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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윤상인.박이진 옮김, 오자키 마리코 진행.정리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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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하면 일본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두 번째 사람이다. 그의 문학이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졌다는 얘기다. 그의 일생에 걸친 작품 이야기를 한 책이 이 책이다. 대담 형식으로 그의 삶과 작품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프랑스 어법에 관한 공부와 일본어 어법에 대한 공부를 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러한 문체 덕분에 유럽을 비롯한 서구 여러나라에서도 그의 작품이 읽힐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노벨 문학상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을 탔을 때 그의 반응이 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글을 쓸 수 있겠구나. 이 말. 천상 그는 소설가이다.

 

그럼에도 부끄럽지만 나는 그의 소설을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또다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었음에도 도저히 감동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는 분명 경향이 다른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많이 번역이 되어 있는데...

 

소설을 읽지 않았다고 그에 대해서 모른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수필집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나무 아래서"를 아주 좋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 책으로 인해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 후쿠시마 사태에서도 그는 앞장서서 원전에 대한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하니...

 

이렇게 그가 사회 문제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 때문이라고 본다. 그가 진실한 친구로 사귀었던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말이다. 그는 일본의 평화 헌법을 지지하는 운동을 하고, 오키나와의 진실을 규명하는 운동도 하며, 요즘에는 원전 반대 운동도 하고 있으니, 그의 이러한 운동은 그가 중심부를 지향하는 인물이 아니라, 주변인을 자처하는 그러한 경향을 지닌 인물이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주변인이기에 세상의 중심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그럼으로 인해 그의 객관적인 시선이 작품 속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

 

오에 겐자부로는 그의 소설로도 유명하지만, 그의 아들 히카리 때문에도 유명하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 그러나 그 아들은 음악으로 자신의 세계를 이어가고, 무려 40년이나 아들의 잠자리에 담요를 덮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이 작가의 생활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이 아들을 중심으로 그의 소설이 영감을 얻어 펼쳐지기도 했다는 사실도 빼먹을 수 없는 일이고.

 

무엇에나 신중한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는 오에 겐자부로. 그의 문학 활동 50년을 맞이하여 총결산 격으로, 아니 한 시대를 정리하고 다른 시대를 준비하는 격으로 마련된 이 대담에서 우리는 한 작가의 전생애와 전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신비에 휩싸이지도 않고, 또 세상과 절연하지도 않고, 오만에 빠지지도 않고, 자신이 할 일은 작품을 쓰는 일이라는 사실을 굳게 지켜가고 있는 작가. 그의 60주년 작품 정리도 나오길 바란다. 그는 그럴 일은 없겠지요 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문학의 죽음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 시대. 문학은 결코 죽지 않음을 오에 겐자부로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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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찾는가 -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대안 노벨상 수상자들 이야기
게세코 폰 뤼프케 & 페터 에를렌바인 엮음, 김시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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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루쉰이 생각났다. 그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품고 살았던 사람.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 묵묵히 밀고 나갔던 사람. 그의 말이라고 하는 이 말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에 길이 처음부터 길이 아니듯이, 희망도 처음부터 희망이 아니다. 희망은 절망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때 나타나게 된다. 그것도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쉬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제목이 "희망을 찾는가"다. 물음표가 찍혀 있지 않다. 그래서 "너 희망을 찾고 있니? 그렇다면 우릴를 봐."라고 하는 듯하다. 너는 지금 이 시대에 절망하여 좌절에 빠져 있지 않고, 이 시대에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그것은 희망을 찾는 것이다. 희망을 찾는다면, 이미 그 희망을 찾아 떠난 사람들의 길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 길로 함께 가라. 그렇다면 그 길은 이제 갓 난 작은 길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갈 수 있는 큰길이 될 것이라고 하는 듯하다.

