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 버틀러의 말 - 희망으로 연결된 SF 세계, 우리의 공존에 대하여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콘수엘라 프랜시스 엮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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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소설을 써왔다는 버틀러. [킨]이란 소설로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나는 버틀러의 소설을 세 권 읽었는데, 그의 상상력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버틀러는 세 종류의 독자가 있다고 한다. 페미니스트, SF팬. 흑인. 모두 주류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세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는 버틀러의 삶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단 3년밖에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버틀러. 지나치게 큰 키로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는 버틀러.


그래서 어려서부터 소설을 썼다는 버틀러다. 그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소설이 주로 SF작품이었다고 하고, 그도 그런 소설을 썼다고 한다.


물론 많은 작품들이 거절을 당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를 계속 해왔다는 사실. 다른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글이 지닌 문제점을 파악하고, 계속 쓴 결과 지금처럼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는 버틀러.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하나로 규정짓기를 거부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킨]을 SF작품으로 보는데, 버틀러는 이 작품에서는 과학에 관한 표현이 거의 없기 때문에 판타지 소설로 봐야 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노예제 사회의 실상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소설을 쓴 것. 


이렇게 버틀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고 하고, 그런 결과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소설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의 작품 세계를 알 수 있는 인터뷰집이다.


더 많은 말이 필요없다.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읽어보면 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실린 시는 지금 우리에게도 유용하다. 그가 안타까워했던 미국의 현실이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고 있는 이런 현실. 답답하다.

작가에게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작가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뭐든 타자기의 먹이로 쓸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끔찍한 일이었다 해도 나중에 써먹을 수가 있죠. - P41

어떤 종류든 중요한 변화야말로 SF의 핵심이에요. - P59

저는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두 가지가 필요해요. 제목과 결말이요. 그 두 가지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냥 아직 시작할 때가 아닌 거예요. - P67

...소설을 읽고 싶어 한다면, 그 소설은 꽤 좋은 이야기, 이야기로서 독자들의 관심을 붙들 이야기인 쪽이 좋아요. 다른 수많은 소설은 물론이고 텔레비전, 영화, 스포츠, 그 밖의 다른 오락물들과 경쟁해야 하죠. - P70

SF의 멋진 점 하나는 제가 파고들고 싶은 것은 뭐든 자유롭게 파고들 수 있다는 점이에요. - P121

작가로서 제가 하는 일은 제 인생을 캐내고, 역사를 캐내고, 뉴스를 캐내고, 뭐든 거기 있는 걸 캐내는 거예요. 마치 온 우주가 광물이고 저는 그 안에서 금을 캐내야 하는 것 같죠. 그리고 물론 저는 제 글에서 제 인생의 조각들을 볼 수 있어요. 아까 이야기한 특성들로 말하자면, 당연히 저를 방해하기도 하고 저를 밀어주기도 하고 다른 일들도 해요. - P126

우리 모두가 훨씬 열악한 삶을 받아들인다면 훨씬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겁을 먹는단 말이에요. ... 문제가 실제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믿질 않아요. - P137

사람들은 정말로 하던 대로 하는 걸 훨씬 편안해하거든요. 그 하던 대로 하던 일들이 불가능해지기 전까지는요. - P139

많은 사람이 그저 우월감을 느낄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 자기 이익에 맞지 않는 투표를 하면서요. 딱 우리를 파멸시킬 근시안적인 행동이에요. - P157

작가의 글은 작가 내면의 감정과 생각과 믿음과 자아의 표현이죠. 직업 작가로서 글을 쓰는 방법을 익히기가 어려운 건 그게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기도 해요. 거절은 정말 고통스러워요. - P168

독서는 그런 식으로 우물을 채워요. 상상력의 우물을 채워주죠. 그러면 그 우물로 돌아가서 채워둔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거예요. - P195

하지만 위험한 건 우리가 더 위계적일수록 우리나 다른 사람의 지성에 귀 기울일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거예요. - P234

글쓰기의 멋진 점은 세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계속 새로운 발견을 한다는 거예요. - P243

