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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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부분부터 뭐야?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번역으로 읽어서 원문의 문체를 모르겠지만, 적어도 번역문에서 독특한 문체를 느낄 수 있다.


소설인데, 탁-탁-탁 하는 리듬을 느낄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짧은 문장들이 계속 나온다. 이토록 간결한 문장들이 연속될 수 있나 싶을 정도다. 게다가 같은 단어들, 같은 문장들이 반복된다. 상황도 반복되고. 


음악에서 도돌이표가 있는 듯이 소설은 계속 나아가다 돌아가고 또 나아가다 돌아가고, 반복, 반복의 연속이다. 이런 문장들 속에서 리듬을 느낄 수 있다.


첫부분을 보자. 짧은 문장. 반복되는 문장을 만나게 된다. 이런 부분이 또 계속해서 나온다. 자꾸 앞으로 돌아가, 돌아가 하는 듯이. 도돌이표. 불안에 싸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런 도돌이표와 같지 않을까, 그런 점을 표현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하는 문장들의 반복이다.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불안감이 엄습하여 나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바로 지난 여름이었다. 나는 적어도 10년은 보지 못했던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크누텐과 나, 우리는 늘 함께였다. 내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불안 증세로 내 왼팔, 내 손가락이 쑤신다. 난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8쪽)


인물이라고 해봐야 겨우 셋인데, 아니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둘인데, 이름이 나오지 않는 '나'와 '크누텐'


'나'는 시작부터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그런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서 글을 쓴다. 글쓰기가 치유의 한 방식이지만, 여기서 글쓰기는 치유가 되지 않고, 그의 불안감을 계속 심화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불안감을 계속 떠올린다. 왜 불안한가? 별것도 아니다. 그 별것 아닌 것이 별것이 되는 것. 이 소설이 지닌 장점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다치는데, 뒤로 가면 '크누텐'이 서술자가 되는 부분들이 있다. 이상하게 다른 인물인데도 이들의 서술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비슷하다. 둘다 무언가 모를 불안에 차 있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냥 감정을 안으로 안으로 들여 자신의 행동을 제약한다. '나'도 그렇고 '크누텐'도 그렇다.


이러니 이들은 어릴 적 친구라고 해도 계속 어긋날 수밖에 없다. 나와 크누텐의 관계만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도 잘 관계 맺지 못한다. 무언가 계속 어긋난다. 크누텐의 아내와 만나는 장면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런 만남을 크누텐에게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은 크누텐도 마찬가지다. 무언가가 관계를 맺는데 실패하게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안으로만 들어가는 태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트하우스라는 낡은 곳, 아무도 찾지 않는 곳. 그래서 어린 시절 그들의 피난처이자 놀이터이기도 했던 그곳이 나오지만, 그 보트하우스처럼 '나'도 '크누텐'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쇠락해갈 뿐이다.


보트하우스는 그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장소가 되는데, 그들에게 의미가 있던 그 장소가 이제는 그냥 쇠락한 공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만큼 자신들을 옥죄고 있는 불안들도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마음 졸이고, 불안에 떨던 많은 상념들이 삶에는 별다른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관계는 파탄날 뿐이다. 크누텐이 아내와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어린 시절의 어떤 경험때문이라면, 그런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보트하우스처럼 그 자리에서 그냥 낡아갈 뿐이라는 것, 자신의 삶을 갉아먹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 점은 '나'도 마찬가지다. '나'가 변변한 일자리도 갖지 않고, 그나마 어린 시절부터 해오던 연주일을 하던 것에서 이제는 집 안에만 처박혀 글만 쓰는 일은 관계의 파탄이다. 외부와 연결돼 있던 끈을 놓아버리고 만 것.


하여 인물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데, 그런 짜증을 작가는 짧은 문장들을 경쾌하게 배치함으로써 누그러뜨리고 있다.


이들의 우유부단함, 관계맺기의 실패 등이 경쾌한 문장으로 소설을 끝까지 읽어가게 만들고 있다. 아마도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문장이 짧고 경쾌했다는 사실은 남을 것 같다. 


