2
L. 프랭크 바움 지음, 존 R. 닐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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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즈의 마법사]다. 두 번째부터는 생소하다. 읽은 적이 없다. 그래도 도로시가 계속 나오겠지 하는 기대를 했는데... 도로시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팁이라는 소년이 나온다.


이젠 팁의 모험이다. 그런데 1권과 완전히 다르면 오즈 시리즈가 되기 힘드니, 1권에 나왔던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팁의 모험에 함께 하는 인물들. 허수아비와 양철나무꾼이 등장한다. 물론 착한 마법사는 당연하고.


허수아비가 에메랄드의 왕에서 쫓겨난다. 소녀들이 쳐들어와 허수아비가 양철나무꾼이 다스리는 나라로 도움을 요청하러 간다. 팁의 모험 과정에 이 내용이 들어간다. 


자, 이제 내용은 팁과 더불어 허수아비가 왕위를 다시 찾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에메랄드 왕의 후계자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착한 마법사 글린다를 만나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즈마라고 불리는 후계자는 어디에 있을까?


동화답게 오즈마의 존재를 말하는 순간 오즈마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마법이지 않은가. 소녀를 소년으로 바꾸는 마법. 그 마법이 풀리고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팁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 2권은 이렇게 팁이 오즈마로 밝혀지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는 것으로 끝난다. 


행복한 결말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이 벌어지지만, 정당성이 없는 권력은 오래 갈 수 없음을 이 동화에서 보여주고 있다.


기이한 존재들이 모여, 호박머리 잭, 목마, 하늘을 나는 검프까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을 상상에서 이룬다. 그렇다. 이러한 상상을 통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들을 꿈꾸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상상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옳지 않음이 어떻게 극복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일지를 경험하게 해준다.


세상에서 소중한 것은 돈보다도 지혜, 사랑, 우정임을 이들의 모험을 통해서 보여주고, 돈만을 추구하는 삶이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그런 생활은 지속될 수 없음을 반란을 일으킨 진저라는 인물을 통해서 보여준다.


자연스레 재미있게 읽으면서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를 익히게 한다. 그것이 동화가 지닌 장점이기도 하겠지만, 1권을 너무도 재미있게 읽은 아이들이 다음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해서 썼다고 하는데, 그만큼 아이들에게 상상의 재미를 주는 역할을 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이 2권을 읽으면서 [나니아 연대기] 중에서 [말과 소년]이 생각났다. 출생의 비밀? 결국 제 자리를 찾아가는 주인공? 아이 때 한번쯤 상상했던 일들을 동화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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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1 : 위대한 마법사 오즈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1
L. 프랭크 바움 지음, W.W. 덴슬로우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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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았던가? 애니메이션으로 보았던가, 아니면 짧게 요약한 요약본으로 읽었던가? 오즈의 마법사는 분명 아는 내용이다. 적어도 이 1권은.


허리케인으로 오즈로 온 도로시가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를 만나 여행을 하고, 결국 각자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는다는 모험 이야기.


줄거리야 워낙 유명하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동화답게 우연적인 요소도 많이 등장하고, 현실과 맞지 않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이 동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우리는 합리와는 거리가 먼 상상 속에 빠지길 좋아하니까. 그런 상상 속에서 자신의 앞으로 살아갈 힘을, 방법을 은연중에 깨우치게 되는지도 모른다. 동화란 그런 것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직접적인 말이 환상 속에 펼쳐짐으로써 강요로 느껴지지 않는다.


재미있게 읽으면서 그냥 동화 속 인물들과 함께 모험을 한다. 그뿐인 것 같다. 하지만 알게모르게 무언가가 자신을 채우게 된다. 


오즈의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다. 허수아비는 뇌를 갖고 싶어하고, 양철나무꾼은 심장을 갖고 싶어하며, 사자는 용기를 갖고 싶어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이것들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모험을 하는 과정을 보면 허수아비는 충분히 지혜롭고, 양철나무꾼은 사랑이 넘치며, 사자는 불굴의 용기를 지니고 있다.


오즈의 마법사는 이미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그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선물할 뿐이다.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실제로 지니고 있다고 여기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즈의 마법사가 준 선물이다. 이렇게 오즈의 마법사라고 해서 오즈의 마법사가 큰 역할을 할 것 같지만, 그 역시 서커스단원일 뿐이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


그렇다면 지혜, 사랑,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이미 자신에게 있다. 그것을 자각하고 발현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아마도 이 동화를 읽으면서 그 점을 무의식 중에 깨달을 수 있으리라. 여기에 지혜, 사랑, 용기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해야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셋을 아우르는 존재가 바로 도로시다. 순수함을 지닌 존재. 이러한 순수함을 지닌 존재는 외양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우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을 그대로 인정한다. 도로시가 지닌 그러한 태도 때문에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 역시 자신들의 자리에 머물 수 있음에도 도로시가 고향으로 떠날 때까지 함께 한다.


이는 나만의 목적 달성이 곧 행복이라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내 목적만 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모두 달성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여 위대한 마법사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위대한 마법사는 바로 자신이다. 자신이 그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이제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를 다 읽기로 했다. 그냥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끝까지 읽어야겠다는 생각. 다음 편엔 널리 알려진 1권의 내용과는 달라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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