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듣던 밤 - 너의 이야기에 기대어 잠들다
허윤희 지음 / 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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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연속, 꿈에 아버지가 나왔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아버지 표정이 참 애매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무 말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와 저는 할 말 가득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죠.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꿈에서 깼어요.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아버지 생전에 저는 아버지와 그렇게 마주 보고 있던 기억이 없어요. 서로의 안부를 물은 적도 없는 것 같아요. 기억이 안 나요. 그런 사이가 꿈에서 만나니 반가울 리 없잖아요. 문득 궁금해요. 평소에 서로 얼굴 보고 지낸 시간도 거의 없는데, 왜 아버지는 꿈에 나타난 걸까요? 혹시 그동안 못한 얘기라도 나누고 싶었던 걸까요? 그런데 저는 아버지와 그렇게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어색해요. 꿈에서 보는 것도 아직은 불편해요. 이런 마음을 가진 제가, 이상한 건 아니죠?”

 

이런 말들. 이상하면 이상한 대로 궁금하면 궁금한 대로 꺼내고 싶은 말이 있지만, 막상 꺼내놓자니 남들이 어떻게 볼까 봐 신경 쓰여서 결국 꺼내지 못하고 가슴에 남아 있는 말.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이 즐겁고 슬픈데, 누구한테 말하고 싶은데 별거 아닌 이야기라고 되돌아올까 봐 망설이는 말. 그런 말들이 모이는 장소가 라디오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TV보다는 라디오를 즐겨 듣는 내가 여전히 느린 사람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긴 하지만, 남들보다 모르는 게 많아서 세상 흐름에 뒤처지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내 귀가 머무는 곳이 더 좋더라.

 

 

‘사과하고 싶은데 괜찮겠지요?’

‘겁이 나지만 도전하고 싶어요.’

‘자꾸만 그 사람 생각이 나요….’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고,

필요한 건 조금 더 큰 확신이었다.

그것이 딱 한 사람의 동의일지라도.

만난 적 없는 라디오 속 DJ의 대답일지라도 말이다. (114~115페이지)

 

똑같이 들리는 라디오도 낮과 밤의 온도 차가 있다. 그건 라디오를 들어보거나 즐기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낄 테다. 특히 한밤의 라디오는, 누군가의 사연에 귀 기울여주는 느낌이 강하다. 저자가 방송하는 라디오도 밤 10시에 시작한다. (유감이지만, 나는 저자의 방송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 방송의 분위기가 저절로 느껴진다고 말하면, 좀 이상한가?) 청취자에게 들려줄 글을 적고, 사연과 음악을 고른다. 그날그날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선택되는 사연이나 고르게 되는 음악도 다를 것이다. 어떤 날은 한껏 웃긴 이야기를, 어떤 날은 한없이 우울한 사연을 고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모든 날의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는 살짝 눈물을 훔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밤에 날아오는 사연은 우리가 겪는 각자의 일상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그 두 시간, 누군가의 어깨에 내려앉은 하루의 무게를 덜어줄 수만 있다면 충분하니까 말이다.

 

 

고민 없는 삶의 평온함에 가장 감사하는 날이 있다면

아마도 가슴을 짓누르는 큰 돌덩이 하나를

내려놓은 직후일 것이다.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삶이 무슨 재미겠냐고,

여유 부리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무료한 삶이어도 좋으니 제발 이번 일만은 해결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밤을 보낸 뒤일 것이다. (94~95페이지)

 

그런 청취자의 사연과 음악이 어디 듣는 사람의 것일 뿐일까. 저자에게는 라디오 부스 안에서 보낸 모든 시간이 그냥 흐르지는 않았다. 자기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은 밤으로 만들어주는 게 저자의 능력이었으리라. 게스트 한 명 없이, 오직 저자의 목소리와 청취자의 사연과 음악으로 가득 채우는 시간이다. 저자 스스로 말한 것처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꾸준한 방송 이력만으로도 충분히 검증된 것 같다. 들어주는 사람이 진심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자기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 그렇게 저자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청취자의 이야기를 들어오면서 자기 이야기는 차곡차곡 가슴에 모아두었나 보다. 이렇게 책으로 한꺼번에 들려주는 걸 보면...

