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평전 - 솥에서 난 성자
김형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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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 대종사 소태산 박중빈. 어렸을 때 이름은 박진섭, 그 다음 이름은 박처화, 그 다음이 박중빈. 오랜 구도 끝에 진리를 발견한 사람. 발견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알린 사람.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는 일제시대. 민족이 억압을 받던 시대. 민중을 구원한다는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민족 구원? 아니다. 민족이라는 한계를 정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원하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는다. 조선인, 일본인, 그리고 세계인을 구원하려는 목표를 세운다. 이것이 종교다.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는. 지금은 특정 집단에 국한되어 다른 집단을 배제하고 있지만, 종교의 처음이 그랬을까?


배제가 아니라 포용 아니었던가. 누구나 나와 같은 존재라는 인식. 그래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 나만이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깨우치는 세상. 그렇다고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강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도록 이끌어주는 과정.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소태산! 한자어로 살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를 많이 쓰던 시대였고, 호(號)라든지 자(字)라든지 본명 외에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한자를 썼으니, 박중빈 역시 자신의 호를 한자로 음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솥에 산'이라고 부른다. 솥을 생각한다. 솥이 무엇인가.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로 바뀌는 공간 아닌가. 그렇게 바뀌기 위해서는 그냥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열기와 습기 등을 견뎌내야 한다. 그것을 견뎌내면 다른 존재로 바뀌게 된다. 그것을 하는 존재가 바로 솥이다.


쌀과 물을 넣고 끓이면 밥이 되듯이 솥은 하나의 세상에서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솥에 산'이라는 이름에는 이미 다른 존재로 변한 자신을 말해주고 있으며,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변하게 한다는, 함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솥에는 어떤 존재들이 들어갈까? 소위 귀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 들어갈까? 아니다. 솥에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이 들어간다. 그냥 보통 존재들. 그것들이 솥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살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 나온다. 그렇다고 솥에 보통 것들, 귀하지 않은 것들만 들어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솥에는 귀한 존재들도 들어간다. 당시 귀하던 고기도 솥에 들어가 삶아지지 않던가. 그러면 다른 음식이 되어 나온다.


즉 '솥에 산'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있다. 약한 하층민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권층도 포함한 모두를 아우르는 진리. 그것을 설파하고 함께하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 맞게 소태산은 약한 사람들이 더 힘들어지지 않는 삶을 살게 한다. 간척사업을 해서 식량난을 해결하고 자금을 확보하려든지, 당시 가장 약한 층에 속했던 여성들도 동등한 대우를 받고, 동등한 활동을 하게 한다든지, 일제 순사 출신까지도 포용을 하며, 일본인인 경찰 고위 관료조차도 함께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다양한 종교를 아우른다. 진리의 길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 사람을 배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끌어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도록 할 뿐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깨치지 못하면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도 강조한다.


지금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소태산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엄혹한 일제시대, 어떤 사람들은 소태산이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3.1운동 당시 제자들의 태도에서도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소태산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때가 오지 않았다는 판단도 있고, 종교를 민족의 한계로 국한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있다.


이런 소태산의 모습에서 예수나 부처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들 역시 민족적 요구와 진리 추구 사이에서 민족의 입장에 서라는 요청을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민족의 경계 내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종교로 설 수 있지 않았을까.


즉, 종교는 경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경계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핍박을 받고 있지만, 핍박하는 사람들이 다른 민족 전체는 아니니, 다른 민족의 성원들과 함께 그러한 억압을 떨쳐내고 진리의 길에 들어서려고 하지 않았을까.


솥은 자신에게 들어온 존재들을 가리지 않는다. 그 각각 다른 존재들이 솥 안에서 하나가 된다. 여럿이 하나가 되는 일, 내가 어거지로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다. 소태산은 그런 일을 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가 된 법은 어디로 갈까? 일귀하처(一歸何處)라고 묻는다고 한다.


어디로 가긴. 다시 만법(萬法)으로 가지. 그 만법은 예전과 같은 만법이 아닌 변한 만법. 즉 만이지만 하나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솥에서 다른 존재로 하나가 된 존재는 다시 여럿에게로 돌아간다. 여럿에게로 돌아가는 하나. 그 만법과 하나가 바로 원이다. 일원이다. 돌고돈다.


하여 원불교의 상징이 원이다. 돌고 돎.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소태산 박중빈.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남겼던 진리의 길. 그것은 희망의 길이자 행복의 길이었을 것이다. 솥 속에서 다른 존재로 변한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소태산이 우리에게 보여준 진리의 길일 것이다.


