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 나의 이동권 이야기 나의 OOO 1
이규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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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 장애가 있는 이규식의 이야기다.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실었다. 담담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결코 유쾌한 삶이 아니었을텐데 이 책을 읽으면 비장해지기보다는 경쾌한 느낌을 받는다. 어려운 시절을 겪었던 사람이 과거의 일을 추억처럼 풀어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순탄치 않았던 삶을 살았던 그의 삶이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런 삶도 있다고. 과연 이런 삶이 당신들과 다른 삶이냐고. 우리는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그러니 장애인이라고 특별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과 같이 살 수 있게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라고.


그렇다. 가장 힘든 사람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했다. 장애인이 불편을 겪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사회, 장애인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 장애인도 자신들의 편리를 추구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다. 그리고 이규식은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공동체라고 불리는 시설에서도 살아보고, 이동권 투쟁도 해보고, 탈시설 운동도 한 이규식.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이 과거에는 특별한 일이었을 테니, 그가 겪은 고통은 이 책에 나와 있는 구절들로 우리가 체험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와 같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아직은 미약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나 시설들이 개선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 투쟁 중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철이 있고, 저상버스 도입률이 50%도 안되고 있으며, 장애인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곳곳에 있는 식당가에서는 장애인이 화장실을 가기가 힘들다는 사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여행을 할 때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 비장애인도 여행을 할 때는 많은 불편을 겪는데, 장애인들이 겪는 불편은 더욱 심하다는 사실.


오죽했으면 그가 "나도 무계획 여행이라는 걸 해보고 싶다."(274쪽)고 했을까. 비행기도 배도 불편함이 있고,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숙소부터 시작해 이동 수단을 마련하는 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은 부분들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 더 놀랄 만한 일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교도소의 시설이다. 장애인이 생활하기에는 그야말로 감옥인 곳.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해야 하는 곳인데도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있기에는 너무도 불편한 곳이라는 사실을 이규식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으니...


공공기관부터 장애인이 불편하지 않고 이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들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시설로 생활공간을 국한시키지 말고 함께 살 수 있도록 탈시설활동을 지원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만은 않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이규식 같은 사람이 있어, 누군가 앞서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좋은 쪽으로 조금씩 발전해가고 있다. 


그가 지금껏 해온 일들이 무용하지 않았듯이, 그의 삶을 기록한 이 책을 통해서 더 나은 사회가 어떤 사회일지 생각해 본다.


장애인이 편하게 이동하고 생활할 수 있는 사회라면 비장애인 또한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사회일테니. 이규식과 같은 사람들이 계획을 짜지 않고 충동적으로 여행을 편하게 떠날 수 있는 그런 사회라면 다른 환경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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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무죄다 - 검사 이성윤의 검(檢) 날수록 화(花)내는 이야기
이성윤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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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과 꽃.


검을 칼이라고 한다면 꽃과 대척되는 지점에 있다. 물론 검사할 때 검은 칼이 아니다. 칼이 아닌데, 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칼 앞에서 식물은 약하디 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칼로 아무리 식물을 베어내도 식물은 완전히 죽지 않는다. 죽은 듯이 보였다가도 어느 때에도 다시 살아난다. 그것이 바로 김수영이 노래한 '풀'이다. 식물이다. 꽃이다.


꽃의 화려함이 10일을 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화려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참고 지낸 세월을 생각한다면, 화려함을 봐줄 수도 있다. 또한 그 화려함이 자신을 위한 것도 있지만, 다른 존재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는데, 어찌 화려하다고 비난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저자는 검찰로 오랫동안 근무했다. 검찰이 지닌 칼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꽃에 대한 책을 썼다. 그것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야생화에 대한 글들도 있으니...


그를 아내는 '꽃개'라고 한단다. 꽃 냄새를 잘 맡는 개와 같다는 뜻이다. 비하하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꽃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이리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꽃을 찾아낸다는 것은 집중력과 주의력이 있다는 뜻이다. 또 남들이 잘 보지 않는 면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꽃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고통도 볼 수 있는 사람이리라.


