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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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장소는 나의 장례식장. 나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되어 투명인간처럼 그 안의 모습을 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의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를 하러 찾아올까, 함께 했었던 그 시간 속의 나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같은 시간을 즐겼던 그 순간의 나와는 다른 기억으로 저장된 일들은 없을까. 마냥 궁금한 것투성이다. 그리고 그 모든 궁금증의 공통점은 바로 이것이겠지. ‘나’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을까,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삼십 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소식은 누군가의 탄생 소식과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 켜짐과 꺼짐을 동시에 들었던 적도 있다. 대부분은 지인의 아이들이 태어나는 소식, 지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안에서 들려왔던 죽음의 모습도 참 다양했다. 교통사고나 급사, 질병으로 인한 죽음. 그리고 이어지는 장소는 장례식장. 참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장소이다. 그 안에서 내가 평소에 들어왔던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들려온다. 죽은 이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올 때도 있었다. 조문객의 입장에서 나는 ‘아,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이해하면서 그쳤지만, 그 반대의 입장이 되어보려 하니 조금은 욕심 같은 바람이 인다. ‘나를 알고 있는 많은 이들이 나에 대해서 좋은 것만 기억하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 ‘나’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기억해주는 것의 바람에서 ‘좋은 사람’이었다는 바람까지 보태고 싶어진다.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란 기억으로 남고 싶은 거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속의 헤이즐과 어거스터스 역시나 나와 비슷한 느낌으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공감을 준다. 더군다나 헤이즐과 거스(어거스터스)는 암이라는 병마와 싸우고 있었고, 언제 자신에게 손짓할지 모를 죽음과 만날 준비도 해야 하는 입장에서 더더욱 죽음이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상기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남겨진 시간, 얼마가 될지 모를 그 시간을 사랑해야만 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에게 닥칠, 자신이 선택할 일들을 받아내야만 했다. 실험용 의약품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산소통에 호흡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헤이즐, 의족으로도 멋진 소년이 되어보는 거스, 한쪽 눈을 잃고서도 유쾌하고 쿨한 남자가 되고 싶었던 아이작까지. 눈물로 보낼 것 같은 시간을 웃음으로, 당연하게 그럴 수도 있는 일로 받아들이려 하는 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과 대견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자신에게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죽음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안도의 한숨을 쉬게 만들어준다고 해야 할까. ‘그래, 나는 이렇게 신체의 한 부분을 내어주고서라도 너(죽음)와 싸우고 있어. 반드시 이길 테야!’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다. 그 순간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 싸워왔던 그 시간이 곧 멈출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싸우고 있다는 것 자체를, 싸워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중이라고.

 

그래서

 

나는 이 책 속에서 느껴지는 슬픔들을 통해 이들의 고통을 함께 만났다.

“고통이란 느껴야만 하는 거거든.” (70페이지)

이미 삶의 끝인 그 죽음을 알고 있는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의 슬픔, 닥치지 않으면 모를 것 같은 그 마지막을 향해가는 슬픔을 이 책의 주인공들과 만나고 있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것 중의 대표주자가 바로 슬픔일 것이다. 헤이즐과 거스에게 똑같이, 갑작스레 찾아왔을 그 슬픔의 깊이를 같이 헤아려보고 있다. 그 슬픔이 유지되는 동안 더 깊은 슬픔과 무너짐을 선사했던 『장엄한 고뇌』의 저자 피터 반 호텐을 만나는 일까지 더해진 것은 이미 이 아이들에게 더 많은 슬픔이 다가올 것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참 친절한 것 같아서 화가 났다. 예고 없이 온다던 그 슬픔을 예고해 주려 했다니.) 한 권의 책을 통해 교감했던 그 시간을 저자의 무책임한 태도로 절망을 느끼게 했으며, 만나고 싶었던 그 마지막 이야기 역시 들을 수 없었다. 작가가 숨겨두고 싶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계획되지 않은 마무리였는지 모를 것들뿐이었다. (이 부분은 직접 이 책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를 읽고 확인하길 바란다.) 그 먼 길을 목숨을 걸고 여행을 감행했던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더 많은 절망과 차마 얘기할 수 없는 슬픔의 무게였으리라.

