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는 것이다. (이 별에서의 이별, 237페이지)
요즘에 일하는 곳에 찾아와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신청하고 가는 어르신들 볼 때마다, 항상 우리 삶이 죽음과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란, 나중에 아파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됐을 때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미리 밝혀두는 것이다. 사는 동안 생각하는 죽음의 순간이리라. 이미 여러 번 병원을 경험하면서, 한번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비슷한 서류에 사인한 적이 몇 번 있다. 위급한 순간이 왔을 때 가슴을 뚫고 호스를 끼우고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를 한 것인지 말 것인지 물으며 서류를 내미는 의료진에게 처음에는 오해했었다. 자기들 일 편하게 하려고 이런 거 미리 받아두는 건가 싶었는데, 입·퇴원과 중환자실 드나드는 일이 반복될수록 이 서류에 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들과 미리 의논하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긴 시간 고민하지 않고 이 서류에 사인했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떠나는 이와 남겨진 이가 이 죽음을 같은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어떤 죽음은, 죽은 이보다 곁에 남은 이들에게 더 죽음을 알게 하는 것 같다. 떠난 이는 모를 죽음 이후의 시간이 남겨진 자들의 몫인 것처럼, 그 시간에 견뎌야 할 감정도 남겨진 이의 것이다. 『이 별에서의 이별』은 장례지도사인 저자가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순간의 기록이다. 그 기록의 시간 속에 죽은 이, 남겨진 이, 그들을 지켜보는 이가 있다. 아마도 저자는 그들을 지켜보는 이가 되겠지.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의식을 누군가는 해주어야 했다. 그것은 온전히 남겨진 이의 몫이었고, 저자는 남겨진 이가 의뢰하는 현장에서 그 일을 해낸다. 내가 처음 장례지도사를 본 건 외숙모의 장례식장에서였고, 그들은 그저 돈을 받고 장례식장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을 정리해주는 정도로 생각했다. 이 책으로 처음 알았던 건, 장례지도사가 죽은 이의 집에 가서 직접 시신 수습을 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죽은 이를 가장 아름답고 편하게 보내줄 수 있게 돕는 사람, 유족이 슬픔으로 해내지 못하는 것까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계속 듣다 보면 정말 궁금해진다. 장례지도사를 어떻게 시작하고,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망자와 유족을 대하는지 말이다. 읽고 있는 어떤 순간에는 내가 이 길로 한 번 들어서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일이 만만해 보여서가 아니라, 이 일로 내가 느끼고 배우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평생 직업으로 삼아 의미 있게 배우고 싶기도 했다. 어쨌든 그건 더 고민해야 할 문제였고. 지금은 저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기에도 벅차긴 하다. 인상적인 몇 가지가 있었는데, 시신의 화장이었다. 아버지의 입관식도 보지 못했던 터라, 정말 시신에 화장한다는 생각을 못 했다. 그런데 자살한 사람의 목에 난 멍 자국을 없애려 조심스럽게 화장을 한다는 말에 놀라웠다. 훼손된 시신에 아름다움을 입혀주는 일. 수의를 입히고, 그들의 사연을 가슴에 묻고 조용히 보내주는 인사를 하는 저자의 마음이 읽히기도 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누군가의 기록으로 보고 있자니, 그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장면으로 뛰어든 것만 같다.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일을, 이렇게 또 하나 배운다.
