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아내
A.S.A. 해리슨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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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조디는 남편의 바람을 알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다고 표시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남편 토드 역시 아내가 자기의 바람을 알고 있다는 걸 인지한다. 그렇다고 바람을 멈추지도 않는다. 그저 각자의 어떤 생각 때문인지 현재의 상태를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냥 지금 이대로 흘러가게 놔둘 뿐이다. 조디가 바라는 건 현재의 평온한 삶이고, 토드 역시 조디의 평온을 망치지만 않으면 이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으니 나쁠 게 없다. 하지만 평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토드의 바람이 조디의 평온을 깨트리는 순간이 왔다. 조디가 간절히 바라던 안정적인 삶이 더는 계속될 수 없게 되었다. 무난히 흘러가기만 한다면, 조용히 이 삶이 유지되기만 한다면 더는 바랄 게 없던 조디는 이제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야만 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설은 아내 조디와 남편 토드의 시선을 교차로 보여준다. 같은 상황 다른 느낌. 우리가 언제나 경계하고 들어야 할 상대의 마음이 아닐까 싶은 진심을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아내인 조디가 바라보는 가정의 모습과 남편인 토드가 유지하는 가정 안에서 개인의 삶이 하나인 듯 아닌 듯 애매하다. 이렇게 유지하는 게 부부의 삶일까? 우리가 아는 가족, 가정이란 게 이런 모습이 맞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처음 조디와 토드의 마음이 하나씩 비출 때마다 의아하면서도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누구나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 각자가 바라는 최선의 선택이 다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정상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부르는 부부의 모습이 꼭 한 가지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바라보면 조디와 토드의 관계가 틀린 것은 아니다. 이대로 유지만 된다면 굳이 나쁜 결말도 아닌 채로, 그들의 진심은 누구나 들을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부부의 모습으로 그들의 관계를 끝까지 보여줄 수 있었으리라.

 

조디는 왜 토드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화내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을까? 이 부분이 정말 궁금했다.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누군가의 모습, 특히 나를 기만하고 부부의 약속을 배신하는 행위를 한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하지만 조디가 토드를 바라보는 시선은 약간 달랐나 보다.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심리상담사인 조디는 토드를 좀 더 전문가의 시선으로 봐왔던 듯하다. 토드는 현재 자기에게 닥친 문제를 있는 그대로, 혹은 심각한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축소하여 생각하곤 했다. 어머니와 자기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편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특히 자기 어머니에 관해 애착이 심했다. 그래서일까, 보이는 모든 여성에게 성적 욕망을 가진다. 실제 자기의 모습과 상태보다 과장해서 스스로 판단하는 토드의 어리석음과 그런 토드를 바라보는 조디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묘사된다. 그렇게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 특히 토드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서 완벽하다고 생각할 텐데, 정작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웃기고 황당한 상황 같은 거 말이다. 그에 반해 조디의 침묵 역시 궁금했다. 조디는 단지 평온한 일상 한 가지 때문에 토드의 행동을 모른 척하면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일까? 어떤 마음이어야 그런 대응이 가능할까? 이상하게도, 읽으면서 조디의 태도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토드의 배신으로 변한 조디가 오히려 편하게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한 여자의 심경 변화에 공감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바라는 삶이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가 바라는 방향으로 삶이 흐르기를 바란다. 침묵을 깨기로 한 조디의 선택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말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던 아내가 칼을 들고 상대를 겨누기 시작한다. 왜? 이 끔찍한 배신은 더는 참을 수 없는 게 인간이니까. 그동안 참아주고 침묵했던 조디의 노력을 깡그리 무시한 토드의 행동이 더는 그 참을성과 침묵을 유지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준다. 그때부터 조디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든다. 어떻게? 역시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동안 해왔던 대로, 조용하고 간결하게, 의외의 타이밍에 완벽한 결과를 얻기까지 하는 운까지 따라주는 행운의 여신으로 변신한다.

