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 밀라논나 이야기
장명숙 지음 / 김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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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없는 사회라는 말과 꼰대들이 판치는 세상이라는 말이 거의 동의어로 들리는 세상인데, 그만큼 세대 간 소통이 잘 안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라떼는 말이야라고 하는 말, 나 때는 안 그랬다고, 나는 그랬다고 하는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듣는 세상.


나이듦이 지혜로와지고 인정받음이 되지 않고 꼰대로 치부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만큼 기성세대들이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때 나이듦과 여유, 지혜로움이 같아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을 만났다. 그렇다.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다. 우리가 살아갈 인생은 어차피 기한이 정해져 있다. 그 정해진 기한을 잘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인생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라서, 어떻게 살아야 잘살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때 잘사는 법을 가르쳐준다기보다는 보여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아,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멘토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특정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지니고 산다면 누구나 처음 사는 인생을 그래도 좀 잘살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마찬가지로 멋지게 나이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그렇다. 그렇게 나이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늙어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단 한번 뿐인 인생, 멋지게 살고,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을 쓴 장명숙은 그런 사람이지 않을까 한다. 멋지게 늙어가는 사람. 인생을 멋지게 산 사람. 물론 그도 고민을 많이 하고 시행착오도 겪었겠지. 그런 과정을 가감없이 책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삶을 책을 통해 만나면서 꼰대가 아닌 어른을 만나게 된다. 나이 들어서 유튜브를 하는데, 구독자가 많다고 한다. 유튜브 운영과 구독자와 나이를 연결시킬 필요는 없지만, 살아온 인생을 담담하게 전해주고, 그 과정에서 삶의 지혜를 얻게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구독해서 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른이 없는 사회, 꼰대들만 있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렇게 삶의 지혜를 보여주는 사람이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다.


무겁지 않게, 또 훈계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게 그렇게 자신이 살아온 삶을 통해서 단 한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는 후대들이 잘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책 곳곳에 담겨 있으니... 찬찬히 이 책을 읽어보며 느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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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익 중장의 처형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이진명 옮김 / 페이퍼로드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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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일본군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전범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을 당한 조선인 장군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홍사익이라는 이름을.

 

이때는 그냥 친일을 한 사람, 그것도 일본 천황에 충성을 한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일제시대 일본군 중장까지 올라갈 정도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이어 일본 육군대학까지 나온 사람이니...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 왜 홍사익이지 하는 의문? 일본에서 중장까지 올라갈 정도의 사람이라면 창씨개명을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을까?

 

저항시를 쓴 윤동주도 일본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 창씨개명을 했는데, 왜 그는 일본 육군 중장이라는 장군이었는데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도 그런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생각.

 

무언가 이상하긴 한데...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이라니... 그를 처형하기까지의 과정이 잘 나타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

 

앞부분에서 그가 우리나라 광복군을 이끈 이청천(지청천) 장군과도 관계가 있고, 독립운동을 하는 동기들의 가족을 뒤에서 도와주었다는 내용도 나오는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연구하면 될 일이고...

 

일본군이든 광복군이든 아마도 동기라면 가족에 대한 도움을 거부하지는 못했으리라는, 그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생각. 그래도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그리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러한 증거로 '전의회(全誼會)' 회보를 들고 있는데, 이런 결정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왜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해방된 조국에서 그런 사실을 밝히는 일이 구구절절 변명한다는 느낌, 그렇게 구차하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겠다는 지사적 자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

 

개인으로서 하는 행동과 사회에서 위치한 자리에서 하는 행동이 똑같은 행동이라도 결과는 다를 수 있고, 평가도 다를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더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책을 읽어보면 개인으로서의 홍사익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일제시대 전쟁기에 과연 그는 어떤 행동을 했는가?

 

개인의 품성을 논외로 하고, 그는 포로수용소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다. 물론 포로가 파견된 부대에 대해서는 지휘권이 없다고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지만 (전범 재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포로수용소 총괄담당임은 틀림없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가 전범 재판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어쩌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미 일본은 패망했고, 자신이 명령했든 명령하지 않았든 포로수용소에서는 잔학행위가 있었다. 그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침묵으로 일관하고 사형 판결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전범 재판에 대해서는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홍사익 중장은 억울한 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한 일본인들도 사형을 면하고, 나중에 일본 정계에 진출한 경우가 많은데, 그에게는 유독 가혹했던 이유는, 유럽에서 벌어진 포로에 대한 잔학 행위와 동남아 곳곳에서 벌어진 포로에 대한 학대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물어야 하고, 그 책임자가 바로 홍사익 중장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였을 수 있다.

