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cm 선인장
밀밭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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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집 'Song'의 친절한 사장님 송지우양과 19금 웹툰의 최강자 까칠한 권도진의 알콩달콩한 사랑 성공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꽃집의 화초들을 쓸어가는 남자가 수상하다. 말도 없고 계속 화분을 사 가는 의미도 모르겠고, 하지만 손님이니 친절하게 대하며 응대하긴 하는데... 지우가 보기에 이 남자 권도진은 수상하다. 그것도 엄청나게~ 수상하다. 자기 손을 떠나 수상한 이 남자에게 팔려간 아이들은 무사히 잘 자라고 있을까? 성실하게 화분을 관리할 것 같진 않은데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외모는 출중하나 표정은 말도 걸지 말라는 듯하니 어쩔 수 없었다. 침묵할 수밖에. 그런데 이 남자가 갑자기 A/S를 요구한다. 그동안 사들인 화분 80개의 생명이 위태롭단다. 도대체 어떻게 보살폈기에 그렇단 말인가?! 뻔뻔하게도 제품 불량 운운하며 사후관리를 언급하는 이 남자가 영 밥맛이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의 생명이 우선이었던 지우는 별다른 생각 없이 도진의 집에 방문한다. 거기서 본 아이들의 자태는, 헉...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이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주기적으로 도전의 집을 찾아가는 지우가 도진의 홈그라운드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는지...

 

남주인공 권도진을 떠올리면서 방 한 칸에 칩거하듯 들어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남자를 상상했다. 뭔가에 몰입하면 며칠을 굶어도 배고픈 줄도 모를 집중력을 발휘하는 사람. 물론 그가 그리는 웹툰은 연재해야 하니 마감도 지켜야겠기에 먹는 일보다 시간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내 눈엔 뭔가에 빠져든 것처럼 집중하는 그 뒷모습이 먼저 보인다. 일이니까 당연히 해야 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몰입을 보고 있는 듯하다. 스토리를 짜고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의 열정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그런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악플이 무슨 힘을 발휘할까 싶었는데, 그도 사람인지라 남들이 만들어내는 의미 없는 말들에 상처받고 있었다. 그때 짠~하고 나타난, 꿀 탄 흰 우유 한 잔. 담백하고 달콤한 맛이 주는 위로에 푹 빠져 그녀를 잡아먹기로 한다. ㅎㅎ

 

소설 속 주인공은 두 명인데, 이상하게도 여주인공 송지우보다 남주인공 권도진에게 시선이 쏠린다. 소개글을 보고, 외모부터 출중한 남자가 19금 웹툰의 작가라는 게 어떻게 비칠까 염려했는데 큰 거부감 없이 와 닿는다. 그냥 그림이 좋아서 그렸고, 그쪽 방면에 뛰어난 재능이 보여 업으로 삼은 것뿐이다. 그런데 왜 세상은,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을 그냥 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건지... 온라인 한 번만 열면 쉽게 주문하고 배송되고, 많은 정보가 넘쳐나고, 내가 관심 두는 것들을 금방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런 세상이 올까 싶었는데 정말 오고야 말았다. 인간의 편리한 생활을 도모하는 것이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때 발생하는 위험을 미처 몰랐을 뿐. 그 위험을 장난삼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는(?)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주고 있는지 알까? 한번 툭 던져놓고, 아님 말고 하는 식. 난 반댈세~

 

아, 맞다. 이 책을 로설이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내 생각이 자꾸만 삼천포로 빠지려고 한다. 분량과 내용 면에서 즐겁게 읽을 수 있게 해주고 있는데 말이다. 로맨스소설로의 역할과 재미, 우리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에 대한 경각심까지 충분히 주고 있다. 또 한 번 중편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는데, 즐길 수 있는 소설로 딱 알맞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순간과 타이밍의 개연성도 괜찮고, 심각하고 진중한 에피소드에 공감하게 되고, 적당하게 유머러스한 것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게 한다. 특히 권도진의 말발.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말발 좋은 남자는 당할 수가 없다. 비록 그가 나쁜 남자라 할지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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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커버 보스
정이연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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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니 내 옆에 웬 낯선 여자(남자)가 누워 있다?'

솔직히 새로운 설정은 아니다. 이런 에피소드로 시작된 이야기가 신선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짧고 굵다는 건 이 소설을 두고 한 말 같다. ^^ 장편소설 분량을 딱 반토막 낸 분량으로, 해야 할 말만 간단명료하게 적어놓은 듯한 분위기. 군더더기 빼고 느슨해지는 분위기 빼고, 치고 빠지는 기술이라고 해야 할까. 짧은 시간에 좀 더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하여 즐기기에 충분한 소설.

