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백온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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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구입해 놓고, 책장에 고이 모셔놓고 있다가 이제는 읽어야지 하고 읽었는데, 일곱 편의 소설.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각 소설의 특징을 찾는 것이 더 좋은 읽기겠지만, 소설 역시 시대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 작품들이 지닌 어떤 공통점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더 앞선다. 그러다 실패. 


어떤 작품은 계속 마음 속에 남아 있고, 어떤 작품은 빠른 속도로 읽었고, 또 어떤 작품은 함께 실린 비평을 보고서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했는데...


대상 수상작이 백온유가 쓴 '반의반의 반'이란다. 반의 반이면 1/2이고, 그것의 반이라면 1/4이 되나? 그런데 왜 제목이 이럴까?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읽게 되는데... 등장인물은 넷이다. 할머니 영실, 엄마 윤미, 딸 현진, 그리고 요양보호사 수경. 


사건이 벌어진다. 영실이 꼭꼭 감추고 있었던 돈 오천만 원이 사라진 것. 이제 범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등장인물 넷에 범인으로 의심받을 사람은 정해져 있다. 요양보호사. 문제는 증거. 하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판정을 받은 영실. 확실하지 않는 CCTV. 물증은 없다. 심증은 있는데...


이 사건이 중심이 되지만, 사실 소설의 중심은 이것이 아니다. 바로 비틀어진 관계. 즉 서로의 마음을 열지 않은 관계를 지속한 가족의 이야기다. 모든 것을 다 터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가장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이 가족이라면, 이들은 무엇을 공유했을까?


가족이 공유하고자 하는 것 중에서 가장 먼저 꼽으라면 그것은 사랑 아닐까? 이 사랑이 맹목적일 필요는 없다. 다만,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말, 행동, 마음가짐 등등이 상대에게 가 닿으면 된다.


어쩌면 상대를 가장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공동체가 가족일지도 모른다. 그냥 알아서 하겠지, 엄마니까, 아빠니까, 할머니니까, 자식이니까, 손녀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데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가족의 바람직한 형태 아닐까.


따라서 가족은 똑같지는 않지만 다름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관계일 수 있다. 서로를 다독거려줄 수 있는 관계. 하지만 이 소설 속 가족은 그렇지 않다. 영실-윤미의 관계는 데면데면하고, 영실-현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월을 보내왔을 뿐 이들에게는 끈끈한 무엇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아니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에 보탬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양보호사 수경은 그렇지 않다.


인생 말년에 수경의 태도에 마음을 여는 영실인데, 어쩌면 영실이 기대한 가족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엄마인 윤미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고, 손녀인 현진도 그랬을 텐데, 이들의 관계는 이상하게도 조금씩 비틀어져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돈의 행방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영실에게는. 영실은 인생 말년에 자신을 보듬어준 수경이 고마울 뿐이니... 물론 돈을 수경이 가져갔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소설을 읽으며 함께하지만 무언가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비틀어져 어긋나는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관계를 인식한다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아마 윤미나 현진이 수경의 반의반의 반만큼만 했어도, 또 영실이 그렇게 했어도 이들의 관계는 훨씬 나아지지 않았을까?


비틀어진 관계를 성해나의 '길티 클럽:호랑이 만지기'에서도 만날 수 있고, 성혜령의 '원경'에서도 만날 수 있다. 특히 성혜령의 '원경'을 읽으면서는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을 떠올리기도 했으니..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서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하는 사람에 의해 관계가 비틀어질 수 있음을... 그것이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 아이를 학대하는 감독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니... 


서로 딱 맞는 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다. 세상에 만들어진 퍼즐 조각처럼 제 자리를 찾기만 하면 딱 맞아떨어지는 관계를 원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딱 맞지 않기 때문에 맞추려고 자신과 상대가 조금씩 자신을 내어놓고 함께 맞춰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가 중심이 아니라 '우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한다면 정확히 맞지는 않더라도 떨어지지는 않을 정도의 맞춤은 된다. 2025 제16회 절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며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관계, 그러한 관계를 비틀어지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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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후쿠
김숨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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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 마음을 울린다.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첫 구절. 사람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은 마지막 구절.