참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평전이었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만법귀일이 아니라 만법이 만법으로,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를 만들고 더 높고 튼튼하게 쌓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와 다른 너는 몰아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함께해야 할 존재라는 것. 솥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기를 함께 견뎌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뜨거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안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소태산의 사상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종교를 떠나서 한 사람의 일생을, 고민을, 그가 한 실천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로 이 책은 큰 의미를 지닌다.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부처님 오신 날. 소태산 그의 사상과 실천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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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빈·송규 -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창비 한국사상선 20
박중빈.송규 지음, 허석 편저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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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다. 박중빈은 들어봤는데, 송규는 처음이었다. 하긴 원불교 신자도 아니고,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원불교를 창시한(?) 사람이 박중빈이라는 사실은 역사 시간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 다음을 이은 사람까지야.


종교 지도자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를 이끌어온 사상가로도 볼 수 있다. 사상가로 이들을 보면 굳이 종교라는 틀에 가둘 필요가 없다. 이 책에 실린 박중빈의 [대종경]을 보아도, 특정 종교로 국한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근본은 하나이기 때문에, 많은 종교들이 나왔지만, 그것은 방편에 불과하고, 그 종교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같다는 것이 박중빈의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이비 종교는 뺀다. 박중빈 역시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는 종교나 사상으로 보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이들의 사상이 무엇일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사상 아니던가. 그 행복이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적 부를 뜻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사상가들이 말하는 행복이란 진리를 깨우치고, 진리를 실천하면서, 그 진리를 후대에 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행복 추구를 모든 사람들이 한다면 그 사회는 조화를 이룬 사회가 될 터이다. 그런 사회를 추구하는 사상가니, 어떤 특정한 종교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이 책에는 [정전]과 [대종경]이 수록되어 있고, 정산 송규가 쓴 [정산종사법어] 중 일부와 천부경 해설이 실려 있다.


무릇 모든 종교의 경전이 그렇듯이 좋은 말, 경청해야 할 말, 실천해야 할 말들이 실려 있다. 박중빈이나 송규가 말하듯이 말보다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 그럴 듯한 말만 늘어놓아서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쉬운 말로 표현을 하고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다. 이해하는 데서 그치면 안 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실천해야 하는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누누이 이야기하고 있으니 더 부연할 것도 없고...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는, 정말 우리가 명심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말이구나 했다.


'세상에 세가지 제도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나니, 하나는 마음에 어른이 없는 사람이요, 둘은 모든 일에 염치가 없는 사람이요, 셋은 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는 사람이니라.' (288쪽. 대종경, 요훈품 38)


햐, 이 구절, 누구에게 딱 맞는 구절 아닌가.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를 훈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뻔뻔하게 잘못을 하고도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 그러니 그것이 악인 줄도 모르고, 혹 악인 줄은 알지만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만한 사람은 알리라. 그만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하니, 이들을 어떻게 제도(교육)할 수 있단 말인가. 박중빈 같은 사람도 힘들다고 했는데... 참.


그러니 요훈품에 나오는, 특별히 잘나지 않은 나같은 사람에게는 이 말이 다가온다. 보통 사람이라고 공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그 사람에게 특별한 수행법이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니.


'대중 가운데 처하여 비록 특별한 선과 특별한 기술은 없다 할지라도 오래 평범을 지키면서 꾸준한 공을 쌓는 사람은 특별한 인물이니, 그가 도리어 큰 성공을 보게 되리라.'(288쪽. 대종경, 요훈품 40. )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일, 박중빈은 도를 닦기 위해 특별히 출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에서 수행을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을 꾸준히 하는 것, 다만 그것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이 책을 읽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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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5-03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는 사람....새기고 또 새깁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되지 않아야할텐데요...ㅠㅠ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kinye91 2025-05-03 12: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러려먼 잘 들을 수 있는 귀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겠지요.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지음, 원은영 옮김 / 이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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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197쪽) 

절충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양쪽을 다 편드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어느 한쪽으로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자칫하면 작품을 완전히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에 대한 평가가 완벽하게 일치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작가에 대한 평가로 인해 작품도 평가가 달라진다면, 외적인 이유로 작품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질문에 여러 작가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답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나올 수밖에 없다. 세르비아의 독재자였던 밀로셰비치를 지지(?)했다고 알려진 페터 한트케를 저자는 비판하고 있지 않다.


한트케의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으로 인해 그의 작품이 지닌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끝까지, 아마 이 책에서 저자에게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작가는 페터 한트케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가 일방적으로 밀로셰비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면을 보면 작가에 대한 평가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 작가를 평가하는 데는 수많은 자료들이 필요할 테고, 어떤 면에서는 시간(역사)도 필요할 테다. 그러니 동시대의 작가를 평가하면서 그의 작품을 그와 연결지어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작가의 잘못이 명백한 경우는 예외다. 범법자를 저자 역시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범법자들의 사고방식이 작품 속에 은연 중에 나타날 수도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작가의 사상이 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이 경우는 판단하기가 쉽다. 범죄를 옹호하는 작품을 쓰는 작가는 거의 없기 때문인데... 그러한 작품이, 가령 나치의 학살을 옹호하는 작품이라든지, 반유대주의를 선전하는 작품, 아동 성착취를 지향하는 작품 등등은 그 작가가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허용이 되지 않을 것이고, 작가가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더더욱 허용되지 않을 테니까) 대부분의 작품은 표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니, 이런 경우는 공론을 통해서 작품을 검증해야 한다고 한다.


