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 : 태조 - 혁명의 대업을 이루다 조선왕조실록 1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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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가장 탁월한 미래학이다.

미래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과거를 돌아봐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는 목적은 미래의 길을 찾고자 함이다. 역사가 과거학이 아니라 미래학인 까닭이 여기에 있고,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10페이지)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 1』권을 읽다가 새로운 것을 보게 되었는데, (어디까지나 내가 느끼기에 새로운 장면이었다는 거다) 3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서 거의 250페이지 가깝게 서술된 게 조선의 건국 전 이야기다. 그러니까 나는, 고려 왕조가 끝나고 조선이 뚝딱 세워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거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 ㅠㅠ) 하긴, 멀쩡히 잘 굴러가는 나라가 갑자기 사라지고 새로운 나라가 생길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동안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새로 등장하는 나라 사이의 일을 잘 듣지 않았던 거다. 왕과 왕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나라와 나라가 바뀌는 것인데 얼마나 커다란 일이었겠나. 그 일이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아는데도 간과했다. 현재의 나라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누군가는 상황을 바꾸고 나라의 역할을 제대로 할 마음을 품는 것을. 고려와 조선의 바통 체인지가 그랬다. 고려 말 나라 안팎의 상황이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특히 흉흉한 민심은 고려가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못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이성계였고, 그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조선의 건국을 이뤄낸 거였다. 그렇게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기 시작되었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잦아서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할 때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개혁이 아니고서는 해결 방법이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무렵이었다. 하지만 개혁을 하려는 사람들의 뜻은 둘로 나뉘었다. 고려를 기반에 둔 온건 개혁을 말하던 이색과 정몽주. 아예 왕을 바꾸어(왕의 성을 왕 씨에서 바꾸자는) 시작해야 한다고 급진 개혁을 말하는 신흥 무인 세력들. 이성계는 신흥 무인 세력에 속한 자다. 하지만 이 안에서도 뜻이 하나로 쉽게 모아지지는 않았던 듯하다. 개혁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가기도 했고, 뜻을 같이할 수 없는 사람들과 맞서기도 했다. 이성계는 명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최영과 우왕의 뜻에 반대하여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군대를 되돌린, 위화도 회군을 결정하기도 했다. 그건 곧 반역을 의미했다.

 

쉽진 않았지만, 이성계는 조선 건국과 함께 태조가 된다. 그의 나이 쉰이 넘어서 이룬 결과였고, 오랜 시간 함께해온 사람들과 더 나은 나라를 꿈꿨을 것이다. 고려 말의 상황과 같은 일은 만들지 않겠노라 속으로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고 그가 조선을 통치한 건 6년여 정도였다. 아버지를 따라 고려로 귀순하고, 변방 촌뜨기에서 조선의 태조가 되기까지 그의 대서사시가 『조선왕조실록 1』권에서 펼쳐진다.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이뤄낸 것을 유심히 지켜봐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거였다. 민심을 읽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의 정책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의 정치나 선거 대책 방향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거기에 그의 리더십과 겸손이었다. 그의 겸손은 특히 이 책의 후반부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그는 조선 건국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만의 능력으로 조선을 건국한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 건국 이후 조선왕조를 더 탄탄하게 하려고 주변 사람을 이끄는 모습은, 리더라면 어때야 하는지 몸소 보여준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말년에는 왕자의 난을 지켜보면서 과오를 뉘우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태조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혁명적 토지 개혁을 단행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랑과 고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 짊어질 수 있는 극도의 증오를 동시에 받으면서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가는 저승에는 함께 이 왕국을 만들었으나 먼저 왕국을 떠난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래는 언제나 그랬듯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었다. (356페이지)

 

