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사 치트가 너무 최강이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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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 치트가 너무 최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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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버그 -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
맷 매카시 지음, 김미정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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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국가이기에 항상 전쟁을 염려하면서도,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나 다른 대륙의 국가들까지 이 전쟁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두지 않을 거로 믿었다. 오늘날의 전쟁은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게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전쟁 상황의 모습을 잘 생각하지도 않았다. 금을 사두어야 한다, 현금은 휴지조각이 된다, 생필품을 쌓아두어야 한다는 등등. 이런 일이 내 앞에 펼쳐질 거로 생각한 사람 얼마나 될까? 이번 전 세계를 공포에 떨며 뒤흔든 ‘코로나 19’는 마치 전쟁 상황을 눈앞에서 보게 해준 거 같다. 세상에나, 마스크를 사려고 몇 시간을 줄 서는 경험 해본 적 있던가? 자주 사용하던 소독용 에탄올이 거의 두 배의 값으로 오르고 그마저도 품절이라는 답변을 듣고 황당했던 적은?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고,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세계로 이끈 이 바이러스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017년 세계보건기구가 슈퍼버그 12종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매년 70만 명이 사망한다는 통계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 사망자 숫자는 더 늘어나겠지.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슈퍼버그의 등장은 다양하고 그 속도도 빨라져서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단다. 그렇다면 이 슈퍼버그가 무엇이더냐. 항생제 내성이 있는 신종 박테리아로, 20세기 의학의 기적을 일으킨 플레밍이 발견한 페니실린 이후로 항생제 개발과 무분별한 사용의 결과로 만들어진, 박테리아가 진화한 결과이다. 백신이 존재하지 않고 변이된 슈퍼버그. 눈에 보이지 않아서 더 공포를 일으키는 이것에 인류의 목숨은 위태롭다. 저자와 그의 동료들은 이 슈퍼버그에 맞서기 위해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하려고 고군분투한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하나의 항생제를 개발하면 인류의 건강에 굉장한 영향을 미치고 끝날 것 같은데, 이놈의 바이러스는 신종의 출현과 변이를 거듭하면서 인류를 위협하는 짓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의학의 연구와 노력 역시 멈출 수 없는 장거리 레이스가 아닐까 싶다. 저자는 임상시험을 통해 바이러스를 이겨내고 인류의 안위를 도모하는데, 이 책은 그가 진행하는 임상시험의 기록이면서 그 지난한 과정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저자는 신약 ‘달바반신’이 미국 FDA(식품의약국) 임상시험 허가를 받고 시험에 참여한 환자들에게 투약하기까지의 과정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들려준다. 어떤 사람들이 이 임상시험에 참여할까? 대상자는 복합성 피부 연조직 감염증이라는 난치병에 걸린 환자들이고, 저자는 그들을 참여시키면서 각 개인의 인생사까지 함께 듣는다.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도한다. 그들 모두가 이 임상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여 살아남기를, 못된 병을 이겨내고 평범한 일상을 누리기를. 저자는 항생제의 개발 역사도 같이 풀어내고 있는데, 이는 인류가 진보하면서 함께 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페니실린에서부터 항진균제인 니스타틴, 항생제인 반코마이신 같은 약들. 이렇게 항생제가 꾸준히 개발되어야만 했던 이유가 인류의 진보와 그 맥락을 함께한다는 게 무섭다. 인류가 발전하고 진화하면서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키는 환경이 되었을 테고, 그에 따라 새롭고 변화하는 바이러스의 등장이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슈퍼버그의 존재는 우리 인류가 영원히 같이해야 할 존재인가?

