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욤비 -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욤비 토나.박진숙 지음 / 이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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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머리에 떠오른 책이 있었으니, 그것은 홍세화가 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다. 오래 전에 나와 많은 사람에게 읽힌 책. 우리나라와 프랑스를 비교한다기보다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프랑스로 망명한 홍세화의 삶 이야기에서 느낀 바가 많았다. 


그만큼 우리나라도 민주화가 되기 전에는 탄압을 받고 이 땅에 살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도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독재시대만이 아니다. 6.25전쟁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남과 북에 남기를 거부하고 제3국을 선택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난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망명자들은 난민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살던 땅을 벗어난 사람들.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간 사람들 이야기에는 공감하면서도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망명신청을 한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난민을 받아들여 난민으로 인정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난민 숫자도 많지 않고. 


이 책을 읽어보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와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난민이 되면 자기 나라에서 누렸던 지위를 누리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최소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욤비 씨의 경우는 난민으로 인정받는데도 몇 년이 걸렸고, 그 동안에는 취업도 제대로 하지 못해,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박해를 받아 탈출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에 왔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동안 소송을 해서 결국 난민 지위를 얻고, 가족들까지 우리나라에 오게 했지만, 이는 욤비 씨가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가 없다. 그는 우연히도 좋은 사람들, 또 법에 능통한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욤비 씨와 같이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난민 심사에 통역관조차 제대로 배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또한 심사 기간 중에 거처할 장소나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없다면? 암담하다. 살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왔는데, 그 나라에서 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여기에 차별이 겹친다면?


욤비 씨가 겪은 일 가운데 초반은 이런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그는 무척 힘든 일을 겪었다. 다행히 큰부상을 당하지 않았고,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어서 난민 인정을 받았지만, 욤비 씨의 경우가 특별한 경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다른 난민들을 위해 일을 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운이 아니라 자기 나라에서 탄압을 받아 살기 힘든 사람들은 당연히 난민 지위를 받아야 하고, 다른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이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우리나라로 난민 신청을 해서 지금은 난민 지위를 얻고 난민으로 살아가는 욤비 씨. 그들을 난민으로 인정한 순간부터는 자국 사람으로 인정하고 함께 살도록 해야 하지 않나. 


비록 지구가 여러 국경으로 나뉘어 각 나라마다 일정한 벽이 있지만, 그 전에 우리는 인류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류다. 그러니 이동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이동했을 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그 나라에서는 제공해야 한다. 억지로 막고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나라는 난민 인정에 인색하다. 그러나 난민에 대한 인식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세계의 일원이기 때문이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한때 이런 난민 생활을 겪은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욤비 씨는 다시 콩고로 가서 콩고의 민주화를 이루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우리나라에서 더 열심히 살아간다.  이 책에 나온 욤비 씨의 삶을 통해 난민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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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 밀라논나 이야기
장명숙 지음 / 김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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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없는 사회라는 말과 꼰대들이 판치는 세상이라는 말이 거의 동의어로 들리는 세상인데, 그만큼 세대 간 소통이 잘 안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라떼는 말이야라고 하는 말, 나 때는 안 그랬다고, 나는 그랬다고 하는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듣는 세상.


나이듦이 지혜로와지고 인정받음이 되지 않고 꼰대로 치부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만큼 기성세대들이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때 나이듦과 여유, 지혜로움이 같아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을 만났다. 그렇다.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다. 우리가 살아갈 인생은 어차피 기한이 정해져 있다. 그 정해진 기한을 잘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인생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라서, 어떻게 살아야 잘살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때 잘사는 법을 가르쳐준다기보다는 보여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아,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멘토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특정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지니고 산다면 누구나 처음 사는 인생을 그래도 좀 잘살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마찬가지로 멋지게 나이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그렇다. 그렇게 나이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늙어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단 한번 뿐인 인생, 멋지게 살고,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을 쓴 장명숙은 그런 사람이지 않을까 한다. 멋지게 늙어가는 사람. 인생을 멋지게 산 사람. 물론 그도 고민을 많이 하고 시행착오도 겪었겠지. 그런 과정을 가감없이 책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삶을 책을 통해 만나면서 꼰대가 아닌 어른을 만나게 된다. 나이 들어서 유튜브를 하는데, 구독자가 많다고 한다. 유튜브 운영과 구독자와 나이를 연결시킬 필요는 없지만, 살아온 인생을 담담하게 전해주고, 그 과정에서 삶의 지혜를 얻게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구독해서 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른이 없는 사회, 꼰대들만 있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렇게 삶의 지혜를 보여주는 사람이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다.


무겁지 않게, 또 훈계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게 그렇게 자신이 살아온 삶을 통해서 단 한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는 후대들이 잘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책 곳곳에 담겨 있으니... 찬찬히 이 책을 읽어보며 느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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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익 중장의 처형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이진명 옮김 / 페이퍼로드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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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일본군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전범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을 당한 조선인 장군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홍사익이라는 이름을.