자신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생각들의 늪을 작가의 문장처럼 날렵하고 경쾌하게 벗어던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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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수학특성화중학교 시즌 2. 1~3 세트 - 전3권 수학특성화중학교
김주희.이윤원 지음, 녹시 그림 / 뜨인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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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1에 이어 시즌2다. 역시 세 권으로 이루어졌다. 시즌1에 나오는 인물들에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고,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달라진다. 그리고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사실 중학생이 개입되기에는 너무도 큰 사건이다. 그렇지만 중학교 때 이런 사건을 해결한다는 환상을 품은 학생도 적지 않으니, 중학생들의 환상을 채우는 데는 이만한 이야기도 없겠단 생각도 든다.


시즌1에 나오는 악당이 제로다. 왜 이들이 악당이 되었는지 전 편에서는 알 수가 없었는데, 2에서는 피타고라스와 연결지어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질서, 인간 지식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 이것을 벗어난 것에 대한 증오. 그래서 무리수를 발견하고 주장한 피타고라스의 제자인 히파수스가 죽임을 당한다는 얘기가 시즌2에 등장한다. 그의 죽음이 바로 테러와 연결이 되고, 이것이 제로와 연결이 되게 만든 것.


소설이 어느 정도 개연성을 지녀야 한다면 왜 그런 사건을 일으키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피타고라스와 히파수스를 등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중학생들이 겪을만한 모험을 가미해서 사건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즉 어른들 세계에 제로가 있다면, 아이들 세계에는 성찬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노을, 란희, 파랑, 아름이 있고. 여기에 성찬이 사건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무리수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이 소설을 요약하면 썸, 아이돌, 성적,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 생활을 해야 하니 당연히 성적이 들어가고, 수학특성화중학교라고 하니, 수학에 관한 내용이 간간이 나와 사건을 해결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문을 연다든지, 온수를 튼다든지, 식사를 할 때 간식을 더 받는다든지 할 때마다 수학과 관련된 문제가 나오고, 그를 풀어야지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한 전개다.


그렇다고 이렇게 수학 문제만 나오면 대부분은 흥미를 잃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겪는 소위 말하는 '썸'탄다는 말에 해당하는 연애 비슷한 감정들과 관계들이 나온다. 이것이 풋풋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제로라는 악당을 통해서 모험을 겪게 되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게 한다. 책을 통해서 하는 간접 경험. 이것 역시 괜찮은 방법이다.


다만, 현실에서 겪을 수 있는 고민들은 이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내용으로 전개되다 보니, 등장인물들이 모두 대단한 능력자들이다. 그리고 문제가 커다란 위기 없이 해결이 된다.


이것이 이 소설을 편하게 읽을 수 있게도 한다. 어차피 문제는 해결될 것이고, 그 과정을 따라가면 되니까. 


소설을 통해서 현실을 반추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기보다는 경쾌하고 발랄하게 사건을 진행함으로써 현실을 잊고 다른 사람의 세계에 몰입하게 하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마다 등장하는 수학에 관한 문제들이 수학이 실제 생활과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서 비록 조금일지라도 수학은 우리 생활과 별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없애는데 도움을 준다.


빠르게,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보면서도 마음 졸이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그러면서 수학 문제도 한번 등장인물들과 함께 풀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소설이다.


청소년들이 읽으면서 수학이 이렇게 쓰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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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수학특성화중학교 시즌 1. 1~3 세트 - 전3권 수학특성화중학교
이윤원.김주희 지음, 녹시 그림 / 뜨인돌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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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특성화중학교'


수학 영재를 키운다고 세울 수 있는 학교다. 과학고가 있으니 수학고가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수학고는 없다. 과학고에 수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재고가 있는데, 이 영재고가 바로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학생들이 있는 학교 아니던가.


고등학교도 그런데 수학특성화중학교라고 하면 특목고가 아니라 특목중이다. 이런 학교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글쎄?


제목은 이렇지만 수학특성화중학교답게 수학 문제를 푸는 일이 많은 학교로 설정이 되어 있지만, 소설은 중학생들을 중심으로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진노을, 허란희, 임파랑, 박태수, 한아름이라는 중학생 다섯이서 겪는 갈등과 호감이 한 축을 이루고, 여기에 교사로 나오는 정태팔, 김연주, 류건과 관련된 사건이 또 한 축을 이룬다.


