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코와 쿄지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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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평탄해 보이지만, 그러한 평탄 속에는 수많은 주름이 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춰진 주름들. 어쩌면 우리들의 삶은 그런 주름들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주름을 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틈들을 가리려고만 해서는 진실을 볼 수 없다. 삶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틈들을 인식하고, 그 틈들을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온전한 삶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런 틈, 주름들을 가리려는 세력들이 있다. 기득권을 지닌 세력, 그들은 주름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들의 허위가 밝혀지고, 허위로 누리고 있던 권력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주름이 드러나지 않게, 틈이 나타나지 않게 가리고 메우려 한다.


권력자의 말은 권력 없는 사람들의 말을 억압하고, 말이 발화되지 못하게 한다.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권력을 지닌 자다. 그렇게 권력을 지닌 자들은 약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그렇다고 약자들이 언제까지 침묵만 하고 있을 순 없다.


그들이 겪은 주름들을 펼 수 있어야 한다. 주름들을 펴서 그들 역시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연대가 필요하다.


침묵이 아닌 말하기는 연대를 통해서 나오게 된다. 그런 연대는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공감의 언어, 진실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의 언어는 사라져서는 안 된다.


소설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첫작품에서 '나의 언어 나의 이름'(42쪽)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렇게 언어,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이름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도 사회적 제약이 만만치 않다. 권력의 힘은 이들이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이름을 갖길 원하지 않는다. 단지 원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억압하고 배제한다. 철저하게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그래서 약자들은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은 권력을 쥔 자들이거나 한때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다. 어떤 사건을 언급할 때 이름이 불리는 사람들이 그렇다.


한정현은 이것을 거부한다. 한정현은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를 쓰지 못하는 사람들, 이름을 내세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틈, 주름에서 그들을 나오게 한다. 주름으로 감춰져 있던 사람들, 삶들을 펼쳐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들의 삶이 더욱 다양함을, 더 많은 삶들이 감춰져 있음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단지 보여줌을 넘어 연대를 통해 그들이 주체로 서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집의 끝에 실린 에필로그에서 인물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떠나올 때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떠나올 때와 다른 모습으로.


소설집 제목이 된 '쿄코와 쿄지'만 봐도 그렇다. 두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다. 한 인물이다. 쿄코와 쿄지는 모두 경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글로는 같은 경자지만 한자어로 쓰면 다르다. 남녀 차별이 있던 시대에 동등한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네 명의 친구는 모두 이름에 '자'를 넣기로 한다. 아들이 아닌 스스로 자(自). 이는 남의 눈에 비친 삶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자'로 살기는 힘든 세상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신부'들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수녀'들에 대한 언급은 없듯이, 운동권에서도 앞에 나섰던 많은 남성 운동권 지도자들은 언급이 자주 되지만, 뒤에서 그들을 받쳐준 수많은 여성 운동가들은 잘 언급되지 않듯이, 또 삼풍백화점에서 묵묵히 일해야 했던 많은 여성노동자들, 용산 참사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인물들, 부마항쟁도 마찬가지로 잘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자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으로 건너가 경자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행정을 담당한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경자의 자를 아들 자(子)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쓴다. 이 이름이 일본어로 쿄코다. 하지만 경자는 스스로 '자(自)'자를 쓰고 싶어한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침묵을 강요하는 권력 앞에서 아직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스스로 자(自) 자를 쓰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이 다른 소설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각기 다른 단편들이지만 읽다보면 인물들이 서로 얽히게 된다. 관계를 맺는다. 즉 약자들의 연대, 감춰진 사람들의 연대가 소설 속에 나타난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의 삶을 주름으로부터, 틈으로부터 꺼내게 된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하나로 엮여 나타나는데, 명확히 서술하기보다는 인물들의 삶에서 접힌 주름들을 펴면서 우리에게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직면하게 한다. 그 펴진 주름도 다 펴진 것이 아님을, 그래서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소설들이 실려 있다.


