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랩소디
정운영 지음 / 산처럼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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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후반기부터 2002년 후반기까지의 정운영 선생(1944~2005)의 글모음이다.

세상 돌보는 일에 몸 돌보는 일마저 더해진 처지에 IMF탁치와 새천년은 열렸지만 광기의 암울한 세상은 선생을 도대체 편하게 해주지 못했다.

"정운영 선생 같은 분 요새는 없습니다." 라는 말밖에... 

정운영 선생의 그 투명한 천재성과 따뜻한 탁견이 요새 더더욱 그립습니다.


21p. 실로 그 이념이니 제도니 하는 화상들이 우리의 삶과 사랑에 제법 근사한 세계를 선물한 적이 별로 없다. 정의와 평화보다는 압제와 수탈이 본령이었다. ...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나는 세계화, 금융자본, 신자유주의 암흑에 허덕이는 세기말(世紀末)의 절망적인 영혼들한테 구원의 르네상스는 과연 어디 있는가?

 

32p. 자유의 방종을 누르고 평등의 여지를 넓히지 않는다면, 그래서 정의를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한테 희망이 없다.

 

36p. ...‘늙은 피라고 우리를 비웃으면 안 된다. 작은 목숨을 이어준 메마른 뿌리의 고투를 쉽게 잊겠다면, 당신들이 가꿀 목숨들과 그 뿌리의 정성도 뒷날 쉽게 잊힐 수 있기 때문이다.

 

93p. 개혁은 행사가 아닌 생존 방식이 되어야 한다.

 

95p. 준칙(rule)이냐 재량(discretion)이냐의 논쟁은 경제학계의 해묵은 숙제이다. 정부가 준칙만 정하되 재량은 당치 않다는 것이 고전파 경제학의 주장이라면, 준칙만으로는 경제가 멋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재량이 필요하다는 것이 케인즈 경제학의 반론이다.

 

100p. 정책의 실패를 처벌하면 누구도 국정을 감당하지 못한다. 반명 정책적 실수라는 이유로 항상 면죄부를 준다면 국정 운영에 견제 장치가 없어진다.

 

102p. 각국의 생산 조건이 상이한데도 이처럼 교환 기준만 세계적으로 통일하려는 폭력적시도가 세계화의 경제적 현실이다.

 

138p. “나는 젊어서 급진파가 될 엄두를 못 냈다. 왜냐하면 늙어서 보수파로 변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라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고백을 들어둘 가치가 있다. 늙어서도 세월의 때가 묻지 않은 정직한 분노를 간직할 자신이 없거든, 아예 젊어서 분노를 얘기하지 않는 편이 낫다.

 

193p. 자신의 득점보다 팀의 승패를 먼저 생각하고, 그래서 개인보다 조직을 앞세우라는 와스프(WASP)의 윤리는 누구라도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배 계층 내에서만 통용되고, 지배 국가 내에서만 유효한 규범이라면 피지배 계층이나 주변 국가들로서는 오히려 경계할 대상이다.

 

195p. 결국 있지도 않는 적을 만들어내고, 변변한 적이 아닌데도 자꾸 그 위험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반세기 전의 아이젠하워는 군산 복합체의 위협을 경고했고, 경제학자들은 항구적 전시 경제의 위험을 강조했다. 적이 없으면 가상적(假想敵)이라도 만들어서 무기를 팔아라, 그래야만 미구 경제가 수요 부족의 공황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세계화가 시대의 모토로 등장한 오늘 군비 증강 주술에 묶인 세계 최강국 대통령(조지 W. 부시)의 취임사에서 풍기는 화약 냄새는 정말 유감이다. 미국(개인)의 홈런보다 세계()의 승리를 함께 생각하자는 권고 따위는 아무래도 편치 않은 모양이다.