그리고 이 두 축이 맞물려 사건이 전개된다. 1권은 비교적 가볍게. 요즘 인공지능이라고 할 수 있는, 거의 알파고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서는 '피피'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노을에게 발견되는 과정이, 2권에서는 류건과 관련된 제로라는 단체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3권에서는 그러한 갈등이 해결이 된다.


이런 서술 과정에서 수학 문제가 간간이 나오는데... 물론 중학교 수준의 문제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함께 문제를 풀어볼 수 있다.


즉, 수학을 어렵게만 여기던 학생들에게 수학에 대한 흥미를 불어넣어 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수학 문제가 많이 나오면 아마도 중학생들은 책을 덮고 말 것이다. 그래서 적당하게 문제를 배분하고 있다. 많이가 아니라 적게, 필요할 때, 즉 모험을 할 때 힌트를 주는 식으로, 그 힌트가 바로 수학과 관련이 있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학생들 사이에 벌어지는 호감과 갈등이 중학생들의 흥미를 이끌어내고 있으며, 여기에 컴퓨터와 관련된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져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수학특성화중학교라는 제목에 수학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을 거라고 하지만, 학생이 수학 천재이고, 그런 학생들에게 수학과 관련된 행사를 많이 한다는 설정으로, 수학이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보면 된다.


보통 학생들보다 배경이 좋은 인물들이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아마도 학생들이 감정이입을 하기보다는 자신과는 다른 멋진 학생들의 이야기를 본다는 관점에서 읽을 가능성도 많지만, 오히려 그것이 수학과 거리를 두어서 좀더 객관적으로 수학을 볼 수 있게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중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청소년들의 모험과 성장소설이라고 해야할까, 여기에 수학이 양념처럼 가미되어 있는 소설이다. 중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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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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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디스토피아다. 지구의 지상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 인간. 외계에서 온 범람체들에 의해 지상을 빼앗기고 지하로 스며들어 살아가는 인간 세계가 나온다. 범람체들은 거의 무한증식이다. 자신들과 접촉한 대상에 들어가 그 대상을 지배한다.


그렇게 여겨지는 범람체들과 공생할 수 없는 인간들은 그들을 피해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 지상을 찾기 위해서 지상을 탐색할 파견자들을 내보낸다. 파견자들은 지상을 탐색하고 범람체들을 없애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지하에서도 계속해서 범람체들에 의해 감염되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들은 인간들과 함께 살 수 없다. 광증이라고 표현한다. 미친 사람. 그런 사람은 격리되어야 한다. 그들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격리시설로 옮겨진다. 그 격리시설을 가족들조차도 방문하지 못하지만.


지상은 범람체들에 의해 잠식당했고, 지하에서도 범람체들에 감염되는 사람이 속속 나오는 상황에서 인간들은 범람체를 없앨 연구를 한다. 지상을 되찾으려 한다.


파견자들은 그러한 막중한 임무를 띤 사람들이다. 그런 파견자가 되고 싶은 태린이 있다. 이제프를 사랑하는, 그래서 이제프와 함께 지상을 거닐고 싶은.


파견자 시험을 보는 와중에 태린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다른 존재를 감지하게 된다. 그 존재와 대화를 하게 되기도 한다. 의존하기도 하지만 시험 마지막에 자신이 이름 붙인 '쏠'이라는 존재에 휘둘려 폭주하고 만다.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태린에 대한 징계는 이제프의 도움으로 추방이 아니라 파견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주 위험한 임무를 띠고 두 명의 파견자들과 함께 파견되는 태린. 여기서 태린은 다른 세계를 인식한다.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존재의 정체도 깨닫게 된다.


지상과 지하, 범람체들과 인간, 그 사이에 있는 범람화된 인간들. 그렇다. 이제 지구에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 이는 공생이냐 파괴냐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공생의 조건.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지키면서 자신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즉 범람체들도 인간을 완전히 잠식해서는 안 되고, 인간 역시 범람체들을 인정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지구에서 영원히 몰아내려 해서도 안 된다.