'간단후쿠를 입고, 나는 간단후쿠가 된다.' (7쪽) 

'답장은 마세요.'(288쪽)

<간단후쿠 : 일본군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이 주로 입은 간단한 원피스식의 옷)


'군인을 데리고 자는 공장'이라는 부분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스즈랑은 바늘 공장이다.

스즈랑은 실 공장이다.

스즈랑은 비단 공장이다.

스즈랑은 신발 공장이다.

스즈랑은 군복 만드는 공장이다.

스즈랑은 돈 많이 버는 공장이다.

스즈랑은 좋은 공장이다.

스즈랑은 간호사 양성소다. (58쪽)


소설을 이끌어가는 요코 (개나리)가 끌려간 곳이 '스즈랑'이다. 그런데, 이 스즈랑에 오기까지 많은 이들은 공장에 가는 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속였다. 어떻게 보면 '스즈랑은~이다'라는 말은 사실이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곳으로 가는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스즈랑은 ~이다'는 거짓이다. 속임수다. 인신매매를 하기 위한 술수다. 이것은 거짓을 넘어 범죄다. 


범죄에 속아 넘어간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없다. 범죄자를 비난하고, 그를 처벌해야지 피해자를 비난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넘기는 일은 없다.


또한 부끄러워해야 할 존재는 범죄자이지 피해자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은? 이들은 여전히 거짓을 말한다. 여러 증거가 있음에도 그들은 '스즈랑은 ~이다'라는 말을 하고, 그곳으로 자발적으로 왔다고, 즉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왔다고 우긴다.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속임수로 사람을 끌고 갔음에도,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들은 정당하다고 말한다. 이는 범죄를 감추려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우기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다.


이런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자신들의 범죄를 이토록 가리고 없는 것으로 하려는 자들을,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자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소설은 그러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스즈랑은 ~이다'에 속아 온 주인공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갈 뿐이다. 그곳에 온 사람들. 모두가 '스즈랑은 ~이다'에 속아 온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 영문도 모른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책임을 묻지 않아도 소설을 읽으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안다. 다만 그 책임을 지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버티고 있는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서글픈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젠 생존자가 몇 분 남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버티기만 하는 일본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소녀상을 세워도 일본 눈치를 보는 사람들. 거기서 더 나아가 이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외치는 상황.


마지막 구절, '답장은 마세요.'란 말을 응답하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였는지, 원. 아니다. 인간의 존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답장은 마세요.'라고 하는 것.


이 말에 담겨 있는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 어찌 응답을 안 할 수가 있나? 어떻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있나?


소설은 담담하게 전개되지만, 이 담담한 전개는 비극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토록 슬픈 현실, 우리 아픈 역사.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소설은 '요코'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니 첫 문장은 사람의 존엄을 잃은, 옷(간단후쿠)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군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 또한 돈을 벌 목적으로 사람들을 이용한 자들이 있을 뿐. 하지만 이들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다.


나나코가 죽은 다음에 눈이 먼 하나코를 위해 모두가 나나코가 되어주는 모습을 통해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애처롭다. 그러니 요코가 '답장은 마세요.'라고 했지만, 우리는 이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한 응답을 작가 김숨이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 지속적인 응답에 우리 역시 반응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비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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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서 거장의 클래식 5
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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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 대한 글이라고 해석이 된다. '악녀서'라니.. 악마같은 여자가 나오는 소설인가 싶었다. 세상에서 악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는데, 요즘은 이들에 대한 다른 시각을 지닌 소설들이 나오기도 했으니, 이 책에 나오는 악녀들은 누구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소설을 읽어도 악녀를 찾을 수가 없다. 어째서 악녀인가? 하는 의문. 오히려 상처받아 사회에서 고립된 사람들의 이야기 아닌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점으로 어울리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 이야기. 


밀려났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제 자리를 찾은 사람 이야기. 이런 사람들을 악녀라고 하면, 우리 모두는 악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악녀들이 악녀라고 불리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일 텐데... 네 편의 소설 주인공은 모두 여자다. 그리고 이들은 남자보다는 여자를 사랑한다. 소위 말하는 동성애자이다. 


