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
서정오 지음 / 현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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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민의 "신과 함께"란 만화를 웹툰으로 다 봤다. 운이 좋았지.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에 다 보았으니 말이다. 지금은 유료로 돈을 내야 하는데...

 

그런데 그 만화 보면서 작가가 공부 많이 했구나 했는데, 우리나라 신화에 이런 내용들을 어디서 찾았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신화라고 하면 단군신화, 고주몽 신화, 박혁거세 신화 등 문자로 기록된 것들만 알고 있는, 어쩌면 외국의 신화는 많이 알면서도 우리 신화에는 까막눈인 상태였는데...

 

서점에서 서가의 이곳저곳을 기웃기웃거리다가 신화를 모아놓은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살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데.. 이미 "신과 함께"에서 나온 내용과 많이 겹치는데 굳이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과 아냐, 그래도 분명 많은 부분에서는 다를 거야, 또 안 나오는 부분도 많고, 만화라는 갈래와 글로 수록된 갈래는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팽팽히 맞섰다.

 

책을 뺐다 넣었다 반복하다가 에라, 조금 비싸지만, 우리나라 신화 모음집이 이 정도도 안되면 어떡하냐 하는 마음으로 계산을 해버렸는데...

 

첫부분 대별왕소별왕 부분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재미있어? 어, 이런 내용도 있어. 이걸 왜 모르고 있었지. 아 "신과 함께"에서는 이 부분이 이렇게 표현되었는데, 여기서는 이렇네, 조금 다르구나...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지내는 온갖 신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이런 신화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데, 그것을 많은 학자들이 노력하여 채록해 놓은 책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술된 상태를 그대로 기록했기에 읽기에 상당히 부담스러운 경우가 있었다.

 

또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신화는 대부분이 무당이 굿을 할 때 쓰기 때문에 가락이 있으며, 또 내용과는 불필요한 굿에 필요한 부분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이런 부분들이 읽기를 방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런 부분을 과감하게 삭제했다고 한다. 우선 읽기 편하게,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게 정리를 했다. 또 내용이 조금씩 다른 신화들은 이 글을 쓴 지은이가 전체적인 내용이 더 잘 이해될 수 있게 뺄 것은 빼고, 넣을 것은 넣어 새롭게 정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신화를 자기 멋대로 바꾼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신화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때와 장소에 맞게 변용이 되어 온 것이 신화의 역사이고, 신화의 장점이기에 자신이 수정한 것도 신화의 특성에 맞는 일이겠지 한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지은이의 변용을 거쳐서 이 신화들은 더욱 생명력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읽기에도 상당히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화에서 항상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족성, 우리는 같은 기억을 갖고 있을 거라는 동질성 등을 느낄 수도 있고.

 

그리스-로마 신화만 재미있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신화도 재미있다. 아주. 그걸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대별왕 소별왕, 처승차사 강림, 바리데기, 손님네, 칠성신, 저승 고지기 우마장자, 성주신과 지신, 조왕신과 문왕신과 측신 등등...

 

하나하나 읽어가면 우리나라 신화의 다양성을 맛볼 수 있다. 신화라고 하면 그리스-로마 신화만 생각하기도 하는데, 아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다양한, 이렇게 역동적인 신화가 있다는 걸 이 책이 보여주고 있다.

 

좋다. 더 많은 신화들이 정리되었으면 좋겠다. 참고로 이 책은 끝까지 읽으면 많은 부분이 서로 연결이 됨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이 책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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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평전 - 모조 근대의 살해자 이상, 그의 삶과 예술
김민수 지음 / 그린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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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를 주욱 읽었는데, 카프카가 우리나라의 이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작품의 난해성이라든지, 죽은 다음에야 더 유명해지고, 지금까지도 많은 연구 논문들이 나온다는 사실들이 말이다.

 

또한 둘이 비슷한 시대에 살았다. 이상이 조금 뒤에 태어나고 활동하지만, 이들은 활동했던 시기는 근대성이 꽃 피우던 때이고, 이런 근대성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던 시대이기도 하다.

 

포스트 포던이라는 말이 90년대에 유행했었는데, 이 때 이미 카프카나 이상은 포스트 모던한 작가로 우리에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이상, 이상, 정말로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하다못해 그의 전집만 해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시 출간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집이란 원본이 확정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학자들마다 이상 전집을 펴내려 하는 것을 보면 그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유효한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아직도 연구할 것이 많은 작가임에도 틀림이 없고.

