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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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이니까 당연한 것처럼 읽어보게 되는 책이다. 담백하다.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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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 -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안세홍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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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라 부를 수 있는 나이. 그 숫자 그대로 너무 아름다워서 떠올리는 것 자체가 설렘과 함께 올 것 같은 나이라 부르는 십대, 이십대. 피어오른다, 라는 말이 잘 어울려 활짝 핀 꽃송이를 연상케 하는 얼굴. 그 찬란한 시간을 잃어버린 이들의 눈물의 목소리다. 한이 쌓여 숨 쉬는 것을 어렵게 하는 표정이다. 생존해 있음이 아름답지만 동시에, 아프다.

『겹겹』 속의 할머니들,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그 시간을 떠올리면 암흑이다. 단지 그 시간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겪어왔기에, 지금의 외로움과 고통이 남아있는 것이기에 더 아프다. 거짓에 속아서, 어려운 형편에 가족을 위해서,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데 선택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팔려가듯 끌려가 당했던 수모와 고통을 그 누가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의경 할머니의 “꽃이 피어오르는 걸 끊어낸 거지.”라는 말씀처럼 피어야 할 나이에 피지 못하고 꺾여버린 꽃이다. 그렇게 꺾여버린 꽃은 땅에 떨어지고, 오고가는 이들에게 밟히고 짓이겨진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기댈 곳도 없고 위로해줄 이도 없다. 가장 큰 아픔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300원, 400원에 일본군 성노예로 팔려가 인생을 구속당한 삶이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생긴 지 80년, 일본군의 성노예로 희생된 여성들이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여전히 그 폭력이 만들어낸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들을 모습과 목소리를 저자 안세홍이 12년 동안의 기록을 바탕으로 『겹겹』을 만들어냈다.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그 시간동안 만나고, 모습을 담고, 목소리를 기록했다. 한이 섞인 울음소리, 돌아갈 수 없는 꿈같은 기억, 아프기만 한 시간들의 토해냄. 그렇게 겹겹이 쌓인 상처와 가슴속 돌덩이들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들을 보여주고 있다. 지나간 시간의 역사가 아니라, 이미 끝난 일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흔적이고 상처이기에 드러내야 한다.

저자가 할머니들의 그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몇 차례씩 중국에 오고가면서 할머니들을 만나고, 안부를 묻는다. 꺼내기 어렵고 아픈 기억이지만 제대로 듣고자 힘을 낸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를, 겪지 않은 그 아픔을 토해 내달라 부탁한다. 그리고 할머니들은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슴을 찌를 듯이 아픈 이야기,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한 시간의 기록을 들춘다. 순전히 기억력에 의지해서. 살아있는 증인이기에 할 수 있는 생생한 증언이다.

할머니들은, 전쟁은 끝났으나 돌아갈 곳이 없다. 패전한 일본군 대신 내려오는 소련군을 피하고자 중국에 숨어들면서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 일은 더 어렵게 됐다. 중국말도 모르고, 자신이 갇혀 있던 곳이 어딘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세월이 흐르듯 그렇게 살아왔다. 그곳에서. 중국 땅이지만 중국인은 아니고, 북한의 국적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채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훨씬 많은 이 시점에서, 보호받으며 지내야 할 상태인데도 방치되듯 살아가는 모습들이 아프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쌓인 시간들이 흑백의 사진 속에서 눈물을 비처럼 흘리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책 속에 담긴 여덟 분 할머니들의 모습이 상처 그 자체였다. 끌려가고 감금당하고, 계속되는 성폭행 끝에 남겨진 것은 버려짐이었다. 전쟁은 끝났고, 일본군은 떠났고, 할머니들은 남겨졌다. 전쟁의 최전선이었던 곳에서,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 그곳에서, 이방인인 채로 버려졌다. 그런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온 시간들이 할머니들의 가슴 속에 어떤 모양으로, 얼마만큼의 무게로 쌓여있는 것일까.

