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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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지만 정작 읽어본 적이 없는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항상 다짐하면서도 정작 읽을 시간이 없다고 밀어두었던 책을 이제야 읽었다. 그레고르 잠자는 갑자기 왜 곤충으로 변했는지, 그의 변신 후 가족들은 또 어떻게 변신했는지 궁금했던 것도 컸지만,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그 질문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아이들이 자기 부모에게, 자기가 아침에 일어났는데 곤충으로 변해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한 번쯤은 묻는다고 한다. 아마 이 책의 내용에서 시작된 질문인 듯하다. 갑자기 내 아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는데, 순간 말문이 막히고 버벅거리지 않을까 싶더라.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사랑을 가득 담아 가족이란 이름의 따뜻함만을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말이다. 내 가족이 곤충으로 변했을 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의 한계를, 이미 한 번쯤은 작게나마 경험한 것 같아서 그 순간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자신의 몸이 갑충으로 변한 것을 알게 된다. (후반부에 하녀의 말로 판단하자면, 아마도 말똥구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옆으로 돌아눕는 것도 힘들다. 병가를 내고 하루 쉬지 그러냐고 생각하던 찰나, 출장영업사원으로 일하는 그는 그날 아침에 시간 맞춰 기차를 타야 했다. 월급쟁이의 비애가 이런 건가. 아프거나 사정이 생겨도 마음대로 쉬지도 못하고, 몇 분의 지각에도 밥줄이 흔들릴 수 있는 현실이여.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가 방에서 나오지 않자 식구들은 돌아가면서 그의 방문을 두드린다. 그가 잠긴 문을 열지 않고 알겠다며 대답만 하자, 식구들은 그 대답(?)을 듣고 돌아간다. 잠시 후, 지배인이 그의 집을 찾아온다. 그가 기차를 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왔겠지. 잠긴 방문 사이로 그가 아무리 말을 해도 그의 가족들과 지배인은 알아듣지 못하고, 어쩌다 열린 방문을 사이에 두고 모두가 얼어붙는다. 인간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상하게 생긴 벌레 같은 존재가 있을 뿐이었다. 놀란 지배인은 뒷걸음질 치면서 그의 집을 떠났고, 가족들은 이 사태에 대해 놀랄 사이도 없이 적응해야만 했다.


그가 벌레의 외모로 변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말한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가족의 말을 들을 수 있지만, 가족들에게 그가 하는 말은 그저 동물의 소리로 들렸다. 소통이 안 되는 건 당연했다. 그는 힘껏 그의 사정, 마음,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받고 싶었으나, 가족들은 변한 그의 존재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만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가족의 수입원인 그가 일을 못 하게 되었으니, 당장 이들의 생계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도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벌레의 몸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기 방 안에서 열심히 걷고 매달리고 움직이는 게 전부였다. 그의 방문은 처음 그가 벌레로 변한 날부터 꽉 닫혀 있었다. 그가 방 밖으로 나와 할 수 있는 게 없었을뿐더러, 가족들은 아직도 그의 변한 외모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동생이 그의 방안으로 그의 음식을 갖다 주거나, 그의 방을 청소해주는 게 전부였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쉽다. 그가 돈을 벌지 못하니 다른 가족이 생계에 뛰어들면 된다. 하지만 이들이 일하지 못하는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아버지는 과거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던 은행의 제복을 입은 채로 앉아 있기만 하고, 어머니는 천식으로 건강 때문에 일을 못 하고, 여동생은 뭐, 그냥 처음부터 일을 안 해서? 어쨌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던 그는 가족의 돌봄이 필요한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 누가 볼까 두렵고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존재로 남았을 뿐이고. 누군가를 돌보는 일도 갑작스럽게 생계를 걱정하게 되는 것도, 지치고 막막할 테다. 이 과정에서 왜 이 말이 생각났는지 모르겠지만, ‘오래된 병 앞에 효자 없다라는.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 했고, 좋게든 나쁘게든 언젠가는 끝이 있을 테니 지금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치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이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일인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게 내 인생에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인지 답을 찾고 싶기도 했다.