 

203p. (사무라이) 전국 시대의 원죄 외에 현대사의 오류도 있었다. 예의 그 반공 신드롬이 말이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석권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돌발하자, 미국은 동북아 안보와 일본의 재무장을 서둘렀다. 반공의 맹우로 군국주의 세력과 제휴한 것은 사실상 예고된 수순이었다. 재벌이 부활하고, 전범은 석방되어 정계로 진출했다. 그들의 혈관에 도도히 흐르는 파시스트 광기는 재무장, 헌번 개정, 부전(不戰) 결의 반대를 필두로 식민지 정당화 망언, 신사 참배, 교과서 왜곡 등 아주 잡다하게 터져 나왔다. 반공의 보루로서 독일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치 잔당은 반공의 우군이 아니라 역사 청산을 위한 사냥감이었을 뿐이다. 코뮤니즘과 함께 파시즘을 억누른 연합군의 독일 점령 정책은 무엇보다 스탈린과 유대인과 드골이 두려웠기 때문이고, 파시즘으로 코뮤니즘을 막으려던 일본의 경우는 미국을 필두로 이승만과 장제스 및 그 후계들의 레드 콤플렉스단견에도 일말의 원인이 있다. 정권이 아니라 나라가 문제였는데...... .

 

237p. 밥줄이 정의감보다 무거운 현실은 참으로 치사하지만, 그 치사한 현실이 우리네 삶의 집합이라면 참고 견디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238p. 중요한 것은 제도가 아니라 제도의 내실과 운영이다.

 

300p. 그래 반민주도 살고 반민족도 살지만 반미국은 살지 못하는 것이 이 나라의 역사였다.

 

323p. 그러나 국내의 언론과 식자층 일각에서는 미국인 보다 더 반미 감정을 걱정하고,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진상 규명에 앞서 미국과의 혈맹 관계 손상을 염려하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 점 변함없이 되풀이된 민족 비하의 발로이고, 사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327p. 공급자의 양식이나 소비자의 의식이 성숙하지 못했을 경우, 자유 방임 설교는 이렇게 방종과 탈선만 선동할 뿐이다.

 

335p. 정치는 수시로 음모론 따위를 퍼뜨리며 유권자를 홀립니다. 설사 누구의 음모일지라도 그 음모에 속지 않는 일이 중요합니다. 박정희 집권 초기에 부산 시민은 특별히 그 정권을 반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투표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대문 앞에 떨어진 삐라한 장이, 그러니까 거기 적힌 전라 도민이여 단결하라는 선동 한마디가 편안한 시민의 마음을 마구 들쑤셔 놓았습니다. 전라 도민의 단결을 외치는 괴문서를 부산 시민의 집에 누가 어떤 의도로 뿌렸을지는 직접 보지 않고도 능히 짐작할 만합니다.

 

347p. 무역 수지에도 잡히지 않는 세계 최대의 교역 상품은 무기이고, 그 다음은 마약이 차지한다. 1995년 유엔사회개발연구소(UNRISI)의 한 보고서는 마약 거래가 연간5000억 달러 규모의 ‘지하 경제를 형성하여 원유시장을 압도한다고 추산했다.

사람을 즉석에서 죽이는 무기와 서서히 죽이는 마약이 세계 교역의 수위를 차지하는 이 문명의 역설을 대체 어떻게 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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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질주 - 정운영 교수가 천년대의 전환기에 던지는 화두
정운영 지음 / 해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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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p. 자유에 대한 모독은 시대 해체의 징후이다. 봉건 사회가 해체되면서 지배 계급은 생계와 생산의 수단인 토지로부터 농민을 추방한 뒤,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자유'를 하사했다. 경쟁력과 유연성이라는 이름의 현대판 주문(呪文) 역시 일터에서 내쫓은 자유와 눈치껏, 재주껏, 요령껏 살아남을 자유에 대한 훈시이다. 시대의 유행인 사회 안전망이란 결국 재주와 요령에서 낙오한 사람들을 위한 나라의 적선 수단일텐데, 실로 그것은 걸인과 부랑민 수용으로 책임을 다한(?) 자본주의 역사의 구빈법 시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과 삶에 대한 불안의 극대화, 기껏 그것이 세기말 인류의 지혜가 안출한 경쟁력 향상의 첨단 비기(祕器)란 말인가?

