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의 장미 -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리베카 솔닛 지음, 최애리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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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릭 아서 블레어(39쪽)에서 조지 오웰로


조지 오웰은 잘 알려진 작가다. 두 소설이 특히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동물농장] 또다른 하나는 [1984]. 이 소설들 외에도 [카탈로니아 찬가]도 많이 읽혔다. 그리고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나는 왜 쓰는가] 등도 제법 읽혔다고 할 수 있고.


전체주의에 반대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글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 작가. 그 정도다. 오웰은.


오웰 본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 역시 알지 못했다. 사실 알 필요도 없다. 나에게는 에릭 아서 블레어란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즉, 작가 조지 오웰은 존재해도, 그가 태어나서 자신의 집안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불리는 에릭 블레어란 이름은 내겐 존재하지 않는다.


한 집안의 작가가 아니라 그는 세계의 작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작가로 존재한다. 오웰이라는 이름이 영국에 있는 오웰 강에서 따왔다는 사실도, 또 오웰적인(Orwellian)이라는 말이 있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오웰 작품을 꽤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오웰의 한 면만을 알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 책 끝부분에 실린 옮긴이의 말이 내 감정을 대변한다.


‘이전에 오웰은‘시대의 양심’이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위대한 작가라는 데 동의하기는 해도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 작가였다. 그런데 이번 작업을 통해 알게 된 오웰은 감동적이었다.’(377-378쪽)


오웰을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든 책이라는 점에 나도 동의한다.


2. 베카 솔닛


한마디로 믿음이 가는 작가다. 오웰의 글쓰기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다. 솔닛 역시 마찬가지다. 솔닛의 글은 정치적이다. 우리 사회와 떨어지지 않는다.


솔닛은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다. 단순히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그런 사회 변화를 이루는데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언어를 통해서 거짓과 기만이 자리를 잡기도 하고, 언어를 통해서 거짓과 기만이 밝혀지기도 한다. 그래서 전체주의는 늘 언어를 독점하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목적이 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목적. 그 언어 이면에 담겨 있는 목적을 알아채고 그것을 깨뜨리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가 바로 솔닛이다.


그렇다고 솔닛 글쓰기가 일방적으로 정치적이지는 않다. 단순한 구호로는 화려하게 수식되어 감춰진 허위를 밝혀낼 수 없다. 밝혀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글은 우선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영향을 주기 위해선 읽혀야 한다. 글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사람들이 읽을 만하다고 여겨야 한다. 그런 글쓰기, 솔닛은 하고 있다.

솔닛은 말한다. 오웰이 그런 작업을 했다고.


3.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


이 책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때 한 작가는 조지 오웰이다. 그리고 그가 심은 장미는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우리가 흔히 ‘빵과 장미’라고 할 때 빵이 단순한 빵이 아니고, 장미가 장미를 넘어선다는 점을 알고 있듯이.


물론 오웰이 심은 식물은 장미다. 그리고 그는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또 식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글을 쓴다.


세계가 격변에 처해 있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기쁨을 찾아낸다.


이 기쁨,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요소다. 우리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긴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듯이, 삶에는 아름다움이 따른다. 이 아름다움이 기쁨을 불러오기도 하고, 삶의 희망을 불러오기도 한다.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인 [1984]를 다시 읽으면서 솔닛은 이 소설에서 오웰이 표현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읽을수록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감탄한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소설이다. 좋은 소설이다. 의미가 하나만 담겨 있지 않은, 수많은 의미로 해석이 되는 소설들. 솔닛은 리좀이라는 말을 빌려온다. 어디로 벋어갈지 알 수 없는 상태. 그러나 많은 곳으로 분기되어 나가지만, 그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존재들.


오웰 역시 마찬가지다. 오웰은 전체주의를 비판한 소설가로만 규정될 수 없다. 그는 사람이 기쁨을 얻으면서 살아가는 세상을 원했다. 획일적인 사회,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도 규제하는, 그렇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해야지 하는 규정이 많은 사회는 바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세상, 정치적인 올바름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이 지닌 성향은 인정하는, 그러한 삶이 바로 사람들의 삶이라고 한 사람.


그래서 솔닛은 이 책을 쓰면서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로 시작한다. 이미 오웰에게서 우리는 빵을 너무도 많이 얻었으므로. 오웰에게도 장미가 있음을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보여준다.


어느 곳을 펼쳐도 밑줄을 긋고 싶은 구절들이 있다. 가령 이런 구절들.