 

분노의 방식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궁금증으로 끝까지 읽게 되는 소설이다. 물론 조용히 참는 아내와 그런 아내의 진실을 알면서도 무시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진행하는 남편의 배신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싶은 호기심에서, 결국 터져버릴 게 터지고 나니 이제는 이 싸움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하는 시선으로 지켜보게 된다. 인과응보처럼 배신의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20년을 한집에서 따로 인생을 살아왔던 두 사람의 모습으로 계속 가게 될 것인가 하는 결말을 보고 싶어서. 그리고 여전히 선택에 관한 고민은 계속된다. 나는 조디처럼 평온을 위해 배우자의 배신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배신을 알게 된 순간 바로 드러내서 해결을 보고 싶을까. 어쨌든, 적어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토드를 응원한 적도, 토드의 바람을 이해한 적도 없다. 서로 합의하고 유지하는 관계를 일방적으로 깨트린 그를, 그런데도 일말의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가 맞이하게 될 결말만이 궁금했을 뿐이다.

 

읽는 내내 조디의 심리를 따라가게 되는데, 예상하지 못한 순간을 맞이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감정 변화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고 싶은데 어렵고, 결국 더는 내가 잃을 게 없다고 여기게 되는 순간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그게 꼭 인생의 정답은 아니겠지만,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만 문제가 끝나는 운명이니까. 어렵게 침묵을 깨고 부딪치는 일상의 벽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 궁금하다. 잔잔하게 시작되었다가, 커다란 해일을 일으키는 이야기였다가, 밀실 추리소설처럼 한 사람만이 알게 되는 긴장된 결말로 보이는 다양성까지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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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악센트
마쓰우라 야타로 지음, 서라미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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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본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눈에 봐서는 보이지 않는, 숨어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멋진 것이나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발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눈을 돌리고 싶은 거나 아름답지 않은 수많은 것 안에도 어딘가에 반짝이는 빛이 깃들어 있다. 나는 그런 믿음으로, 선입관에 얽매이지 않고 결코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128~129페이지)

 

매일 보던,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장면들에서 찾아오는 어떤 느낌이 있다. 때로 그런 느낌들은 삶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고, 생각의 변화를 만들기도 한다. 오늘을 바라보는 작은 지침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렇게 일상을 채우는,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되는 순간들은 예고 없이 무심한 듯 찾아온다는 거다. 계획하지 않았던 순간에, 무심코 바라보던 작은 꽃잎 하나에서 일상의 생각들이 피어나는 일들. 낯설지 않은 경험이지 않은가? 저자가 조그맣게 얘기하듯 들려주는 일상의 단편들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어제의 경험과 오늘의 시선이 만들어낸, 인생의 작은 지침들이 쌓이는 순간을 만든다.

 

처음 만난 작가다. 그렇다고 낯설거나 어색하지도 않다. 오히려 친근한 말투에,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건네듯 말하는 문장들이 여자들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수다를 떠는 기분에 가깝다. (실제로 저자가 여성인 줄 알았다가 남성인 것을 확인하고 ‘깜놀’했다는 건 안 비밀) 수다를 떤다고 하면 시간 낭비하는 것으로 여기기 쉬운데, 오히려 이 짧은 글들 속에서 인생의 작은 지침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만날 수 있으면 만나고 싶다.”는 말을 좋아한다.

무척 근사한 말이다. 직접적으로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부끄러우니 한 번 에두른다고 할까. 조금 물러나서 “혹시 만날 수 있으면 꼭 만나자.”라는 마음을 담아 쓰는 말이다.

(중략)

그런데 이 말의 본질은 “당신이 좋으니 만나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어떤가? 그런 식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연애 감정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좋아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92~93페이지)

 

