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릴리언트 블루 (Brilliant Blue)
함지성 지음 / 잔(도서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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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만남은 여행의 즐거웠던 시간을 기억하듯 그곳에 남겨두고 오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굳이 기대하지 않아도 좋을, 여행이 끝나면 현재의 생활로 가져와서 감정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계산(?)은 더 짙어졌고, 오늘을 살아내느라 바쁜 인생은 이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얘기하곤 했는데... 이 소설을 읽다 보니 잠깐, 아주 잠깐 한 번쯤은 그냥 여행 자체로 생각하면서 떠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니까, 여행지에서의 만남을 꿈꾸지도 않지만, 혹시 여행지에서의 만남이 있더라도 거기 놔두고 와야만 하는 결론을 미리 내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니었느냐고 말이다.


수키는 남프랑스에서 결혼하는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 이 친구들은 몇 년 전 보라카이에서 만난 친구들이고, 이들의 초대로 남프랑스에서 지내던 시간도 있었다. 그때, 리버를 만났다. 파란 눈의 중심에 노란빛이 섞인 그와의 시간은 사랑이 되었고, 그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이 사랑이 영원할 거로 믿었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던 중 선뜻 선택하지 못할 문제에 이르렀고, 그렇게 헤어졌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흐르고...


친구의 결혼식에서 그를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나만 하는 건 아니지? 수키가 그와 연인이기에 앞서 그는 결혼 당사자의 친구였으니, 당연히 초대받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의외의 망설임을 겪어야 했다.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고 싶은데, 그와 만남이 어색할까 잠깐 주춤거렸다. 단순히 그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게 어색해서만은 아니다. 그와 헤어진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순간순간 그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은 튀어나왔다. 어느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 어느 음악 바 앞에서, 어떤 음식을 두고도. 그녀의 옆에 다른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줄곧 그녀의 온전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음에도 리버의 잔상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친구의 결혼식에 왔으니, 즐거우면서도 불안한 이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두근거리면서, 떨리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다시 봐도 어떻게 할 거라는 생각도 계획도 없는데, 보고도 싶고 안 보고도 싶고. 모든 상황과 순간에서 갈팡질팡하게 되는 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혼자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을 때면 항상 데리러 와 내 것과 똑같은 차를 시키던 그 사람이. 잔이 거의 비워질 때 즈음에 맞춰 책을 덮으면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내 등을 감싸던 그 사람이.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가기 전이면 꼭 허드슨 강 쪽 부두까지 손을 잡고 걷고 싶어 하던 그 사림이. 이제는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 사람 따위, 전혀 가볍지 않지만 나는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다. (43페이지)


벽에 박힌 못을 뽑아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이 자리에 없는 건 한 사람뿐이다. 서로의 생각이 일치하지 못해서 헤어졌지만, 그렇게 헤어졌다고 슬프거나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인간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 아픔을 그대로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이만큼 보고 싶고 힘든데 마치 아닌 것처럼,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말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저자는 이렇게 아닌 척하는 게 아니라, 수키라는 인물을 통해 너무 솔직하게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일상에 집중하고 해야 할 공부를 하고 지냈지만, 어느 순간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의 흔적을 가감 없이 들려줬다. 그런 마음 모른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 같아서, 나도 모르게 수키의 감정을 담은 문장을 따라가고 있었다. 오래 전의 어떤 감정, 어려서 그랬다고 변명하기에는 후회가 가득했던 순간들, 조금 양보하지 못해서 감정적으로 대했던 날들을 지금도 기억해 낼 수 있을 정도니까.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 경험했을 그 순간을 소설로 다시 만나니. 웃음도 나지만 아련하기도 하다. 사실 이런 감정을 느끼고 살기에는 오늘이 너무 바쁘지 않은가. 전쟁통에서도 사랑을 한다고 하지만, 나이를 먹고 살아가는 일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우선에 두지 못하게 하는, 어떤 눈치를 챙길 때도 있다. 그래서일까, 스물 전후의 시간을 보내는 수키의 일상에서 돌아가지 못할 시간의 설렘에 두근거렸다. 뭐든 열심히 하면서 실수도 하니까, 그래도 된다는 너그러움을 먼저 보이게 된다. 한 사람의 일기장을 보는 기분으로 읽게 되는데, 그 중심에 로맨스가 있다. 그래서? 친구의 결혼식에 갔어? 리버가 거기에 왔어, 안 왔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를 다시 만났는지, 만났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지나간 시간을 묻어두고 각자의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그녀의 오랜 그리움에 대한 답을 얻었는지. 뉴욕, 보라카이, 남프랑스 등 이국적인 배경이 이 소설을 더 특별한 느낌으로 전달하면서, 괜히 수다쟁이가 되면서 읽게 되는, 오랜만의 가슴 떨림이, 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배가 되게 한다.