조선왕조실록이 독자에게 읽히는 건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78편의 사극 드라마가 조선을 배경으로 했다고 하니, 조선왕조는 충분히 흥미로운 소재이긴 하다. 조선왕조의 모든 왕을 드라마로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원작이라고 불러도 좋을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는 게 어떤 독자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나야, 나) 다양한 버전으로 나온 조선왕조실록을 읽는 맛이 있을 텐데, 이미 검증된 역사학자 이덕일의 목소리로 만나는 조선왕조실록은 사뭇 웅장한 느낌이다. 이제 시작인데 정통 조선왕조실록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크기 때문이다. 구상과 자료조사에 10년의 시간이, 집필에 5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믿고 읽어봐도 좋을 작품이다. 이미 2권(정종, 태종)까지 출간되었고, 곧이어서 계속 출간될 다음 왕들도 얼른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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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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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건 육체가 늙고 죽음과 가까워진다는 것과 같다. 서글퍼지기도 하면서 도무지 늙어가는 것의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고 투정도 부리게 되지만, 찾아보면 나이 듦의 장점이 있다. 세월을 흘러보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그러하다. 어떤 일이 일어났던 그때 말고, 시간이 흘러야만 알게 되고 확인하게 되는 일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서커스 나이트』는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만나는 치유에 관한 이야기다. 느리고 더디게 가면 도태되고 낙오된다고 믿는 세상에서, 느리게 천천히 보내는 시간에서 만나는 상처 회복의 순간을 차분하게 들려준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매력 있는 작품이다.

 

사야카에게는 희한한 능력이 있다. 사이코메트리. 어떤 사물을 만지면 그 사물과 관련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누군가의 땀 냄새가 밴 티셔츠 한 장을 만지면 그 옷 주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가능하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편지의 발신인은 오래전 헤어진 남자 이치로. 현재 사야카의 삶을 보면 이치로의 편지는 뜬금없는 일이다. 사야카는 아이가 있고, 아래층에는 시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남편은 없지만 한 가정의 유부녀인 것이다. 이치로의 편지는 뜻밖이었지만, 편지의 내용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야카가 사는 집 마당에 소중한 무언가가 묻혀 있으니 찾으러 가도 되겠냐는 내용. 물론 이치로는 그 집에 사야카가 사는 줄 모르고 보낸 편지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오래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살던 집에 내가 살고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특이한 인연에 소설이 어디로 흘러갈지 몰라서 계속 읽게 되는데, 요시모토 바나나의 담백한 문장이 어김없이 담담하게 읽게 한다. 조금 특이한 가족 구성원의 등장부터 그러하다.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시한부 남자에게 받은 청혼, 죽기 전에 자기 아이를 낳아달라며 말하는 남자나 그 제안에 응한 여자나 닮았다. 일찍 부모를 잃은 사야카에게 그렇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아무 조건 없이 사야카를 받아준 시부모님, 죽는 그 날까지 사야카를 아끼고 사랑해주었던 남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아이. 그리고 이치로의 편지에서 확인한, 마당의 히비스커스 나무 밑에 묻힌 작은 뼛조각을 발견한 사야카는 그 뼛조각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렇게 오래전 시간과 조우한다. 뭉개져서 굽어버린 그녀의 엄지손가락, 마당의 나무 밑에 묻힌 것은 왜 이치로와 연관이 있는 것인지, 그녀의 지나간 시간이 하고 싶은 말을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천천히 듣게 된다.

 

사야카의 지나간 이야기가 현재와 교차하면서 하나씩 들려온다. 지나간 시간의 중심에는 이치로와 연관된 일들이 있는데, 그때 그 시간이 그렇게 흩어져버릴 수밖에 없었던 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조금 더 너그럽게 이해하고 융통성 있게 흘려보내도 될 일들이 그때는 왜 참지 못하고 도망쳤을까? 이치로는 왜 사야카를 좀 더 찾아가지 않았는지... 아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아무리 말해도,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고, 도망치는 게 방법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여기며 자기 안위를 살폈을 것이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였겠지. 사야카가 겁쟁이여서가 아니라, 이치로가 사야카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치로의 어머니가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라...

 

심각해질 거 없어, 모든 건 지나가니까 즐겨, 하는 메시지 때문이었을까.

실제로 기분이 좀 편해졌다.

이치로의 방에 있을 때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던 그 기분. 겨우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조금은 미안해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변해 간다.

아무리 불러도 사토루는 돌아오지 않고, 미치루는 성장해 간다.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무리 없을 일만 하고 싶다.

