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공사 하시는 분들이, 비가 와서 오늘 작업은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퇴근하셨다. 뭐, 일이 조금 늦어져도 일하시는 분들이 가시니 괜히 시간이 생긴 것 같은 느낌... 이때다 싶어 책 좀 읽어볼까 했는데,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은지 며칠이 되었으니 지금 이런 순간은 새삼스럽지 않다. 다만, 눈으로는 책을 좇고 있으나 머릿속으로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무섭게도 활자조차도 들어오지 않는다. 보통 이런 경우는, 내용은 안 들어와도 기계처럼 활자라도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닌가?

신간이 무수히도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도, 굳이 한번은 신간에 눈 돌리지 않고 이미 읽었던 책을 읽고 싶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
새로운 책 읽기도 모자란 시간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찾고 싶었던 건지 왜인지, 굳이 예전 책을 다시 들춰보고 있다. 무심코 읽었던 책, 뜻밖의 느낌에 좋은 여운을 남겼던 책, 적어도 내 책장에서 방출하지는 않겠다고 마음먹게 하는 책. 찬찬히 몇 권 남지 않은 책장을 살펴보다가 눈에 들어온 책이 한권 보인다...

어렵게 구해놓고 잠깐 잊고 있었다.
10년도 더 된 책이니 팔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읽고 싶어서 여기 저기 검색하다가 우연히 상태 좋은 책을 발견해서 득템했다. 물론 최상급은 아니어도 아직 중고로 판매되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가격도 천차만별. 적당한 중고가격 같으면서도 정가의 두 배 이상인 것도 있는 걸 보면, 이 책을 나만 찾는 건 아닌가 보다. 수요는 많으나, 공급이 적으면 값은 또 오르기 마련... 이 세계도 역시 그런 것이겠지.

순간, 이 책을 한권 더 구입하고 싶다는 마음에, 중고시장이 아닌 출판사로 전화했다. 너무 오래된 책이긴 하나 그래도 출판사 창고 어딘가에 박혀 있는 때 묻은 책이라도 있을까 해서... (퇴근 시간 다 되어 전화 드려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재고 문의하려고 전화했다가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개정판 예정에 있단다. 올레~!!
편집자분과 잠깐 이야기하다가 알게 된 이 반가운 소식에 어쩔 줄 몰라 혼자 팔딱팔딱... 현재 가을쯤에 계획이 잡혀있고, 내용은 변동이 없으나 겉모습은 바뀔 것 같다는 말, 일정에 관련된 선생님(작가분)의 답변이 아직 확정되지 않아 일정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 하지만! 가을에 나온다는 것은 확정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담당자분께, 너무 읽고 싶었던 책이라 얼마 전에 어렵게 구해서 읽고 한 두 권쯤 더 구하고 싶어서 재고 문의한 건데, 개정판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살짝 서운하다고 말했다. 개정판 나올 줄 알았으면 예쁜 책 만날 시간을 좀 더 기다리는 건데, 기다리다, 기다리다, 얼마 전에 구한 거여서 좀 아쉽다고...
그랬더니 담당자분이, 개정판 나오면 구판이 더 귀해질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살짝 웃으신다. 나도 속으로 책테크라도 하면 될까 싶어, 혼자 웃었다. 어찌되었든 개정판이 나온다니 마냥 기다리는 그 두근거림이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다... 옆에서 통화하는 내용을 그대로 듣고 계시던 엄마가 하시는 말씀, “성질 급한 사람이 술값 먼저 낸다더니... 쯧~”
그러거나 말거나, 좋은 걸 어떡해... ^^




가끔 생각해보면 읽고 싶은 책이, 읽고 싶을 때, 더 이상 판매되지 않는 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많이 속상하고, 안타깝고, 더 찾아서 꼭 읽어보고 싶은 간절함이 생긴다. 반대로, 없으니까 읽지 못한다는 마음에 급포기가 되면서, 항상 보관함 속에 머물러 있는 책으로 자리하게 되기 쉽다. 세상 돌아가는 게 다 그런 거니까 이해도 되긴 하지만, 안타까운 것도 사실...

