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서 거장의 클래식 5
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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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 대한 글이라고 해석이 된다. '악녀서'라니.. 악마같은 여자가 나오는 소설인가 싶었다. 세상에서 악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는데, 요즘은 이들에 대한 다른 시각을 지닌 소설들이 나오기도 했으니, 이 책에 나오는 악녀들은 누구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소설을 읽어도 악녀를 찾을 수가 없다. 어째서 악녀인가? 하는 의문. 오히려 상처받아 사회에서 고립된 사람들의 이야기 아닌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점으로 어울리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 이야기. 


밀려났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제 자리를 찾은 사람 이야기. 이런 사람들을 악녀라고 하면, 우리 모두는 악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악녀들이 악녀라고 불리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일 텐데... 네 편의 소설 주인공은 모두 여자다. 그리고 이들은 남자보다는 여자를 사랑한다. 소위 말하는 동성애자이다. 


이런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지금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는데, 퀴어 축제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시위대들... 차별금지법이 동성애찬성법 또는 동성애권장법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동성혼이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인구총조사에서 동성 배우자를 인정한다는 최근 기사를 봤는데, 우리나라 역시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반면에 대만은 동성혼을 인정한다고 한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 '그는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된 자유중국 타이완에서 첫 번째 동성 혼인신고를 하고 당당하게 함께 살고 있는 1호 부부이기도 하다. 다산 작가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지만 그는 어느 자리에서도 동성애를 권유하거나 예찬하지 않는다. 동성결혼은 자신의 삶이지 타인이 개입하거나 타인에게 권유할 성격의 어떤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존재이자 삶이지 선택 가능한 가치나 이념이 아니다.'(242쪽)고 하고 있다.)


대만 작가인 천쉐가 쓴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러한 동성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터. 이러한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 밀려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찾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겠는지를 이 소설은 짐작하게 해준다.


그럼에도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아 찾기에 성공한다. 그래 그러면 어때? 이게 바로 나야! 하게 되기까지,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당당하게 선언하기까지 겪게 되는 과정. 


굉장히 힘들고 우울한 과정을 거쳤음이 분명한데 소설은 빠르게 전개되는 서술방식으로 인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지는 않는다. 


인물의 마음을 따라가면 그 인물이 겪은 갈등과 고통을 함께할 수 있고, 그러면서 주인공이 자신을 찾고 삶을 긍정하게 되는 ('이상한 집'은 약간 다르지만) 과정에서 읽는 내 마음도 펴지게 된다.


굳이 동성애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사회의 통념과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배제 당하는 사람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도 된다.


다수와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 아니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척당하는 사람들. 그래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 하지만 이들은 그대로 이들일 뿐이다. 이들에게 다른 존재로 살아가라고 강요할 순 없다.


그런 강요를 누구도 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므로, 그 다름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이 소설 속 인물들도 그러한 삶을 살아왔으니... 하여 방황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그래, 이것이 바로 나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내 사랑은 바로 이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 그러한 일들을 보여주는 소설. 


마지막 편인 '고양이가 죽은 뒤'라는 소설은 천쉐의 자전적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물론 내가 천쉐라는 사람을 알지 못하지만 이 책에 실린 '후기-칭에게'를 읽어보면 아, 작가도 이런 과정을 거쳤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천쉐는 소설을 쓰고 이 소설 속 주인공은 그림을 그리지만, 이들은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려 하고 있고, 또한 그러한 예술을 통해서 다시 자신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소설과 작가의 삶을 일대일로 대응시켜서는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소설의 소재를 가져오더라도 소설적 장치를 통해서 인물의 삶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냥 소설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작가의 삶을 참조할 수는 있지만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일은 삼가야 한다. 천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에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일은 어떻게 계속 소설을 써나갈 것인가, 어떻게 자신이 쓰고자 하는 소설을 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흥미를 갖는 제재는 무엇이든 소설의 형식으로 표현해내고 싶었다'(12쪽)


그렇다면 작가의 삶을 몰라도 이 작품을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또한 작가의 삶을 잘 알아도 읽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한 편 한 편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과정, 이 빛이 남에게서 주어진 빛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찾은,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빛임을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악녀서'라고 했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그러면 이런 '악녀'가 더 많이 생겨, '악녀'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악녀'라는 말이 소수자라는 말로 쓰이고, 소수자는 다르기 때문에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 소수든 다수든 다 다른 존재라는 것, 다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그곳에 이르지 않는 사회가 좋은 사회임을, 이 소설집의 복간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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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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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원작에 '여자들과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부제가 달려 있다고 하는데, 번역본에는 그 문장이 나와 있지 않다. 책표지에 있는 클레어 키건에 관한 설명에 나와 있다. 번역본에도 이 부제가 달려 있으면 소설을 좀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는데...