 

사실 슈퍼버그는 1960년대 이전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단다. 그 후로도 산발적으로 나타나곤 했는데, 그게 1990년대 이후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뭘까. 누군가는 그 이유를 상업적 농업의 확산에 있다고 말한다. 흔히 보는, 식용과 판매를 위한 동물의 사육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동물의 생장을 인간의 의도대로 조절하려다 보니 항생제의 필요성은 커졌고, 그에 박테리아들이 항생제의 약효와 싸우면서 빠르게 변이했다는 이야기. 그렇게 지구 구석구석에 퍼진 박테리아들이 지금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게 현실이라고. 그래서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 슈퍼버그에 대한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슈퍼버그로 인한 사망자는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할 것이라고. 처음, 병상에 누워있는 병사들이 파상풍이나 패혈증으로 죽어가는 것을 막고자 발견한 항생제가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쓰인 건 맞다. 하지만 인류의 발전 속도에 따르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 역시 인간이었다는 걸 이 책으로 알게 된 것 같다. 인간 중심으로, 인류의 발전과 변화와 편리함은 분명 좋은 것이라고 여겼지만, 어쩌면 지금 우리는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는 중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도 없다. 인류가 항생제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뤘지만, 지금 우리가 감염병에 취약한 상태에 놓인 것 역시 사실이니까 말이다. ‘글로벌 전염병이 핵폭탄이나 기후변화보다 훨씬 더 위험한 재앙을 인류에게 가져올 것’이라는 빌 게이츠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끊임없이 변이를 거듭하며 인류가 개발하고 사용하는 항생제를 무력화시키는 슈퍼버그. 아무리 경고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위험해도 필요한 순간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슈퍼버그의 등장 속도는 더욱더 빨라질 것이고, 우리는 그 속도에 뒤지지 않게 계속 새로운 항생제 개발에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 속도가 같지 않다. 인류가 더 빠르지도 못하다. 새로운 항생제 개발의 속도보다 내성이 생긴 병원균의 등장이 더 빠를 것이기에 말이다. 그 경제성 때문에 제약회사가 항생제 개발에 망설이기도 한다는데,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 기업의 측면에서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인류의 숙제를 같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서로가 머리 맞대고 꾸준히 항생제를 개발해야 하는 목적은 같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 19’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가 휘청거린다. 평범하게 누리던 일상은 혼란의 도가니로 변했고, 친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것조차 두려움에 떨게 한다. 심지어 가족 모임도 안 한다고 하는 게 현실이다. 언제까지 이 위기가 계속될까? 아마 지금 사태에 관해 종식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어렵지 않을까. 의료진과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확진과 사망자가 줄어들 뿐, 이제 ‘코로나 19’는 감기처럼 우리 옆에서 언제 어디서든 발병할 수 있는 질병이 될 것 같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 저자가 시도하는 또 다른 연구는 항생제의 강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어떤 방법이든 이 상황을 종식할 수만 있다면, 인류를 위협하는 슈퍼버그의 출현을 막을 수만 있다면 다행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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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아니, 증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존재 자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러지 못한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쩌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상식과 불평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꼭 편지 같다. 친애하는 당신에게 하고 나는 말할 테다. 이름 없는 당신에게라고. 이름을 붙이면 ‘당신’을 실제 세계에 연루시키게 될 텐데, 그러면 훨씬 더 위험해지고, 훨씬 더 부담이 커진다. 저 바깥 세상에, 당신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당신, 옛날의 고리타분한 사랑 노래들처럼 그냥 당신이라고 부르련다. 당신은 꼭 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당신은 수천 명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건 아니다, 나는 당신에게 말하겠다.

당신이 내 말을 들을 수 있다고 가정하련다.

하지만 소용없다. 당신은 듣지 못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시녀이야기, 72페이지)

 

21세기 어느 날의 미국. 지구는 전쟁과 환경오염, 온갖 성질환으로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이런 불행의 시대를 누군가는 권력을 잡는 기회로 만든다. 대통령은 사라졌다. 국회는 해산됐다.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한 전체주의 ‘길리아드’가 일어났고, 국민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했다. 특히 여성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으면서 체계화하여 관리했다. 통제하고 착취했다. 평화롭게 살던 여성 오브프레드는 갑자기 이름도, 가족도,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리고 사령관의 ‘시녀’가 되어 감시당하고 살아가면서, 사령관의 아이를 임신하도록 강요당한다. 그게 ‘시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존재 이유였다. 평범하게 자유를 누리며 국가의 일원으로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던 여성들이 한순간 모든 권리를 빼앗긴 채 한 인간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게, 상상이 되는가? 갑자기 여성의 은행 계좌는 압류되었고, 기혼 여성의 모든 금융자산은 남편에게 귀속되었다. 여성들은 모두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한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한 삶이 시작되었다. 남성에 의해 지배받는 세상이 왔고, 여성의 신분은 몇 가지로 구분되어 관리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통제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가 누구를 소유하고,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해도, 심지어 살인을 해도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던가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구는 앉을 수 있고 누구는 꿇어앉거나 일어서거나 다리를 활짝 벌리고 드러누워야 한다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진짜 문제는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다 마찬가지라는 말만큼은 절대 내 앞에서 하지 마라. (시녀이야기, 233페이지)