‘거짓말은 앎과 연결의 능력을 잠식한다. 앎을 차단하거나 왜곡함으로써, 또는 거짓을 유포함으로써, 또는 거짓을 유포함으로써 거짓말쟁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박탈한다. 정확한 정보는 공적이고 정치적인 삶에 참여하기 위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기 주위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상황을 알기 위해,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수적인데 말이다.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아는 것과 거짓말의 희생자가 아는 것 사이에 쐐기를 박는다.’ (296쪽)


소위 말하는 황색언론이 하는 일. 그리고 그런 황색언론을 부추기고 지원하는 일을 누가 하는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정치인들. 귀는 막고 입만 열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들을 전체주의로 가고 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행복과 기쁨의 차이는 중요하다. 행복은 마치 끝없는 햇살처럼 지속적인 상태로 상상되는 데 비해, 기쁨은 번개처럼 번득이는 것이다. 행복은 난관이나 불화를 피하는 질서 잡힌 삶을 요구하는 듯한 데 비해, 기쁨은 어디서든 불현듯 나타날 수 있다.(72쪽) ... 행복이 의존을 유도하는 마취제로 사용되는 반면, 기쁨은 사람들이 그 의존성에서 탈피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행하고 느끼는 능력의 성장이다.’(칼라 버그먼과 닉 몽고메리의 글을 인용. 73쪽)


기쁨은 이렇게 어떤 순간에도 느낄 수 있다. 그런 기쁨을 느끼는 삶을 충만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오웰이 추구한 삶도 행복하고 안락하게 오래 사는 삶이 아니라, 삶의 순간 순간 기쁨을 느끼는 충만한 삶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는 힘든 상황에서도 장미를 심는다.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다.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인 면에서 손을 떼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그는 정치와 기쁨(아름다움)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함께 존재했다. 솔닛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면이 바로 그것이다.


‘나무 심기를 대부분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오래가는 행위로 제안하면서, 그는 미래에 대해, 어떻게 하면 미래에 기여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 장미를 심은 남자는 그것이 또한 미래의 편에서는 일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05쪽)


이런 말을 통해서 솔닛의 오웰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오웰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전체주의가 자유와 인권뿐 아니라 언어와 의식에까지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다른 누구도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적시하고 묘사한 것이다. 그의 작업이 너무나 강한 설득력을 지녔으므로, 그의 마지막 작품은 현재까지도 그림자를, 아니 봉화의 불빛을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그 성과를 더욱 풍부하고 심오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작업에 불을 지핀 연료, 즉 그의 이상주의와 헌신이다. 그가 소중히 여기고 욕망했던 것, 욕망 그 자체와 즐거움과 기쁨에 대한 긍정적 평가, 그리고 그것들이야말로 전체주의 국가와 영혼을 파괴하는 그 침식력에 반대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그가 한 일은 이제 우리 각 사람의 일이다. 그건 항상 그랬다.’(359-360쪽)


이 책의 마지막 문장. 솔닛이 하는 말.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쓸데없는 걱정


설마, 이 책을 읽은 무수한 정치인들이 장미를 심지는 않겠지. 그들은 지금도 무슨 건물 앞에, 공원에 자신의 이름을 단 기념식수를 하고 있지 않은가. 오웰이 행한 방식과는 반대로. 그들은 미래의 편에 서기 위해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권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무를 심는다. 


아니, 미래에도 자신들이 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리기 위해서 심는다고나 할까. 이들의 나무심기는 그래서 오웰의 장미 심기와 다르다. 그걸 같다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나무를 심는 행위는 좋다. 그 나무는 적어도 환경 오염을 시키지는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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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2-01 11: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나의 힘이 미약하다고 느끼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때 한가지 일을 꾸준히 해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레베카 솔닛의 글 안에서 오웰과 장미 나름 아름다운 조합이란 생각이 드네요^^

kinye91 2023-02-01 12:33   좋아요 3 | URL
앞이 보아지 않는다고 여길 때 오웰이 장미를 심고 돌보았듯이 무언가를 한다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솔닛의 글이 참 좋은데 이 책도 아주 좋았어요.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 - 우아하고 유쾌하게 나이 든다는 것
노라 에프런 지음, 김용언 옮김 / 반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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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에프런. 모르는 사람? 


영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사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쓴 작가라고 한다. 연출도 했다고 하는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를 연출했다고 한다. 물론 더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이 두 작품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품이니... 


