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욘더
김장환 지음 / 비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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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상이 가능할까? 소중한 이를 잃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상상했을 거다. 그리운 이를 놓을 수 없어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죽은 이를 불러올 수도 없어서 괴로운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들. 붙잡고 싶고 다시 보고 싶고, 함께한 시간을 다시 이어가고 싶은 간절함 같은 거.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어차피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을 그저 막연하게 담아두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혹시라도, 그 간절함을 이뤄주는 곳이 있다면?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만들어주어 다시 이어가게, 아니 이 세계에서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가게 해주는 곳이 있다면? 고민 없이 냉큼 달려가리라. 먼저 간 이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리라. 이제 곧 다시 만날 거라고, 우리 행복했던 시간 다시 이어가자고 말이다.


미래의 어느 날, 김홀은 암으로 죽은 아내 이후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랑하는 이를 잊는 게 어디 쉬운 일이랴. 그리움만 쌓인 채로 살아가던 시간도 이제 정리하려고 한다. 어디선가 아내가 보고 있다면 자신의 이런 모습을 슬퍼할 테니까. 정신 차려야지 하는 순간에 날아든 아내의 홀로그램 메시지 한 통. 어느 가상공간에 있다는 아내의 안부였다. 그건 아내가 죽기 전 기억을 저장한 것에서 시작된 일이다. 가상공간 욘더에 있다는 죽음 너머의 사람들, 그곳에 아내가 있다는 걸 알고 그는 찾아간다. 더는 슬퍼하거나 고통스럽지 않게, 아내를 만나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서로 사랑하던 그때를 다시 그려낼 시간만 남았다는 듯, 아내를 만나러 욘더로 간다.


그런 게 꼭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그저 그 사람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는 마음 치료가 안 되는 사람. 아주 갑자기 죽어간 사람이나 고통스럽게 병사한 사람에 대해 회한을 가진 사람, 고인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가진 사람,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사람이 떠난 뒤에 그걸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 (74페이지)


,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걸까. 이 소설을 읽으며 생각했던 건 김홀과 이후의 재회, 불멸의 세상을 꿈꾸며 그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이었다. 누구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어딘가에 천국은 존재하고, 우리가 죽은 후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건 여기에서 다하지 못한 생을 이어가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지금 생이 너무 아쉽기만 해서,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별의 순간이 아프기만 해서 상상하는 그곳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으니, 우리가 바라는 마음이 무엇인지 이렇게 꿰뚫을 수 있는 것도 능력이구나 싶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묻곤 했다. 이런 상황에 내 앞에 펼쳐진다면, 나는 김홀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죽음을 선택해야만 그곳으로 가서 그리운 이를 만날 수 있는데, 주저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할 마음이 나에게 있는 걸까?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상상력은 기발했지만, 그 상상은 인간의 마음을 파고드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의 이야기가 그저 판타지에 머물지 않고 있다는 걸 저절로 알게 된다.


뇌를 다운로드해서 사는 죽은 자들의 도시, 욘더. 생의 기억을 담아 가상공간 욘더에서 살아갈 바탕을 만드는데, 이곳은 슬픔도 고통도 나이 듦도 없다. 아마도 천국이 정말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지. 이곳이 아닌 저곳의 생을 경험한 이를 만나본 적 없으니, 이들의 이야기가 그저 상상에 머물기만 하는 건지 정말 존재하는 곳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도 한 번쯤 경험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는 건, 우리는 이미 이별의 슬픔을 알기 때문이다. 더는 함께할 수 없어서 아프기만 한 가슴을 달랠 길이 없어서다. 그러니 당장이라도 욘더로 뛰쳐 가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다. 그렇게 알게 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에 그토록 바랐던 행복은 더 간절해지지만, 불멸의 생을 바라면서까지 함께 하는 게 사랑이고 행복일까 하는 의문. 저마다의 이유로 욘더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또 다른 행복을 만들어가지만, 어쩌면 행복은 후회하는 것을 되돌린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불멸의 생을 영위하면서 사랑을 이어가고 불행이 없는 곳이기에 마냥 만족하는 삶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는 것을 욘더에서의 시간이 말해준다. 인간의 바람이 이뤄낸 만들어진 천국에서 인간은 행복하기만 한지 묻는다.


