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노벨레 문지 스펙트럼 개정판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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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서, 어딘가에 감춰있다가 머리를 슬쩍 내밀듯 욕망이 꿈틀댄다. 그렇게 감추어진 욕망이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들춰졌을 때 우리의 감정은 꾹꾹 내리누르긴 하지만, 실제로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감정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순수하고 도덕적 기준에 철저하게 반응하는 인간이라고 해도, 언제 어디서 불어올지 모를 위험한 바람에 항상 노출된 거 아닌가. 다만, 그 바람을 맞으면서 버티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남편 트리돌린과 아내 알베르티네는 겉으로 보기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보통 가정의 일상처럼 보였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난 후의 저녁 식사 자리.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아이는 곧 보모의 손에 끌려 잠자리에 든다. 그 자리에 남은 사람은 아이의 아빠와 엄마인 부부. 그 순간, 안정된 삶의 단란했던 부부에게 익숙한 일상을 조금 다르게 보내고 싶은 감정이 일었나 보다. 아니면 상대방에게 속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거나. 그래서 그들 각자 감춰왔던 욕망을 고백한다. 아내 알베르티네는 덴마크 휴양지에서 반한 장교를 언급한다. 그 장교가 전화를 받고 갑자기 떠난 게 아니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를 그때의 감정에 대해 말했을 때 남편 프리돌린의 마음은 어땠을까. 솔직하게 말하자고 서로 다짐하고 이야기를 꺼냈음에도 아내에게 처음 발견한 욕망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아내가 경험한 그 욕망의 순간이 자기에게는 없었다는 게, 자기 아내가 그런 욕망을 경험하고 감춰왔다는 게 말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럴 수도 있다는 척하던 그는 내면의 혼란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려고 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은, 소설 속 문장처럼 거리에는 창녀들이 그득했어도 자기 집안 여자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였다. 17살의 순결했던 아내에게 그런 환상이 있었다니 용서가 안 된다. 그 자신은 욕망의 순간을 끊임없이 탐닉하면서도 말이다. 지인의 임종 소식에 달려 나간 그는, 죽은 이의 딸에게 고백을 듣는다. 이미 알던 시선이다. 그 집에 방문할 때마다 자기를 바라보던 지인의 딸이 아버지의 시체 앞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여겼다. 무슨 감정의 변화였을까, 그는 지인의 집에서 나와 거리를 헤매고,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대학 동창 나흐티갈로부터 은밀한 파티 이야기를 듣는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되어버린 파티장에서 그는 금기의 유혹을 한껏 즐기지만, 그 위험을 떨치지는 못한다.

 

그가 경험한, 금지된 환락의 세계는 실재했을까, 아니면 그에게 찾아온 욕망의 판타지였을까? 그가 그런 환상의 실재에 고민하던 때, 새벽에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의 꿈 이야기를 듣는다. 아내의 꿈은 지독하게 에로틱했다. 그가 환상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웠던 경험보다 더 생생했다. 아내의 꿈 이야기를 다 들은 그는 어떤 꿈도 완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무슨 의미였을까? 당신이 경험한 그 꿈은 꿈에서만 머무는 욕망이라는 뜻일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상쯤에서 그만 넣어두라는 경고였을까?

 

인간의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그 욕망을 얼마나 표출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묻는 것만 같다. 실제로 소설 속의 비밀 장소에서는 가면을 쓰고 입장한다. 트리돌린이 선택한 가면은 수도사 복장이었다. 성스러운 종교에 바탕을 둔 이가 입는 옷이 그가 갈구하는 욕망과 대조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그 비밀 장소에 모인 이들의 가면과 의상 대부분이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는 거다. 여러 가지 위장술을 허용하는 장소였지만, 특히 고위층이나 도덕을 강조하는 이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옷이 많았다. 수도사는 물론이고 수녀 복장, 여왕이나 기사, 법률가를 나타내는 의상이 대부분이었다. 욕망이 춤을 추는 난잡한 그곳에서 가장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복장의 사람들이라니. 얼마나 웃긴가. 그런데도 그들이 선택한 의상이 이해된다면 너무 과장일까. 가장 쉬운 예가 그런 거 아니던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반발심이 끓어오를 때. 아마 시대와 환경이 만든 욕망의 억누름은, 그들이 만든 비밀 장소에서 도덕을 외치는 의상을 선택하게 했을 것이다. 자꾸만 드러내지 말라고 하니 그 안에서 더 팔팔 끓어오를 수밖에, 그러다가 결국 뚜껑은 들썩거리고 끓다가 넘치게 되겠지. 살면서 금기도, 서로에게 갖춰야 할 도덕도 필요하지만 어쨌거나 욕망의 보편성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만 같다.