간절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됐어, 그다음으로 넘어가, 하고 사토루가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278페이지)

 

이 지점에서 확인하게 되는 게 바로 시간의 힘인 것 같다. 그때는 잘 몰랐고 아니라고 믿었지만, 지금은 감당하게 되고 이해가 되는 순간이 되는 일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마 그때는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상황을 담아낼 마음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해서일 수도 있다. 그 무엇이 그때를 어렵게 했든지 내 안의 자리가 있어야 그 많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보듬을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리가 없어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이치로의 어머니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이치로가 실행에 옮기면서 사야카와 다시 만나게 된 건, 삶의 그런 이치가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그때 마무리하지 못했던 감정을 정리하고, 뒤늦은 오해를 풀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게 되는 순간. 시간이라는 다리를 건너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또 한 번 강조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모든 상처가 다 아물고 없었던 일로 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자기가 감당하고 정도의 몫으로 이해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성장하고 배워가는 시간의, 흐르는 세월이 담아낼 수 있는 장점이라고,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이 나이가 되어 늙어가는 육체가 버겁고 슬프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이 쌓여 경험하고 배운 것들 때문에 또 지금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걸, 지금은 안다. 지나간 많은 시간 속에서 나도 사야카처럼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있었을 것이고, 그게 그 순간의 답이라고 나 자신에게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는 어설프고 서툴러서 그래서인 줄 모르고 말이지. 그때와 지금을 연결하는 긴 시간은 저자의 말처럼 회복의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만 향한 시선에 미치도록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때는 거기서 머물러야만 치유되는 상처들이었을 거라고. 그 시간을 견디고 나니 현재의 시간이 또 다른 회복을 불러왔다. 사야카가 작은 뼛조각에서 읽은 간절한 마음을 듣고 용기 내어 연락하고 다시 마주하며 지나간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시간.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힘을 서서히 깨닫는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살아왔더니,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하면서 지내왔더니, 어느 순간 보니까 상처와 아픔은 회복되어 있기도 하더라는 말을 이렇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평범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 배경이나 캐릭터는 그다지 평범하지 않았다. 사야카와 이치로가 연결된 히비스커스가 심어진 집, 남편도 없는 집에서 시부모와 함께 하는 일상, 초자연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발리, 발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야카 성장의 시간, 손길이 닿으면 사물의 이야기를 읽는 능력. 어쩌면 자연이 삶 곳곳에서 묻어 있으면서 인간의 일상을 주관하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발리의 풍광을 묘사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자연이 늘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묘한 분위기 속의 일상에서 특별한 사람들의 정이 또 평범하게 보이는 건 무슨 조화인지. 결국은 그렇게 돌고 돌아서 우리 삶의 평범함을 다시 비춘다. ^^ 아마 그건 요시모토 바나나가 가진 특이한 능력 때문인 것 같다. 낯설고 어색하게도 보이는 분위기로 소설을 읽게 하면서도, 독자가 우리 삶과 닮은 평범함을 찾아내게 하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많은 문제와 생각을 꺼내어 공유하게 한다는 것을.

 

사람은 저마다 많은 사람들과 이어져 있고, 그 사이를 오가며 조금씩 바퀴를 돌린다. 그것도 자연의 섭리의 일부다. (408페이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순간을 들려준 것 같다. 버릴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 존재하는, 하지만 이제는 어둡지 않게 만들어야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되는 기회. 한 걸음 한 걸음, 때로는 웅크리고 때로는 기지개를 활짝 켜면서, 아픈 기억이라도 꺼내야 한다면 꺼내어 보면서, 나아가는 걸음들을 이렇게 듣는다. 누군가에게는 지금이 상처를 만드는 시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지금이 회복의 시간일 수도 있다. 저마다 지금 시간이 만드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언젠가는 그 회복이라는 것을 마주할 거라고, 세월이 조금 흘러야 가능한 일이라면 조금 기다려도 괜찮지 않으냐고 말하고 싶다. 지나고 보니 조금은 알겠더라, 하는 말을 굳이 여기서 한 번 더 적용해본다. 지금은 그 시간을 조금은 더 지켜보자고 말이다. 빈틈없이 뭔가가 꽉 들어차 빽빽했던 마음에 곧 공간이 생길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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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다.
더워도 너무 덥고
새벽에는 4시쯤부터 환해지더니
5시 반쯤 되면 서서히 해가 보이는 것 같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힘든 사람인데
더위 때문에 새벽에 해 뜨는 걸 본다.
하루에 거의 2~3시간 자는 듯...