 

대안 노벨상, 바른생활상이라고 한다. 처음, 이 책에서 바른생활상이 본래는 노벨상으로 주어지길 바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윅스퀼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사람에게 노벨상 중에서 생태학상이라는 하나의 상을 더 만들어 주면, 자신이 그 비용을 대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벨상 위원회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더이상 망설이면 안된다고 생각한 윅스퀼은 대안 노벨상인 바른생활상을 만들어 수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벌써 몇 십년이 지난 얘기다. 이 상 덕택에 바른생활상을 탄 사람들의 활동이 알려지기 시작해 희망의 길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는 노벨상을 탄 사람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만큼 주류 세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이들의 활동이 그냥 묻혀지지는 않았다. 이것이 윅스퀼이 상을 만들어 수여한 이유이기도 하다. 상을 받은 사람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의 활동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연스레 끌게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세상은 조금씩 바뀌어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나하나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길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 이들이 만든 길들이 서로 연결이 되면 우리는 더 많은 희망의 길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런 희망의 길들을 연결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해주고 있어서 위안이 되기도 하고.

 

세상을 한 번에 바꿀 수 없다면 천천히 바꾸면 된다. 우공이산이라는 어려운 말을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 속담 중에서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 여리고 여린 물방울들이 한 방울 한 방울, 한 방울, 한 방울... 계속 바위에 떨어진다면 결코 뚫리지 않을 것 같았던 바위에도 어느 순간 구멍이 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희망의 역할이다.

 

루쉰이 말한 길도 이와 같다. 처음 시작이 어렵지 시작을 하면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희망이 현실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안된다는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할 수 있다는, 아니 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사례들을 많이 접해야 한다. 긍정적인 사례들을 자꾸 접하다보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사상가인 그람시는 전면전인 기동전보다는 국지전인 진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들의 참호를 파고, 그 참호를 중심으로 조금씩 조금씩 넓혀가는 진지전. 진지전은 빠른 시간 내에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길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 진지들이 서로 연결이 될 때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고,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는 순간, 희망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지금 세상에 희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말자. 희망은 있다. 그것을 우리가 찾아야 한다. 그래서 제목이 "희망을 찾는가"다. 희망을 찾는다면 이미 절반의 성공이다. 시작을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희망을 찾는다면, 희망을 찾아 이미 길을 내기 시작한 사람들의 뒤를 따르면 된다. 이들의 뒤를 무작정 따르기만 하란 얘기가 아니다. 이들처럼 길을 낼 수도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들의 뒤를 좇기만 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 맞게 길을 내는 일, 그것이 바로 뒤를 좇는 일이다. 그것이 희망을 찾는 일이다.

 

희망을 찾는가. 보라. 이미 희망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을 보면 희망은 늘 우리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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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전기 - 세계 사랑을 위하여
엘리자베스 영 브륄 지음, 홍원표 옮김 / 인간사랑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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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온 지도 꽤 오래되었고, 그의 거의 모든 저서가 번역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물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주요 저작들은 이미 다 번역되었다고 봐야 한다.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정신의 삶과 같은 책들을 우리는 한글로 읽을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아렌트는 영어보다도 독일어로 사유하고, 독일어로 글을 썼다고 봐야 하는데, 그의 사상들이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이 될 때도 많은 과정을 거쳤을텐데, 이 저작들이 다시 한글로 번역이 될 때 우리는 아렌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의문.

 

워낙 고대 그리스 사상부터 로마, 그리고 중세, 또 칸트, 헤겔에 맑스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편력이 다양한 사람이라서 어느 한 면으로 아렌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인데, 우리나라 학문 풍토에서 이들 서양철학자들을 전면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한 서양철학에 서양정치사상사까지 훑은 학자는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많은 공부가 아니라 그 정도는 공부해두어야 아렌트 사상의 핵심을 이해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는 읽는 나 자신의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에, 한글로 된 책을 읽으면서도 글자는 한글이되, 그 글자들이 모여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렌트 전기도 마찬가지다. 전기문이라서 쉽게 생각하고 덤벼든 것이 우선 잘못이었다. 우리는 전기문을 학생들에게 권할 정도로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하지 않나. 그냥 그 사람의 일생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접어든 이 책은 우선 분량에서부터 주눅들게 했다. 아니 무슨 책이 이렇게 두꺼워.