저는 책을 한 권 살 때, 이 책에서 아이디어 하나만 얻어도 제값을 하는 거라고 말해요. 책을 한 권 쓸 때는, 제가 단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가치 있는 일을 한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영향이 좋은 것이라면요. - P254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를 때 마구잡이로 희생양을 찾는 경향이 있어요. - P288

(딜레이니의 말) 텍스트는 원래 선형적이지 않아요. 텍스트는 다중적이고, 정말로 읽는 사람,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쌍방향의 과정이죠. - P323

지혜와 선견지명을 기준으로 지도자를 선택하라. 겁쟁이를 지도자로 고르면, 그 겁쟁이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에 좌우될 것이다. 바보를 지도자로 고르면, 그 바보를 조종하는 기회주의자들에게 끌려다닐 것이다. 도둑을 지도자로 고르면, 그대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훔쳐 가달라고 내미는 꼴이다. 거짓말쟁이를 지도자로 고르면, 거짓말을 해달라고 청하는 꼴이다. 독재자를 지도자로 고르면, 그대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노예로 넘기는 셈이다. (443쪽. 은총을 받은 사람의 우화에 나온다는 시) - P443

조심하라. 우리는 너무 자주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을 내 말처럼 한다. 우리는 남에게 들은 말을 우리의 생각인 양 여긴다. 우리는 봐도 좋다고 허락받은 대로 본다. 더 나쁠 때는, 보라고 지시받은 대로 본다. 반복과 자만으로 인해 그렇게 된다. 뻔한 거짓말이라도 반복, 반복, 또 반복해서 보고 들으면, 거의 반사적으로 그 말을 내뱉게 되고, 그다음에는 우리가 그 말을 했다는 이유로 옹호하게 되고, 마침내는 우리가 그 말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이게 된다. - 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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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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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믿음이 가는 작가. 그냥 존 버거의 책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키는 작가다. 내겐 그런 작가들이 몇 있는데, 외국 작가로는 존 버거, 리베카 솔닛, 어슐러 K. 르 귄, 마거릿 애트우드 등이다. 물론 다른 작가들도 있지만.


이번에 읽은 존 버거의 책은 짧은 글들로 이루어졌다. 1부는 시간이고 2부는 공간에 대한 글들이라고 하는데, 시간과 공간은 우리들 삶을 이루고 있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으니, 시,공간에 대해 느끼는 마음들을 풀어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다른 많은 글들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 책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글은 집과 시에 대한 글들이다.


'원래 집이란 말은 세상의 중심을 의미했다. 지리적인 아닌 존재론적 의미에서 그랬다. ... 전통 사회에서는 세상의 의미있는 모든 것들은 다 실재였고, 그 세상의 밖에는 위협적인 혼돈이 존재했다. ... 집이 없으면 모든 것은 파편일 뿐이었다.

  집이 세상의 중심인 까닭은 그곳에서 수직과 수평의 선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수직선은 위로는 하늘로 아래로는 땅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다. 수평선은 다른 곳을 향해 가로질러 가는 땅 위의 모든 길을 달린다. 따라서 집은 하늘의 신과 또 땅 속의 죽은 이들과 가장 가까운 장소이다. 이런 가까움에 의해 신에의 접근과 앞서 죽어 간 이들에의 접근을 약속받는다. 또한 집은 지상에서의 모든 여행이 시작되는 곳임과 동시에 희망을 가지고 되돌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72-73쪽)


그렇다면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떨까? 버거의 말에 동의한다면 집이 없다는 것은 하늘과 땅으로 향하는 길을 잃은 것이며,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 장소를 잃은 것을 뜻한다.