기술의 발달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다. 소설 속의 인간 역시 자기 신체에서 원하는 부분을 바꿔놓기도 한다. 상상이지만 인간의 욕망을 이뤄줄 욘더를 만들어내는 정도로 인간 세상을 발전했다. 필요로 만들어진 사이보그마저 점점 인간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까지 담아냈다. 때로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 기계보다 더 이성적이고 차가워질 수 있는 인간. 인간과 사이보그가 공존하는 세계를 상상하듯, 이 소설 역시 그 상상 속에 인간의 따스함과 불멸의 욕망이 빚어낸 씁쓸함이 존재한다. 준비하지도 못했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던 상실을 경험한 이들에게, ‘욘더는 그들만의 행복을 찾아가려고 애쓰던 마음이 이뤄낸 세상이다. 불행도 없고 죽음도 없다. 감정의 고단함이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건 얼마나 평화로울까. 고요함이 흐르고, 사랑과 행복만이 넘치는 순간이 일상인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슬픔을 느낄 일이 아예 없는 게, 평온해 보이는 일상에 익숙해지는 게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었는지 소설의 결말이 그 답을 보여준다.


우리 사는 동안 이런 세계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상상은 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줬다. 구판으로 이미 읽은 독자도 있을 테고, OTT 드라마로 이미 만난 시청자도 있을 테다. 두 가지 모두 접하지 못한 나 같은 독자에게 이번 개정판은 SF의 매력을 발견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 될 것 같다.


#굿바이욘더 #김장환 #비채 #김영사 #소설 #SF #상상의세상 #불멸의사랑

##책추천 #소설 #한국소설 #드라마 #완전한천국 #티빙오리지널시리즈 #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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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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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31페이지)


대문 밖 아버지는 호인이었다. 사람들에게 술과 밥을 잘 사고, 얘기도 잘했다. 무엇보다 놀란 건 아버지가 웃는 모습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를 찾으러 갔던 동네 경로당 출입문을 열고 마주한 장면은, 사람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웃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우리 아버지,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그런데 집에서는 왜 그래? 웃기는커녕 욕하고 화내고 큰소리만 치던 기억이 전부였는데, 지금 내가 본 건 뭐지? 뭔가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에 더 오래 고민하진 못했다. 나중에 그날의 장면을 가끔 떠올렸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나는 아버지를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든다.


소설 속 평생 빨치산으로 살아온 아버지의 존재는 딱히, 그렇게 의미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다면 나머지 가족들의 삶이 조금 평탄했을까.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아버지의 혁명은 계속되었으나 함께한 동지들은 죽어갔고, 아버지의 위장 자수 계획도 실패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한국의 자본주의 속에서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아버지가 바라던 평등은 지금 우리에게 닿은 세상일까? 일상의 많은 부분이 평등하게 이뤄진 세상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혁명에 힘을 쏟았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을 테다. 아버지의 빨치산이라는 수식어는 작은아버지의 인생을 무너뜨렸고, ‘의 인생에도 도움 될 게 없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 아버지가 노동절 새벽에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아버지의 장례가 치러지는 사흘 동안의 이야기가 한 사람의 긴 생을 그대로 담아낸 것에 놀랐다. 누군가의 인생이 이렇게 펼쳐질 수도 있구나 싶었다. 평생 형을 원망하며 살아온 작은아버지가 이 장례식에 등장할지 궁금했다. 형의 죽음을 알았지만, 대꾸도 없이 끊어버린 전화는 그의 닫힌 마음이 여전하다는 걸 증명했고, 그러니 증오하는 이의 죽음 따위 애도할 마음이 없다고 여겼다. 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가장 확인하고 싶던 일이기도 하다. 아마도 아버지는 딸뿐만 아니라 작은아버지에게도 평생 받아들이기 힘든 상처를 준 이였기에 말이다. 반면에 아버지가 구례에서 사귄 이들은 사흘 내내 장례식장을 꽉 채운다. 누군가는 사흘 내내 머물면서, 누군가는 바통 터치하듯 찾아오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와의 추억을 꺼낸다. 정치적 지향점이 다르면서도 오랜 세월 친구로 지내온 이가 있는가 하면, 다문화 소녀의 인생 한 장면에 기록될 일도 마다하지 않은 아버지였다. 혁명을 위하는 중에도 인간다움을 잊지 않으며 딸 같은 나이 청년의 삶도 바꿔놓았다.


