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U. R. - 로줌 유니버설 로봇 이음스코프
카렐 차페크 지음, 유선비 옮김 / 이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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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이다.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쓰고 있는 로봇이라는 말이 이 희곡에서 나왔다고 하니...


희곡은 로봇을 생산한 사람들과 로봇이 등장한다. 그런데 사람의 관점에서 시작한 로봇 생산이 로봇의 반란으로 이어진다.


기계를 통해 인류의 편리함을 추구했던 결과가 결국 인류의 멸종으로 나타난다. 이런 결말을 암시하는 것이 '귀머거리 꽃'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여자 주인공인 헬레나가 사람들이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기사를 읽은 뒤에 듣게 되는 꽃의 이름. 이는 귀가 안 들린다는 뜻보다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하는데, 오직 인간의 편리,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서 일을 하는 존재들을 귀머거리 꽃에 비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헬레나는 이런 귀머거리 꽃을 인식하고 끔찍하게 여기지만, 다른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여전히 로봇을 생산해서 사람들이 더욱 더 일을 하지 않는 세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고, 인간들은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탐욕이 부른 결과, 차페크는 이 점에서 인간들이 자신들의 편리만을 추구하다가는 결국 '귀머거리 꽃'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로봇을 생산해서 인류가 편해지겠지만, 그 부작용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로봇을 이용한다? 이는 전쟁이다. 더욱 참혹한 전쟁. 하지만 참혹한 전쟁을 벌이더라도 아직 로봇에 대한 통제권은 인간에게 있다. 인간들은 이 점에서 안심한다. 로봇은 언제든지 통제 가능하다.


그러나, 로봇이 인간에게 예속된 존재로만 있는단 보장이 없다. 희곡에서는 로봇이 반란을 일으킨다. 마치 지금 인식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있듯이, 로봇에게도 인식과 감정을 넣는 일이 발생하고, 그런 로봇들이 인간의 통제에 따를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디스토피아로 돌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로봇들은 자신들이 로봇을 생산할 수 없다. 로봇 생산의 비밀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인류와 로봇이 모두 멸망할까?


아니다. 인류와 로봇만이 지구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생명체들도 존재한다. 이를 로봇 프리무스와 헬레나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지구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 점이 이 두 로봇의 대화에서 나오고, 앞으로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 즉 '사랑'임을 서로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하는 로봇들을 통해 차페크는 보여준다.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로봇들만 있는 세상이라도 사랑이 사라지지 않음을, 사랑이 사라지지 않으면 다른 세계가 다시 펼쳐질 수 있음을 이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어쩌면 차페크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인공지능이든 메타버스든 지름 우리는 과학기술에 열광하고 있다.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존재든 만들어낼 수 있고, 만들어내야 한다고 하는 이 시대에 이 희곡은 과연 그런 세상이 된다면 그 다음은 어떨까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하는 일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로봇들이 일을 하는 세상을 보여주는 이 희곡을 통해,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의 미래를 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도 과연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직접 자기 손으로 일을 하는 사람 '알퀴스트'를 희곡에서 살아남게 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삶을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하다. 그것을 전적으로 다른 존재에 맡길 수는 없다. 노동을 모두 다른 존재에 맡긴다는 말은 자신의 목숨을 다른 존재에게 맡긴다는 말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편리만을,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상이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를 잘 보여주는 희곡이고, 로봇을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 희곡이다. 지금 이 시대에 꼭 읽어야 할 희곡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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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에스에프 다섯 마당
곽재식 외 지음 / 구픽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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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있던 판소리. 그 판소리 사설이 소설이 되어 판소리계 소설이라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판소리계 소설에 유명한 작품이 있다. 다 읽은 사람은 별로 없지만 내용을 모르는 사람도 별로 없는 작품들... 흥부전, 춘향전, 심청전, 토끼전 등


이런 작품을 에스에프와 결합시켰다. 현대 과학이 발달했고, 사회문화도 바뀌었으니 현대에 맞게 재창작했다고 보면 된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은 총 5편이다. 그래서 다섯 마당이라고 한다. 춘향전, 변강쇠전, 심청전, 적벽전, 옹고집전.


