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호호~

탐난다.

 

 

 

 

 

 

 

 

 

 

빅머그 자태가 그냥... 탐난다... 책도 머그컵도... 에휴...

https://www.aladin.co.kr/Ucl_Editor/events/book/2019_borntoread53_pop1.html

 

리커버판, 합본, 양장, 한정판....의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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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9-12-28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이책 삽화가 후덜덜이더라고요.
삽화때문에 소장하고 싶어졌어요

구단씨 2020-01-02 18:20   좋아요 0 | URL
언제 읽을지도 몰라서, 어차피 장식용(?)이겠지만...
탐나네요. ^^
 

 

오늘 저녁 밥상에 오른 음식은 제육볶음이다. 어제 마트에서 할인 가격으로 사 온 부드러운 돼지고기에, 온갖 야채를 듬뿍 넣어 얼큰하고 달달하게 볶은 게 내 입맛에 딱 맞는다. 고기보다는 야채를 먼저 집어 먹고 있는데, 엄마가 슬쩍 고기를 집어 나 있는 쪽으로 놓는다. 같이 먹자는 의미다. 어제 같이 사 온 밤맛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눠 마시면서, 오늘 저녁은 평소보다 많이 먹게 된다면서 투덜투덜. 그래도 젓가락질을 멈추지는 않는다. 맛있으니까. ^^

 

일상의 많은 날에서 종종 엄마와 이런 시간을 보낸다. 가끔은 집 앞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한 그릇씩 먹고 오거나, 영화 <겨울왕국>을 보자는 엄마의 말에 더빙판을 예매하거나(엄마는 자막 읽기 힘들다면서 한국 영화나 애니메이션 더빙을 선택한다), 저녁 하기가 귀찮다면서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씩 입에 물고 걸어오거나, 집 근처 기찻길 주변을 돌면서 운동이라고 우기거나... 생각해보면 너무 소소하다. 엄마가 자식에게 바라는 건 참 많을 테지만, 사실 나는 엄마의 기대에 맞는 결과를 내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게 언제나 미안하면서도 너무 익숙하다. 엄마니까, 엄마는 자식의 부족한 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줘도 괜찮은 사람이니까, 언제나 지켜보면서 또 기다려줄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또 그렇게 믿어왔다.

 

 

그게 언제까지일까? 내가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엄마가 언제나 나를 지켜봐 주고, 엄마가 우리 형제들 보면서 웃을 수 있는 날들이? 우리가 사는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아는데도, 자꾸만 착각하게 된다. 현재 상황에 핑계를 대고 안주하면서 기다려주는 시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꾸만 미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어떤 순간이 다가오고 후회를 하겠지. 그때는 이미 늦을 테지만, 어리석은 나는 또 그걸 모르고 계속 지금만 보고 있겠지... 우와노 소라의 소설에서 단편 「당신이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앞으로 328번 남았습니다」를 읽으면서, 어리석은 자식의 모습을 또 한 번 보게 됐다. 아마도, 어쩌면 나도 가즈키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가즈키의 열 살 생일날, 눈앞에 이상한 숫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어머니의 요리를 먹을 때마다 하나씩 줄어들었다. 이상하다. 다른 때는 아닌데,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먹을 때만 숫자가 줄었다. 가즈키는 숫자가 0이 되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눈앞의 그 숫자는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먹을 때만 줄어드니까, 언젠가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이 그 숫자를 다 채우게 된다면 더는 어머니의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계속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다. 어머니가 안 계시게 되는 상황이 올 거고, 더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지 못하게 된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가즈키는 결심했다. 더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먹지 않기로, 더는 눈앞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게 하기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엄마가 해주는 밥을 안 먹어? 엄마가 얼마나 서운해 하시겠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언제까지 먹을 수 있다고 그러는 거야?!’ 한집에 살면서 서로 다른 상차림으로 밥을 먹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번거롭기도 하지만, 그 불편한 마음을 어떻게 말할 수가 없다. 가즈키는 아예 집에서 밥을 먹지 않거나 밖에서 사먹곤 했다. 그러다가 집을 떠나서 대학에 진학하고, 취직을 하고서도 집밥을 절대 먹지 않았다. 숫자는 328에서 줄어들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다짐이 지켜질지 모르겠지만, 가즈키에게는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이렇게 할 거라고 다짐하면서도, 가까운 곳에서 맡아지는 엄마의 집밥 냄새를 이겨내야만 했다. 그리웠다. 엄마의 집밥도, 엄마의 표정과 따뜻한 말도. 하지만 본가에 갈 수는 없었다. 갈 때마다 음식을 먹이고 싶은 엄마의 간절함을 알기 때문이다.