그들이 소환하는 아버지는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와 너무 달랐다. 생활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아버지, 습관처럼 보증 서주며 집안을 말아먹은 아버지, 어느 시절의 ‘-라떼인지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는 아버지를, 고향을 떠나고 싶었을 테다. 뒤늦게 알았다, 그동안 알던 아버지가 아버지의 일부였음을. 막무가내 같았던 아버지가 누군가의 인생을 구하기도 하고, 오지라퍼 같은 행동이 감동을 불러왔으며, 기억에서 사라진 아버지와 의 애틋한 시간을 다시 그리는, 아버지의 장례식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늦게나마 차근차근 아버지의 삶을 복기하던 는 아버지가 바라던, 딱 아버지다운 방식으로 이번 생에서 놓아주려고 한다.


책으로 농사를 배우고, 그마저도 완전하게 배울 생각을 못 하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갔을까. 그놈의 혁명이고 뭐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농사라도 지어야 식구들 먹고살 텐데, 이놈의 영감탱이 허구한 날 혁명 타령이나 하고 남편이 아니라 남의 편으로 평생 살아가는 모습에 화병도 났을 법하건만, 아버지의 혁명 동지로 살아온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조금 더 현실적이라 하더라도 그 바탕은 변하지 않더라. 사상의 지향점 앞에서 한편이 되었다가 상황에 따라 반대편이 되었다가 하는 모습이 우습다. 아마도 아버지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 어머니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죽음으로 해방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버지의 장례식 사흘의 시간이 한 사람의 생을 정리하는 시간 그대로 가치 있었다. 이래서 죽은 이를 보내는 애도의 시간이 필요한 건가 싶기도 했다. 아버지는 죽음으로 이룬 자유를 이제 다른 곳에서 또 다른 혁명을 꿈꾸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딸은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답게 살다간 아버지의 인생을 이렇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작은아버지가 비로소 아버지와 화해하고 죽음 후의 자리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이루는 모든 관계가 언젠가는 다 풀리게 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혹여나 그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말이다.


오십 년 가까이 살아온 어머니도 아버지의 사정을, 남자의 사정을, 이제야 이해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 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밤이 더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248~249페이지)


여전히 나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제는 서로 치열하게 싸우던 시간마저 희미해졌다. 대화다운 대화 한번 해보지 못한 채로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정리되었다. 지금 이렇게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지만, 혹시 또 모르겠다. 살아있는 동안 말하지 못했던 어떤 마음이 가슴 속에 자리한 채로 떠났는지도.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지금 내 마음이 다독여질 것 같다. 평생 자기만 알고 살아온 사람이라고 기억된다면 내 인생에서 작게나마 남아있던 아버지라는 존재가 참 의미 없어질 것 같다. 어쨌든, 각자의 고단한 인생을 잘 정리하고 떠났다면, 그랬다면 된 거다.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겠나.


#아버지의해방일지 #정지아 #창비 #소설 #한국소설 #가족소설 #혁명 #가족

##책추천 #감동 #웃음 #한남자의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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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에 새로 온 동료는 나와 비슷한 나이인데, 난임 치료에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지금은 남편과 둘이 살아가는 순간을 즐겁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가끔 남편과 통화하는 걸 들을 때가 있는데, 세상 이렇게 다정하고 오래된 친구처럼 얘기하는 부부가 있나 싶어서 종종 놀란다. 그래, 이렇게 두 사람이 나이 들어간다면, 이것도 좋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입양에 관해 얘기하게 됐다. 입양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고려해봤고, 입양은 그 부부의 인생 계획에 넣지 않기로 했단다. 그 얘기를 나누었던 날, 우연히 TV를 보다가 입양아의 인터뷰까지 보게 됐다. 자기가 입양될 당시의 사회적 환경과 한국 입양 시스템의 문제점,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었으나 그 과정이 너무 어렵고 어떤 정보도 얻기 힘들다고 말하는 장면에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그리고 다음 날 도서관에서는 의외의 책까지 만나면서, 무슨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입양에 관한 화두는 최근 나의 곁을 계속 맴돌고 있다.


여자는 자신이 수입품이었기에 화가 난다.

여자는 자신이 수출품이었기에 화가 난다.