 

그럼 일상으로 돌아온 남편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는 아내의 꿈 이야기를 듣고 이혼을 결심하면서 집을 나오지만, 막상 그에게는 신분을 들킬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밀 장소에서 그를 구해준 수녀 복장의 여자를 찾고 싶지만 찾을 수 없었고, 가명을 쓴 부인이 호텔에서 자살한다. 혹시 수녀 복장의 여자와 자살한 여자가 동일인일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알 수 없다. 그에게는 미스터리한 비밀 파티와 그의 신분이 노출되어 경고를 받은 일만 남았다. 집에 돌아온 그는 잠들어 있는 아내를 본다. 그리고 잠든 아내의 옆에는 그가 비밀 파티에서 썼던 가면이 놓여 있다. (앗, 들켰군!) 그는 아내에게 지난밤의 모든 일을 털어놓는다. 두 사람은 화해했지만, 아내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하다. “어떠한 꿈도 순전히 꿈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혼잣말처럼 속삭인다. “결코 미래를 속단하지 마.”(158페이지) 화해를 했으나 감정적으로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는 말인지, 이미 있었던 서로의 비밀이 없었던 일로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인지. 결국, 진정한 화해도 아닐뿐더러, 결코 예전 같을 수 없다는 말이겠지. 그들이 각자 경험한 어떤 일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사적이지 못하다는 모순에 얽매여 있을 테니까. 드러내지 말아야 할 욕망을 그렇게 드러내 버렸고, 꿈은 꿈으로만 머물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부부가 가져야 할 도덕적 의무와 한 개인으로 느끼는 욕망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보는 듯하다. 엎치락뒤치락,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 관계가 서로에게 책임을 부여하면서도 그 책임을 말하는 제도의 규범이 부부의 마음을 가르기도 한다. 한편이었다가 서로 죽여야만 하는 원수가 되기도 하는 양면성. 그 양면성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현실의 안정을 주는 직장, 집안에서 머물며 가정을 책임지는 아내의 역할, 서로가 잘 지키며 지내야 하는 규범적인 생활이 그들이 말하는 이상적 가정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다가 느끼는 건 오늘날과 얼마나 다를까 하는 의문이었다. 사랑으로 맺어지고 결혼이라는 선택을 했지만, 그게 부부 관계의 모든 것을 정의하지는 않는다는 것. 프로톨린과 알베르티네가 닿을 그 선택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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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도키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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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어렵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소설이니까 가능한 설정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꿈에서 만날 수 있는 장면들 말이다. 인생의 절묘한 순간에 나타나 나를 옳은 길로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나이에 미래에서 온 자식 같은 건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밤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 내가 미처 모르고 지나치기만 했던 소중한 순간과 기회를 지금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게.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으로 곧 세상과 이별할 아들이 눈앞에 있다. 다쿠미와 아내는 그 아들의 운명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도 쉽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가족이니까, 자식이니까. 그러다가 혼수상태처럼 빠져있는 아들 도키오의 모습을 보면서 다쿠미는 아내에게 오래전 이야기를 꺼낸다.

 

스물 세 살의 다쿠미. 오래 일하지도 못하고, 남들과 타협하며 살아갈 줄도 모른다. 그러니 인생은 언제나 어긋난 것처럼 여기게 되고, 항상 세상을 탓했다. 언제나 '큰 거 한 방'을 노래하며 인생이 뒤바뀔 날만 기다린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 일확천금은 말 그대로 우연히 찾아오는 어느 순간일 테다. 지금 다쿠미에게 필요한 건 인내심과 노력으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뿐인데, 그는 오늘도 홧김에 일을 그만둔다. 그때 그의 앞에 나타난 도키오. 어디에서 온 청년인지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 다쿠미에 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뿐. 자연스럽게 곁을 맴돌며 도키오는 다쿠미의 일상에 스며든다. 그러다가 다쿠미의 애인 지즈루가 사라지는 일이 생기고, 도키오와 다쿠미는 사라진 지즈루를 찾으러 다닌다.