밖에 일보러 다녀야 하는데도 겁이 나서 나설 수가 없다.
샤워를 하면서도 동시에 땀이 흐르는데 어째야 하는 건가?
겨울이 힘들지만 올해 여름은 진짜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 같다.
택배 기사님 꼭 3~4시에 오셔서,
가장 더운 시간이라 물건 받으면서도 죄송하고 그래서
이제는 500ml 생수 얼려놨다가 드린다.
마트에 가니 300원 하더라.
당연히 자기 할일 하면서 돈 버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 있겠지만,
그 말도 맞는데,
이 살인적인 더위에 당연한 일도 힘든 건 힘든 거 아니겠나...
얼음물 드리면서 죄송한 마음 달래 봄.

최고 온도 35도라는데
체감온도는 도대체 얼마만큼인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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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2018-07-2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어컨없이 살아낸 그동안의 여름을 덧없네요. ㅠㅠ
올해를 버틸수 있을지....;;;;;;

구단씨 2018-07-27 23:55   좋아요 0 | URL
아 진짜 덥네요.
생각해보면 작년에도 에어컨을 그리 많이 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올해는 에어컨 고장 날까봐 무서워요. (이미 며칠 전에 한번 점검 받은 터라 더 무섭다는...)
한번 서비스 접수하는데 최소 일주일 후에나 수리하러 온다는 말에 식겁...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빈말로라도 마음에 없으면 밥 한번 먹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스치듯 우연히 만나는 사이가 다음에 밥 한번 같이 먹을 일이 일어나는 건 드물다. 그래서 그런 빈말에 마음을 두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내가 먼저 꺼내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다. 언제였던가. 서른 즈음에 중학교 동창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인지 자주는 아니어도 그렇게 어쩌다 한번, 몇 달에 한 번 정도 우연히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웃으면서 인사하고 지내는 정도. 어느 날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친구가 나한테 언제 시원한 생맥주나 한잔하자고 그러면서 인사하고 지나갔다. 그 친구가 느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인사하고 지나갔다. 그 친구의 제안이 씁쓸했던 건 빈말이라는 걸 고스란히 드러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언제 한 번 시원한 생맥주 한잔하자고 하면서 내 연락처를 묻지 않고 갔다. 몇 년 동안 몇 번을 지나치며 인사했어도 그 친구와 나는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그런 상대에게 내가 '다음에'라는 가정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술 한 잔'이라는 '다음에' 역시 기대하지 않았던 거다.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에'가 있을 수 없을 거, 아닌가

 

전작들을 꾸준히 챙겨 읽고, 개정판 특별판 한정판 등등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기존 출간작도 관심 두게 하는, 인터넷서점의 출간 알림을 설정해놓은, 나에게 이도우는 그런 작가다. 6년 만에 출간되었다는 이번 작품 소식이 반갑다. 느려터진 내가 다행히도 선착순 사인본을 놓치지 않았다. 힘들었던 건, 받아놓고도 바로 읽지 못하고, 이제 좀 읽어보려고 하니 폭염에 책을 손에 들 수 없었다는 거. 힘들지만, 읽어냈다. 사람을 읽고, 이야기를 읽고, 그들이 전하는 삶의 모습들을 읽었다. 아마도 특별한, 아주 특별한 뭔가를 기대하고 읽었다면 밋밋하고 재미없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이런 기대를 한 독자가 있겠지? 솔직히 말하면, 나도 조금 기대했다. ^^) 이야기는 평범했고, 잔잔했다. 사람에 치이고 세상에 치이던 여자가 어렸을 적 자랐던 곳으로 돌아왔다는, 그곳에서 고교 동창이 작은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싶던 순간에 시골 동네의 작은 서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듣는 시간 때문에, 오래전 해묵은 상처부터 기억 속에서 잊으려고 애쓰던 상처까지 같이 찾아오고야 말았던, 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찾은 것들 때문에 상처는 비워지고 마음이 채워진다다는 내용

 

 

 

 

 

 

 

 

 

듣고 보니, 별거 없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서 높낮이가 심한 감정을 읽는다거나 사건의 출렁임을 자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잔잔한 흐름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의 한마디, 의외의 장면에서 삶의 뭉클함을 찾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아아, 속이 시원하다."