여자는 어린이를 입양 보내는 국가는 물론 입양기관도 국가 간 입양을 통해 돈벌이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그 여자는 화가 난다, 18페이지)


마야 리 랑그바드의 책 그 여자는 화가 난다를 도서관 신착 자료 코너에서 뽑아 들고 읽었다. 읽기 전에는 제목과 표지만 보고 세상의 불평등에 관한 여자들의 분노의 목소리인 줄 알았다. 첫 문장부터 충격적이었고, 몇 페이지 읽다가 알아버렸다. 이 책의 부제가 이 책의 반복된 화가 난다문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저자는 한국계 입양인으로 덴마크 시인이다. 시처럼 들리지만, 오랜 세월 담아둔 감정의 고백 같았다. 아니, 고발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부제 국가 간 입양에 관한 고백이라는 수식어 그대로였다. 저자의 개인적 경험으로 국가 간 입양이 얼마나 허술하게 처리되고 있는지, 이걸 알면서도 쉽게 용인되는 사회 구조를 비판하고 있다. 거의 10년 전에 덴마크에서 출간되었다는데, 상당한 화제였던가 보다. 이 책을 읽고 해외에서는 입양을 생각했다가 그만둔 가정들이 있다고 하니, 그 영향이 컸다는 걸 알겠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반복되는 문장으로 그 격한 분노가 얼마나 큰지 저절로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화자인 그녀는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해외로 입양된 모든 이의 이름이기도 하다. 국가 간 입양이 한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얼마나 이로운 일인지 들으면서 자라왔다고 하는데, 이게 정말 좋은 일이기만 할까? 그 이로움은 누가 판단하는 거지? 이 책 읽자마자 오월의봄에서 출간된 아이들 파는 나라를 바로 이어서 읽었는데, 두 책은 비슷한 맥락으로 국가 간 입양이 얼마나 불편한 진실을 감추고 있는지 말한다. 특히 한국이 아동 수출국이 되어버린 과정을 듣고 있노라면, 어떻게 이런 정책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졌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배경에는 우리가 흔히 정상 가족이라고 말하는 가족의 형태가 있었고, 경제 성장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횡행했던 해외 입양이 하나의 사업처럼 성장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정작 그 입양의 중심에 있는 어린아이들의 삶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일이었다.


여자는 한국에는 부모가 자녀를 입양시킨 후 그 결정을 되돌릴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리케는 호주에선 자녀를 입양시킨 부모가 28일 내로 결정을 철회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에는 이러한 법적 철회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여자는 화가 난다, 78페이지)


여자는 입양은 친밀감과 애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헤이그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한국 정부에 화가 난다. 헤이그협약에서는 아이들이 친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명백히 밝혔다. 또한 각각의 회원국 정부에서는 아이들이 친부모 밑에서 자랄 수 있도록 적절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만약 아이들이 친부모 밑에서 자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정부는 우선적으로 국내입양부터 고려해야 한다. 만약 국내입양조차 쉽지 않다면, 그때 국가 간 입양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 여자는 화가 난다, 128페이지)


우리나라는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3년에 국제 입양을 시작했다고 한다. 여러 정부를 거쳤지만, 국제 입양은 계속됐다. 일부 국제 입양 성공에 가려진 수많은 해외 입양인의 비극적인 삶은 가려졌다. 그런데 왜 국제 입양은 시작된 걸까? 이 책에서 추적한 대한민국 국제 입양의 실태는 놀라웠고, 잔인했다. 한국전쟁 이후 전쟁고아를 구제한다는 취지로 국제 입양을 장려했으나, 실제로는 청소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혼혈아동이 국제 입양의 대상이었으나, 점점 그 대상은 넓어졌다. 부모를 잃은 미아까지 입양 대상이 되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국제 입양은 줄지 않았다. 국가 주도로 경제 성장을 추진하면서, 국제 입양은 국가의 복지비용을 줄이는 데 일조했다. 그러면서 이민 확대나 민간외교라는 허울로 국제 입양은 계속 이뤄졌다. 한해 태어난 총 출생아 중 1%가 넘는 아이가 해외로 입양된 적도 있다는데, 이거 실화인가 싶을 정도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세계 최대 아동 수출국이라는 오명은 지워질 시간이 없었을 테다.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이를 키울 수 없는 부모가, 아이를 원하는 부모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걸 국가가 도와주는 것쯤으로 여겼던 거다. 입양 과정에서 돈이 오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입양 문제를 얼마나 순진하게 생각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물론 국가 간 입양 절차에 비용은 발생하겠지 싶었다. 사람이 오고 가는데, 비용이 발생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게 아이를 보내고 맞이하면서 거래하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정부는 이 절차와 책임을 민간 기관에 넘겼다. 국제 입양에 최대 종주국은 미국이었고, 우리나라 해외 입양인의 70%가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 영향력을 과시하는 국제 입양기관들이 존재하고 있다. 국제 입양이 정부에 많은 목적을 제공했다면, 국제 입양의 중심에 있는 입양인들이 겪는 문제는 누가 해결하고 책임져야 하는지 물어도 대답해주는 이가 없다. 많은 입양인이 낯선 땅에서 낯선 부모의 폭력에 쓰러지고, 정신적으로 학대받으며, 부여받지 못한 시민권으로 세계를 떠돌거나 불법체류자가 된다. 처음 입양이 시작될 때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일이 훗날 이들의 인생을 크게 뒤흔드는 일까지 만든다. 이 참담한 비극은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헤이그협약은 원가정 보호를 천명하고, 원가정 보호가 불가능할 때는 국내에서 보호 가능한 가정을 찾고, 국제 입양은 최후의 수단으로 검토할 것을 원칙으로 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140페이지)