작가와 작품을 일대일로 대입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으니, 작품 속에 드러난 작가의 사상을 찾아내는 읽기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 많은 것들이 작품 속에서 드러날 수 있으니, 그러한 읽기를 계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때는 몰랐고 또 옳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알고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역사로부터 관점이 달라지고, 감춰졌던 것들이 드러날 수 있으니까. 작가와 작품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행적도 역사를 통해서 새롭게 밝혀진 것들이 있고, 그러한 새로운 사실들로 인해 작품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렇다고 작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떻게든 작품 속에는 작가의 사상과 경험이 녹아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다만, 그것이 작품 속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자신의 사상을 노골적으로 펼치면서 사람들을 호도하려 할 때, 아마도 그 작품은 작가를 옹호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호응을 받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외면받을 것이다.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작품들에는 무엇이 있다. 작가가 잘못된 삶을 살았을지라도 작품 속에는 사람들을 끄는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은 세월의 힘을 견뎌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으라는 메시지가 있기에 살아남는다. 그 무엇을 찾는 읽기, 토론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잘못된 행위를 한 작가를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작품은 작품 나름대로의 생명이 있으니 그 작품에 대한 평가는 여러 사람의 (동시대인과 미래 세대들) 읽기와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시대에 거스르는, 즉 시대에 맞지 않는 작품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공론장의 역할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에도 적용이 된다. 한때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작가가 잊혀지기도 하고,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던 작품이 새로운 사실들의 발견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어 비판받는 경우도 있으며,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나 작가들이 새로운 조명을 받는 경우도 있으니.


작가란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작품은 그러한 작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마찬가지다. 작품을 읽고 평가하는 독자들도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이 사는 시대의 공론장 속에서 작가와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매달리기보다는 이 작품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논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지녀야 할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작품인가 하는 점을 살펴야 할 테고. 그러한 작품은 역사의 심판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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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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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이 있다. 긍정으로 쓰는 말이다. '개천에서 용난다'와 같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개천'이라는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좋지 않은 환경이라고. '용'은 그러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존재라는 의미로 쓰이고.


자수성가 역시 마찬가지다.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사람을 말한다. 과거와는 단절된 현재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때 과거는 극복해야 할 무엇이지 자신을 이루고 있는 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지 않은 것, 떨쳐버려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이 지나온 과거다. 


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한심한 사람이라고 무시를 한다. 개천을 빠져나온 용이 다시는 개천으로 돌아가지 않듯이, 자수성가한 사람 역시 자신이 자란 환경에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곳은 지워버려야 할 곳이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에게는 이곳의 사람들, 그리고 미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자수성가란 말과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에는 이상하게도 '능력주의'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노력으로 그곳을 벗어났다는, 그러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자신이 그곳을 벗어난 것이 순전히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 때문일까? 노력이나 능력도 있었겠지만 우연이나 또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환경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신은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그러한 환상을 지니고 있으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게 된다. 자신과는 다른 무능력한 사람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 경멸받아 마땅한 사람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노력을 한다. 능력을 발휘하려 한다. 한데 어떠한 조건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우연히 그들은 자신들의 조건 속에 갇혀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곳을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디디에 에리봉이 쓴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이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노동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곳을 벗어난 그는 랭스에 살고 있는 부모님을 무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구시대에 갇혀 지낸 존재라고, 교류도 하지 않는다. 형제들과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잘났으니까. 노력을 해서 벗어났으니까. 


그러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 함께 본 사진들을 통해 다른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그렇게 무시했던 그들의 삶이 무시당할 삶은 아니었음을. 그들 역시 그런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음을. 그것이 랭스로 되돌아간 그가 깨달은 것이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뒤돌아보는 경우가 드문데, 그는 뒤돌아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무엇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까? 성소수자이자 노동계급 출신인 그는 성소수자에 대한 글을 쓰고, 성소수자에 차별에 맞선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이 편견과 모욕에 갇혀 살고 있음을,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도 그러한 환경 속에서 제약을 받고 있음을 이해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는 되는데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그것도 가장 가까운 노동계급인 가족들에 대해서는? 그는 여기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하나가 아님을. 노동계급 출신의 사람들이 계속 어렵게 살아가고, 좁은 시야에 갇혀 있는 것도, 그들이 어쩌다 극우세력에 투표를 하는 것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극우세력에 투표를 한다고 비판만 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그는 단지 개인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야 함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랭스를 되돌아보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는 커다란 조건이 두 개 있었음을, 하나는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것과 또다른 하나는 성소수자라는 것을.


