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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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단하지 말 것.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예단을 하는 이유는 그게 좀 더 쉽고 게으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들에 대해 너무 열심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375페이지)

 

머리가 없는 소녀의 시신이 발견된다는 내용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처음부터 긴장감을 안고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시신이, 그것도 머리가 없는 시신이 발견된다는 게 평범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 살인을 했고, 머리를 잘라서 가져갔고, 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불안에 떨면서 생활한다. 시간이 상당히 흘렀는데도 범인은 잡히지 않은 상태가 더 무섭다. 이 끔찍한 일을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지만, 범인이 잡혔다면 조금은 안심하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도대체 소녀는 왜 죽은 것일까, 누가 소녀의 머리를 가져간 것일까, 도대체 왜?

 

앤더베리는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다. 마을 어디에 누가 사는지 정도는 다 알 수 있는 곳. 열두 살의 에디는 친구 네 명과 무리를 이루어 다닌다. 어느 날 이 아이들은 낙엽 더미에 덮인 소녀의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그리고 범인이 남겨놓은 흔적으로 보이는 하얀색 분필로 그려진 그림. 그리고 범인으로 지목된 남자가 있다. 에디에게 분필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알려준 사람, 에디의 학교에 선생으로 새로 부임한 남자, 에디가 백색 인간이라고 부르던 핼로런 씨. 그가 금발 머리 소녀를 죽인 범인일까?

 

이 소설은 1986년과 2016년, 30년의 시간을 오가며 과거와 현재를 교차로 이야기한다. 1986년에 열두 살이었던 다섯 소년 중의 한 명인 에디가 주인공이 되어 소설을 이끈다. 2016년의 에디는 학교 선생이다. 부모님이 살던 낡은 집에서 여전히 지내고 있으며, 셰어하우스처럼 클로이라는 여자애에게 방을 하나 내주고 있다. 마흔두 살의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지내면서, 과거의 친구들이었던 개브와 호포를 여전히 친구로 두고 있다. 어느 날 배달된 한 통의 편지가 30년 전의 시간을 다시 끌고 온다. 그리고 그때의 시간은 사건도 같이 불러온다. 마틴 목사를 해치고 등에 천사 날개를 그린 건 누구일까, 미키의 형 션을 강물에 빠져 죽게 한 사람은 누구일까, 호포의 개는 왜 죽었는지, 핼로런 씨는 정말 금발 머리 소녀를 죽였을까, 오랜 세월을 지나 미키는 왜 다시 에디를 찾아온 것일까...

 

등장인물 모두가 수상해 보인다. 낙태는 죄악이라며 신도들을 이끈 마틴 목사의 진짜 모습을 의심하게 된다. 건들거리던 미키는 형이 죽고 나서 더 불량해졌다. 핼로런 씨는 왜 금발 머리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에디의 부모님은 이 모든 사건과 전혀 상관이 없는 건지. 왜 모든 사건에 초크맨의 메시지는 남아 있는 걸까. 초크맨이 등장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사건은 일어나고, 사람들은 충격에 빠진다. 그럼 초크맨을 잡으면 되는데, 초크맨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니, 정말 초크맨이 범인이 맞기는 한 건지... 알아도 모르는 것투성이다. 의문은 늘어나고 사건은 풀린 듯 풀리지 않는다. 무엇 하나 분명하고 개운하게 해결된 것은 없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사건은 종료되고, 잊힌다.

 

내가 요즘 듣는 노래가 있다. 클로이가 하도 틀어서 비교적 견딜 수 있게 된, 프랭크 터너라는 포크 겸 펑크 가수의 노래다.

후렴구에 저지르지 않은 일로 기억되는 사람은 없다는 가사가 나온다.