세 편의 소설에 모두 남녀가 등장한다. 두 편은 여자가 서술자로 등장하고, 한 편은 남자가 서술자로 등장한다. 남자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너무 늦은 시간'을 보면 강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는데, 그러한 행동이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불만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또는 장난, 농담이었다는 식으로 행동과 말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상대의 감정을 느껴보려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무 늦은 시간'의 주인공 '카헐'이 바로 그렇다. 여성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생각한다.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면 좋고, 자신을 조금이라도 귀찮게 하면 싫다. 싫은 정도에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것을 비하하는 말로 표현을 한다.


그러한 언어에는 자신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데, 이는 세상은 남자라는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지 여성이 중심이 될 수는 없다는, 여성은 남성의 편리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여전히 불안에 시달리는 존재, 유리 천장에 갇혀 있는 존재는 남성보다는 여성이다. 여성은 그러한 위험을 늘 생각하고 있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카헐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남동생과 함께한 장난, 과연 이것이 장난인지도 의문이지만, 그러한 장난을 웃음으로 넘기는 아버지의 모습. 여기에 여성의 자리는 없다.


자신들을 위해 음식을 차린 엄마가 앉기도 전에 식사를 하는 모습도 그런데, 엄마가 앉으려 하자 의자를 빼서 넘어뜨리다니... 그것을 야단치지 않는 아버지. 아니 그렇게 할 생각을 한 아들 둘. 이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중에 카헐이 그때 아버지가 다르게 했더라면 하지만, 그것은 잠시고, 그는 아버지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이런 그의 모습을 통해서 남자가 무의식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이 여자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그리고 차별의식이 체화되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나는 과연 '카헐'과 얼마나 다른가 하고.


'길고 고통스런 죽음'에는 여성 서술자가 등장한다. 작가다. 우리 말로 하면 작가의 집에 들어가 창작활동을 하려 한다. 그런데 한 남성이 방문한다. 다짜고짜. 그는 마치 권리를 빼앗긴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데... 


아니, 작가가 글만 쓰고 있나? 작가의 방에 들어가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글을 쓰고자 함이 아니던가. 그런 과정에서 무엇을 하던지 그건 남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


방 안에 틀어박혀 글만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남성이 남성 작가에게 그렇게 행동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온갖 꼬투리를 잡으려 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클레어 키건의 작품이 지닌 장점이 나타난다. 복수를 한다. 어떻게 작가답게 작품으로... 그래서 제목이 된 '길고 고통스런 죽음'은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일이 된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영역을 침범하고 함부로 말한 사람을 응징한다.


'남극'은 좀 섬뜩하다고 할 수 있는데, 소통하지 못하는 관계는 얼어붙은 남극과 같을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을 일탈 행위를 하는 여성에게 닥친 비극으로 읽을 수 없는 것이 '친절'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절을 사랑이라고 해도 좋다. 자신은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상대에게는 지옥과도 같을 수 있음을.


친절한 남성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친절이 문제다. 상대를 배려하는 친절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친절이다. 즉 상대를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그 존재를 자신에게 끌어오기 위한 친절일 뿐이다.


이런 친절이 여성에게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지를 소설의 후반부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친절이 아니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는 친절은 친절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렇게 세 편의 소설에는 남녀가 나오지만 이 남녀는 평등하지 않다. '여자들과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소설이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역시 클레어 키건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지만, 전에 읽었던 소설에서는 어떤 밝음, 따스함 등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 소설집에서는 어긋난 관계에 누가 책임이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어긋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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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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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5편의 단편소설들. 커트 보니것이 유명해지기 전에 쓴 소설들. 이미 그가 어떤 소설을 쓰게 되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소설들.


다양한 형식과 내용이 이 작품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보니것 특유의 유머와 풍자가 담겨 있고, 또 평화 사상이 담겨 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기를 다룬 소설 '유인 미사일'을 보면 냉전시기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지 않고 인간으로 대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소련과 미국의 조종사(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충돌해 죽은 다음, 그 아버지들이 편지로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소설. 전쟁광인 군인들이 아니라 냉전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다룸으로써 보니것은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반전-평화를 다루는 소설로는 '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가 있는데, 초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염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다른 존재를 다룰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다른 나라의 무기를 파괴하는 쪽으로 사용할까? 그런데 왜 다른 나라의 무기를 파괴하려 하지? 그것은 다른 나라를 적국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평화를 위협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무기를 파괴하면 그 나라는 가만히 있는가? 그 나라는 침략받았다고 생각해 다른 보복 수단을 강구하지 않겠는가. 이러면 서로가 무기를 증대할 수밖에 없고, 서로서로 적대행위를 멈출 수 없게 된다.