 

오랜만에 한국으로 들어온 강욱의 어느 날 아침. 햇살의 따가움에 잠을 깨고 일어났는데, 자신의 침대에 웬 여자가 누워 있다. 간밤에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원나잇을 즐기는 것도 아닌데 술이 떡이 되어 누워있는 이 여자는 누구인가? 이상한 여자일세. 그게 한번이면 아량을 베풀어 볼만도 하건만, 두 번이나 반복되는 건 또 뭔가. 도대체 이 여자가 자신의 집에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몰라 신경이 거슬리던 사이, 여자의 가방 속에서 신원을 확인한다. 희미하게 웃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리고 여자의 약점(?)을 쥐고 거래를 한다. '너 나한테 빚 졌다!'

 

얼마 후, 강욱과 여자는 태용건설에서 재회한다. 여자는 신입사원 강욱의 상사 김수현. 외모 멀쩡하고 일 끝내주게 잘하는데 워커홀릭이다. 자신의 침대 위에서 본 여자와 회사에서 마주한 여자의 이미지가 다르다. 이 여자, 뭘까? 시건방진 캐릭터 그대로 강욱은 느물느물 자신감 넘치는 신입으로 수현을 대하고, 겉으로 단단하게 보이는 수현은 강욱의 놀림 같은 관심에 공격당한다.

 

실실 쪼개며 속을 끓게 만드는 남자의 매력이 상큼하다. 딱 눈길이 가게 만들어졌다고 해야 하나. 까칠한 듯하면서 말랑말랑한 마음을 갖고 사는 매력덩어리를 그대로 심어놓은 것처럼, 얄미운데 딱밤보다는 괜히 옆구리를 찔러주고 싶은? 뭐, 좋다는 얘기지. ^^ 그런 강욱이 자신의 배경을 숨기고, 목적을 두고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였기에 그 사실을 수현이 알게 될 때를 대비해 준비를 한다. 수현에게 향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시간차 계획을 세운다. 두 사람 사이에 알게 모르게 생긴 비밀. 이 잘난 남자가, 자신에게 미친듯 관심을 보이는 남자가, 기껏 신입사원이었던 남자가, 사실은 내가 다니는 회사의 오너일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는 거야?!

 

많은 이들이 가볍게 웃고 즐겼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짧은 후기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마적 분위기가 충분히, 보편적으로 즐길 수 있게 한다. 장편과 단편 그 사이의 장점을 살려 짧고 굵게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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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s, Let us
이유진 지음 / 이가서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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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터스 렛 어스』 편지, 음악 그리고 우리...

 

 

나는 아침형 인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는 잠을 자고... 가능하면 자정을 넘기지 않고 잠이 들 수 있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했으니, 그런 패턴으로 도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흐름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에는 일어나는데, 밤에는 잠드는 시간이 들쑥날쑥. 때로는 잠깐 자고 일어나고 다시 또 잠깐 자고 일어나는 초저녁부터의 조각잠. 그러다 심해지면 병처럼 찾아오는 불면증, 폭식하듯 잠을 자기도 하고, 하룻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고. 가능하면 처방 받은 수면제를 먹지 않고 순전히 내 의지로 건너가고 싶은 시간들이었다. 때로는 그런 방법이 통하기도 하고 통하지 않기도 하고. 결론은 잠이 오면 잠을 자고, 잠이 오지 않으면 잠들지 않는 것. 그것 밖에는 없다. 그럼 문제는 잠들지 못하는 시간들에 관한 것...

 

그래서 이들의 금요일, 새벽 3시, 음악과 편지로 풀어내는 그리움에 동참하려 한다.

모두가 잠이 드는 밤이라는 시간에 잠들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음악과 편지와 함께 찾아오는 이들이었다. 그 묘한 매력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독자)도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보내는 이가 의도하지 않아도 전파 타고 날아와 가슴에 저절로 박히는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한밤중-새벽이라도-의 라디오가 주는 그 매력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해 가고, 곧 동이 터 아침이 되려고 하는 시간에도 분명 누군가는 듣고 있을 것만 같다. 수줍게 문자를 찍어 신청곡을 보내면서, “나 지금, 여기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어요.” 라고 신호를 보낸다.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 음악이 지금 듣고 싶어요.” 라고 말하면서 답을 하기도 한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가 다른 공간에서, 누군가는 말하고 누군가는 듣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고요해지는 그 시간에도 누군가는 듣고 있을 그 목소리, 그 이야기들, 그 음악들은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그래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까지 하고 싶어질 만큼의 간절함이다.