 

“아니야. 향수병은 죽음의 부작용이야.” (249페이지)

그 아련한 느낌마저 지워야만 죽음과 멀어질 것을 알기에 때로는 인간이 가지는 어떤 감정들을 잘라내려고까지 한다. 죽음을 향해가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차마 그 감정마저도 버려야 할 것만 같은 이름으로 기억창고에 저장하려 한다. 육체의 아픔이 가져오는 게 너무나도 어마어마해서 단순히 그 병명 이상의 것을 가져오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추억이란 아름다운 이름일 수 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버려야 할 것이 되었다면 그 병(죽음)이란 것이 얼마나 힘이 센 것인지를.

 

그럼에도

 

“응. 난 『장엄한 고뇌』에 나왔던 그 말을 믿어. ‘잃어가는 그녀의 시력 앞에 떠오르는 해는 너무 밝았다.’ 그게 신이라고 생각해. 떠오르는 해, 그리고 빛이 너무 밝고 그녀는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는 거. 우리가 산 사람을 위로하거나 혹은 괴롭히기 위해서 돌아온다고 믿지는 않지만, 우리가 뭔가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 (178페이지)

이들이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하고, 무언가가 되어 남아주기를 바라는 그 간절함은 아프지 않은 우리와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데 이유를 주고, 내일 남겨질 나의 흔적을 새기는 일. 그게 바로 우리가, 이들이 이 순간을 살아가는 목적이자 의무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헤이즐과 거스는 충분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평균 수명보다 모자란 시간을 끌어안고서 이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느끼고 새기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들의 사랑에 관객으로 동참했다.

슬프기에 아름다웠고, 아름다웠기에 더 아프게 느껴지게 했던 사랑을 보여주는 헤이즐과 거스. 인간의 평균수명보다 짧은 자신들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지금 자신의 몸에 대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아직은 열여섯, 열일곱. 그 나이의 평범한 십 대보다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더 친숙한 일상을 살아가는 헤이즐과 거스에게도 다른 이들과 똑같이 사랑은 찾아왔다. 다를 것이 없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감정이었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 그런 일들이 다가온 것뿐이다. 단지 신체적 아픔을 가지고 있기에 또래보다 더 빨리 어른의 마음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사랑이 내 눈에는 아름다운 회색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무채색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들려주고 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멀지 않은 이별의 순간에, 적어도 서로에게만큼은 그들이 살아갔다는 그 흔적을 새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듯, 그렇게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 상처를 이기지 못해 무너지는 누구처럼 되지 않기 위해 그 상처까지 끌어안을 마음으로 헤이즐을, 거스를 사랑 했다. 서로에게 남겨진 흔적이 비록 상처라 할지라도 그 상처를 이기고 내일을 살아갈 것을 알기에 지금 이들이 하는 사랑 역시나 당연한 것으로 보였다. 그냥, 사랑하면 된다. 그게 이들에게 숨 쉬고 있는 오늘을 각인시키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이들을 나 역시도 당연하게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음의 고저 없이 평범할 것 같은 이야기가 나에게 특별함을 선사했다.

 