처음 이 소설에서 가족들이 벌레로 변한 그를 돌보는 상황 자체가 혼란스러웠지만,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언젠가 그가 예전 모습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동안 가족을 돌봐왔던 수고를 생각해서라도 그를 돌봐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의 여동생이 더 참을 수 없다고, 그를 내쫓아야 한다고 외치던 순간, 알았다.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건 없다고,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이면서도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이 변하기 전부터 그의 가족이 보여준 행태는 너무 이기적이기도 했다. 가족의 빚을 그 혼자 감당하는 게 맞는 건가 싶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가 벌어온 돈으로 생활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건가 싶어서. 그의 모습이 변하고, 그가 더는 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니, 이 가족은 변한다. 소파에 앉아 늘어진 뱃살을 보여주기만 했던 아버지는 외모를 말끔하게 갖추고 외출을 한다. 아프다던 어머니는 하숙인을 챙길 정도가 된다. 착하게만 보였던 여동생은 오빠를 챙긴다는 이유로 이 가족의 꼭대기에 군림하려고 한다. 이 가족이 이렇게 활동적인 사람들이었나 싶을 정도로,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음에도 그의 등에 빨대 꽂고 살아왔던 건가.


이 가족에게 그레고리 잠자의 존재는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이었을 텐데, 그 역할을 잃자 그의 존재도 사라져간다.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로까지 추락한다. 여동생에게는 혐오의 대상으로, 어머니에게는 안쓰러운 아들이지만 부담스러움으로, 아버지에게는 이 집안에서 별 쓸모없어 사과를 막 던져도 되는 벌레쯤으로.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인정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 역할과 능력을 떠나서 기본적으로 가족 안에서 존중받는 건 당연한 게 아니었나 싶었는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당연함은 사라졌다. 가족 관계에서도 분명하게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이 있고, 그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필요한 기본 예의였다. 부모가 아이를 낳았으니 키우는 게 당연한 책임이고 역할인 것처럼, 자녀나 다른 구성원에게도 각자의 책임과 역할이 있다. 모두가 함께 자기 자리에서 상호협조했을 때 가족의 이름은 힘을 가진다. 일방적으로 누구 한 사람의 희생이 당연하지 않은 게, 맞는 거였다. 새삼스럽게도, 그걸 이렇게 다시 알게 된다.