 

소설은 의외의 결말로 후회와 눈물을 만든다. 설마 그런 상황이었을 줄이야. 왜 한 번도 그런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결말은 잔인했다. 가즈키에게 땅을 치고 후회할 상황을 만들어버린 작가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왜 우리는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를 아프게 하는지 가슴을 치고 싶을 정도로... 소중한 것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영원하지 않은 시간을 조금 더 아껴두고 싶은 마음을 후회하게 하는 거다.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은 안 되니까’가 아니라, ‘형편이 곤란하니까’가 아니라. 오직 지금만이 가능한 것을 눈앞에서 확인한 기분이다. 자꾸만 미루다가는, 조금 더 있다가 할 거라는 핑계가 더는 통하지 않은 거였다. 가슴이 알싸했다. 식상하지만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새기게 한다. 가즈키의 선택의 결과는 후회였지만, 후회 그 후의 일상은 다시 소중함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엄마, 집으로 갈 테니까…… 뭐라도 좀 만들어줘.”

“뭐라도, 라니……. 언제?”

“지금 당장.”

“지금 당장!? 뭐, 뭘 먹고 싶은데?”

“뭐든지 좋아.”

“…… 그래서, 뭘 먹고 싶니, 가즈키?” (당신이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328번 남았습니다 - 42~43페이지)

 

이상한 카운트다운을 마주하게 된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들 비슷했다. 비슷한 선택으로 비슷한 상황을 만든다.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벅차서 일상의 소중함 따위는 잊고 지낸 지 오래일 사람들에게, 세상 모든 일에 있을 그 끝을 상상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푸근한 냄새를 풍기는 엄마의 집밥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뭉클했다. 만약 우리 인생에서 무언가가 남은 횟수가 보인다면, 그게 엄마에 관한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너무 잘 알고 있는 답마저 당황해서 제대로 볼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런 감정적인 이야기에 찬물을 끼얹듯 보다 현실적인 엄마의 이야기를 하는 게 케스터 슐렌츠의 『엄마, 조금만 천천히 늙어줄래?』이다. 갑자기 쓰러진 엄마 때문에 형제들의 일상은 변한다. 엄마를 모실 병원, 비용을 처리할 보험, 치료 후 돌봐드려야 하는 요양원 등을 거치는 길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거기에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엄마의 변덕과 괴팍한 성격은 덤으로 감당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게 엄마라는 걸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항상 우리를 돌봐주는 엄마였는데, 언제 엄마가 우리가 돌봐드려야 하는 대상이 된 거지? 그게 언제였든, 현실은 현실이다. 저자와 형제들에게는 엄마를 돌봐야 하는 현실만이 남아있었다. 언제나 든든하게 나를 돌봐주고 내 삶의 기둥이었던 엄마가, 이제는 내가 돌봐드려야 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 때문에 이미 어느 정도 경험하긴 했지만, 저자가 겪은 시간을 적나라하게 들려주는 이 글을 마주하니까 막연하게 생각하는 그 순간이 생생해진다. 언젠가 엄마가 거동이 불편해지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상이 힘들어지고, 병원에 드나들고 요양원에 머물러야 할 시간이 많아진다면, 나는 그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저자 역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을 마주하면서 당황한다.

 

 

케스터 슐렌츠가 엄마를 돌보며 작성한 이 책은 엄마를 떠올리면서 감성적이 되기 쉽고, 부모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에 따라오는 일상이 변화를 현실적으로 제시한다. 감상에 빠져 허우적대기에 앞서 현실에서 처리해야 하는 문제들을 언급한다. 우리가 비켜갈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갑자기 닥친다면 더 당황하겠지만, 언젠가는 닥칠 거라고 생각하면서 준비해야 하는 일이었던 거다. 혹시나 아프게 되면 병원에 모셔야 할 상황, 그때 간병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퇴원 후 돌봄은 어느 시설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 후로도 계속되는 돌봄 상황에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 복지제도가 한국보다 잘 되어있다는 독일에서도 이런 경우는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국가가 해주는 것보다 개인이 준비하고 처리해야 할 것들이 대부분이었던 거다. (물론 다 같은 경우는 아니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저자의 엄마는 잘 치료 받고 적당한 요양시설을 선택해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과정을 보고 있자니 적나라한 현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서 웃프더라. 이미 겪어본 일이라 그런지 저 마음이 쓰이는 것도 있었고 말이다.