집을 잃은 사람들의 상실. 그것은 단지 집이라는 물질을 잃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삶을 잃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집은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이는 시간과도 연결이 된다. 하늘과 땅에 연결이 되는 수직선은 시간과도 관련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늘을 보며 살던 인간이 땅으로 돌아가게 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순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말과 집이 잃었다는 말이 비슷해지니, 집은 무엇보다도 인간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서로 떨어짐이다. 사람과 미움은 그 열정이 서로 함께 한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은 또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과, 그런 열정들은 떨어짐 혹은 분리에 의해 시험받는다. 공간이 벌어지고 분리가 존재의 조건이 되자마자 사랑은 이 분리를 시험한다. 사랑은 모든 종류의 거리를 없애는 것을 목적한다.' (112쪽)


이 말을 집에 적용하면, 집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은 사랑과 미움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끔 자신이 미워질 때도 있는데, 자신과 다른 사람임에랴. 하지만 사랑과 미움은 한 집이라는 같은 장소에 있을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언제나 해결될 수 있다. 미움 역시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버거는 '사랑은 모든 거리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한다'(113쪽) 한다. 그렇다. 사랑은 나와 남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는, 어쩌면 그 거리를 아예 없애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이 거리 없음이 바로 '시'다. 


'언어야말로 잠재적으로 인간의 유일한 집인 동시에 인간에게 적대적일 수 없는 유일한 주거지이다. 산문의 경우, 이 집은 광대한 영토, 철도와 도로, 고속도로 등을 통해 가로지르는 하나의 커다란 나라이다. 그러나 시의 경우 이 집은 하나의 단일한 중심, 단일한 목소리로 집중된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집에 대한 선언이고 동시에 집에 대한 반응이다.' (120쪽)


마치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자, 집이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물질적 요소라면 언어는 또다른 면에서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다. 언어가 집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산문보다는 시가 더 집과 가깝다고 한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광대한 영토를 산문에 비유한다면, 이는 산문은 집을 떠나서 다시 집까지 돌아오는 과정에 겪는 일들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시는 바로 내가 있는 집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집 밖의 존재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라고 할 수 있다. 집 밖에 있는 수많은 거리를 집 안으로 들여 없애는 것. 그러니 시는 곧 집이다.


그래서 버거는 '시가 때때로 주장하는 자신의 불멸성은 ...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경험을 언어가 껴안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언어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기 때문이다. ...시는 정확히 미래와 현재 그리고 과거의 공존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약속이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나 과거에도 적용된다면, 그 약속은 오히려 확신이라 불러야 하리라.' (30쪽)고 한다.


이렇게 시 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없어진다. 시는 그래서 앞에서 버거가 말한 집과 같아진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자기만의 집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집이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적어도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집은 마련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하지 않을까? 주택정책이 여기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무를 등한시한 국가(구체적으로는 국가의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정부)는 국민을 위한다는 국가가 될 수 없으니...


이렇게 존 버거의 짧은 글들을 모아 놓은 이 책을 통해서 다시금 집의 중요성, 주택정책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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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나선 -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를 발견한 이야기 궁리하는 과학 1
제임스 D.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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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용어 'DNA'. 그것의 구조를 밝혀낸 사람,, 제임스 왓슨과 프란스시 크릭.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다. 물론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이고 그것들이 네 개로 이루어져 있다는 글을 보기도 했지만 (아데닌-티민, 구아닌-시토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별로 관심 있는 분야도 아니었고, 또 지금은 이를 기초로 더 많은 유전학이 발달해 있으니...


하지만 늘 처음이 어렵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처음이 어렵지 시작이 되면 그것을 발판으로 더 많은 연구들, 발전들이 이루어진다.


DNA구조가 밝혀지기 전까지 많은 과학자들이 그에 매달렸고, 많은 실패들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과학자들끼리의 경쟁도 있었고.


과학계가 서로 협동하는 경우도 많지만 치열하게 경쟁하는 경우도 많다. 과학 분야에서라면 누구에게라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과학자 집단 아니던가. 그러니 그들은 협력을 할 때는 하더라도 철저하게 자신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다.


논문에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또한 자기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위대한 과학적 성과를 낼 수 없지만, 집단의 능력과 노력에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 더해져야만 과학적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 책은 그 점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물론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사람 중의 하나인 왓슨이 쓴 책이라, 자신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경우가 많겠지만, 그럼에도 DNA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지기까지의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서술되어 있다.


왓슨도 자신이 쓴 글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당연하다. 자신의 관점에서 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기 위한 과학자들의 경쟁과 협력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누구보다도 먼저 DNA의 비밀을 밝혀내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이 아주 긴박하게 잘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과학적 지식이 없어도 이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왓슨의 회고록이라고 보면 좋을 책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영국으로 연구하러 가서 거기서 만난 동료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왓슨.