춘향전은 '몰입 감상'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결말을 소설을 읽을 때 그 기억을 지우고 읽게 하는 방법.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는 뇌에 접근해야 한다. 춘향전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뇌를 조정할 때, 다른 많은 부위들도 조절이 된다는 것. 그래서 춘향전을 읽은 사람들은 좋은 쪽으로 변화가 된다는 내용으로 소설을 전개한다.


뇌가 인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 소설의 내용은 춘향전과는 관계가 없고, 춘향전이라는 작품을 통해 인간의 뇌에 어떤 변화를 이끌어냈는가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변강쇠전은 원전에 충실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원전에서 더 나아간다. 낭인을 늑대 랑 자를 써서 늑대인간으로 표현하고, 강쇠와 옹녀를 그런 낭인으로 만드는... 원작과는 달리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작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과 다르면 내치는 그런 사회의 모습이 잘못되었음을, 변강쇠전의 변형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현재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옹고집전'도 마찬가지다. 


옹고집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서,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자들이 오히려 옹고집 아닌가 하는 그런 질문을 하게 하는 작품이었는데...


'심청전'은 원작을 많이 비틀었다.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사건을 남기고, 오염된 바다, 그러나 그 바다에서도 생명은 살아가고 있음을, 인간의 탐욕이 오히려 바다를 망치고 있음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준다.


적벽전은 선거라는 요소를 도입해서 내용을 전개한다. 너무도 유명한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소재로, 선거에서 이합집산이 벌어지고, 치열한 경쟁 끝에 승리하는 내용으로 전개되는데...


판소리 다섯 마당을 현대 감각으로 재해석했다고 할 수 있는 이 소설들. 그냥 과거의 작품을 재해석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판소리가 그 시대에 민중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듯이, 지금 이 작품들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발을 최우선하는, 성장으로 대변되는 탐욕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 작품집에 실린 '심청전, 옹고집전'은 현대판 판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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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꿀벌의 예언 1~2 세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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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넘나드는 소설이다. 환경과 역사가 교차하는 소설이기도 하고, 과학과 환상이 어우러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베르베르의 소설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러한 상상력을 통해서 인류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작은 곤충, 꿀벌에서 시작한다. 꿀벌이 사라지면 식량난이 심각해지고, 각국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이 빠른 시기에 끝나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하고 만다.


그렇다. 퇴행 최면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전생에 접속한다는 것은 환상에 속한다. 전생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소설은 이런 환상을 과학과 연결짓는다. 바로 시공간의 중첩. 그리고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예로 들어서 말한다.


우리가 말을 한 이후에는 결과는 말을 하기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언을 알고 있다면, 그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하려고 한다. 즉, 예언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행위로 인하여 예언은 실현되든 실현되지 않든 한다.


먼 미래에 제3차 시계대전이 일어나고 인류가 멸망할 위기에 처한다는 사실을 안 주인공.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자신이 실행한 최면때문에 벌어진 일임을 알게 되고,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전생으로 간다.


예언서를 작성한 인물이 바로 현재를 살고 있는 주인공의 전생이다. 그것도 현재의 인물이 전생의 인물에게 역사를 알려줘서 기록된 예언. 그런데 이 예언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먼 미래의 일이 쓰였다. 이게 무슨 일?


소설은 여기에서 새로운 흥미를 유발한다. 그냥 전생으로 가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줬다에서 끝나면 사건은 과거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사건이 변할 수는 없다. 과거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 베르베르 소설의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현재를 넘어선 자신도 모르는 미래가 예언서에 적혀 있다. 그래서 그 예언서를 읽어야만 미래를 바꿀 수가 있다.


예언서의 이름은 '꿀벌의 예언'이다. 예언서를 쓰기 위해서 베르베르는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성스러움을 인정하던 시대. 수호천사의 존재를 믿던 시대. 그래서 수호천사로 중세로 간 현생의 인물이 전생의 인물에게 사건을 불러주게 된다. 이것이 예언서가 된다.