한정현의 전작에서도 그렇지만 '낙관하자!'를 생각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언어를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소설집의 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그들이 기억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될 테고 그것으로 충분할 것도 같았다. 나 또한 그곳으로 돌아가면 이버엔 그들에게 내가 공부했던 부산에 대해, 부산에서 바라봤던 광주에 대해 말해볼까 싶었다.' (451쪽) 


이렇게 자신의 언어를 찾은 사람,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사람. 바로 그들이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기까지는 수많은 약자들의 연대가 있었음을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작가 중 좋아하는 작가로 한정현을 꼽을 수 있게 만드는 작품집이기도 하고... 기존의 작품들과 연결이 되기도 하니, 읽으면서 한정현 작품들을 곱씹게 되기도 하는 소설집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경자(京子)가 아닌 경자(京自)들이 있음을, 우리는 그러한 경자들을 주름과 틈에서 나오게 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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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 생명의 씨앗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프랭크 허버트 지음, 유혜인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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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이다. 발표된 연대 순으로 묶었기에, 이번 권에서는 1962년부터 1985년까지의 작품이 실려 있다. 영화 '듄'을 보지 않았고, 소설 '듄'도 읽지 않았기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서, 듄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단편들이 있다는데, 그것이 내게는 큰 의미를 주지 않았다.


그냥 SF소설이라고, 그런 소설들이 시대와 배경만 다르지 우리 인간들의 삶을, 인간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고 여기고 읽을 뿐이다. 이 소설집도 다양한 배경,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인간이 만약 다른 행성으로 이주를 한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두 편이 마음에 남는다.


하나는 '생명의 씨앗'이고 또 다른 하나는 '피아노 수송 작전'이다. 둘 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낯선 곳으로의 이주를 주제로 삼고 있다.


만약 우리가 낯선 우주의 다른 행성에 정착해 살아야 한다면 과연 지구와 똑같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 행성을 지구와 똑같이 만들어야 할까? 오히려 그 행성에 인간이 맞춰야 하는 것 아닐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생명의 씨앗'이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지닌 행성을 발견하고 인간들이 이주해 살아가도록 한다. 초기에 정착하기 위해서 지구에서 씨앗들을 가지고 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행성에서는 지구의 씨앗들이 살아남지 못한다. 다른 생명들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왜 그럴까 고민한다. 그리고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게 살아남은 생명체인 '매'에게서 답을 찾는다. 그렇다. 정착한 행성을 지구와 똑같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행성에 인간들이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식물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다. 이것이 진화 아니겠는가.


진화론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행성에서 살아가려 할 때 지구와 똑같은 조건, 똑같은 생물들로, 지구에서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하면 과연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지구와 완전히 똑같을 수 없다. 그 행성은 그 행성대로 수억 년 또는 수백 억년 동안 자신의 환경을 구축해왔다. (현재 우주의 역사를 약 138억 년이라고 하니, 그에 맞추면)


그렇다면 그 행성은 그 행성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 있다는 말이다. 지구에서 씨앗을 가져갔다고 해서 지구에서와 같은 성장을 바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행성에 맞는 성장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그 행성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


바로 지구에서와 다른 선택을 한 호니다와 크로다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 중심주의를 고수하는 과학자들은 그걸 인정 안 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처럼.


'과학자들은 인정하지 않을 문제였다. 그들은 이곳을 또 다른 지구로 만들려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행성은 지구가 아니었고, 지구가 될 수도 없었다. 들여온 생물들 가운데 매가 가장 먼저 이 사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크로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429쪽)


과학자라면 지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진화의 경로를 인간들이, 다른 생물들이 밟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틀에 갇힌 과학자들은 다른 행성을 지구에 맞추려 할 것이다. 바로 이 소설에서 비판하고 있는 과학자들처럼.