별것 아닌 사과 한 알을 맞고 죽어가는 그를 보면서, 인간의 삶이 이렇게 허무할 수 있나 싶어서 우울해지기까지 하더라. 살면서 직업이란 생계와 연결되기도 하지만, 자기 존재를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 변신하고, 직업을 잃고, 자기 기능이 멈춰버린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잃기 쉬웠다. 가족의 생활비를 벌고 있을 때 그의 존재는 인정받지만, 그의 빈자리는 곧 채워지고 그의 존재 의미는 희미해져 버리거나 사라진다. 이 상황이 그레고르 잠자만의 일이 되는 걸까? 바로 1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게 우리 현실인데, 매 순간 불확실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엇을 장담하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삶의 모든 순간 우리는 불안을 함께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 불안은 카프카의 변신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도 모른다. 이때의 기회를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확신하며 살아갈 수 없는 게 삶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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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는 인류의 흑역사 -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인 폐허 40
트래비스 엘버러 지음, 성소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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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으로 들어가는 큰길에는 짓다가 만 건물이 있다. 도로변에 있어서 못 보고 지나칠 수 없는 위치인데, 이렇게 방치된 상태가 10년이 넘었다. 좋은 자리여서, 건물이 들어서기만 하면 뭘 해도 손해는 안 볼 거로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 누구도 이 건물이 이 상태로 머물러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건물은 1층과 2층 사이의, 철근이 위험하게 솟아 있는 회색의 콘크리트 상태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치 누가 와서 미완성의 그림을 완성해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저자는 이 책으로 모든 버려진 장소에 남겨진 이야기를 전한다. 말 그대로 한때 화려함을 자랑했으나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장소.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아무 위험요소가 없어도 그냥 겁부터 나게 하는 말이다. 황량하고 스산한, 사람도 없고 건물도 사라져가는, 지금 여기에 사는 이가 없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대로 보여주는 장소가 됐다. 여기에서 소개된 장소들은 어쩌다가 지금의 악명을 남기게 된 걸까. 저물어가는 곳이 되고, 마지막에는 누구도 찾지 않는 장소가 되어간 과정을 들려주면서 꽤 쓸모 있는 교훈을 전한다. 인간이 만든 이 흑역사 속에서 어떤 교훈을 발견할 수 있을지 기대하면서 읽게 된다.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마다 다른 이유에서 시작된 장소들의 역사를 들려준다. 예정된 운명이 이루어진 곳, 세상의 변화에서 끝내 도태되어버린 곳, 시간의 무게에 잠식되어버린 곳, 찬란했던 영광의 잔해로 남은 곳, 그리고 오래된 이야기의 마침표가 된 곳. 그런 곳들이 모여 인간 역사의 쓸쓸함을 더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많은 고아를 돌봤던 뷔위카다 보육원은 튀르키예와 그리스의 싸움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 많은 아이는 어디로 가야 했을까. 1964년 보육원이 문을 닫고 아무도 돌보지 않은 그곳은 방치를 거듭하며 시간의 흔적으로 남았지만, 흉물이라 불리며 역사의 한 장면으로 박제되었다.



영국의 해외영토 몬트세렛은 비틀즈의 프로듀서가 만든 AIR 스튜디오가 생겨나면서 많은 가수가 찾아오곤 했다. 어느 순간 유명한 곳이 되었지만, 최악의 허리케인 휴고가 몬트세렛을 덮쳤다. 돌이킬 수 없는 피해로 도시의 회복은 더뎠고, 더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었다. 휴화산 수프리에르힐스가 폭발했고, 녹아 흐르는 용암은 섬을 집어삼켰다. 거듭된 화산 폭발은 이곳을 금지구역으로 만들었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은 무너져가기 마련, 위험한 곳으로의 사람 발길은 끊겼고 폐허가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 정책으로 나라 밖으로 나가기 어려웠던 일본인은, 60년 전만 해도 하와이에 가고 싶어도 쉽게 갈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의 패한 여파로 일본 내에서는 전후 경제 지원을 위해 현금이 국내에 머물러야 한다고 믿었고, 외국 여행과 관광을 억제했다고 한다. 그에 하와이 대신으로 하치조지마는 일본의 대표 관광지가 되었고, 하치조로열 호텔은 화려함을 자랑하며 일본 내 관광객을 흡수했다. 하지만 일본이 부유해지면서 해외여행은 쉽고 저렴해지면서, 일본인들은 더는 하와이를 닮은하치조지마를 향하지 않았다. ‘진짜 하와이를 갈 수 있었으니까. 그 후로 1990년대 일본의 거품 경제가 붕괴하고 경기 침체가 계속될 때도 이름을 바꿔가며 영업해나갔던 하치조로열 호텔은 2006년 문을 닫았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정원의 나뭇가지가 제멋대로 자라나면서 나뭇잎이 진입로의 표지판을 가렸고, 덩굴이 건물을 뒤덮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자연이 이 호텔의 폐업안내판이 되어버린 듯하다.