며칠 동안 TV와 라디오를 통해 내 눈과 귀에 들려왔던 모든 장면과 소리는 슬픔이었다. 누군가의 모습이 아릿해서 아프고 멜로디가 절절해서 슬픈 노래였다. 어쩌면 그 외의 다른 이유로,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슬픔을 더 깊이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내 맘처럼 흐르지 않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슬픔이 헤이즐과 거스에게 찾아왔던 순간들처럼 느껴졌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 공감의 이유를 찾고 있었다. 억지로 그 이유를 찾지 않아도 이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공감할만했지만, 나는 그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밀려오는 여운을 정리할 구실 또 한 번 찾고 있었나 보다. 정말 오랜만에 집중해서 한 권의 책에 빠져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이들의 평범하고 유쾌한 일상이 들려올 때는 웃고 있었고, 내일의 희망이 무너지고 좌절이 찾아올 때는 울고 있었다. 나(우리)에게 흘러가는 일상과 크게 다르지도 않게 그저 누구나 비슷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과 같아서 안도하는 한편, 언제 높게 일지 모를 파도를 기다리는 불안감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어제는 저런 일, 오늘은 이런 일, 내일은 또 내일의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지금 그대로인 것처럼……. 계속해서 이어지고 살아가는 날 중의 하루하루가 쌓여서 가는 시간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처럼 때로는 슬픔과 아픔이, 설렘과 즐거움이 오는 날들일 수도 있겠지. 그래서 늘 슬픔과 아픔을 느끼면서도 웃게 될 희망을 찾아서 살아가는 시간일 테고. 그러한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그 사람을 기억하는 장면들로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나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322페이지)”

헤이즐과 거스, 두 사람은 이미 넘칠만한 흔적을 남겨주었다.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는 오늘을 다시 보게 하고 시한부로 살아갈 수도 있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게 한다. 이들이 보여주었던 시간이 슬프고도 아름답게,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되어 있었으니까.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낼 평범한 일상마저 ‘특별하게’ 살아준 그 시간이 소중하게 여겨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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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파울로 코엘료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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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사탕의 유혹도 있었지만,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과 친해지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그의 작품 중 나와 맞는 게 단 한편뿐이었기에... 담담한 듯, 조용한 말투가 가져다줄 어떤 느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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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난다 - 치사해서 말하지 못한 사소한 것들을 향해 이단옆차기
김보라 지음, 스폰지 그림 / 돋을새김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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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해서 말하지 못한 사소한 것들을 향해 이단옆차기라는 부제가 눈길을 끈다. 문장 그대로다. 말하자니 치사한 사람이 될 것 같아 주저하게 되고, 참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화병이 날 것만 같은 마음을 어쩌랴. 이럴 때 다른 방법은 없다. 쏟아내야 한다. 풀어야 한다. 속사포 욕이라도 마구 쏴줘야 한다. 아마도 저자는 그런 사람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어떤 을 풀어내는 그 화끈함이 시원하게 들린다. 여기에서 방점은 사소하다는 것에 있다. 뭘 그 정도로 그러냐, 별로 큰일도 아니구먼, 그냥 넘어가지 속 좁게 군다, 는 말들이 나올 상황들이다. 하지만 사소하다고 하기에 일상이나 인간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라 그 여파가 너무 크다. 그리하여 그 사소한 일은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일이 되고야 만다. ~? 그런 시간이 쌓여, 참고만 있자니 이 성격에 죽을지도 모를 위태로운 상황들로 변신하기도 한다.

 

어딘가에서 누구에게 하소연하듯 수다 삼매경에서 나올 법한 얘기인데, 저자의 말에 100%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된다. 더불어 정말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한 번 더 실감하게 된다. 나 혼자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것은 내 방 안에서 나 혼자만의 일상이 가능할 때 얘기고,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겪어가는 일은 많은 배려와 이해를 동반해야만 한다. 저자는 아주 사소하지만 우리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들을 말한다. 깨알같이 화가 나게 하는 일들이 끝도 없이 풀어져 나오는데 이런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할 일이 참아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앞뒤 없이 화만 내서도 안 되는 게 살아가는 처세술 아니겠나. 눈치껏 재주껏 어디 그 화를 풀어내 보시라.

 

어떤 일에 화가 나냐고?