에프런이 나이들어서 쓴 수필이다. 수필이 지닌 솔직함이 이 책에 배어 있는데, 나이들어서 자꾸 잊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글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젊은 시절, 기자가 되기 위해 언론사에 들어가서 겪은 이야기를 쓴 '저널리즘에 대한 러브 스토리'는 당시 언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다.


특히 여성들이 겪는 일들, 남성이라면 결코 하지 않은 일을 하게 하는 당시의 관습이 이 글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럼에도 글이 어둡지 않아서 읽기에 좋고.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지만, 에프런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들이 많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여기에 자신이 영화를 하면서 했던 실패작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실패를 통해서 성공을 이루었다는 상투적인 주장을 하지 않아서 좋다.


에프런은 '내가 보기에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앞으로도 언제든 또 다른 실패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172쪽)라고 한다.


그렇다,. 실패는 과정이다. 한 번의 실패가 성공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수많은 실패들이 인생에서 벌어진다. 그렇다고 실패에 좌절해서도 안 된다. 실패는 또 다른 실패를 이끌 수도 있지만, 실패가 바로 끝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패는 과정이다. 그런 과정, 자신이 겪어왔던 과정을 유쾌하게 펼쳐보이고 있는 이 책. 에프런의 수필집. 


영화에서,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겪었던 성공, 실패를 통해서 한 인생을 잘 살아왔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마음을 가볍게 하는 이 책, 읽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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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이야기, 제22회 양성평등미디어상 우수상 수상작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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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결국 틀이다. 그것을 찢었다는 말은 틀을 거부했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이 책은 자신을 옥죄고 있는 사회적 통념을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왜 여자들일까? 사회적 통념을 깬 남자들도 있을텐데... 역사에서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남자들이다. 어떤 책을 보아도 남성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그리고 사회적 통념이 주로 남성에 의해서 만들어졌기에, 그들은 통념을 깰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이미 기득권을 쥐고 영위하고 있기 때문에, 그 틀에서 벗어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익숙한 사회 환경에서 그냥 살아가면 된다. 반면에 남성에게 익숙한 환경이 여성에게는 너무도 낯선, 그런 환경 속에서 지내려면 남성보다는 몇 배의 노력을 더해도 익숙해지기 힘들다.


실력이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여성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통념이 자신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제약이 많은데, 말로도 제약하고 있으니, 여러모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데 많은 고난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틀을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틀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꽃 피우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틀을 깨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이다. 사람들이라는 표현대신 여자들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많은 제약을 받았고, 그들에게는 유독 캔버스 안이라는 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떤 여자들은 남자의 이름을 빌려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남자의 이름으로 작품을 냈을 때는 찬사를 받던 그림이, 똑같은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라고 밝힌 순간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었던 일들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데...


틀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긴 스웨덴 여왕이었던 크리스티나는 너무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여성이 그럴 수 없다는 판단에서 죽은 지 약 300년 뒤에 무덤에서 나와 성별을 감정받았다고 하니, 여왕도 그러할진대 다른 여자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사례들을 굳이 페미니즘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아직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이 성별이나 또는 자신의 성적 지향에 따라서 차별을 받지 않는 사회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페미니즘은 여전히 필요하다.


미술과 관련해서 여성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고, 또 그런 사회적 틀을 어떻게 깨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는지, 그들에 대한 사회의 평가는 어떠했는지를 서술하는 이 책은 자연스레 페미니즘과 연결이 된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 생활로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예술이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을 이 책을 읽으면 실감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알려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하면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 이 책을 읽으면 왜 페미니즘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림에 표현된 모습을 부정하기는 힘들테니까.


그리고 그 그림들에 나온 모습이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알 수 있을테니까. 그런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특히 여자에게는 얼마나 불평등한 것인지를 그림과 설명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순간순간 놓치고 있었던 모습을 이 책에서는 잘 포착해서 보여주고 있다. 화가와 모델의 관계에 대해서도, 둘의 관계가 평등할 수 있음을, 그림을 완성하는데 화가만이 아니라 모델로 함께 참여한다는 사실을,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모델을 객체로 만들지 않고 그림을 완성하는 주체로 만드는 화가들이 바로 여성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남성 화가들이 여성 모델들을 객체로 또는 자신의 그림을 완성하는 도구로만 여겼던 경우가 많았음을, 그것이 문제임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또한 성폭력에 관한 그림들, 그런 그림을 통해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피해자다움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기도 하고... 그림을 통해서 삶과 사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니, 여자든 남자든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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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휴먼 - 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 자서전
주디스 휴먼.크리스틴 조이너 지음, 김채원.문영민 옮김 / 사계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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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일이 떠올랐다.