 

두 젊은 남자가 한 여자를 찾아다니는 로드무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소설은 단순히 흥미로움만 전하지는 않는다. 다쿠미와 도키오와 다니는 그 길의 그 모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현재 그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고 이어져 왔는지 찾아다니는 여정이었으니까. 현재의 다쿠미는 그의 아내가 희귀병을 유전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 아이가 태어난다면 또 그 병을 가지고 태어날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아내를 설득 시켜 결혼에 이르고,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도 낳기에 이른 건 모두 과거의 어느 시점에 도키오를 만났기 때문이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 아들이 과거의 나에게 다녀간 적이 있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다쿠미 부부는 믿는다. 지금 뇌신경이 죽어가면서 누워있는 이 아이라면, 분명 아버지의 흐트러진 청춘을 바로 잡아줄 수도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렇게 과거에서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 바탕이 되어, 현재에 이른 이 가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으면서도, 혹시 나에게도 와줄 수 있는 기적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동시에 생긴다. 미래에서 온 나의 아이가, 지금의 내가 잘못 사는 것을 자꾸만 멈추게 하려고 애쓰는 일. 처음에는 왜 이러나 싶어서 거추장스럽고 귀찮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서서히 녹아들고 동화되어 이 아이가 하는 말들에 저절로 신뢰가 생길 때 어떤 마음일까 싶다. 자꾸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고, 어떤 식으로든 내 인생이 좀 더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때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방향이 나쁘지는 않다고 하는 마음이라면 더 믿어도 좋겠지. 상대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종종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을 아주 먼 훗날에 알게 되더라도, 지금은 역시 눈앞의 시간을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게 중요한 거겠지.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그건 마음속에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걸 알았기에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낳은 거야." (396페이지)

 

읽다 보면 얼핏 장르가 궁금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걸 보면 판타지답기도 하고, 다쿠미와 도키오의 우연한(?) 만남이 만들어낸 결과를 보면 감동 드라마 같기도 하다. 자기를 떠난 애인을 찾아 헤매는 걸 보면 연애소설 같기도 하지만, 지즈루와 함께 떠난 오카베를 찾기까지의 과정과 이유를 보면 추리소설 같기도 하다. 결국은 이 모든 조각이 모여 완성해가는, 한 사람이 인간다움과 세상을 배우며 성장해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별을 앞둔 아버지와 아들의 기적 같은 시간 여행에 독자가 편승해, 오늘을 사는 이유를 묻는 것 같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미래가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오늘 이 순간도 미래이면서, 우리가 만드는 삶의 한 조각이면서, 우리의 행복을 그리는 시간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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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샷 - 전쟁, 질병, 불황의 위기를 승리로 이끄는 설계의 힘
사피 바칼 지음, 이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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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의 진화를 보면서 놀랄 때가 많다. 유선 전화에서 무선 전화로, 통화만 하던 전화가 영상 통화가 되고, 손안의 작은 휴대폰 하나로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게, 아직도 가끔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스마트한 세상에 살고 있고, 이 스마트한 세상을 만든 많은 순간이 룬샷이 아니었을까 싶다. 낯설고 생소한 그 단어, 룬샷(Loonshots)은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발상으로 여겼던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기에 생긴 말이다. 신조어이지만 사전에도 등록되지 않은 단어이면서, 우리 미래에도 꾸준히 영향을 미칠 승리의 바탕이 될 것이다.

 

효율과 관리에 중점을 두는 게 기존 이론이라면, 룬샷은 쓸모없는 발상으로 여기던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중점에 두고 발전시키며 성장을 이끄는 방법을 제시한다. 세계사에 한 획은 그은 많은 일이 이 방식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심장질환 사망률을 감소시킨 건, 미생물학자인 엔도 아키라가 청록색 곰팡이에서 발견한 약물 때문이다. 처음에는 부작용 때문에 일본에서 외면받았던 약물이 제약회사 머크가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출시했다. 머크가 돈을 벌게 된 건 당연했다. 누군가는 미친 아이디어라고, 위험하다고 치료 가능성을 아예 무시했던 게 누군가는 성공의 기회가 된 셈이다. 도대체 그 미친 아이디어를 본 사람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보다 룬샷의 가장 쉬운 설명은 이 책의 초반부에서 들려주는 노키아의 예다. 무선 전화 시장을 개척한 노키아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키아 엔지니어 몇몇이 새로운 종류의 전화기를 만들었을 때, 기업의 지도부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모두 깔끔히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 아이디어가 뭐였냐고? 인터넷이 가능하고 커다란 터치스크린에 고해상도 카메라가 달린, 온라인 앱스토어가 함께하는 휴대폰이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이 휴대폰 말이다. 눈앞에서 성공과 돈이 떠나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아이고, 사촌이 좋은 땅을 헐값에 산 것보다 더 배가 아프다. 그 땅을 내가 팔았으니...