 

23p. 오해가 없도록 못박는 말이거니와 오늘의 위기를 초래한 원흉은 단연 재벌의 방만한 차입 경영과 문어발 확장의 탐욕이며, 거기 뒷돈 대며 함께 놀아난 금융의 탈선이다. 그것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과 실책 역시 공범이다.

 

26p. 하느님의 섭리였는지 결국 로마가 굴복하고 회개했지만, 나는 그 탄압을 자초한 기독교의 배타성에 주목하려고 한다. 나만이 구원의 길이고 너는 가짜라는 그 배타성 말이다. 그것은 마치 이 지구를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계로 만들기 위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서로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는 대신, 두 체제가 서로 나든 너든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피터지게 싸우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회주의의 붕괴로 이 지구에는 자본주의의 유일 체제가 형성되었다. 사회주의라는 견제 세력이 소멸되자, 자본주의는 온갖 독선과 횡포를 자행했다. 이윤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람을 잘라도 무방하고, 자본이 뻗어나가는 데에 이웃 나라의 희생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여기 걸려든 것이다.

 

38p. 세계화는 주변부의 무장을 원천적으로 해제하려는 강대국의 국가 이기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1p. 대포를 녹여 밥을 만드는 것은 정치의 일이다.

 

78p. 국제통화기금은 달러를 중심으로 세계의 경제 질서를 편성하려고 만든 기구이며, 그 창설 의도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86p. 2차 대전이 끝난 뒤 1차 대전의 치부책을 다시 꺼내는 영국인의 기질도 눈여겨볼 만하지만, 이들 선거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과거에 대한 집요한 책임 추궁과 장래에 대한 철저한 경계이다. 선거는 현재 치르지만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묶는 노끈이기도 하고, 그 관계를 자르는 가위이기도 하다.

 

136p. 미국의 모라토리움을 막아주는 힘은 미국 경제의 실력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이고 군사력이다.

 

143p. 1976년 대자보로 가득한 천안문 광장(1976년 저우 사후 천안문 광장에서 2,600명이 사살됨)에 대고 민주 벽은 좋은 것이다. 인민이 자유로워야 하니까라고 칭찬했던 덩이 1989년 천안문 시위대를 향해서는 적에게 일말의 동정도, 먼지만큼의 관용도 보여서는 안된다고 외치면서 피를 흘리고라도사태를 진압하라고 정치국에 독촉했다. (이후 3,700명이 천안문에서 죽었다.)

 

185p. 박정희가 아니면 그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가 아니었다면 더 잘 이루었을 것이란 반론만큼 무력하기 때문이다.

 

207p.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미국 아저씨는 정식 근로자이나, 염색 공장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청년은 연수생에 불과하다. 그런 낯간지러운 궁리를 마련한 이유는 충분히 짐작한다.

 

223p. 매국노의 재산권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일제 35년의 강점이 그대로 합법적이고, 해방 이후 52년 동안의 일제 청산 노력이 말짱 헛것이었다는 증명이다. 법관이야 법률에 따라 고지식하게 판결했을 터이다. 그렇다면 그런 법을 방치한 역사가 잘못이다. 일제와 싸운 보답으로 조선족 자치주를 만들어준 중국에 낯이 뜨거웠다. 저들은 잊어도 그만인(?) 은혜를 잊지 않는데,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매국조차(!) 잊은 것이다

서노불이(恕怒不異) 용서와 분노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니며, 진정으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분노해야 한다. 분노 없는 용서는 분별 잃는 비굴일 뿐이다.