하나는 미국이 7월에 한국은 인신매매 방지 2등급(2류)국가라고 분류했다는 기사.


또 하나는 장애인차별쳘폐연대에서 벌인 지하철 타기 운동과 당시 국민의힘 대표였던 이준석과의 토론.


왜? 이 책의 주인공 주디스 휴먼이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고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장애인이었기 때문.


그가 살아온 환경이 우리나라와 겹치는 장면도 많았고, 그가 하는 말 중에 지금도 새겨들어야 할 말이 많지만, 우리가 민주주의의 선도국가라고 여기고 있는 미국이 장애인에 대해서 차별을 하는 모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랬다. 특히 미국이 지니고 있는 오만함이 이 책에 잘 나와 있어서 다른 나라들을 인권 후진국이니 인신매매 방지 2등급 또는 3등급 국가니 규정짓는 그들 정부의 행태를 인식할 수 있어서.


유엔에서 장애인권리협약을 제정해서 각 나라에서 비준을 해서 실행을 하는데 미국은 오만하게도 비준을 하지 않는다. 이 책 저자인 주디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비준을 실행하도록 움직였지만 결국 비준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은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자신들 나라에는 장애인이 없는 것처럼. 


미국은 일반적으로 유엔의 협약을 비준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 없이도 우리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84쪽)


현재까지 177개국이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했다.(2022년 2월 현재 184개국이 비준했다-옮긴이) 우리도 머지 않아 비준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때 저자가 말하는 현재는 2017년이다. )(291쪽)


이런 나라가, 수많은 총기사고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나라가, 경찰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총을 쏘아 죽이는 나라가, 성폭력 피해자들이 여전히 많은 나라가 다른 나라를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둥, 인신매매 방지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재단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하겠다고 하니,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나라다.


이런 태도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첫번째 말한 기사가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그 다음은 주디스 휴먼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교육, 이동, 생활을 위해서 투쟁했던 과정때문에 떠올랐다. 


지하철 타기 운동이 과격하다고, 왜 출근시간에 하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 방식은 비문명적(비문명이라는 말은 불법이라는 말을 에둘러 한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불법보다는 비문명이 더 안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그렇다면 문명은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고, 또 그들을 보지 않으려 해도 소리내지 않고, 보이지도 말아야 하는 걸까. 법적인 행동, 그들 말대로 문명적인, 문화적인 행동을 아무리 해도 거들떠도 보지 않으니, 소리를 들으라고, 좀 보라고 하는 행동 아닌가)이라고 몰아세운 전 국민의힘 당대표도 있었다. 그가 토론에 참여하기 전에 그들이 우상으로 삼는 미국에서 벌어진, 그리고 그런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 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읽었다면 비문명 운운하는 말을 할 수 없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장애인들이 자신들만을 위해서 무엇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과 같이 이동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인데... 그 목소리가 전달이 안 되니 눈에 보이는 운동을 하는 것 아닌가.


이 책에서 주디와 그를 비롯한 사람들이 권리를 얻기 위해서 하는 일도 그것이다. 이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 눈 앞에 나타나야 한다.


한데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이? 당시로서는 불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눈 앞에 나타날 수가 없으니... 도로를 점거하는 일, 차를 세우고 휠체어에서 내려 버스에 기어올라가는 일, 연방정부 건물을 점거하여 자신들과 대화하게 하는 일, 의사당 건물까지 80여 개 되는 계단을 온몸으로, 남들은 오래 걸려야 몇 분 걸리는 그 계단을 몇 시간씩 온몸을 써가며, 다쳐가며 올라가는 일. 그렇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런 보여줌, 나타남에 불법(비문명) 운운하면, 그건 아예 눈에 띠지 말라는 말이다.


당신들은 장애인이니까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장애인이기 이전에 그들도 사람이다. 주디가 어렸을 때 휠체어를 타고 친구 집에 가서 벨을 누르지 못하고(계단이 있기 때문에) 문 앞에서 친구를 불러 함께 놀 때, 그때 어린아이들은 편견이 없었다. 주디는 본래 그런 애다. 그냥 함께 놀아준다. 못 하는 놀이가 없다. 그런 주디에게 낯선 남자애가 '너 어디 아프니?'라고 묻는다. 