“조선말을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맘대로 안 돼.” (이수단 할머니)
“갈 수만 있다면 고향에 가고 싶어요.” (박우득 할머니)
“혼은 조선에 가 있어요. 꿈을 꿔도 조선 꿈이지.” (현병숙 할머니)

고향이 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다. 조선이란 나라는 할머니들의 고향이었지만, 돌아가기에 만만치 않은 곳이다. 남아있는 가족도 없고, 설사 가족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 오랜 시간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의 교감이 쉽지 않을 터. 배삼엽 할머니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에 한국에서 사망 신고가 되어 있다고 한다. 국적회복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음에도 포기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셨다. 멀리 고향에서 보내온 가족사진 한 장으로 평생 마음을 의지해 살아오신 이수단 할머니의 그 간절함은 또 어떤 것일까. 고향을 잊지 않으려고, 하루도 고향을 잊어본 적 없다면서 지도를 보고 사신다는 김대임 할머니의 절절함은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위안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 수 없는 환경,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가슴에서 화가 끓어오르는 박서운 할머니의 열기는 평생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고향에 가고 싶다고, 고향에 갈 방법을 묻는 박우득 할머니의 바람은 어떻게 이뤄드려야 할까.

그분들의 상처가, 아픔이, 고스란히 박힌 사진들이다. 찍는 이의 마음과 피사체로 앞에 있는 이의 마음이 그대로 대화가 되는 사진이다. 조선말을 잊고, 여러 가지 질병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잊지 못할 그곳. 할머니들의 고향을 그리워한다. 간절하게 가고 싶은 곳이지만, 그 간절함이 쉽게 이루어지지 못해서 안타까움으로 꾹꾹 눌러 담은 단어, 고향. 자신이 지금 사는 곳이 고향이라 여기며 흘러간 시간과 꽉 채운 나이를 아쉬워하는 마음.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가 없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 할머니들의 간절한 마음을 대신하듯 저자 안세홍의 사진들은 보는 이, 글을 읽는 이에게 그대로 전해져온다. 오랜 시간 할머니들을 만나러 다니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저자는 계속해왔다. 계속 찍고, 듣고, 기록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할머니들의 이 모습은 그렇게 전해져왔다. 이해할 수 없는 감시와 방해 속에서도 사진전을 열었던 저자의 마음의 일부분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모르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알게 전해줘야 한다. 들려줘야 한다. 그래서 저자의 사진들과 이 책 『겹겹』은 그 의미가 깊다. 잊을 수 없는 그 아픔의 시간들을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그 모습을 보고, ‘잊는다’는 단어조차 떠올리지 않게. 어렵게 이어가고 있는 저자의 ‘겹겹’ 프로젝트가 결코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여전히, 아픔은 남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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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기생 홍금보 1 앙상블
육시몬 지음 / 청어람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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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생이란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다. 미인, 아름다움, 천하절색 등등. 얼굴에 고운 단장을 하고 화사하게 몸치장을 하고. 음주가무에 덩실덩실 어깨춤이 춰지는 장소에 그 어여쁜 얼굴의 자리가 있다. 실제 기생이 존재했다는 시절에 살아보지 않았으니 영화나 드라마, 책에서 만난 이미지가 전부이리라. 당연한 것처럼 내 머릿속에서 기생은 아름다운 여인이라 각인되었건만, 그 이미지를 와장창 깨뜨려버린 기생이 나타났으니 그 이름도 육중한 홍.금.보. 붉은 홍(紅), 능금 금(檎), 보배 보(寶). 붉디붉은 능금 같은 보배라고 홍금보라는 이름이 가진 그 의미 또한 그럴싸한데, 아뿔싸. 외모가 그 이름을 따라주지 못했으니... 기생이란 신분이 무색하게 홍금보는 박색이다. 그것도 천하박색! 보통은 독각귀(도깨비) 홍금보라 불리니 그 외모가 심히 무섭다. 꽃다운 나이 열여덟이 되었건만 아무도 홍금보의 머리를 올려주겠다는 이가 없다. 다른 기생들이 머리에 가채를 올리고 있을 때 홍금보는 댕기머리 소녀(!)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육척에 가까운 키에 기골이 장대하고 억세기까지 한 덩치 큰 소녀상을 떠올려보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웃겨서...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는 위로 말고는 그 어떤 말도 건넬 수가 없구나. 지금 세상이라면 잘 나가는 모델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르는데. 얼굴은 고은애(<달려라 하니>)를 연상시켜도 조금만 다듬으면 몸매는 미란다 커가 울고 갈 지도 모르는데. 시대를 잘못 만났어!!! 400년만 늦게 태어나지, 라고 읊어봤자 뭔 소용. ㅠㅠ