황경신의 이 책을 득템했을 때가 생각난다...
금방 1쇄본이 품절되고, 더 이상 판매하지 않던 상태에서 증쇄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2쇄본이 내 손에 들어왔다지.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두에게 해피엔딩>은 구판 2쇄본이다. 지금은 새옷을 입고 예쁜 책으로 이렇게 자리하고 있는 모습에 혼자 흐뭇한 마음으로 푸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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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2013-06-12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다 비슷한가 봐요.ㅋㅋ
전 다행히도 모두에게 해피엔딩을 당시에 사서 읽고 곱게 모셔뒀는데.....반대로 개정판이 나왔다고 하니...또 몸살이 날것 같네요.
미치도록 사대는 책이 이젠 처치곤란 지경인데..;; 그와중에 이미 있는 책을 껍데기 바꼈다고 또 사지 못해 안달인건지.
그래도 ............가지고 싶네요.ㅠ_ㅠ

2013-06-12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5월 한 달 동안 책을 300권쯤 내다 팔았고, 200권쯤 버렸다. 팔아도 판 것 같지가 않고, 버려도 버린 것 같지가 않은 이 이상함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지금 방에는 15칸 책장 하나뿐이다. 거기에 채워진 책이 내가 가진 책의 전부이고, 조금 더 정리해야 할 책들이 방의 한 구석에 쌓여있을 뿐...

그리고 지금 내 가장 가까운 곳에 쌓여있는 책은 두 줄 정도?
한 줄은 읽어야 ‘할’ 책, 다른 한 줄은 읽고 ‘싶은’ 책... 당연히 읽어야 할 책보다 읽고 싶은 책의 탑이 더 높다. 읽고 싶으나 읽을 수 없었으니 탑은 줄어들지 않았고, 그 사이에 읽고 싶은 책은 더 늘어났으니 탑은 더 높아졌다. 다행히도 읽어야 할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몇 권이 빠지면 몇 권이 다시 채워지는 정도... 하지만 분명한 건, 속도가 너무 더디다는 것. 서평도서 먹튀한 것도 있고(미안), 약속한 날짜보다 많이 늦은 것도 있고(이것도 미안). 그런데도 책이 사고 싶다. 일주일 동안 책바구니에 넣어두었던 책의 목록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사고 싶다, 사고 싶다, 사고 싶다... 싶은 간절함으로...
결국은, 지금 결제해야만 했다. 피츠제럴드 에코백도 갖고 싶고, 사고 싶은 책은 많으니 5만원이 넘는 건 기본이고... 정말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 계산하고 구매하는 마음. 그러니까, 읽자... 읽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
2년쯤 전에 출판사 이벤트로 도서 3권을 받았는데, 다른 도서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이 책만 눈에 보인다. 그나마 이 책은 바로 눈에 보여서 다행이다. 서평 때문에 2년 만에 꺼내어본 이 책의 모습이 참 안습이다. 책의 삼면이 바래져버렸다. 나머지는 양호해서 안심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 그에 따른 뇌의 퇴화나 기억력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인이라고 할 나이는 아닌데, 정말 기억력 때문에 심하게 스트레스 받고 있는 요즘, 이 책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뇌의 이야기나 기억력에 대해 조금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다 싶다. 저자의 전작,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와 함께 읽으면 더 좋을 듯하다. 이 책도 빨리 책장 어디선가에서 찾아내야겠다.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을 읽고 한동안 쇼크 같은 멍함이 있었다. 아주 짧은 단편들이었는데, 너무 시간이 없던 와중에 읽었던 상태였던지라 이야기들이 전하고자 하는 게 뭐였지? 하는 의문으로만 가득한 채 그 시간을 지나왔다. 분명 책의 내용에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나는 그 이후의 시간을 <어젯밤>이란 책에 할애하지 못했었다. 안타깝게도... 한참 전에 읽었던 터라 지금에 와서 다시 들춰볼 부지런함을 찾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장편이라니 조금은 안심하고 만나볼 수 있겠다 싶다. <가벼운 나날>... 제목이, 표지가, 작가의 전작으로 만난 느낌을, 이번에는 제대로 즐길 수 있기를...


출간 때 잠깐 고민을 했더랬다. 배수아 번역으로 사야할지 공경희 번역으로 사야할지... 같은 시기에 같이 나온, 출판사와 번역가와 디자인을 달리해서 나온 이 책을 보고 잠깐 놀웠고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가 원서를 읽을 수준이 안 되니 나는 전문 번역가의 손을 거친 <눈 먼 올빼미>로 빠른 선택을 했다. 소설가의 번역이란 맛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소설가의 분위기가 들어간 느낌 보다는 깔끔한 느낌을 맛보는 걸로!