그 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좋게 생각하면 좋은 기억으로, 나쁘게 생각하면 나쁜 기억으로. 하지만 좋은 느낌이 계속 전달되기를 바라는 건 나뿐이 아닐 터. 저자의 저 문장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묻는다. 만날 수 있으면 만나고 싶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투자해야 한다. 시간, 마음, 비용 그 이상의 여러 가지. 때로는 물리적인 이유로 만남을 거절해야 하기도 하고, 마음과는 다르게 만남을 성사해야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은근 따라오는 스트레스로 그 대상을 떠올리면 괜한 미움까지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저자는 그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고 보듬어 안는다. 내가 좋으니 만나고 싶다는 의미로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그러네. 내가 싫으면 아무리 일 때문에 만난다고 해도 얼굴에서 표가 날 텐데.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자 한다면, 귀찮거나 불필요하다는 생각보다 만나자는 그 마음을 먼저 생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저자의 말을 들을수록 생기는 의문이 있다. 왜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기 일쑤일까. 뻔한 답일 것 같지만, 아마도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도 그걸 받아들이는 마음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부정의 시선으로 보면 한없이 부정적이다. 저자처럼 긍정의 시선으로 보니 세상 모든 것이 차례대로 진행되는 어떤 일처럼 차근차근 흐르는 느낌이다. 작가의 사인본에, 직접 인쇄된 서명의 편지지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한다. 어떤 값어치의 계산보다 그 선물에 담긴 마음이 먼저 보였기에 그 기쁨을 아는 것이다. 이 선물을 주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을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편지지가 되었으니,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 정도였다는 걸 알게 된 감동 같은 거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감동을 발견한다. 발견하는 것은 감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어떤 시선들을 알아챌 때마다 감동한다. 어떻게 해야 이런 마음으로 일상을 지낼 수 있지? 솔직히 말하면,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상황이나 생각을 먼저 떠올리는 나 같은 사람은 저자의 한없는 긍정과 감동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 긍정의 에너지를 받아 나도 조금은 착하고 좋은 생각을 먼저 하면서 살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를 품어본다. 긍정적인 생각부터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건만, 평소의 습관으로 보면 쉽게 바뀌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기대를 하게 된다. 그만큼 저자의 문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좋은 기운’이 있어서다.

 

이 책으로 나를 만들어가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단조로운 일상에 순간순간 스미는 시선이 어떻게 하루를 변화시키고 삶 전체를 달라지게 할지 궁금해서다. 저자의 모든 것을 그대로 흡수하기는 어렵겠지만, 저자가 보여준 그의 삶의 바탕이 어떻게 일상을 흐르게 하는지 그대로 보여서 무시할 수 없었다. 나 스스로 거는 긍정의 주문이 그동안 내 안에 자리했던 부정의 힘을 밀어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분명하게 삶의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뜻 내 안으로 들이기 싫었던 투정을, 이제는 좀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 반성에 의미를 두고 싶은 글이다. 저자가 말하는 그 경험에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믿는다. 자기가 쌓은 경험만큼 인생을 만드는 건 없다. 이미 알고 있었고, 누군가가 보여준 검증의 순간도 봤다. 그러니 저자의 긍정에너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저자를 통해 일상이 무기력하지 않게, 매 순간 힘을 내게 하는 방법을 더 잘 듣고 싶어진다.

 

무슨 일이든 저마다 ‘알맞게 무르익은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만 맛볼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과 아름다움. 그 순간에 이르러야만 만날 수 있는 뛰어난 품질을 바쁘다는 이유로 멀리하면 안 된다. 결코 안 된다. (중략) ‘알맞게 무르익은 순간’이란 ‘즐거운 순간’이다. 좋은 것보다는 즐거운 것이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고 나는 믿는다. (156페이지)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2년이나 살았다면 당신만 아는 로마의 진면목이나 에피소드가 넘쳐날 텐데 왜 그런 것들을 쓰지 않느냐고. 당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 마음을 열지 않는 한 무엇을 써도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다고.

글쓰기는 괴로운 일이다. 괴로워도 쓰고 싶은 것이 글이다. (38페이지)

 

여행지에서 단골 식당을 만들고, 신발 장인에게 마지막 선물을 받기도 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A 씨를 만나는, 일주일을 준비하려고 일요일마다 셔츠를 다리는 일들. 누군가는 듣고 웃을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는 한없이 진지하고 중요한 일상의 단편들이다. 그런 조각들이 모여 채우는 하루가 인생이 되어간다. 그런 소박함이 우리 삶 곳곳에 있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그게 행복이 아니면 뭐가 행복이란 말인가. 저자는 자기의 그 소박한 조각들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느끼는 행복의 다양함을 증명한 셈이다. 읽으면서 저절로 느낀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그 행복의 기회에서 멀어지지 말라는 메시지에, 행복의 크기보다 행복 그 자체에 의미를 둔 문장들에 조용히 긍정의 끄덕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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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2020-03-1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저도 사소한 일상의 단상들이라고 여기며 읽기 시작했는데 ... 책을 덮고나니 마치 좋은 스승을 만난 기분이었어요.ㅎ 회사 다닐때 이런 상사가 있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싶고...ㅎㅎ 좋은 어른을 만난다는게 이런 일이구나 싶었답니다. 가볍게 시작한 마음과는 다르게 깊게 남은 책이 되었어요.^^