어느 여행작가의 글로 관심 두었던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 넓게 뻥 뚫린 시원함으로 기억했는데, 그곳에는 열차들의 무덤이 있다. 영국이 초석 등 천연자원 운송 목적으로 철도를 세우고 우유니에 환승역을 건설했지만, 인공 질산염의 등장은 이 자원들의 수요를 줄게 했다. 기차역이 폐기되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은 자연스럽게(?) 소외되고 잊히기 마련이다. 녹슨 증기기관과 객차가 모여 앉아 우유니 기차 폐기장을 만들었다. 한때 번영의 상징이 되고 희망을 주었을 그곳이 지금은 쇠락을 보여주는 곳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예전에 어떤 어른의 왕년에~’로 시작하는 말을 정말 듣기 싫어했는데, 어떤 건물, 장소, 사람 등 모든 것이 한때의 화려함과 자신만만함을 뒤로하고 오늘의 씁쓸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이 살짝 읽히기도 한다. 어느 것이든 누구든, 소멸해가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정말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가족과 수치는 어떤 관계일까 하는 의문을 잠깐 가졌던 장면이 우간다의 아캄펜섬의 이야기다. 처녀성을 잃지 않은 딸이 결혼 시장의 우수한 상품으로 매겨지는 가능했던 시대. 그러니 결혼 전 처녀성을 잃었거나 아이까지 가진 여성이라면 얼마나 큰 비난을 받았을지 가늠하고도 남는다. 아캄펜섬은 그런 이유로 가족과 사회에서 밀려난 여성이 갇히는 곳이었다. 이 섬을 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가난해서 아내를 얻지 못하는 남자들이 구세주로 나타나거나. 이 관행은 19세기에 아프리카에 선교단이 들어오면서 금지되었다고는 하나, 아캄펜섬 유배 관습은 20세기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아캄펜섬에서 유배되었던 여성이 오늘날에도 생존해 있으면서 그 증언을 생생하게 이어간다고 하니, 산 증인이 된 거다. 그런데 해마다 분요니 호수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이 섬이 곧 물 아래로 사라질 위험에 빠졌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젊은 여성을 사라지게 했으니 쌤통이라고 해야 할지, 역사의 증거가 된 곳이 사라진다고 하니 잊힐까 봐 걱정해야 할지 말이다.


폐허가 된 많은 도시, 장소, 건물이 정말 폐허로 그 생을 마감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세상의 변화로 물 흐르듯 그 쓰임이 다해버렸다는 게 안타깝고, 한 시대의 중심이 되었던 사실들이 역사에 그대로 박혀있다는 것에 존재를 유지해야 하는 건 아닐까. 자연스럽게 쓸모없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남아서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세월의 덧없음을 지켜본 것 같고,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빚어낸 결과가 이렇구나 인정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미래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은 고민하게 하는 이야기인 듯하다. 속도전으로 밀어붙이는 산업화나 환경의 파괴보다 무분별한 발전을 앞세우는 방식들이, 지금 우리가 숨 쉬는 이 시간을 폐허로 만드는 건 아닐까 염려해야 할 때이다. 흑역사라기보다는 씁쓸한 역사의 한 장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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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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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조카(큰 언니의 아들)10년 가까이 키웠다. 그 당시에는 가족이 모두 같이 살았으니,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키웠다는 말이 맞겠다. 유치원 때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함께 사는 동안, 가족 모두가 바라는 건 한 가지였다. 이 아이의 몸과 마음이 올바르게 자라주기를, 부모가 함께 살지 않는다고 해서 고개 숙이지 말기를, 공부까지 잘해준다면 앞으로의 성장에 햇살이 비춰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큰 조카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자기 엄마와 살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우리는 걱정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면, 키우는 게 당연하다. 낳았으니 키우는 게 의무일 테고, 사회적인 책임을 배제하더라도, 미성년 아이에게 일어난 일 대부분 역시 부모의 책임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 누구도 큰 조카가 자기 엄마랑 사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가 큰 조카를 돌봐야 했던 이유와 같다. 낳았다는 것 말고는 부모의 자격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부모의 자격이 무엇이며 누가 판단하는 거냐고 따지고 든다면 설명하기 어렵지만, 내가 아는 일반적인 생각의 기준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그러니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정의 여의치 않아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자기가 데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모의 역할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 그게 소녀의 부모였다.