 

'인간은 모든 선의를 갖고 사람을 대하더라도 그것이 죄를 저지르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죄를 범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 (679쪽)

 

'홍 중장은 가능한 한 선의를 가지고 포로를 대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 면에서는 조금도 그의 양심에는 부끄러운 점이 없었다.' (680쪽)

 

이 구절에서 쿤데라 소설에 나오는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이디푸스 역시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지른지도 모르고 지냈다. 자신은 좋은 삶을 살았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어느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것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한다.

 

홍사익 중장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한다. 그는 책임을 지려했고, 그 책임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도.

 

그러나 저자는 일본식 사고, 또는 일본식 행동에 대해서 미군이 주축이 된 전범 재판소에서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논리를 앞세운 그 재판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책임을 회피하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일본도 잘못했지만, 미국도 잘못했다로 나아갈 수 있고, 그 주장의 한 가운데 홍사익 중장을 놓을 수가 있다. 잘못된 재판으로 희생된 사람으로.... 이렇게 보면 일본과 더불어 미국에도 비판을 가할 수가 있다.

 

전범 재판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기 전에 식민통치를 한 일본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홍사익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일도 하지 않았음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조선인으로서 일본군 중장까지 갔고, 그 일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면, 그 일에 대한 우선 책임은 일본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홍사익의 행동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그 역시 역사의 흐름을 알지 못했고, 또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갈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의 행동에 찬성할 수 없지만, 그 역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수레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 아렌트 말대로 성찰해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굴러가는지 알려고 해야 한다. 자신이 그 수레바퀴가 오는 길에 있는지, 그 수레바퀴를 미는 쪽에 있는지, 또 수레바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찰에는 공부가 필요하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도, 철학을 배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을 읽으면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 우리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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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acWine 2021-11-05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네요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kinye91 2021-11-06 15:41   좋아요 1 | URL
어느 정도는 홍사익이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숲속의 자본주의자 - 자본주의의 변두리에서 발견한 단순하고 완전한 삶
박혜윤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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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이라는 말에서 자본주의를 벗어난 삶을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의 저자는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긍정한다. 자본주의 세상에 살면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삶을 살려면 여로모로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쓴 사람이 원하는 삶은 행복한 삶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사는 삶. 즉 무엇을 해야지에 매여 자신의 온 힘을 쏟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편하게 지내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니 도시를 완전히 떠나지도 않는다. 숲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시에 살지도 않는다. 나름 시골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컴퓨터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이 생활한다. 불편하지 않단다.


왜냐하면 버려야지 하고 결심한 다음에 결행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레 살면서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즉 결심이 앞서고 그 결심을 실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자신들이 살면서 그냥 편한 방향으로 실행을 한다.


그런 행복이다. 그러니 자본주의를 버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시장없이 살기는 힘들지 않은가. 시장은 자본주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소이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산다. 왜? 필요하니까. 다만 이 책을 쓴 사람이 살 때 고려하고 있는 사항은 참조할 만하다.


물건을 살 때 자신에게 필요없어질 때 어떻게 할까를 생각한다고 한다. 쓸 때가 아니라 버릴 때, 마치 '메멘토 모리'라는 말처럼 그 물건이 내게서 떠나가야 할 때 어떻게 할까 하면 함부로 물건을 사지 못한다.


자본주의를 떠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내에서 환경을 생각하는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숲속의 자본주의자라고 제목을 붙인 까닭이 바로 숲속에 방점을 두지 않고 둘 다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내 삶은 다른 사람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오죽하면 감옥에서 독방에 가두는 일이 강한 처벌이 되겠는가.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는 감옥에서도 그런데, 사회 생활에서야 말해 무엇하리.


그러니 이 책을 쓴 사람은 자신의 삶에 다른 사람의 삶을 연결짓는다. 다만 그 연결이 자신의 삶을 침해하지 않도록 하고, 자신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침해하지 않도록 관계를 맺으면서.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기, 그냥 자신은 이런 삶이 좋고 편해서 살 뿐이다. 모두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보여주기만 할 뿐. 선택은 어차피 개인이 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책을 쓴 사람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있다. 사람 수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행복이 있을테니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보지 말고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욕망을 파악하고 사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는 글쓴이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덩달아 편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음을, 거창한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목표를 잡지 않아도 됨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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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의 불 - 한 자연과학자의 자전적 현대 과학문명 비판
에르빈 샤르가프 지음, 이현웅 옮김 / 달팽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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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에르빈 샤르가프의 자서전이다. 에르빈 샤르가프... 몰랐던 사람이다. 과학 쪽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알겠지만, 과학과는 거리를 두고 사는 내게는 전혀 낮선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이런 나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왓슨-크릭이 발견한(?) DNA 이중나선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샤르가프의 연구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그렇다면 이 에르빈 샤르가프라는 사람도 생물학 쪽에서는 꽤 권위를 지닌 과학자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책 제목 옆에 쓰여 있는 설명은 '한 자연과학자의 자전적 현대 과학문명 비판'이다. 샤르가프는 현대과학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음을 알려주는 말인데...