 

260p. 요즘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언론의 자유를 의심합니다. 지난날 우리를 괴롭혔던 공안 기구의 검열이나 정보기관의 압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전시대적 유물이 크게 줄었는데도 불안은 가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역설적이지만 언론 자유의 과잉 때문입니다어떤 인물이나 행위에 대한 평가만 해도 그렇습니다. 권력의 눈치를 읽으며 특정인을 듣기조차 간지러울 만큼 추켜세우거나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저질 선동성 활자 매체는 말할 것도 없고, 검열 불가의 인터넷을 비롯한 최첨단 전자 매체가 누리는 언론의 자유는 가히 언론 공해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사람 잡을 얘기를 함부로 써대고도 언론의 자유라고 뻗대는 한, 쉽사리 손대지 못한다는 세상의 약점을 파고든 영약한 언론 장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듣기 민망한 아첨과 근거 없는 독설로 독자를 홀리며, 그렇게 세를 불리고 돈을 버는 언론 간상배(奸商 輩)가 너무 많습니다. 그것도 언론이라고 우기니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301p. 4410개월 만에 석방되어 세계 최장기 복역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김선명은 내가 타협할 수 없었던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폭력에 굴복하면 그 폭력을 휘두른 자들과 공범이 됩니다. 이데올로기 그 자체는 잣대가 아닙니다.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견뎠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기쁨이었습니다라고 전향 거부의 사연을 토로하면서,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거기도 내 조국이고 여기도 내 조국이라고 대답했다. 이 시대의 치부를 도려내고 분단의 상처를 쓰다듬을 지혜와 용단을 새 정치에 바랄 수는 없을까?

 

304p. 나의 관심은 오히려 전체 이익을 위한 강대국의 책임 따위가 과연 존재하느냐는 질문과 그 대답에 있다. 역사와 현실이 가리키는 대로 이것은 한낱 조작된 신화에 불과하다.

 

305p. 실제로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구별은 강대국 편의의 레토릭일 뿐이고, 세계 경제에 대한 공헌과 자국 이익의 추구 역시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동의어에 불과하다.

 

337p. 저항에는 역설이 따릅니다. 자유와 평등과 우애를 구호로 내건 프랑스혁명은 인류 역사에 가장 치열한 저항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저항으로 혁명에 성공한 뒤 지배 계층은 즉시 더 이상의 저항을 불법으로 단죄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곧 저항과 저항 거절의 반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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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테를 위한 비망록
정운영 / 한겨레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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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기억을 지운다는 "레테를 위한 비망록"이 책이름인데 그 안 머리글 제목은 선행의 기록을 알린다는 "에우노에를 향하여" 이다.

고 정운영 교수가 잊지말자 하는 1995년 김영삼 문민정부의 진행부터 1997년 IMF 발발 직전까지의 기록이다. 개혁과 과거사 단죄의 후퇴를 포함해 시작만 호기로웠던 용두사미 문민정부의 한계와 OECD 가입 후 어려워져만 가는 나라안팍 경제를 걱정하고 있다.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 따른 이념적 돌파구 모색과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67. 1980년대 후반 단군 이래 초유의 국제수지 흑자가 투기 광풍을 몰고 왔다면, 90년 초반의 호황은 투자와 소비의 급격한 '초과수요' 열기를 불렀다. 확실히 우리 경제는 흑자에 약하다. 가계든 정부든 항상 적자에 시달리다 보니 적자에는 제법 단련이 되었는데, 어쩌다 흑자를 대하면 어떻게 주체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딱한 체질이 되어버린 탓인지 모른다.


69. 투기와 독점은 시장의 실패 가운데 그 천민적 속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요소이다. 투기가 집과 땅을 휩쓸어 사회가 온통 망국명을 앓고, 분신 자살과 신도시 건설이 뒤를 이은 것이 불과 수년전이었다. 