 

그런 홍금보에게도 기생으로서의 재주가 있었으니, 바로 노래다.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조선 최고의 ‘가기(歌妓)’다. 그런 홍금보와는 대조적으로 천하절색의 미인 설향은 벙어리 기생이다. 홍금보에게도 마음을 준 이가 있는데 통사관(통역사) 장이강 오라버니다. 그런데 이 오라버니 어장관리 하는 건지 뭔지, 홍금보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없다. 거기에 이강 오라버니는 벙어리 기생 설향에게서 눈길이 떨어질 줄 모르니 어쩌면 좋누. 때는 왜란이 마지막을 향하던 시기. 조선에 들어온 명군의 통사관이 한명 있었으니 그 이름 박수타(바티스타). 파랑국(포르투갈)의 금발의 백인 통사관 박수타가 한눈에 홍금보에게 반해버렸다. 억지로 끌려오듯 했던 조선에서, 매일 도망치는 게 일이었던 박수타에게 조선에 머물러야 할 명분이 생긴 것이다. 사랑!!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 박수타와 홍금보. 뭐, 사랑하는데 언어의 장벽쯤이야 별것이겠냐 마는... 목소리와 외모 성질까지 억세고 드세고 장대하고 폭력적이고 현실적이기까지 한 홍금보와 금발의 파랑국 남자 박수타가 연결이 될 것인지 말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들의 어학교재인 ‘색주부뎐’도 궁금하고, 뭐 그렇다는... ^^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코믹스러운 캐릭터에 입혀진 가벼운 이야기 같지만, 이 소설의 뼈대는 신분의 고하로 차별이 있었던 조선시대가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대극이다. 정여립이 주도했다는 기축옥사로 한바탕 피바람이 불고 간 다음, 복면의 두령 홍길동이 활약하는 시대로 배경이 만들어졌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나라, 모든 백성이 똑같이 잘 사는 나라를 꿈꾸며 실체 없는 유토피아인 율도국을 향하게 하던 때. 실존인물이었던 허균의 등장과 허균이 썼다는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직접 등장한다. 홍금보가 소속된 기방 장만옥을 아지트로 매일 술에 절어 한량으로 지내는 허균과 동학운동 때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홍길동, 부유한 상인의 아들 장이강 세 사람이 막역지우로 설정되어 이야기를 끌어간다.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수상쩍게 펼쳐지고, 활빈당이 시국을 어지럽힌다고 여기는 시대.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목숨 걸고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오는 이들의 활약과 당연하듯 왕의 자리를 거머쥔 자의 탐욕과 가진 자들이 부리는 횡포 사이에서 다양한 사건들과 로맨스가 펼쳐진다. 그 가운데 이들이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잘하는 것 하나씩은 있는 사람들. 뭔가 하나 부족한 것 같지만 그대로의 삶을, 자신의 존재감을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부조리한 사회와 국가에 대해, 세상이 바뀌기를 염원하면서 활동하는 것도 대견하다. 낯선 이방인이지만 박수타가 홍금보에 대한 마음을 비췄을 때, 바뀔 세상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듯해서 이야기의 맥락이 이어져 보인다. 박색이라 불리던 홍금보도 누군가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음을, 기생 신분이 물건처럼 사고팔고 가능했던 세상에서 마음을 먼저 얻고 싶은 이가 있음을. 그게 바로, 누구나가 똑같이 평등한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는 이들의 바람을 그대로 보여준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책의 주인공은 홍금보다. 박색기생인 홍금보가 만들어가는 인생과 그런 성질과 외모에도 진실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싶은 기대감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위험한 순간이 닥쳐와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 강해서, 위험과 죽음마저 매번 홍금보를 피해가는 듯하다.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마인드로 살아가는 홍금보, 박색이어도 할 말 다하고 먹을 것 다 먹고 제멋에 사는 홍금보, 조선을 위해 들어왔다는 명군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홍금보, 양반이든 미남이든 그 어떤 외모 앞에서도 당당한 홍금보!!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는 위로마저 물리쳐버리는 위인이다. 매번 닥쳐오는 위기마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재빠르다. 연관도 없는 일에 연루되거나, 혼자 삽질하면서 숨겨진 영웅이 된다거나 하는 에피소드가 홍금보를 더욱 매력 있는 인물로 보이게 한다. ^^

