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혼합니다
가키야 미우 지음, 김윤경 옮김 / 문예춘추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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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사망을 알리는 친구의 엽서에 부럽다고 말하는 여자의 마음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일단 크게 한숨 쉬지 않을까? 이 한숨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을 것 같다. 한 가지는 남편의 사망 이후로 혼자 지낼 친구의 안부가 걱정되어 한숨, 다른 한 가지는 이제 그녀를 힘들게 하던 고민 하나가 줄었으니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말 그대로 부러움의 한숨. 아마 이 상황을, 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내 남편이 빨리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여성의 삶을 경험해본 적 없을 테니 말이다. 남편과 함께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남편이 빨리 죽기를 바랄까. 아니, 남편의 죽음이 아니어도 좋겠다. 그저 눈앞에서 남편과 마주하지 않는 일상이라도 바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만큼 남편과 함께 사는 일이 고통스럽다는 게, 친구 남편 사망 소식에 부럽다고 말하는 여성의 진심일 테니까.


이혼을 예능의 소재로 삼을 만큼 이제는 이혼을 숨겨야 하거나 가십으로 여기지 않는다. 물론 그중에는 다른 사람의 이혼을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신나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과거의 우리 사회가 이혼을 무슨 큰 잘못을 하는 것처럼 수근대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내 주변에도 이혼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처음 그들의 이혼을 접했을 때는 의외의 소식에 놀라기도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누구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 소식 후 이어지는 그들의 결혼생활은 내가 봤던 것만큼 행복하지만은 않았다는 거다. 여기서 그 식상한 말을 또 한 번 해야겠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타인의 삶 내면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거라는 진실을 다시 확인하는 셈이다. 어쨌든. 이 소설의 주인공 스미코의 삶도 타인의 시선으로 판단하는 행복에 맞춰있었다는 거다.


58세의 평범한 주부 스미코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동안 남편의 수입으로만 살다가, 아이들이 크고 제 갈길 가면서 그녀도 시간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알겠지만, 돈으로만 따지자면 그녀의 수입은 남편과 비교할 수 없다. 그래도 그녀의 일상과 노동을 시간제 일의 수입으로만 따질 수 있을까? 모든 집안일을 혼자 해야 했고, 몸이 불편한 시부모도 간병했다. 며느리가 시부모를 간병하는 게 당연하게 여기며 남편을 비롯한 남편 집안 남자들은 그녀에게 많은 의무를 지웠다.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니 속이 터질 것 같아도 참고 그 모든 걸 감당하면서 살아왔겠지. 그러다 순간, 친구 남편의 부음에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의 인생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처음 이 책을 펼치고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도 바로 숨이 막혀왔다. 일방적으로 모든 집안일을 떠 앉은 그녀의 하루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분주하게 아침을 차리고, 남편이 출근하면 뒷정리하면서 발을 동동 구를 것이고, 그녀 역시 급하게 아침 출근길을 서두를 테지. 시간제라도 일하는 게 힘든 건 마찬가지고, 퇴근 후 또 다른 집안일을 하다 보면 하루해가 저문다. 이어지는 남편의 퇴근 후 아침 상황이 반복된다. 남편의 식사를 준비하고, 주방을 정리하고, 지친 몸으로 잠이 들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비슷하게 흘러가는 하루의 시간이 그녀에게만 잘못된 건 아닐 테니. 문제는 가족인 남편이 그 집안의 모든 일에서 남보다 못한 존재라는 거였다. 문득, 아이들이 자라면서도 혼자서 힘든 많은 일이 있었을 텐데, 그녀는 그걸 어떻게 다 해내고 여기까지 왔을까 싶더라만.


우리의 엄마들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모든 엄마가 그러지는 않을 테지만, 엄마니까 아내니까 며느리니까 해야만 했던 일들 앞에서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게 당연한 의무처럼 여겼던 시절을 건너왔을 거다. 그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게 문제였나 보다. 그러니 58세 여성의 이혼 결심을 그냥 한번 던져보는 말로 여기기도 했겠지. 막상 아내가 꺼낸 이혼이 진지한 현실이라는 걸 실감했을 때 남편의 태도가 우습기만 하다. ‘내가 번 돈이고 내 집이니까, 모두 내거야. 당신에게 하나도 줄 수 없어!’ 아무리 부부 공동재산의 분할을 얘기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읽으면서 조마조마 했던 게, 스미코의 이혼 결심이 혹시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남편의 일방적인 재산재산 분할 반대와 시골 동네의 가십으로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냥 이대로 살자고 지레 포기하는 건 아닐까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삶의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남편이 보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삶을 되찾고 행복해지고자 이혼을 선택한다. 그래, 이제 스미코는 이혼한다.