한 가지 궁금증만 보고 이 소설을 대했다. 처음 소개 글에서 언급된 헤어진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에,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하는 결말만 파헤치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재회 여부를 확인하기까지 서술되는 한 사람의 일상과 그 나이에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해서 살아가는 날들, 이국적인 풍경을 들려주는 재미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새 결말에 도착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색다른 장소를 문장으로 여행하는 기분, 잊고 지냈던 두근거림을 마주하며 잠깐 설렜던 즐거움이 가득했던 소설이다.


#브릴리언트블루 #함지성 #도서출판잔 #소설 #로맨스 #한국소설

##책추천 #어떤그리움 #뉴욕 #보라카이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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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복간할 결심 1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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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페이지에서 살인 사건의 범인을 알려주고, 친절하게 살인의 이유까지 말해준다. 그러니 더 읽을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 소설의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다. 더 큰 궁금증이 생겼으니까. 내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게 내 일상을 불편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한 가족을 죽일 이유가 된다고 금방 떠올릴 수 있을까? 문맹이 왜 살인의 이유가 되는지, 그 궁금증이 이 소설을 더 펼쳐보게 한다.


유니스가 글을 배우기 시작해야 할 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녀는 글을 배우지 못했다.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성장 환경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아플 때 그녀가 간병했다. 제법 잘 해냈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자 더는 견디지 못했던 그녀는 아버지를 질식사로 죽게 했다. 들키지 않았다. 그저 죽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을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녀의 생존법은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다. 누군가의 약점을 잡아내어 돈을 갈취하면서 협박도 일삼았다. 그녀에게 만족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그냥 살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커버데일 가족의 가정부로 일하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 되었다.


커버데일 일가가 돈이나 쓰면서 즐기는, 그저 그런 날들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면 아직 살아있었을까 싶기도 하다만. 학력이 높고 오페라도 즐기면서, 집안 곳곳에 책을 쌓아두고 즐기는 사람들이라서 유니스의 눈에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건지도 모르겠다. 서재에는 책이 가득했고, 딸은 학교 과제를 하느라 책을 읽어야 했고, 아들은 주방의 식탁에서도 책을 들고 와서 읽을 정도였다. 조지의 책상 위에는 온갖 서류가 쌓여있고, 재클린도 잡지와 책을 읽었다. 유니스는 이 많은 책과 활자들이, 이 가족이 자기를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말싸움도 아니고, 쌓여 있는 책이 누군가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된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글자를 모르는 것을 시작으로 한 사람의 인격 형성에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하는, 문맹이 낳는 또 다른 문제를 들여다보게 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동정심을 앗아갔고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심리학자들이 애정이라고 부르는,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그녀의 기질 안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74페이지)


유니스는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이후 처음으로 조지의 시체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다음에는 응접실로 다시 들어가 재클린, 멜린다, 자일즈의 시체 역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연민도 회한도 일지 않았다. 사랑, 기쁨, 젊음, 평화, 안식, 생명, 먼지, , 낭비, 가난, 폐허, 절망, 광기,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랑을 제거하고 생명을 파괴하고 희망을 부수며 지성의 가능성을 훼손하고 기쁨을 종식시켰다. 유니스는 매장하는 사람들조차 신음을 흘릴 정도로 커버데일 가족의 시체를 썩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훌륭한 양탄자가 엉망이 되어 안타까웠고, 자신에게는 피가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257페이지)