 

여기에 만만치 않은 가격. 이렇게 비싼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적어도 이 책에 매겨진 값만큼은 읽고서 남겨야 하지 않나 하는 부담감. 전기문을 집어들었는데, 가격과 분량에서 우선 부담을 지니고 들어갔으니...

 

내용도 만만치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 읽기가 힘들다. 이건 전기문이 아니다. 굳이 전기문이라고 한다면 출생에서 죽음까지 다루었다는, 전기문의 시간적 형식을 갖추었다는 점에서만 전기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기문 중에 평전이라고 하면 된다.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 전기문.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평전과 또 전기문과 자서전과 다르게 다가온다. 아렌트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일생에 대해 알기 위해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그것은 실수다. 곧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망설이게 된다. 끝까지 읽을 것인가, 중간에 그만둘 것인가?

 

전기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아렌트 사상 해설서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이 전기문 자체가 아렌트 사상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고, 아렌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러한 사상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렌트 사상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나온다. 따라서 아렌트의 책을 미리 읽지 않았다면 이해하기가 힘들다. 아니, 읽었다고 하더라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것은 아렌트 자신의 해설도 아니고, 아렌트의 책을 읽은 우리들의 해설도 아니고, 이 전기문을 쓴 영-브륄의 해설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읽으면 뿌듯함이 밀려온다. 해내었다는 마음. 그런 마음이 든다. 정치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은 도전해볼 만한 책이다.

 

나는 여기서 아렌트의 삶이 사회 전반의 문제에서 인간의 문제, 그리고 사유의 문제로 계속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직접 자신이 겪었던 무시무시한 세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나타난다면, 그 세계에서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인간의 조건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다면 세계속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정신의 삶. 즉 사유-의지-판단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결국 무국적자였다는 생각. 무국적자였기 때문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관찰하는 사람에 가까웠고, 관찰하는 사람이었기에, 사유-의지-판단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런 고민이 결실을 맺었으면 우리가 그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전기문이 아니라, 철학사상서를 읽은 듯한 느낌이 드는 이 두꺼운 책은, 끊임없이 우리의 머리를 괴롭힌다. 제발 생각 좀 하라고. 그냥 따라 읽지 말라고. 네 생각을 정립하면서 따라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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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팔다 - 우상파괴자 히친스의 마더 테레사 비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정환 옮김 / 모멘토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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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라고 한다. 평생을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위해 살았던 사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좋은 쪽으로밖에는 들어보지 못했다.

 

봉사의 화신.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다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 다들 테레사 수녀를 존경하고 본받으라고 한다.

 

그처럼은 살 수 없어도 그처럼 사는 사람은 존경해야 하고, 그처럼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그런데 이 책은 아니다. 테레사 수녀처럼 살면 안된다고 한다. 테레사 수녀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고 있는 책이다. 어두운 면이라고 해도, 테레사 수녀의 개인적인 비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한 것은 사실이고, 그렇게 산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은 테레사 수녀의 그러한 삶이 어쩌면 또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는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비판을 제기한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많은 돈을 기부받았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도움을 받으면서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보이고 있다.

 

최신 의료 시설이나 더 나은 시설을 만들 수 있는 기부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데서 의심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녀가 함께 사진을 찍은 사람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다른 용도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성스러운 수녀인 그녀가 몰랐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부도덕한 사람들과도 함께 어울린 그녀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고 하지만, 좋은 일을 할 때에는 동기도 중요하고, 재원을 어디서 확보하느냐도 중요한데, 이에 대해서 너무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비판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어쩌면 자신의 배경으로 활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내비치는데...