구단씨 2020-03-18 12:22   좋아요 0 | URL
무슨 문장들이... 삶의 문장들 같은 느낌이었네요. ^^
작가가 남자라는 데서 한번 놀랐는데, 어떻게 보면 여학생의 일기 같은 낙서를 훔쳐본 것도 같고... ㅎㅎ
다정하게 들려오는 그 말들이 좋았어요.

노란장미 2020-03-1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ㅎㅎㅎㅎㅎ 여자인줄 알고 한참 읽다가 어느순간 뉘앙스가 이상한 부분이 나와서 검색해보니 남자분이시더라구요. 진짜 엄청 놀랐어요.ㅎㅎㅎㅎ

구단씨 2020-03-18 12:57   좋아요 0 | URL
저도 모르게 글의 분위기만 보고 선입견을 가졌었나 봐요.
이런 경우 몇 번 있기도 했어요. (특히 에세이 만날 때요. ^^)
 
잠자는 미녀들 1
스티븐 킹.오언 킹 지음, 이은선 외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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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염병이 여성에게만 접근한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마음이 들까? 왠지 여자라는 이유로 공격받는 느낌이 들 것 같다. 그리고 이유가 궁금해지겠지. 왜? 왜 어떤 병이 찾아올 때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것일까? 그 원인을 찾고 싶기도 할 것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어하고 싶어지겠지. 스티븐 킹과 그의 아들 오언 킹이 만들어낸 한 편의 소설은, 인간이 맞이할 수도 있는 끔찍한 상황의 두려움과 인간의 기질을 보여줌과 동시에 잔인한 남성들에게 맞선 여성들의 방어가 얼마나 대단해지는지 보여준다.

 

‘오로라 병’이 전 세계를 뒤흔든다. 여성이 잠이 들면, 그 여성은 고치 같은 물질에 뒤덮여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 이 병이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미국의 애팔래치아 산맥에 인접한 소도시 둘링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오로라 병으로 고요했던 마을의 일상은 한 번에 흐트러진다. 모두가 긴장한다. 원인도 알 수 없어서 대책이 없다. 사랑하는 여성들이 잠들고, 잠든 후 둘러싸인 물질을 제거하려고 할 때마다 여성들은 폭력적으로 변하고 주변 사람들을 공격하기까지 한다. 처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병했다고 해서 ‘오스트레일리아 수면병’으로 불리다가,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인 오로라의 이름을 따서 ‘오로라 병’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여성이 잠이 들면 거미줄처럼 얽힌 것이 여성의 몸을 덮어버린다. 이런 현상이 전 세계에서 보이고, 번지는 속도에 비하면 치료법이나 대응 방법은 없이 속수무책이다. 그 어떤 병보다 빠르게 번지는데, 현재로서 오로라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여성이 잠들지 않는 것. 잠들지 않으면 이상한 물질이 여성을 감싸지도 않고, 여성이 폭력적으로 변해 공격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언제까지 잠들지 않고 견딜 수 있단 말인가. 하루 이틀, 짧은 시간의 단편적인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해결책은 아니다. 인간은 활동하고, 먹고, 자고 하는 일상에 익숙해진 존재니까.