헤이그국제입양협약 가입이 그 답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입양 과정과 책임이 민간 기관이 아닌 국가가 관리 감독하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국제 입양된 아동의 인권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를 보장하는 내용인데, 그러려면 법 개정을 비롯한 많은 문제 해결과 절차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그게 이루어지지 못해 이 협약에 닿지 못하고 있는 듯한데, 이 문제의 본질 역시 간단한 게 아니었다. 국가와 민간 기관, 국가와 국가 간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계속 이어지는 동안 국제입양인의 삶은 여전히 불행하고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


입양이란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 그 날, 내가 TV에서 봤던 장면은 한 국제입양인의 호소였다. 자라면서 겪은 많은 차별과 학대 말고도 자신을 괴롭게 한 건 정체성의 문제였다고 한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줄곧 물어왔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했다. 그 대답을 찾으려고 한국에 왔으나 찾을 수 없었다고. 단지 태어났을 뿐인데, 다른 나라로 보내어지는 과정에 왜 당사자의 목소리는 없었는지조차 물을 수 없었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느라 노력했을 테고, 그런데도 온전히 그 가족, 그 나라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시간 속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로 끊임없이 차별에 노출되어 성장했지만, 남은 것 역시 그동안 살아온 모습의 인생일 뿐이다. 많은 국제입양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지 묻는 책인 듯하다. 입양을 마냥 좋게만 봤던 나의 어리석음을 경고하는 많은 사례와 진실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헤이그협약이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 보였다. 이설아 작가의 가족의 온도에 그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가족의 온도는 결혼한 부부가 세 명의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동안 입양에 관한 이야기에는 아이를 입양한 부모나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다뤄졌다면, 이 책은 입양된 아이의 목소리를 담았다. 앞부분에서는 아이를 입양하는 마음과 과정을 잘 드러낸 작가의 다짐과 입양 절차를 다룬 이야기가 있다. 정상(?)적으로 결혼한 부부가 불임도 아닌데, 아이를 낳는 게 아닌 입양을 선택한다. 부부의 마음이 같아서일까. 입양을 결정했다고 그 과정이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부부의 마음이 같으니 입양을 대하는 자세가 경건했다. 한번 버림받은 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줄 알고, 사라지지 않을 부모의 자리에 머물 줄 알며, 온전히 아이의 성장을 살피며 마음을 다한다. 오랫동안 뿌리박혀 있던 가족의 개념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는 듯했다. 같이 산다고, 피를 나누었다고 가족이 아니라는 건 살아오면서 저절로 알게 됐다. 어떤 관계에서도 갈등은 존재하겠지만, 이렇게 살아가도 가족이라는 걸 보여준다.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되어 함께한다면, 그게 가족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맺으면서 입양을 공개했다. 완전한 가족이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했고, 그 시간 동안 사랑을 쌓으며 부모와 자식 관계가 되어갔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많은 감정의 문제까지 아낌없이 들려주면서, 입양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입양에 직접 관계된 이들의 자세를 새롭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아이를 읽어야 할 책으로 보라는 말은 입양 아동을 양육하는 부모라면 더욱 깊이 새겨야 할 조언입니다. 입양 아동의 삶은 입양 부모의 품에 안기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해왔습니다. 아이는 우리와 너무 다른 신체적 특성과 성격, 여러 재능과 고유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옵니다. 아이가 무엇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어떤 경험을 하며 우리에게 왔는지를 파악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에 적절한 양육을 제공하려면 몇 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이의 고유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이와 연결된 출생 가족을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사랑하는 입양 자녀를 위해 부모가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출발선입니다. (가족의 온도, 120~121페이지)