이 사이에 범람화된 인간이 있다. 범람화된 인간 중에서도 태린과 같이 범람체와 공생하는, 두 자아가 동시에 한 몸에 존재하는 존재들도 있다. 바로 태린과 선오가 그런 인물들이다.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소설은 범람체로 인해 지하로 쫓겨난 인간들의 세계인 디스토피아에서 시작한다. 그렇다. 인간은 자신들이 살던 터전에서 쫓겨났다고 여긴다. 그들은 지상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고 한다.


그 과정은 범람체와 인간의 전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전쟁을 막으려는 존재들이 나온다. 변화를 인정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가자고 하는 존재들. 범람체들 역시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고, 인간들 역시 범람체들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접촉이 있어야 한다. 접촉 없는 이해는 없다. 이런 접촉을 이끄는 존재가 바로 태인이다. 선호다. 이들은 지상에서 오는 신호를 감지하고 이를 이해하려 한다. 그런 과정에서 범람체들과 또 범람화된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만남에서 오는 이해, 특히 쏠과 공생하면서 다른 존재를 받아들인 태린. 이들은 전쟁이 아닌 공생을 택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제프를 희생시키면서도...


집단과 개인의 공생. 집단 속에 개인이 완전히 녹아들지도 않고 또 개인을 위해 집단을 없애지도 않은 함께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 소설에서 펼쳐진다.


범람회된 인간들은 인간이 아닌 것이 아니라 변한 인간, 즉 다른 형태의 인간일 뿐이라는 인식으로 가는 지난한 과정. 세 존재들이 경계를 정하고, 또 서로 경계를 허물면서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단일성에서 오지 않음을, 유토피아는 다양함에서, 다양함을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짐을 생각하게 한다.


중간지대의 확장이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태린이 경계지역에서 범람체들과 인간들을 연결짓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인간들의 인식이 범람화된 인간들도 인간이라고 바뀌어 간다. 


'그들은 우리를 움직이는 징그러운 시체라고 생각해. 그래서 그냥 땅속에 파묻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왕 파묻을 거면 무기로 써먹고 묻겠다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죽은 게 아니야.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됐다. 그걸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363쪽)


범람회된 인간, 즉 전이자들은 이런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경계지역이 생기고 점차 서로 접촉하면서 사람들의 생각은 변한다. 바로 이렇게.


'경계 지역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전이자들의 삶을 목격하자, 도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그것도 삶이라는 것.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일 뿐이라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까.' (418쪽)

 

그렇다고 한번에 확 변하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결과가 아니다. 과정이다. 디스토피아가 결과라면 변해가는 과정,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 바로 유토피아다. 


'앞으로도 그 균형이 지금처럼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 태린은 경계 지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답을 찾아내주기를 바랐지만, 어쩌면 아이들도 명확한 답에는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단지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419쪽)


이렇게 소설은 태린이 점차 각성해가면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는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어쩌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나아가야 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렇게 김초엽은 다른 생명체에 잠식당하는 지구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것이 정복이 아니라 공생으로 갈 수 있음을,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이를 현실에 반영하면 사람들의 이주를 생각하면 된다. 이주민들을 자신들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야 함을. 그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함을. 이주민이 우리 사회에 많이 유입되고 있는 이때, 그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범람체, 인간, 그리고 전이자들의 관계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결코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현실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는 생각이 든다. SF소설은 공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현실을 반영하는, 우리에게 이 현실에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SF소설은 공상이 아니라 상상임을, 이렇게 다른 관계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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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끝 그리폰 북스 18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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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소설인데 제목이 '유년기의 끝'이다. 유년기라고 하면 어린 시절 아닌가. 그런 유년기의 끝이라면 성장이 되는 시기인 청소년기를 말해야 하는데, 청소년기는 어른에게서 독립해서 나아가려는 시기로 정의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유년기란 무엇인가? 행복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행복으로 충만한 시기. 인류의 역사로 따지면 황금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유년기의 끝은 인류에게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때가 왔다는 말인데...


그런 시기에 닥친 인류는 행복할까? 유년기를 벗어나 청소년기, 중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는 동안에 사람은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그런 시기를 거치는 인간은 개인이다. 다들 이런 시기를 보편적으로 거치지만 경험은 개인적으로 하게 된다.