단순히 글자를 모르는 건, 앞서 말했듯이 한 사람의 일상을 불편하게 하는 정도로 여겼다. 어디에 가서 내 정보를 써넣거나 필요한 내용을 메모하지 못해서 나중에 찾아보지 못하게 하는 그 정도의 불편함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불편함만 생각한다면, 유니스가 보여준 행동을 그 어느 것도 이해할 수 없다. 글자를 모르니 타인의 감정을 읽는 것도 어려웠다. 타인의 감정을 읽거나 소통할 수 없으니, 자신의 필요로 저지른 일의 잘못도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방법, 감정의 교류나 도덕 같은, 같이 살아가는 방식도 알지 못해서 그녀만의 생존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거다. 그렇다고 그녀의 살인이 범죄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의 첫 문장에서 알려준 유니스의 살인이 왜 시작되었는지를 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문맹은 일종의 시각 장애(47페이지)라는 말처럼, 그녀의 문맹을 장애로만 받아들였다면 의료적 지원이 필요한 일이다. 글자를 모른다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다방면의 지원으로 이 장애를 치료해야 하는 일이라는 거다. 하지만 유니스가 보여준 행동으로 생각하자면, 문맹은 시각 장애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듯하다. 문맹을 부끄러워하면서, 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지경에 이른 유니스를 보면 말이다. 글자를 모른 채로 사는 일상을 상상해 본 적도 없고, 습관처럼 읽고 끄적이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 역시도 읽지도 않을 책을 가방에 꾸역꾸역 넣고 외출하는 습관을 보면, 어디서든 읽는 일을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이 책의 소개에서 본 김상욱 교수의 말을 곱씹어봤다. 다들 영어로 얘기하는 자리에서, 영어를 모르는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부끄러움과 분노였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있으니, 혹시나 이 사람들이 내 얘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그것도 영어도 모른다면서 비웃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의심이 가득해진다. 그것만이 아니다. 영어를 모르는 내가 느끼는 좌절감, 이 부끄러움을 감당하게 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스쳐 지나간다.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경험하는 감정이긴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보게 되는 건 살인의 과정이 아니라, 문맹이 단순히 읽고 쓰는 일을 못 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나쁜 마음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재밌는 건, 누구나 글을 알고 쓰는 세상이라고 해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거다. 유니스와 대조적으로 커버데일 일가는 읽는 일에 집중한다. ‘우리 집에는 이렇게 책도 많고, 우리는 종종 오페라도 즐기면서, 주변 사람을 불러서 파티도 한다?’ 부족할 게 없어 보이고,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서 누리는 삶이라고 과시하는 듯한 태도는, 그들이 나에게 특별히 잘못이 없다고 해도 미움 받을 행동으로 각인된다. 너는 왜 열심히 일하면서 집에서만 지내? 새로운 동네에 왔으니까 소개 좀 해줄게, 이런 것도 있으니까 좀 즐기면서 살아, 뭐 이런 우월감을 유니스에게 보이기도 했다. 주인님, 마님 호칭을 좋아했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웃기긴 하다. 유니스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타인과 다른 방식으로 일상을 즐기고 싶은 사람도 있지 않나? 휴가 때 꼭 여행을 가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집콕으로 쉬고 싶다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내가 아는 방식으로 상대에게 권하는 것도 실례가 된다는 것을, 커버데일 사람들은 몰랐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유니스가 일상을 사는 방식을 이해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들처럼 살아가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두 사람은 흰색 메르세데스 자동차를 타고 출발했다. 조지는 커버데일 통조림 회사로, 자일즈는 마그누스 와이든 재단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조지는 자일즈에게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해 보겠노라 다짐했던 터라 바람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건네 보았지만, 자동차에 타고 있는 그들 위로 침묵이 내려앉을 뿐이었다. 자일즈는 소리만 내고는 언제나 그렇듯 책을 펼쳐 들었다. 제발 이번에 만나는 여자가 괜찮은 사람이기를. 재키가 이 넓은 집을 혼자서 감당하려는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그녀에게 그런 짐을 지우는 건 부당한 일이야. 어디 단층집 같은 곳으로 이사라도 가야 할 형편인데…….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어림도 없는 소리. 그러니 제발 E. 파치먼이라는 여자가 괜찮은 사람이기를. (13~14페이지)