한때 어린 조카를 입양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 내가 돌보던 조카가 서너 살 즈음일 때, 내가 그 아이를 직접 돌보며 양육하는 당사자인데도 법적인 문제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곤란해질 때마다 했던 생각이었다. 그 당시에는 결혼한 부부가 아니면 아이의 입양이 불가했었는데, 비혼이고 아이를 키웁니다를 읽고 알았다. 싱글인 상태에서도 아이를 입양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다는 것을. 물론 비혼이어도 입양의 자격이 생겼다고 해서 이 과정이 쉬운 건 아니다. 다만, 꼭 결혼으로 이루어진 부부가 아니어도 아이를 입양할 수 있고, 가족을 형성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안도했다고 해야 하나. 이제껏 우리가 알아 왔던 정상 가족의 개념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가족이란 서로 사랑을 나눠줄 수 있다면, 누구라도 아이의 성장에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럼 가족인 거 아닐까. 앞서 두 책이 국제 입양 실태에 관한 고발의 분위기로 참담하고 우울했다면, 이 책은 뒤의 두 책은 국내입양의 현실적인 장면을 그려주는 것 같다. 입양의 환경을 생각하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세가 바로 이런 거 아닐까.









#그여자는화가난다 #아이들파는나라 #비혼이고아이를키웁니다 #가족의온도

#입양 #국제입양 #국내입양 #정체성 #문학 ##사회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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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1-09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이하라 2022-11-09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 되세요.^^

thkang1001 2022-11-09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 - 신경학자가 쓴 불가사의한 질병들에 관한 이야기
수잰 오설리번 지음, 서진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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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에 등장하는 체념증후군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 마음의 병이 이렇게 병명이 되어 진단할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흔히 화병은 들어봤어도, 절망한 나머지 마음과 말을 닫아버리는 증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저자는 스웨덴의 체념증후군 아이들의 이야기로 이 책을 쓰기로 했다는데, 이 병은 약자의 마음에서 생기는 병이었다. 심인성 장애의 기본에, 이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의 사람들이 겪을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아이들은 이 병에 쉽게 노출되기도 하고, 그만큼 마음의 상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스웨덴의 난민 아이들이 원인 모를 혼수상태에 있고, 전 세계에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집단을 연구하면서 알아낸다. 사회적 환경이 스트레스를 만들고, 우리 마음의 문제가 몸에 영향을 준다는 것. 결국은 우리 생활의 모든 질병은 한 가지 원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니 병명이 드러나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겪는 불편함과 괴로움은 질병이 된다.


체념증후군은 정말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병이었다. 1, 길어지면 5~6년을 침대에서 보내는 소녀들의 모습이 상상되는가? 난민에게 주로 보이는 이 병은 영원히 이주민으로 불안한 삶을 누리는 이들에게 생긴다. 안정적이지 못하고, 그 나라의 국민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때로는 오랫동안 난민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이의 불안감이 아이들의 눈에 그대로 비친다. 어린아이니까 뭘 모른다고 해서는 안 된다. 아직 자기주장을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이라고 해도 보이는 게 있고 감정이 있다. 이 서러움을 아이들이라고 모를까. 그렇게 생각하면 체념증후군이 이 아이들에게 생긴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다만 이런 현상이 아이들에게 머물러 있을 때 알아채지 못하는 어른들의 시선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정확하고 깊게 알아보려 애쓰려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말이다.


이 질환에 걸리는 이들이 그렇게 선택적이라는 사실은 이 병을 그저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과 관련된 생물학적인 문제로만, 혹은 개인의 성격과 연결되는 심리적인 문제로만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47페이지)


눈으로 보이는 증상을 진단하려면 기본적으로 검사를 한다. 검사 결과 아무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이 질병을 판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가 잠에 빠져 수년 동안 깨어나지 않는 아이들을 찾아다니면서 발견한 증상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면서 진단할 수 있었다. 정상인데도 보이는 증상들, 발작하거나 틱장애를 일으키거나, 환각에 시달리거나 하는 등의 모습은 인간이 고통받는 질병을 물리적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걸 증명했다. 저자가 찾아낸 결과도 마찬가지다. 모든 질병이 생물학적, 사회적, 심리적 요인이 함께 만들어졌다는 거다. 진단명이나 증상 등은 이 요인들이 어느 정도 작용했느냐 하는 비중의 차이 정도가 있을 뿐이다.