136. 저의 전망으로는 '당분간' 한국 사회에 혁명과 같은 획기적인 변화가 오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마르크시즘을 비롯한 진보적 대안 탐색이 반드시 어떤 성과가 기대될 때만 의미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폐기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 예수의 말씀이 당장 실현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복음전파의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220. 색깔 유령은 계급적 적대를 부추기며 미구에 '급진' 유령으로 변신한다.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는다는 자신감의 반영인지 사회의 보수화 추세는 도처에 역력하며, 누구도 그런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개혁이 보수의 목을 비틀어 주머니라도 터는 듯이 비뚜로 선전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여권이 내놓는 개혁은 개량이고 개선이지만, 재야가 부르짖는 개혁은 불온으로 덧칠되곤 했다. 지난날 얼마나 많은 독재자가 민주주의 '형식'의 요구조차 불온으로 단죄하며 권력 유지의 명문으로 악용했던가?


284. 대학의 지식은 "대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역설이 그것입니다. 생태학자 배리 코머너가 분명하게 지적했듯이 "올바로 제기된 질문은 잘못 제시된 답변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질문이 바르면 언제라도 해답을 찾을 가능성이 있지만, 질문 자체가 잘못되면 해답에 이를 기회가 영영 없기 때문입니다.


290. 지식인이란 거부하고 저항하는 사람이다.


307. 일찍이 마르크 블로흐가 갈파했듯이 허위란 그 나름대로 하나의 증거가 되는 법이어서, 허위를 방관하면 그것이 곧 역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 재산을 기증하고 작고한 김철호 선생은 "뼈에 무슨 색깔이 있겠느냐"면서 분단 희생자의 진혼과 위령을 당부했다.


317. 정신이 왜소하면 사람과 사회의 관계가 한층 피폐해진다. 계급과 민족의 절박한 현안은 애써 외면한다고 해서 소멸될 대상이 아니기에 우리는 실종된 담론의 복원에 열중해야 한다. 사회 정의의 실현과 분단 해소가 결코 포기할수 없는 과제라면, 거대 담론에 집착하고 그 열망을 간직할 의무가 우리한테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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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의 전망대
정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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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교수의 다섯번째 수상집이다.
우리는 김영삼 문민정부에 들어섰고 금융실명제 시행, 공직자 재산공개, 전교조 교단 복귀가 있었다.

세계는 동구 사회주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의 맹위와 미국의 거침없는 전세계 할거가 목도된다.
가트가 저물고 우루과이라운드에 이어 각종 라운드의 제기, wto체제,
일본을 통한 선학습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길들이기의 가속과 쌀시장 개방 문제
그리고 사회적 부의 증가에 따른 우리 내부의 빈부격차 문제 ......
오늘에 비춰본다면 다른 분야는 진도도 좀 나가고 개선도 보이지만 오직 북미관계와 남북문제 분야에서는 우리의 중,러 수교와 김일성의 사망에 이어 북-미는 꼬여가고 지금까지 상황 악화에 극단 대결의 모습이다.
독립운동을 한 김일성이 일정때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를 어찌 생각했을까 라는 글대목에선
지금 봐도 상당히 복잡한 인식전환을 일으키게 된다.
진정 정운영 교수의 혜안과 지혜가 그립다.   
다음 책은 ‘레테를 위한 비망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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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언어
정운영 지음 / 까치 / 199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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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부터 1993년 8월까지 당시 50대에 들어선 정운영 교수가 발표한 칼럼의 모음집니다.

1986년 한신대학교에서 해직된 정교수가 서울대, 고려대에서 정치경제학을 강의하면서

1988년부터 1999년까지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했으니 

한겨레신문 포함 다른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을 모은 그분의 글모음 네번째이다.