 

이 책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건축과 미술의 관점에서 이상의 작품을 판단한 결과를 드러내고 있다. 기존에 이상에 대한 접근이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져 이상 문학의 단면만을 파악하고 있다는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이상 문학이 열린텍스트를 지니고 있기에 다양한 해석이 다 타당하다고 하는 기존의 주장에 대해서 건축의 입장에서, 디자인의 입장에서, 또는 미술의 입장에서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미 이상은 서구의 최신 건축이론을 습득했으며, 일본을 통한 짝퉁 근대를 인식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통한 근대화가 짝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해낸 작가라는 것이다.

 

하여 주장에 설득력을 얻기 위하여 문학적인 접근이 아니라(그런 접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향에서, 즉 미술적인, 건축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이상의 삶 자체가 건축학도였으며, 그는 근대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조선과 건축"이라는 잡지의 표지 디자인에 당선될 정도로 디자인 쪽에서도 이미 앞서간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삶과 문학이 떨어질 수 있을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은 이미 당대의 한계를 넘어섰으며, 이런 한계넘어섬을 자신의 시로 표현해내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 겪게 되는 몰이해, 비난을 그는 견디지 못하고 소설, 수필의 세계로 빠져들지만,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에 나온 해석을 비판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는데, 현대물리학, 천문학, 건축학, 디자인학 등이 종합적으로 이상을 해석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이 정도로 이상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의 작품이 어정쩡한 상태의 작품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다다이즘을 구현한 작품이라는 주장까지도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이미 100년을 앞선 작가를 지니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조선이라는 한 주변부 국가에만 국한되는 작품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작품이라고 한다. 이런 이상을 '민족주의'틀로 이해하려 하면 안된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사람.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시대를 앞서갔다면 지금 우리는 이상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상이 바랐던 포스트모던 시대가 아니던가? 이미 이상이나 다른 서구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작품 경향들이 해석되어 넘쳐나고 있는 시대 아닌가? 그럼에도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도, 문학을 배웠다는 사람에게도 이상은 아직도 어렵다.

 

몸으로 디지털세계를 사는 아이들에게도 이상은 어렵다. 그의 작품은 아직도 암호의 세계이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다른 사람들의 건축에 대한, 미술에 대한, 디자인에 대한 지식이 얄팍해서인가?

 

문학은 지식과도 어느 정도 상관은 있지만, 대부분 좋은 문학작품은 지식을 떠나서 마음에 와닿는, 그래서 해석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작품이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이상 문학에 들어가면 과연 이상 문학은 좋은 문학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또 하나 의문이 있는데, 이상이 완벽하게 시대를 앞서 갔을까? 그가 시대를 앞서갔다면 일본이 우리나라에 심은 문명이 짝퉁 근대화란 사실을 넘어서 일본의 문명 자체도 짝퉁이라는 걸, 동경에 가기 전에도 이미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러면 그는 동경에 가길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 문명의 중심이라는 뉴욕으로 가길 갈망했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든다. 동경 갔더니 일본이 짝퉁이고, 우리는 짝퉁의 짝퉁이더라란 인식을 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이상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없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가 김기림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한 구절.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바구니에 끼워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오.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오그려.

... 그들(삼사문학 동인)은 이상도 역시 20세기의 스포츠맨이거니 하고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들에게 낙망을(아니 환멸)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과 만날 때 오직 20세기를 근근히 포즈를 써 유지해 보일 수 있을 따름이구려! 이 마음의 아픈 갈등이어.'

(권영민, 이상문학의 비밀 13, 민음사 276쪽에서 재인용)

 

이 책의 저자는 이상 문학에 대해서 이제는 정통해석을 내놓았다고 자부하는데, 글쎄? 이렇게 하나로 해석이 완벽하게 되면 이미 그 자체로서 이상의 문학은 저급한 문학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완벽한 해석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참신한 해석임에는 틀림없다. 이상 문학에 접근하는. 그래서 읽는 내내 재미도 있고 즐거웠다.

 

덧글

 

읽으면서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게 있었는데, 이상을 자꾸 李霜으로 쓰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상을 한자어로 표기할 때는 어김없이 李霜으로 나오는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이상이 발표한 작품을 사진으로 실어논 부분에도 이상은 李箱으로 나온다. 왜 李箱을 자꾸 李霜으로 표기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리고 왜 제목이 이상 평전이 모르겠다. 이 책은 이상의 삶에 대한 평가보다는 문학에 대한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냥 이상 문학 연구로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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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카프카론 현대의 문학 이론 26
질 들뢰즈 외 지음, 조한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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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카프카란 작가 자체가 우리나라 이상이 받는 대접을 받고 있을 정도로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보다 더 어려운 말을 구사하는 철학자인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프카에 대해 쓴 책은 읽기 전부터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할까?