 

특히 재치 있게 표현되는 장면과 문장들이 재미를 더한다. 홍금보라는 이름 자체가 연상시키는 것은 외모다. 어렸을 적 봤던 중국영화에서 그 육중한 몸으로 무술을 하던 홍금보. 떠올리면 일단 웃음부터 나는 인물이다. 그렇게 연상되는 인물이 이 책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더군다나 남자도 아닌 여자로 나왔으니 읽기도 전에 그 웃음을 기대하는 건 자연스럽다. 벙어리기생 설향과 박색 가기 홍금보의 ‘병풍후립신구(屛風後立身嘔)’는 기발한 표현으로 들린다. 병풍을 세우고 그 앞에서 설향이 사람들 앞에서 노래한다. 하지만 벙어리인 설향은 병풍 뒤의 홍금보가 부르는 노래에 ‘립싱크’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립싱크를 한자어 발음되는 그대로 립신구라 표현하다니. 게다가 박수타의 홍금보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온이유 홍금보 (溫而幽 紅檎寶)’라고 했다. 홍금보뿐이야~ 하는 애절한 온리유(only you)를 말하는 것이다. 홍금보와 박수타가 매일밤 어학교재로 사용하던 ‘색주부뎐’ 속의 문장들 역시 마찬가지. 어딘가 엉성하지만 박수타는 열심히 배워 실생활에 그대로 써먹는다. 귀엽게도... ^^

 

적당한 배경과 소재, 매력 있는 캐릭터들을 보는 즐거움으로 읽을 수 있었던 듯하다. 이야기는 끝났으나 끝나지 않은 듯한 여운이, 지금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게 만든다.

 

<사진출처 : KBS '안녕하세요' 공홈>

 주인공 홍금보를 이영자, 개그콘서트-황해의 이수지를 연상하면서 읽었다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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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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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뜨거운 반어법의 씨앗이 숨어 있다. 숨이 끊어질 듯 사랑하면서도 ‘잘 있지 말아요’라고 속삭이고, 편지를 쓰고 싶지만 차마 보내기는커녕 완성할 수조차도 없다. 절대 놓아주고 싶지 않지만 ‘그냥 지금 헤어집시다’라고 선언하고, 그녀를 결연하게 떠나보내면서도 자신의 사랑이 무거운 저울추처럼 그녀에게 평생 매달려 있을 거라는 저주를 서슴지 않는다. 사랑하기에 붙잡을 수 없고, 보낼 수 없기에 차라리 놓아버리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14페이지 프롤로그 중에서) 

 