끝없는 적대행위, 무기 개발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냉전시대 핵무기 개발의 역사 아니던가. 평화는 무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힘의 균형이라고 하지만, 그 균형을 이루기 위해 더 많은 무기들을 개발하고, 거기에 많은 희생이 따른다. 보니것은 반하우스라는 초능력(염력)을 지닌 사람을 등장시킴으로써 인간이 전쟁을 위해 일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 보니것 특유의 풍자를 보자. 특출한 능력을 지닌 반하우스 교수는 세계 평화를 위해 무기를 파괴하기로 한다.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모든 나라의 무기를...


'그날 이후, 당연히 반하우스 교수는 전 세계의 무기를 체계적으로 파괴해 오고 있고 급기야 지금은 돌멩이나 뾰족한 막대기 외에는 군대를 무장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그의 활약이 정확히 평화로 귀결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폭로 전쟁'이라 불릴 수 있는 무혈의 재미있는 전쟁을 촉발시켰다. 모든 나라는 적국의 간첩들로 넘쳐 나고 있으며 이 간첩들의 유일한 임무는 군사 장비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 뒤 그 군사 장비를 언론에 보도해 반하우스 교수의 주의를 끌기만 하면 그 군사 장비는 즉각 파괴되었다.'('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 272쪽.)


참 통쾌한 풍자다. '무혈의 재미 있는 전쟁'이라니... '폭로 전쟁'이라니... 마치 "쟤가 그랬어요."라고 일러바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 일반 시민들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않는, 반하우스 교수의 행동.


그럼 세계 권력자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오히려 반하우스 교수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자신들이 무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든 반하우스 교수의 거처를 찾아내 그를 제거하려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보니것은 전쟁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평화를 위한 노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반하우스 교수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반하우스 효과는 아니다'('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 275쪽)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겪은 작가인 보니것. 그는 평화를 염원한다.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 전쟁으로 인해 겪게 되는 어린아이들의 고통을 '난민'이라는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니...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아이들. 자신의 아빠를 찾으려는 모습을 통해서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에는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소설이 몇 편 있다. 미래를 살아갈 세대가 현재에 고통을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짓말'이란 소설을 보면 명문고 입학과 관련된 일들이 나타나는데, 우리나라 역시 '특목고'라고 해서 그러한 일을 겪고 있다. 여기에 소위 명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행태. 하지만 보니것은 명문가 사람들도 염치가 있음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아이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모습과, 어른들의 위선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염치 있는 명문가 사람의 모습인데... 우리는 과연 그런가? 


우리나라에서 잘나간다고 하는 집안 사람들, 과연 염치가 있는가? 그들이 자식들을 위한답시고 한 행태들을 보라. 예의, 염치는 사전에만 존재한다. 적어도 보니것은 명문가라면 그래도 염치는 있어야 한다는 점을 등장인물인 리멘젤 박사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자식의 문제에 이성을 잃고 특별 입학을 부탁하는 그의 모습. 그러나 거절당하고서야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그나마 염치가 있는 명문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그래서 '이제 우린 더 이상 여기에 오지 못할 것 같아요.'('거짓말'. 361쪽)라고 하고 있으니... 우리나라 있는 집안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태도를 기대한다면 무리일까?


또한 아이를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 세상에 문제아는 없다. 문제 어른, 문제 사회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연상시키는, 또 최근에 나온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연상시키는 '아무도 다를 수 없던 아이'라는 소설도 많은 여운을 준다. 그 아이의 마음을 여는 것은 어른과 사회의 몫이라는 것을...


이밖에 다른 소설들도 좋다. 환상적인 내용의 소설도 있고, 일본 소설가인 가카야 미우가 쓴 [70세 사망법안, 가결]이란 소설을 연상시키는, 생명 연장으로 사회가 겪게 되는 모습을 그린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란 소설도 지금 현대 의료과학이 추구하는 현실에 비추어 읽어볼 만하다.