이제 해원은 추운 것도 못 느꼈다. 실내복에 맨발엔 은섭의 슬리퍼만 꿰신고 나왔는데도 몸에서 이상하게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명여가 통쾌하게 외쳤다.

"그래, 다 망가져버려라! 내가 망가지는데 집이 멀쩡하면 되겠니, 같이 고장 나야지!"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145페이지)

명여 이모의 낡은 펜션으로 찾아온 해원은 이모가 왜 펜션을 방치하는지 몰랐다. 이 장면을 읽고 있던 나도 몰랐다. 그러나 명여가 통쾌하게 외치는 그 순간의 감정은 알 것 같았다. 답답함이 폭발하듯, 본인은 닫아두고 꼭꼭 눌러두면서 그 감정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단속하고 살아온 것 같은데, 고장이 난 수도가 폭발하듯 분수처럼 튀어 오르는 순간, 명여의 마음도 폭발했으리라. 아무리 단속을 한다고 해도 감정은 작은 틈새로라도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이건 뭐, 새어 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폭발했으니 얼마나 거대했을까. 이렇게 소리치고 싶던 순간이 명여에게 얼마나 많았을까? 담고 있자니 아프고 답답하고, 쏟아내자니 그게 감당이 안 될 테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자책의 순간을 조금은 더 끌어안고 있었으리라. (명여가 왜 자책하면서 15년을 살아왔는지는 소설의 후반부에 나온다) 이 장면을 읽는데, 몇 문장 안 되는 명의 외침을 듣는데, 갑자기 뭔가 확 터지는 것 같은 기분에 은근슬쩍 개운함마저 들었다. , 한파에 수도는 터지고, 물은 분수처럼 튀어 올라온 집을 얼음 왕국으로 만들었지만, 명여의 속은 시원했을 것만 같다. 그러면서 감정이 이입된다. 누구나 그런 순간 담고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차마 꺼내놓을 수 없는 말에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는 일들, 어디 대나무 숲에라도 가서 외치고 싶은데 그래서도 안 될 일들, 그게 담아두고 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니까.

 

이게 시작이었나 보다. 서울 생활이 지친 해원이 강원도 시골의 이모 집을 찾아든 이유도 명여 이모가 외치던 이유와 비슷할 것 같다. 시원하게 쏟아냈으니, 이제 회복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거다. 이야기는 그 길을 참 천천히 걷게 한다. 당장 뭔가를 전환하는 게 아니라 서서히 걷는 길을 여는 것만 같다. 고장이 난 수도 때문에 펜션 호두하우스의 수리 기간은 열흘 정도 걸린다고 했다. 수리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명여 이모는 친구 수정의 집으로, 해원은 은섭의 집으로 임시 피난처로 삼는다. 그리고 서서히 상처를 비우고 마음을 담는 시간을 연다. 해원은 은섭의 서점 굿나잇책방에서 일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은섭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서점 일에 몰두하면서 피곤했던 서울에서의 시간을 잊는다. 일주일에 한 번 독서 모임에 참여하면서 사람들과 친해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섞이는 법도 익숙해진다. 그리고 얼음 왕국이 되어 흉가처럼 보이던 호두하우스는 일주일의 시한부였지만 굿나잇책방의 이벤트 상품으로 활용된다

 