 

"밤에 글을 쓰고, 밤에 음악을 하는 건, 유난히 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차마 낮에는 할 수 없었던 그 말들을, 그 마음을 혼자 있는 밤에만 슬쩍 꺼내보는 것 아닐까요? 그 마음만큼, 그 시간만큼...... 쌓여있는 편지들을 보내주세요."

 

금요일의 새벽 3시 라디오부스 안, Letters 코너가 시작된다. 누군가가 쓰는 편지를 읽어주고 그가 선곡한 음악이 함께 한다. 그 편지와 음악으로 가슴이 설레고 떨릴, 혹은 아련할 누군가를 위해서... 음악을 만드는 그 남자 해수는 폭이 넓은 치마를 입고 가던 그녀를 그곳에서 다시 만난다. “난, 안 돼.” 라고 말하면서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하는 말을 듣는다. ‘괜찮을 거야...’

한 시간의 사랑을 위해서 연필로 편지를 쓰는 그 여자, 현진. 시작 시간과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시간이 정해져있는 영화라고 해도 괜찮다 생각했다. "싫어." 라고 말하는 그 남자가 그래서 좋다. 자신의 차가운 손을 따뜻한 손으로 감싸줄 줄 아는 그 남자가, 자신과의 만남을 바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좋단다. 좋으면 된 거지.

 

“해수씨도, 그런 사람 있어요? 생각 안하려고 하는데, 자꾸 생각나서 에이, 그냥 생각하자 하는 사람.”

“있어요. 있는 것 같아.”

 

지금은 서로를 바라보는 상대방의 그, 혹은 그녀가 있음에도 그들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자 한다. 현진은 해수의 그녀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 해수는 현진의 그에게 나쁜 사람이 된다. 잠깐은, 아주 잠깐은 괜찮을 거라고 서로에게 위로를 하면서. 현진의 차가운 손과 발은 따뜻해지고, 해수의 건조함은 사랑을 배우고, 그러면 될 것 같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서로에게 이별까지 배달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거면 된 거다. 그래도 괜찮을 거다...

 

서로가 마주보던 시간을 바람이라 불렀으니,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불륜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수에게는 2년 된 애인이 있고, 현진에게는 결혼하자 말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온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서로에게 '싫다'고, '넌 안 된'다고 하면서도 흘러가는 마음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불안하지만, 그 불안까지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라면 어떨까. 그러면서도 계속되는 그들의 금요일 새벽 3시는, 그래도 사랑일 테다. 한 사람은 편지를 쓰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편지를 읽는다. 그 마음이 어떨까 상상을 해봐도 그들만큼 잘 알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느 가수의 노래 제목처럼, 사랑 그 놈, 참...

 

누군가 나에게 아날로그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나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이기도 하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니었으니까. 세상사에 치여 가면서 가끔은 꼼수도 부리고, 잔머리도 쓰고, 편리한 것들을 찾아다니기도 하지만 이런 면에서는 디지털기기의 편리함보다는 주파수를 맞추어야만 들리는 라디오처럼 아날로그적인 게 좋다. 눈앞에 보이는 현란한 영상이 아닌, 오직 소리로만 들리고 느낄 수 있는 그 감정들은 무어라 설명할 수도 없다. 그저 그게, 라디오의 지독한 매력이라고 할 수밖에. 현진과 해수의 이야기가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었을 텐데 나에게 이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래서일 테지. 라디오가 주는 감성과, 표현하지 못할 마음을 담은 사람들의 마음과, 누군가가 쓴 편지라는 구실로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여서 그런 거라고... 안되는데 하면서도 가끔은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나가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했다. 기침처럼 숨기지도 못하고, 드러난 마음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어서 알아차리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 그래서 현진과 해수가 어설프게나마 드러내는 마음, 다시 주워 담아야만 하는 마음이 안타까운 거다. 