 

균형과 소통을 제대로 유지하려면 내부의 장벽을 극복하게 도와줄 손길이 필요하다. 어느 모세의 보좌진의 손길이 아니라, 정원사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하다. 아이디어가 이전되는 데 힘을 너무 받거나(추상같은 명령) 힘이 부족하면(아무 지원 없음), 유망한 아이디어와 기술도 실험실에서 썩게 될 것이다. 그러면 조직은 그 기술을 상실하고, 시간과의 싸움에서 질 것이며, 그 기술을 발명한 사람의 충성심을 잃게 된다. 핵심 인재는 회사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267페이지)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발상의 전환과 가능성을 믿는 것. 성공한 룬샷의 경우를 보면 대개 이런 눈을 가지지 않았을까. 지금 눈앞의 것만 보고 투자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전략적인 상품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듯하다. 기본적으로 인내가 필요하기도 하다. 꾸준한 노력의 결과를 기다려야 하니까 말이다. 룬샷의 성공 사례와 특징을 살펴보면 많은 이론이 바탕에 있고, 발견과 노력, '상전이(모든 것이 변화하는 순간)'에 있다. 모든 상전이는 경쟁하는 두 힘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보통은 두 가지 형태의 인센티브가 생기는데, 대략 '판돈'과 '지위' 정도가 된다. 이 상전이의 원리는 더 혁신적인 조직을 만들 수도 있고, 구조의 변화로 조직을 탈바꿈시킬 수도 있다. 안정적인 것을 유지하면서 익숙한 패턴만 바라보던 것이 좋은 것만을 아니라는 것을 상기한다.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것은 항상 제자리걸음일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나아가고자 한다면 아이디어는 넘쳐야 한다. 그 아이디어를 찾는 눈을 길러야 하고 발전시키고 활용할 수 있다면 성공의 길은 더 가까워질 것이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룬샷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의 결과가 아닌 앞으로 마주할 결과를 더 집중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버니바 부시의 레이더는 전쟁 영웅이 아니었나 싶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야 심장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며 약을 만든 엔도 아키라 박사는 오늘날 심혈관질환 환자들에게 고마운 사람일 터. 디지털카메라의 발상이 의미 없다고 여겼던 폴라로이드 사의 몰락 역시 당장의 현상만 봤기 때문일 것이다. 룬샷을 무시해서 실패했다고 여기는 것도 위험하다. 누군가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발견되고 발전시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룬샷과 프랜차이즈(룬샷으로 탄생한 제품의 후속작 또는 업데이트 버전)는 서로가 필요하다. 이 둘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의 시너지 효과는 계속되는 발전과 성장을 가져올 것이다. 룬샷 역시 제품형 룬샷과 전략형 룬샷의 균형에 귀를 기울인다. 기본적인 제품의 안정성과 기술 개발의 가능성에 '미친 아이디어'가 함께했을 때 룬샷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술력이 뛰어나고 자본의 안정성을 갖춘 기업이라도 중요한 타이밍의 룬샷을 놓친다면 그 결과는 뭐, 추락이겠지.

 

천재 기업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발명품을 가지고 건설한 제국이 오랫동안 건재하면 그를 둘러싼 신화가 널리 퍼진다. 그러나 정말로 성공을 이루는 사람들, '우연의 설계자들'은 그보다 덜 화려한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어느 한 룬샷을 열렬히 지지하기보다는 많은 룬샷을 육성할 수 있는 뛰어난 구조를 만든다. 그들은 예지력 있는 혁신가라기보다 세심한 정원사에 가깝다. 그들은 룬샷과 프랜차이즈 양쪽을 모두 잘 돌보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하게 한다.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고 지원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79페이지)

 

기업의 입장에서 룬샷을 잡지 못한다면 망하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조금 더 크게 보자면 국가의 위상이 걸린 문제가 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은 서구 사회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발견하고 이뤄놓은 기술이 다양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에게 사용되고 기억되는 과학적인 발전은 서양에서 일어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이와 인쇄술, 자기나침반, 화약, 대포, 주철, 지폐 등 중국이 먼저인 것들이다. 중국은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발전해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발전을 세계로 돌리지 못했다. 그건 중국이 시선을 내부로 돌리면서 베이징, 만리장성, 대운하 등 프랜차이즈 프로젝트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너무 성장한 나라였기에, 중국의 지도자들은 미친 아이디어에 더는 관심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자연법칙'이 만들어낸 보다 정교한 기술, 새로운 생각들을 '과학적 방법'이라는 더 현대적인 이름으로 오늘날 우리의 발전에 바탕이 된다.