그래, 궁금하다. 사랑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모른다고도 할 수 없고,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잘 알게 되는 부분들이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매번 전문가도 되게 만들고 백치도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잘할 것 같은데도 어렵고, 만만하게 보이다가도 레벨 최상급의 문제 같고, 두려워서 다가가지 못하다가도 한 손만 내밀었을 뿐인데 쉽게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고. 울고 웃는 인생사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차지하는 감정적인 비중이 참, 크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랑도 그렇지만 책 속에서 만나는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친구처럼 시작했던 연인은 다시 친구로 돌아가지 못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우연처럼 시작된 츠네오와 조제의 만남은 현실 속 불가능한 조건들 속에서 이런 사랑이 가능한 젊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조제와는 다른 세상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츠네오의 미래는 아픈 마음을 붙잡고서라도 온전하게 조제에게만 향할 수는 없다. 깊은 바닷속 같은 마음으로 살았던 조제의 현실을 츠네오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과 함께 돌아서는 것. 언젠가 츠네오가 기억해 낼 조제의 모습에서 어떤 감정이 피어오를지는 모르겠으나, 한때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열정적으로 피웠다는 기억만은 선명할 거라 믿는다. 조제와 함께했던 시간, 그때만큼은 츠네오의 진심으로 조제를 사랑했을 테니.

 

그들은 왜 서로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을까. 그들은 왜 함께 살면서도 행복할 수 없을까. 남자들이 상대방의 ‘진실’을 찾으려 할 때, 여자들은 상대방의 ‘이해’를 원한다. 여자들이 ‘미래’를 계획하며 행복의 주문을 걸 때, 남자들은 ‘과거’에 집착하며 그녀들을 유도신문 한다. 여자들이 지금이야말로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라 느낄 때, 남자들은 행복을 방해하는 갖가지 장애물을 확인하며 조바심을 느낀다. 이 영화는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불안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31페이지 『클로저』)

 

작업 선수라 자처한 발몽(『위험한 관계』)은 작업 대상 트루벨 부인에게 진심과 열정을 발견하면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발몽은 트루벨 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목숨마저 끊어지는 상태였으니까. 시라노(『시라노』)는 연애편지를 대필하면서 사랑을 키워나간다. 항상 당당했던 자신의 큰 코가 사랑을 알게 되니 콤플렉스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대신 써주면서도 사랑하는 록산에게 얼굴을 내놓지 못한다. 하지만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마음은 달라진다. 아쉽게도 너무 오랜 시간 후에 알게 된다는 것, 다시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에 발목 잡히고, 뭔가가 채워져 사랑에 다가가려 하니 타이밍이 발목을 잡는다.

 

사랑을 거부하는 자에게도 기어코 사랑은 온다.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사랑은 오히려 더욱 드라마틱 할 때가 있다. 지나친 에고 때문에, 자신을 향한 극대화된 사랑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감성의 회로가 고장 나버린 사람들. (151 『달과 6펜스』)

 

사랑이 수반하는 또 다른 의미는 이별이다. 사랑의 완성이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 웃을 수 있다. 반면 어떤 식으로든 이별-그게 죽음이라 할지라도-로 갈 길을 택한다는 것은 사랑이 가지는,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한눈에 반한 순수한 사랑 이면에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확인하고 죽음을 택한 두 젊은이의 사랑(『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으로 완결되었다. 온몸으로 치러야 했던 속죄의 모습 그대로를 투영한 브리오니(『속죄』)는 치유될 수 없는 긴 이별을 불어온다. 연기에 몰입하다가, 그 주인공으로 착각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임무의 대상인 이 선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해버린 왕지아즈(「색, 계」)에게 다가온 것 역시 죽음이다. 존재 이유와 목적이 배우처럼 타인을 살아가는 것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관객들은 오셀로의 비극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진실은 분석이 아니라 진심 어린 믿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사랑은 흠 없는 완벽이 아니라 흠조차 기꺼이 끌어안는 너른 마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194페이지 『오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정여울은 이 책을 4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마지막 카테고리의 이름은 ‘인연’이다. 앞에서 열정적인 사랑이나 연애 그리고 이별까지 이야기하고서 마지막에 그 인연이라 붙인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한다. 그 이유가 있다. 사랑에 대한 그 많고 많은 정의와 위협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갔다. 이 정도만 해도 사랑에 진저리쳐질 것 같다고, 미리 밀어내고 싶은 상황이 올지도 모를 것을 예상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도 괜찮다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사랑 그것, 한번 해보라고 말하려는 듯이. 그래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오만한 남자와 편견을 가진 여자가 결국에 확인하게 되는 것도 사랑이고(『오만과 편견』), 문맹의 치욕과 전범의 누명을 무릅쓰고 지키고자 했던 것 역시 사랑이다(『책 읽어주는 남자』). 사랑을 배운 적도, 그러니 당연히 해본 적도 없는 남자를 품어주던 여자는 마지막까지 그 모습을 지킨다(『제인 에어』). 눈물 한 방울의 기적처럼 얼음조각을 빠지고 부서지게 하면서 알게 해준 사랑(「눈의 여왕」)도 존재한다.