 

사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공동 저작도 많지만, 독자적인 저작도 많은데, 이 책은 둘의 공저다. 어디까지가 들뢰즈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가타리의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굳이 알 필요도 없다.

 

이 책에서 이들이 펼친 내용을 따라가기도 벅차니 말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조건이 있다. 하나는 카프카의 작품을 적어도 절반 이상은 읽었을 것. 최소한 '변신',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유형지에서', '개에 대한 연구' '시골 의사'와 같은 단편과 장편이라고 할 수 있는 "성, 소송, 실종자"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은 최소한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 개념은 알 것. 이들의 철학 개념이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데 도처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개념에 카프카의 작품을 대응시키고 있다. 그러니 이들 철학자들의 개념을 알지 못하면 이게 뭔 소린가 하면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다.

 

즉, 책을 읽어가면서 출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미로 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빛에서 점점 멀어지는 읽기는 읽는이로 하여금 피로에 나가떨어지게 한다. 김현의 말마따나 '책 읽기의 괴로움'이 된다. 그런데, 이들 철학자의 개념에 조금 익숙하다면 '행복한 책읽기'가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한 것도 아니니, 대략 개념에 대한 맥락만 이해하면 된다는 얘기다. 여기에 우리 자신이 읽은 카프카를 더붙인다면 훌륭한 읽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아주 오래 전에 산 책인데... 최근 카프카의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이 책도 사놓았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가물가물했는데, 책을 다시 읽다보니, 한 부분만 읽었다. 그 부분에만 표시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읽은 부분이 제3장 '소수집단의 문학이란'이다. 아마도 제목과 관련지어서 이 부분만이라도 이해하자는 생각으로 읽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그건 읽기의 실수다. 어리석은 읽기였다. 물론 제3장부터 읽는 것 좋다. 아니, 어쩌면 제3장부터 읽어야 더 좋을 듯하다. 다 읽는다면 말이다. 우선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읽는 것이 좋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소수성이란 정통에 대비되는 개념이라는 사실, 통념에 대비되는 존재를 소수집단이라고 보면 되니, 독일인도, 체코인도 되지 못하고, 유대인으로서, 변형된 독일어에 관심을 가진 카프카는 소수집단에 속하는 문학을 한 사람이 된다.

 

이 다음에 그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여러 모습들을 이야기하는데, 머리에 와닿은 개념은 탈영토화, 재영토화다.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부분에서 벗어나(탈영토화), 자신의 다른 영토를 구축하는 것(재영토화).

 

결국 카프카의 작품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탈영토화, 재영토화하는데 탈주가 이루어지고, 이런 탈주는 변신으로 나타난다고 보면 되고, 이러한 탈주들은 각자의 욕망을 지니고 집단을 이루며, 연결되고, 배치되는 특성을 지닌다고 보면 된다는 것.

 

결국 카프카의 문학은 '나무'처럼 중심에서 확고히 연결되어 나아가는 문학이 아니라, '리좀'처럼 각자의 영역이 자신만의 특성을 지니면서 방향없이 나아가는 문학이라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리좀'이 잘 이해 안되면 감자를 생각하면 된다. 감자의 뿌리가 땅으로 들어가 감자들이 열리듯이 카프카의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이 감자들처럼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는 얘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나 독립적이지 않은 존재들, 서로 연결이 안되어 있을 것 같으나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존재들, 그래서 결론이 날 수가 없는, 영원히 흩어나가는 그런 존재들이 바로 카프카의 작품이란 얘기다.

 

이런 작품이기에 아직도 우리는 그에게서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이런 얘기를 이 책은 하고 있다.

 

덧말

 

아쉬운 점은,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 용어에 대해서 맨 뒤에 부록으로 해설을 달아주었으면 하는 것과, 번역상에서 작품들의 이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

가령 이 책에서는 "심판"이라고 하는데, 요즘 읽은 솔 출판사에서는 "소송"이라고 하고, 이 책에서는 "아메리카"로 나와 있는데, 지금은 "실종자"라고 하는 것 등. 작품 명에 대해서도 헷갈린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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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384
권혁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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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들이라니... 지금 얼마나 많은 소문들이 횡행하고 있는지...

 

대통령이 바뀔 즈음에 온갖 소문들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소문들은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때로는 희망으로, 때로는 절망으로, 때로는 분노로.

 

이런 소문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집을 꺼내들었다.

 

제목도 "소문들"이다.