하지만 그게 백 퍼센트 맞는 말은 아니다. 내 인생은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 내가 하지 않은 말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인엇이 누락되었는가가 우리를 규정한다. 거짓말이 아니라 밝히지 않은 진실이 우리를 규정한다. (212~213페이지)

 

에디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을 때마다, 과거의 인물들과 하는 이야기가 늘어날 때마다 사건의 진실은 드러난다. 그때 그 일의 진짜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거였다. 인제 와서 드러내봤자 무엇이 달라질까 싶지만, 그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사건의 해결보다는 자기 자신이 이제는 좀 편하게 지내고 싶어서 꺼내놓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중에는 진실을 말하기 싫었지만 드러내놓은 사람도 있다. 어쨌든, 30년의 세월은 범인도 범인이 아니게 만들고, 이제야 꺼내놓은 고백이 대나무 숲에 머물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독자는 사건의 진실을 하나씩 들을 때마다 섬뜩해진다. 사소했지만, 고의가 아니었지만, 사건은 커졌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누군가의 진짜 모습을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일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그 책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난감한 것이 어디까지 말을 해도 되는가, 이다. '절름발이가 범인이다~'라고 외치던 목소리에 분노한 독자라면 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이럴 거라는 예측과는 다르게 막상 펼쳐보니 진실은 저기 멀리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소설을 읽는 긴장감은 커진다. 예상했던 인물과 다른 사람이 범인이 되었을 때 두 눈은 커진다. 무엇보다, 전혀 다른 곳에서 진짜 범인이 등장할 때는 심장이 쫄깃해진다. 소설 『초크맨』은 긴장감과 읽는 재미를 동시에 만들어주기도 하면서, 인간이 저지르는 사소함이 얼마나 큰 사건을 만드는지 보여준다. 이럴 줄 몰랐어, 하는 뒤늦은 후회는 사실을 털어놓을 기회마저 놓치게 한다. 30년을 건너와 들려오는 진실은 끔찍하다. 무엇보다 호기심 때문에, 습관이 되고, 그게 또 인식하지 못하는 범죄를 몸에 익숙하게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게 가장 무섭다. 인간이 가장 무섭다는 누군가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우리는 스스로 해답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건 정답이다. 그게 인간의 천성이다. 우리는 원하는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질문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뭔가 하면 진실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은 그냥 진실인 습성이 있다. 우리는 그걸 믿느냐 믿지 않느냐만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24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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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의 겨울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5
토베 얀손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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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계절인데, 해마다 겪는 게 다르게 느껴진다. 작년의 여름과 올해의 여름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올해 여름을 견디면서 생각하는 건 '작년에 에어컨을 몇 번 켰더라?' 하는 거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작년 여름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에어컨을 켜고 지낸 날이 적었다. 올해는 에어컨이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 더위에 에어컨이 말썽이어서 서비스 신청을 했는데 기본 일주일은 기다려야 점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더 더운 것 같았다. 다행히 큰 문제 없이 점검받고 다시 시원한 집안에서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태어나서 몇십번의 여름을 겪었지만, 올해의 이 지독한 여름과 더위는 처음이라고 기억될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다. 처음 겪는 일이 어디 올해의 여름뿐이랴. 올해의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울지, 내년의 여름은 올해처럼 더울지, 알 수 없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많은 일이 그랬다. 처음 먹는 음식, 처음 보는 것들, 처음 가보는 장소들.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일 대부분은 처음을 거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던 거였다. 무민에게 이 겨울도 그러하겠지. 지난번에는 '태양이 저물어도 어둠이 찾아들지 않는 한여름'을 경험하더니, 무민은 이제 처음 보는 겨울을 지나고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한겨울 속에 있다. 해마다 11월의 겨울잠을 자는 무민들. 그렇게 잠들면 다음 해 4월에 잠에서 깨고, 잠에서 깬 무민들을 기다리는 건 따뜻한 봄이다. 겨울 내내 잠을 자면서 보내니 무민들이 겨울을 알 리 없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그때 혼자 잠에서 깬 무민은 밖으로 나간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낯설지만 처음 만진 눈은 신기하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추위를 몰고 오는 겨울과 눈이었다. 이런 겨울을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지 아직 무민은 모른다.