돈만으로 자신의 행복을 사지는 못한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포스터의 포트폴리오'라는 소설도 돈이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다양한 소설들을 통해 다양한 주제들을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으니... 보니것의 초기 단편들이지만 그의 소설 세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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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위픽
정보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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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된 대학교 기숙사를 개조해서 만든 이 기계학습센터는 산골짜기 한가운데 있었다. 냉난방 비용 절감을 위해서인지 창문을 거의 판자로 막아놨지만 에어컨 호스가 연결된 곳만 한 뼘 정도 창문 유리가 노출되어 있었다.'(12쪽)


주인공이 살게 된 곳을 묘사한 부분이다. 돈이 없어서 자신의 두뇌를 업로드 하는 조건으로 입주하게 된 곳. 이곳은 '안에 들어가서 복도와 방 구조를 실제로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교도소였다. 감방에는 창문이라도 있으니까 사실 교도소가 여기보다 나은지도 모른다'(14쪽)는 표현으로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서 들어온 곳이다.


자신의 뇌를 업로드하는 조건으로 주거를 해결하고 돈도 어느 정도 받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결국 자신을 팔아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이 사는 곳은 폐쇄된 곳이다. 스스로 폐쇄했다고 하기보다는 폐쇄된 공간으로 내몰린 사람들.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신영복 선생이 어떤 글에서 한 말처럼 한 여름의 감방 안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약자들에겐 약자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약자가 있다.


강한 자에게는 아무 소리도 못하면서 자기보다 약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는 강하게 구는, 그야말로 강약약강인 존재. 소설에서는 그런 이를 '또라이'라고 하는데, 이런 또라이는 특이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생활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디에나 통계적으로 열 명 중에 한 명 정도는 또라이가 있는 법이고 주변에 아무도 또라이가 없으면 내가 그 또라이라고 하지 않던가'(17쪽)라는 표현으로, 소설은 또라이를 등장시킨다. 어떤 또라이?


바로 자신도 같은 처지이면서 약자를 더 괴롭히는, 약자를 괴롭히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또라이. 915호 사람이다.


그가 괴롭히는 사람은 이주노동자인 요가 강사다. 자신의 나라에서 엔지니어였다는 요가 강사. 하지만 이 나라에 온 그는 여기저기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사람일 뿐이다. 약자들에게도 무시당하는 그런 사람.


여기에 주인공을 또 만만하게 보는 915호. 그에게는 자신의 먹잇감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또라이 짓을 한다. 하지만 약자가 언제까지 약자일 수는 없는 법.


폐쇄된 공간에서 쫓겨난 915호는 이제 그곳에 있는 약자들에게 군림할 수가 없다. 그는 그런 세계에서도 쫓겨난 사람.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강하게 굴려 했을 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응징. 그는 약자로 전락하고 피해자가 된다.


이렇게 소설은 약자들을 보여준다. 이들은 강자에게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않는다가 아니라 못한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 중에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강하게 나간다. 그렇게 그는 가해자가 된다. 하지만 이 가해는 언제까지 지속될 수 없다. 그 역시 약자니까. 가해와 피해가 뒤집히는 것은 순간.


이런 사회의 모습이 바람직할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사회는 '폐교된 대학교'라는 표현처럼 사회의 구실을 못하는 사회일 뿐이다. 그런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창문이 없다. 그 창문은 아주 조그마해서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사회의 모습을 정보라는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다. 폐쇄된 사회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이 아니라 남을 누름으로써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사람이 있음을.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 사회에서 오래 존속하지 못함을. 오히려 서로를 도와주는 관계가 오래 감을.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임을.


비록 가해에 공모하지만 주인공과 요가 강사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자신이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최선을 다해주는 요가 강사와 그런 요가 강사에게 고마워하고 그를 존중하는 주인공. 이런 관계들이 지속되어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데...


그런 관계는 조그만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관계다. 915호같은 사람과의 관계는 판자로 막아놓은 창문이고.


자 우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조그만 창문을 마저 가려야 하는가? 아니면 판자로 막아놓은 창문에서 판자를 떼어내야 하는가? 판자를 떼어내고 더 많은 부분을 봐야 한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지 않는 부분까지 보아야 한다. 그것이 '창문'의 역할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닫힌 세계를 열린 세계로 여는 것은 결국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915호 같이 더 닫는 그런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소설. 짧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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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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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들 모음집이다. 역시 보니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반전이 일어나는 작품. 그 특유의 유머와 풍자가 들어있는 소설들.


소설집에 실린 소설 중에 돈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설이 있는데, 그렇다. 우리는 자본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성장, 성장하는 것은 바로 이윤을 남기는 일이고, 이윤은 곧 자본이 추구하는 기본 목표이니, 이러한 자본에 잠식당한 삶은 다른 것을 볼 수 없게 한다.