공공장소를 개인장소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어요. 여긴 당신들 안방이 아니므니다. 먹는 사람과 뒤처리하는 사람 따로 있을 때 분노의 주먹이 불끈 쥐어집니다. 나는 식기 세척기가 아니라고요! 약속시각 몇 분쯤 습관적으로 늦거나 아무 미안함 없이 취소해버리는 사람들에게 내 시간을 돌리도~! 똑같은 방법으로, 약속시각에 몇 분이 아니라 몇 시간쯤 늦게 와서 복수해줄 겁니다. 집 없는 설움에 울게 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대궐 같은 집에서 당신을 내려다볼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이제 무슨 옷을 입어야 할까요? 예전의 55사이즈가 지금 44사이즈도 안 되는 거 알고 있나요? ㅠㅠ 누군가의 값진 노동 앞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로 판단하지 마세요. "~나 해야겠어요."라는 말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사라져가는 서점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출판사를 호구로 아는 거래처나 독자에게 섭섭합니다. 우리는 책으로 통하는 사이인데 말입니다. 피곤하다고 방바닥과 이불로 돌돌 말린 주말을 보낸 것이 너무 허망해서 화가 납니다...

 

, 끝이 없다. 괘씸해서 화가 나고, 속상해서 화가 나고, 서운해서 화가 나고... 가만히 듣고 있자면 매일 살아가는 오늘이 기쁘면서도 그 깨알 같은 화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도 한다. 사는 게 그렇지, 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2%가 있는 듯하다. 아마도 그건 한 번쯤 터져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꾹꾹 눌러 담은 화, 혹은 가슴 속 상처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 번쯤 이런 수다 삼매경에 푹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내가 한번 말한다고 해서 화 내게 되는 그 많은 원인이 단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 변화의 과정에서 이런 타이밍 한 번 맛보는 거로 생각하면 어떨까. ^^

 

자의 에피소드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여러 가지 있었는데, 그중에 특히 지하철의 노약자석은 노약자 전용석이 아니라 노약자 우선 좌석이라는 말에 심각하게 공감했다. 혹시 젊은 사람이 앉아 있다가도 노인분이 타면 바로 일어나면 되는 좌석인 거다. 지하철이 아닌 버스만 다니는 이곳에도, 가끔 버스를 타다 보면 정말 자리 양보하기 싫어지게 하는 노인분이 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 그런 경험을 하고 보니 자리 양보에 대한 예의를 차리기가 싫어진 적도 있다. 언제였던가. 노인분이 버스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알아서 일어나려고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급하게 내 옆에 와 떡하니 서서 요즘 것들은 자리 양보도 할 줄 모른다는 둥, 아이고 팔다리허리어깨야 하면서 몸의 여기저기를 두드려대면서 굳이 바닥에 주저앉는 할머니. 저자도 말했지만, 노인분이 타면 자리 양보 안 하는 사람 거의 없다. 노인에게 자리 양보는 당연한 것처럼 배우고 자랐기에 나 역시 아무리 피곤해도 서서 간다. 그런데 저런 노인을 만나면 저 일어나는 거 안 보이세요? 할머니 같은 분들 때문에 자리 양보하기 싫어져요.” 라며 굳이 한마디 하고 일어난다. 그러면 그 할머니는 내 뒤통수에 대고 싸가지가 바가지라는 둥 끊임없이 욕사포를 날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목적지까지 유유히 그렇게 서 있다가 내린다. 처음에는 내가 정말 나쁜 년인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주변의 시선이 의아해서 둘러보니 와~ 대박. 사람들이 나에게 공감의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살짝 엄지를 추켜드는 사람도 있었다. 아하~ 이런 마음이 나만 드는 건 아니었구먼. 결론은, 나는 나쁜 년이 아니라는 것. 뭐 이건, 나도 한껏 화가 났기에 했던 행동이었지만, 지나고 살짝 후회와 웃음을 함께 삼켰지만... , 조금은 뻘쭘하기도 하고... 그래도 그런 싸가지 바가지가 한 번쯤은 속을 시원하게 해주긴 하더라.