이런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지금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는데, 퀴어 축제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시위대들... 차별금지법이 동성애찬성법 또는 동성애권장법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동성혼이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인구총조사에서 동성 배우자를 인정한다는 최근 기사를 봤는데, 우리나라 역시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반면에 대만은 동성혼을 인정한다고 한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 '그는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된 자유중국 타이완에서 첫 번째 동성 혼인신고를 하고 당당하게 함께 살고 있는 1호 부부이기도 하다. 다산 작가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지만 그는 어느 자리에서도 동성애를 권유하거나 예찬하지 않는다. 동성결혼은 자신의 삶이지 타인이 개입하거나 타인에게 권유할 성격의 어떤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존재이자 삶이지 선택 가능한 가치나 이념이 아니다.'(242쪽)고 하고 있다.)


대만 작가인 천쉐가 쓴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러한 동성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터. 이러한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 밀려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찾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겠는지를 이 소설은 짐작하게 해준다.


그럼에도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아 찾기에 성공한다. 그래 그러면 어때? 이게 바로 나야! 하게 되기까지,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당당하게 선언하기까지 겪게 되는 과정. 


굉장히 힘들고 우울한 과정을 거쳤음이 분명한데 소설은 빠르게 전개되는 서술방식으로 인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지는 않는다. 


인물의 마음을 따라가면 그 인물이 겪은 갈등과 고통을 함께할 수 있고, 그러면서 주인공이 자신을 찾고 삶을 긍정하게 되는 ('이상한 집'은 약간 다르지만) 과정에서 읽는 내 마음도 펴지게 된다.


굳이 동성애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사회의 통념과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배제 당하는 사람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도 된다.


다수와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 아니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척당하는 사람들. 그래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 하지만 이들은 그대로 이들일 뿐이다. 이들에게 다른 존재로 살아가라고 강요할 순 없다.


그런 강요를 누구도 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므로, 그 다름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이 소설 속 인물들도 그러한 삶을 살아왔으니... 하여 방황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그래, 이것이 바로 나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내 사랑은 바로 이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 그러한 일들을 보여주는 소설. 


마지막 편인 '고양이가 죽은 뒤'라는 소설은 천쉐의 자전적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물론 내가 천쉐라는 사람을 알지 못하지만 이 책에 실린 '후기-칭에게'를 읽어보면 아, 작가도 이런 과정을 거쳤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천쉐는 소설을 쓰고 이 소설 속 주인공은 그림을 그리지만, 이들은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려 하고 있고, 또한 그러한 예술을 통해서 다시 자신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소설과 작가의 삶을 일대일로 대응시켜서는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소설의 소재를 가져오더라도 소설적 장치를 통해서 인물의 삶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냥 소설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작가의 삶을 참조할 수는 있지만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일은 삼가야 한다. 천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에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일은 어떻게 계속 소설을 써나갈 것인가, 어떻게 자신이 쓰고자 하는 소설을 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흥미를 갖는 제재는 무엇이든 소설의 형식으로 표현해내고 싶었다'(12쪽)


그렇다면 작가의 삶을 몰라도 이 작품을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또한 작가의 삶을 잘 알아도 읽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한 편 한 편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과정, 이 빛이 남에게서 주어진 빛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찾은,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빛임을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악녀서'라고 했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그러면 이런 '악녀'가 더 많이 생겨, '악녀'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악녀'라는 말이 소수자라는 말로 쓰이고, 소수자는 다르기 때문에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 소수든 다수든 다 다른 존재라는 것, 다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그곳에 이르지 않는 사회가 좋은 사회임을, 이 소설집의 복간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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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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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원작에 '여자들과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부제가 달려 있다고 하는데, 번역본에는 그 문장이 나와 있지 않다. 책표지에 있는 클레어 키건에 관한 설명에 나와 있다. 번역본에도 이 부제가 달려 있으면 소설을 좀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는데...


세 편의 소설에 모두 남녀가 등장한다. 두 편은 여자가 서술자로 등장하고, 한 편은 남자가 서술자로 등장한다. 남자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너무 늦은 시간'을 보면 강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는데, 그러한 행동이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불만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또는 장난, 농담이었다는 식으로 행동과 말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상대의 감정을 느껴보려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무 늦은 시간'의 주인공 '카헐'이 바로 그렇다. 여성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생각한다.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면 좋고, 자신을 조금이라도 귀찮게 하면 싫다. 싫은 정도에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것을 비하하는 말로 표현을 한다.