세상에 그가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것이 20대다. 놀라운 성취다. 하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것도 20대니 혈기왕성한 나이에 과학적 업적을 이룬 것이 예외가 아니긴 하다.


새로운 아이디어, 멈출 줄 모르는 도전 정신, 그리고 치밀함 등등이 그런 업적을 이루게 했으리라.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세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다.(생리의학상). 공동저자였던 크릭과 경쟁자였던 모리스 윌킨스.


이 책에서는 윌킨스와의 경쟁과 협력이 생생하게 잘 펼쳐진다. 그리고 빠진 한 사람. 후기에서 왓슨은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 그럼에도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나중에 왓슨은 로지(로잘린드 프랭클린을 그들은 줄여서 로지라고 불렀다)에 대해서 다른 평가를 한다. 훌륭한 과학자였다고. 아마 살아있었다면 로지도 노벨상의 공동수상자가 되었을텐데...


여기에 더해서 미국에서 DNA구조를 밝히려고 했던 폴링과의 경쟁. 그리고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냈을 때 깨끗하게 승복한 폴링의 자세. 과학자가 지녀야 할 덕목이지 않을까 싶다.


연구를 할 때는 치열하게 경쟁하되, 상대가 완성된 이론을 발표했을 때는 그를 인정하는 것. 그런 점들을 볼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물론 왓슨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라는 점을 기억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DNA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지기까지의 과정이 그에 직접 관여했던 사람의 관점으로 아주 흥미진진하게 서술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읽기에도 좋다. 추천사를 쓴 최재천의 말처럼 과학자도 글을 잘써야 한다.


글 잘쓰는 과학자가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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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2-14 2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난달에 제가 읽었던 과학동아 1월호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 님에 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kinye91 2024-02-15 11:1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왓슨이 자전적인 기록에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어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2-15 1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 좀 detail한 내용이긴 합니다만, 제가 읽었던 과학동아 1월호 내용에 근거하면 프랭클린이 DNA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51번 X선 회절 사진‘이라는 것을 찍어서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는 얘기가 나오더군요. 아마 왓슨도 자전적인 기록에서 이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나 조심스레 예상해 봅니다.

kinye91 2024-02-15 11:59   좋아요 2 | URL
네. 이 책에 그런 내용이 있어요.

그레이스 2024-02-19 0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았던 책입니다. 이젠 이 책도 과학분야에서는 고전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느 분야든 관계가 중요한 요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kinye91 2024-02-19 17:17   좋아요 0 | URL
맞아요. 관계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특히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경우를 보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 큐큐클래식 7
버지니아 울프.비타 색빌웨스트 지음, 박하연 옮김 / 큐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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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사적이면서 공적이다. 일기와 달리 자신만이 보지 않고 상대방이 보게 쓴 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을 담고 있지만, 그 내면이 상대에게 전달이 되어야 한다. 나와 남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편지가 한다.


나와 상대. 단 둘만이 간직하고 있으면 사적인 글로 그쳤을 텐데, 편지는 둘 다 폐기하지 않는 한 어느 한쪽이 쓴 글이라도 살아남는다. 그래서 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히게 된다. 이때 편지는 공적인 존재가 된다.


편지가 문학이 될 수도 있음을 유명한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발간된 편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 중에 카프카의 편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카프카의 편지에서 그 유명한 구절 '책은 도끼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지는 못했다. 읽어야지 하면서도 선뜻 손에 잡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반면 울프의 다른 글들 [자기만의 방]과 같은 글은 어쩌다 읽게 되었는데... 계속 버지니아 울프는 언젠가 읽어야 할 작가로 내게 남아 있다.


이번에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는 비타 색빌웨스트와 버지니아 울프가 주고 받은 편지를 모아 놓았다. 1923년부터 1941년 버지니아 울프가 죽기까지 주고 받은 편지들. 무려 18년이다. 방대한 양이 남아 있을테니, 책으로 편찬할 때는 그 중에서 선별을 했을 테다. 선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600쪽이 넘는다. 