즉 잘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기를 제외하면 청소년기부터는 자아라는 개인의 경험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니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즉 유년기의 끝은 보편성에서 개별성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이 소설은 반대다. 개별적인 인간들이 보편적인 인간처럼 개성을 잃어가면서 행복하게 살던 시대가 중간에 나온다.1부가 '지구와 오버로드'이고 2부가 '황금시대', 3부가 '최후의 세대'다.


지구에 외계인이 나타난다.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전을 앞세워 그들은 인류에 개입한다. 즉 전쟁을 없애고, 지구연합을 결성하게 한다. 선의를 지닌 독재자가 된다. 그들을 인류는 오버로드라고 부른다.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구연합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도 좋겠지만, 개별성을 잃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즉 인간의 자율성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굶주림으로 죽어간 사람들은. 국경으로 인해 나타난 여러 폐해들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버로드의 뜻대로 지구연합을 결성한다.


그것이 1부다. 지구엔 이제 전쟁은 없다. 살육도 없다. 굶주림도 없다. 그야말로 황금시대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일하고 쉬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시대. 그럼에도 이런 황금시대에도 그런 행복이 외부로부터 왔다는 사실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 스스로 찾아낸 행복이 아니다. 오버로드들에 의해 주어진 행복이다. 이런 결과에 완전히 거스르지는 않지만 자신들만의 자율 공동체를 결성해 살려는 사람들이 나온다. 2부에 그런 내용이 펼쳐진다.


여기에 오버로드들과 교류하는 인간도 나오고, 도대체 오버로드들이 왜 지구에 왔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몰래 오버로드의 별로 가는 사람도 나온다. 그리고 지구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3부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중심으로. 어린아이들은 기존 어른들과 다르게 성장한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변해간다. 즉 의식의 공유라고 해야 하나. 개별적인 몸이 그들에게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가족이란 개념도 이제는 사라져야 할 시기다. 유년기의 끝이다. 우리 인간이 성장하는 모습과 반대 방향으로.


우리에게는 유년기의 끝은 보편성에서 개별성으로 나아가는 시기라면, 이 소설에서 유년기의 끝은 개별자로 존재했던 인류가 보편적 인간이 되는 시기를 의미한다.


이제 개인 인간은 없다. 의식을 공유하는 보편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구에 있을 필요가 없다. 지구는 그들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니까. 지구는 사라진다. 그 사라짐을 2부에서 오버로드들의 우주선을 타고 그들의 행성까지 갔다 온 잰이라는 사람의 눈을 통해 서술한다.


이렇게 소설은 오버로드라고 불리는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난 순간부터 지구가 사라지는 순간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지구의 시간으로 하면 100년이 넘는 시간. 그 과정에서 인류가 살았던 지구는 사라진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인류는 우주에서 계속 살아간다. 오버로드를 통제하고 있는 존재를 오버마인드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나가 된 정신을 다른 우주로부터도 계속 충원하고 있는 존재를 부르는 말이다.


1950년대에 발표된 소설인데, 이것을 디스토피아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외계인에 의해 잠시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지만 지구가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행복은 외부에서 올 수가 없겠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신이 추구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다면, 또는 생각을 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자신들의 운명에 개입하지도 못하고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을 때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삶일까?


인류보다 고도로 발전한 지성체인 오버로드들도 오버마인드를 알지 못한다. 그들 역시 오버마인드가 왜 인류를 새롭게 개조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불확실만이 현실인 세상이다. 


아마도 1950년대 역사적 불확실성 속에서 작가는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여기서 길을 잃으면 인류의 종말로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표현하고 있단 생각이 들지만...


지금 우리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 소설에서처럼 우주 개발을 오버로드들에 의해 하지 못하게 되었던 인류가 아니라 다시 달을 기지로 활용하고자 달에 가려고 하고 있으며, 그런 달을 기반으로 삼아 화성에 인류를 보내겠다고 하고 있으니.


우주에 우리가 모르는 생명체가 있을 수 있고, 다른 문명이 있을 수 있지만, 발전된 문명에 의해서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비록 느릴지라도 서서히 탐구해나가는 것이 인류의 본 모습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에서처럼 외계 생명체에 의한 행복이 과연 황금시대라 될 수 있을지 그런 오버로드들을 다른 대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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