그러한 언어에는 자신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데, 이는 세상은 남자라는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지 여성이 중심이 될 수는 없다는, 여성은 남성의 편리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여전히 불안에 시달리는 존재, 유리 천장에 갇혀 있는 존재는 남성보다는 여성이다. 여성은 그러한 위험을 늘 생각하고 있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카헐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남동생과 함께한 장난, 과연 이것이 장난인지도 의문이지만, 그러한 장난을 웃음으로 넘기는 아버지의 모습. 여기에 여성의 자리는 없다.


자신들을 위해 음식을 차린 엄마가 앉기도 전에 식사를 하는 모습도 그런데, 엄마가 앉으려 하자 의자를 빼서 넘어뜨리다니... 그것을 야단치지 않는 아버지. 아니 그렇게 할 생각을 한 아들 둘. 이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중에 카헐이 그때 아버지가 다르게 했더라면 하지만, 그것은 잠시고, 그는 아버지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이런 그의 모습을 통해서 남자가 무의식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이 여자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그리고 차별의식이 체화되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나는 과연 '카헐'과 얼마나 다른가 하고.


'길고 고통스런 죽음'에는 여성 서술자가 등장한다. 작가다. 우리 말로 하면 작가의 집에 들어가 창작활동을 하려 한다. 그런데 한 남성이 방문한다. 다짜고짜. 그는 마치 권리를 빼앗긴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데... 


아니, 작가가 글만 쓰고 있나? 작가의 방에 들어가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글을 쓰고자 함이 아니던가. 그런 과정에서 무엇을 하던지 그건 남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


방 안에 틀어박혀 글만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남성이 남성 작가에게 그렇게 행동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온갖 꼬투리를 잡으려 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클레어 키건의 작품이 지닌 장점이 나타난다. 복수를 한다. 어떻게 작가답게 작품으로... 그래서 제목이 된 '길고 고통스런 죽음'은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일이 된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영역을 침범하고 함부로 말한 사람을 응징한다.


'남극'은 좀 섬뜩하다고 할 수 있는데, 소통하지 못하는 관계는 얼어붙은 남극과 같을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을 일탈 행위를 하는 여성에게 닥친 비극으로 읽을 수 없는 것이 '친절'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절을 사랑이라고 해도 좋다. 자신은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상대에게는 지옥과도 같을 수 있음을.


친절한 남성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친절이 문제다. 상대를 배려하는 친절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친절이다. 즉 상대를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그 존재를 자신에게 끌어오기 위한 친절일 뿐이다.


이런 친절이 여성에게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지를 소설의 후반부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친절이 아니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는 친절은 친절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렇게 세 편의 소설에는 남녀가 나오지만 이 남녀는 평등하지 않다. '여자들과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소설이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역시 클레어 키건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지만, 전에 읽었던 소설에서는 어떤 밝음, 따스함 등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 소설집에서는 어긋난 관계에 누가 책임이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어긋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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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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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5편의 단편소설들. 커트 보니것이 유명해지기 전에 쓴 소설들. 이미 그가 어떤 소설을 쓰게 되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소설들.


다양한 형식과 내용이 이 작품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보니것 특유의 유머와 풍자가 담겨 있고, 또 평화 사상이 담겨 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기를 다룬 소설 '유인 미사일'을 보면 냉전시기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지 않고 인간으로 대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소련과 미국의 조종사(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충돌해 죽은 다음, 그 아버지들이 편지로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소설. 전쟁광인 군인들이 아니라 냉전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다룸으로써 보니것은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반전-평화를 다루는 소설로는 '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가 있는데, 초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염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다른 존재를 다룰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다른 나라의 무기를 파괴하는 쪽으로 사용할까? 그런데 왜 다른 나라의 무기를 파괴하려 하지? 그것은 다른 나라를 적국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평화를 위협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무기를 파괴하면 그 나라는 가만히 있는가? 그 나라는 침략받았다고 생각해 다른 보복 수단을 강구하지 않겠는가. 이러면 서로가 무기를 증대할 수밖에 없고, 서로서로 적대행위를 멈출 수 없게 된다.