 

사랑이 진정 아름다운 이유는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소망을 충족시켜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사랑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 그 사랑을 통해 그들 주변의 세상을 좀 더 환하게 밝혀줄 수 있다는 희망이야말로 사랑을 아름답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빛이다. 소냐의 사랑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삶뿐 아니라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수많은 죄수들의 삶에, 라스콜리니코프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희망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290페이지 『죄와 벌』)

 

 

이들의 이야기가 책에서만 머무르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아니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때는 아니라는 말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그러니 책은 책 안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로 독자를 만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정여울이 책을 통해서 들려주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만난 많은 이야기가 삶과 사랑에 많이 침투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오직 사랑만을 보게 했던 한때를 기억하게 한다. 편견으로 하나의 사랑을 떠나보낸 사람은 엘리자베스가 아닌, 나였다. 록산에게 썼던 시라노의 대필편지는 철없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많은 책과 영화가 공감과 위로의 바람을 불러오고 있다.

이렇게, 우리 삶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불러오는 것은, 너무도 많다. 정여울은 마치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거침없이 사랑이란 화두를 던진다. 굳이 콕 집어서 사랑에 관한 비결이나 예외까지 포함해서 구체적으로 풀어놓는다. 우리가 시작하는 사랑이나 연애, 이별, 계속되는 인연과 결혼까지. 사랑이 뿜어내는 그 많은 감정의 의미를 풀어헤친다. 다양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사랑은 역시 불가능한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끊임없이 시험하게 하고, 우리 삶에 침투해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때로는 풍요로움과 만족감을, 때로는 결핍과 외로움을 선사하기도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이 책에서 소개해준 많은 책 중에는 고전이 많다. 언젠가 우스갯소리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로맨스소설은 고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로맨스소설 속에서 주인공들 이름만 바꾸면 우리 이야기가 된다고 하기도 했다. 우스갯소리로 멈출 이야기는 아니었다. 비록 씁쓸함이 웃음 끝에 달렸지만,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으니까. 이 책을 통해서 오래전 기억을 꺼내게 하는 책들과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준다. 잊고 있었던 것들은 마음이 먼저 기억한다. 순간적으로 피어오르려 했던 그리움이나 외로움은 이들의 사랑이 덮어버린다. 한때의 우리, 불어오는 바람이 스산해질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정여울이 보내는 위로처럼 들리는 이야기다. 바람이 조금, 불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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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편지 -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손거울 같은 책
윤석미 지음 / 포북(for book)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연필을 깎았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손이 다치지 않게, 커터칼로 조심스럽게 앞으로 밀면서 깎아냈다. 생각하고 싶은데 생각이 막히고 멈춰버렸을 때,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을 때, 집중할 게 필요하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 순간을 흘려보낼 수 있겠지만, 가끔 나는 그 순간을 연필을 깎으면서 흘려보낸다. 오직 이 연필을 깔끔하고 예쁘게 깎아내는 일만 생각한다. 다 깎고 나면 쓰던 메모지에 뭔가를 끼적이기도 한다. 펜으로 마구 휘갈겨 쓰는 촉감과는 사뭇 다르다. 연필 특유의 사각거리는 소리, 종이에 잉크가 번지는 것이 아닌 연필심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가루들, 펜을 사용했을 때 보다는 연하게 써지는 글씨들이 눈에 들어온다. 뭔가가 맘에 안 들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쓴다. 어렸을 때 처음 글씨를 배울 때의 마음 같다. 네모 칸 반듯한 노트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쓰고, 틀린 글자를 지우고 다시 쓰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글씨를 다 익히게 된다. 가끔 맞춤법이 틀리기도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지우고 다시 쓰고, 틀린 것을 또 배우면서 쓰면 되겠지.