그런 사람에게 닥친 일들, 이 책에서는 스치듯이 언급하고 있지만, 검찰의 핵심에 있던 사람도 이렇게 검찰에 불려다니면 힘들어하는데, 법과는 무관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검찰은 그야말로 칼을 휘두르는 권력자일 수밖에 없다.


하여 이 책을 읽으면서 꽃과 식물들에게서 위안을 얻는 그를 보면서, 우리도 역시 자연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음을 생각한다.


가끔은 하늘을 보라는 말, 이 말은 하루하루 쫓기듯 살아가는 생활에서 잠시 눈을 돌릴 여유를 가지라는 말이다.


그런 여유가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지도 모른다. 힘들 때, 생활에 지쳤을 때 자신을 잠시 놓아두고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여유. 


그런 여유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저자처럼 이렇게 나 아닌 다른 대상을 보면서 마음을 내려놓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꽃을 찾아다니면서 꽃에게서 느낀 감정들, 그 꽃들이 지닌 속성,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 인간의 삶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많은 꽃과 나무 사진들, 그림들이 눈을,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이성윤의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김수영의 '풀'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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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의 말 - 희망으로 연결된 SF 세계, 우리의 공존에 대하여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콘수엘라 프랜시스 엮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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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소설을 써왔다는 버틀러. [킨]이란 소설로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나는 버틀러의 소설을 세 권 읽었는데, 그의 상상력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버틀러는 세 종류의 독자가 있다고 한다. 페미니스트, SF팬. 흑인. 모두 주류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세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는 버틀러의 삶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단 3년밖에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버틀러. 지나치게 큰 키로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는 버틀러.


그래서 어려서부터 소설을 썼다는 버틀러다. 그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소설이 주로 SF작품이었다고 하고, 그도 그런 소설을 썼다고 한다.


물론 많은 작품들이 거절을 당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를 계속 해왔다는 사실. 다른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글이 지닌 문제점을 파악하고, 계속 쓴 결과 지금처럼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는 버틀러.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하나로 규정짓기를 거부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킨]을 SF작품으로 보는데, 버틀러는 이 작품에서는 과학에 관한 표현이 거의 없기 때문에 판타지 소설로 봐야 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노예제 사회의 실상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소설을 쓴 것. 


이렇게 버틀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고 하고, 그런 결과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소설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의 작품 세계를 알 수 있는 인터뷰집이다.


더 많은 말이 필요없다.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읽어보면 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실린 시는 지금 우리에게도 유용하다. 그가 안타까워했던 미국의 현실이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고 있는 이런 현실. 답답하다.

작가에게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작가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뭐든 타자기의 먹이로 쓸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끔찍한 일이었다 해도 나중에 써먹을 수가 있죠. - P41

어떤 종류든 중요한 변화야말로 SF의 핵심이에요. - P59

저는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두 가지가 필요해요. 제목과 결말이요. 그 두 가지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냥 아직 시작할 때가 아닌 거예요. - P67

...소설을 읽고 싶어 한다면, 그 소설은 꽤 좋은 이야기, 이야기로서 독자들의 관심을 붙들 이야기인 쪽이 좋아요. 다른 수많은 소설은 물론이고 텔레비전, 영화, 스포츠, 그 밖의 다른 오락물들과 경쟁해야 하죠. - P70

SF의 멋진 점 하나는 제가 파고들고 싶은 것은 뭐든 자유롭게 파고들 수 있다는 점이에요. - P121

작가로서 제가 하는 일은 제 인생을 캐내고, 역사를 캐내고, 뉴스를 캐내고, 뭐든 거기 있는 걸 캐내는 거예요. 마치 온 우주가 광물이고 저는 그 안에서 금을 캐내야 하는 것 같죠. 그리고 물론 저는 제 글에서 제 인생의 조각들을 볼 수 있어요. 아까 이야기한 특성들로 말하자면, 당연히 저를 방해하기도 하고 저를 밀어주기도 하고 다른 일들도 해요. - P126