 

프롤로그를 잘 읽고 넘어가야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연결되어지는 책이다. 서로의 진실을 다 드러내지 못해서 오해 아닌 오해를 갖기도 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두 사람의 마음과 태도, 드러내는 행동들이었으니까. 차마 이름을 부를 수 없어서 어깨를 살짝 찔러 부르고,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 수 없어서 주저하다 타이밍을 놓치고, ‘사랑합니다.’ 한 마디에 무너져 내리는 것들. 저절로 불면의 밤을 가져오게 하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면 그게 아닌 게 되어버린다. 현진이 아픈 몸으로 순간 목 놓아 울어버린 마음을 알 것도 같다. 표현하지 못해서 아팠던 거다. 감정을 말할 수 없어서 울음으로 드러낸 거다. 결국은 내민 손을 누군가가 잡아주어야만 멈출 수 있는 눈물이었던 거다. 그렇게 눈물은 멈추었고, 불편한 사랑을 택했던 이들에게 찾아올 것이 그 무엇이라 해도 괜찮았을 거다. 누군가가 만들어줄 새벽 3시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시간으로 바뀌었을 테니...

 

누군가의 마음을 읽어주고, 눈빛만으로 알아주는 오피디가, 나는 정겹다. 좋다. 그런 사람 옆에 한명쯤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새벽 3시의 방송이 쓸쓸한 사람들만 듣는 방송 같아서, 꼭 들을 사람만 들어주는 방송 같아서 멋지다는 사람. 그중에서도 현진을 아주 잘 읽어내는 사람이라서 좋다. 편안했다.

“자기가 정말로 착하거나 후덕하면 내가 이런 말 안하지. 실제로는 딱 잘라 좋아하는 사람 몇 명만 곁에 두고 살면서.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무관심하고 제 취향대로 살그머니 챙겨.”

오피디가 현진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오피디가 어디 숨어서 날 보고 있나?’ 라고 생각할 만큼 현진이란 캐릭터의 묘사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이 책 속의 현진은 나를 많이, 닮았다.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무관심하고, 제 취향대로 살그머니 챙겨... 그렇게 사는 사람 괜찮을까, 싶었는데 오피디의 저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만 같아서...

 

새벽 3시. 자정을 넘어섰지만 아직은 밤,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간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눈을 뜨고 동이 터오는 순간을 기다릴 수도 있는 시간. ‘사랑하오...’ 라는, 희미하지만 듣고야 말았던 그 고백으로 이들이 다시 열어갈 시간이 이어지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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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밤
이아현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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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이름은 옴브레(그림자). 니제르라는 본명을 두고 옴브레라 불린다.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을 드물다. 그 스스로 그 이름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슬픔과 고통의 이름이기에. 마피아의 수족이면서 살인병기로 키워진 그가 어둠의 방에서 새로 태어난다. 빛을 거부하는, 오직 어둠만이 그의 목숨을 이어가는 것만 같다. 웃음을 모르고 온몸은 차가움으로 칠갑한 그는 살아 숨 쉬는 이유 따위 연연하지 않는다. 개 같은 삶을 이어가는 것, 그뿐...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고 여행길에 오른 여자 미우. 가진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만 여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언젠가 그 돈이 다 사라지면 그녀의 목숨도 사라질 거다. 그녀의 바람은 그 정도다. 오직 여행이 끝날 때까지만 목숨을 연명하는 것. 하지만 신은 그녀의 바람을 거부한 듯하다. 사랑을 잘라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그녀에게 선뜻 죽음을 선물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에게 차가운 온기를 건넨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우연처럼 조우한 옴브레와 미우는 오해와 사건으로 함께 한다. 물론 둘 사이에 스파크가 튀는 애정이 생겨서가 아니다. 옴브레가 쫓던 여자의 흔적을 미우가 가지고 있었고, 옴브레는 그저 사라진 여자를 잡기 위해 미우를 감금한 채 붙들고 있다. 딱 거기까지다. 더도 덜도 말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서로를 붙잡고 있으면 된다. 남자는 조직을 뒤통수치고 달아난 여자를 잡기 위해, 여자는 어차피 하는 여행의 연장선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거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재미없다. 이 소설은 예상하는 대로 옴브레와 미우가 서로를 마음에 담는 것까지 이어진다. 다만, 두 사람의 마음이 연결되는 과정에서 보이는 에피소드나 장면들이 섬뜩하리만치 잔인한 게 많다. 인간에 대한 감각을 잃은 듯 마치 살인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마피아 수장의 살인개 노릇을 하는 남자의 마음을 열어보고 싶어진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지, 혹여 다른 목적을 두고 그 시간을 견디는지 궁금했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을 위해 여행길에 올랐는지, 눈앞에 보이는 잔인함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지...