 

그저 우연히 발견된 것에서 멈추지 말아야 성공한 룬샷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룬샷 육성을 위한 설계가 중요하다. 저자는 5가지 원칙을 내세워 룬샷의 성공을 말한다. 대부분 회의적이고 불확실한, 짓밟히고 무시당하는 기록 긴 시간을 이겨낼 것. 무엇이 문제인지 엉뚱한 데서 원인을 찾는 가짜 실패에 속지 말 것. 실패의 이면을 파고들어 결과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만들어낸 의사결정의 질을 생각할 것. 룬샷을 폭발하는 조직의 시스템을 만들 것. 룬샷을 만드는 것보다 룬샷을 육성하는 정원사가 될 것. 모든 요소, 룬샷으로 성공과 실패를 이끈 내용을 살펴보면 결국, '룬샷을 육성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미친 아이디어는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발견과 성공시킨 그 이후가 진정한 결과물이다. 아이디어 하나가 얼마나 뻗어 나갈 수 있는지, 얼마나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지 하는 것은 개인, 팀이나 기업, 아울러 한 나라의 통찰력과 노력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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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5-08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한테 굴러들어온 복을 차 버린 사람 많을 것 같습니다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사람 많았겠지요 반대로 다른 사람이 관심 갖지 않은 걸 잘 알아본 사람도 많았겠습니다 바로 앞보다는 멀리 내다봐야겠지요 중국이 먼저 만든 것들이 세계로 뻗어가지 못하다니 아쉽군요 세계가 서양 중심이 되고 말았으니... 이제는 좀 다르겠습니다 그래도 좋은 걸 누군가는 잡고 누군가는 놓치겠지요


희선

구단씨 2020-05-13 10:20   좋아요 0 | URL
저는 정말 그런 눈을 갖고 싶어요. 기발함을 알아보는,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눈. ^^
익숙한 것이 편하고 오리지널이 주는 슬기로움이 있겠지만,
세상은 계속 진화하고 있고 인간은 또 그 변화에 어울리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안간힘
유병록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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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아들을 잃었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제 행복한 날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행복 대신 보람이 있는 삶을 살기로 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로, 약속했다. (201~202페이지)

 

내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슬픔을 상상하곤 한커. 그 슬픔의 대상이 누구일까, 그 슬픔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막상 내 앞에 닥친 깊은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 슬픔의 끝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경험하는 슬픔의 크기는 점점 커갔다. 그건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살면서 책임지고 겪어야 할 무게가 커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렸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슬픔은 고작 숙제를 안 해가서 선생님께 혼나는 정도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 않았던가. 그 슬픔이 크기를 키워 와서, 지금은 숙제 정도로 슬픔을 가늠하지 않는다.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과 죽음으로의 이별 같은 일을 큰 슬픔이라고 말한다. 이 정도의 기준을 슬픔이라고 말한다면, 글쎄, 나는 아직 그 슬픔을 경험하지 못했다. 언제가 닥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그 슬픔을 상상하면서도, 설마 그 슬픔의 깊이가 이미 경험한 사람만 하겠는가. 저자가 어린 아들의 죽음을 감당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잘 이겨내기를, 잘 버티고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건, 언젠가 내가 겪을 그 시간을 마주하는 느낌이 들어서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불행의 순간이겠지만, 언제까지 그 슬픔을 붙잡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안간힘을 버티며 살아간다. 슬픔도 이겨내고, 불행도 밀어내려고 발버둥 치면서 말이다.