이때 네 사람이 얽히고 설키게 된다.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는 베스파, 주인공인 르네, 그리고 르네의 스승이자 전생에서부터 함께 하는 알렉상드르와 그의 딸 멜리사.


르네와 알렉상드르, 멜리사가 역사학자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과거를 추적할 수가 있다. 이런 역사학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에서는 역사적 사실도 기록되고 있다. 또한 베르베르는 자신의 어학지식을 소설에서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베스파는 등검은 말벌을 의미하고, 멜리사는 꿀벌과 관련이 있다는 것.


검은등말벌이 꿀벌을 멸종시켜,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는데, 그를 구원하는 것은 과거에서 온 여왕 꿀벌. 그리고 멜리사로 추정되는 인물인 드보라를 통해서 미래의 도시가 나오게 되는데...


허구적인 소설을 통해서는 이렇게 인물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겪는 일들로 서술이 되고, 종교의 역사는 소설에 '므네모스'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게 된다. 이 역사적 사실은 주인공들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서술한다. 사실을 알려준다. 종교의 역사를 알 수 있게 된다.


다음에 전생 여행을 통해서 다시 역사를 만나게 된다. 역사에 기술된 과거가 아니라 과거 인물이 겪는 일을 통해 만나는 역사. 그리고 예언서를 찾는 과정에서 추리가 곁들여진다.


결말 부분에 나타나는 반전까지. 소설은 끝까지 호기심을 잃지 않게 전개된다. 여기에 꿀벌이 우리 인간의 삶에 지닌 의미까지.


아주 희망적으로 소설이 끝났으면 하지만, 베르베르는 현실에서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도 있지만, 지금 이대로 살아가는 우리들 생활에서는 지구 온난화를 피할 수 없음을 그는 소설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꿀벌에게서 생존 방식을 배우고 꿀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음을... 그런 미래를 소설의 끝부분에서 보여주고 있다.


다만, 지금처럼 살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 있다. 인류는 3보 전진하고 2보 후퇴하면서 역사를 만들어 왔다는 것. 또 이런 역사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간다는 것.


그렇다. 예정설이 아니다. 전생이 있다고 해서 후생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현재를 통해 바꿀 수가 있다. 즉 예정설 자체가 결정론이 아닌 것이다.


예정은 말 그대로 예정이다. 얼마든지 수정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3보 전진 2보 후퇴에 담겨 있는 의미다.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언제든지 전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2보 후퇴의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2보 후퇴의 기간을 줄이는 일 또한 우리들의 행위에 달려 있다. 베르베르는 바로 '꿀벌의 예언'이라는 이 소설을 통해서, 아니 소설 속 예언서의 존재를 통해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방대한 소설이지만 읽기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빨리 끝을 향해 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긴다. 소설 속 주인공이 빨리 예언서를 찾으려 하는 마음과도 같이. 하지만 예언서를 찾기 위해서 그들이 시간 순서를 밟아가야 하듯, 이 소설 역시 순서대로 읽어가야 한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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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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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불펜의 시간'이라니. 불펜은 마운드가 아닌 마운드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곳 아닌가. 어떤 선수는 불펜 투수라는 이름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도 하는데...


불펜은 그래서 밝음과 어둠으로 굳이 나눈다면, 어둠 쪽에 가깝다. 물론 프로야구에서 불펜 투수를 한다는 사실은 프로가 되지 못한 다른 선수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남에게 주목받지 않는 삶. 그런 삶을 불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면, 불펜을 마운드에 오르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마운드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장소를 불펜이라고 한다면, 불펜의 시간은 노력과 기대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화려한 마운드의 삶을 보여주지 않고, 불펜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마운드에 서려고 하지만 설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없다면 마운드에 선 사람들도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다.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경기를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불펜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불펜의 도움으로 자신들이 더 빛날 수 있다.


하지만 마운드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사람이 불펜의 고충을 알까? 불펜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알까? 어쩌면 불펜은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설 수밖에 없는 자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소설에서 말하는 불펜의 시간은 그래서 마운드에 서기 위해 준비하는 미래의 영광을 대비하는 노력의 시간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오히려 경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시간이라고 해야 한다.