단순히 문맹인 한 사람의 살인으로만 보여주지 않은 책이라 더 인상 깊다. 문맹이거나 문맹이 아니거나, 책을 읽고 살거나 안 읽고 살거나, 어느 틈에 파고드는 우월감이나 박탈감을 조심해야 한다. 유니스의 살인을 무조건 혐오하기에도, 커버데일 일가의 죽음에 애도만을 표하기에도 어렵기만 했다. 문맹이 한 사람의 성장과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유니스의 감정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확인하게 하면서,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그러지 못한 사람들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를 던져주었다. 커버데일 일가는 유니스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당연한 일이 유니스에게는 언급하지 않아줬으면 하는 공포로 다가오는지 알지 못했다. 멜린다는 유니스의 문맹을 알고 글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선의는 선의로 다가오지 못하고 강요와 공포가 되기도 한다. 유니스에게 멜린다의 제안은 자신의 약점을 파고드는 공격이었다. 글자를 읽고 쓸 줄 안다고, 책 읽는 것을 즐긴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을 잘 읽고 선을 잘 지키기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적당히 거리를 지키고,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고 살아가는 법은 여전히 어렵다. 문맹으로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인격이 결국에는 한 가족의 몰살하고, 문맹을 모르는 사람들이 저지른 실례는 파국을 불러왔다.


#활자잔혹극 #루스렌들 #북스피어 #복간할결심 #추리소설

##책추천 #개정판 #문맹 #오지랖조심 #특권의식조심 #문맹의위험 #파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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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올드 - 50대 아들과 80대 노부모의 어쩌다 동거 이야기
홍승우 지음 / 트로이목마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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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아들과 80대 노부모가 함께 사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어느새 부모와 자식 세대가 같이 사는 일이 드물어져 버렸으므로. 나 역시 처음에 결혼할 때는 엄마와 함께 살 집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지만, 따로 살면서 자주 들여다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실제로는 큰 집을 구할 돈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4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갑자기 한 집에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큰 위험(?)인지 직접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갑자기 80대 노부모를 자기 집으로 모셔오고 함께 산다는 게, 결말이 궁금해지는 모험처럼 보였다.


이들에게는 특이한 사정이 있었다. 저자는 아내와 아이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낸 후 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치매에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었다. 혼자 지내는 게 걱정스러웠던 저자가 자기를 위해서 부모님을 모셔왔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첫 번째 이야기에서, ‘, 이 사람은 엄마 밥이 그리웠구나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나는 아들이 갑자기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 그 시간이 서로에게 소중하고, 치매를 겪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돌보는 어머니에게 많은 힘이 되었을 거라고 느껴진다. 어디에선가 들은 얘기로는, 치매는 갑자기 환경이 바뀌는 것도 위험하지만, 혼자이거나 외로울 때 더 심해진다고. 더군다나 아무리 남편이지만 노모가 혼자 치매 아버지를 돌보는 일도 많이 힘들었을 거다. 옆에서 다른 가족이 같이 돌볼 때, 치매 진행 속도가 더디거나, 돌봄을 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된다는 것을 알 것 같아서다. 가족 돌봄을 해 본 사람이라면 많이 이해했을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많이 어려웠을 시기. 4050세대가 자기 역할만으로도 힘이 버거웠을 때다. 자식을 키우기에도 힘든 시간, 일을 하면서도 갈등과 고민이 많을 시간, 자식으로 부모 돌봄을 걱정해야 하는 시간. 여기저기 걸쳐 있는 다리가 여러 개 필요한 시기를 이렇게 보낸 저자가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곧 겪을 지도 모를 일에 대비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더라.


이 책 속 인물들을 보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저절로 떠올리게 된다. 치매와 당뇨를 앓으면서 청력과 시력도 안 좋은 저자의 아버지는 항상 주의 깊게 살펴봐야할 대상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듯 돌보고 계셨다. 나의 아버지는 오랜 세월 당뇨가 있었고, 결국에는 당뇨 합병증을 심하게 앓다가 돌아가셨다. 지금의 시아버지는 시력이 굉장히 안 좋아서 오히려 청력이 발달한 경우다. 시어머니 역시 당뇨를 지병으로 갖고 있으며, 나의 엄마는 아프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빠를 정도다. 늙어가는 일은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주변 사람을 통해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데, 이 책을 보면서 그 심각함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니까, 저자의 부모님 모습이 이제 흔하게 보는 우리네 부모의 모습이니까. 억지스럽게 그려지지 않아서 오히려 더 들여다보게 되는 이야기에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다. 정치를 주제로 부모와 갈등하기도 하고, 조심하라면서 여러 번 강조하는 엄마를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내 맘대로 되지 않은 자식의 문제로 속이 상하는 것도 잘 아는 마음이었다.