 

뭔가 익숙하지 않은가? 갑자기 들이닥친 병으로 일상이 마비됐다. 끔찍한 사건 사고들이 빈번해지고, 이 이상한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여들어 병원은 붐빈다. 아직 발병하지 않거나 잠들지 않아서 병을 겪지 않은 여성들은 이 병에 대비하고자 몸부림친다. 잠들지 않기 위한 약이나 드링크를 사려고 약국을 습격하기도 하는 모습들. 오로라 병에 걸린 여성들을 감싼 물질이 병을 전염시킨다는 누군가의 말에 여성들을 불태워 죽이기도 한다.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 장면이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를 위협하는 ‘코로나19’ 상황과 닮았다. 치료제를 개발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현재 닥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대비해야 하는 사람들. 평소에는 흔하게 있어도 필요성을 잘 몰랐던 마스크를 사기 위해 약국 앞에 줄을 서 있고, 비슷한 증상에 혹시 내가 감염된 게 아닐까 싶어 선별진료소에 달려가기도 하는 사람들. 온갖 가짜 뉴스에 혼란은 가중된다.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에 또 다른 것들이 공격하는 듯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답을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데, 가짜 정보로 그 답을 찾아가는 길은 더 어려워졌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위기에서, 인간을 공포에 밀어 넣는 그 어떤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현재 우리의 상황에 맞춰 일어난 일처럼, 소설은 그 생생함을 더한다. 무엇보다 지금의 위기를 미리 알아챈 것도 아닐 텐데,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의 눈이라도 가졌던 것일까? 상상력으로 시작된 이야기이지만, 이미 상상으로 멈추지 않을 이야기라는 것을 증명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1편은 그 상황의 시작을 보여주고, 집단 발병의 시작과 그 엄청난 공포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주기도 하면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게 한다. 엄청난 몰입을 주는 전개와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 그 갈등 안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욕망은 어디까지일지 궁금하게 한다. 남자와 여자의 성대결이라고 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대조적으로 보이는 모습들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2편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병이 다양하게 진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인간의 적나라한 민낯이 드러날 것 같다. 무엇보다 인간 전체가 아닌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감염병이라는 게 아이러니하고 차별 같지만, 끝까지 지켜보면서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와 가까워지길 바란다. 어쨌든 현재의 대한민국과 전 세계의 위기와 닮은 모습에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이야기다. 스티븐 킹과 그의 아들 오언 킹의 합작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주목받기 쉽겠지만, 이야기의 완성도 역시 뒤지지 않을 듯해서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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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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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할 일이 있어서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지냈다. 여기저기 통화를 하고 틈틈이 문자를 확인하면서 답장을 보냈다. 언어가 없었다면, 언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일상은 어떻게 될까? 인간으로 당연하게 누릴 자유를 억압당하고, 하루에 쓸 수 있는 말을 100단어로 제한당한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 소설 속 여성들의 삶이 마치 언젠가 다른 세대가 겪었던 모습인 것만 같다. 어쩌면 어느 날의 우리가 당하게 될 현실 속 불평등과 불합리 같다. 읽는 내내 손목이 꽉 조일만큼 답답한 가슴의 매클렐런이 된 것만 같았다.

 

 

지금 상황은 이렇다. 우리는 하루에 100단어만 말할 수 있다. 책도 모두 빼앗겼다. 그들은 글자가 있는 모든 것을 책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줄리아 차일드(Julia Child)의 책을 복사한 오래된 원고부터 친구가 장난삼아 결혼 선물로 준 빨간 체크무늬 표지의 낡은 요리책까지, 소니아가 손댈 수 없는 수납장에 갇혀 있다. 분명 내 책들이지만, 나 역시 그 책에 손댈 수 없었다. 패트릭은 마치 운동 기구처럼 수납장 열쇠 외에도 각종 열쇠를 한 덩어리로 묶어 들고 다녔다. (31페이지)

 

여자들은 하루에 100단어만 말할 수 있다. 매클렐런은 결혼한 지 17년 되었고,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다. 남편 패트릭은 좋은 사람이다. 누가 봐도 다정한 가족들이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맞이하는 저녁 식사 자리의 화기애애함이 넘쳐흐른다. 조금 이상한 것 하나만 빼고는. 식탁 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남편과 아들들의 목소리뿐이다. 매클렐런과 딸 소니아는 조용히 식사를 할 뿐이다. 하루에 정해진 100단어가 초과하는 순간, 손목에 달린 카운터에 전기 충격이 가해진다. 카운터의 숫자가 하나씩 더 올라갈 때마다 전기 충격의 강도는 높아진다. 손목에는 화상 자국이 생기고, 심한 경우 기절까지 한다. 그 공포를 아는 매클렐런은 카운터의 숫자가 100에 가까워져 왔다는 걸 알고 말을 아낀다. 딸 소니아는 카운터의 기능과 역할을 잘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는 것. 말을 안 할수록 좋다는 것. 그러니 매클렐런 집의 저녁 식탁 분위기가 어떤지 상상이 되지 않는가? 아들 셋과 남편의 목소리는 자유롭고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한다. 시시콜콜, 미주알고주알. 하루 사용할 단어의 차감에 대해 두려움이 없이 말이다.