(광대의 경제학 -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 경제학을 위한 변명 - 시지프의 언어)

 

책 "시지프의 언어"에 담긴 세월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출범하고 이후 김영삼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문민정부를 막 표방했고 개혁의 드라이브를 걸었다. 미국은 아버지 부시가 걸프전쟁 이후 (경제문제로) 재선에 실패해 틀린턴이 당선되어 취임 직후까지의 시대이다. 경제적으로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1991.12.31.)로 서로 협조해오던 서방 자본주의 국가간의 이해가 대적할 상대를 잃고 자기 내부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며 한편으로는 서로서로 유리한 짝짓기를 통해 EU, 나프타 등 지역경제 블록화를 이루어나가던 시절이다. 이어서 우리 나라에게는 쌀을 포함한 농산물과 서비스 시장에 대한 개방압력과 입김의 파고가 드높고, 닫혔던 중국과 정식수교(대만과 단교)로 중국산 물건의 수입이 급증하던 시기로 선진국과 중국의 사이에 끼여 앞과 뒤를 모두 우려하며 북한의 핵개발까지 걱정하던 우리 처지의 시기이다.

 

뜨거웠던 87년 6월과 군복과 양복을 반반쯤 걸친 보통사람의 시대를 지나 90년대의 초반에 들어선 우리 사회는 1980년을 전후하여 경제적으로 38선 북쪽에 대한 어느 정도 우위를 느끼고 있었고, 풍요의 단맛을 소비로 향유하며 우리 사회 내부의 식어가는 "(혁명이든 개혁이든) 혁의 열기'와 (중간쯤으로 불려짐에 자위하듯)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보수화가 사뭇 뚜렷해지고, 식자우환 이라고 정교한 통제와 한단계 발전된 내외 자본의 꼼수와 대응에 대해

정치경제평론가로서 사람, 민족, 나라의 곳간을 걱정하는 정운영 교수의 글들이다.

 

정운영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237p. 나는 '문명의 마지막 언어는 혁명이다"라고 주장한 헤르첸의 당돌한 선언에 동의한다.

다만 그 혁명은 역사의 필연이 가져오지 않고

인간의 간고한 노력과 투쟁이 이룬다는 조건이 붙붙는다.

......

다시 한번 역사가 정녕 우리의 온몸으로 만들어내는 노동과 투쟁의 소산이라면,

애초에 필연 따위를 상정해서는 안 된다.

...... 

구원은 예기치 않는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의 시)

끝까지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 절망 다음에 예비된 절차는

필경 새롭게 출발하는 희망일 수밖에 없다."

 

이하는 두고 2021년 지금에 봐도 좋은 대목의 글들이다. 

 

32p. 실제로 돈을 다치는 데 대한 반발은 벼슬을 잃는 데 대한 유감보다 훨씬 더 집요하며,

그래서 그런지 축재에 대한 수술이 정치권력의 개혁보다 한층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35p. 돈과 권력은 이 사회에서 자신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가장 편리한 도구이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는 길은 각기 다르다.

그 두 길을 한꺼번에 걸으려는 것은 욕심이고, 그 욕심이 지나치면 재앙을 부른다.

 

36p. 아무리 제도를 바꾸어도 사람이 그대로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반문은 정당하지만,

반대로 구조는 그대로 두고 사람만 다스리려는 생각도 크게 무모하다.

 

48p. 재벌의 처지에서 소유는 목적이고, 문어발은 그 수단일 따름이다.

 

56p. 영국의 속담에 바보는 여왕에게 키스해도 좋을 때 하녀와 키스하는 녀석이란 말이 있다.

 

56p 카톨릭노동청년회(JOC)를 창설한 카르딘(Cardijn) 추기경은

"병든 붕어를 살리기 위해서는 고기에 주사를 놓기보다 어항의 물을 갈라"고 가르친 적이 있다.

 

59p. 성역이라는 허깨비도 피치자를 조종하기 위한 은밀한 폭력의 행사라는 점에서는 한치의 변함이 없다.

 

67p. 정부가 걱정해야 할 대상은 반대세력의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지지세력의 실망이다.

 

77p. 통일의 경제적 의미는 한마디로 민족경제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에 있다.

 

78p. 이탈리아 마치니는 민족이란 민중을 위해, 민중 위에, 민중에 의해서만 구될 수 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에 못지 않게 나는 국가의 명예는 장점을 자랑하는 데보다는 결점을 제거하는 데서 더 크게 좌우된다는 그의 충고를 존중하는데,

 

83. 허버트 스펜서는 언젠가 의회는 양심에서뿐만 아니라 지능에서도 그 나라의 평균보다 뒤진다고 무엄한 언사를 농한 적이 있다.