 

하루, 한주, 한 달의 끝과 한 해의 마지막.

어른이 되어서도 월요병 같은 순간들은 수시로 찾아왔다.

내일로 한 걸음 건너간다고 해서

뜨거운 태양이 금세 표정을 바꿀 리도 없고

새 달력의 첫 장을 넘긴다고 해서

훈장처럼 주름살을 바로 부여받는 일도 없을 텐데.

우린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을 촘촘히 나누고

경계를 만들며 그 선 위를 조심스레 걸어갔다.

이 밤이 영원하기를 꿈꾸거나

어서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47페이지)

 

어떤 날은 그날 선택된 노래 가사로, 어떤 날은 읽었던 책의 구절로 채워진, 또 어떤 날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으로 채워진 이야기. 문득 이곳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상에서 서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모여 책 이야기를 하는 이 공간과 말이다. 책 이야기를 꺼내고, 읽은 사람들에게는 공감과 다른 의견을 듣기도 하는, 혹은 읽고 싶은 책으로 찍혀 장바구니에 투척하게 되는... 보이지 않는 한 공간에 모여 서로의 관심사와 소박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곳은 흔할지도 모르지만, 그 흔한 곳에 머물며 마음을 전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요즘 유행한다는 혼자서 하기가 익숙해서일까? 혼밥이나 혼술 같은, 혼자서 해도 괜찮은 순간들을 즐기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서? 혼자 있는 공간에서 주로 듣게 되는 라디오가, 북적거리던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모두가 흩어지고 각자의 집에 있는 시간인 한밤이 주는 매력. 혼자 있지만 혼자가 아닌 것처럼 느끼게 누군가의 이야기에 꽉 채워지는 밤이 든든하다.

 

 

6개의 챕터로 나누어 차근차근 들려준다. 사랑과 가족, 우정, 이별, 성장, 그리움. 청취자의 사연을 배경으로 저자가 방송에서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덧붙인다. 때로는 저자만의 이야기로 누군가의 속내를 듣게 한다. 누구나의 일상이라는 생각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아프고 슬픈 사연들에, 부담 없이 우리 사는 이야기를 공유한다. 거기에 본문에 삽입된 일러스트는 글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만든다. 차분하게 듣고 있다 보면, 나도 사연 하나 보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별거 아닌 일상이지만, 뭐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좀 나눠보면 어때?

 

“내일은 엄청 춥대요. 겨울이 이래서 싫어요. 춥잖아요.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한 계절이 온 건가요? ㅠㅠ 그래도 저는 내일 이불 밖으로 나가보려고요.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러 미용실에 가요. 미루기만 했더니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거든요. 더 미루지 않으려고 예약도 해뒀어요. 오랜만에 미용실 가서 기분 전환도 하고, 칼바람 맞으면서 좀 걷기도 하고, 그러다가 도저히 추위를 못 참겠으면 카페 안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서 책도 읽고 그래 보려고요. 특별할 것 없는 계획에 갑자기 기분이 들떠있어요. 오늘 밤은 잠도 잘 올 것 같아요. ^^ ”

 

행복은 작고 사소한 것들 사이에

감춰진 보석이었다.