어머니는 봄날 꽃밭 위에 이불을 덮고 잠든 딸을 만나러 입관실에 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딸의 손끝 하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얼굴도 삼베 천으로 전부 가려놓아 그저 관 속에 누운 사람이 딸일 거라고 믿는 수밖에. 어머니는 왜 딸의 몸을 전부 가려놨냐고 묻지 않는다. 나도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숨을 내뱉는 것조차 힘겨운 이 공간에는 어떻게든 견디어 보려는 사람들만 애처롭게 남아 있다. (이 별에서의 이별, 28~29페이지)
우연처럼 장례지도사의 길로 들어섰지만, 저자에게도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현실이 놓여 있었다. 그렇다고 이 일을 감당하는 게 돈 때문은 아니리라.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와 인구 고령화, 사망자가 늘어가는 것이 이 직업에 관심 두게 한 것도 있다. 많은 이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이 직업에 뛰어들었다. 몇 달의 연수 기간을 채우고 현장에 투입되면서 실수도 있었을 테다. 제대로 배우려고 두 눈을 부릅뜨기도 했겠지. 저자는 그렇게 시간과 경험을 쌓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들여다보지 못한 사이에 부모가 죽고, 장례를 치러줄 이가 없이 외롭게 죽어가고, 신혼여행지에서 배우자의 익사를 겪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죽음마저 쓸쓸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죽음의 순간에 삶을 생각한다. 죽음을 자각하는 순간에 삶이 더 빛난다는 말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읽은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에서는 자기 죽음의 결정을 할 수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 별에서의 이별』을 읽다 보니 죽음을 생각하면서 안락사를 준비하는 이가 보냈던 삶의 마지막 순간이 정말 빛나지 않았을까 싶다. 안락사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알겠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때, 삶이 더 반짝일 수 있다는 것을. (솔직히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이 책은 읽고서도 마음에 안 든다. 종교의 색이 너무 짙다. 제목만 보고 펼쳐 들었는데, 페이지를 계속 넘길수록 제목에 낚인 기분.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었다. 그냥 이렇게 무료하고 기대할 것 없이 살다가, 죽음이 다가오면 삶도 끝나겠지 싶은 순간을 보내기도 했다. 뒤늦게 뭔가 내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늦어도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몇 번의 장례식을 다녀오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닥친 위기를 지켜보면서 지금이라도 내가 해야 할 것을 생각했다. 늦었지만 하고 싶은 것, 늦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삶을 더 채우고 싶은 욕심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특히 지금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아픈 사람들, 취약계층이 주로 찾아온다. 내가 의료진이 아니니까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더 죽음에 가까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그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조금 더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을까, 내가 힘들어도 친절하게 대해야지, 이들이 이렇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순간을 기억해야지 하는 마음. 죽음의 현장에서 내가 죽은 이가 될 수도 있고 남겨진 이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어떤 자리에 있어도 덜 슬플 수 있게 살아가야지 하는 다짐.
죽음에 대한 공부는 마치 세상의 안과 밖 경계선을 더듬는 것 같습니다. 해안선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선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선은 가르고 막는 역할이 아니라 만나고 접속케 하는 의미를 갖습니다(그렇다면 ‘경계’라고 해서는 안 되겠지요). 삶에게 죽음을, 죽음에게 삶을 소개하는 맞선 자리 같은 거죠.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둘이 함께 탄생하고 함께 소멸합니다.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134페이지)
누구나 죽는다. 삶을 맞이했으니 죽음으로 끝을 맺는 거겠지. 생전에 어떤 삶이었든, 죽음의 순간은 비슷하다. 죽은 몸을 맡기고 떠난다. 남겨진 이들은 이 이별의 과정을 묵묵히 진행한다. 그 과정에 함께하는 이가 장례지도사다. 임종과 사별의 현장, 눈물과 후회와 사랑을 느낀 순간을 그대로 기록한 이야기에서 그리움을 견디는 법을 배운다. 어떤 죽음이든, 내가 감당할 죽음 앞에서 어때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죽은 이를 떠올리는 마음, 그 마음에 담아야 할 것들, 이별 후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까지, 이 의식 속에 있다. 죽음, 이별 후에 새로 시작되는 삶에 관해, 육신의 소멸이 아니라 기억에서 잊히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에 관해 우리에게 묻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별에서의이별 #양수진 #싱긋 #삶과죽음 #이별 #에세이 #장례지도사
#스위스안락사현장에다녀왔습니다 #죽은자곁의산자들 #세상의마지막기차역 #책 #책추천
#아직이죽음을어떻게다뤄야할지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