 

한국과 독일은 아주 다를 줄 알았다. 각자 독립된 생활을 일찍 시작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간섭보다는 독립된 인격의 관계로 유지되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노년의 부모를 걱정하고 어느 부분 돌보고 책임져야 하는 건 비슷했다. 부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형제들이 모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의논한다. 각자 역할 분담을 하면서 같이 처리해야 할 문제인 거다. 저자는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일이나 요양 시설을 알아보거나 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저자의 남동생은 경제 관련 처리와 계산하는 일을 담당했다. 물리적으로 멀리 있는 저자의 누나는 엄마와의 정신적인 교감을 이루려 노력했다. 이상하게도, 엄마가 아프니 형제들이 모이거나 얘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 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우리 아버지 편찮으셔서 병원에 드나들고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하면서 겪은 것과 너무 똑같았다. 우리도 그랬다. 문제가 터지니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고,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남동생이나 여동생과 통화하면서 이런 저런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집안의 우환이 생기는 건 걱정이지만, 이런 일이 생기니 형제들 사이에 관계는 조금 가까워진 것 같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참나...

 

흔히 부모가 나이 들어간다는 서글픔을 언급하면, 더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고,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말한다. ‘더 늦기 전에...’라는 이유로 감정적인 부분의 해결을 먼저 생각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다른 의미로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을 준비하게 했다. 옮긴이의 말처럼, 노부모에 관한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하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됐다. 노부모를 돌보는 일은 때로 가혹하고 냉정한 현실이라는 것. 노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은 생각하는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게다가 거동이 불편한 노부모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마치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24시간 곁에서 돌봐야 하고, 실제로는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다. 그러다가 요양병원을 찾게 되는데, 그렇다고 요양병원이 최고의 답은 아니다. 자식이 있는데 요양 시설에 모셔도 되는지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비용도 발생한다. 그래서 노부모를 돌본다는 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감정적인 것보다, 조금은 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늙고 거동이 힘들어지면, 그때는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현실적이고 금전적인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두어야 한다.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혼자 남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대책보다는 걱정만 앞선다. 어느 정도 예상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닥친 엄마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겁부터 난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노부모에게 일어나는 문제와 그 문제 해결을 위한 현실적인 부딪힘이 그대로 들려왔다. 각자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해결 방법은 다를지 모르지만, 저자의 경험담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내가 이미 경험해서 그런지 공감된 부분이 많다.

 

아버지의 죽음, 엄마의 유방암, 엄마의 늙음. 이 모든 일을 계기로 나는 나의 늙음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이제 58세다.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 이렇다 할 불만이 없다. 나 역시 중년의 위기를 겪었지만 잘 이겨냈고, 26년째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건강하고 멋진 아들이 둘이나 있고, 좋은 친구들이 있고, 직업도 만족스럽다. 뭘 더 바라겠는가. 글쎄, 나는 무엇을 더 바랄까?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모든 것이 지금처럼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 사진과 지금 거울 속 나를 비교해보면, 시간의 톱니 자국이 확연히 보인다. 주름진 거친 얼굴과 축 처진 눈 밑 지방이 정말 내 것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때도 있다. (엄마, 조금만 천천히 늙어줄래? - 203페이지)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부모의 늙음을 외면하지 말고 조금 더 현실적인 상황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부모의 늙음과 병듦은 점점 비극적인 상황으로 흘러가겠지만, 그렇다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이 책을 통해 그 모든 상황을 한 번씩 시뮬레이션해 보고 언젠가 닥칠지 모를 순간을 준비할 수 있기를,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잘 해결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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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5 0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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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2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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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5 0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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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2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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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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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입양된 나나는 극작가이자 배우이다. 프랑스에서는 ‘나나’로 불리며 양부모에게 불편함 없이 자랐다. 어느 날 나나에게 이메일 한통이 배달된다. 예전에 나나가 한국 신문에 응했던 인터뷰를 보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젊은 감독 서영의 의뢰였다. 나나는 선뜻 서영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으나, 곧 자기가 헤어진 애인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고 마음이 바뀌었다. 이제 곧 엄마가 될 그녀가 확인하고 싶은 것 한 가지, 그녀의 생모의 흔적을 찾고 싶었던 거다. 생모를 만나거나 생모의 실체를 알게 되거나.