 

읽으면서 착각을 했다. 혹시 신분 계급이 있던 우리나라의 과거 어느 시대, 양반과 천민의 구분으로 인간 차별을 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던 시절이 생각났다. 뭐가 다른지 한참을 찾고 있는데도 답을 알 수 없었다. 오브프레드가 있던 시설의 시스템이 오직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으로만, 그녀들의 자궁만 존재할 뿐이다. 여성을 아이를 낳는 도구로만 여기면서, 통제하고 교육하면서 각 사령관의 집으로 보내는 게 ‘아주머니’들의 역할이었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 따위는 없다. 쾌락의 요소를 철저히 제거한 상태로, 은밀한 욕망이 꽃필 여지도 전혀 없이, ‘시녀’들은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한, 오직 남자들의 종족 번식을 위해 존재하며 삶을 멈췄다. 시녀들은 원래 이름을 빼앗겼다. 그녀들이 배속된 가정의 남성 이름을 따 '오브000'으로 불린다. 오브프레드, 오브글렌… 처럼, 프레드의 시녀, 글렌의 시녀.

 

21세기의 대한민국은 계급이 없을까? 여성과 남성의 차별이 없을까? 오브프레드의 시대와 다르지 않을까? 소설은 2195년의 어느 날 열린 심포지엄에서 길리어드 시대에 ‘시녀’였던 어느 여성의 녹음을 들려준다. 그 여성이 오브프레드라고 추정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역사의 기록쯤으로 여기면서도 확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불분명한 출처의 기록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불임이 여성의 탓은 아니면서도, 불임의 여성을 다른 여성의 자궁으로 대신한다. 환경오염이나 성병, 핵전쟁으로 세상이 물든 게 여성의 탓인가?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 세상은 불임의 원인을 여성에서 찾고, 여권 신장에서 불안을 느끼며 성경에 바탕을 둔 세상을 만든다. 아이를 낳는 도구로 만든 ‘시녀’를 사령관의 집에 보내고, 기한 안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유배지로 보내서 핵폐기물을 치우는 인생을 만든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앓으면서 죽어가겠지.

 