이제는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는 이야기에 저자의 이야기를 웃고 울면서 읽게 된다. 아픈 부모를 돌보는 간병기인가 싶었다가, 서로 다른 세대인 대상을 이해하는 이야기로 읽힌다. 변화하는 시대에 서로 감정 상하지 않게 소통하며 지내는 과정도 보인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살면서 겪는 고충도 다르지 않았다. 빚 갚으려 일하다가 지친 날들이 버거울 만도 하다. 왕년에 잘 나가던 시절을 얘기하면서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꼰대 친구가 낡은 갑옷을 벗기 바라는 마음도 배운다. 젊은 사람들 틈에서 노인이 서러움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빈번할 수 있다. 이제 고령화, 초고령화 세상이 되면서, 젊은이보다 노인의 인구가 많아지면서, 노인이 되어서 서럽지 않을 세상이 올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그런 세상으로 들어선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가 나이 들어가면서, 어떻게 배우면서 늙어가야 하는지 비춰주는 거울 같은 이야기에 울컥해지는 순간이 많아서, 어제 돌싱포맨 보면서 웃었던 순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올드 #OLD #홍승우 #트로이목마 #웹툰 #우리시대의이야기

##책추천 #책리뷰 #나도늙어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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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06-27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요새 울적한 책들 자주 보시네요ㅠㅠ
당분간 요런거 말고 코믹/액션/스릴러 이런거 읽어주셔요. 여름이니깐요 ㅎㅎ

구단씨 2024-06-28 14:08   좋아요 1 | URL
울적하다기 보다는 옆에 있는 책들 손을 뻗으니 이렇네요. ^^
사실 주변에서 지금 돌아가시 분, 곧 돌아가실지도 모를 분들이 많아서 심란하긴 해요...
몰입빵빵할 것 같은 추리 소설도 쌓아두었습니다. ㅎㅎ

젤소민아 2024-07-06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당선, 축하드립니다~
 
고령자 씨, 지금 무슨 생각하세요? - 노년의 심리를 이해하는 112개 키워드
사토 신이치 지음, 우윤식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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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네, 나이 먹고 고집만 세져서는...’ 언니가 엄마와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마다 하는 말이다. 나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지만, 나이 먹으면 다 저런 건가 싶은 생각에 그저 지켜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이를 먹어갈수록 변화하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성격이 변한다고 해야 하나. 기억력이 감퇴하고,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건 당연했다. 가끔은 민망할 정도로 억지를 쓰는 것도 지켜봐야 했다. 어느 상점에서는 진상 손님 짓 하는 것을 말리기도 했다. 이 사람이 우리 엄마 맞나 싶을 정도로, 언젠가부터 이해하기 힘든 태도를 보일 때가 있더라. 이런 변화를 나만 느끼는 건 아닐 테다. 나와 관계없는 어르신들, 누군가의 부모님들, 많은 이가 경험했거나 느끼고 있을 변화일 수 있다. 이런 변화를 모른 척할 수 없는 건,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 어쩌면 언젠가 내가 그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를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서는 종래의 관점과의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노인이라는 말 대신 다른 호칭을 제안합니다. 그것이 바로 고령자 씨입니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 쇠약해져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풍부한 경험에 근거하여 우리들의 상상을 뛰어넘은 말과 행동으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그런 뉘앙스를 담은 말입니다.” (17)


저자는 나이 든 이들을 노인이 아닌 고령자로 부른다. 일본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비단 일본의 문제에 국한되는 건 아니며,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보는 현상이라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래서 고령자 씨에게 찾아오는 변화, 그 변화가 다른 세대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묻고 답을 찾으려고 한다.