이 소설 속에서 스미코뿐만 아니라, 이혼한 중년 여성(그들 대부분은 스미코의 고교 동창생이다)이 몇 명 더 등장한다. 혹자는 주변의 그런 여성들 때문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니냐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럼 그녀들이 왜 이혼했는지 듣는 일도 필요하다. 저마다의 인생, 색도 모양도 달랐지만, 그녀들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였다. 자신의 삶, 행복, 진정 바라는 것을 찾아가는 여정 말이다. 그 과정에 이혼이 있었을 뿐이다.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삶의 가운데 있어야 할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그 삶을 찾아가는데 나이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소설이 아닐까 한다. 그동안 가키야 미우가 보여준 소설 속 인물들이나 내용을 보면, 이번 소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사회 문제를 주인공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면서 웃음도 놓치지 않았던 저자가, 이번에도 날카롭고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세대도 변했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편견이 머문 세상에서 주인공 스미코가 찾아갈 자유와 새로운 삶이 기대되는 게 나만은 아닐 터.


결말이 참 시원시원한데, 웃음이 나면서도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네. 그래도. 많은 독자가 스미코의 같은 상황이라면, 이혼이라는 선택으로 확인하게 될 행복을 더 기대하며 살아갈 것 같다. 세상 모든 스미코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이제이혼합니다 #가키야미우 #이혼 #자유 #자신의삶 #중년의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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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브루 파우치 엘살바도르 SHG EP - 40ml*5ea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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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커피가 제일 맛있다는 내 입맛에도 과하지 않은 진함과 고소한 끝맛이 그대로 느껴진다. 부담스럽지 않은 아메리카노 마시기에 딱 좋았고, 다음번에는 우유와 함께 라떼로 마셔봐야겠다. 재구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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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사형 집행 레시피 - 제3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우수상 수상작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이석용 지음 / &(앤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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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선고는 물론이고 사형 집행은 더더욱 진행되지 않는 나라. 사형 집행이 단순한 의미도 아니고, 외교적인 이유도 있다고는 하니 쉬운 문제는 아닐 테다. 범죄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고 해서 범죄가 줄어드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범죄심리 전문가의 말을 떠올려보자면, 연쇄살인을 일으킨 범죄자를 만났을 때 그가 물었단다. 자기 사형이 선고되는 거냐고. 아무 잘못 없는 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했으면서, 정작 자기 죽음은 겁나는 거였구나 싶은 게, 어쩌면 본보기라도 이런 잔혹 범죄에 사형 선고가 필요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집권 3년 차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을 쓸고 있는 와중에 사회적 이슈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얼마나 일을 못 했으면, 한번 떨어진 지지율이 오르지도 못하고 임기 끝나가는 시기에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까. 어지간히 일을 못 하는 대통령인가 보다. 대통령과 주변인들은 지지율 상승을 위해 시나리오를 짠다. 바로 오랫동안 없었던 사형 집행을 이뤄내는 것.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이보다 더 큰 이슈는 당분간 없을 것이고, 무너진 지지율 회복에도 분명 효과가 있을 거로 여긴다.


그동안 사형 선고는 있었지만, 사형 집행은 없었던 세월이 얼마나 길었던가. 뉴스를 장식하는 잔혹 범죄를 접할 때마다 사형 선고를 운운하지만, 정작 사형 선고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니 사형 집행을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거야말로 정부가 준비한 깜짝쇼가 될 테다. 정부 관계자들이 사형수 60여 명 중 사형 집행의 주인공 3명을 선발하는 작업을 한다. 인권을 외치는 이들에게 대항할 인간미 넘치는 장면도 연출하려고 계획한다. 사형 집행 전날 사형수가 원하는 음식으로 최후의 만찬을 제공하는 게 바로 그거다.