 

적당히 낯설고 적당히 익숙해진 카페 안 구석 자리,

고막을 타고 온몸을 풍성하게 감싸는 음악 소리,

유리컵에 맺힌 물방울과

찰랑이는 얼음 사이에 꽂아둔 빨대조차 청량한

아이스커피 한 잔,

적당히 두근대는 심장 소리,

결국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

 

그래,

이 기분이었다. (19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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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 새로운 기능 알림을 봤어도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뭐, 몇 년전 작성한 글 소환해주는 거야 다른 사이트에서도 하는 거라 새로운 느낌 크지 않았는데...
대박인 건
책 본문 사진 찍어 텍스트로 변환해주는 거
이거 완전 편하고 좋다!!
아주 아주 편하다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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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타협을 위해서도 싸움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선행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대상을 구성하는 핵심과 취약점들에 대한 인식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남자들은 생각보다 남자를 모른다. 그저 자기와 주변의 남자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의 파편으로 하나의 상을 그려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남자로서의 자기 인식인 동시에 사회적 객관을위한 고민의 산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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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자주 드나들면 그냥 알게 된다. 어떤 의사(의료진)가 환자를 위하는 건지 저절로 보인다. 저자가 지금 이렇게, 마지막 구명 밧줄을 잡는 것처럼 계속 말하는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환자를 위해서다. 환자에게 다가가는 시간이 길어져서 환자가 사지를 넘지 않도록 붙잡으려고,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살리려고. 그게 전부다.

 

피는 도로 위에 뿌려져 스몄다. 구조구급대가 아무리 빨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도 환자는 살지 못했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기준은 헐거웠고, 적합한 병원에 대한 정보는 미약했다. 구조구급대는 현장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병원을 선택할 것이어서 환자는 대로 가야 할 곳을 두고 가지 마라야 될 곳으로 옮겨졌고,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받지 않아도 되는 검사들을 기다렸다. 그 후에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옮겨지다 무의미한 침상에서 목숨이 사그라들었다. 그런 식으로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이송 시간은 평균 245분, 그사이에 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목숨들은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사망'이었다. (골든아워1, 148~149페이지)

 

저자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게 아덴만 작전이고, 저자의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가 작년이다. 그사이 다른 매체를 통해 인터뷰나 강연을 잠깐씩 보긴 했지만, 그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훌륭한 의사라는 생각만으로 멈췄다. 북한군 병사를 치료하면서 그의 인터뷰를 몇 번 보고, 국회의원들에게 중증외상센터의 현실과 대책을 브리핑하는 걸 보면서 뭔가 달라질 거로 믿었다. 중증외상센터가 왜 필요하고 또 그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야 하는지 일련의 사건들로 증명되었으니까. 알려진 것이 그 정도일 뿐,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그보다 많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우리나라의 병원에 그가 말하는 필요한 시스템을 갖추고 중증외상센터의 지원이 늘어나서, 병원까지 가지 못해 길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더는 없는 세상이 곧 올 거로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순진했던 것 같다. 세상을 너무 몰랐다. 어느 날 CF에 등장한 그를 보고 의아했다. 화면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다. 그가 왜 CF까지 등장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이름을 알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싶은 오해를 했다. 나중에 그 CF를 찍어야 했던 배경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출동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지 않는 정부 대신에,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해주는 통신사와 손잡고 찍은 광고. 그것도 갑자기 출동하게 된 현장을 화면에 담게 되었다는 후문에 한숨이 푹푹 나오더라는...

 

이 책을 읽다 보면 그가 방송이나 다른 인터뷰에서 말하는 현장의 생생함이 더 가깝게 다가온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나 역시도 아는 게 거의 없지만...)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저렇게 나대는 거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다. 사람의 목숨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려는 것뿐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시스템과 구조장비를 갖추려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걸 해주지 못하는 정부나 그런 생각조차도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그의 간절한 바람은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당장 눈앞에 엄청난 돈을 물어다 줄 제도가 아니어서 아무도 어떤 기관도 쉽게 협조하지 않는 것일까?