오직 출산의 도구로 존재하는 여성의 삶이 과거의 어느 시대의 기록이라는 전달은 끔찍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아이를 갖기 위한 성행위에 세 명이 등장한다는 거다. 사령관과 시녀와 사령관의 아내는 아이를 잉태하려는 행위에 같이 참여한다. 불임인 사령관의 아내는 시녀의 뒤에서 단단한 벽처럼 자리하고, 시녀는 사령관과 마주하며 성행위를 한다. 감정은 없다. 쾌락도 없다. 오직 아이를 만들기 위한 의식으로 여긴다. 웃긴 것은, 계급의 위에 있는 이들은 시녀나 다른 이들을 무시한다. 그들의 일상을 위해 존재하는 여러 가지 도구 중의 하나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아이 문제에서만큼은 시녀의 자궁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남편의 아이를 갖기를 원하면서도 남편의 내연녀를 보는 듯한 시선을 던진다.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해도 아무렇지 않은 존재로 말이다. 사령관의 아내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에 필요한 도구(?)를 들이면서도, 그 도구를 존중할 마음은 전혀 없다. 사령관도 마찬가지. 그의 유희를 위한, 과거의 어느 시절에 성행했지만 지금은 금지된 것들을 은밀하게 즐기기 위한 파트너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출산 과정 역시 기가 막힌다. 마치 대리모의 출산에 참여하듯,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자세를 취하며 출산의 고통에 동참한다. 진짜로 출산하는 것처럼. 자기 것이 아니면서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온전히 자기 인생의 한 장면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들의 이기적인 세상에 희생되는 많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고민한 결과로 소설은 에필로그에서 독자에게 그 과정을 이해시킨다. 한 여성의 목소리로, 그 시대의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이야기로,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진실로 믿고 싶은 역사로 말이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누군가 만든 체제가 운영되고 있을 뿐인 세상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오브프레드가 남긴 목소리는 간절하다.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누군가는 들어줄 거로 믿고 남긴 이야기다. 목숨이 위태로운 그 순간에도 이렇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 지금 이후로의 여성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저자의 말처럼, ‘여성의 삶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으면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고 했다. 그걸 증명하는 게 이 소설의 결말이기도 하다. ‘길리어드’가 무너지고 당시의 자료들은 폐기된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삶과 고통은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길리어드’ 시대의 숨기고 싶은 폭력은,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듯이. 이런 비슷한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을 상담하던 의사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김지영의 상황과 상태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이해해주면서도, 아이 때문에 선택한 자기 아내의 경력 단절을 아파하면서도, 의사는 다짐한다. 임신 때문에 그만두는 여직원의 후임은 미혼으로 구해야겠다고. 그래서 우리는 반복해야 한다. 계속 말해야 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더는 불합리와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여성의 삶을 이어갈 수는 없으니까. 우리 인생이 암흑이 아닌 빛으로 남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오래전에 샀는데도 미루기만 했던 이야기를 드디어 읽어냈다. 혹시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뭇거리던 소설을 그래픽 노블 출간 때문에 핑계 삼아 같이 읽게 된 거다. 이미 영화나 발레, 오페라로 보여줬던 이야기는 아마 몇 번을 다시 봐도 충격일 듯하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기에 몇몇 장면을 찾아봤다. 생각보다 소설의 장면들을 잘 담아놓았다는 느낌에, 언젠가는 드라마로도 만나고 싶어졌다. 피를 보는 것 같은 빨간 드레스, 그와 상반된 하얀 두건은 누구도 그녀들을 침범할(볼) 수 없다는 분위기다. 그녀들의 시선은 오직 드레스에 감춰진 채로 보이지 않는 발끝의 어느 부분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인간이되 인간다움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어디서 이런 설정이 등장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서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1985년에 써졌다는 이 소설은 21세기를 통과하는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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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8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픽노블의 그림이 제가 책 읽으며 떠올렸던 바로 그 장면이라 놀랐어요. 같은 책을 읽은 것일테니 당연한거겠지만요. 그림이 참 사실적이네요.

구단씨 2020-03-18 14:04   좋아요 0 | URL
잔인하면서도 놀랍고, 굉장히 기억에 많이 남는 장면이었거든요.
한 사람의 존재감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이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사두고 뒤늦게 읽었다가 충격이었습니다...
 
조용한 아내
A.S.A. 해리슨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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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조디는 남편의 바람을 알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다고 표시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남편 토드 역시 아내가 자기의 바람을 알고 있다는 걸 인지한다. 그렇다고 바람을 멈추지도 않는다. 그저 각자의 어떤 생각 때문인지 현재의 상태를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냥 지금 이대로 흘러가게 놔둘 뿐이다. 조디가 바라는 건 현재의 평온한 삶이고, 토드 역시 조디의 평온을 망치지만 않으면 이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으니 나쁠 게 없다. 하지만 평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토드의 바람이 조디의 평온을 깨트리는 순간이 왔다. 조디가 간절히 바라던 안정적인 삶이 더는 계속될 수 없게 되었다. 무난히 흘러가기만 한다면, 조용히 이 삶이 유지되기만 한다면 더는 바랄 게 없던 조디는 이제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야만 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설은 아내 조디와 남편 토드의 시선을 교차로 보여준다. 같은 상황 다른 느낌. 우리가 언제나 경계하고 들어야 할 상대의 마음이 아닐까 싶은 진심을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아내인 조디가 바라보는 가정의 모습과 남편인 토드가 유지하는 가정 안에서 개인의 삶이 하나인 듯 아닌 듯 애매하다. 이렇게 유지하는 게 부부의 삶일까? 우리가 아는 가족, 가정이란 게 이런 모습이 맞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처음 조디와 토드의 마음이 하나씩 비출 때마다 의아하면서도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누구나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 각자가 바라는 최선의 선택이 다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정상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부르는 부부의 모습이 꼭 한 가지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바라보면 조디와 토드의 관계가 틀린 것은 아니다. 이대로 유지만 된다면 굳이 나쁜 결말도 아닌 채로, 그들의 진심은 누구나 들을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부부의 모습으로 그들의 관계를 끝까지 보여줄 수 있었으리라.