 

 

어떤 침묵은 외면이겠지만, 어떤 침묵은 그 어떤 위로보다도 따뜻하다. (37페이지)

 

한 번도 예상한 적 없던 슬픔이 찾아왔다. 저자는 아들을 잃었다.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통이 그를 엄습했고, 그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이겨내는 중이다. 누구나 각자의 슬픔이 가장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다가오는 건, 언젠가 내가 했던 생각들이 그대로 비쳐서다. 사실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하는 게 정말 어렵다. 상대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지만, 그 순간 내가 건넬 수 있는 마음이 어설픈 위로로 비칠까 봐서다. 그런 마음을 저자는 염려한다. 그가 겪은 아픔이 주변 사람들에게 퍼질까 걱정하고, 그들이 자기에게 닥친 불행을 금방 또 잊을 거로 생각해서 서운함을 비춘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다르지 않다. 내 일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그들의 일이 되지 않는다. 똑같은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막연하게 공감하는 슬픔으로 여길 수도 있다. 기꺼이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불편함은 상대를 향한 서운함으로 저장된다. 게다가 내가 겪는 슬픔의 분위기가 그들에게까지 옮아간다면, 나 하나 때문에 그들의 감정이 내내 슬픈 채로 머물러야 한다는 게 또 미안해진다. 그래서 점점 주변과의 거리를 두게 된다. 내 마음이 감당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그들의 웃음이 가득한 일상에 나의 아픔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슬픔은 어떻게 다가오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통과하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다. 어린 아들의 죽음은 그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그대로 가슴에 꽂아주었고, 함께하는 아내만이 자기의 고통을 공감해주리라 믿었지만 그마저도 온전하게 같지 않았다. 부부의 아들이었지만, 그 아들을 같이 잃었지만,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미세하게 달랐다. 저자는 그런 아내에게까지 서운했을 것이다. '영원히 지금 그대로의 슬픔을 당신과 공유한다고 믿었는데, 그 슬픔을 벗어나는 방식이 당신과 내가 이렇게 달랐구나' 싶은 순간, 마치 아내의 슬픔이 더 작은 건 아닐까 하는 오해도 하지 않았을까? 듣다 보면 인간의 가장 기본이고 바탕이 되는 마음들이 보인다. 이것저것 재는 것이 아닌, 가장 순수했던 마음 그대로 돌아간 것만 같다. 내 마음과 같으면 그렇게 이해해주는 게 고맙고, 내 마음과 다르면 괜한 미움과 서운함이 겹쳐 감정이 멀어지려고 하는 일들을 보면서, 그 상황과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으면서도 조금은 더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중심을 잡고 슬픔을 끌어안는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 그 방법은 각자 다를 수도 있지만, 저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아들과 함께한 시간 그 자체를 기억하는 것이었다.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면서 죽은 이가 남긴 기록을 생각한다. 아직 학교에 다닌 적도, 돈을 벌어본 적도 없는 아들은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저자가 부모로서 기억하는 모든 것은 아들이 남긴 게 된다. 아들이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편안하게 잠들었던 작은 침대, 살던 집의 곳곳에서 풍기는 아들의 자국들. 그 공간을 떠나면 아들의 흔적을 금방 지우고 슬픔도 소멸할까 싶지만, 저자는 굳이 그곳을 떠나면서 아들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자기에게 다가온 슬픔을 마주하며 기꺼이 끌어안았다. 우리 삶은 슬픔을 외면해도 계속되니까. 그러니까 굳이 그 아픔을 빨리 지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흐르는 게 당연한 것처럼, 슬픔도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게 방법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가 슬픔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이 꼭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의 말을,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따라해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이해와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77페이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은 말에서 먼저 드러나기 마련이다.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함부로 반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의 존중을 얻는 방법은 높은 지위가 아니라, 많은 나이가 아니라, 깊고 넓은 마음뿐이다. (147페이지)

 

 

나에게 다가온 슬픔을 잊으려고 애쓰지 않고 간직하면서 삶을 유지하는 이야기 같다. 세상을 떠난 아들을 기억하면서 슬픔에 빠져있기보다는, 아들의 빈자리만큼 더 나은 삶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맞이한 비극에 주저앉지 않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면서 아들을 가슴속에 새기고 있었다. 아내와의 시간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고, 그의 성장을 함께한 가족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가 처음 겪은 상실은 존경의 의미를 기억하게 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보고 느꼈던 일들에 그의 다짐을 더 하고, 관계를 더 현명하게 이어가는 방식을 경험한다. 매 순간 삶의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는 문장에, 그가 안간힘을 내며 나아가는 모습은 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 또 다른 위로가 된다.