하지만 다른 것을 보아야 한다. 소설 '탱고'에서처럼 자본에 둘러싸인 삶들 속에서도 자본이 아닌 즐거움을 추구하는 모습, 그러한 모습이 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점을 보여주는 소설도 있는데...


다른 소설들보다 마지막에 실린 '사기꾼들'이라는 소설이 마음에 남는다. 사기꾼들. 우리가 생각하는 남을 등쳐먹는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다. 두 화가가 등장한다. 한 화가는 보통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 또 다른 화가는 평론가들에게 인정받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


쉽게 이야기하면 달력에 들어가는 듯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무엇인지 모를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두 화가는 자신에게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좋은 그림이라고 해도, 비평가들이 훌륭한 그림이라고 해도 그들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 점을 감춘 것이 바로 사기꾼과 같다고 여기고.


그렇지만 예술이 그러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예술 아닌가. 당신은 왜 저 사람처럼 그리지 않느냐고 하는 말이 통용될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예술가의 세계 아닌가.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지금도 세계에서 뛰어난 화가로 일컬어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보라.


둘의 사이가 좋았던가. 둘이 서로의 그림을 그렇게 훌륭하다고 인정했던가. 속으로는 인정했을지 모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그다지 좋은 평을 하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으니...


예술은 그러한 것이다. 자기만의 것. 자기만의 표현이 있고, 자기만의 관점과 기법이 있다. 그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그것이 사기일 것이다.


표절이 가장 엄격하게 금지되고 처벌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따라서 예술은 다른 사람을 따라해서는 안 된다. 자신만의 길, 그 길을 가는 것.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를 비교한다. 누가 더 좋은가? 누가 더 잘 그리는가? 문학으로 치면 누가 더 잘 쓰는가?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오히려 이러한 비교가 예술가들을 나락으로 몰지 않는가.


예술가는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혼신의 힘을 다해 했을 때 작품은 그것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작품을 사기라고 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활동을 한 것이기에.


그 점을 이 소설의 뒷부분에서 잘 보여준다. 다른 사람의 평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자신들은 안다. 자신의 작품이 지닌 의미를, 훌륭함을. 


이를 거꾸로 생각하면 자신들의 작품이 지닌 한계를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한계를 알고 있음에도 굳이 언급하지 않으면 그것을 사기라고 할까? 아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예술가가 제 작품은 이 점이 부족해요 하면 겸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다른 의미를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러니 굳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지닌 한계, 부족한 점, 자신이 무엇을 못하는지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면 되고, 다른 예술가들이 잘하는 것을 인정하면 되는 것 아닌가.


비교가 불필요한 곳. 오히려 비교가 작품이나 작가를 망치는 곳, 그곳이 바로 예술이라는 장 아니겠는가. 


이 '사기꾼들'이라는 짧은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보니것 역시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고.


이런 예술의 장이니 '표절'이 범죄 취급받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이윤을 위해 남을 따라하고, 그것을 감춘 것이니. 자신의 한계를 말하지 않은 것과는 다른 차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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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0-1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트 보니것, 에세이를 재밌게 쓰던데 소설은 어떨지 궁금하군요.

kinye91 2025-10-17 17:51   좋아요 1 | URL
소설도 에세이만큼이나 위트와 풍자가 넘쳐난다고 생각해요. 저는 커트 보니것의 에세이와 소설 둘 다 좋더라고요.

yamoo 2025-10-18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니것 소설 10권 있는데 아직 3권밖에 안 읽었어요! 세상이 잠든 동안...이거 저도 읽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생각이 안나네요..ㅜㅜ 보니것의 대표작 <제5도살장>을 읽어야 하는데...아직까지 못 읽고 있네요..하~

kinye91 2025-10-18 11:56   좋아요 1 | URL
저는 요즘 보니것 소설을 찾아 읽고 있는데 제5도살장 좋았어요.

페크pek0501 2025-10-19 17:01   좋아요 1 | URL
제5도살장, 저 읽었어요. 완독했죠. 그러니까 보니것의 소설을 제가 읽은 거네요.
와!.. 이젠 저자와 책 제목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지점에 제가 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 기억력이 엉망인 것은 너무 책을 많이 알고 있어서라고 애써 합리화, 해 봅니다. 합리화하지 않으면 제가 너무 바보 같아서...ㅋ

kinye91 2025-10-20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책을 너무 많이 읽으신 것 같아요. 그러다가 가끔 읽은 책 또 읽는 것은 아닌지... 저는 그런 의심이 들 때도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