 

살인이 놀이처럼 보이던 남자와 “죽여주세요.” 한 마디가 거침없이 나오던 여자 사이의 기류가 어둡다. 냉랭하다. 온통 어두운 방에서 악몽에 시달리던 남자와 나눠줄 거라고는 손에서 나오는 온기뿐이던 여자가 나누는 게 뭘까 싶었다. 결국 그 모든 것이 사랑으로 귀결된다. 그들이 함께 가는 곳이 정말 지옥이라고 할지라도 함께 가자고 손을 잡았으니, 가야지. 달빛을 달빛으로 보게 하는 눈을 열어주었으니, 누구도 담아본 적 없는 심장에 그녀를 담게 했으니, 가봐야지. 그게 지옥이든, 어디든...

 

상당히 어두운 내용이다. 취향 차이가 있겠지만, 나에겐 읽기가 편하지 않았던 소설이기도 하다. 남자의 위치나 역할이 거부감이 일었던 게 아니고, 장면 묘사가 잔인해서 부담스러웠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사람이 마음을 여는 순간 변할 수 있다고 보여준 건 애틋했다. 인간의 마음이란 그러할 테니.

 

전체적으로 무난히 읽을 수 있으나 개연성이 부족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아니라 좀 불편한 느낌이다. 또한 잔인한 장면들에 거부감이 있다면 망설여질지도 모르겠다. 읽기 어려운 게 아니라 취향 때문인지 선뜻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힘들었다고 해야 하나... 이 소설로 이아현 작가를 두 번째 만났다. 기존 작품들을 다 읽지 못해서 나름 기대감이 컸었던 듯하다. 조금 더 탄탄한 구조로 다음 작품을 만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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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한 사람들만 아는 진실
진양 지음 / 청어람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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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긋고 시작할 수 없는 마음처럼, 마침표도 그렇게... 『이별한 사람들만 아는 진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걸 가지고 애가 탔던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의 애가 탐을 허기지다는 느낌으로 받고는 했었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그립다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누군가가 그러던데. 그런 걸로 보면 가끔은 폭식하듯 채우는 끼니가 그리움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그런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외롭다는 것도, 그립다는 것도 잘 모르고 살았는데... 그런 것을 느낄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져본 적도 없었고, 필요성도 못 느끼고 살아왔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면서 ‘그건 그리움이야.’라고 답을 말해주는 것만 같을 때는 빵점 맞은 시험지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다 틀려서 빗금처럼 그어져 있는 점수표, 오답 노트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처음부터 다시 풀어야 할 문제들을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느낌. 그럼 이럴 때는 시험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배우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럼 절반은 맞을 수 있을까.

 

사랑을 시작할 때, '이때쯤 끝내야겠다.' 마음먹고 시작하는 경우는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굳이 그 유효기간을 계산하지도 않았었고. 누군가를 마음에 담으면 담은 채로, 그러다 어느 날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오면 헤어지는 것으로 한 번의 사랑을 끝내고는 했다. 원래 그런 거라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살아가는 많은 일 앞에서 ‘원래’라는 부사를 붙여서 말을 하고 나면 그게 맞는 것처럼 여겨지고는 했다. 이미 끝난, 아니면 어긋난 많은 일 중에서 유독 사랑이란 것에 ‘원래’라는 말을 붙이기는 싫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말을 붙인다. 그러면 한 번의 웅얼거림은 넘어갈 수 있을 것만 같으니까. 은수와 지후의 일들 앞에서도 나는 내내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했다. 너희의 사랑, 인생, 그리고 또 다른 것들이 찾아오는 이 시간도 원래 그렇게 흘러간다고 말해지고 싶어지고는 했다.

 

서은수와 강지후는 3년 동안 연애를 했다. 어느 날 은수는, 둘 사이의 스파크가 없어서, 시들해진 감정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지후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그놈의 스파크가 없어서 헤어지자 말하는 여자. 반면 제법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남자.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로 비밀연애를 3년이나 했는데, 이젠 그 헤어짐의 다양한 감정들을 표출할 수도 없는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원래 비밀연애는 그런 것이니까. 서로를 끌어안고 자폭할 수 없으니, 서로가 그 공간에서 쿨하게 살아남고자 담백해야 한다. 그들의 이별은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조금의 위로는 날려주고 싶어진다. 사랑이 쿨하지 못한데, 어떻게 이별이 쿨할 테냐.