노년의 심리를 이해하는 112개의 키워드라고 부제를 달아놓았지만, 그 많은 키워드 속에서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먼저 찾아보게 된다.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어려워하는 일, 때로는 이렇게 쌓아두거나 주워 오는 쓰레기로 집에 쌓아두는 저장강박증, 뻔히 보이는 의심과 보이스 피싱에 더 잘 노출되는 일, 고집이 세고 화가 많은 건 자주 보이는 성격이고,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자기에게 불리한 기억은 쉽게 잊는 게 가능해지는지... 많은 증상과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는 고령자 씨 자신의 자율성이 아닐까. 내가 직접 운전을 해서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자유로움, 아직은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의 쓸모 있음, 자기 효능감은 그들에게 운전대를 놓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몸과 지능의 감각은 점점 떨어져 온 게 사실이니, 이로 인한 교통사고의 위험성에 더 가까워졌다.


보이스 피싱은 어떨까. 갈수록 교묘해지는 수법으로 젊은 사람들도 당하고야 마는데, 고령자 씨 역시 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의심스러운데 당하고야 마는 일이 왜 반복해서 일어날까. 고소득을 보장해 주겠다거나, 당신 자녀가 회사 공금에 손을 댔다거나 하는 등의 뻔한 속임수에 빠지는 일에 왜 자꾸 속는 걸까. 현직에서 물러나거나 성인이 되고 독립한 자식에게 고령자 씨는 자기 존재감을 느끼기가 어려워진다. 내가 가족에게 보탬이 되고 의지가 되어줄 수 있다는 책임감을 갖고 싶은 의욕, 고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활동으로 자신감을 갖고 싶어 한다. 보이스 피싱은 고령자 씨의 이런 의욕과 열정에 자극을 불어넣고 악용하는 경우다. 저자의 말처럼, 사기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자신감 과잉이 보이스 피싱 같은 사기에 노출될 위험을 높이는 거라고 한다.


왜 짜증을 내고 화가 늘어날까. 흔히 나이 먹으면 다 그런다는 한마디로 이해하기 어려운 변화였다. 내가 경험한 고령자 씨의 괴팍한 성격 변화는 두 가지였다. 젊을 때 괴팍하던 사람이 나이 들고 더 괴팍해졌거나, 젊을 때 안 그랬던 사람이 나이 들고 괴팍해졌거나. 어쨌거나 두 가지 경우 모두 나이 들고 괴팍해진 건 맞고,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젊었을 때 점잖았던 사람도 고령자가 되면 부쩍 짜증과 화가 많아진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지고 인지 기능이 쇠퇴하면서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이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고, 자기 쓸모없음을 생각할수록 스트레스가 늘어나고 누적되어 짜증이 쌓인다고. 이렇게 쌓이다 보면, 감정 조절이 어려워져 화가 표출되는 거라고 말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엄마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엄마는 나이 들어 몸의 이곳저곳 고장이 나고, 병원 드나들 일이 많아지면서 확실히 짜증이 늘었다. 본인 마음처럼 되지 않는 몸의 불편함과 그에 따라오는 우울감과 좌절감이 수시로 화가 나는 듯했다. 육체의 노화로 생기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건데,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 상실감이 커진다.


하나하나 찾다 보면 이보다 더한 일들도 많을 거다. 마음을 건드리는 작은 일에서부터 육체의 불편함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더 큰 일까지. 고령자 씨를 둘러싼 문제는 한 가지로 진단할 수 없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효과를 거둘 방안을 모색하면서, 고령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섬세하고 다정한 접근법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해와 소통이 바탕이 되어 오해나 착각을 일으키지 않고, 소통을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고령 운전자에게 운전을 그만두기를 강요하기보다는 다른 활동을 추천하면서 자기 효능감을 느끼도록 조언하거나, 고령자가 자기 유리한 것만 기억한다는 오해를 풀어야 한다. 젊은 시절에 불안과 위험을 인지하고 긴장하면서 살아왔던 거에 비해, 나이 들고 남은 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무의식에 일어나는 기억 저장법이었다. 보이스 피싱 대처법으로는 수상한 전화에 응대하지 말고 자녀와 먼저 통화하는 규칙을 정해 위험을 차단해야 한다고 알려주기도 해야 한다.