 

이 책이 테레사 수녀에 대한 다른 면을 부각시켜주는 의미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테레사 수녀의 긍정적인 면이 존재하는 것도 또한 사실이니, 어느 한 쪽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테레사 수녀의 평소 행적과, 그리고 이 책을 종합해서 읽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만,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우상화해서는 안된다는 사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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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 - 미국 흑인 시민권 운동의 어머니
로자 파크스.짐 해스킨스 지음, 최성애 엮음 / 문예춘추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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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차별이 되는 사회.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우리는 미국을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생각해 왔다. 그리고 링컨 이후에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다음에 미국은 인종차별이 없어진 나라로 생각하기 쉽게 배워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로자 파크스.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름일테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알아도, 말콤 엑스라는 알아도, 로자 파크스라는 이름은 들어본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킹 목사의 전기문을 읽은 사람은 어쩌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이름이기는 하지만.

 

로자 파크스,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흑인 여자.

 

이렇게 주로 알려져 있다. 흑백분리를 시행하는 남부 앨러바마주의 버스 탑승법에 맞서 싸운 사람.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 구치소로 끌려간 사람.

 

지금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1950년대 미국에서, 그 민주주의의 산실이라던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버스 탑승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하다못해 마시는 물까지도 흑백을 분리해서 급수대에 설치해 놓았다니...이거 어디 사람이 견딜 수 있었으랴.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력증에 빠진다는데 있다. 흑인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도 나오듯이 흑인들이 유권자 등록 운동을 할 때에도(세상에 이들에게는 형식적으로만 투표권이 보장되어 있었다. 유권자로 등록을 하는데, 백인의 보증이나 아니면 문해 시험을 봐서 통과해야만 했다고 하니) 백인들의 방해뿐만이 아니라, 이미 자리를 잡은, 또는 백인의 인정을 받고 사는 흑인들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더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지금도 좋다고 생각하는 기득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이들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수많은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로자 파크스는 유권자로 등록을 하고 흑인 사회 운동에 참여하며(그 당시는 흑백 차별도 있었지만, 남녀 차별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펼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삶의 모습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리 양보 거부로 나타나고(본인은 이제는 지쳐서,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날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버스 타기 거부운동이 벌어진다. 시작하는 이들도 반신반의하면서 시작한 버스 보이콧은 흑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계속 이어지고, 이것이 결국 대법원에서 흑백분리 탑승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내게 된다.

 

미국사회에서, 그것도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남부 사회에서 드디어 인종차별을 버스 타기에서는 해서는 안되게 만드는 법적 근거를 지니게 된다. 이렇게 되게 하는데 기폭제가 된 사람, 바로 로자 파크스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의 삶이 멈추었다면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버스 탑승에서 해결되었다고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자 파크스는 이후에도 계속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행동에 참여하며, 한 사람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하며 살아간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물방울 하나하나는 힘이 약하지만, 바위에 부딪쳐서 부서지지만, 그 물방울들이 쉬지 않고 계속 바위에 부딪치면 결국 바위는 뚫리고 만다. 이를 보여준 사람이 로자 파크스이고,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로자 파크스는 한 사람으로서의 시민이 어떻게 행동해야 사회가 바뀌는지를 보여준 사람이다.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지만 결국은 사회를 바꾸었던 사람.

 

그런데 이 로자 파크스가 2005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내게 충격이었다. 우리랑 동시대 사람이잖아. 그 때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자리를 백인에게 양보하길 거부했던 때 나이가 할머니 나이가 아니라, 한창 인생을 살아가는 중년의 나이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후 계속 사회활동에 참여하며 살아왔던 사실. 우리랑 같은 시대에 살던 인물이라는 사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 이 책의 말미에 로자 파크스는 아직도 인종차별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걱정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차별들은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그 진행 중인 차별을 고치는 일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로자 파크스을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지 한 여인의 이야기를 읽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 있는 차별을 없애는데 우리의 힘을 보태는데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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