우리 몸의 질병이 생물학적, 사회적, 심리적 요인이 모여서 발병한다는 걸 최근에 많이 경험했다. 특히 엄마의 병원행이 잦아지고, 이런저런 증상을 호소하는데도 찾아낼 수 없던 병명에 당황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엄마는 많은 질병에 시달렸고, 여전히 병원에 의지하며 지낸다. 가장 많이 고통을 호소하는 건 소화기 장애다. 심리적인 이유로 소화 장애가 생긴 건 꽤 오래된 일이고, 꾸준히 위장을 점검하고 보호하면서 살아왔다. 엄마의 위장이 다루기 힘든 아이처럼 변한 건 생물학적 요인이지만, 엄마가 신경 쓸 일이 많아지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이 위장은 더 발작한다. 물 한 모금 넘기는 것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위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진료받고 약을 먹지만, 그마저도 쉽게 나아지지 않으면 위장내시경까지 하면서 확인한다. 최근에는 소화기 관련 장기의 CT 촬영까지 하게 되었는데, 의사는 인간이 나이 듦에 따라 장기 기능이 약해진 건 있지만, 특별히 어떤 문제가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저자의 주장이 바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저자는 이 책으로 말한다. 질병이 어떤 신호가 되어 우리 삶의 불편함을 말하고 있다고. 크라스노고르스크(카자흐스탄)의 집단 수면증은, 한때 번성했던 도시가 쇠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우울함, 정부의 강요로 이 도시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잠들면서, 잠이 든 채로 움직이는 수면증까지 발병한 이유를 살펴보게 하는 일이 그 의미를 더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특정 질병에 걸렸다고 믿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이런 증상을 질병으로 규정하는 순간 질병의 범주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본다. 어떤 병이라도 그 병의 서사가 있을 테고, 그 서사를 살펴보면서 병을 진단하고 치료해야 한다. 요즘처럼 전문화된 분야로 나뉘고 구성된 방식, 모든 가능한 질병 목록을 갖고 일하는 시스템에서는 그 병의 원인을 찾고 치료하는 일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때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과 질병, 심인성 장애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다. 그 설명은 인간이 속한 사회와 환경적 요인, 개인의 문제를 더하며 찾아야 한다. 체념증후군으로 아이들에 관심 두게 되었다. 심리적인 문제가 신체의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고, 질병이 생각보다 더 많이 사회적으로 패턴화된 행동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논하기보다는 적극적인 치료를 위한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고 정답이라는 걸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더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하니포터 #하니포터4_잠자는숲속의소녀들 #잠자는숲속의소녀들 #수잰오설리번

#심리 #질병 #사회화 #자연과학 #생명과학 ##책추천 #책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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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메이브 빈치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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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은, 자식들 다 커서 나가면 혼자서 지내고 싶다는 거였다. 육 남매 키우느라, 가장으로 살면서 허리 휘게 애써왔던 걸 생각하면 엄마는 진즉에 쉬셔야 했다. 엄마에게도 어느 정도 인생 계획이 있었을 테다. 근데, 어떻게 사람 일이 마음처럼만 되겠는가. 엄마는 가장의 자리에서 물러나 있어도 존재가 가장이었다. 이제 좀 쉬어도 되겠다 싶었을 때는 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치료받고 그냥저냥 나이든 몸을 감당하면서 쉬시다가, 요즘에는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해서 다니신다. 집에 혼자 있으니 우울하고 지루하시다면서. 그러니까 지금 엄마의 일은 치열한 생계를 위한 일이라기보다는, 본인의 생활을 감당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고 싶은 목적이 크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하는데, 보통의 부모라면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가 성인으로 살면서 독립하기를 바랄 테다. 아니면 제 앞가림하는 성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거겠지. 디와 리엄 부부도 같은 마음일 거다. 이미 성인이 된 삼 남매와 함께 사는 부모인 디와 리엄. 첫째 로지는 결혼생활이 힘들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둘째 헬렌은 직업이 교사인데 독립은 안 한다. 셋째 앤서니는 음악을 한다며 세월만 보낸다. , 그럴 수도 있지. 각자의 이유로 부모님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집에 살면서, 성인으로 돈을 벌면서 이 집의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는 건, 이건 좀 아니지.