나이가 들고 노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보이는 현상들에, 이해하고 대처하는 방법을 몰라서 오해와 소통의 부재가 쌓인다는 게 문제의 시작인 것 같다. 신체 능력과 인지 저하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나이 듦의 증상이라면, 이것을 시작으로 자존감, 자율성, 자기 효능감 저하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 거기에 가족 돌봄의 문제까지 고려하면, 부모와 자식 세대가 함께 하면서 부딪히는 일은 더 많아지고 있다. 가족이니까 괜찮다는, 가족이 해야 한다는 식의 고정 관념은 불만과 갈등 유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돌봄을 받는 대상이나 돌봄을 행하는 가족이나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모두가 만족하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노화를 자각하고 인정하면서, 돌봄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 역시도 남에게 의지하지 않을 정도만 살다 가고 싶다고 쉽게 말했는데,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는 일이던가. 100세 시대에 고령자의 특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돌봄의 대상과 역할을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게 필수라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것 같다. 특히 고령자 씨에게 필요한 건 삶의 목적이다. 사소하더라도 살아가는 목적이 있다면, 그것에 맞게 자기 생활을 주도하면서 살아가게 되면서 심신의 건강 유지가 가능하다고 한다. 삶과 일상의 자기 결정이 삶의 목적만큼 중요하며, 이는 고령자 씨의 자존감이나 자율성 등의 다양한 심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고령자 씨를 보는 것은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행복한 일입니다. 나이를 먹어도,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게 되어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면 늙는 것도 그렇게까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분명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215)


저자의 설명을 듣고 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이해. 무조건 이해하라고 하면 나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왜 이해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나면 고령자 씨를 대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가까이서 보면, 나의 엄마가 편안하고 행복할 때 나도 덜 불안하고 편안하다. 엄마가 불편함을 호소하는 말, 이유도 모른 채로 짜증 내는 것을 듣고 있을 때는 덩달아 나의 스트레스도 치솟는다. 서로가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 행복한 노년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고령자 씨를 이해하는 일은 필요하다. 나의 미래를 미리 보는 일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과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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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처 : 벨몬트 아카데미의 연쇄 살인
서맨사 다우닝 지음, 신선해 옮김 / 황금시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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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들은 기억이 난다. 학점 제대로 못 받았다고 부모가 교수에게 항의 전화를 했다는 뉴스. 군대 간 아들 일로 행보관이나 그 이상의 책임자에게 전화하는 부모가 많다는 내용도 지인에게 직접 들었다. 어느 인터넷 게시글의 댓글에는, 회사에서 신입사원 부모에게 전화를 받아본 상사도 있다는 내용도 본 적이 있다. 성인인 자녀의 일에 부모가 나서는 게 이렇게 흔한 일이었던가. 얼핏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과거에는 안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내용의 뉴스를 듣는다면 새삼스럽지 않다. 유치원에서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도, 부모의 과도한 간섭은 교육 현장은 물론 사회생활까지 문제를 만든다. 그 문제 상황의 가장 큰 피해자는 자녀일 테고 말이다. 이런 극성 부모와 넘치는 사명감에 불타는 교사가 만난다면 어떨까.


미국 동부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 벨몬트 아카데미. 겉보기에 우아하고 평화롭다. 돈 많은 부모의 기부금과 높은 교육열은, 학생이 최고의 점수로 졸업하면서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맹렬하게 달리게 한다. 이 달리기에 학생보다 학부모가 더 열심히 참여하지만, 그 영향은 자녀인 재학생에게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이런 태도 때문인지 학생의 건방진 태도는 흔했고, 자녀의 점수에 부모는 당연하다는 듯이 간섭하기에 이른다. 학부모들의 돈이 이 학교를 운영하게 만드는 바탕이어서, 벨몬트 아카데미의 선생 대부분은 학부모의 간섭을 차단하지 못한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올해의 교사상을 받은 테디는 이 학교 학생이나 학부모의 건방진 태도를 잘 참지 못했다. 10년 동안 학생을 위해 헌신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벨몬트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올해의 교사상을 제대로 축하받지도 못했다. 그래도 기뻤다. 이 상패 하나로 그의 위신이 달라졌고,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어느 날, 재학생 잭의 부모가 테디를 찾아온다. 잭의 에세이 점수가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점수 수정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정중하게 거절한 테디는, 다른 방식으로 잭 부모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절대로 그들이 만족할 만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여기까지 읽으면 어느 나라에서나 극성 부모가 존재하는구나 싶었을 텐데, 뭔가 묘한 분위기가 테디를 감싸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선생이지만 유치한 감정으로 학생을 대하는 듯한, 그가 가진 기준에서 벗어나면 그 누구라도 그의 적이 되어버리고 마는 이상한 방식의 교류. 그랬다. 테디는 자신이 학생을 위한 방식의 가르침을 행한다고 믿지만, 그 믿음에 부합하지 못하는 대상에게는 그만의 방식으로 철저하게 응징한다. 학생뿐만이 아니다. 그가 벨몬트 아카데미에서 가르침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는 인물들은 모두 그의 조용한 처벌의 대상이 된다.