 

공감해서 웃음도 나고 조금은 달라서 오버하는 듯한 느낌도 있다. 저자의 에피소드를 곰곰이 듣다 보면 나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부분이 상당히 있다. 절반쯤은 공감하고 절반쯤은 공감하기 어려운 정도다. 그건 누가 잘했네 잘못했네 하는 이분법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같은 상황을 두고 하는 생각의 차이, 취향의 차이, 성격의 차이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저자가 발끈했던 일이 나에게는 그냥 흘러가듯 무시하는 일도 있는 걸 보면 분명 사람의 성격 차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화가 나는 지점이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고 화를 내는 정도도 다를 것이다. 조금은 가볍게 읽어도 좋고 조금은 무겁게 생각해볼 문제도 있다. 우리 사는 동네 어딜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들, 사람들이다.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나 자신이 속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문제로 끌어내 끝장토론 한번 해보자, 하는 의미가 아니니 부담 없이 즐겨도 좋을 이야기다. 속이 좀 시원해질지도 모를 수다 한바탕 즐기면 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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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연애 따위를 놀 청소년문학 28
방미진 지음 / 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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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 19세 초과 금지 연애 소설.

들어는 봤나~ 19세 초과한 사람들은 읽지 말라는 연애 소설?

 

공부, 성적, 진로... 학생이나 청소년이라는 대상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연결되는 단어다. 학생의 본분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당연히 성적도 좋아야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선택된 대학은 곧장 직업으로 이어지는, 아주 강력한 끈으로 묶여 있다. 그러니까, 그 나이에 해야 할 일이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정해진 법칙 같은 느낌이다. 물론, 공부해야지. 하고자 하는 일, 미래를 위해서라도. 10대, 청소년이라는 그 시기는 공부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오직 공부’로만 채워질 수는 없다는 것을 아주 과감하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청소년문학이 나타났다. 그동안의 청소년문학에서 만나보지 못했던, 제목부터 궁금하게 만드는 『어쩌다 연애 따위를』이 그 시간을 지나고 있는 아이들의 진짜 속마음을 듣게 하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연애도 운동화를 닮았다. 이건 꼭 사야 돼! 하는 핫한 신상도 몇 달 안 가 시들해지듯, 아무리 핫한 연애라도 금세 익숙해진다. 미련 없이 버리기 힘들다는 점도 닮았다. 아우, 이거 해외 배송에 완전 힘들게 구한 건데. 그래도 쟤만 한 애 없는데. 그래서 결국은 신발장에 곱게 모셔 두고 바람을 피우게 되는 거다.

익숙한 건 편하지만 어딘가 궁상맞다. 함부로 구겨 신은 운동화를 별 수 없이 질질 끌고 다니는 것처럼, 관계를 유지하다 결국에는 바이 바이.

아무리 멋진 것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된다. 아무리 멋진 것이라도. (26페이지, 조신)

 

네 명의 인물이 차례로 등장한다. 열여덟, 열아홉. 고2, 고3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아이들에게서 공부에 인한 스트레스나 누군가의 독촉, 성적에 인한 비관 같은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이 아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다. 사랑, 연애.

조신. ‘하... 이 완벽한 비주얼~ 나도 내게 반하겠네♥’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외모를 가진 조신은 바람둥이다.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지만,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다 만날 수 있다. 자뻑에 빠져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여자들이 뻑이 간다. 여자 친구가 있음을 알면서도 만나는 여자들이 수두룩. 하지만 여러 여자를 만나고 있어도, 그에게는 순정이 있다. 오직 너뿐이라고 외치고 싶은 여자를 가슴에 품고 있다.

서두.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왜 말을 못 해! 왜!’ 오동통 너구리를 연상할 수 있는 몸매에 때론 과격하고 솔직한 여학생이다. 애써 사들인 옷은 며칠이 채 되지도 않아 몸에 맞지 않게 된다고 해도 괜찮다. 다이어트란 실패해도 다시 할 수 있으니까, 이 정도 폭식과 과식쯤이야... 그런 서두에게 마음을 품은 이가 있단다. 누구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그렇다는데, 왜 당사자는 말을 안 하느냐고!!

안평. ‘다음 생에는 마성의 게이로 태어나겠어!’ 안평은 게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게이로 살아가고 있다. 당연히 여자 친구는 사귀어본 적이 없다. 안평에게는 우정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품어버린 조신이 있으니까. 아, 떨려... 이 자식 이거 왜 이래? 마성의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조신을 어떡하면 좋을까.