소설 곳곳에서 묘사되는 장면들이 눈앞에 그대로 그려진다.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독립서점의 분위기를 그리면서 읽게 되기도 하지만, 그 공간에 모여든 나이 성별 불문한 책모임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작고 허름한 기와집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펼쳐질 작은 서점 내부, 여름 내내 푸르게 자랐던 벼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겨울 논의 스케이트장,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 리어카의 뒷자리에 앉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승호, 뭔가를 계속 만들면서 손을 놓지 않는 소녀 감성 수정 씨, 엘이디 전구로 바꾸라며 영업에 열을 올리지만 그래도 책이 좋아서 책방을 찾는 거라고 믿고 싶은 근상 씨, 반항하는 이미지 뒤로 속이 꽉 찬 아마추어 래퍼 현지. 그중에서도 명여 이모의 표정을 계속 그리면서 읽게 되는데, 내가 바라보는 명여 이모의 얼굴은 항상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 말을 하지 못하는 나날들 때문에 명여 이모는 단 하루도 편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해원의 인생에 책임까지 느끼지는 않았을까? 상당히 복잡한 표정의 명여 이모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 한밤에 창으로 비친 달빛에 의지해서라도 뭔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할 말이 너무 많지만 할 수 없어서 곧 죽어도 계속 써 내려가야만 하는 사람, 그렇게까지 했건만 다 쏟아내지 못한 사람의 얼굴을...

 

전에 이모가 했던 말을 생각해봤어. 날씨가 좋으면 만나자는 건 너무나 기약이 없다는 거. 그러게, 좀 더 때가 되면, 상황이 좋아지면차일피일 미루게 되는 일들이 내게도 있었어. 이젠 조금 다르게 살 수 있을까?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401페이지)

 

어쩌면 우리에게 화해나 용서, 상처를 덜어내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무게가 없는 말들이 그 순간을 만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잔뜩 날 선 마음을 둔해지게 하기 싫었나? 나를 방어하기 위해 계속 뾰족하게 있어야 했던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 더는 안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의 제목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다는 말은,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말과 같다고 명여 이모가 그랬다. 그건 만나지 말자는 말이라고. 그랬다. 그런 빈말들. '다음에'라며 약속 시각을 못 박지 않고 흐지부지 잊어주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은 말. 해원이 보영에게 지금은 너무 춥다면서 날씨가 좋으면 만나자는 말을 했을 때, 아마도 해원은 미루고 싶었던 것 같다. 기억 속 상처를 들추는 시간을, 그 상처를 다시 꺼냈을 때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을, 어쩌면 영원히 기억에서만 머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그런 상처들이 안에서 머물기만 한다고 좋은 걸까? 그대로 있어도 괜찮을 걸까? 아니다. 괜찮지 않으니까 우리는 매번 그 상처를 조금씩 들추고, 싸우고 화해하고, 괜찮아지려고 노력하는 거 아닐까. 그 괜찮아지는 시간은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는 건가 싶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갈 게 아니라, 먼저 찾아가서 그날 날씨를 좋은 날로 기억하라는 듯이. 결국은 그 상처도 치유도 내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 '너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그때는 하지 못했던 말이, 세월이 흐르니까 이렇게 용기를 내게 하기도 하는구나' 싶은 조금은 늦어버린 안심. 그래도 괜찮다. 이제는 손을 내밀어야 하는 순간을 만드는 사람이 누구여야 하는지를, 날씨가 좋은 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되었으니까. '언제 밥 한번 먹자'는 것으로 시작한 빈말(?)'우리가 같이 밥을 먹은 그 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는 마음 가득한 말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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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0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20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란장미 2018-07-2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말말고 꽉찬 말로..... 우리도 밥 한번 먹어요.ㅎㅎㅎㅎㅎ
완전 진심!

구단씨 2018-07-28 00:11   좋아요 0 | URL
속을 꽉 채울 수 있는 음식을 골라봐야겠어요~!! ^^

다락방 2020-02-2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비 채널 돌리다 이 드라마를 하는 걸 알게 됐어요. 어? 이건 이도우 작가 책인데?! 저는 읽지 않은 책이지만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고, 오, 이거 분명 구단씨 님의 리뷰 있을거다! 하고 찾아왔어요. 역시 있었습니다! 헤헷 :)

구단씨 2020-02-28 15:38   좋아요 0 | URL
아... ^^
언젠가부터 드라마 방영 시작 예고도 많이 하더라고요.
알면서도 드라마는 못 봤는데, 반응은 궁금합니다. ^^
 