 

이 소문들 연작은 언어의 유희라고 할 수 있는데, 언어들이 유희로 우리들을 다른 세상으로 인도한다.

 

아니 풍자라고 해야 옳겠다.

 

우리 사회에 대한 풍자. 말들이 지닌 발음의 유사성을 가지고 전혀 다른 뜻을 만들어내는.

 

그 중 한 가지를 보면 시에 나온 세계가 시집에 갇힌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겪는 바로 그런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풍자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순간.

 

소문들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 그 순간,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소문들 연작시 지금 읽어도 우리 사회를 느낄 수 있다.

 

이 시집은 운율을 생각한다기보다는 머리 속으로 사회의 모습을 그리면서 읽어야 한다.

 

언어로 풍자하는 세상, 그리고 언어로 만들어가는 세상에 대해서.

 

덧글

 

시를 인용하고 싶었으나 한자어를 찾아내기 힘들어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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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전집 5
프란츠 카프카 지음, 오용록 옮김 / 솔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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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다. 분명 앞에 보이는데 가는 길을 알 수 없다. 성에서 사람이 오기도 하는데, 역시 갈 수 없다. 특정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이 성은 이성과 합리로 운영되지 않는다. 성이 운영되는 기제는 비합리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성의 힘으로 파악하려고 하면 할수록 성에 가는 길은 꼬이고, 숨는다.

 

그러니 주인공 K는 성에 갈 수가 없다. 그는 성에 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그에게 성으로 가는 길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성이란 소설, 카프카가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K가 마부를 따라가는 데서 소설이 멈춘다. 도대체, 언제 K는 성에 갈 수 있을지, 하지만 그 앞까지의 전개를 보면 K는 결코 성에 도착할 수가 없다.)

 

그는 성에 갈 수 없을 뿐더러, 성과 관계를 맺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못한다. 미끄러짐, 그와 마을 사람들의 관계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끄러짐이 그를 성에 도달하지 못하게 한다.

 

마을 사람들은 성과의 관계에서 합리성을 버리고 있는데, K는 합리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직업(?)이 측량사로 나온 것만 봐도 그렇다. 측량사란 극도로 합리성을 추구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즉, 측량사는 객관적으로 수치화된 정확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미 합리성을 포기한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수가 없으며 그의 말이나 행동은 자꾸만 마을사람들과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성의 고위 관리인 클람을 만날 수 없고, 기껏해야 클람의 비서만을 만나지만, 그것도 의사소통이 되는 만남이 아닌 일방적인 만남에 그치고 만다.

 

배경이 겨울이고, 밤에 소설이 시작된다. 어둡다. 그리고 힘들다. 이는 성에 도달하는 길이 그렇다는 것을 암시해준다고 할 수 있는데...

 

가지 못한다는 사실, 또 성이란 분명 존재하지만 어떤 존재이다라고 할 수 없는 면에서 이 성을 진리라고 한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K라 할 수 있고, 마을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를 멈추고 그냥 그들의 생활에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맹목적인 받아들임을 측량사인 K는 이해할 수가 없고, 그래서 이성적인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방황이 시작되는 것이다.

 

소설이 전개될수록 이상하게 성의 실체는 사라지고 만다. 오직 마을 사람들만이 실체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런 마을 사람들을 통해 K의 일이 실패할 거라는 예상을 하게 된다

 

장황한 소설이다. 무슨 미로 찾기 같다. 그런데 출구를 찾지 못하겠다. 찾기도 전에, 마치 찾지 말라는 듯이 소설이 끝나 버린다. 도대체 어떤 결말을 내려고 했을까?

 

수많은 해석들이 모여 카프카를 만들고 있다는 역자 후기에서처럼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성을 나는 진리의 세계로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K는 화엄경의 선재동자처럼 진리를 알려줄 스승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선재동자는 여러 스승들을 만나 점차 진리의 세계에 접근해 가지만, K는 선재동자가 만난 스승들을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의 세계를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에 싸여 점점 진리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만다.

 

그래서 그는 진리로 가려고 하지만, 결코 가지 못하고 진리의 주변만을 얼쩡거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 삶이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우울했다고나 할까.

 

말로 진리란 무엇이다라고 딱 규정할 수는 없다. 진리는 측량처럼 객관적으로 이것이다라고 말해질 수 없다. 그래서 진리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 어쩌면 숨어 있다가 찾는 사람에 의해 발견된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발견을 방해하는 사람들, 이 소설의 마을 사람들처럼, 어디에나 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이 이 소설에서 찾아야 할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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