박순. ‘팬질...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그룹을 좋아하고 멤버 중의 한 명에게 팬으로서의 사랑을 분출한다. 스스로 성공한 팬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할 정도로 열정과 애정을 담아 팬질을 한다. 그런 박순이 어느 날, 팬질을 그만두겠다고 한다. 왜? 미친 듯이 좋아했던 그 시간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거야?

순정. ‘왜 사랑할수록 내가 초라해지는 걸까?’ 조신의 공식적인 여자 친구다. 고3. 공부를 미치도록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면서 조신과의 연애를 그만둘까 싶기도 하지만, 조신과의 연애가 공부에 전혀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순정에게 연애와 성적은 어떤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신에게 헤어지자 말한다. 너무 잘난 남자를 만나는 평범한, 아니 평범하다고까지 못할 정도의 외모를 가진 순정에게 조신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상대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 헤어져!

 

나는 정말 조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 모두가 하는 말이 맞다. 우리가 만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런 연애는 로맨스가 아니라 코미디다.

하지만 원망은 없다. 원망이라니 당치도 않다. 나 같은 여자가 조신 같은 남자를 만나 연애하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니, 조신 같은 사람이 나 같은 인간을 좋아하게 될 확률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이 지구상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 나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 잠시나마 나를 순정 만화 속에 살게 해주어서. (147페이지, 순정)

 

표지부터 순정만화 삘 나기에 무슨 내용이기에 그런가 했다. 상당히 발랄하면서도 정작 이 아이들의 진짜 얘기를 왜 이제야 듣게 되었을까 싶어 안타깝기도 했다. 공부나 성적은 이 아이들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운명공동체라 여긴다고 해도, 그 아이들의 시선에 비친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나 연애를 솔직하게 들어본 적이 없는 듯하다. 왜냐고? 그러면 안 되는 시기라고 이미 못 박아 버렸기에, 아예 처음부터 차단된 단어이고 있어서는 안 될 감정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있어서 공부만큼이나 중요하고 필요한 건 바로 이런 감정이고 시간이었던 거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연애하고, 가슴앓이하고, 헤어져 보고, 연예인을 향한 팬질이 가져다준 시간은 헛되게 흘러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그렇다.

 

안평과 나는 그 전쟁으로 인해 한 가지를 배웠다.

누군가의 특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집단도 언젠가는 이해관계에 따라 특성을 약점으로 규정하며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랑하는 존재를 지키려는 마음이 나를 지독하고 잔인한 인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인간은 그런 존재라는 것을. 사랑은 추악함을 부르기도 한다. (129페이지, 박순)

 

그룹의 팬질을 하던 박순이 팬질을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안평에게 하는 얘기들은 서늘했다. 미친 듯이 집중했던 대상, 그 대상 하나로 똘똘 뭉쳤던 팬덤이라는 하나의 덩어리가 박순에게 남겨준 것은 허탈감이었다. 서로의 마음 하나씩 생채기를 만드는 건 순식간, 그 일에 인해 상대를 할퀴고 헐뜯고 한 사람 매장하고 떠나보내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 팬질의 경험이 박순에게 가르쳐준 것은 사람 살아가는 세상에서 배워야 할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었을까. 순간적인 감정으로 나 하나 살겠다고 한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일이 결국 후회와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내내 지우지 못할 불편함일 것이다. 물론 그것 하나 때문에 팬질을 그만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시간이 경험하고 배우게 한 어떤 게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다.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산다는 아이돌에게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박순의 사랑. 그 파릇파릇한 열정과 집중이 부러웠다.