 

책을 읽다가 이렇게 눈물이 나려고 했던 게 참 오랜만이다. 끝이 없는 그의 노력이 시한부가 될까 봐 답답하고, 그런데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내고 있는 그에게 감동해서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라. 그놈의 행정은 당장 현장에서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행정을 운운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우선이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급하지 않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골든아워에 도착해서 치료를 시작해야 환자가 살아날 기회는 늘어난다. 의료진이 환자에게 가까이 갈수록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다. 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하자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었다니. 미국이나 독일, 영국, 일본에서도 정착되었다는 중증외상센터의 시스템이 대한민국에서는 한없이 어려운 일이라는 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리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 앞에 무엇이 문제가 되어야만 하는지 알 수 없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그의 인터뷰를 한 번씩 볼 때마다 이 커다란 제도를 그 혼자서 이고지고 끌고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한 인터뷰일수록 그의 신념은 사그라진 것 같다. 다음이 없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달라지지 않을 일에 그는 더는 어떤 바람조차 갖지 않는 듯 말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가 없는 중증외상센터의 운명을 생각한다. 그곳은 언제까지 운영이 될까, 그가 없는 그곳이 과연 존재할까, 그럼 우리가 목숨을 구할 기회도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앞선다.

 

이 책은 2002년부터 2018년까지 그가 경험한 기록이다. 1권에서는 주로 그가 외상외과에 들어와서 부딪힌 의료 현실에 절망하는 순간들이 많다. 미국과 영국의 외상센터 연수로 그는 한국에서도 정착시킬 외상센터를 기대했겠지만, 한국의 현실은 그의 바람을 다 담지 못했다. 외상센터로 실려 오는 환자들의 절박한 현실을 들려주면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접 마주한 인간의 무력함을 토로한다. 여러 가지 사건으로 왜 중증외상센터가 필요한지 피력하지만, 그의 바람이나 노력만큼 따라주지 않는 현실이 답답하다. 이어지는 2권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장의 모습이 담겼다. 그가 속한 병원이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되었지만 열악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외상센터를 제대로 갖출 시스템을 안착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사고 현장에서의 일들, 병원과 정부가 해결해주지 않은 행정상의 일들,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나아가야만 하는 그의 감정들. 거기에 그 혼자가 아니라 중증외상센터 팀원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가 이끌어가고 있지만, 그 혼자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공간이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와 동급으로 들려온다. 틈나는 대로 헬기 출동 훈련을 하고 부족한 장비지만 정비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환자를 구하러 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응급 출동 현장의 이야기는 더 생생했다. 세월호 사고에도 갔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거기에서도 참 우리나라의 행정은 사람이 우선이 아닌 채로 굴러가더라. 더는 그곳에서 남아있을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돌아왔을 때는 얼마나 허탈했을까. 밤에 나는 헬기 소리를 소음이라고 민원을 넣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만약 그 소음(?)이 지금 나와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오고 있는 소리가 되었을 때야 아무 말도 안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특히 힘을 잃은 채로 중증외상센터를 떠나는 동료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읽고 있는 내 어깨도 축 처진다. 아직 그곳에 남아있다고 해도 그들의 끝은 어떤 모습일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이대로 중증외상센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람을 구하고자 한다는 그의 신념과 의지가 끝날 것만 같아서 무섭다.

 

외래 진료는 내가 병원에서 하는 일 중 그나마 가장 부담이 적다. 이때 만나는 환자들은 생사를 오가는 긴 싸움을 끝내고 '살아난' 사람들이다. 환자가 부서지고 으깨진 몸으로 실려 왔을 때나, 검붉은 피를 쏟아내는 수술방에서 그리고 죽음과 지난한 전투를 벌이는 중환자실에서 그들을 만나는 것과는 다르다. 미국에서 연수받을 때 데이비드 호이트(David Hoyt) 교수는 외래 진료는 추수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외래 진료는 죽다 살아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고, 내 지긋한 일상에서 실제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골든아워1, 19~20페이지)

 