역시, 이정명! 하는 감탄사가 나올까? 작가의 전작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으니 기본적인 신뢰감을 준다. 특히나 이번 책의 내용은 참 매력적이고,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믿음으로 선택할 수 있게 만든다. 이 소년이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함을 나도 볼 수 있을까, 아마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읽어 보고 싶어진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마음속으로 깊게 들어오는 작가의 글이 그리워질 무렵, 딱 맞춰서 나온 듯하다.




<28>
숫자만 바라봐도 손이 저절로 가게 하는 정유정의 신간이다. <이별보다 슬픈 약속>을 읽을 때는 잔잔한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더니, <내 심장을 쏴라>에서는 심장의 떨림과 울림을 같이 주더라. 그리고 <7년의 밤>을 읽을 무렵, 나는 아마 정유정의 전작들을 읽지 않았다면 작가가 남자인줄 알았을 것이다. 그만큼 어떤 힘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여자 작가니까 힘이 없다, 하는 말이 아니다. 그동안 고정관념처럼 가져왔던 남자 작가 특유의 분위기를 나는 <7년의 밤>에서 느꼈었다. 그래서 이번 신간 역시 성별을 떠난 어떤 파워를 느끼고 싶었다고 말하는 게 어울릴 듯하다. 예판 기간인데 계속 미루던 것을 알사탕 준다니까 저절로 책바구니로 들어간다. 날짜 잊지 말고 챙겨 구매해야겠다.



구간 몇 권 더 넣었더니, 책값이 후덜덜... 그래도 이 녀석들로 하여금 마음이 놓아진다면, 처방받은 약이라 생각하고 물과 함께 넘겨보련다...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대출해 온 책을 펼쳐봤더니, 쩍벌이다. 그냥 지나쳐도 될 것을 끝이 뾰족한 목공풀로 틈새를 곱게 발라주고 두꺼운 사전으로 몇 시간 눌러주었다. 새책처럼 반짝이지는 않아도, 더 이상 쩍벌이로 그 모습을 험하게 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마음이 놓아진다. 내 책도 아닌데, 가끔 도서관 책에 이런 시술을 해줄 때가 있다. 곱게 살아야지 싶어서, 이렇게 해놓으면 다른 이들도 잘 해놓을 것 같아서...


5월만 지나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몸도 마음도 좀 쉬어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니네...
몸은 천근만근 피곤하고, 오른팔은 거의 마비 직전까지 간 상태로 너무 아프고, 잠은 자는데 자는 것 같지 않은 몽롱함 역시 계속이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뭘 하는지 모르게 하루는 금방 가더라. 밤에는 머리만 닿으면 잠이 쏟아질 것 같은 날들의 연속이다. 괜찮아지겠지 싶은 주문을 넣어본다. 괜찮아지겠지...

살던 대로 살자. 평소에 안 하던 짓 하면 그것도 오지랖이다. 원래대로, 나 하던 대로, 게을렀던 나 그대로, 살자고...
다섯줄의 결과물 앞에서 책을 즐겁게 읽고 싶다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밤을 만나면서 오늘을 마무리... 내가 읽고 싶은 책과 내가 읽어야 할 책들 사이에서 여전히 허우적대더라도, 적어도 내가 선택한 이 책들 앞에서 미안해지지는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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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2013-06-12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살때마다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시는...구단님.ㅋ
이번에도 역시나 제가 보고 싶은 책 검색하니 님께서 올리신 페이퍼가...ㅎ
더 놀라운것은 페이퍼에 등장하는 책들이 땡쓰투를 하면 다 된다는거!!!!! 존경합니다.ㅋㅋ
대부분 담아놓고도 안사는 경우도 많고...혹은 다른곳에서 구입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러는데 늘 땡쓰투가 되어서...늘 감사하답니다.^^
이번에도 땡쓰투 누르고 갑니다.^^

2013-06-12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미브 : 아무것도 없다
김신형 지음 / 도서출판 오후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재밌네! 끝까지 다 읽어보니, 부제가 말하는 의미가 뭔지 알겠다. 그래도, 아무 것도 없을 그곳을 다시 찾는 그들이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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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플라워 - 개정판
진주 지음 / 신영미디어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일단은 구매. 그냥 읽어보면 된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동주와 사라, 로이. 이들을 떠올릴 때 느꼈던 그 감정과 푸르른 표지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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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 - 제5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43
김이윤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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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선고를 받은 엄마를 둔 딸이 수학 문제집을 들여다보는 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소설책 같은 게 머리에 들어올 것 같지도 않고, 책상 위에 책만 여러 권 뽑아 놓았다. 정신을 다른 데 쏟고 싶어 만화책도 추리 소설도 꺼냈지만 한 쪽을 다 읽기도 전에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다. 눈과 귀를 붙잡아 두는 영화나 미국 드라마, 일본 드라마, 대만 드라마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것도 효과가 업을 게 분명했다. 뉴스가 의미 없다는 건 초저녁에 이미 확인한 일이고, 이런 밤에는 다만 만나는 일만이 필요할 것이다. 나 자신과 마주하거나 엄마와 독대하거나.