본래는 밀려난 삶을 불펜의 삶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혁오를 통해서 불펜의 삶이 타의에 의해서 밀려난 삶, 능력이 부족해서 밀려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고등학교까지 최고의 투수였던 혁오는 진호의 죽음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러다 그는 깨닫는다. 


'왜 소수의 선수만 프로가 되는 거야? 왜 1군과 2군을 나누는 거야? 왜 굳이 연장 게임을 해서까지 승패를 가리려는 거야? 연봉과 성적은 왜 다 공개하는 거야? 왜 모두 승자가 될 수 없는 거야?' (157쪽)


'그래서 혁오는 결단했다. 남들과 다른 방식의 야구를 하기로. 이기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 스포츠를 하기로. 어제까지의 세계, 프로야구 역사와의 대결을 포기하고 가장 꿈꾸었던 기록과의 대결과 포기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자기만의 리그를 개설하기로.' (158쪽)


프로라는 세계는 경쟁의 세계, 야구가 기록과의 싸움도 되지만, 다른 선수와의 경쟁도 치열하다는 사실. 그런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야구계에서 은퇴해야 한다는 사실. 소수만이 프로가 되는 비정한 현실을 깨달은 혁오는, 자신만의 경기를 하기로 한다.


승부와 관계가 없는,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하는 야구. 그는 중간 계투로 프로선수로서의 생명을 이어간다. 불펜 투수인 것. 불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데, 이를 자신의 의지로 해나가고 있다.


사람들이 그를 비난해도 그는 밀려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의 세계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독립리그에서 프로선수가 되기를 꿈꾸지 않고 야구를 하는 혁오의 모습이 그것을 보여준다.


이런 혁오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 경쟁, 남보다 앞서 가겠다고 아등바등 특종에 혈안이 되어 있던 기현이라는 기자. 그 역시 신문사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 그렇다. 꼭 남에게 잘 보이면서, 굽신거리면서 사회 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 이런 기현도 신문사에서는 '불펜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편집장과의 갈등으로, 그런 기현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으로부터, 기현은 불펜이 아니라 퇴출이 될 위기에 처한다. 물론 퇴출이 아니라 퇴사다. 스스로 나온다. 다른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남 눈치를 보면서 기사를 쓰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현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지내는 새롬이 한 말, '작아도 단단한 것, 어쩌면 작아서 단단한 것.' (238쪽)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주인공 준삼에게도 '불펜의 시간'이 다가온다. 혁오는 야구장에서, 기현은 신문사에서, 준삼은 대기업에서 '불펜'으로 내쳐진다.


견뎌내지 못한 준삼에게 혁오가 포기하지 않고 공을 던지는 모습은 그에게 다시 시작할 힘을 준다. 


'누구나 아름다움의 조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겐 서로의 조각을 자극할 힘이 있음을. 나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확신이 준삼의 마음에 찾아왔다.' (  251쪽)


이렇게 소설은 불펜의 시간을 보내던 세 사람이 모두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낸다는 희망으로 끝난다. 희망이다. 절망에 겨워 '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만 내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삶을 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사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 그것을 펼쳐보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그렇게 되기 위해 '불펜의 시간'을 거쳤을 그들을 소설은 보여준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사는 세 사람이 야구라는 공통 분모를 통해 각자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모습을... 아니 혁오를 통해 준삼과 기현이 마운드의 삶이 아니라 불펜의 삶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달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세 사람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소설은 어느 새 끝나 있다. 그리고 '불펜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내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모처럼 마음이 청량해지는 소설을 읽었다는 느낌... '연꽃'이 떠올랐다고 해야 할까? 무더위에 그다지 깨끗한 물이라고 할 수 없는 연못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혁오의 삶이 바로 연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엉킨 마음이 풀리는 그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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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적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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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서로 연결이 되지는 않지만, 별 상관이 없다. 한편 한편이 완성된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제목이 된 소설은 경쾌하다. 자본주의의 적이라고 하면 공산주의를 생각해야 하는데, 아니다. 이미 공산주의는 이 세상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적은 무엇일까? 소설은 그런 자본주의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세상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삶을 '자폐'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자폐 가족'이 바로 자본주의의 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어려워한다. 관계맺기를 어려워하니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가 없다. 현대 문명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들이 된다. 그러니 그냥 자신들의 힘으로 살려고 한다.