 

이때는 그냥 친일을 한 사람, 그것도 일본 천황에 충성을 한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일제시대 일본군 중장까지 올라갈 정도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이어 일본 육군대학까지 나온 사람이니...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 왜 홍사익이지 하는 의문? 일본에서 중장까지 올라갈 정도의 사람이라면 창씨개명을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을까?

 

저항시를 쓴 윤동주도 일본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 창씨개명을 했는데, 왜 그는 일본 육군 중장이라는 장군이었는데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도 그런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생각.

 

무언가 이상하긴 한데...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이라니... 그를 처형하기까지의 과정이 잘 나타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

 

앞부분에서 그가 우리나라 광복군을 이끈 이청천(지청천) 장군과도 관계가 있고, 독립운동을 하는 동기들의 가족을 뒤에서 도와주었다는 내용도 나오는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연구하면 될 일이고...

 

일본군이든 광복군이든 아마도 동기라면 가족에 대한 도움을 거부하지는 못했으리라는, 그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생각. 그래도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그리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러한 증거로 '전의회(全誼會)' 회보를 들고 있는데, 이런 결정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왜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해방된 조국에서 그런 사실을 밝히는 일이 구구절절 변명한다는 느낌, 그렇게 구차하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겠다는 지사적 자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

 

개인으로서 하는 행동과 사회에서 위치한 자리에서 하는 행동이 똑같은 행동이라도 결과는 다를 수 있고, 평가도 다를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더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책을 읽어보면 개인으로서의 홍사익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일제시대 전쟁기에 과연 그는 어떤 행동을 했는가?

 

개인의 품성을 논외로 하고, 그는 포로수용소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다. 물론 포로가 파견된 부대에 대해서는 지휘권이 없다고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지만 (전범 재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포로수용소 총괄담당임은 틀림없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가 전범 재판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어쩌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미 일본은 패망했고, 자신이 명령했든 명령하지 않았든 포로수용소에서는 잔학행위가 있었다. 그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침묵으로 일관하고 사형 판결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전범 재판에 대해서는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홍사익 중장은 억울한 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한 일본인들도 사형을 면하고, 나중에 일본 정계에 진출한 경우가 많은데, 그에게는 유독 가혹했던 이유는, 유럽에서 벌어진 포로에 대한 잔학 행위와 동남아 곳곳에서 벌어진 포로에 대한 학대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물어야 하고, 그 책임자가 바로 홍사익 중장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였을 수 있다.

 

'인간은 모든 선의를 갖고 사람을 대하더라도 그것이 죄를 저지르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죄를 범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 (679쪽)

 

'홍 중장은 가능한 한 선의를 가지고 포로를 대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 면에서는 조금도 그의 양심에는 부끄러운 점이 없었다.' (680쪽)

 

이 구절에서 쿤데라 소설에 나오는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이디푸스 역시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지른지도 모르고 지냈다. 자신은 좋은 삶을 살았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어느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것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한다.

 

홍사익 중장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한다. 그는 책임을 지려했고, 그 책임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도.

 

그러나 저자는 일본식 사고, 또는 일본식 행동에 대해서 미군이 주축이 된 전범 재판소에서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논리를 앞세운 그 재판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책임을 회피하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일본도 잘못했지만, 미국도 잘못했다로 나아갈 수 있고, 그 주장의 한 가운데 홍사익 중장을 놓을 수가 있다. 잘못된 재판으로 희생된 사람으로.... 이렇게 보면 일본과 더불어 미국에도 비판을 가할 수가 있다.

 

전범 재판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기 전에 식민통치를 한 일본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홍사익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일도 하지 않았음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조선인으로서 일본군 중장까지 갔고, 그 일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면, 그 일에 대한 우선 책임은 일본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홍사익의 행동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그 역시 역사의 흐름을 알지 못했고, 또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갈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의 행동에 찬성할 수 없지만, 그 역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수레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 아렌트 말대로 성찰해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굴러가는지 알려고 해야 한다. 자신이 그 수레바퀴가 오는 길에 있는지, 그 수레바퀴를 미는 쪽에 있는지, 또 수레바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찰에는 공부가 필요하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도, 철학을 배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을 읽으면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 우리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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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acWine 2021-11-05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네요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kinye91 2021-11-06 15:41   좋아요 1 | URL
어느 정도는 홍사익이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숲속의 자본주의자 - 자본주의의 변두리에서 발견한 단순하고 완전한 삶
박혜윤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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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이라는 말에서 자본주의를 벗어난 삶을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의 저자는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긍정한다. 자본주의 세상에 살면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삶을 살려면 여로모로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쓴 사람이 원하는 삶은 행복한 삶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사는 삶. 즉 무엇을 해야지에 매여 자신의 온 힘을 쏟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편하게 지내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니 도시를 완전히 떠나지도 않는다. 숲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시에 살지도 않는다. 나름 시골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컴퓨터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이 생활한다. 불편하지 않단다.


왜냐하면 버려야지 하고 결심한 다음에 결행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레 살면서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즉 결심이 앞서고 그 결심을 실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자신들이 살면서 그냥 편한 방향으로 실행을 한다.