소설은 이 치밀한 계획과 이 계획에 참여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흘러가는데, 이게 참 묘하다. 정부 관계자들이야 자기네 원하는 지지율 회복이 목적이라지만, 그 구성에 모인 사람들 각자는 또 자기만의 목적이 있다. 참관인으로 선발된 기자는 특종이 목적이겠고, 일반인 위원은 자기를 알리는 게 원하는 일이다. 그 외의 사람들, 정부 관계자들이야 자기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고, 정치적 목적을 이뤄내는 게 궁극적 바람이다. 그 중심에 요리사 X’가 있다. 철저하게 신분을 감춰주는 것을 조건으로 사형수의 마지막 식사를 책임진다. 가장 궁금하고 가장 뜬금없이 주인공처럼 비치는 인물로 보였던 요리사 X. 그가 만든 음식을 먹고 분위기를 바꾸고, 절대 입을 열지 않았던 피해자들이 숨겨진 장소를 말하는 등 사형수들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마지막 모습을 장식하고 떠난다.


읽다 보면 사형수의 마지막 식사에 얽힌(?) 비밀이 드러나지만, 물론 처음부터 그걸 알 수는 없다. 그저 막연하게 이거 뭐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문과 요리사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고(보고) 사형수들이 보인 반응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한 명의 사형수가 음식을 먹고 떠나갈 때마다, 요리사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별다른 요구나 설명이 없었는데도 사형수의 마음을 깊게 건드릴 수밖에 없는 음식을 제공하며 그들의 마지막에 다른 모습을 보이고 가게 하는 능력을 갖춘 이의 정체가 궁금했던 거다. , 결말을 보면 다 알게 되지만, 읽는 내내 이 궁금증으로 소설의 몰입감은 저절로 높아진다.


특이한 소설이라는 생각에 읽기 시작했는데, 등장인물 각자의 사연과 목적 있는 사형 집행 참여에 놀랍기도 했다. 소설의 끝부분에 다다라야 이 조각들이 모여 소설이 완성되는 느낌이다. 사형 집행의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설 수 없는 마음이 갈팡질팡하다가, 사형수의 잔인함에 눈을 뜰 수 없을 때는 사형 집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다가, 이 모든 선택은 각자의 이익과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 의견일 수도 있겠다는 씁쓸함까지. 어느 것 하나도 완벽하게 한쪽으로 치우치지 못하는 마음이었던 거다. 그러면서 소설 속에서 묻는 것들을 생각한다. 아무리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사형수에게 인권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혹시라도 잘못된 판결로 억울하게 사형수가 된 건 아닌지. 웃으면서 읽었는데, 추리 소설이 아닌가 싶을 만큼 반전이 있고, 대한민국의 현실과도 맞닿은 이야기에 더 어려웠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죽음에서까지 쓸모를 찾는 등장인물들에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이기심이 그대로 담긴 것 같아서 서늘했다. 사형제도의 존폐를 따지는 것 역시 각자의 이익을 계산하며 이뤄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절대 가볍지 않은 주제로 소설을 즐기게 하면서 상당히 깊은 고민을 남기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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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지 마라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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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도 더 전의 이야기니까, 요즘의 대학 생활과 비교할 바는 못 되겠지만, 학자금 대출을 모르고 졸업을 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해서 등록금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닌 것도 아니고, 공부를 너무 잘해서 장학금을 받은 것도 아니다. 어쩌다 보니 좋은 조건을 이용하게 되어, 어느 정도의 학점만 유지하면 안심하고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후에 시작되는 거라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또 그다음의 인생 문제를 해결하며 사는 것만 걱정하면 되는 거로 생각했다. 그것마저도 쉽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청춘을 보면 나도 모르게 걱정의 마음으로 보게 된다. 내가 여유로우면서 던지는 시선이 아니라, 그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막막함에 더해진 무언가가 더 삶을 힘들게만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당장 가까이 있는 큰조카만 봐도 그랬다. 자세하게 몰랐는데, 이미 학기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았고, 학생이면서 채무자 신분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거다. 졸업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채무자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고단함도 감당해야 한다. 생각하고 계획한 그대로 다 잘 된다면 다행인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 취직도 어렵고, 일하면서 돈 모으기도 간단하지 않다. 중년도, 노인도 힘들지만, 청년도, 힘든 세상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도 다르지 않았다. 이 청춘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 한가득 마음으로 읽게 된다. 두 주인공 정용과 진만은 지방 사립대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도 그들의 취업은 진행 중이다. 저렴한 월세를 구하고 둘이 함께 산다.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선택한 방법인데, 나는 이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의 끝이 좋은 걸 거의 못 봤기에. 함께 살기 시작한 둘은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편의점, 고속도로휴게소, 출장 뷔페, 택배 상하차 등 돈이 되는 일은 무조건 했다. 한겨울의 추위를 이기려고 팬티스타킹을 입어가면서 말이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사는데, 그럼 이들 앞의 세상이 조금은 살기 괜찮아져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그들은 그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20대일 뿐이고, 언제나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삶을 버티는 이들을 볼 때마다 울컥해지고, 때로는 수치심도 느낀다. 이렇게까지 악다구니 써가며, 비난의 시선을 받아내며 살아가야만 하는가 싶은 마음. 읽는 나도 이들의 하루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몰입감이 상당한 소설이다. 슬프고, 애틋하고, 한숨이 나고, 한때 나도 엄마에게 할 소리 못 할 소리 했던 것도 기억나고. 부모가 무엇을 물려주느냐에 따라 자식 인생도 정해질 수밖에 없다고 따지듯 말한 적이 있다. 부가 부를 낳고, 가난이 가난을 낳고. 복권에라도 당첨되지 않는 한 인생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니, 그저 별일 없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긴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정용과 진만이었다. 특히 진만은 좀 어리숙해 보이고, 마음이 여리기까지 하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무슨 오지랖인가 싶을 정도로 타인의 문제에 잘 빠져든다. 단순히 공감 능력이라고 하기에는 진만의 현실이 너무 심각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정용은 진만과 그런 면에서 좀 다른데, 그게 두 사람의 동거 생활의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진만을 보면서 답답했던 마음이 터져버리고 진만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게 된다. 그 길로 사라진 진만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진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마주한 진만의 소식에 놀란다.