자본주의는 필요가 아니라 수요를 창출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서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하지만 이 자폐 가족에게는 새로운 물품이 별로 필요없다. 그냥 그들이 자급할 수 있으면 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간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적이 될 수밖에.


이런 과정을 경쾌하게 그려낸다. 어쩌면 궁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을 발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으니, 그렇다. 우리가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환경 문제를 걱정하지만, 지금처럼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자본주의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는 한, 기후 재앙이나, 환경은 나아질 수가 없다.


결국 자본주의는 우리의 생활을 먹고 사는 불가사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본주의를 이겨낼 수 있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참조할 만하다. '자폐 가족'이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이를 생태학자들의 용어로 바꾸면 '자급자족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먹을거리는 자신이 생산하고, 가능하면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공장에서 생산한 물품보다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내는 물품을 쓰면서 사는 삶. 자급자족의 삶. 


그런 삶으로 생활이 바뀌면 자본주의가 초래한 온갖 병폐들을 없앨 수가 있다. 이 소설 '자본주의의 적'에서 그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과 꼭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에 나오는 시골 사람들의 모습이 딱 그렇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의 적'에 나오는 '자폐 가족'과 비슷하다. 크게 욕심 내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그런 삶이 경쾌하게 그려지고 있어서 읽으면서 웃음을 머금게 된다. 가볍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는 않게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미있게 읽었다. 그냥 재미가 아니라 울림이 있는 소설이었다. 그 소설을 읽은 뒤 이 소설집을 읽으니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


'검은 방'이라는 소설은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였다면, 이 소설은 어머니를 중심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회상을 통해서 전에 읽었던 소설을 떠올릴 수가 있게 된다. 여기에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과도 연결이 되고.


한 시대 무엇을 위해서 살았던가? 과연 그런 사회는 도래했는가?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보다는 바로 우리 삶, 스스로를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대체로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이 경쾌하지만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아무리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무겁지 않게 표현하고 있지만, '계급의 완성'이라는 작품은 결코 가볍지 않다. 경비원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자신들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선물이랍시고 주는 사람들, 평생을 힘겹게 일하지만 얻는 것이라고는 상한 몸밖에 없는 사람들.


우연히 발바닥, 그것도 보드랍고 '연분홍 빛 발바닥'이라고 소설에서 표현한 태어날 때는 누구나 갖고 있는 그 발바닥을 땅 한 번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관리라는 명목으로 - 사실 그들은 관리하지 않아도 어릴 적 갖고 태어난 발바닥을 그리 험하게 만들지 않는다. 다만, 관리하면서 더욱 더 보드랍게 관리를 할 뿐이다. 땅에 발디디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 그런 발바닥을 유지하고 있는데, 죽어라 일만 하는 사람은 너무도 거칠고 갈라진 발바닥을 지닐 수밖에 없는 현실.


그렇다. 어떤 이는 계급을 '냄새'로 구분했지만, 정지아는 이 소설에서 '발바닥'으로 구분했다. 땅을 딛고,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존재인 발바닥. - 물론 손도 마찬가지다. 소설에서는 아내의 손을 이렇게 표현했다 -. 아들의 발바닥을 보는 순간 그는 '아들의 발만큼은 태어났을 적 그대로, 보들보들, 야들야들,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복숭아꽃 빛깔로 되돌려주고 싶었다'(211쪽)고 생각했다.


아들의 발바닥을 정리해주지만, 그것이 그때뿐이리라.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바로 계급은 이렇게 해서 완성이 된다. 소설 제목이 '계급의 완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슬프고도 무거운 내용이다. 하지만 작가는 가볍게 표현하고 있다. '해학적 표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작가는 우울에 찌들지 않게 그림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음을, 그런 희망을 우리가 지녀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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