 

한국에서 살던 시절 나나에게는 ‘문주’라는 이름이 있었다. 철로에서 기관사가 발견하고 그의 집에서 1년 정도 문주를 돌봐주면서 불렀던 이름. 문주는 서영에게 묻는다. 문주의 뜻이 무엇이냐고. 이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것 중 하나가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물으며 그 뜻을 읊조리는 문주의 행동이다. 어쩌면 문장에서 그대로 문주의 표정이 그려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주는 누군가의 이름에서 그 사람의 역사를, 의미를 찾는다. 이름의 뜻으로 그 사람의 시간과 이미지 같은 것을 그린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자기 이름의 뜻을 먼저 말하면서 문주와의 소통을 이룬다. 어쩌면 문주에게도 분명히 사랑받았던 의미의 시간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국 체류 동안 문주가 찾아다니던 것들, 그 흔적들의 발자취를 영상에 담으면서 서영의 다큐멘터리는 조금씩 그 분량을 채워간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눈에 들어오는 한 분, 서영의 거처를 내준 문주가 아래층 ‘복희식당’의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된 묘한 기류. 복희식당의 할머니는 문주가 입양아인 것을 알아챈다. 왜 식당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냉담한 할머니가 문주를 대하는 태도는 의외였다. 따뜻한 밥을 내어주고, 이것저것 묻기도 하면서 사진 하나를 보여준다. 흑인 혼혈 여자아이. 그 아이가 할머니와 어떤 사연을 나누었는지 모르지만, 흔한 인연은 아니었으리라. 소녀를 마냥 그리워하는 할머니, 소녀가 갔다던 벨기에는 어떤 곳이냐며 묻기도 하는. 할머니의 표정은 그리움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를 보는 문주는 원망의 대상이 한 명 더 는 것만 같다. 기찻길에서 발견된 문주는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엄마를 원망했다. 복희식당의 할머니도 버린 아이를 두고 하는 말로 생각하고 마치 자기 엄마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이를 버린 사람이 여기 또 한 명 있네?’

 

내가 원한 보상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 순간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만인 것을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하는 것, 왜 버렸고 왜 다시 찾지 않았느냐고 아픈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물어보는 것……. 혹시라도 생모나 기관사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런 것이 하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망상이었다.

생모나 기관사를 찾기에는 내가 갖고 있는 그들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거나 미비하다는 걸 알면서도 기대한 대가였다. 그들과의 만남이 결국 손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 나는 더더욱 외로움에 매몰됐다. 외로움의 끝은 무력감이었다. (27페이지)

 