 

가족과 함께하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혼자 해야만 하는 일. 가족 모두가 겨울잠을 잘 때 혼자 잠에서 깬 무민은 모든 것을 혼자 해야만 한다. 우리가 부모의 둥지를 떠날 때나,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야 할 일이 늘어날 때를 떠올리게 된다. 객지에서의 독립생활이 외롭고 춥고, 사회생활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감이 늘어나고, 인간관계에 좀 더 깊은 고민을 하면서 성장한다. 무민의 겨울이 그렇다. 혼자서 먹을 것을 구하고, 한겨울의 추위를 견뎌내야 하고, 처음 겪는 겨울을 이겨내야 한다. 어리바리, 알 수 없는 것들로 혼란스럽지만 무민은 우왕좌왕하면서도 잘 해낸다. 처음 보는 눈송이를 신기해하면서도 예쁘게 바라본다. 처음 겪는 일에 도움을 주는 친구들도 있었고, 추위를 피해 먹을 것을 찾으러 무민의 집으로 몰려든 친구들에게 온기와 먹을 것을 제공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겨울을 어떻게 지내게 되는지 조금씩 알게 된다.

 

무민은 생각했다.

'내가 겨울을 이겨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 주고 무릎 꿇리려고 이런 짓을 하는 게 틀림없어.'

겨울은 먼저 부드럽게 떠다니는 눈송이로 아름다운 커튼을 만들어 무민을 속인 다음, 아름다운 눈송이를 눈보라로 바꾸어 얼굴에 마구 내던진다. 그것도 무민이 막 겨울을 좋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135페이지)

 

무민이 부딪히는 겨울은 만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버리고, 시계는 멈췄고, 가족들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한참 전에 떠났던 스너프킨이 떠오르지만 여기에 없다는 현실. 투티키는 아빠의 탈의실에 머물고, 헤물렌은 스키를 타고 나타났다. 이상한 녀석들이 집 안 구석구석에 숨어 있고, 춥다고 무민의 집으로 몰려온 이들을 대하는 것도 짜증이 난다. 처음 보는 겨울에 적응할 사이도 없이 뭔가 몽땅 한꺼번에 무민에게 달려드는 느낌이다.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추운 겨울 실컷 자고 일어나면 따스한 봄이 기다렸던 그동안의 일이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 겨울을, 무민은 잘 견딜 수 있을까?

 

겨울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처음 겪는 추위는 어떤 걸까? 눈뜨면 봄과 여름이 기다려야 하는데, 아직 무서운 겨울이라면? 태양이 지지 않아 덥기만 했던 여름을 기억하는데, 이제는 아무리 기다려도 태양이 뜨지 않는 겨울을 기억해야 한다면? 동글동글 오뚝이같이 생긴 무민을 보면서 보들보들 귀엽고 여린 인형을 상상했다. 그냥 아껴주기만 하고 예뻐해 주기만 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면 그걸 받고 잘 자라기만 하는 대상. 그게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이야기다. 인간도, 무민도. 누구에게나 성장은 필요하다. 온몸으로 부딪히는 경험도 중요하다. 이 이야기는 무민이 이 두 가지를 모두 갖게 한다. 처음 경험하는 계절과 그 계절을 겪으면서 무민이 바라본 또 다른 세상. 무민은 이제 무민 골짜기의 겨울을 기억한다. 몸소 체험했으니, 혹시라도 다음 겨울에 다시 잠에서 깬다고 해도 지금처럼 무섭고 어렵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민에게 한 번의 경험치가 쌓였을 테니. +1~!

 