 

86p. 부패와 좌절의 종말은 그야말로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정치는 본래 더러운 것이고, 그래서 더러운 녀석들만이 덤벼드는 것이란 선입견 위에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고결한 사람의 덕성이라는 역설이 상식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러니 더욱더 더러워질 수밖에!

 

97p. 개량이든 혁명이든, 그 방법이야 어떻든 간에

역사는 현존 질서에 대한 조반(造反)으로 발전되어왔다.

조반의 포기는 곧 정체와 퇴영의 지속일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108p. “우리는 희망에 따라 약속하고, 공포에 의해 실행한다.”_라 로슈푸코 17C 프랑스 문사

 

118p. 누가 어떤 문제를 자주 거론한다고 해서 그가 그 문제의 가장 유능한 해결사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165p. 나는 미국 백화점에 잇는 물건이 그대로 한국 백화점에 있기보다는,

미구 백화점에 있는 물건 가운데 한국 백화점에 없는 것이 있어야 정상이라는 고루한 생각을 여전히 갖고 있다.

 

167p. 숫자란 참으로 냉정한 질서의 산물이지만,

때때로 대중에게 최면을 강요하는 이상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188p. 불리할 때는 예외를 휘두르고 유리할 때는 원칙을 쳐드는 강대국의 그 편리한 처신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한마디로 그것은 앞으로 내세우는 자유무역의 구호와 뒤로 챙기려는 실속은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232p. 여기가 바로 노동자계급의 보수화 징후를 추리는 블랙 홀이다.

부르주아 통치에는 채찍과 당근만이 아닌 노동자가 승복할 만한 어떤 부분적 합리성이 도사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복수 정당제도, 언론의 자유, 견제기구의 존재 등 이른바 일반민주주의의 기본절차들이 그 부분적 합리성을 보증하는 장치가 된다.

 

244p. 진주가 비싼 것은 물속에서 따냈기 때문이 아니고,

진주가 비싸기 때문에 사람이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지난 세기의 어느 경제학자의 주장은 여전히 옳다.

따라서 가격이 오르면 상품이 가게를 채우리라는 옐친의 희망도 이 관점에서 보자면 전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최소한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즉 값이 더더욱 오르기를 기다리며 물건을 진열대 아래에 숨기는 인간의 이기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게는 이 점이 무척 불안하다.

 

252p. 내수의 둔화와 수입 감소로 자꾸만 쌓이는 흑자의 고민을 해소하는 데는 군비 지출이 그만이다. 그게 바로 제국주의 아닌가?

 

262p. 자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각국의 노동조합이나 정부를 일일이 상대하기보다는

브뤼셀의 유럽공동체 본부의 몇몇 유로크랫(Eurocrat)을 조종하는 편이 한결 수월할 것이다.

이을테면 노조가 노동시간을 줄이라고 대들어도,

자본으로서는 유럽의회의 결정사항이니 자의로 들어줄 수 없다는 핑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282p. 자유의지의 방종이 자유의지의 파괴보다 훨씬 낫다는 메시지만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 현대 문명이 강요하는 시계장치처럼 정확한 세뇌공작 앞에 인간의 생존이란 빛과 향기가 제거된 오렌지 조각이거나,

실험대 위의 모르모트 신세에 지나지 않는다는 큐브릭 감독의 고발은 실로 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293p. 연옥의 시련은 천당 약속이 보장될 때 의미가 있는 법이지,

그 시련 뒤에 다시 지옥이 온다면 전혀 견딜 필요가 없는 것이다.

 

352p. 드브레의 소설 불타는 설원에서 (칠레) 아옌데는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네. 다만 절망에 이르도록 방치하는 상황이 있을 뿐이지라고 토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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