어느 여름, 아빠의 트럭은 먼 친척 집 마당에서 멈추고, 차에서 내린 소녀는 그 친척 집에 맡겨진다. 아빠는 소녀의 손 한번 잡아주지 않고, 친척인 킨셀라 부부에게 남겨두고 떠난다. 사랑스러운 딸을 두고 가는 아쉬움은 하나도 없이, 마치 귀찮은 일 하나 해결했다는 태도였다. 소녀의 엄마가 곧 출산을 앞둔 상황에서 돌봐야 할 아이 하나 남에게 떠맡기고 가는 거였다. 남의 집 사정이야 다 알 수 없지만, 어려운 형편이라 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서, 또 태어날 새로운 아이의 등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려운 형편에 자녀가 많더라도, 그 자녀들에게 사랑 듬뿍 주면서 키우는 부모도 많더라만, 왜 다 주지도 못할 사랑에 무책임하게 아이만 낳는 것인지. 태어날 아이가 그 집에서 어떻게 자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쓰리다.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 소녀처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부족한 사랑을 갈구하면서 자라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소녀의 부모가 소녀를 친척에게 맡긴 것을 화내야 하는데, 이 상황이 소녀에게 어떤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킨셀라 부부가 소녀에게 보여주는 진심과 사랑에 울컥해지기를 여러 번, 이 부부에게 사연이 있을 것 같지만 지금 그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오직 소녀와 킨셀라 부부, 이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궁금해질 뿐이다. 소녀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따뜻함이 이 부부에게 뿜어져 나온다. 아마도 소녀의 부모는 소녀가 낯선 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지 관심조차 없었을 것 같기도 하고. 이쯤 되니 소녀의 부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도 관심 없어진다.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소녀가 무엇을 발견하고 이 짧은 시간 동안 어떤 성장을 이뤄낼지 기대되는 건 나만은 아닐 터. 어차피 소녀의 부모는 경제적 어려움에 힘들어하니, 소녀가 킨셀라 부부의 아이가 되는 것도 좋은 거 아닌가.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나는 도저히 이 부부의 진심과 다정함을 놓을 수가 없어서 그런지, 자꾸만 소녀의 현재와 미래에 이 부부의 인성이 그대로 전달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멈추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간 소녀가 마주한 것은, 차에서 내리면서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한 아버지와 같은 거였다. 소녀의 변한 옷차림에 부러워하면서도 어두운 표정의 언니들, 이 상황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어린 동생들, 킨셀라 부부에게 고마움도 모르는 부모. 그 분위기 속에서 불편해진 킨셀라 부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뗀다. 이렇게 끝인가? 소녀는 부모에게 남겨지고, 킨셀라 부부는 떠나고. 정말 이렇게? 소녀가 킨셀라 아저씨에게 훈련된 달리기는 이 순간 빛을 발한다. 떠나는 부부를 향해 뛰어간다. 아저씨를 끌어안으며 흠뻑 취한다. 같은 말이지만 다르게 부르는 그 이름을 외치면서. “아빠아빠이지만 아빠가 아니고, 아빠가 아니지만 아빠인 존재들을 부르며 소녀는 온 마음을 다한다. 그 여름 킨셀라 부부와 함께했던 시간을, 그 짧은 시간 동안 소녀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을 의미들을,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이건 아니다 싶은 것을 제외하고 나면,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부모가 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거기에 조금 더 보태자면,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더해진 노력,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을 항상 고민하는 태도가 부모의 자세이고 책임이라는 것을 아는 정도면 괜찮을까 싶기도 하다.