 

조디는 왜 토드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화내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을까? 이 부분이 정말 궁금했다.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누군가의 모습, 특히 나를 기만하고 부부의 약속을 배신하는 행위를 한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하지만 조디가 토드를 바라보는 시선은 약간 달랐나 보다.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심리상담사인 조디는 토드를 좀 더 전문가의 시선으로 봐왔던 듯하다. 토드는 현재 자기에게 닥친 문제를 있는 그대로, 혹은 심각한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축소하여 생각하곤 했다. 어머니와 자기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편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특히 자기 어머니에 관해 애착이 심했다. 그래서일까, 보이는 모든 여성에게 성적 욕망을 가진다. 실제 자기의 모습과 상태보다 과장해서 스스로 판단하는 토드의 어리석음과 그런 토드를 바라보는 조디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묘사된다. 그렇게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 특히 토드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서 완벽하다고 생각할 텐데, 정작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웃기고 황당한 상황 같은 거 말이다. 그에 반해 조디의 침묵 역시 궁금했다. 조디는 단지 평온한 일상 한 가지 때문에 토드의 행동을 모른 척하면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일까? 어떤 마음이어야 그런 대응이 가능할까? 이상하게도, 읽으면서 조디의 태도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토드의 배신으로 변한 조디가 오히려 편하게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한 여자의 심경 변화에 공감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바라는 삶이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가 바라는 방향으로 삶이 흐르기를 바란다. 침묵을 깨기로 한 조디의 선택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말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던 아내가 칼을 들고 상대를 겨누기 시작한다. 왜? 이 끔찍한 배신은 더는 참을 수 없는 게 인간이니까. 그동안 참아주고 침묵했던 조디의 노력을 깡그리 무시한 토드의 행동이 더는 그 참을성과 침묵을 유지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준다. 그때부터 조디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든다. 어떻게? 역시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동안 해왔던 대로, 조용하고 간결하게, 의외의 타이밍에 완벽한 결과를 얻기까지 하는 운까지 따라주는 행운의 여신으로 변신한다.

 

분노의 방식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궁금증으로 끝까지 읽게 되는 소설이다. 물론 조용히 참는 아내와 그런 아내의 진실을 알면서도 무시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진행하는 남편의 배신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싶은 호기심에서, 결국 터져버릴 게 터지고 나니 이제는 이 싸움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하는 시선으로 지켜보게 된다. 인과응보처럼 배신의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20년을 한집에서 따로 인생을 살아왔던 두 사람의 모습으로 계속 가게 될 것인가 하는 결말을 보고 싶어서. 그리고 여전히 선택에 관한 고민은 계속된다. 나는 조디처럼 평온을 위해 배우자의 배신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배신을 알게 된 순간 바로 드러내서 해결을 보고 싶을까. 어쨌든, 적어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토드를 응원한 적도, 토드의 바람을 이해한 적도 없다. 서로 합의하고 유지하는 관계를 일방적으로 깨트린 그를, 그런데도 일말의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가 맞이하게 될 결말만이 궁금했을 뿐이다.

 

읽는 내내 조디의 심리를 따라가게 되는데, 예상하지 못한 순간을 맞이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감정 변화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고 싶은데 어렵고, 결국 더는 내가 잃을 게 없다고 여기게 되는 순간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그게 꼭 인생의 정답은 아니겠지만,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만 문제가 끝나는 운명이니까. 어렵게 침묵을 깨고 부딪치는 일상의 벽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 궁금하다. 잔잔하게 시작되었다가, 커다란 해일을 일으키는 이야기였다가, 밀실 추리소설처럼 한 사람만이 알게 되는 긴장된 결말로 보이는 다양성까지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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