하지만 생활에 밀착한 사람들은 과학자와 다른 것을 발견한다. 소설의 크로다가 발견한 것처럼, 그들은 지구가 아닌 행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자신들이 바뀌어야 함을, 지구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살아가려 한다.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다른 행성에 이주한 인간들이 마주칠 일들이다.


'피아노 수송 작전'은 이주하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는가? 우주선에 실을 짐의 무게가 정해져 있다면... 


전혀 낯선 곳으로 가는 인간들이 꼭 가지고 가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과연 여기에 예술이 포함될까? 작가는 당연히 필요하다고 본다. 예술은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다른 행성으로 가더라도 예술도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는 무게가 너무 많이 나간다. 물론 그곳에서 조립을 하면 된다. 그러나 과거에서부터 전해져 온 예술품과 같은 피아노라면? 완전히 다 가져가지 못한다면? 일부라도, 아니 과거를 인식시키는 부분이라고 가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피아노의 무게 때문에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하지만 자식이 이 피아노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느낀 부모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아니, 숨겨서 가져갈 수 없기에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도 조금 양보해야 하고.


이런 과정이 이 짧은 소설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아직까지 화성도 가보지 못한 인간이 낯선 은하로 가서 살아야 한다면, 정말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갈까? 그런 이주에는 무엇이 필요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밖에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소설들이 꽤 있다. 타임머신을 생각하는 소설도 있고, 과거에서 사람을 데려온다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도 있고. 


무엇보다도 앞에서 언급한 두 소설처럼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이 있어서 좋다. 그것이 소설이 보여주는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듄]을 읽어봐야겠다. 적어도 그의 세계관을 잘 드러낸 소설이라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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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52-1961 - 오래된 방랑하는 집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프랭크 허버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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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관심을 가진 때가 달라진다. 어릴 적 웰즈의 소설들을 SF라고 한다면 그때부터 이런 종류의 소설에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소설을 장르로 구분하고, 그런 장르들이 고정불변인양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하지만 르 귄의 소설이나 버틀러의 소설, 클라크나 아시모프, 하인라인 등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종류를 SF소설이라고 한다면 최근에 관심을 가졌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이들의 소설에 관심을 가지니 우리나라 작가 중에 김초엽이나 천선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SF소설을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하기보다는 우리 삶을 다른 세계로 옮겨갔다고 볼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간접 경험을 하게 하는 데 이런 소설보다 더 좋은 소설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감정이입을 최대한 미루면서 한 발 떨어져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프랭크 허버트라는 작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사실 영화도 보지 않았고, [듄]이라는 소설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작가였는데, 이 작가에 대한 평이 좋고 [듄]에 대한 평도 [반지의 제왕]에 비긴다는 말도 있으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데...


이 작가가 쓴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1952년부터 1961년 사이에 쓴 단편들을 모아놓았는데, 읽으면서도 이게 그 때에 쓰인 소설이라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 쓰인 SF소설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소설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러 상황이 교차되고, 우주인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인간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에 짤막한 소설인 '무능자'를 보면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인류가 특이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분화된 세상이다. 어떤 이는 이동의 능력을, 어떤 이는 불을 피우는 능력을, 어떤 이는 미래를 보는 능력을 등등 각자 자신만의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고, 그 능력을 발휘하면서 사는 세상이 된다.


그렇다면 미래를 보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미래가 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미래는 이미 고정되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다다. 이것이 인간의 삶일까?


