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폭에 담긴 붉은 그리움
지연희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에 TV 뉴스만 보고 다른 것을 거의 안 봐서 몰랐는데, 주말에 배우 박민영이 나와서 하는 말을 듣고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하는 걸 알았다. 제목이 <7일의 왕비>라고 하던데... 7일? 왕비? 게다가 사극? 감이 오더라. 어떤 소재로 만든 드라마인지 느낌이 왔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자꾸 물음표가 떠다니는데, 나, 이런 소설 얼마 전에 읽은 것 같은데? 뭐였지? 소설 제목을 한참 떠올리면서 드디어 찾아냈다. 지연희의 『치마폭에 담긴 붉은 그리움』이었다. 로맨스소설 좋아하는데도 시대물은 취향에 안 맞아서 잘 못 읽고 있다가, 이 소설 읽고 나서 종종 이런 시대물도 즐길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이와 같은 소재로 드라마가 나온다니 더 궁금해져서 소설을 다시 찾아봤다. (얼핏 살펴보니 드라마는 소설과, 혹은 역사적 사실과 많이 다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들긴 하다만...)

 

임금의 동생으로 대군이라 불리는 역은 유유자적 한가하게 보일 정도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었다. 권력 싸움에 관심도 없었다.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자기가 품은 첫정을 나눈 아내와 백년해로하는 게 유일한 바람인 남자다.

역의 아내 여의는 천방지축이라 불릴 정도로 밝은 성정이다. 아무리 봐도 지고지순한 현모양처의 이미지는 아니다. 바깥바람이 그립고 여기 저기 둘러보면서 살고 싶으면서도, 지아비의 사랑만으로도 하루하루가 행복한 여인이다. 부부인이라 불리는 대군의 아내로서는 불합격일지 몰라도, 역의 아내로는 충분했다. 역의 마음에 들어온,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싶은 유일한 여인이었으니까.

 

소설은 처음부터 부부였던 두 사람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역과 여의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사이다. '아니, 그 시대에 얼굴 한 번 안 보고 혼인하였을 터인데, 이런 분위기가 가능한가?' 싶은 순간에, 역이 아는 어린 여의의 모습이 이야기가 흐르는 중간에 한 번씩 드러난다. 궁 안의 소년이 만났던 어린 소녀, 어차피 왕권과 상관없는 자리이니 이 소녀에게 건넨 손을 붙잡는 것도 괜찮겠지. 그렇게 소년과 소녀는 혼인을 하고 부부가 된다. 물론 여기서 여의는 역의 그런 마음과 과거를 모른다. 그냥 현재의 자기 남편을 아끼고 사랑할 뿐이다. 소박한 일상을 즐기는 여느 부부를 보는 듯했다. 시대가 다를 뿐이지,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잖아. 여염집 아낙의 평범하고 행복한 하루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역은 여의에게 교과서적인 아내상은 바라지 않는다. 완전하게는 아니겠지만 여의가 숨통 열어놓고 활발하게 지내길 바랐다. 그런 둘의 모습이 그동안 그 시대의 여인들에게 강요되었던 분위기가 아니어서 소설이기에 가능한 캐릭터겠지 싶으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사랑이 보고 싶었던 거지, 여의의 행동이나 생각을 문제 삼을 이유는 없으니까. 마치 처음부터 마치 그들 사이의 어떤 방해도 없을 것이라고, 그러니 그들의 집 담 밖의 일들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고, 관심도 없는 일에 시선을 둘 여력이 없다고, 오직 둘만 바라보면서 살이게도 아까운 시간이었던 거다. 어린 소년과 소녀가 우연처럼 만났던 그 잠시의 순간, 손바닥 위의 꽃잎이 날릴 때 바랐던 소원이 이루어져 행복한 남자가 계속 웃을 수 있기를, 읽는 내내 나도 바라게 된다.

 

이런 부부가 있을까? 그 어떤 것도 가로막을 수 없고, 오직 자기 배우자만이 유일한 존재이며, 그 무엇으로도 둘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는 사이. 마음속 간절한 바람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살면서 얼마나 많이 다가올 텐가. 그런 것도 아무런 의미 없다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으니 오직 당신만이 내 옆에 있으면 된다고 여기는 삶. 아름다웠다. 역과 여의의 모습은 어느 부부에게나 이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연회에 참석해도 화려함을 자랑하는 기녀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두는 여러 명의 첩도 역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오직 여의뿐이다. 할 말 다하면서도 수줍어하고, 마음속 바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위험한 줄 몰라 가슴을 철렁하게 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인을 어찌 눈에 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평생 당신만을 보며 살겠다고 다짐하는 역의 시선이 너무 당연해 보여서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자칫 권력에 욕심낼 것도 같은 위치였으나, 그에게는 여의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는 게 그대로 보였으니, 이런 멋진 남자의 사랑이 끝까지 멈추지 않기를 바라면서 읽게 되는데...

 

그들의 사랑은 마냥 행복해 보여서 좋았는데, 어떤 악역도 보이지 않아서 힐링 드라마 같았는데, 잔잔한 물결이 이는 것처럼 흐르는 이야기로 보여서 안심했는데, 이상하게 불안했다. 뭔가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흐르면 그냥 해피엔딩의 행복한 결말일 텐데, 뭔가 자꾸 숨어있는 채로 자기 역할을 소화할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던 거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들에게 혹시 무슨 일이 닥치지 않을까, 어디선가 복병처럼 튀어나온 일이 이들의 사랑을 훼방 놓을까 싶어서 긴장하면서 읽게 된다.