우리 모두가 훨씬 열악한 삶을 받아들인다면 훨씬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겁을 먹는단 말이에요. ... 문제가 실제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믿질 않아요. - P137

사람들은 정말로 하던 대로 하는 걸 훨씬 편안해하거든요. 그 하던 대로 하던 일들이 불가능해지기 전까지는요. - P139

많은 사람이 그저 우월감을 느낄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 자기 이익에 맞지 않는 투표를 하면서요. 딱 우리를 파멸시킬 근시안적인 행동이에요. - P157

작가의 글은 작가 내면의 감정과 생각과 믿음과 자아의 표현이죠. 직업 작가로서 글을 쓰는 방법을 익히기가 어려운 건 그게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기도 해요. 거절은 정말 고통스러워요. - P168

독서는 그런 식으로 우물을 채워요. 상상력의 우물을 채워주죠. 그러면 그 우물로 돌아가서 채워둔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거예요. - P195

하지만 위험한 건 우리가 더 위계적일수록 우리나 다른 사람의 지성에 귀 기울일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거예요. - P234

글쓰기의 멋진 점은 세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계속 새로운 발견을 한다는 거예요. - P243

저는 책을 한 권 살 때, 이 책에서 아이디어 하나만 얻어도 제값을 하는 거라고 말해요. 책을 한 권 쓸 때는, 제가 단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가치 있는 일을 한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영향이 좋은 것이라면요. - P254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를 때 마구잡이로 희생양을 찾는 경향이 있어요. - P288

(딜레이니의 말) 텍스트는 원래 선형적이지 않아요. 텍스트는 다중적이고, 정말로 읽는 사람,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쌍방향의 과정이죠. - P323

지혜와 선견지명을 기준으로 지도자를 선택하라. 겁쟁이를 지도자로 고르면, 그 겁쟁이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에 좌우될 것이다. 바보를 지도자로 고르면, 그 바보를 조종하는 기회주의자들에게 끌려다닐 것이다. 도둑을 지도자로 고르면, 그대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훔쳐 가달라고 내미는 꼴이다. 거짓말쟁이를 지도자로 고르면, 거짓말을 해달라고 청하는 꼴이다. 독재자를 지도자로 고르면, 그대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노예로 넘기는 셈이다. (443쪽. 은총을 받은 사람의 우화에 나온다는 시) - P443

조심하라. 우리는 너무 자주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을 내 말처럼 한다. 우리는 남에게 들은 말을 우리의 생각인 양 여긴다. 우리는 봐도 좋다고 허락받은 대로 본다. 더 나쁠 때는, 보라고 지시받은 대로 본다. 반복과 자만으로 인해 그렇게 된다. 뻔한 거짓말이라도 반복, 반복, 또 반복해서 보고 들으면, 거의 반사적으로 그 말을 내뱉게 되고, 그다음에는 우리가 그 말을 했다는 이유로 옹호하게 되고, 마침내는 우리가 그 말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이게 된다. - 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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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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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믿음이 가는 작가. 그냥 존 버거의 책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키는 작가다. 내겐 그런 작가들이 몇 있는데, 외국 작가로는 존 버거, 리베카 솔닛, 어슐러 K. 르 귄, 마거릿 애트우드 등이다. 물론 다른 작가들도 있지만.


이번에 읽은 존 버거의 책은 짧은 글들로 이루어졌다. 1부는 시간이고 2부는 공간에 대한 글들이라고 하는데, 시간과 공간은 우리들 삶을 이루고 있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으니, 시,공간에 대해 느끼는 마음들을 풀어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다른 많은 글들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 책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글은 집과 시에 대한 글들이다.


'원래 집이란 말은 세상의 중심을 의미했다. 지리적인 아닌 존재론적 의미에서 그랬다. ... 전통 사회에서는 세상의 의미있는 모든 것들은 다 실재였고, 그 세상의 밖에는 위협적인 혼돈이 존재했다. ... 집이 없으면 모든 것은 파편일 뿐이었다.