성소수자로서의 삶,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이해하면서 노동계급을 이해하려는 자세는 지니지 않았음을 깨달으면서, 이제 그는 과거와는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수성가한 사람이 자신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살피는 관점을 지니게 되는 것, 개천에서 난 용이 하늘에만 머물지 않고 다시 개천에 가서 개천을 살피는 일을 하게 되는 것, 이것이 [랭스로 되돌아가다]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능력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성공한 디디에 에리봉을 통해서. 몇몇 성공한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다수의 사람들을 비판하는 관점을 버려야 함을. 그들을 틀 지우고 있는 환경을 파악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함을 저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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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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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책이 학교 도서관에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를, 영국에서 주는 유명한 문학상을 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노벨문학상을 타는 데 이바지한 작품조차도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런 책을 읽힐 수 있느냐고 도서관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운동을 하는 나라에서, 과연 이 책이 학교 도서관에 비치될 수 있을까?


있겠다. 왜냐하면 읽히기 전에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또 대부분 책을 도서관에서 퇴출시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책을 잘 읽지도, 제대로 읽지도 않으니까. (다 그렇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대부분은 그렇겠지만)


오드리 로드의 책은 꽤 번역이 되어 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블랙 유니콘]. 그리고 [자미]. 물론 오드리 로드에 대한 평전도 있다. 그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은 평등을 향한 오드리 로드의 주장을 담은 책이기에 도서관에 소장하는 것을 별로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 평등을 반대하지는 않으니까. 지금은 성소수자에 대한 불평등을 대놓고 자행할 수 없는 시대니까.


하지만 성소수자로 자라나면서 자신의 경험을 풀어낸 [자미]는 다른 대우를 받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아직도 성소수자 이야기가 전기로 나오면 그것을 읽는 학생들이 성소수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렇지만 이 책은 도서관에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저자가 전기나 회고록, 또는 자서전이라는 이름 대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서 '자전신화'라고 했는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서전과 신화를 합친 말. 그렇다. 이 책이 쓰인 때가 1980년대 미국이지만 미국에서도 과연 이때 성평등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면에서 그러한 불평등, 어려움을 겪고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이제는 성인이 된 흑인이자 여성이고 페미니즘 운동가이자 성소수자인 오드리 로드의 성장기는 거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성장하기 전에 스러져 간 사람이 많으니까. 잊힌 사람도 있고, 스스로 물러난 사람도 있으니, 이 책에서도 어린 나이에 삶을 마감한 친구 제너비브(제니)의 이야기도 있듯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화'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사람'이라는 그러한 말이 생각나듯이, 오드리 로드는 살아남아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니,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자전신화'라고 할 만하다. 그러니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더라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것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도 이 책은 의미가 있으니, '위인전' 읽히기 좋아하는 이 나라에서 오드리 로드의 이 이야기는 읽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오드리 로드의 다른 책들 (사실 읽은 책이 [시스터 아웃사이더]밖에는 없지만)과는 다르게 20대까지 삶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즉 운동가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주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그러한 운동가가 되는 오드리 로드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흑인으로 태어나 겪게 되는 일들, 흑인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온갖 차별들, 여기에 흑인여성 레즈비언으로 겪게 되는 더 많은 일들이 시간 순서대로, 오드리 로드가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일, 감정, 사랑 등이 펼쳐진다.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가는 오드리 로드를 만날 수 있으며, 그가 경험하는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사랑으로 오드리 로드는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불평등을, 불합리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고 이 책이 여성들에게만 의미가 있지는 않다. 이 책에서는 레즈비언으로 나오지만 이는 오드리 로드가 그러한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고, 성소수자들이라면 대다수가 겪었던 일들이기 때문에, 성에 따라서 이 책을 읽고 말고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고 그렇고.


이 책 제목이 된 '자미'는 캐리아쿠 말로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함께 일하는 여성들을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여자들로부터 받은 삶들이 오드리 로드를 '전사'로 이끌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러한 '전사'가 나오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떤 책을 두고 도서관에 있을 만하다 아니다는 논쟁도 할 필요가 없어야겠고.


20대 초반까지의 삶을 다룬 이 책을 먼저 읽고 오드리 로드의 다른 책들을 읽으면, 이 책에서 오드리 로드가 깨달아가는 것들이 어떻게 주장으로 발현되고, 사회를 바꾸는 '전사'로서 하는 주장의 맥락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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