이미 정해진 대로 사는, 마치 성경의 '예정 조화설'대로 이미 신께서 예비하셨더라는 식으로 되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세상에서도 아무것도 아닌, 어떤 능력도 지니지 않고 태어난 무능자가 있다. 그리고 유능자들이 결합을 해도 무능자들은 계속 태어난다. 그렇게 무능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소설에서는 그런 사회를 끔찍하게 여기지만, 현실은 어떠할까? 자신의 삶이 그대로 정해져 있다면? 자신은 그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이 행복한 삶일까?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다는 피하지 못할 운명을 지니고 있지만, 태어남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에는 예측하지 못할 수많은 변수들이 있고, 그러한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운명을 만들어가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무능자들이 태어난다는 사실은, 기계적으로 정해져 있는 틀을 벗어나는 자율적인 인간의 삶이 탄생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꼭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 수도 있음을. 그래서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우리가 알아서 해 나가야 한다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나간단 뜻이다. 고정되지 않은 미래. 그리고 참견쟁이 예지자들도 우리를 귀찮게 할 수 없다. 여자로서 그게 좀 마음에들었다. 특히 결혼 첫날밤에는.' (213쪽. '무능자' 끝부분)


짧은 이 소설이 현대에 쓰였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만큼 최근에 나오는 SF소설과 구별할 수 없다. 그래서 시대를 넘어서 SF란 미래를 선취해서 우리들의 삶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아니 꼭 SF라고 하지 않아도 소설이나 다른 문학 작품들, 예술 작품들이 이런 역할을 해왔기에 인간의 역사와 함께 예술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 '무능자'말고도 '사격 중지'와 같은 소설은 압도적인 무기가 과연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무기로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답을 이 소설을 통해서 고민할 수가 있다. 그만큼 좋은 소설은 지금 우리에게 질문을 하게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사고의 과정이고 성숙으로 가는 길이 된다.


이 소설집 역시 SF라는 이름에 걸맞게 외계와 접촉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 소설들이 많다. 그렇지만 외계를 정복의 대상이거나 침략의 주체로만 보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소설들이 있기도 하다. 없을 수가 없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 그것은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본능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이질적인 존재와 함께하는 모습을 꿈꾸는 것도 인간이다. 이 소설집에는 그러한 것들이 함께하고 있다.


한편 한편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고, 이제 이 시기 이후의 단편집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 소설들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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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가게 마음이 자라는 나무 12
데보라 엘리스 지음, 곽영미 옮김, 김정진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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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프리카가 배경이다. 에이즈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곳. 에이즈가 무슨 천형인양 취급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편견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에이즈 환자는 많이 발생하고 있으니 (HIV바이러스 보균자라고 할 수 있지만, 편의상 그냥 에이즈라는 말을 쓴다),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특히 부유한 나라에서는 치료제 등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만성질환처럼 관리가 되지만, 부유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치료제를 구하기 힘들 뿐더러, 에이즈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도 힘들다. 지금은 좀 나아졌겠지만, 이 소설이 쓰일 때는 더 심했으리라.


말라위라는 나라에서 관을 만드는 일을 하는 아빠와 함께 살고 있던 빈티 가족은 아빠의 죽음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아빠 역시 에이즈로 죽었다고 하고. 이때문에 친척들에게로 간 빈티 남매들은 친척들에게 구박을 받는다.


죽은 형제의 재산을 얻어가는 친척들. 그들에게는 남겨진 아이를 소중하게 키우겠다는 생각은 없다. 오로지 짐일 뿐이다. 결국 할머니 집으로 탈출하고, 할머니 집에서 에이즈로 고통받는(부모들이 에이즈에 걸렸든, 자신들이 걸렸든)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할머니와 다른 메모리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와 함께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빈티. 그러면서 에이즈의 현실에 눈을 떠간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에이즈에 걸렸다고 무조건 피해야 할 사람도 아니며,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질병이라는 것.


말라위가 가난한 나라라서 제대로 치료하지 못할 뿐이니 그들을 잘 돌본다면 그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간다. 다른 아이들을 도우면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성장하는 빈티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줄거리다.


에이즈. 천형이 아니다. 인간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하여 소설 속에서는 예레미야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자신도 보균자지만 어떻게 하면 에이즈를 예방할 수 있나, 또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일을 한다.