  집이 세상의 중심인 까닭은 그곳에서 수직과 수평의 선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수직선은 위로는 하늘로 아래로는 땅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다. 수평선은 다른 곳을 향해 가로질러 가는 땅 위의 모든 길을 달린다. 따라서 집은 하늘의 신과 또 땅 속의 죽은 이들과 가장 가까운 장소이다. 이런 가까움에 의해 신에의 접근과 앞서 죽어 간 이들에의 접근을 약속받는다. 또한 집은 지상에서의 모든 여행이 시작되는 곳임과 동시에 희망을 가지고 되돌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72-73쪽)


그렇다면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떨까? 버거의 말에 동의한다면 집이 없다는 것은 하늘과 땅으로 향하는 길을 잃은 것이며,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 장소를 잃은 것을 뜻한다.


집을 잃은 사람들의 상실. 그것은 단지 집이라는 물질을 잃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삶을 잃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집은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이는 시간과도 연결이 된다. 하늘과 땅에 연결이 되는 수직선은 시간과도 관련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늘을 보며 살던 인간이 땅으로 돌아가게 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순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말과 집이 잃었다는 말이 비슷해지니, 집은 무엇보다도 인간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서로 떨어짐이다. 사람과 미움은 그 열정이 서로 함께 한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은 또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과, 그런 열정들은 떨어짐 혹은 분리에 의해 시험받는다. 공간이 벌어지고 분리가 존재의 조건이 되자마자 사랑은 이 분리를 시험한다. 사랑은 모든 종류의 거리를 없애는 것을 목적한다.' (112쪽)


이 말을 집에 적용하면, 집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은 사랑과 미움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끔 자신이 미워질 때도 있는데, 자신과 다른 사람임에랴. 하지만 사랑과 미움은 한 집이라는 같은 장소에 있을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언제나 해결될 수 있다. 미움 역시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버거는 '사랑은 모든 거리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한다'(113쪽) 한다. 그렇다. 사랑은 나와 남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는, 어쩌면 그 거리를 아예 없애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이 거리 없음이 바로 '시'다. 


'언어야말로 잠재적으로 인간의 유일한 집인 동시에 인간에게 적대적일 수 없는 유일한 주거지이다. 산문의 경우, 이 집은 광대한 영토, 철도와 도로, 고속도로 등을 통해 가로지르는 하나의 커다란 나라이다. 그러나 시의 경우 이 집은 하나의 단일한 중심, 단일한 목소리로 집중된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집에 대한 선언이고 동시에 집에 대한 반응이다.' (120쪽)


마치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자, 집이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물질적 요소라면 언어는 또다른 면에서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다. 언어가 집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산문보다는 시가 더 집과 가깝다고 한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광대한 영토를 산문에 비유한다면, 이는 산문은 집을 떠나서 다시 집까지 돌아오는 과정에 겪는 일들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시는 바로 내가 있는 집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집 밖의 존재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라고 할 수 있다. 집 밖에 있는 수많은 거리를 집 안으로 들여 없애는 것. 그러니 시는 곧 집이다.


그래서 버거는 '시가 때때로 주장하는 자신의 불멸성은 ...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경험을 언어가 껴안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언어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기 때문이다. ...시는 정확히 미래와 현재 그리고 과거의 공존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약속이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나 과거에도 적용된다면, 그 약속은 오히려 확신이라 불러야 하리라.' (30쪽)고 한다.


이렇게 시 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없어진다. 시는 그래서 앞에서 버거가 말한 집과 같아진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자기만의 집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집이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적어도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집은 마련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하지 않을까? 주택정책이 여기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무를 등한시한 국가(구체적으로는 국가의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정부)는 국민을 위한다는 국가가 될 수 없으니...


이렇게 존 버거의 짧은 글들을 모아 놓은 이 책을 통해서 다시금 집의 중요성, 주택정책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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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나선 -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를 발견한 이야기 궁리하는 과학 1
제임스 D.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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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용어 'DNA'. 그것의 구조를 밝혀낸 사람,, 제임스 왓슨과 프란스시 크릭.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다. 물론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이고 그것들이 네 개로 이루어져 있다는 글을 보기도 했지만 (아데닌-티민, 구아닌-시토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별로 관심 있는 분야도 아니었고, 또 지금은 이를 기초로 더 많은 유전학이 발달해 있으니...