만남-사랑-우정이라는 제목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살필 수 있게 한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이 둘 사이에는 굳은 신뢰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의 작품에 대해서 경탄하면서 서로를 북돋워주기도 하고, 서로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 편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울프의 소설 [올랜도]가 비타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비타 색빌웨스트가 내가 몰라서 그렇지 꽤 많은 작품을 썼으며, 잘 알려진 작가였다는 점에서 울프 주변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남성 중심으로 편협하게 알고 있지 않았나 반성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면 울프 소설을 꼭 읽어야겠다는, 특히 비타가 극찬하고 있는 [등대로]라든지, [올랜도]는 시간 내서 꼭 읽어야지 하는 결심을 하게 됐는데...


당시 영국은 동성애에 엄격한 나라였다. 일례로 오스카 와일드도 동성애로 감옥 생활을 했으며,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앨런 튜링도 동성애로 탄압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 버지니아와 비타가 어느 정도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들이 동성애로 처벌을 받지 않은 이유는 둘 다 결혼을 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한다. 


겉으로는 이들은 이성애자로 보였을 테고, 버지니아와 비타의 관계는 동료 작가 또는 문학을 하는 선후배 정도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겠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이 둘의 관계에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둘의 만남이 서로의 문학활동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고, 지지를 받고, 다른 사람들의 비평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문학을 추구해갈 수 있는 힘을 서로에게 얻었다는 점. 


그런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문학을 감상할 기회를 주었다는 점. 그런 점들을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서로에 대한 사랑, 서로에 대한 우정으로 10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한 버지니아와 비타. 그런데 이렇게 서로를 위하던 사람이었는데, 비타는 버지니아의 죽음을 예감하지 못했을까? 


이 책을 보면 버지니아가 비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1941년 3월 22일이다. 그리고 버지니아는 3월 28일에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겨우 6일 차이...마지막 편지에 '우리가 언제 가게 될까?'(633쪽)라고 하며 비타와의 만남을 기대했던 버지니아인데.


예민한 버지니아에게 전쟁 상황, 주변에 떨어지는 폭탄들, 견디기 힘든 경제 상황 등이 더욱 견디지 못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비타가 그렇게 많은 도움을 주려고 했음에도...


버지니아와 비타가 주고받은 편지. 이 편지들을 통해서 개인 버지니아 울프에게 좀더 다가갈 수 있어서 좋았고, 비타 색빌웨스트라는 작가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도 좋았다.


서로가 서로를 챙기면서 북돋워주는, 문학 활동을 하는데 서로 도움을 주는 그런 모습. 그런 모습이 오롯히 드러나고 있는 편지 모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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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평전
이광호 지음,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기획 / 사회평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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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개인이 진 것이지 인간이 진 것은 아니다."

알파고와 바둑을 둔 다음 이세돌이 한 말이라고 한다. 


"한 인간의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 전체에서는 위대한 도약"

달에 첫걸음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의 말이라고 한다.


노회찬 평전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를 비롯한 진보정당 사람들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그들 개인에게도 큰 일이었겠지만 (이는 결코 작은 걸음은 아니다. 다만, 개인보다는 진보주의자들을 대표했다고 할 수 있으니, 이런 말도 통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정치사에도 위대한 도약을 이룬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많은 변화도 있었지만, 기대만큼 일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고, 또 진보들이 스스로 고질병이라고 하는 분열로 인해 여러 번 이합집산도 거쳤지만 (오죽하면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을까), 그래도 진보정당이 국회에 입성했기에 이룰 수 있었던 일들이 많았다고 본다.


바로 그 중심에 노회찬이 있었다.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슬프지만 그는 갔으니, 과거형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많은 어록을 남긴 정치인이 있을까 싶기도 한데, 말들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가 돌연 세상을 등졌다.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책을 하나 고르라면 '교과서'라고 답을 하겠다던 노회찬.