나의 아로니아공화국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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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어떤 설문에서인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아니, '어떤 대통령이었으면 좋겠는가?'였던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그 질문을 받고 별것 아닌 것처럼 들렸던 한 문장을 꽤 오래 생각하고 답했다는 것뿐. 지금 생각해보면 두 질문은 다르지만 닮았다. 어쩌면 하나로 엮어진 질문일 수밖에 없는, 하나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꿈꾸는 나라와 내가 바라는 대통령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나라를 이런 대통령이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자면, 현재 우리 삶을 아프게 하는 일들을 사라지게 할 국가의 손길이 가장 먼저 생각날 것이다. 빈부 격차나 실업률, 미세먼지 대책, 최저임금이나 법정근로시간 등. 요즘 지겹게 뉴스에서 보는 아픈 일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해줄 나라와 리더를 원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그 답은 너무 어려웠나 보다. 지금까지 몇십 년이 흐르도록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면서도 앞으로도 그리 쉽게 해결될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이다. 나의 이런 비관적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런 나라와 대통령을 찾기 어렵다면 만들면 되지 않으냐고, 그 말을 실행에 옮긴 사람이 여기 있다.

 

 

아로니아 공화국. 초대 대통령, 재선 대통령 김강현. 재밌게 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고 여기며 만든 나라. 주인 없는 지역을 접수하고 거대한 프로젝트 성공시키듯 아로니아 공화국을 만든다.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한다면서 높은 건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건물의 최대 높이는 5층. (인구가 많지 않으니 가능한 일?) 공기를 오염시키는 자동차도 없다. 걸어서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된다. (나라가 넓지 않으니 가능한 일?) 아주 탄탄한 국방 시스템으로 군대가 필요 없으니 군 면제 특혜 비리 같은 것도 없다. 공부하라고 스트레스 주는 사람도 없다. 오직 신나게 잘 노는 방법을 가르친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한다.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기업이 소득을 배분한다. 아이의 탄생은 국가 전체의 축제이며, '영원히 행복할 의무'를 부여받는다.

 

나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아로니아는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시민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한다. 시민은 늘 항상 언제나 국가권력보다 무겁고 소중하며 우선돼야 한다. 오로지 이것만이 아로니아가 존재하는 이유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허투루 여기는 국가는 국가로서 자격이 없다. 시민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나 몰라라 하는 국가는 국가로서 존재 이유가 없다. 자격이 없고 존재 이유가 없는 국가는 반드시 사라져야 마땅하다. 잘라서 말한다. 아로니아 시민은 곧 아로니아 국가 그 자체다. (151~152페이지)

 

듣고 있자니 살짝 어이가 없기도 하다. 이런 나라가 있을 수가 없잖아. 그러니 이런 말장난 같은 거 그만두고 오늘의 현실을 제대로 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바라던 나라가 바로 이런 나라 아니었을까?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상하를 나누는 학습이 아닌 공부, 치열한 경쟁에서 이뤄내야 할 부유함이 아니라 보통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싶은 것. 누구나 바라지만 함부로 이뤄지지 못할 일이기에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렇게 간단하게(?) 이뤄놓은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김강현과 그의 일당들은 해냈다. 이상향의 나라를 상상 속에서 머물게 놔두지 않고 현실로 옮겨왔다. 이제 아로니아 공화국의 국민들은 재밌게 잘 놀면서 행복해지기만 하면 된다. 그게 아로니아 공화국 국민의 의무다.

 

이런 나라가 있다니! 아니, 이런 나라가 있다면 누구라도 먼저 가고 싶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 이 땅에서 겪는 불행한 삶과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 안고 찾아가고 싶을 것이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요소를 조목조목 따져가며 그 해결책을 마련하거나, 그 불행과 반대되는 정책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데 놓치고 싶지 않다. 그곳으로 가면, 내가 아로니아 공화국 국민으로 속한다면 정말 행복해질 것만 같다. 그렇다고 믿었다. 아로니아 공화국 국민도, 아로니아 공화국을 만든 김강현 대통령과 개국공신들도. 처음에는 그들이 바라는 이상향에 맞는 나라로 갖춰지고 있음에 너도나도 행복했다. 신난다. 그들이 그리고 꿈꾸던 나라가 이렇게 이뤄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자니 이 무슨 신성한 일이던가. 하지만 그 꿈같은 일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들이 바라던 세상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이었다. 그 바람이 이뤄지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몇 년 동안 그들이 그리는 세상을 차곡차곡 만들어가면서 확인하게 된 건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강현의 아내 강수영이 현 정권의 야당에 가입하고 차기 대통령이 되어 이루고자 하는 건 그들이 이룬 국가의 소멸이었다. 아니라고 하지만, 기존의 국가들이 국민을 불행하게 했던 요소들을 배제하고 끌어가는 게 아로니아 공화국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 점점 피어오르는 건 국가의 본성이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양립할 수 없게 하는 국가 운영 시스템이 그러했다. 관리와 통제, 규율과 제재, 그 이상의 여러 가지가 국가와 국민이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게 했다.