너무도 분화되고 전문화된 현대 과학은 전문가끼리도 소통이 안되는 경우가 많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융합이니 통합이니 하는 쪽으로 여러 학문이 교류하고 함께 작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요즘 과학풍토에 대해서도 샤르가프는 비판적일까 생각을 해보니, 그의 자서전을 읽은 결과 그는 요즘 이런 융합 과학 쪽에도 비판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샤르가프가 비판하는 과학의 방향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전문분야만으로는 더 나아갈 수가 없으니 다른 전문분야와 합쳐 나아가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현대 과학의 방향이다. 반면에 샤르가프는 작은과학을 추구했다. 그것은 각 분야로 더 쪼개지는 과학이 아니라 자연을 넘어서지 않는, 인간 자체를 넘어서지 않는 과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 책의 표지에 천지창조 그림 중에서 신이 아담에게 손가락을 내밀고 있는 장면에서 둘의 손가락은 맞닿아 있지 않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샤르가프는 바로 이 상태에서 자신의 삶, 자신의 과학을 한다고 한다. 떨어져 있는 이 공간을 넘어서지 않으려는 자세. 이것은 둘의 손가락을 맞닿게 함으로써 인간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으려는 현대 과학을 비판하는 그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또 샤르가프는 물리학 분야에서 이루어낸 과학 결과들은 바꿀 수 있지만, 인간이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생물학 분야에서 이루어낸 과학 결과물들은 비가역적이라고,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다고, 인간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고, 그 유기체들은 스스로 살아가게 된다고,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고, 그런 점을 명심하고 추구하는 과학이 작은과학이라고 한다.


그러니 샤르가프는 동키호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고집세고 시대를 읽을 줄 모르는 과학자 취급을 받는다. 


이 책은 왜 샤르가프가 그렇게 현대 과학에 비판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살아온 시대를 통해 과학자들의 위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알 수 있다.


책의 첫 시작은 원자폭탄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그 사건을 접하고 미국을 떠날 생각을 한다. 여기서부터 샤르가프가 생각하는 과학을 알 수 있게 된다.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프로젝트를 맨하탄 프로젝트라고, 엄청난 숫자의 과학자들이 모여 작업을 했고, 그것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으며, 결과는 인류에게 참혹한 폭탄 생산이었다는 것.


기술과 권력에 종속되는 과학은 진정한 과학일 수 없다는 것, 그런 과학이 이제는 인간의 몸을 향하면 인간 복제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에 대해서, 그는 과학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시 책의 끝부분에 가면 그의 생애를 한 장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는 첨단과학기술시대를 살고 있다. 샤르가프가 우려했던 부분에서 더 나아가고 있는 중. 결과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샤르가프의 예측을 빗나가게 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더 많은 고려, 더 많은 책임, 더 많은 윤리들이 과학에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 나는. 그럼에도 샤르가프의 경고, 또는 우려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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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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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전반부를 읽을 때만 해도, 교육의 힘에 대해서 말하겠지 하는 기대를 했다. 이런 구절에서 그런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버리고 떠난 오빠를 흉내 내면서 모르몬 사상의 한 분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보낸 그 긴긴 시간들 말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 내는 그 끈기야말로 내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109쪽)


그런데 아니었다. 교육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교육에 의해서 관점이 뒤틀린 사람이 제 관점을 찾아가는 얘기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교육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교육은?


사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가면서 이건 '배움의 발견'이 아니라 '교육의 해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배움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실천하는 일이라면 교육은 위에서 주어진다는 생각. 사실 교육이 내면에 아직 드러나 있지 않은 능력들을 끄집어내는 행위라고 하는데, 이 책은 끝나갈 때까지 광신적인(?다른 종교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하기는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버지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아버지 관점에서 벗어나 살아가려는 모습은 '배움의 발견' 아니라 '교육에서의 탈출'이라고 해야 맞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지닌 소설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좀더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으려나?


학교, 정부를 사탄으로 보는 모르몬교도 아버지와 그를 추종하는 엄마에게서, 이들에게는 병원 진료조차도 사탄에게 몸을 맡기는 행위가 되니 참 먼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저자인 타라 웨스트오버는 1986년생이다. 1986년 미국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가 겪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참...