입양된 아이 문주와 입양 보낸 아이를 생각하는 복희식당 할머니.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서 있는 듯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무슨 추리소설처럼 과거로 거슬러 간다. 문주는 발견된 그 시점을 찾아가면서 그 시간을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복희식당 할머니의 이야기는 마치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하나 다른 사연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드러난다. 그러면서 이 소설은 문주가 자기 근원을 찾아가듯, 복희식당 할머니가 만나고 싶은 이를 그리워하듯 그렇게 자기만의 이야기를 완성해간다. 누군가의 진심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문주는 배속의 아이 우주에게 점점 더 의미를 부여한다. 우주라는 이름부터 삶이라는 완성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대신 보여주는 흐름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 속 문주가 프랑스로 입양된 해가 1986년이다. 1980년대는 한국의 해외 입양이 세계 1위였던 때라고 한다. 특히나 미혼모의 아이가 다수를 차지했고, 혼혈아들이 많았다고도 한다. 소설의 복희식당 할머니가 그리워하던 아이는 입양아가 맞다. 복희식당 할머니 추연희가 직접 해외로 입양 보낸 아이다. 그 아이가 추연희의 아이는 아니다. 불임으로 남편에게 버림받고 기지촌의 간호사로 일하던 추연희가 기지촌에서 일하던 백복순과 이룬 대안 가정에 속했던 아이였다. 80년대의 기지촌과 미혼모와 혼혈아. 그리고 입양아.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이었다. 기지촌에서 일하던 여성이 임신하고, 그렇게 태어난 혼혈 아이는 아이들의 세상에 속할 수도 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온전한 가정이 아닌 미혼모라는 이름의 엄마들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해외 입양.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으며 사는 것보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해외가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차별의 정도나 모양새만 다를 뿐이지, 온전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하는 시간은 그곳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야기의 흐름은 입양아와 입양 보낸 사람을 모으고 있다. 한때 해외입양 1위로 불명예를 날리고 있던 시절의 주인공들이, 전혀 다른 부모의 뿌리를 두고 있는 이들이 모여서 한때 대안 가족을 만들었던 추연희의 시간을 되돌려준 것 같다. 죽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추연희라는 이름을 한번 되찾은 복희식당 할머니를 문주가 보내주면서 정리하고, 곧 태어날 문주의 아이 우주를 맞이하는 것이 하나의 동그라미가 되어 돌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다 소모해 버린 몸을 버리고 이제 곧 무형의 암흑에 도착하게 될 연희는 씨앗이나 연기처럼, 혹은 한 줌의 물질이거나 에너지가 되어 영원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수십억 년의 진화를 거슬러서, 이 세상에 오기 전 하나의 세포로도 존재하기 이전에 그녀가 그러했듯이. 고생했어요. 나는 말했다. (235페이지)

 

자기 이름의 역사를 찾아가는 일. 누구에게서 태어났다는 것 하나가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의 손길이 아니라, 살아있기에 누구의 보살핌이라도 닿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어느 순간 누군가를 원망하며 자랐을지도 모를 그 시간을 조금은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생각하게 한다. 문주의 기억 속 철로는 문주가 버려진 곳이 아니라 그저 발견된 곳이었을 수도 있는 그 가능성을 떠올렸을 때 비로소 달라질 삶의 의미들 말이다. 추연희는 떠나면서 자기 이름을 한 사람에게 기억하게 했고,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이들은 자기 이름의 의미를 새기면서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한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의도와 손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이 소설 때문에 가끔은 잊고 지내던 따뜻한 타인의 손길을 한 번쯤은 기억하게 된다. 미처 몰랐던 어느 진심이 비집고 들어올 틈 하나를 만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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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플래티넘 등급에 제공되는 영화할인권...

혹시 사용 안 하시는 분 계시면 양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2장 정도 필요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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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4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4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4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4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4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4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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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대학가 근처에는 원룸이나 소형 아파트, 기숙사가 학생들을 주거를 흡수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의 대학가는 흔히 자취방이라고 부르는 옛날식 원룸이거나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하숙이 대세였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다녔기에 이런 방식의 독립은 경험하지 못한 때였다. 다행인지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친구 덕에 기숙사 구경도 해 보고, 그 친구가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학교 앞에서 하숙했기에 하숙집을 경험해보기도 했다. 독방에 세면시설이 있었고, 식사만 다른 하숙생들과 같이했다. 복도식 아파트의 축소판처럼 각각의 하숙방이 쭉 있는데, 나중에는 옆방 남자 선배와 친해지기도 하고, 다른 학부의 친구를 알게 되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가졌던, 로맨스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설정이 현실로 이어질 법도 하건만,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은 각자의 학교생활 충실히 하고 졸업과 동시에 인사도 없이 떠나가는 잠깐의 식구(?)였다.

 

이상하다. 이런 로맨틱한 상상은 그 이후로도 가끔 떠오르곤 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그래, 언젠가 나에게도 옆집의 남자와 부딪힐 사건이 벌어질지 몰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괜히 화내거나 성질내지 말고 성격 좋은 여자 이미지를 심어주겠다는 엉뚱한 계획까지 세웠다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일은 정말로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 간혹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복사해서 붙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 '정말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일어났더라고요!' ? 그거잖아. 그래서인지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로 머무는 거지... 라고 다짐하지만, 또 상상하고 기대하고 설레고 싶어지네, ~!