 

이 나이 정도(?) 살아보니,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었다.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해야 어울릴 듯하다. 물론 그 안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캐릭터들은 소설에서 등장할 수 있는 조연들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이 소설은 현실의 모습을 더 많이 눈에 담게 했다. 두 사람의 이별 순간부터 그려지던 것이 수상하더니, 결국에는 그들의 이별 후 모습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마음을 드러나게 했다.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밀려와 누가 손을 내미는 것도, 누군가는 그 손을 잡는 것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다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다시 만난 적이 없었으니, 지금 은수와 지후의 모습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한, 헤어진 누군가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뒤돌아서서 가느라 그 뒷모습도 안 봤으니 알 턱이 있나. 그땐 그랬다. 알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혹시라도 만나다가 그 마음이 식으면, 싫어지면, 솔직하게 얘기하고 끝내자"

아주 오래전 누군가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연애를 시작한 적이 있다. 연애를 하다 끝이 날 때는, 조용히 연락 끊고 사라지지도 말자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어오면 바람이나 양다리는 허용할 수 없으니, 상대의 가슴에 더 큰 상처를 주지 않게 솔직하게 표현자고. 누군가에게 이별을 먼저 이야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상대를 더 아프게 만드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어디로 숨어버리듯 사라지지도 않았고, 그만이라는 의사표현도 분명히 했고, 누군가를 만나면서 바람이란 것은 허용하지 않았으니 상대에 대한 예의를 다 지켰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헤어지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상대가 다른 이를 좋아해서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헤어지자는 말을 못해 조용히 연락을 끊어버린 적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늘 가슴에 품었던 이별방식은 저런 거였다. 감정에 솔직해지자는 것. 연애라는 이름이 그 어떤 목적지로도 갈 수 있겠지만, 그 목적지가 이별이라면 솔직하게 입 밖으로 꺼내는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고...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은수의 입장을 쉽게 이해했다. 가슴에 스파크가 일지 않아서 이별하자 말하는 은수에게 공감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별의 말을 들었을 지후를 살짝 안타까워하기도 했지만, 누구에게 잘못을 물을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뭔가 부족한 감정들이 싫어서 이별을 얘기해야만 했던 은수도, 스스로의 변화를 조금씩 받아들이면서도 그걸 이별로 연결하지 못한 지후도... 각자의 자리에 있었던 두 사람의 입장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고 이야기한다면 오지랖일까. 아니면 가슴에 불꽃을 피워줄 다른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대해 좋은 점들만 열거해주어야 했을까. 나는 그냥, 내가 많이 느끼지 못했던 그들의 시간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러면서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시간들을 다시 생각했다. 그때 내가 누군가와 헤어졌을 때, 한번쯤 뒤돌아봤으면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두 사람이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사랑을 하는 과정이 보통의 절차라면, 이 이야기는 거꾸로 진행된다. 헤어짐을 말하는 순간 시작된 이야기는, 이제 그 헤어짐 후의 두 사람의 모습을 담으면서 사랑에 대한 많은 생각을 남겨주고 있다. 어떤 노래의 가사처럼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누군가의 감정을 안타깝게 지켜보게도 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은수와 지후, 두 사람의 이별후 마음을 보게 한다. 당사자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알아차리더라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는 것들을 제 3자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으려니, 참... 그래서 소설인가 싶다가도, 바로 며칠 전에 본 누군가를 떠올리면 일상인가 싶기도 하다. 문학이 주는 재미는 여기서 또 한 번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일상이라 부르는 현실을 소설 속에서 발견하게 하는 것. 아니면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일 테고.

 

"처음 사랑이 시작할 때, '아, 사랑이다.' 라고 말을 하고 시작한 건 아니라는 것."

"이별도 똑같지. 입 밖으로 '이별하자' 꺼냈다고 해서, 그게 이별인가." (160페이지)

이것만큼 정석인 말이 있을까. 우리가 사랑을 하기 시작할 때나, 이별을 하게 될 때는, 출발선에 서서 "요이~땅" 하는 신호음과 함께 출발하는 달리기가 아니라는 것. 사랑도, 이별도...

 

몇년 전, 우연히 발견하듯 만났던 이 책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던 그 순간 나만의 베스트셀러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힘든 마음을 힘들다 말하지 못한 때여서, 누군가의 마음을 더 들여다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을 한참을 쥐고 흔들었던 책이었으니까.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힘들었던 게 사랑 때문은 아니지만... 어딘가 깊은 곳으로 뚝 떨어져있는 것 같은 기분에 더 깊은 우물을 파게 하는 책이었다. 사실 이 책 속의 이야기가 그리 심각하게 우울하지도 않았는데. 너무나 닮아있는 우리네 현실 같은 이야기에 깊게 빠지게 되어서라고 하면 핑계가 좀 되려나.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건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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