그런 행복이다. 그러니 자본주의를 버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시장없이 살기는 힘들지 않은가. 시장은 자본주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소이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산다. 왜? 필요하니까. 다만 이 책을 쓴 사람이 살 때 고려하고 있는 사항은 참조할 만하다.


물건을 살 때 자신에게 필요없어질 때 어떻게 할까를 생각한다고 한다. 쓸 때가 아니라 버릴 때, 마치 '메멘토 모리'라는 말처럼 그 물건이 내게서 떠나가야 할 때 어떻게 할까 하면 함부로 물건을 사지 못한다.


자본주의를 떠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내에서 환경을 생각하는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숲속의 자본주의자라고 제목을 붙인 까닭이 바로 숲속에 방점을 두지 않고 둘 다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내 삶은 다른 사람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오죽하면 감옥에서 독방에 가두는 일이 강한 처벌이 되겠는가.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는 감옥에서도 그런데, 사회 생활에서야 말해 무엇하리.


그러니 이 책을 쓴 사람은 자신의 삶에 다른 사람의 삶을 연결짓는다. 다만 그 연결이 자신의 삶을 침해하지 않도록 하고, 자신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침해하지 않도록 관계를 맺으면서.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기, 그냥 자신은 이런 삶이 좋고 편해서 살 뿐이다. 모두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보여주기만 할 뿐. 선택은 어차피 개인이 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책을 쓴 사람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있다. 사람 수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행복이 있을테니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보지 말고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욕망을 파악하고 사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는 글쓴이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덩달아 편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음을, 거창한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목표를 잡지 않아도 됨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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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의 불 - 한 자연과학자의 자전적 현대 과학문명 비판
에르빈 샤르가프 지음, 이현웅 옮김 / 달팽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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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에르빈 샤르가프의 자서전이다. 에르빈 샤르가프... 몰랐던 사람이다. 과학 쪽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알겠지만, 과학과는 거리를 두고 사는 내게는 전혀 낮선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이런 나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왓슨-크릭이 발견한(?) DNA 이중나선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샤르가프의 연구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그렇다면 이 에르빈 샤르가프라는 사람도 생물학 쪽에서는 꽤 권위를 지닌 과학자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책 제목 옆에 쓰여 있는 설명은 '한 자연과학자의 자전적 현대 과학문명 비판'이다. 샤르가프는 현대과학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음을 알려주는 말인데...


너무도 분화되고 전문화된 현대 과학은 전문가끼리도 소통이 안되는 경우가 많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융합이니 통합이니 하는 쪽으로 여러 학문이 교류하고 함께 작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요즘 과학풍토에 대해서도 샤르가프는 비판적일까 생각을 해보니, 그의 자서전을 읽은 결과 그는 요즘 이런 융합 과학 쪽에도 비판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샤르가프가 비판하는 과학의 방향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전문분야만으로는 더 나아갈 수가 없으니 다른 전문분야와 합쳐 나아가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현대 과학의 방향이다. 반면에 샤르가프는 작은과학을 추구했다. 그것은 각 분야로 더 쪼개지는 과학이 아니라 자연을 넘어서지 않는, 인간 자체를 넘어서지 않는 과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 책의 표지에 천지창조 그림 중에서 신이 아담에게 손가락을 내밀고 있는 장면에서 둘의 손가락은 맞닿아 있지 않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샤르가프는 바로 이 상태에서 자신의 삶, 자신의 과학을 한다고 한다. 떨어져 있는 이 공간을 넘어서지 않으려는 자세. 이것은 둘의 손가락을 맞닿게 함으로써 인간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으려는 현대 과학을 비판하는 그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또 샤르가프는 물리학 분야에서 이루어낸 과학 결과들은 바꿀 수 있지만, 인간이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생물학 분야에서 이루어낸 과학 결과물들은 비가역적이라고,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다고, 인간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고, 그 유기체들은 스스로 살아가게 된다고,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고, 그런 점을 명심하고 추구하는 과학이 작은과학이라고 한다.


그러니 샤르가프는 동키호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고집세고 시대를 읽을 줄 모르는 과학자 취급을 받는다. 


이 책은 왜 샤르가프가 그렇게 현대 과학에 비판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살아온 시대를 통해 과학자들의 위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알 수 있다.


책의 첫 시작은 원자폭탄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그 사건을 접하고 미국을 떠날 생각을 한다. 여기서부터 샤르가프가 생각하는 과학을 알 수 있게 된다.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프로젝트를 맨하탄 프로젝트라고, 엄청난 숫자의 과학자들이 모여 작업을 했고, 그것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으며, 결과는 인류에게 참혹한 폭탄 생산이었다는 것.


기술과 권력에 종속되는 과학은 진정한 과학일 수 없다는 것, 그런 과학이 이제는 인간의 몸을 향하면 인간 복제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에 대해서, 그는 과학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시 책의 끝부분에 가면 그의 생애를 한 장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는 첨단과학기술시대를 살고 있다. 샤르가프가 우려했던 부분에서 더 나아가고 있는 중. 결과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샤르가프의 예측을 빗나가게 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더 많은 고려, 더 많은 책임, 더 많은 윤리들이 과학에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 나는. 그럼에도 샤르가프의 경고, 또는 우려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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