 

베스 올리리의 셰어하우스는 독자의 이런 간질간질한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소설이다. '내 로맨스가 아니면 관심 없다! 소설이나 영화의 로맨스는 사양한다!'라고 외치는 독자에게 은근히 스며들기 좋은 이야기로,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과 두근거림, 사랑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오해들, 좀 더 성숙한 사랑을 위해 이들이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게다가 현실에 맞는 상황들과 약간은 소설 같은 설정에, 인생의 단짠단짠을 그대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는. 사는 게 뭐 있나, 이렇게 힘들다가도 인생 전화위복이 되는 거, 그렇게 행복에 한발 다가서려고 애쓰면서 사는 게 사는 거지.

 

애인과 헤어진 티피는 같이 살던 애인의 집에서 나와야 할 상황이지만, 그녀가 가진 돈은 부족했고, 살 곳은 필요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셰어하우스 광고. 집주인은 야간에 일하는 간호사여서 서로가 집에 있는 시간이 다르니 자기가 집에 없는 시간에 집을 대여한다는 것. 이용 시간을 정해놓고 같은 집을 시간대 나눠서 둘이 같이 쓰자는 말이다. 월세도 괜찮은 가격에 좋은 조건이지만, 집주인 남자와 동거(?)한다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다른 선택지가 없던 티피는 집주인 리언과 계약하게 되고, 시간차 동거를 시작한다.

 

서로가 '윈윈'하는 계약이었지만, 위험 부담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모르는 사람과 같은 공간을 쓴다는 것, 서로 성별이 다르다는 것, 취향이 다른 두 사람의 공간이 공유된다는 것, 누군가와 함께 사용하는 공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등 혼자 살 때와 다른 게 너무 많지 않은가. 같은 공간을 공유하다 보니 지켜야 할 게 많고, 나만의 공간이 아니니 여러 가지로 물어볼 것도 많은 게 사실이다.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의사소통은 필요했다. 티피가 리언의 집에 들어온 이후로 두 사람의 의사소통은 쪽지였다. 집안 곳곳 발길 닿는 곳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적은 포스트잇 쪽지를 붙여놓는다. 세면대 진열장에, 냉장고에, 침대 옆에, 식탁 위에 등. 음식을 많이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고,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다고, 어느 공간을 어떻게 바꿨으니 이해해달라는, 정리되지 않은 짐의 처리 방식 같은 그 공간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했다. 이 정도면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의 온도가 괜찮지 않은가? 적당한 거리와 딱 필요한 내용만 주고받으면 되는 일. 참 심플하다.

 

그런데 말이다. 읽다가 보니 이 동거의 단점보다는 장점, 감정을 건드리는 설정이 눈에 들어오면서 자꾸 설렘설렘하더라. 21세기의 유럽이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고, 서로에게 상처 주는 애인을 정리하는 것도 참 심플하게 느껴졌는데(리언의 경우), 왜 티피와 리언이 만들어가는 사랑은 아날로그 시대를 보는 것 같을까? 느려도 너무 느리다. 뭔가 말랑말랑한 게 피어오를 것 같으면서도, 조심스러워서 좀 더 살펴보다가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좋게 보면 사람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는 성격이고, 나쁘게 보면 답답해서 독자를 죽일지도 모른다. 그냥 핑계 하나 만들어서 서로 얼굴 보란 말이야~! 그러다가 둘이 얼굴을 마주하게 된 곳이 리언의 집 욕실이다. ㅋㅋ 티피는 어쩜 그렇게 타이밍도 잘 맞췄는지, 첫 만남이 훌러덩 다 벗은 누드 차림과 속옷 차림인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서로 민망한 꼴을 먼저 보고 시작했으니, 뭔가 급히 전개가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건 나뿐만이 아닐 터.

 

무엇보다 이 소설의 아날로그적 사랑법이 두근거리면서 다가왔던 건 둘이 주고받는 포스트잇 쪽지였다. 얼굴도 모르고 통화도 안 하는 두 사람은 집안에서의 쪽지와 급할 때 사용하는 문자였다. 말로 하면 몇 초 걸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쪽지로 오고 가면서 차곡차곡 쌓인다. 소소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 일상이 그렇지 않은가. 하루하루 소소하게 살아가는 시간. 누군가와 종일 이야기했어도 정리하려고 보면 일상의 안부를 나누는 일이었다는. 티피와 리언이 처음에 나누는 메모는 집안의 정리나 서로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서로의 일상을 작게나마 적기 시작하면서 상대의 안부를 묻기에 이른다. '리언, 괜찮아요?' 같은 걱정의 말, 출판사 편집자인 티피가 만든 책의 감상을 전하고, 일터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나누는 것도 두 사람 사이에 점점 커지는 일상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며 상대의 마음을 읽고, 때로는 눈앞에서 마주하고 말할 때보다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수단인 편지의 힘을 확인한 것만 같다. 하고 싶은 말 실시간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많은 세상에서,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전달되기만 하면 되는, 속도보다 진실한 마음에 중요함을 강조한 것 같아서 괜히 흐뭇해지기도 했다.