 

나라는 '순수'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삶을 정의했다. 하나님 아래 남성, 남성 아래 여성. 순수한 인간이란, 순수한 여성이란 남편의 말에 복종하고,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 살림에 몰두해야 하며, 나쁜 말을 쓰지 않고, 사회에 나오지 않으며, 개인적인 교류나 의사를 나누는 것은 차단해야 한다. 오직 가정 안에서, 남편의 말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게 좋은 거다. 나라는 '순수운동'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여성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남편에게 귀속했다. 남편은 국가가 마련해주는 일을 하고 돈을 번다. 국가는 남성의 모든 것을 관리할 자격을 가졌다. 그리고 국가는 남성이 관리하는 여성의 권리도 가졌다. 여성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저 먹고 싸고 자는, 최소한의 생리현상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여성은 침묵을 지키고 복종하는 존재이다. 만약 우리가 배워야 한다면, 집안의 가장인 남편에게 물어본다. 신이 정해준 남성의 지도력에 여성이 의문을 제기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139페이지)

 

이런 생활을 한 번이라도 상상한 적이 없다. 그러니 이런 나라가 될 거라는 상상도 한 적이 없다. 내가 사는 이곳이, 여성에게 하루 단어 100개만 허락한다면,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 하루만 해도, 아니, 1분 사이에 내가 한 말은 100단어가 넘고도 남는다. 무엇이 여성의 말에 제한을 걸게 했으며,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게 하는지 궁금했다. 소설 속에서는 그 근거가 성경이 된다. 성경 말씀을 근거로 여성이 남성의 갈비뼈 하나로 태어난 것을 강조하면서, 남성의 세상 안에서 여성은 그저 아이를 낳는 생산 도구, 그들의 후손을 번식하거나 일상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에서도 성경을 바탕으로 여성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애를 낳는 도구로만 존재 이유를 주었는데, 그놈의 성경이란 참...)

 

왜 이런 세상이 되었는지 생각하다가, 매클렐런의 친구이자 페미니스트인 재키를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부당함과 부조리함, 잘못된 정치를 향한 쓴소리,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정책과 국가의 의도에 반기를 드는 목소리를 멈추지 않는 그녀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둘로 나뉜다. 저 정도가 뭐 어쨌다고, 아니면 우리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내거나. 재키는 후자였다. 그러다가 실종됐다. 아마 국가의 정책에 반항하고 사람들(여성들)을 선동하는 그녀를 제거해야만 했겠지. 그럼 매클렐런은 어떤 여성이었을까? 처음에는 재키의 행동과 말이 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재키와 함께 목소리를 냈다. 그런 활동이 점점 지쳐갈 무렵, 남편의 걱정스러운 한 마디에 집회 참석을 그만둔다. 그리고 세상은 고요해졌다. 권리를 찾으려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모든 여성의 손목에는 카운터가 채워졌고, 하루 100단어의 카운터가 자정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일하던 여성들의 자리는 사라졌고, 여성들의 돈은 남편의 계좌로 이체된다. 여성의 여권은 소멸하였고, 외국으로 여행도 불가능해졌다. 미래의 어느 날, 미국의 모습이다.