하지만 늘 처음이 어렵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처음이 어렵지 시작이 되면 그것을 발판으로 더 많은 연구들, 발전들이 이루어진다.


DNA구조가 밝혀지기 전까지 많은 과학자들이 그에 매달렸고, 많은 실패들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과학자들끼리의 경쟁도 있었고.


과학계가 서로 협동하는 경우도 많지만 치열하게 경쟁하는 경우도 많다. 과학 분야에서라면 누구에게라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과학자 집단 아니던가. 그러니 그들은 협력을 할 때는 하더라도 철저하게 자신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다.


논문에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또한 자기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위대한 과학적 성과를 낼 수 없지만, 집단의 능력과 노력에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 더해져야만 과학적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 책은 그 점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물론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사람 중의 하나인 왓슨이 쓴 책이라, 자신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경우가 많겠지만, 그럼에도 DNA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지기까지의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서술되어 있다.


왓슨도 자신이 쓴 글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당연하다. 자신의 관점에서 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기 위한 과학자들의 경쟁과 협력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누구보다도 먼저 DNA의 비밀을 밝혀내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이 아주 긴박하게 잘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과학적 지식이 없어도 이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왓슨의 회고록이라고 보면 좋을 책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영국으로 연구하러 가서 거기서 만난 동료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왓슨.


세상에 그가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것이 20대다. 놀라운 성취다. 하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것도 20대니 혈기왕성한 나이에 과학적 업적을 이룬 것이 예외가 아니긴 하다.


새로운 아이디어, 멈출 줄 모르는 도전 정신, 그리고 치밀함 등등이 그런 업적을 이루게 했으리라.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세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다.(생리의학상). 공동저자였던 크릭과 경쟁자였던 모리스 윌킨스.


이 책에서는 윌킨스와의 경쟁과 협력이 생생하게 잘 펼쳐진다. 그리고 빠진 한 사람. 후기에서 왓슨은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 그럼에도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나중에 왓슨은 로지(로잘린드 프랭클린을 그들은 줄여서 로지라고 불렀다)에 대해서 다른 평가를 한다. 훌륭한 과학자였다고. 아마 살아있었다면 로지도 노벨상의 공동수상자가 되었을텐데...


여기에 더해서 미국에서 DNA구조를 밝히려고 했던 폴링과의 경쟁. 그리고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냈을 때 깨끗하게 승복한 폴링의 자세. 과학자가 지녀야 할 덕목이지 않을까 싶다.


연구를 할 때는 치열하게 경쟁하되, 상대가 완성된 이론을 발표했을 때는 그를 인정하는 것. 그런 점들을 볼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물론 왓슨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라는 점을 기억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DNA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지기까지의 과정이 그에 직접 관여했던 사람의 관점으로 아주 흥미진진하게 서술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읽기에도 좋다. 추천사를 쓴 최재천의 말처럼 과학자도 글을 잘써야 한다.


글 잘쓰는 과학자가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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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2-14 2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난달에 제가 읽었던 과학동아 1월호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 님에 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kinye91 2024-02-15 11:1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왓슨이 자전적인 기록에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어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2-15 1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 좀 detail한 내용이긴 합니다만, 제가 읽었던 과학동아 1월호 내용에 근거하면 프랭클린이 DNA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51번 X선 회절 사진‘이라는 것을 찍어서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는 얘기가 나오더군요. 아마 왓슨도 자전적인 기록에서 이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나 조심스레 예상해 봅니다.

kinye91 2024-02-15 11:59   좋아요 2 | URL
네. 이 책에 그런 내용이 있어요.

그레이스 2024-02-19 0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았던 책입니다. 이젠 이 책도 과학분야에서는 고전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느 분야든 관계가 중요한 요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kinye91 2024-02-19 17:17   좋아요 0 | URL
맞아요. 관계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특히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경우를 보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