자신 앞에 나타난 낯선 존재, 다름을 아픔으로 치환해서 묻는다. 다르다와 아프다. 아픈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나하고 함께 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때 받은 충격. 주디는 그러나 이 충격을 이겨나간다. 학교 입학을 거부 당했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교사 자격증 수여를 거부당했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다. 


자꾸 그들 눈 앞에 나타난다. 혼자 힘들면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함께 그런 상황을 바꿔 나간다. 그렇다. 자꾸 보이게 해야 한다. 보게 해야 한다. 목소리를 내야 한다. 혼자만 끙끙 앓지 말고, 외쳐야 한다. 보여야 한다. 그러면 함께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렇게 지내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기에.


장애인들만 그렇게 모이지 않는다. 비장애인들도 함께 한다. 장애인이 잘살 수 있는 사회는 비장애인도 잘살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힘들게 사는 사회는 장애인들에게도 힘든 사회이기 때문에 함께 해야 한다. 이게 바로 문명이다.


또 장애인이라고 한 범주로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장애인에도 청각, 시각, 지체, 인종, 성적지향성 등등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래서 장애인 운동은 그런 스펙트럼을 존중하고 함께 해야 한다. 그들이 지닌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게.


연방정부 건물을 점거했을 때 장면이 인상적이다. 다양한 장애인들이 그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의 의견을 끝까지 들어주는 장면. 누구나 소외되지 않고 자기 말을 하는 장면. 다양한 방법으로 의사 소통의 길을 열어가는 장면들. 여기에 비장애인들까지 함께 해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그런 모습.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다.


그런 그들에게 당신들은 불법을 저질렀어. 그런 방식은 비문명적이야. 그러면 안 돼. 아무리 의견이 정당해도 방법이 불법(비문명)이면 안 되는 거야. 하면 될까? 그렇게 하기까지 들어주기나 했나? 그들의 존재를 보아주기나 했나?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저자는 클린턴 행정부에서도, 오마바 행정부에서도 일했다. 정책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실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정권이 바뀌면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한 번에 되지 않는다고, 먼 길, 오랜 시간이 걸리 거라고. 그러나 꼭 이루어질 거라고 믿기에.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포함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호하고, 미국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이 모든 것은 사안을 깊이 들여다보고, 다양한 토론과 회의를 거치며, 시간이 걸리는 견제와 균형의 방식을 따르기를 민주주의에 요구한다. 의사 결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무엇보다 우리는 사실을 검증하고, 납득할 만한 객관성을 보이며, 내 말을 듣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정부를 원한다. (298쪽)


이 말, 지금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해주고 싶다. 특히 집권을 한 사람,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불통 또는 자신의 주장을 밀고나가는 것이 소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글에서 미국을 우리나라로 바꾸면 지금 우리나라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민주주의를 시민의 힘으로 이룬 나라라고 자부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떤 정부를 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꾸 편가르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디의 다음 말을 들려주고 싶다.


사회 안에서 전체 집단이 다른 사람들부터 분리될 때 민주주의의 구조는 약화된다. 서로 거리를 두고 분리되다 보면 이해와 공감에 실패하고, 궁극적으로 불의를 초래하거나 타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상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나라로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차별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어떻게 느껴지는지 그 복잡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면 불평등과 가난의 책임을 사회 구조가 아니라 개인에게로 쉽게 돌리게 된다. 서로를 비난하는 데만 급급하다면 행동을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300쪽)


많은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장애인의 성공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 살 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나를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디가 한 말, 혹 앞이 안 보인다고 희망을 놓으려는 사람에게, 솔닛의 말처럼 희망은 어둠일 수도 있으니..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종종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300쪽)는 주디의 말도 마음 속에 새겨두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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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 키우기
한승원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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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가 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통의 자서전처럼 내용을 길게 서술하지 않고, 제목마다 짧은 글을 싣고 있다.


길어야 4쪽을 넘기지 않는 글들이 모여 작가 한승원의 삶을 보여준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 80을 넘은 나이까지의 삶.