 

매클렐런이 목소리를 내고 해동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는 딸 소니아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의 사랑 로렌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음대로 이혼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세상, 불륜이나 동성애를 저지른 이들에게 가해진 충격적인 형벌의 끔찍함을 알아서다. 무엇보다, 말을 배우고 자기 의견을 말할 줄 알면서 성장해야 할 딸 소니아의 미래가 절망적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소니아는 지금보다 더 억압받는 세상에서, 마치 그런 세상이 당연한 듯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신경과 언어를 연구하는 그녀의 과거 능력이 다시 필요해진 정부가 일시적으로 그녀의 카운터를 해제해주었지만, 그녀는 안다. 이 실험이 끝나면 다시 그녀는 카운터 속에 단어가 갇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끔찍하게도 이 실험의 목적이 그녀가 생각했던 좋은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순간, 더는 참지 못했다. 지금도 부당한 세상, 여성이란 존재에게 생명을 주지 않는 그들만의 낙원을 이제는 끝내야만 했다.

 

목소리를 뺏긴 것뿐이지 않으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소리를 뺏기니 모든 것을 뺏긴 세상이었다.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었다. 무엇이 옳은지 제대로 설명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점점 여성들의 목소리가 아예 사라진,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것이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앞서 만난 같은 주제의 소설들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것만 찾아보려고 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굳이 또 만나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읽다 보니 조금씩 보이는 건, 매클렐런이 지난 이야기를 현재 안에서 하나씩 꺼낼 때마다 등장하는 인물 재키의 말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권리를 주장하고 외쳤다. 틀린 것을 수정하려고 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모이고, 나아가고, 소리쳐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의 삶을 조금씩 파먹으며 묻으려고 하는 국가의 의도를 그녀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싸우다가 목소리를 잃고 삶을 잃었겠지. 소설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재키라는 인물은 어쩌면 이 소설이 존재하기 위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이유, 잘못되어가는 세상을 향한 경고,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 재키가 매클렐런에게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은 아마 이런 말들이었을 것이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로렌조가 말했다. 하지만 내 잘못이 맞다. 다만 내 잘못은 목요일에 모건의 계약서가 서명했을 때 시작된 게 아니다. 20년 전에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투표하지 않았을 때부터.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포스터를 만들거나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고 재키에게 수없이 말했었던 그때부터였다. (348페이지)

 

여성의 목소리가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이들. 환상적이지만, 현실의 한구석도 닮아 있어서 겁이 나는 이야기다. 여성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어린 남자애들까지 노동의 현장에 투입된다. 국가가 보장한 미래를 꿈꾸며 따르지만, 국가는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 세상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이 보장한 미래도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이 억압하고 차별하려는 여성은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똑같은 인간일 뿐인데, 왜 여성을 사회에서 밀어내면서 순수 운운하며 존재하지 않는 인간 취급을 하는지. 어쩌면 그건 여성이나, 여성의 존재와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국가가 말하는 대로 세뇌되어가는 남자들이 적응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여자니까, 여자는' 이런 이유로 거부당하는 일상의 면면에 경종을 울린다. 가상의 세상을 말하고 있지만, 가상의 공간에서만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두렵고 어렵고 무서운 이야기다. 인간이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이유를 한 여성의 간절한 목소리로 대신 전한다. 손목에 채워진 카운터의 빈자리, 전기 충격으로 검게 타버린 늘어진 그 손을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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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ooster 2020-03-09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 가득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구단씨 2020-03-16 20:57   좋아요 1 | URL
이 책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내용이 훨씬 좋았어요. 재미도 있었고요. ^^

2020-03-09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9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애비로드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2
최예지 지음, 살구 그림 / 폴앤니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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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이해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왜?’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고 싶을 때마다 우리는 투쟁의 길을 걷기도 한다. 하지만 투쟁이든 아니든, 답을 찾든 못 찾든, 그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곧 다시 답을 찾으러 떠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 순간의 답에 만족하면서 또 오늘을 사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저자가 써 내려간 이야기들에서, 또 한 번 그 세상 속 우리의 모습을 본다. ‘왜?’라고 묻고 싶은 순간에서 파생한 또 다른 감정을 만난다. 때로는 답을 찾는 것보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바라는 순간을 만나기도 하니까 말이다.