교과서가 무엇인가? 좋은 말만 적혀 있는 책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교과서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차별들을 살펴야 한다. 그래도 대체로 교과서는 옳은 말을 하는 책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미래 세대에게 전수했으면 좋은 것들이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교과서가 지니고 있는 편향성이라든지, 부정적인 면을 언급하지 말고, 그냥 통상 교과서적 인간이라고 할 때 쓰는 그런 비유적 표현으로 쓴다)  


노회찬은 교과서대로 행동하지 않는 정치인을 보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왜 자신들에게 가르친 대로 그들은 행동하지 않는가? 그는 그렇게 교과서적 인간이 되었다. 앎과 행동을 하나로 한 인간.


자신의 이익보다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꼭 해야만 할 일을 했던 사람.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런 사람들과 어울렸던 사람.


사회에서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사람을 우리 눈 앞에 보여준 사람. 그런 정치인이 노회찬이었다. 그러니 어떤 말로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세상을 등졌으리라. 


하지만 정치인 누구나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온갖 비리를 저질러 놓고도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법망을 피해가려고 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또 법망을 못 피할 것 같으면 정치 탄압이라고 주장하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이 자신의 잘못을 가리려고 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교과서적 인간 노회찬은 그런 정치인이 될 수 없었다. 그는 교과서에 실린 대로 옳다고 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비록 실수라고 해도, 그 실수로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노회찬.


요즘 부쩍 그가 생각났다. 정치판이 참... 그러다 노회찬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의 평전을 샀다. 56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600쪽 내외에 담는다는 일이 우습기는 하지만, 이 정도 두께면 노회찬이 한 많은 일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환경. 교과서적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노동운동가로서의 삶. 여기서 그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정당의 필요성을 깨닫고,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일하는 정치가로서의 삶. 진보정당원으로서 국회의원이 되어 한 활동들.


국회의원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대변하는 자리, 봉사하는 자리임을 너무도 잘 알고 행했던 사람. 정치를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특히 힘없는 약자들을 위해서 할 줄 알고 또 하려고 했던 사람.


많은 일들을 겪고, 진보정당의 부침도 겪으면서 진보정당이 국민을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실천했던 사람.


그런 그의 삶이 이 책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읽으면서 노회찬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우리 곁에 있었던 우리가 필요로 했던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6411번 버스 연설로 알려진 그의 말. 이 책에 그 연설이 실려 있다. 그가 어떤 정치를 하려고 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연설.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다. 마치 마친 루터 킹 목사가 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나는 꿈이 있습니다 보다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도 기억할 수 있는 연설을 남겨준 노회찬이 고맙기도 하다.

  

우리가 투명인간 취급했던 사람들을 우리 앞으로 불러내었던 정치인. 하지만 이 연설에서 더 큰 감동을 준 것은 바로 '투명정당'이라는 말이다. 숨어 있는 정당. 정작 자신들이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데,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는 그런 정당. 그러면서 자신들의 이익은 절대 놓치지 않는 정당. 그런 정당이 투명정당이다. 


투명인간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투명인간 취급한다고 했을 때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약자를 의미하지만, 투명인간은 본래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해 이익을 취했던 인물 아닌가. 그러니 노회찬이 말한 투명정당은 바로 그런 투명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 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 분들의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431-432쪽)


통렬하다. 통쾌하다. 투명정당, 진보정당이 투명정당이었다면, 그간 다른 정당들은 보이지 않는 정당이 아니라 아예 드러내 놓고 빼앗아가는 정당이었을 것이다. 한데 어떤 정당 정치인도 노회찬처럼 이렇게 반성하지 않았다.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노회찬이 비판한 투명정당보다 더한 정당으로 남아 있다. 그런 정당들의 본질을 알게 해주는 말, 투명정당. 그래서 이 연설은 더 소중하다.


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촌철살인. 노회찬의 말하기였다. 적절한 비유. 그렇다. 비유는 길어지면 안 된다. 그러니 이쯤에서 마치자. 다만, 앞의 말들을 좀 바꾸어서 끝내고자 한다.


"노회찬의 국회의원 당선은 한 인간의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지만 진보정당 전체에서는 위대한 도약이었다"


"노회찬 개인은 죽었지만 진보정당이 죽은 것은 아니다."


그의 마지막 말도 이러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5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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