곧 서른이 되어가는 큰 조카는, 경제적인 이유로 남들보다 조금 늦은 졸업을 했고 학자금 대출이 남아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스스로 용돈을 벌어서 학교에 다녔으니, 이 아이의 경제활동은 꽤 오랜 시간 계속된 셈이다. 이제는 자기 인생을 책임질 기반을 다져야 하고, 어려운 시기에 취업 활동을 계속했다. 며칠 전, 오랜만의 가족 모임에서 좋은 소식을 듣고 다들 눈물바다였다. 우리 가족에게 항상 아픈 손가락이었고, 누구보다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있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이 아이에게 많은 기회를 주지 못했기에 늘 걱정이었다. 이제는 취직도 했으니 좋은 일만 있겠지 싶은 마음에 안심한 것도 잠시, 부모라는 존재는 이 아이에게 또 다른 짐을 지워주고 있다. 입버릇처럼, 큰조카가 고아였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어 오르지만, 부모가 있는 아이에게 나는 그저 친척인 현실이 눈앞에 있을 뿐. 이런 나를 볼 때마다 남동생은 냉정하게 말한다. 이 아이의 성장에서 우리가 안부를 묻고, 가끔 밥을 같이 먹거나 용돈을 줄 수는 있어도, 이 아이의 인생을 책임질 수는 없다고. 이 아이가 자기 인생을 먼저 챙기기를, 도움에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을 잡아줄 어른으로 존재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 생각하곤 한다.


한때 외가의 가족들에게 맡겨졌던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 이제는 이모 삼촌과 같이 술을 마시기도 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뭔가 더 해줄 게 없는지 찾게 하는 존재로 남아있다는 게, 나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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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 파랑
기 드 모파상 지음, 송설아 옮김 / 허밍프레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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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기억나지 않던 시간에 읽었던 모파상의 작품을 잊고 살았다. 그저 어릴 적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에 한 번쯤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러다가 국내에 한 번도 소개된 적 없는 작품이 담겼다는 이 책이 궁금했다. 소개된 말 그대로, 보석 같은 짧은 이야기들은 정말 유머러스하면서도 감정의 깊이를 헤아리게 된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들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순간의 마음은 무엇일까, 이제 어떤 인생을 만들면서 살아가야 할까 하고 말이다. 참 어렵다, 인생...


첫 번째로 만난 작품 사랑은 사냥터에서 사냥꾼이 본 그 장면은 애틋하면서도 묘했다. 사랑한다며 애인을 살해하고 남자는 자살한다. 이런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자살한 남자는 죽어서도 사랑이라고 믿겠지.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은 암컷 오리 곁을 맴도는 수컷 오리의 마음 역시 사랑이리라. 앞서 들려준 인간의 사랑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오리의 사랑은 한없이 슬퍼 보였다. 적어도 진짜 사랑했다면, 자기 앞에 놓인 비극을 감당하는 민낯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 시사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계속 생각난다, 죽은 암컷 오리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떠나지 못하고 공중에 머물렀을 수컷 오리의 눈빛이.


위송 부인의 장미 청년인생역전 로또를 다른 버전으로 보여준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았다. 글쎄, 나쁜 예만 봐서 그런지 몰라도, 복권에 당첨되고 그 후의 인생이 행복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물론 그 진짜 이야기는 본인이 가장 잘 알겠지만, 적어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그랬다. 위송 부인은 정조를 잘 지키고 품행이 바른 장미 처녀를 찾고 있었다. 그런 의미를 충분히 담은 여성을 찾아 장미 처녀라고 이름 붙이고 추앙하려고 한다. 아무리 해도 장미 처녀를 찾을 수 없던 그때, 마을 사람들이 한 청년을 가리킨다. 그보다 품행이 바르고 옳은 청년은 없을 거로 소문이 났던가. 그냥 소문으로 끝났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장미 청년의 인생에 없을 것 같았던 돈과 명예는 그에게 비극을 불러온다.