 

소설은 김강현의 과거와 대통령 퇴임을 앞둔 일흔의 현재를 교차로 보여주는데, 그의 과거가 서술되는 장면에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그대로 드러낸다. 특히 김강현이 대학에 가고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검사가 되고 또 검사를 그만두게 되는 과정이 암울한 대한민국의 민낯을 고스란히 비춘다. 부정부패와 부조리, 학연 지연으로 공정하지 못한 판결의 순간들, 세상이 미쳐 날뛴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엇 하나 인간의 행복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대한민국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시스템에서 수혜의 대상이었던 김강현이 뒤늦게 깨달은 것이 국가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 그런 국가를 떠나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 타이밍에 끼어 들어온 무리로 김강현은 아로니아 공화국의 건립을 실행에 옮기게 된 거다. 그렇게 새로 세우는 나라에 얼마나 기대가 컸을까? 정말 잘 놀기만 하면 되는 나라라고 생각했겠지? 이 소설을 읽는 나 역시 그럴 거라고 믿었고 기대했다. 소설에서나 가능한, 상상 속에서나 이루어질 일을 그려내는 순간의 희열 같은 것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국가가 국가로 존재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은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온전하게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강수영이 김강현에게 설명하는 장면을 볼 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랬다. 김강현이 이룬 국가는 점점 우리 사는 현실의 국가와 닮아갔다. 그때 강수영이 제시하면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공약 또한 기가 막힌다. '공동생산, 공동분배, 공동행복'이었다. 공산당이 없는 공산주의식 인간공동체를 꿈꾸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온전하게 이뤄질 수 있을까?

 

지금까지 지구상에 없던 나라. 누구나 꿈꾸던 나라. 하지만 우리가 사는 모든 국가의 모습이 그대로 비춰준 결말. 마지막에 강수영이 제시한 국가도 역시 완전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그녀가 이룰 나라의 시스템 역시 과부하가 걸릴 수 있고, 그 시스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도 있다. 그녀가 김강현의 아로니아 당에 맞서 그린머슬아로니아 당에 입당하고 자기 생각에 목소리를 높인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대통령이 된 강수영이 아로니아 공화국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다 듣지 못했기에 섣불리 강수영 정권의 성공과 실패를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김강현에서 강수영으로 바통 터치된 정치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듣다 보면 한 가지 결론을 얻게 된다. 자신이 속한 국가에서 문제를 먼저 찾을 게 아니라, 그 국가의 시스템 안에서 내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지 먼저 점검해야 할 문제였다. 나라가 싫어서 떠나고, 나라가 싫어서 새로 만들어도 변하는 건 없었으니까.

 

시종일관 웃음과 기가 막힌 상상으로 독자를 시선을 놓치지 않는 소설이다. 그만큼 우리의 간절함을 담은 이야기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김강현의 성장 과정은 특히나 재밌다. 꼴통이 첫사랑에 빠져 개과천선하여 성공한 남자로 거듭나는 게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배경이 흥미롭기도 하다. 그들이 모여 풀어내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웃음이 끊이지 않지만, 소설은 결코 가볍게 흐르지 않는다. 분노와 아픔, 감동과 추억이 새겨진 우리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행복 하고자 국가의 탄생을 이뤄냈고, 그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 국가의 소멸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행복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어디서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그 행복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에 맞서 어떤 대안을 만들어서 행복에 이르러야 하는지 계속 묻는다. 그 대안이 국가를 세우는 것만은 아닐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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