무슨 선생이 이럴까 싶으면서도, 각 인물의 태도에 화가 나기도 여러 번이다. 모두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의 최선(?)을 다한다. 자녀의 점수를 위해서 계획된 협박도 못 할 게 없었다. 부탁을 가장한 은근한 종용도 했다. 처음에는 테디의 어긋난 교육 신념이 이상해 보였는데, 학생도 학부모도, 학교 관계자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상태로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 게 과해 보였다.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난다고 했던가. 탈이 나고 크게 났다.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더는 욕심 부릴 수 있는 목숨조차 없게 되었다. 그 사이에 여러 명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었다. 열심히 했지만 미운 털이 박혀 점수를 얻지 못하는 학생, 학생 편을 들면서 선을 넘어 간섭하느라 목숨을 지키지 못한 선생, 자녀의 인생 대신 재단해 주려다가 예정에 없던 죽음을 맞이한 학부모, 제 역할 다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다가 목숨을 잃은 학교 관계자 등, 모두가 자기 목숨을 지키지 못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경찰은 뭐 하고 있기에 이렇게 연쇄적으로, 그것도 학교 안에서 죽음이 판을 치게 놔두고 있었나. 나름 수사도 하고 용의자를 추리고 했건만,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계속되는 수사에 계속되는 죽음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덕분에 독자가 이 책을 읽는 재미는 배가 되었다. 작가는 소설의 초반부터 범인을 드러내 주었고, 범행 내용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왜 살인이 시작되었는지 이유도 분명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범인도 이렇게 계속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는 거다. 거슬리는 한 사람을 처단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상하게 일이 꼬이고 죽음의 방향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향하다 보니 살인은 이어지고, 범인이 가진 교육 사명감은 한참 멀어진 후였다.


주인공 테디를 중심으로 다섯 명의 시점이 번갈아 가며 서술되는데, 때로는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하는, 때로는 같은 것을 보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는 이들을 보면서 흥미롭기도 했다. 무엇보다, 사건이 해결되나 싶을 때마다 새로운 사건을 만들면서 반전이 거듭되는 게 이 소설의 재미를 더한다. 범인은 이미 알고 있지만, 여기서 사건이 끝나는 건가 보다 하고 안심하려고 할 때마다 엉뚱하게 꼬여버린 사건들, 예상에 없던 인물의 등장은 이 살인을 절대 끝나지 않을 사건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범인 혼자 나쁜 인간인 건가? 그랬다면 일방적으로 범인만 미워할 수 있었을 텐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변 인물들이 하나씩 범인과 다를 바 없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니 기가 막힌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비밀,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살인도 불사하는 선택을 하기에 이르는 과정이 참 재밌다. 인간이란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는 존재인가 싶어서 말이다.


오늘날의 교육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고, 교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서로가 고민해 볼 문제를 제시한 소설이기도 하다. 학생과 학부모, 교육 관계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그 몫을 다하고 선을 지키는 게, 의미 있는 교육의 장을 만드는 게 아닐지 하는 생각도 든다.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고 싶은 부모의 욕심, 많은 과제로 학생의 노력을 평가하려는 교사, 그 사이에서 양쪽의 요구를 다 수용해야 하는 학생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궁금한 게 그것인데, 아무도 들려주지 않았다. 교육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학생이 아닌가 싶은데 말이다. 명문고등학교에서 명문대학으로 진학을 바라고, 그 자신들을 금수저로 인식하며 흙수저출신 교사를 무시하는 학생과 학부모, 그런데도 학교를 유지하게 하는 돈줄인 학부모의 요구를 응할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어떻게 깨트릴 수 있을까. 소설의 첫 부분에서, 잭의 부모가 자녀의 점수를 두고 교사와 협상을 하러 왔다는 게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소설 속 이야기로 머무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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