새벽부터 청소 일을 하는 디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서 음식을 만들어 놓고 나온다. 누군가는 일어나서 아침을 먹겠지. 집에 돌아와서도 끊이지 않는 집안일에 지치고 또 지친다. 어느 집의 육아가 이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집에 유아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그날도 똑같았다. 디는 일을 마치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다. 남편과 아이들 모두 집에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식탁에 앉아 고개를 들지 않고 얘기하는 막내 앤서니, 혼자만의 얘기에 빠져 있느라 흥분하는 헬렌, 거울만 보면서 남의 얘기 흘려듣는 리지. 그 가운데 남편 리엄이 있다. 주방 식탁 위에는 디가 아침에 만들어 놓고 나간 음식이 빈 냄비로 있고, 마시려고 냉장고에 넣어둔 우유는 비어 있다. 세탁실의 빨래는 여전히 산처럼 쌓여 있고, 청소는 엄두도 못 낸다. 이렇게 사는 게 모두를 위한 걸까 의심이 든 그때, 남편의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 이제 이 가정은 어떻게 될 것인가. 디는 결심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읽으면서 그림이 그려진다. 무슨 막장 드라마 보는 기분이기도 하다. 분명 사랑하는 가족인데, 이 사랑이 유지하기 어려운 순간이 바로 이 소설 속에 있다. 사랑하지만 같이 살기는 괴로운 사람들이 여기 있다. 아빠가 실직했다고 하는데도 별 감각이 없는 이 아이들을 어쩌면 좋으냐. 디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강한 대책이 필요했다. 로지는 일 때문에 영국에 가게 됐다고 하고, 헬렌은 친구 부부 집에 며칠 있겠다고 한다. 이때다 싶어 디는 자매가 같이 쓰던 방을 치우고 세를 놓는다. 앤서니는 친구들 집으로 가서 지내겠다고 하니 그 방도 세입자를 들인다. 삼 남매는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놀란다. 엄마가 요구하는, 이 집에서 같이 살려면 방세를 내라고 하니 득달같이 달려들어 화를 내던 아이들이다. 부모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둥, 여기는 우리 집이기도 하다는 둥. 맞다. ‘우리 집이니까 생활비를 같이 부담해야지. 학생 신분이거나 미성년일 때는 괜찮지만, 다 커서 자기 앞가림하면서 돈도 버는데, 왜 이 집의 경제적인 문제는 부모만 감당해야 하는지 아이들은 이해를 못 한다. 그러면서 디의 결정에 화만 낼 뿐이다.


소설은 이 가족의 갱생 프로젝트를 신나게 풀어놓는다. 내 자식들 얼마나 예쁘고 곱게 키웠을까마는, 온전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려면 때로는 단호해야 한다. 그녀는 바란다. 그녀의 고객이 요구하는 대로 청소하는 것처럼, 그녀의 인생이, 이 가족의 미래가 반짝거리기를. 그러려면 각자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해야 한다. 그 중심에 엄마가 있다. 이 갱생 과정이 조금 불편할지 몰라도 한번은 거쳐야만 하는 일이다. 우리가 진짜 가족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려면, 피할 수 없는 시간이다. 혹자는 삼 남매가 했던 말처럼, 어떻게 부모가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저 내 아이들 감싸주고 조금 더 돌봐주면 어떻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면서 나무랄지도. 하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라면, 이 아이들을 영원히 아이로 머물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잘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가게 해줘야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 아니던가. 그러니 디의 이런 시도가 아이들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라는 걸 알아주기를. 이 집의 삼 남매는 부모에게 쫓겨난 게 아니라, ‘때가 되면 낙엽이 떨어지듯 아이들이 집을 떠난 것뿐이다.


짧은 분량에 금방 읽을 수 있고, 몰입감도 좋다. 단막극 한 편 본 기분이기도 하고, 눈앞에서 지켜본 어느 가족의 이야기 같아서 더 생생하다. 어떤 장면들은 우리 집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읽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이다. 세계 책의 날을 기념하여 퀵 리드(Quick Reads) 시리즈로 제작되었다고 하니 의미도 있어 보인다. 금방 읽을 수 있지만 가볍지 않은 이야기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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