 

사랑과 연애를 했던 네 사람, 조신, 순정, 안평, 서두. 이 아이들에게 사랑은 상대를 향한 감정이자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또한, 자존감을 낮게 하는, 그 낮은 자존감을 확인하는 순간을 만들기도 했다. 바람둥이라 부르는 조신이 바라는 것은 자신을 향한 관심이었다. 분명 내가 좋아해서 만나는 여자 친구가 있지만, 내가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닌, 나를 더 사랑해주는 그 마음과 애정을 바라는 것으로 바람둥이가 된다. 그래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말리지 않았다. 예쁜 여자가 아닌 그저 자신이 만나고 싶은 여자를 만난 것이다. 그에 인해 상처받는 한 사람, 조신의 여자 친구 순정은 잘난 조신으로 인해 더 주눅이 들고, 조신의 바람기를 전해주는 소식들로 아파하다가, 선택한다. 더 이상은 조신 때문에 상처받지 않으리라. 항상 같이 있으면서 조신에게 저절로 마음을 줘버린 안평은 민감한 시기에 성 정체성으로 고민하게 된 남학생을 보게 한다. 그런데 안평의 모습만 보면 그게 염려할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면 되는 것, 마음이 가는 대상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는 것. 비록 상대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지만 그건 어떤 사랑에서도 볼 수 있는 단면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연애라는 것을 두고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안평이 게이여서가 아니라. 가장 귀여웠던 인물이 바로 서두. 서두의 외모를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읽게 하는데, 서로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 채로 자신이 하는 오해로 흐르게 내버려두는 이들의 어긋난 마음이 가장 재밌게 펼쳐진 대목이었다. 통통하고 귀엽고 말발 좋은 이 아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야...!

 

밤 12시. 슬픔도 허기도 달랠 길 없었던 나는 식탁에 쪼그리고 앉아 불도 켜지 않은 채, 밥을 비벼 먹으며 청승을 떨었다.

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듯.

울고 먹고 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이 장면이 무척이나 전형적이라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꼭 이런 것만 드라마 같지, 이런 것만! 식상해도 괜찮으니까 연애도 좀 드라마틱하면 안 되겠냐? 어? (68페이지, 서두)

 

각 인물의 시선에서 화자는 ‘내’가 되어 서술한다. 같이 모여 있을 때의 그 객관적인 장면이 아닌, 오직 그들 각자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기회였다. 비록 말할 수는 없었지만,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아파하고 슬퍼할 줄 아는 시간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끝까지 그 유쾌함을 놓지 않고 풀어간 이 아이들의 연애가 읽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게 한다. 허투루 흘러가는 시간이 아님을 보게 한다. 틀에 박히고 뻔한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정작 들어야 할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었을까. 지금 그 시간을 지나고 있는 아이들에게 가장 공감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유치원 때부터 여자 친구 남자 친구를 사귄다는데, 곧 성인의 대열에 합류할 이 아이들에게 사랑이나 연애가 빠질 수 있겠냐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봐줄 건 봐 주자. 그래야 솔직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

 

한 가지 더, 내가 이 책을 읽고 놀랐던 건 저자 방미진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의 전작 두 편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참 서늘하고 어둡다는 거였다. 두 편 모두 청소년소설이었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말일 거로 생각했다. 그게 그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고 방미진이 표현할 수 있는 방식 전부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네.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같은 시간을 걷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밝고 재밌게 표현할 줄 아는 작가였네. 그래서 더 읽는 재미가 있었던 듯하다. 전작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생긴 저자에 대한 선입견을 확 깨트려줘서 더욱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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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얀 필립 젠드커 지음, 이은정 옮김 / 박하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이런 사랑이 가능해?