 

뭐든 거기에 맞는 게 있다. 틀릴 수도 있고 지워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연필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거기에 맞는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면 맞춰가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인정해야 한다. ‘다름’을... 손이 예쁜 사람 발이 예쁜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노래를 잘하는 사람, 공부를 잘하는 사람 잡다한 지식이 많은 사람. 다양한 가능성과 다른 점으로 살아가는 세상인데 유독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눈에 더 들어올 때는 생각이 나아가질 못한다. 일시정지 같은데 영원히 정지가 될까봐 가슴이 막혀온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는 왜 안 되지? 왜 느리지? 왜?’ 하는 마음들이 벅차서 터질 것만 같을 때, 알면서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숨이 가빠져 올 때, 나에게만 적용되는 법칙들이 따로 있는 것만 같아서 혼란스러울 때, 느려터진 내가 한심스러워 보이던 그런 때... 저자 윤석미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왜 이런 문장은 띠지에 떡 하니 버티고 서서 내 눈길을 잡아끌고 있나?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단다. 달팽이걸음이라도 느려도 갈 길 다 가니까, 각자에게 맞는 옷이 있으니까, 인생은 오래달리기니까... 참 적절하게 들려준 이야기에 눈물 한 방울이 핑 돈다. 겉으로 보기에 똑같아 보이는 지게도 산길을 오르기 위한 지게와 들판을 다니기 위한 지게의 길이가 다르단다. 평지를 다니기 위한 지게는 다리가 좀 긴 편이고 산길을 다니기 위한 지게는 다리가 좀 짧은 편이라고, 수풀을 헤치고 다니는 그 길에 걸리지 말라고 지게의 다리가 좀 짧단다. 똑같은 지게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된다. 아마도, 맨 처음에 그 지게는 길이가 똑같지 않았을까. 사용하다 보니 산길을 다닐 때 거치적거려서 다리를 조금 잘라낸 것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산길에 딱 적당한 지게로 맞춤형이 된 것이겠지. 사람도, 그 사람을 둘러싼 많은 것들도 그렇게 적응하고 맞춰가는 거겠지 싶은 마음에, 점점 저자의 이야기에 동화된다. 지금 뭔가가 좀 안 맞아도 괜찮을 것 같고, 느리고 또 느려도 괜찮을 것 같고, 무엇 하나 옆에 붙어지거나 나가떨어진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고... 무조건 다 괜찮은 거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가는 데 이삼일, 오는 데 또 이삼일. 우체통에 넣은 편지가 서로에게 오가는 데는 보통, 일주일이 걸립니다.

그것도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써서 그 길로 우체통에 넣었을 때만 그렇습니다.