그렇다. 인간이 함께 하면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인데, 이를 그 나라의 경제-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더 큰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말라위도 마찬가지다. 국가적인인 의료체계를 갖추고, 예방과 치료를 잘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야 하며, 개인들에게도 지켜야 할 수칙들을 명확히 알려준다면 더 큰 비극은 막을 수 있다.


문란한 성생활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수혈을 통해서 또 부모를 통해서, 그리고 모유 수유를 통해서도 감염될 수 있으니, 이 질병은 개인의 책임도 책임이지만 사회, 국가의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고, 이미 감염된 사람들도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 소설에서처럼 개인이 해결하게 해서는 안된다. 개인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서 감염되는 사람들... 빈티의 언니가 그런 상황에 처하지만 이들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소설은 희망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하늘나라 가게라는 이름은 관을 만드는 가게 이름이다. 어쩔 수 없어서 죽은 사람, 잘 보내주기 위한 가게. 그러한 일들. 


그들을 잘 보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게 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빈티의 성장을 통해서 에이즈가 빈곤한 국가들의 사람들을 어떻게 어려움에 빠뜨리는지를 잘 보여준다.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깨뜨릴 수 있는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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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 워프 시리즈 2
알렉산더 케이 지음, 박중서 옮김 / 허블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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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소년 코난'을 너무도 재미있게 본 세대다. '코난'하면? 미래 소년을 떠올리면 구세대, 명탐정을 떠올리면 신세대라는 말도 있지만, 꽤 오래된 애니메이션.


당연히 일본에서 만들어진, 그것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애니메이션이라서 원작이 있다면 일본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알렌산더 케이라는미국 작가였다. 


읽어보니 내용도 많이 다르다. 어느 작품이 더 우수하다 말을 하기보다는 작품의 장르가 지니는 특성,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등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지나친 문명의 발달이 한 순간 날아가버리고, 세상은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갈 듯하다. 기계문명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 육지의 대부분이 바다로 가라앉은 상황.


이런 상황에서도 다시 기계문명을 일으키려는, 다른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부리는 '인더스트리아' 사람들과 여기서 벗어나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려는 '하이하버'로 나뉜다. 나머지는 사람들이 생존하지 않는 많은 섬들.


여기에 살아남은 코난이 있다. 홀로 살아남는 법을 익힌 아이. 그러다 인더스트리아로 가게 되고, 거기서 할아버지를 만나 탈출해 하이하버로 가게 된다. 그 과정까지만이 소설에 표현되어 있다.


그런 과정에서 인류가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했는지,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선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작은 존재들인 인간들에게 그럼에도 희망이 있음을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자꾸만 '미래 소년 코난'이 떠올랐는데, 그런데 소설과 애니메이션의 전개가 다르다는 점이 소설의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포비'가 나오지 않고, 다만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짐시'라는 인물이 나와 포비와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하고 있는데...


세계에 다시 엄청난 쓰나미가 몰아닥친다. 그 쓰나미는 그나마 남아 있는 육지를 많이 쓸어가 버릴 것이다. 인더스트리아도 마찬가지고, 하이하버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쓰나미가 닥친 데서 끝난다. 그 다음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이제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코난이 지도자가 되어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야 한다. 그렇게 여길 수 있도록 하면서 소설이 끝을 맺는데...


아마도 그들이 만들어갈 세상은 자연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코난이나 라나가 다른 동물들과 교감을 하는 모습이 소설 속에 자주 나오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 생각할 수 있고.


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의 탐욕이 스스로를 파괴했기에 탐욕이 아닌 공존하는 쪽으로 세상이 나아가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이를 애니메이션에서는 더 받아들여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읽는 내내 애니메이션과 겹쳐서 다시 한번 추억을 소환한 읽기라고 해야 하나? 기후재앙이라고 하는 이 시대에, 그 다음이 어떤 비극적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이기도 하고,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미리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 전에 쓰인 소설이지만, 이 소설에서 파괴된 세게는 지금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세계는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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