 

냉장고 문에 이마를 잠시 얹었다가 종이 쪼가리와 포스트잇 쪽지들을 손가락으로 훑어본다. 엄청난 양이었다. 농담, 비밀, 이야기, 두 사람의 인생이 천천히 펼쳐지고 있는 광경. 두 사람의 인생이 바뀌어가는 광경. 아니면 뭐랄까. 동시에 똑같이 바뀌는 장면이랄까. 다른 시간대, 같은 장소에서. (251페이지)

 

이 소설이 의미가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데이트폭력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다는 점이다. 티피의 전 애인 저스틴은 다른 여자가 생기고 같이 살던 티피를 내보낸다. 오히려 동거하는 동안 발생한 지난 비용까지 청구한다. 사귀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하는 일을 반복했다는 티피의 말을 듣고, 이런 놈과 헤어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티피는 저스틴의 연락에 다시 그를 마음에 담으려고 한다. ? 저스틴과 오랜 세월 연애하는 동안 티피는 저스틴에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그의 모든 말에 점점 수긍해가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말이 옳고, 사실을 왜곡해서 기억하게 하고, 강요와 압박으로 상대가 잘못했다고 결론짓고 인정하게 만드는 일들. 저스틴은 교묘하게 티피를 조종했고, 티피는 그것도 모른 채로 저스틴과의 반복되는 헤어짐과 연애에 익숙해진 거다.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았다고 저스틴이 티피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저스틴과 연인으로 지내면서 티피가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는, 그와 헤어진 후에 나타난 후유증과 같다.

 

 

한 사람은 전 애인의 감정적 학대에 속으로 무너져 내렸고, 한 사람은 내성적 성격에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며 죽음을 일상으로 보면서 산다. 우울함이 내재하면서 언제든 극단적으로 치닫는 마음에 나쁜 선택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이런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만났으니, 두 사람을 지켜보는 독자의 염려도 저절로 커진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이 단순히 로맨스 소설로만 비치지 않는 이유, 어쩌면 연애의 시너지효과가 제대로 발휘한 예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티피와 리언은 진짜 연애와 사랑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줬고, 정신적인 아픔까지 치유되어 가는 것을 증명했다. 분명 사랑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두 사람의 주변에 있는 많은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 것까지 아우르며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게 사랑하는 사람의 자격이 아닐까? 티피와 리언의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에 많이 등장하고, 그들의 한마디가 간섭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기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각자의 인생이지만, 또 같이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준 이들 때문에 흐뭇하다. 두 주인공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행복해지는 걸 보면서, 발랄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사람들 때문에 내내 웃으면서 읽었다.

 

"때로는 예전대로 사는 게 더 쉽게 느껴져요. 더 안전한 것 같죠. 하지만나는 당신이 해내는 걸 봤어요. 당신이 해낼 수 있는 일을. 당신이 얼마나 용감한지 봤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괜찮겠어요?" (441페이지)

 

눈물보다 웃음을 더 많이 기억할 수 있다면,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 연애 괜찮은 것 아닐까? 그동안 로맨스 소설 읽어오면서 로맨스에 관해 나름의 정의를 여러 가지 세웠었는데, 어느 정도 현실에 맞게 떨어지는 정의는 '동반성장'이었다. 상대와 함께함으로써 내가 성장하는 기쁨을 맛보는 것, 동시에 상대방도 나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더 발전된 인간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 그렇게 상대를 존중하고 공감의 존재가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연애가,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달콤함과 말랑말랑함에 인간미까지 얹어진, 로맨스와 자기 성장이 잘 어우러진 소설이었다. 홍보 문구의 한 문장처럼,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로맨스는 여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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