작가의 삶을 알면 작품을 더 잘 이해할까? 아마도 이해의 폭을 넓힐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그 점을 떠나서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책을 읽으면 또다른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실을 다루고 있지만, 소설가로 만난 기억이 자꾸만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게 한다. 그러다가 그의 작품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나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뒤로 갈수록 자신의 작품, 특히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정약전, 정약용, 원효, 초의 선사'를 다룬 소설들 이야기를 읽으면 그 작품들을 창작한 배경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좋다.


여기에 작가의 가족 이야기. 이미 한승원은 한강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한승원의 딸 한강에서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이라고 불리게 되니, 아버지이자 선배 작가인 한승원 처지에서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없을 터이다.


자기를 넘어서는 자식을 보는 일, 부모의 기쁨일테고, 자신보다 더 알려지는 소설을 쓰는 자식을 보는 일은 작가로서도 기쁜 일일테니 말이다. 여기에 이름이 한강보다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규호(큰아들)와 한강인(작은아들) 역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니, 집안이 예술가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전라도 섬에서 자란 한승원, 자신은 바다에 관해서는 동시대 작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잘 쓸 수 있다고 한 사람. '목선'으로 작가로 등단했다고 할 수 있으니, 이는 젊은 시절 자신의 경험을 소설 속에 녹여냈다고 할 수 있다.


그 작품을 출발점으로 자신이 겪어왔던 일들을 소설을 통해서 풀어내지만, 참여냐 순수냐 하는 논쟁에서는 어느 쪽에도 발을 딛지 않고 예술은 진리 구현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작품활동에만 매진했다고 하는 그.


제목인 '산돌 키우기' 세상에 돌을 키울 수 있나? 하지만 한승원이 어렸을 적에 동네 형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산돌이라고 키울 수 있는 돌이 있다고, 대신 바르게 지내야 돌이 자란다고.. 그 돌을 키우기 위해 남 몰래 노력했던 모습. 그것이 비록 거짓이었을지라도... 한승원의 삶은 그 산돌 키우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산돌을 키우기 위해서 지녀야 했던 마음가짐과 행동이 결국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그러니 제목을 '산돌 키우기'라고 했겠지.


산돌 키우기라는 말을 바꾸면 진리 찾기, 진리를 행하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작품 속에 진리를 담아야 한다는 말. 작품을 통해서 인류에게 진리를 안겨줄 수 있는 작가로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


그런 모습이 나중에 역사적 인물을 소설을 통해 형상화함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그가 참여냐 순수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모습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고.


산돌 키우기 방법을 이 자서전에 나와 있는 대로 소개한다. 어릴 적 이런 거짓에 속아넘어간다면, 그 또한 자연스레 윤리를 익히게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하얀 거짓말이라고 해야 하나...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저절로 바른 행동을 하는 하는 그런 거짓말. 


"그늘진 땅속에 묻어놓고 쌀이나 보리 씻은 뜨물을 날마다 한번씩 부어주어야 하는데, 그때부터는 절대로 파보아서는 안 되고, 참을성 있게 자라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산돌을 키우는 사람은 남의 못자리 논에 돌을 던진다거나, 남의 감을 따먹는다거나, 남의 수수모가지를 자른다거나, 누구를 때린다거나, 뱀이나 개구리를 잡아 죽인다거나 그래서는 안 된다. 거지가 밥을 얻으러 오면 후하게 곡식을 퍼주기도 하고, 맛있는 것은 동무하고 나눠 먹고, 책도 돌려 보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싸우지도 말고, 양보를 하고 …… 그래야 그 돌이 쑥쑥 잘 자란단다." (72-73쪽)


이 산돌을 한승원은 자신의 삶을 마무리지어야 하는 노년에 다시 마당에 심는다. 그에게 산돌 키우기는 거짓이 아니라 삶을 완성하는 진실, 진리였다.


"망구(83세)의 나이인 나는 내 토굴 뜨락에 산돌 하나를 묻어놓고 키운다. 그 돌이 내가 저 세상으로 떠나간 다음에 보라색 자색의 유리 기둥처럼 자라기를 희망하며." (75쪽) 


작가 한승원. 그는 소설가로 등단했지만, 시도 써서 발표를 했고, (어쩌면 이 점에서 딸인 한강도 아버지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강 역시 소설과 시를 함께 쓰고 있으니) 대학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 그런 삶 속에서도 작가로서의 길을 잃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써온 사람. 그런 한승원의 삶에 대해서 이보다 더 잘 말해줄 수 있는 책은 없으리라.


이 책을 읽으면서 한승원의 작품을 찾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 한 편 찾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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