나도 놀랐다.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하기도 했지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니겠지 하는 기대로 진만의 소식을 나도 정용만큼이나 기다렸다. 현실이 팍팍하지만, 몇 년을 함께 산 친구에게 아픈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털어내고 돌아올 거로 믿었다. 매번 두루뭉술, 속 좋은 사람처럼 행동했던 진만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잠깐 바람 쐬면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진만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네. 여전히 진만에게 현실은 고단했고, 무엇이든 하면서 일상을 유지하는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러려면 뭐든지 해야 했다는 거. 그것 말고는 남은 게 없었다.


이들의 슬픔마저도 웃으면서 읽게 하는 재주를 가진 작가이지만, 그래도 마냥 웃음만을 선사하지 않았다. 작가가 그려낸 웃음 속에 진득하게 가라앉아 있던 현실의 무게감이 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한 게 아닐까 싶었다. 혼자 키득거리면서 이 소설을 읽었지만, 아무리 해도 벅찬 현실이 지워지지 않았다. 때로는 간신히 버틸 수밖에 없는 날들,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그려지는 문장 속에서도 드러나는 건, 정용과 진만이 함께 했을 때 튀어나오는 웃음이었다. 무슨 만담을 주고받듯, 각박한 일상에서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을 수도 있구나 싶은 안도. 그러네, 둘이 함께였을 때 더 잘 살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믿음 같은 거였나 보다. 혼자서는 한없이 어렵고 엄두도 내지 못할 날들이, 둘이어서 그렇게라도 살아갈 수 있었던 듯하다. 크게 바라는 것 없었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갈 날들에 필요한 가장 중요했던 거 하나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날들이었다고 말이다.


작가가 아무리 소설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고 해도, 현실의 막막함과 불평등을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태어난 순간 이미 결정된 것만 같은 불평등의 시작이 참 우울하기도 하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부러운 것도 많고, 노력하면 바뀔 것 같은 기대도 하지만, 사실 뭐 그렇게 큰 기대가 되지도 않는다. 이만큼 살아오면서 보고 느낀 게 삶의 진리 같다는 생각이 진해서. 그래서 더 생각이 많아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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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방 안에는? 타인의 취향 2
이주미 지음 / 씨드북(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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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만큼이나 주제가 너무 귀여워서 호기심이 생기는 그림책이다. 누군가의 가방 안에 담긴 것들로, 그 사람의 하루를, 그 사람의 관심을 알 수 있다는 게 재밌다. 언젠가 지인의 가방 안에서 쏟아지는 물건들로 놀란 적이 있다. 반짇고리, 손톱깎이, 수건 등 평소 사람들의 가방 안에서 보기 어려운 물건들이 가득했다. 어쩌자고 가방 무겁게 이런 것들을 다 가지고 다니냐고 물었더니, 혹시 밖에 있을 때 필요할까 봐서 가지고 다닌다나. 갑자기 바지나 셔츠 단추가 떨어졌다거나, 깜빡하고 손톱 정리를 못 해서 지저분해 보일까 봐. ,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실과 바늘, 손톱깎이까지 가지고 다니는 사람 흔하게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순간적으로 놀라기는 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가방 안을 채우고, 자기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다니기 마련이다. 그게 무엇이든, 내가 필요하고 관심 있으면 된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내 가방 안이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넣을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까 말이다.