끝없는 적대행위, 무기 개발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냉전시대 핵무기 개발의 역사 아니던가. 평화는 무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힘의 균형이라고 하지만, 그 균형을 이루기 위해 더 많은 무기들을 개발하고, 거기에 많은 희생이 따른다. 보니것은 반하우스라는 초능력(염력)을 지닌 사람을 등장시킴으로써 인간이 전쟁을 위해 일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 보니것 특유의 풍자를 보자. 특출한 능력을 지닌 반하우스 교수는 세계 평화를 위해 무기를 파괴하기로 한다.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모든 나라의 무기를...


'그날 이후, 당연히 반하우스 교수는 전 세계의 무기를 체계적으로 파괴해 오고 있고 급기야 지금은 돌멩이나 뾰족한 막대기 외에는 군대를 무장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그의 활약이 정확히 평화로 귀결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폭로 전쟁'이라 불릴 수 있는 무혈의 재미있는 전쟁을 촉발시켰다. 모든 나라는 적국의 간첩들로 넘쳐 나고 있으며 이 간첩들의 유일한 임무는 군사 장비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 뒤 그 군사 장비를 언론에 보도해 반하우스 교수의 주의를 끌기만 하면 그 군사 장비는 즉각 파괴되었다.'('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 272쪽.)


참 통쾌한 풍자다. '무혈의 재미 있는 전쟁'이라니... '폭로 전쟁'이라니... 마치 "쟤가 그랬어요."라고 일러바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 일반 시민들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않는, 반하우스 교수의 행동.


그럼 세계 권력자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오히려 반하우스 교수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자신들이 무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든 반하우스 교수의 거처를 찾아내 그를 제거하려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보니것은 전쟁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평화를 위한 노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반하우스 교수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반하우스 효과는 아니다'('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 275쪽)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겪은 작가인 보니것. 그는 평화를 염원한다.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 전쟁으로 인해 겪게 되는 어린아이들의 고통을 '난민'이라는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니...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아이들. 자신의 아빠를 찾으려는 모습을 통해서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에는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소설이 몇 편 있다. 미래를 살아갈 세대가 현재에 고통을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짓말'이란 소설을 보면 명문고 입학과 관련된 일들이 나타나는데, 우리나라 역시 '특목고'라고 해서 그러한 일을 겪고 있다. 여기에 소위 명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행태. 하지만 보니것은 명문가 사람들도 염치가 있음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아이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모습과, 어른들의 위선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염치 있는 명문가 사람의 모습인데... 우리는 과연 그런가? 


우리나라에서 잘나간다고 하는 집안 사람들, 과연 염치가 있는가? 그들이 자식들을 위한답시고 한 행태들을 보라. 예의, 염치는 사전에만 존재한다. 적어도 보니것은 명문가라면 그래도 염치는 있어야 한다는 점을 등장인물인 리멘젤 박사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자식의 문제에 이성을 잃고 특별 입학을 부탁하는 그의 모습. 그러나 거절당하고서야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그나마 염치가 있는 명문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그래서 '이제 우린 더 이상 여기에 오지 못할 것 같아요.'('거짓말'. 361쪽)라고 하고 있으니... 우리나라 있는 집안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태도를 기대한다면 무리일까?


또한 아이를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 세상에 문제아는 없다. 문제 어른, 문제 사회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연상시키는, 또 최근에 나온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연상시키는 '아무도 다를 수 없던 아이'라는 소설도 많은 여운을 준다. 그 아이의 마음을 여는 것은 어른과 사회의 몫이라는 것을...


이밖에 다른 소설들도 좋다. 환상적인 내용의 소설도 있고, 일본 소설가인 가카야 미우가 쓴 [70세 사망법안, 가결]이란 소설을 연상시키는, 생명 연장으로 사회가 겪게 되는 모습을 그린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란 소설도 지금 현대 의료과학이 추구하는 현실에 비추어 읽어볼 만하다.


돈만으로 자신의 행복을 사지는 못한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포스터의 포트폴리오'라는 소설도 돈이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다양한 소설들을 통해 다양한 주제들을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으니... 보니것의 초기 단편들이지만 그의 소설 세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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