정말 유쾌하게 읽었던 작품 테오듈 사보의 고해성사였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싫어하는 대로 배척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는 일에 한발 양보하고 다가가는 척하는 그 자세를 배워야 하는 걸까. ^^ 시의원 테오듈 사보는 교회를 멀리하는 자다. 그에게는 교회의 재보수 일감이 필요했는데, 교회의 신부 마리팀은 일감을 원하는 테오듈 사보에게 고해성사를 받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종교가 없고 세속적으로 살았던 테오듈 사보에게 고해성사의 시간은 배출하지 못한 변이 가득한 뱃속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일은 받고 싶고, 교회를 멀리했던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이때 익살맞은 테오듈 사보의 활약이 시작된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말이 되어버리는 수상한 논리로 고해성사를 통과하는 그의 재치가 기가 막힌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 있다면 진짜 짜증 나는 순간 많을 것 같은데, 이런 순발력과 융통성(?)을 배우고 싶은 간절함마저 생길 정도인 이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암튼, 난 이제부터 테오듈 사보를 닮고 싶은 사람으로 정했어!


우리가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을 마주하게 될까. 그때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또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할 테지만, 오롯이 자기 선택의 결과가 되겠지만, 알면서도 마음의 혼란과 불안은 잠재우지 못할 것 같다. 무슈 파랑의 주인공에게 닥친 인생의 혼란은 그의 모든 삶을 송두리째 흔든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아내는 처음부터 그를 기만했다. 그걸 모르고 살아오던 파랑은 어느 순간 자신에게 불어온 회오리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아내와 아이를 잃고, 그의 인생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로 살아간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롭게 늙어가는 그를 보면서, 왜 그래야 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내의 외도를 모른 척해야 했을까? 그랬다면 지금의 그와 얼마나 다른 채로 살아가고 있을까? 진실을 드러내면 드러내는 대로, 모른 척하면 또 그런대로 살아가겠지만, 어떻게 해도 완전한 삶은 아닐 거다. 매 순간 그때의 선택이 옳았는지 떠올릴 거고, 그때마다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랴. 그렇게 또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의 삶인 것을.


작품들의 감정이 너무 섬세해서,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어느 장면에서는 선택의 순간에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랑하고 아끼는 이의 곁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 인생에 없을 것 같은 돈과 명예가 나를 찾아왔을 때는 어떤 삶을 그려야 하는지, 종교의 의미와 믿음의 정도는 누가 판단할 수 있는지를,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내 앞에서 춤을 출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게 인간이겠지. 결국은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어떤 태도로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지 묻는 이야기가 아닐까. 소설이 문학이 그래왔듯이, 1880년대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2023년의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아서 놀랄 수밖에 없다. 테오듈 사보와 웃고 무슈 파랑과 울다 보면, 절망의 순간에도 삶을 놓지 않으려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된다. 사는 동안 고난이 내 삶에 끼어들더라도 가뿐히 무시하고 즈려밟고 건너갈 재치, 내 인생의 주인으로 책임감 있게 살아갈 자세를 배우게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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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티 워크 - 비윤리적이고 불결한 노동은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되는가
이얼 프레스 지음, 오윤성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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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티 워크를 간단히 표현하면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누구나 선뜻 먼저 하고 싶지는 않은 일. 이 사회나 국가가 굴러가는 데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두 손 들고 반길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이니, 어떤 상황인지 감이 온다. 이 사회 구석구석 찾아보면 이런 일이 많을 테다. 이 분야에 있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 삶이 편한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데도 그 면면을 들여다볼 생각은 깊게 하지 못했다.