 

그 대상을 잊는 게 반드시 슬픔을 지우는 방법은 아닐 테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에게 다가온 슬픔을 극복하면서,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 반드시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떠나간 것을 잊고 또 다른 것들로 삶을 채우면서 나아가는 일이 때로는 버거울지 모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한 걸음 내디디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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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5-0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부모보다 자식을 잃은 아픔이 더 크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자식은 자기 분신과도 같으니 자기 살이 떨어져나가는 느낌... 그런 마음 잘 모르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아요 아이가 죽고 사망신고 하는 일도 무척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부부라 해도 슬픔이 똑같지 않기도 하겠지요 그렇다고 누구 슬픔이 더 작다 말하지 못할 것 같아요 둘 다 힘들겠습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어서 좀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희선

구단씨 2020-05-07 22:32   좋아요 1 | URL
그러겠죠?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요.
누구나 자기 슬픔이 가장 큰 슬픔일 거예요. 같은 고통을 겪었으니 슬픔도 같을 거로 생각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슬픔은 다 똑같지가 않더라고요.
희선님 말씀처럼, 그래도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힘든 시간을 같이 걸어가는 동안 슬픔도 같이 줄어들 것 같아서요.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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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 속 어느 장면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던가? 주인공이 심란한 마음에 펼쳐 들었던 책의 한 구절,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걷던 길, 술 한 잔과 함께 들려오던 음악. 어쩌면 이런 장면에 빠져들어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 하나가 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건 비단 문학 작품만은 아닐 테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책이나 음악, 장소는 주인공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하는 의미가 되기도 하니까. 저자는 문학 작품을 번역하면서 마주했던 여러 감정을 이야기하면서 그동안 만나온 문학 속 주인공과 음식을 떠올린다. 그때 그 음식이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인간의 성장과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는지 묻는 듯하다. 마치 소설 속에서 마주친 장소, 음악, 책 같은 것과 같은 느낌으로. 그 순간에 느끼는 모든 것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처럼.

 

10월 17일. 키다리 아저씨에게.

체육관 수영장을 레몬 젤리로 가득 채우고 그 안에서 헤엄을 치려 한다면, 몸이 과연 뜰까요? 가라앉을까요?

친구들과 디저트로 레몬 젤리를 먹다가 그런 의문에 빠졌어요. 삼십 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도 여태 결론이 안 나네요. 샐리는 헤엄을 칠 수 있을 거라지만, 저는 세계 최고의 수영 선수라도 틀림없이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해요. 레몬 젤리에 빠져 죽는다면 우습겠죠?

-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레몬 젤리는 주디의 상상력을 키우는 음식이 아니었을까?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쓰는 편지는 그녀가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글쓰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편지 안에 가득한 주디의 일상과 모험, 상상력 같은 이야기는 다시 봐도 생생하다. 주디의 머릿속에 떠오른 레몬 젤리가 가득한 수영장은 읽는 이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생각만 해도 피부에 닿으면 끈적거릴 것 같지만, 그곳에서 수영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싶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면서도 소설이니까 가능한 상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현실에서 하기 어려운 일은 소설 속 주디가 우리를 대신해서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마냥 아이였던 시절을 떠올리듯, 어쩌면 잠시 이 장면을 상상하며 마음 놓고 느긋하게 있어도 좋은 시간 말이다. 팍팍한 현실에 지치고 피곤한 몸을 달달함 가득한 수영장에 넣어놓고, 누가 뭐라 해도 좋으니 상관 말고 즐기고 싶다는 깜찍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 같은 낭만?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면서 독자인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읽은 문학 작품의 세계이다. 그 안에서 맛본 음식의 의미, 사연, 문장이 담은 문학의 섬세함을 읽게 한다. 생강빵과 진저브레드가 어떤 차이인지, 얼마나 같은지 다 알 수는 없으나, 단어에서 다르게 다가오는 그 분위기를 읽고 즐기는 건 독자의 몫이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상상의 세계를 누리는 것도 독자에게 주어진 즐거움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게 의역과 직역의 장단점이었다. 전체적인 흐름에 어울리고 매끄럽게 읽히는 게 좋은 것인지, 있는 그대로의 원래 뜻을 담는 게 좋은 것인지. 나도 원서를 읽을 수준이 안 되니 매번 번역본을 기다리는 독자이기에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상황 파악 잘되고 흐름이 매끄러우면 좋은 것 같으면서도, 더욱 정확한 의미와 있는 그대로 전달되기는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읽는 독자도 이럴진대, 원서를 마주하고 번역해야 하는 사람은 이런 고민이 끝도 없이 이어지겠지. 그래서 번역 일에 대해 고단하면서도 황홀하다고 표현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면서도, 어떤 번역이 작가와 독자에게 가장 좋은 일일까 하는 고민은 계속될 듯하다. 그러면서 독자로 성장한 자기 기억의 순간을 같이 풀어놓으면서 독자로 살아갈 우리들과 공감한다.