책을, 잘못 골랐다.
내가 일방적으로 엄마를 거부(dis-)하면서 속으로 미움을 쌓아가고 있던 요즈음, 그리고 오늘이다. 예약해놓은 건강검진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약간 서먹한 시선을 모른 척 하면서 나란히 병원에 들어섰고, 엄마는 검진실로 나는 대기실에 자리했다. 한번 가면 기본 세 시간은 기다려야 하기에 급하게 방바닥에 널려있던 책 한권을 가방에 넣고 나왔는데 하필이면 이 책이다. 들고 나갈 때는 몰랐는데, 다 읽고 나니 눈물 섞인 욕이 나온다. 정말 ‘제기랄’이다. 기다리고 있는 시간동안 나는 이 책 한권을 다 읽어버렸고, 대기실 구석의 작은 의자에 깊이 파묻혀 혼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삼키고는 했다. 오늘 아침, 언짢은 마음에 ‘엄마, 혼자서 가.’라는 유치한 말을 내뱉지 않은 내 입을 다독여주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안도의 말을 중얼거려본다.

어느 날 고등학생 여여‘군’(여여는 여자다)에게 갑작스러운 불행이 찾아온다. 페미니스트 사진작가인 엄마가 회복 불가능한 암에 걸려버린 것이다. 시간을 붙잡을 사이도 없이 엄마의 암은 괴력을 발휘했다. 엄마가 요양을 위해 시골로 떠나고, 남은 여여는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고등학생으로 지내고 있다. 비록 집에서는 혼자 있지만 여전히 학교에 갔고, 단짝 친구인 세미와 피를 보는 우정의 맹세도 하고, 자신의 두 손에 쥐어진 그럼 스틱으로 우울한 기분도 풀어낸다. 자신의 첫사랑이었는지 어땠는지 모를 선배인 시리우스를 가슴 속에 담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엄마와의 이별도, 세상에 없던 아버지를 발견한 흥분도, 남겨진 자신이 살아가야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수시로 다가올 두려움과 인사하는 법을 배운다. 여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열여덟의 소녀가 충분히 보여줄 수도 있는 행동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학교 선배를 가슴에 담아 첫사랑의 설렘을 느끼기도 하고, 친구와의 우정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생각될 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여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사랑을 했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미혼모라 불리는 엄마를 가진 여여다. 그런 엄마가 마흔 다섯의 나이에 이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을 지켜보는 여여다. 아픈 엄마를 두고도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이 옳은 것인지 가끔은 헷갈리기도 하는 여여다. 마지막이다 싶은 순간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확인하고 싶은 여여다. 지금 여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여여 자신에게 두려움일지도 모르는데 당차고 멋지게 서 있는 여여가 내 눈에는 참 특이한 아이로 보였다. 단 둘이서만 살던 엄마와 여여였는데, 엄마가 떠나버리면 혼자 남을 여여일 텐데, 자칫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 하는 여여가 안쓰럽다고 생각되어야 할 것만 같았는데…….