그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아예 표정이 없는 사람 같다. 이 사람이 지금 화가 났는지 슬픈지 아픈지 어떤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혹시 로봇인가? 그만큼 그에게서 표정은 물론이고 웃는 것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가 활짝 웃는 모습을 봤다. 이런, 그에게 이런 표정도 있구나 싶은 놀라움. TV에서 그의 병원 생활을 취재하는데, 중증외상센터로 실려 온 환자가 잘 치료 받고 퇴원한 후에 외래 진료를 온 장면이 보였다. 그때 그가 활짝 웃으면서 진료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서 이제는 안 봐도 되겠다고, 잘 나았으니 더는 안 와도 된다고 말하며 환자와 웃으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모습에 놀랐다. 그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란 것을 확인한 기쁨도 있지만, 그가 이럴 때 웃는구나 싶은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 죽음에 가까운 상황에서 실려 온 환자가 잘 치료받고 나가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그에게는 이 일을 하는 목적이자 신념이었다. 더도 덜도 아닌, 사람을 살리는 그 자체가 그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이유다. 우리가 그를 응원하는, 그에게 다가온 환자를 더 많이 살릴 수 있게 정부의 지원과 외상센터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하는 이유도 하나다. 사람을 살리는 일, 예방 가능한 사망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외상센터 안에는 환자를 끌고 CT를 찍으러 갈 사람도 부족했다. 외상외과 교수들은 다른 대학 병원이라면 수련의들이 할 일들을 직접 몸으로 감당하며 버텨내고 있었다. 새벽 3시에 환자에게 소변줄을 꼽고, 똥으로 오염된 핏물을 온몸에 뒤집어쓰며 수술했다.

이런 현실과는 정반대로 새 정부는 ‘삶의 질’을 개선하겠다고 나섰다. 각종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의 정책 방향은 외상센 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사들의 업무 공백을 메워주는 전담간호사들의 근무시간도 주 52시간으로 묶여버렸다. 증원은 없으면서 근무시간을 제한하는 기상천외한 정책. 이것은 센터 운영에 엄청난 타격이었다. 나는 세상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돌아가야 간신히 유지될 수 있는 내 처지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골든아워2, 290~29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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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읽는 것조차 쉽지 않아서 쉽지 않다.

읽어보고 싶은데 읽어지지 않아서...

 

어떤 책은,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한 마디도 써지지 않아서 쉽지 않다.

그 좋은 느낌은 왜 써지지 않아서...

 

어떤 책은,

읽는 것도 어려워서 꾸역꾸역 겨우 읽어냈는데,

그렇게 어렵게 읽은 후에도 한 마디도 써지 않아서 쉽지 않다.

 

누가 읽으라고 강요한 건 아닌데,

그래서 읽는 것도, 읽은 느낌을 쓰는 것도 강요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누가 사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책은 꾸준히 사는데,

그건 쉬운 일이더라는... @@

 

 

 밤을 걷는 문장들 - 한귀은

 전작들 좋았는데,

 그래서 신간 출간 때마다 관심 두게 되는데,

 이번 책은 좀 서운한 느낌?

 아직은 읽고 있는 중이니,

 일단은 끝까지 읽어보기로...

 

 

 신비한 공룡 사전 - 박진영, 이준성

 말 그대로 사전이다. 온갖 공룡이... 와우~

 신기하긴 하다.

 흥미롭고 재밌기도 하다.

 아이들이 좋아할만 하다.

 

 

 한국, 남자 - 최태섭

 얼마전에 남자 사람과 <며느라기>를 같이 읽었는데,

 이 책도 참 흥미로울 것 같다.

 같이 읽어보자고 한번 더 권유하고 싶은 책이 될 것 같은.

 한국 남자를 이해하기 위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응? 아닌가? 일단 끝까지 읽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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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8-12-0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인터넷으로 옷 고르는것보다 책 고르는것이 더 쉽더라구요. ㅎㅎ

구단씨 2018-12-11 14:40   좋아요 0 | URL
그렇다니까요. ㅎㅎㅎ
책 고르기 진짜 어려워요.

여긴 지금 눈이 펑펑 내립니다~!
추운 거 진짜 싫은데, 눈이 오니 참으로 겨울스럽긴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