이 느림보 편지를 두고 ‘달팽이 편지(Snail Letter)’라고 부릅니다. (110페이지)

 

손쉽게 문자 한통, 전화 한통, 실시간 이메일 전송, 더 빠르고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SNS. 세상이 점점 빨라지고 간편해진다. 내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두통일 생길 지경이지만, 지금이 그런 세상이라는데 부정할 수가 없다. 다만, 내가 그 속도에 맞추지 못할 뿐이다. 그렇게 빠른 세상에서 손으로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고, 상대방에게 배달되기를 기다리고, 또 상대방이 답장을 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상대가 내 편지를 받고 바로 답장을 썼다고 했을 경우의 시간을 계산한 것이 일주일이다. 물론 바로 답장이 오지 않을 경우,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기다림의 시간이 더 길어지겠지. 그리고 마냥 기다리겠지. 답장이 올 때까지...

 

그런 달팽이 편지의 마음으로, 천천히, 조금은 느리게, 저자가 한 문장 한 문장 들려준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누군가가 한 말이기도 하고, 어디선가 한번쯤을 들어봤음직한 말이기도 하고, 대책 없이 긍정적인 말이기도 하다. 지금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냐고, 여기에 맞춰야만 제대로 가는 길이 아니겠냐고, 이대로 가도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어야 했을까. 그러면서도 수도 없이 묻고 싶었던 순간들을 뒤로 하고 자꾸만, 자꾸만 그 자리에서 듣고 있게 된다. 듣고 있으면서 나도 모르게 혼자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고 있다. 그래서요? 이렇게 하면 될까요? 그건 아니지 않나요? 쉽지가 않아요. 틀린 것 같아요. 다른 것은 안 될까요? 그래요, 어쩌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시작도 끝도 내가 해야 한다는, 채우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비우는 것이라는, 내 발끝이 향하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가슴 속을 들여다보라는,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을 담아두라는 것도.

 

조금만 앉아서 쉬었다가 가더라도, 잠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더라도,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안식... 저자가 조근조근 들려주는 한마디에 조금씩 마음을 내려놓는다. 편지를 보내고 다시 받기까지의 시간이 그렇게 느릿느릿 흘러가니, 덩달아 기다림의 시간도 길어지고, 진심을 가득 담은 한 마디가 더 값지게 담겨 있을 것만 같아서, 답장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 순간을 감당하게 만든다.

 

고인 눈물은 다 쏟아내야 합니다.

쏟아 내지 못한 눈물은 저 혼자 마르지 못하고,

마음 안에 고여 또 다른 상처를 만듭니다. (175페이지)

 

이상하게, 뭔가를 계속 끼적이면서 읽었던 책이다. 책의 문장을 필사한 것이 아닌, 읽으면서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기에 그랬다. 한 문장 읽고 이 생각, 다른 한 문장 읽고 저 생각, 그러다가 뭔가를 적어가고 있는 내 손가락. 어느 순간 보니 메모지에는 형체와 내용을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빼곡하다. 무슨 생각인가를 열심히 적었던 것 같은데, 알아볼 수 있는 글씨는 거의 없었다. 저자가 들려주는 문장에 빠져 나만의 생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가 보다. 세상에 좋은 말, 좋은 얘기, 참 많다. 그런 긍정적인 얘기를 듣고 있는 그 순간의 내 마음까지 긍정적이 된다면 더 없이 좋겠지.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언제 듣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제는 응원이 되었던 말이 오늘은 거추장스럽게 들릴 때가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유독 거슬릴 때도 있다. 이 책 속에서 저자가 하고 있는 말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이렇게 좋은 말들도 딱 적용할 수 있는 타이밍에 들려와야만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천천히 흐르는 저자의 목소리를 제법 좋은 순간에 만난 듯하다. 늘어지고 싶고, 아무 것도 손에 잡기 싫고, 두통이 머리 한 구석을 갉아먹고 있을 때, 저자가 나에게 달팽이 편지를 보내주었다. 천천히 써져 느리게 배달된 이 편지처럼, 나도 천천히 읽고 또 읽고 곱씹어보면서, 연필로 느리게 답장을 써야겠다. 쓰다가, 이게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이 들면 지우고 다시 쓰면서, 느리더라도 하고 싶은 말로 다시 채워 넣으면서. ‘내 마음, 잘 들여다볼게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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