여여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여여를 지켜보던 모든 순간이 상실의 시간들이었는데 여여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스스로가-어쩌면 자신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배워가고 알아가고 채워가면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알게 된 아빠에게 ‘왜 나와 엄마를 버렸냐.’고 울부짖거나 징징대는 것이 아니라 멘토와 멘티로 만나 서로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외발자전거를 타고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있다는 것도 스스로 알아가고 있었다. 결국은, 부모와 자식에게도 언젠가는 이별이라는 것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 온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남겨진 자신 역시 그렇게 살아가야 하고 살아지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 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두려움. 이제껏 그려진 여여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혹여 아무렇지도 않게 보였을 지도 모를 그 모습 안에 충분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 두려움이 여여에게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게 작게, 다양한 모양으로 무수히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여에게도 그 두려움을 떠나보내는 일이 아직 남아있던 것이다. 엄마가 떠나고 자신이 홀로 남은 일이, 남아서 살아가야할 일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밝고 긍정적인 겉모습과는 다르게, 몸보다 마음이 더 많이 자란 아이인 여여는 그렇게 두려움과 인사하는 법을 배운다. 하얀 종이배를 접어서 서이사와 함께 강물에 띄워 보낸 것처럼 그렇게 차근차근, 오늘 이후로 내일에 만날지도 모를 두려움이 있더라도, 이제 여여에게는 겁날 일만은 아닐 것 같다. 모든 일은 다 지나간다. 아름다운 외모도 영원하지 않을 것처럼 변하듯이 두려움과 아픔과 슬픔, 누군가와의 이별 역시 그렇게 많은 것들이 흘러가듯 지나갈 것이다. 부모 자식 간의 이별이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도 당연하게 여겨지겠지.

맞아. 너도 괜찮고, 나도 괜찮고 서이사님도 괜찮아. 우리는 다 괜찮아. 그치?

아침 이른 시간부터 검진용 가운을 입고 검진문진표를 들고 각각의 번호가 붙어있는 이 방 저 방을 돌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이 저 사람들에게 저렇게 자신의 건강을 확인하고 싶어 하게 만든 것인지 순간 궁금해졌었다. 아마도 저 사람들 역시, 자신이 포함된 가족이나 그 외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별-잠시 이별이 아닌 영원한 이별-을 하는 것이 겁이 나서 확인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 이별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미리 알고 있다면 약간의 연습 정도는 해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애잔한 바람 같은 몸부림이 아닐까 하고…….
엄마 차례의 검진이 다 끝나고, 아침부터 빈속으로 이런 저런 검사로 지쳤을 속을 달래주기 위해 병원 앞의 죽집으로 갔다. 배도 고프지 않았는데 혼자 앉아서 드시게 하기가 뭐해서 억지로 죽 두 그릇을 시켜놓고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눈을 든 순간에 엄마의 눈과 마주치고……. 괜히 쑥스러워서 씩~ 한번 웃어줬다. 어영부영 화해의 제스처를 먼저 날렸다. 다행이다.

아직까지 눈앞에서 누군가의 임종을 본 기억이 없다. 그저 그런 소식을 듣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내 나이 이 정도로 먹었으면 앞으로는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되는 시간이 더 많을 텐데, 나는 여여처럼 초연한 듯 강하게 그리고 담담히 두려움과 인사하는 법을 나 스스로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알고는 있으면서도 역시나 두려운 것이 현실인가 싶은 마음으로 조금 더 변명을 미뤄본다. 그래도 여전히, 언젠가는 맞이해야할 운명 같은 시간이라면 나도 마음의 연습을 조금쯤은 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 한 자락 늘 품고 살아야겠다.

오늘이 6월의 첫날인줄 알았는데, 달력을 보니 5월의 마지막 날이다. 다행이다. 아직 5월이 몇 시간 남았구나. 정신없이 5월이 흘러갔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나에게 2013년의 5월은 번개가 번쩍 하고 지나간 것처럼 내 기억에서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던 공사로 한 달의 시간을 보내고, 온갖 가족 행사가 몰려있는 달이어서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낸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집에서는 명절보다 더 큰 행사인 엄마의 생신이 있기도 했다. 벌써 칠순이시다. 깜짝 놀랐다. 나는 항상 자식이었고 엄마는 항상 엄마였는데, 나이에 붙은 숫자를 보고 멘붕이 왔다. 아기처럼 엄마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엄마가 벌써 칠십이야?” 하고 물으면서도 놀라기만 했다. 갑자기 당신의 나이를 알리는 숫자에 우울해지시는 표정이다. “괜찮아. 괜찮아. 어디 가면 환갑으로 본다니까.”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본다니까. 엄마, 동안이야!) 위로해드리면서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마음이 짠하다. 철없는 딸내미 먹이고 키우느라 울 엄마 나이 칠십이 되도록 자신의 나이를 잊어야만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보내셨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나도 여여처럼 언젠가 엄마와의 이별을 해야만 할 테지만, 꼭 그래야만 하겠지만... 적어도 그 시간을 뒤로, 아주 많이 뒤로, 미룰 수 있는 최대한 멀리 미루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엄마’라는 울림을, '이별'이라는 슬픔을 가슴에 깊이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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