 

 

혹시, 고전 명작에서 처음 접했던 낯선 풍경들을 기억하는가? 주인공이 입은 옷이나 시대를 설명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음식이었을 거다. 저자에게 그런 낯선 풍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건 상상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검색 하나로 모르는 대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스마트하지 못한 옛날을 생각하면 글자 그대로 상상에 의존하여 문학 작품 속 세상을 이해해야만 했으니까. 그러니 저자가 번역가가 되고 얼마나 황홀했을까 싶다. 막연하게 상상하며 소화하던 것이 이제는 하나하나 직접 확인하면서 이해하는 순간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어색하고 투박했던, 과거 저자가 접했던 작품들의 번역이 우리말로 옮길 마땅한 표현이 없어서였다는 걸 알게 된다. 너무 이상하다고 여기며 읽었던 문장들의 탄생을 비로소 이해한다. 거기에 중심을 둔 게 음식이다. 각종 빵과 수프, 요리들.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이 뭔가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제대로 알지 못해서 다 맛보지 못한 아쉬움을 저자의 설명으로 달래게 한다. 링곤베리를 귤로 상상했다는 저자의 기억이 귀엽다. 그때는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겠지.

 

검고 딱딱한 빵 대신에 할머니에게 하얗고 말랑한 빵을 주고 싶었다는 하이디. 커다란 빵에 건포도가 박혀 있어서 먹음직스러웠던 소공녀 세라의 시선. 거위 구이가 차려진 식탁에 비교되어 갇힌 히스클리프가 더 생생해지는 워더링 하이츠. 땅콩버터와 잼 샌드위치가 하나의 음식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건 또 뭔가. (여담이지만, 땅콩버터와 잼을 같이 바른 샌드위치는 정말이지, 너무 맛있고 달달하다. 칼로리가 엄청 높은 음식을 먹었다는 죄책감도 동반한다) 더 많은 작품 속 음식 이야기가 있지만, 계속 들으면서도 선뜻 그 음식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문화의 차이가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칼칼하고 개운한 뒷맛이 나는 음식을 좋아하기도 하니까. 마치 피자를 맛있게 먹어놓고 마지막에 김치 한 가닥 먹어줘야 하는 순간도 있는 것처럼. ^^

 

저자가 소개해준 이 많은 작품을 다 읽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게 유명한 작품들, 고전이라 불리며 마치 필독서인 것처럼 여겨지는, 언젠가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어서 목록에 넣어둔 작품들의 제목을 다시 마주하고 있자니 반성 아닌 반성 모드가 된다. 무엇보다 저자가 건드려준 작품 속 음식들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모르고 읽었다면 그냥 식탁 위에 차려지고 지나가는 음식 하나로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어느 순간에는 주인공의 인생을 좌우하는 음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냥 음식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빵 하나에도 삶이 담긴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저자는 이 책으로 번역을 지적하고 오역을 바로잡는 게 아니었다. 번역으로 태어난 글이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그동안 만났던 작품에서 발견한 오해의 순간들을 아름다운 되새김으로 저장한다. 그러면서 독자에게는 새로운 마음으로 그 작품들을 읽고 싶어지게 한다. 그런 장면이 있었나 싶고, 그 음식이 그렇게 번역되었나 하는 궁금증, 그러면서 원작에 더 가까이 가게 하는 마음을 심는다.

 

오역으로 보이는 문장들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한편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느끼게도 한다. 소설 속 단어 하나로 우리는 또 한 번 상상의 시간을 만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단어들로 작품을 보는 다른 시선을 갖기도 한다. 섬세한 번역으로 우리가 작품을 더 잘 이해하는 건 맞겠지만, 어쩔 수 없이 고민에 고민을 더한 단어의 선택으로 우리는 원작의 다양한 해석을 맛보는 즐거움을 저자의 추억 같은 명작 이야기로 듣는다. 때로는 지나가는 행인1처럼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의 세상을 꿈꾸고 다른 삶을 만나는 귀한 경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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