하지만 아무리 가리고 막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을 때가 있다. 자식은 품 안의 자식이어야 한다. 자식이 제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바로 저자의 아버지인 존 웨스트오버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계시를 받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선지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서 벗어나는 생활을 하는 자식을 견딜 다른 관점이 없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관점, 자신이 믿는 종교, 거기에서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계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이제 독립해 나아가려는 타라는 회개시켜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타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눈 앞에는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스스로 기도할 줄 아는 성인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버지의 발 앞에 어린아이처럼 앉아 있지 않았다. (213쪽)

어떤 운명도 아버지와 그 여성을 함께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항상 어린아이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를 잃을 것이다. (214쪽) 


이 말이 핵심이다. 자, 나에게는 어른과 아이가 동시에 있다. 둘 다 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나에게 있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존재할 수 없다면,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로 남아 가족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울타리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며 살 것인가, 아니면 어른이 되어 아버지를 떠나 내 삶을 살아갈 것인가.


타라는 타일어 오빠의 말을 듣고 대학에 간다. 대학에 가서 새로운 문화를 만나게 되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대학생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와 헤어지지 않았다. 자신 속에 있는 아이 말을 듣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다 역사에 흥미를 지니고, 다른 관점을 알기 시작한다. 배움의 발견이다.


'내가 자각의 길에 들어섰고, 오빠, 아버지, 나 자신에 관해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넨 전통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실수로 그것이 어떤 전통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담론에 목소리를 보태 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담론을 확대하고 그편에 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87쪽)


이 부분은 가족들, 특히 엄마와 언니인 오드리에게서 잘 나타난다. 이들은 가부장제인 가족 형태를 바꿀 수가 없다.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조금 저항을 했던 오드리는 가족에게서 배제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아니,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신념이 되었다. 나중에 타라에게 하는 말을 보면 섬뜩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변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완전히 바꾼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오드리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엄마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는 가부장제를 내면화한 대표적인 사례다. 숀이라는 오빠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알고도 모른 척하고, 나중에 문제제기하는 것을 막는다. 엄마에게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일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와 함께가 아니라면 타라를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킨다.


맹목이지만, 그들에게는 그 틀을 깨고 자신들을 바라볼 거리가 없다. 그들은 그 안에 있다. 자신들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는 교육만 있다. 아버지가 제시한 교육. 즉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배움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잡지 않는다. 


그러나 집을 뛰쳐나온 자식들은 볼 수가 있다.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잘못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잘못된 삶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버지의 교육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배움을 발견한다. 배움의 발견은 다른 관점을 지니게 하고,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그 과정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누군가가 과거에 대해 아는 바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제한받게 될 거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 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였다.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ㅈ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373쪽)


그렇다. 배움의 발견은 기쁨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엄청난 고통을 유발하기도 한다. 두려움, 고통, 그리고 인내, 그것으로 인한 자신의 분열. 하지만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자신을 가두고 있는 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471쪽)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   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507쪽)


교육이라는 자아를 지니기 위해서 거쳐왔던 지난한 세월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타라는 너무도 힘든 과정을 거친다. 그럼에도 이겨낸다. 그렇다. 이미 타라는 배움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 속에 있던 아이와 이제는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 아이를 떠나보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책 저자의 말에서 '집에 돌아올 시간이라는 신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아버지는 한 번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14쪽)고 했다. 그렇디. 아버지는 자신의 집에서 볼 수 있는 거리까지만 자식들을 허용했다. 그 경계를 벗어나는 삶을 자식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관점이고, 아버지의 교육이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라는 신호는 타라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아니, 찾는 것이 아니라 타라가 결정해야 한다. 아버지의 교육과는 다른 배움의 길을 찾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왕국에서 독립한 자신의 삶을 찾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쓴 이 책은 한 편의 소설이다. 아마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노로, 뭐 이따위 가족이 있어 하면서 책을 던져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저자가 지나치게 과장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지만 사실일 것이다. 종교 강요, 가정 폭력. 홈스쿨링을 빙자한 교육의 부재. 그리고 조금이라고 그 틀에서 벗어난 자식들을 배제하는 모습. 심해도 너무 심한 폭력이다. 아이들 머리를 쥐어박아도 경찰서에 갇히는 그런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었다니... 


자신의 관점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교육이 과연 진정한 교육인지, 그러한 교육을 지금도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하는 책인데... 


정말 소설 같다. 그래서 한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가 없다. 결론이 궁금해져서. 이 글을 썼으니 적어도 저자가 죽지는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읽는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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