가끔 토요일 밤에 <전지적 참견 시점>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어느 날 등장한 개그맨 박성광과 그의 매니저 임송. 박성광의 매니저는 스물셋의 경상도 출신이다. 어리다면 어린 나이, 하루하루 지내면서 실수한 것들을 복기하고, 주차를 잘 못 한다면서 매일 퇴근 후에 공용 주차장에서 주차를 연습한다. 사회생활 잘 해내고 싶고, 자기 일을 완벽하게 하면서 칭찬도 듣고 싶을 거다. 잘못한 것을 지적받는 것보다 잘한 것을 칭찬받는 게 훨씬 어려운 세상살이. 부모의 품을 떠난 그녀는 일하면서 매일 고향에 계신 엄마와 통화한다. 그날은 유독 실수가 잦았던 날이었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와 그 장면을 보는 나도 같이 울었다. 그녀와 같은 나이의 나를, 우리를 생각했다. 알게 모르게, 조금 힘들지만 단단하게, 아마 그녀도 성장하는 중이겠지. 실수는 줄어들고, 일을 익숙하게 하고, 좀 더 잘 해낼 수 있는 노하우도 터득할 것이다. 무민이 처음 겪은 겨울이 낯설고 두려웠지만, 이제 겨울을 경험한 무민은 달라졌다. 겨울이 어떤 계절인지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 (154페이지)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는 일, 낯선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어렵고 힘들다. 어색하고 낯설어서 시행착오를 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머문 채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는, 늘 낯선 세상에 한걸음 발을 디딘다. 어려움을 겪고 나면 훨씬 잘 자랄 거라는 무민의 말처럼, 그렇게 계속 세상을 향해 나아가며 성장할 것이기에 말이다.

 

 

(번역가를 보니 따루 살미넨이다. 혹시나 해서 이력을 보니 그녀 맞다. 방송인 따루.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한국의 정서를 너무도 잘 알아서 놀랐는데, 막걸리까지 좋아한다면서 즐기던 그녀. 아직 한국에 있는 줄 알았는데, 고국인 핀란드로 돌아가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에 괜히 더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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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핀 시리즈

 

 

 

 

 

 

 

 

 

 

처음에는 편혜영의 소설이 궁금해서 구매했는데,

두번째 박형서 책도 괜찮은 것 같음.

세번째 윤성희, 네번째 김경욱...

 

곧 나올 이기호 편을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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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멜로즈 시리즈 3권이 출간됐다.

이번에도 역시나, 컴버배치의 드라마 표지가 함께 한다.

이 배우님의 이 표정, 어뜨케... ㅠㅠ

드라마를 안 봐서 몰랐는데, 소설의 주인공과 컴버배치의 연기가 싱크로율 100%를 자랑한다고... 응?

 

 

지금 패트릭 멜로즈 시리즈 1권과 2권 사면 컴버배치 님의 매력적인 표정의 엽서를 준다.

각 권 표지와 똑같은 엽서다. 아주 빳빳하고 좋다.

 

 

 

이제까지 3권. 곧 4권 5권도 나올 텐데...

완결까지 가보자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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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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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실의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는 몸에 관한 구절이 많다.

우리 몸, 특히 여자의 몸을 말하는 부분이 많아서 유심히 듣게 된다. 표현도 적나라하다.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표현해주어서 누군가의 솔직한 말을 듣는 기분이다.

이 가벼운 시집을 조금은 무겁게 조금은 깊게 읽고 있는데, 절반 정도 읽었을까.

갑자기 나타난 이 시 때문에 입에 웃음을 머금었다.

단순히 웃겨서가 아니라, '어떻게 이렇게, 이 정도로 표현할 수가 있지?' 싶은 마음 때문이다.

 

 

치질

 

밑구녕까지 꽃이 피었다

 

징후도 없이

예후도 모르는 채

부끄러움을 앓는다

 

걸음마다 꽃이 도져

앉지도 돌아눕지도 못하게 하는

 

괄약근이여

 

 

시에 관해 다양하고 전문적인 해석이 있겠지만,

시를 많이 읽지 않은 이 무지한 독자가 이 시를 읽고 처음에 든 생각은 단순했다.

'이런! 치질을 이렇게 표현하는 시라니, 대단하다!' 시의 구절 그대로 듣다 보면 치질에 관해 다 알아버린 느낌이다.

치질의 모양, 치질의 증상, 치질을 앓는 환자의 마음. 혹시 공감하는 독자가 있으려나?

 

시집의 전체적인 느낌은 흥미롭고, 솔직하고,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거다.

우리 몸 구석구석의 생김새나 느낌을 적어가는 것만 같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못 보는 곳까지 언급하고 묻기도 하면서 말이다.

오랜만에 읽은 시집인데, 특이하다는 생각 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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