처음에는 추리소설을 대하는 느낌으로 읽기 시작했던 듯하다. 어찌 되었든 사라진 사람이 존재하고 그 흔적(생사)을 찾아가는 거꾸로 시간 여행이었으니,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울 거로 생각했다. 물론, 읽기에 충분히 재미있고 흥미롭다. 다만 이건 내가 이 책의 초반부에 추리소설 분위기라 느꼈던 선입견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고 완성되기까지의 과정과 의미가 남달랐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내 머릿속에 내내 떠다니던 물음표가 이야기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그래, 이럴 수도 있지.’ 라는 수긍을 끌어냈다. 여전히 나는 두 주인공이 보여주었던 사랑을 기대하거나 확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 이 소설에서의 틴 윈과 미밍 같은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거다. 혹시 알아? 지금은 기대하지 않는 그 사랑의 모습을 언젠가 내가 주인공이 되어 보게 될지도... 내가 하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의 색이 달라지거나 없는 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 테니까. 사랑의 색깔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다. 그러니 그 누구의 사랑도 우리가 함부로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나는 이들과 같은 사랑을 못 했지만, 이들과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는 간절함도 아직은 없지만, 사랑의 한 장면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교감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말로 다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조각이 그들의 진심을 알았을 때 맞춰지는 느낌. 이 책을 읽는 내 느낌이 딱 그거였다. 그래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사랑, 이런 사랑이 있다는 가능성이나 믿음 같은 것을...

 

물리적인 거리가 서로를 향한 마음을 잘라내지 못하며, 장애 역시 사랑의 힘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불우하게 태어나고 자라면서 후천적인 이유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된 틴 윈,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불편했던 미밍. 우연인 듯했지만 결국은 운명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인연의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쌓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시간을 거슬러 보게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년의 길 안내자가 된 미밍, 다리가 불편한 소녀의 두 다리가 되었던 틴 윈. 아무것도 바란 것이 없다. 그저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한 그 상태 그대로의 시간, 삶을 원했을 뿐이다. 여기에 딱 어울리는 표현은 ‘순수’라는 단어일 것이다. 그것 외에 쉽게 떠오르는 단어도 없다.

 

그 사랑을 찾아가는 길을 딸을 통해 보여준다. 어느 날 사라진 아버지를 찾기 위해 줄리아는 아버지의 고향 미얀마를 찾아간다. 변호사인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 갖춘 삶을 살던 아버지가 사라진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 관계에 대한 결말도 찾으려 했는지 모른다. 아무 연락이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것도 자의적으로 자취를 감춘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어렵기도 하겠지만, 숨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딸의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그때 줄리아의 앞에 놓인 50여 년 전 아버지의 사랑은 혼란을 가져온다. 어쩌면 아버지의 배신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그렇기에 찾아갈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지난 시간을, 계속되는 사랑을 찾아 미얀마의 소읍 깔로로 향한다.

 

깔로의 카페에서 만난 중년의 남자 우 바의 이야기를 따라간 여정이 아름답다. 딸의 입장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삶 한 부분을 이해하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이 소설을 읽는 이에게도 한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 사랑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보여주는 신비로움이 매력적인 소설이다. 우 바를 통해 들려오는 그들의 사랑은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함을 말하는 듯하다. 서로 보지 않아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긴 시간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게 가능하냐고 묻거나 의심하는 이가 있다면, 그들이 하는 사랑의 숭고함을 먼저 보게 한다. 가능하냐고 물었던 물음표를 지워버린다. 그들의 사랑이 믿거나, 믿게 되거나, 혹은 이해하거나 하는 결말을 보게 한다. 그래, 그런 사랑도 있어, 라면서...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사랑의 장면을 한 권의 소설로 풀어내고 있다. 서로에게 닿아있던 그 심장박동을 평생 듣고 있었던 거다. 현재를 살면서 보기 드문 이야기에 감동의 끄덕임을 보내면서, 사랑의 진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 어떤 것보다 강한 힘을 가진 게 사랑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눈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느낀다는 것(그게 심장박동의 들림이어도)의 의미를 찾게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장애가 가로막을 수 없는 것의 위대함을 이들의 사랑으로 확인했다. 동시에 딸의 시선으로 아버지를 이해하는, 화해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한 사람으로, 남자로서 가진 그의 사랑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킨 거다. ‘이런 사랑이 가능해?’라고 물었던 나의 의심은 이때부터 희미해진다.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냥 보면 되는 거다. 이런 사랑도 있다는 것을...

 

슬픈 해피엔딩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 소설이다. 그 안타까움이 슬프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기에 해피엔딩이라 불러도 좋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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