주인공 소년에게 새 가방이 생겼다. 자기 가방 안에 무엇을 넣을까 고민하던 차에, 다른 사람들은 가방에 무엇을 넣고 다니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동생의 가방 안에는 유치원 원아 수첩, 애착 인형, 물통 같은 유치원에 가져가야 할 게 담겨 있다. 엄마의 가방 안에는 사원증, 태블릿, 텀블러, 화장품 파우치 등 회사에서의 하루가 그대로 보였다. 담임 선생님의 가방 안은 하트 사랑이 넘쳤다. 열쇠고리, 안경, 다이어리 등 모든 게 하트 모양이다. 태권도 사범님의 가방 안에는 태권도복, 파스, 달콤한 간식이 있다. 열심히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에게 주려고 간식까지 넣어서 다니시나? 겉모습만 보면 호랑이처럼 무섭게 생겼는데, 의외의 면이 있다.


누군가의 가방 안을 들여다보면서 알게 되는 건,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것 정도? 털털해 보이는 사람의 가방 안에 의외로 필요한 소지품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담겨 있다거나, 화난 표정으로 다니시는 할아버지 가방 안에 길고양이 간식이 들어 있다거나 하는. 누군가의 다른 모습을 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관심이나 직업, 성격이나 생활의 단면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많은 사람의 다양한 면을 확인하는 시간이었고, 사람마다 가지는 하루의 모습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안에서 나만의 하루와 취향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는 건 당연하다. ^^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다양한 용도의 가방이 등장한다. 커다란 여행용 가방, 어르신의 허리에 찬 힙색, 털실로 짠 가방, 손수레형 장바구니 등 그 크기나 용도가 다양하다. 이 가방들은 저마다 자기 용도에 맞게 쓰이고 있고, 그렇게 사용하는 이의 하루를, 삶을 엿볼 수 있다. 나에게도 있고, 필요할 때 적절하게 사용하는 가방들이라 새삼스럽지 않다. 집안의 구석에 박혀 있는 여행용 가방, 어깨가 무겁다며 메고 다니던 크로스백, 얼마 전까지 뭘 배운다며 등에 메고 다녔던 백팩, 몇 개의 손가방, 뚜벅이라 장을 볼 때나 쓰레기 버릴 때 꺼내곤 하는 접이식 폴딩 카트 등. 짐 늘어나는 거 싫다며 최소한의 것만으로 생활하자고 다짐했는데, 말하면서 보니 내 가방의 종류도 다양하긴 하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작은 가방을 가지고 다니지 못한다. 작고 귀여운, 딱 카드지갑이나 휴대폰 정도만 들어갈 것 같은 가방이 얼마나 많은가. 예쁜 원피스 입고 앙증맞은 그런 가방 하나 딱 챙겨 들면 귀염 폭발이겠지만(미안, 내 덩치나 외모는 귀염 폭발 절대 안 되니까 이런 상상이라도. ㅠㅠ), 그렇게 들고 나가면 불안해서 잠시도 밖에 있기가 어렵다. 언제나 내 가방 안에는, 지갑, 휴대폰, 화장지(밖에서 급한 일 생길까 봐), 화장품 파우치(화장 안 해도 들고 나감), 간단한 필기도구(뭘 쓸 일이 없는데도 챙김), 작은 생수 한 병(진짜 나이 들었나 봐, 자꾸 목이 말라), 그리고 제대로 읽지도 못할 책 한 권. 대충 챙긴 것만 이 정도다. 여기에 그때의 외출 목적에 따라 챙길 게 더 늘어나기도 하니, 내 가방 크기가 어때야 할지 상상이 되려나? 이러다가 정말 장바구니 캐리어를 끌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루를 채우는 사람들의 가방 속 물건들과 다양한 가방의 역할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이야기다. 주인공의 가방 안에는 꼬마 탐정의 추리 도구가 가득하다. 아마도 이 아이는 주변의 많은 것에 호기심이 많은 것 같다. 이 꼬마 탐정 덕분에 나도 타인의 가방 속 일상과 호기심을 즐기는 시간이었다. 이미 내 가방 안에 가득한 것들 말고도, 또 무엇을 채울 수 있을지, 채우고 싶은지 상상하는 고민까지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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