저자가 미국 내에서의 환경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기에 우리 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더티 워크를 설명하려는 기본 취지는 다르지 않다. 교도소의 정신병동 근무자, 전쟁 상황에서의 드론 원격 조종사, 미국 국경의 국경수비대원, 대규모 도살장 노동자의 경우를 소개한다. 이들이 겪는 육체적 정신적 고충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지경이다. 사회와 국가가 필요로 하지만, 많은 사람이 불편해하고, 현장에서 그 일을 감당하는 이들의 도덕적 외상을 외면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게 더 아픈 일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 다른 일을 선택하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 분야에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가 대부분 경제적인 문제라면 다른 선택지를 쉽게 고르지 못하는 것 역시 현실이다.


어느 시험에서 봤던 문제가 생각난다. 직업으로 규명되려면, 비윤리적이지 않아야 하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일이어야 한다고 했다. 저자의 설명을 듣다 보면 여기에서 소개된 일들은 직업으로 규명하기 어렵다는 건데, 그럼 이들의 직업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실제로 여기에서 더티 워크라 불리는 일은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면서 인간이나 동물, 환경에 피해를 주는 것도 해야 하는 일. 선량하다고 불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비윤리적이거나 더럽다고 보이는 일. 다른 사람의 무례한 시선을 감당하거나 상처받게 되는 일. 선량한 사람들은 그 일이 사회질서 유지에 필요하다고 여기지만, 암묵적으로는 그 일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일. 누군가 이런 일을 하면서 고통과 책임을 치른다는 걸 알면서도 위임한다.


문득 나는 이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걸 몰랐다고 하기에는 얼마나 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 나는 정말 몰랐을까? 전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그러면서 내가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여기거나, 그들의 고역을 이해한다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그 일을 하면서 당연히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그 일에 관한 많은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거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일이 왜 더티 워크가 되었을까 궁금했다. 겉으로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으로만 보였는데, 그 이면의 이야기를 내가 전혀 몰랐던 거였다. 사회질서 유지에 힘쓰는 교도관이 더티 워크로 소개되는 게 놀라웠는데, 가장 큰 이유가 보이지 않는 집단이라는 거였다. 재소자를 관리하고 그들의 갱생에 한 역할을 한다고 여겼는데, 그 안에서는 내가 상상하지 못한 비윤리적인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 주변의 나는 분도 교도관으로 일했는데, 겉으로 보기에 근무환경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좋은 자리 박차고 나왔다는 생각도 했는데, 말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다 이해하지 못한 것과 이 책에서 말하는 걸 조합해보니, 어쩌면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게 고역스러웠을지도.


드론을 원격으로 조종하며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은 드론 조종사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런 죄책감은 일을 계속하는 걸 어렵게 한다. 여러 가지 감정의 고됨을 돕고자 부대 안에 목사나 상담사가 있지만, 아무리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그들이 원격 조정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로 생기는 고통은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좋은 먹거리를 찾을 때 도축 현장의 노동자들은 더 힘겹게 일하고 있으며, 노동현장은 더 열악해지고 있다. 환경과 동물을 생각한다면서 돌린 시선에서 현장 노동자들의 환경은 열악한 그대로였다는 것을. 선량한 사람들이 사회와 국가, 지구를 생각하며 전환한 소비의 이면이었다.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많은 차별이 더티 워크를 만드는 게 아닐까? 더럽고 지저분한 것을 보면 피하고자 하는 게 새롭지는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두고 싶은 것도 당연하게 계속되어왔다. 하지만 눈앞을 깨끗하게 만들고자 해왔던 일은 야만적이거나 비도덕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때로 이 역할을 하는 이들이 보이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이런 역할이 존재하면서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수면 위로 떠 오른다. 이 책의 설명처럼,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필수노동자에 관한 관심은 커졌다. 그들의 자리에서 해내는 일들에 노고를 위로하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말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필수노동자가 그들만 있는 건 아니다. 이 사회의 필수노동으로 규정하지만 더티 워커라 불리는 이들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이 수행하는 필수노동 작동방식과 사회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 불평등 구조의 과정과 책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게 이 책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어둠 속 필수노동자에 대해 연대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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