 

너는 이게 재밌니, 언젠가 영이 물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내키는 대로 죽죽 그어놓은 길 위를 너는 그냥 달리기만 할 뿐인데, 했다. 영에게 되묻고 싶었다. 너는 그게 재밌니, 이탈하는 게, 이탈을 감수하는 게, 포장도 안 된 허공 위를 덜컹거리며 쏘다닐 뿐인 네 인생이. 나는 중심으로, 중심으로 가고 너는 자꾸 바깥으로, 바깥으로 가겠지.

갑자기 영이 내게 말을 건다.

정말로 갈 수 있을 것 같니?

안쪽으로? (70~71페이지)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결국 물었지만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애비로드」의 화자는 미혼부인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다. 미혼부와 사생아 사이에서 채워질 엄마의 존재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확실히 모른다는 엄마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엄마가 누구인지 묻는 딸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엄마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니가 내 씨인 건 확실하다고. 엉뚱한 그 대답에 웃음이 났는데, 생각해보니 아버지 말이 틀린 것도 아니더라. 정확히 알 수 없는 엄마의 존재를 애써 확인하려는 것보다, 확실한 것만 받아들여도 괜찮지 않을까? 하나라도 옆에 있는 존재를 더 아끼고 사랑하면,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은 나쁘지 않으니까. 다 알지 못했던 아버지에 관해 알아가는 미세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단편이었다. 세상의 많은 미혼모 사이에 있을 미혼부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 세상은 완벽하지 못한 존재들이 더 많은 곳이니까.

 

세상의 불합리에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그 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안으로 숨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공과 영의 생존법」의 공은 영의 사망 소식에 둘 사이의 일을 기억해낸다. 근무지에서 성희롱을 일삼는 대상을 함부로 신고하지도 공을 대신해서 같은 곳에서 근무하던 영이 대신 나선다. 하지만 그 일을 공은 영이 죽은 후에 알게 된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기엔 묘한 기류가 흐른다.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겪어야 할 또 다른 피해가 그 목소리의 힘을 뺀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건 아마도」의 두 존재 역시 비슷한 구도였다. 한 사람은 대학가에서 다단계로 화장품을 팔려고 하고, 한 사람은 꾸미고 가꿔야만 하는 여성의 역할을 버려야 한다고 투쟁한다. 대립하듯 역할이 다른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그때도 지금도 두 사람은 다른 성향의 태도로 살아간다.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숨죽인 채로 세상에 스며들거나 여전히 불합리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거나.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틀린 인생은 아닐 테다. 하지만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더는 그 불합리한 세상에 스며들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일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 번에 바뀔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또 언젠가 그 변화를 바라면서 투쟁하고 목소리를 낸다.

 

묘하고 애매한 사이에서 분명한 관계의 이름을 찾지 못한 「넌 항상 바깥에 있고」에서는 그 관계를 정의하지 못한 여운에 뭔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 「드라이브, 드라이브」는 정리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헤어졌지만 제대로 헤어지지 못하고, 결국은 그 흔적을 하나 끌어와서 미련을 끊어내야 하는 건 아닐까 기대한다. 동생의 ‘같은 자전거가 아니’라는 말은, 새것으로 예전 것의 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손때 묻은 것으로 채우고 싶다는 바람이기도 하다. 새것과 친해지고 적응해가는 과정이 필요한 게 인간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누구든 무엇이든, 관계를 맺고 적응해가는 게 순리 같다. 「딸과 여신과 아이돌의 역사」와 「당신을 위한 스물한 번」은 묘하게 대조적이다. 가까이하려고 했더니 너무 가까워진 선에 부담과 짜증이 일어나기도 하고, 가까이 있을 때는 경쟁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을 거리가 생기니 발견하기도 한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안 되기도 한다. 저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의외로 문제 해결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는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렇게라도 나아갈 수 있음에 긍정의 힘을 얻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행복일지도, 그렇게 살아가는 게 즐거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 나아가고 있다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식이니까. 그러면서도 조금씩 옆을, 뒤를 보면서 세상을 바꾸려고 애쓴다.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박혜진이 말한 것처럼, 내가 바뀌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세상이 이상하게 변해가는 속도를 늦추기도 한다. 누군가 외치고 투쟁하면서 노력하는 삶은 그런 것일 테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자기만의 태도로 살아가면서, 소박하게 변화를 이루어가는 사람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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