 

읽는 내내, 그렇게 이상했던 부분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아, 이들의 사랑은 끝난 건가? 하는 슬픔이 밀려온다. 본인들은 아니라고 해도 기어코 그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믿음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믿음이 사라지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때문에 결국 밀어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해야만 하는 상황. 알 것 같다. 시대가, 신분이, 자리가 그렇게 만든다. 백성들은 불안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폐위된 어머니의 복수라도 하듯 피바람이 멈출 날이 없었다.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던 사람들이 나라의 안위를 위해 반정을 꿈꿨다. 위기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해줄 현명한 왕을 바란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이 잡을 정권에 세워둘, 반정의 명분을 합당하게 해줄 왕이 필요했던 거다. 역은 그 역할에 안성맞춤처럼 존재했다. 역이 원하지 않아도, 권력의 욕심이 없어도 그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들과 의견을 같이하던지, 반정을 알았으니 죽음을 택하던지. 사실 역에게는 그 무엇도 의미 없다. 그들의 말에 따라도, 따르지 않더라도, 오직 여의의 존재만이 그를 있게 하는 것이므로. 여의만 옆에 함께 한다면 그 어떤 자리라도 개의치 않으리. 그가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여의와 함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역과 여의는 어떻게 되었을까. 둘이 함께 나란히 손잡고 궁으로 들어가 정권의 우두머리가 되었을까? 아니면 그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다며 죽음을 택했을까?

 

계속 슬픈 생각을 하던 차에 읽었기 때문인지, 마냥 고요하게 흐르던 이야기 속에서 내내 슬픔을 느꼈다. 계속 긴장하며 읽었다. 어디선가 기다렸다가 튀어나올 슬픔의 한 조각이 그림 전체를 채울 것 같아서 불안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한 두 사람이다. 그 선택의 결과가 서글펐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순간의 마음이 읽힌다. 현실에서도 그러할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 선택의 강요가 존재할 터였다.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모두가 아프기 마련이다. 누구라도 덜 슬프게, 덜 아프게 하는 선택을 해야 할 터였다.

 

연연불망이라 했다. 연(戀)연(緣)불망(不忘). 잊을 수 없는 그리움, 끝나지 않은 인연. 역과 여의의 사랑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읽는 순간에 따라 매번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그래서 여운이 더 짙어질 지도... 마지막에 뒤돌아서서 가던 여의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역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내내 궁금해하고 있다.

“단언하건대, 제비꽃이 으뜸이었소. 모란도 난초도 곱기는 하나 제비꽃에 비할 수는 없었다오.”

 

실제 역사 속 인물인 중종과 단경왕후를 배경으로 가져왔다고 하지만, 많이 다른 듯하다. 연산군의 폭정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진성대군을 왕으로 이끌면서 기록된 중종반정. 진성대군이 이끌고 원해서 이뤄낸 정권이 아니었기에, 정권을 바꾸겠다는 세력에 끌려온 그가 왕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을 것이다. 허수아비 임금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그가 아내라고 지킬 수 있었을까? 7일 만에 쫓겨난 중전으로 기록된 단경왕후는 연산군의 정비였던 폐비 신씨의 조카였으니, 새로운 정권의 세력들은 단경왕후 역시 폐비가 되어야 한다고 외쳤겠지. 그걸 거부할 힘이 중종에게 있었을까. 그렇게 7일 만에 궁에서 나온 단경왕후는 인왕산 아래의 사직골 옛 거처에서 지냈다고 한다. (검색해서 찾아보니) 부인을 잊을 수 없던 중종은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단경왕후는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바위에 올려두었다고. 그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도 그에게 '나는 잘 지낸다...'는 말을 그렇게 표시한 거 아니었을까. 이 소설은 중종반정이 이뤄지기까지의 시간을 그렸는데, 내내 긴장되는 반정의 준비라기보다는 역과 여의 두 사람에 초점이 맞춰졌다. 소설 속에서 그는 한없는 사랑을 바라는 남자로 그려졌고, 그녀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실제 중종은 이미 잡은 왕권을 놓고 싶지 않았던 인물이라던데, 아내를 버리고 끝까지 돌아보지 않을 만큼 냉정한 사람이었다고 하던데 정말일까? 아마도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중종에게도 적용된 게 아니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고... 그래서 소설 속 역의 모습이 더 애틋하고 아프게 보인다. 아내를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냉정하고 권력 욕심을 부린 사람이 아니라, 한 여자를 향한 사랑밖에 몰랐던 나약하고 여린 사람으로 비춰져서 그가 왕위에 오르고 보낸 몇 십 년의 세월이 죽은 상태였을 거라고.

 

소설의 처음부분에서는 그저 어느 시대의 이야기이겠거니 했는데, 마지막을 향해갈수록 암시하는 내용에 어렵지 않게 그 시대를 연상할 수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정암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 시대의 이야기를 다시 찾아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종과 단경왕후의 최후만큼은 드라마나 소설의 모티브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 반정으로 이룬 왕권, 7일 만에 폐위된 왕비, 전해지는 치마바위 이야기에 '7일'이라는 시간은 많은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는 소재가 될 것 같다. 이번에 드라마 <7일의 왕비>도 그런 의미로 궁금하긴 하다. 애절하고, 아프고, 슬프고, 동시에 많은 이야기를 품은 채로 여러 갈래의 길을 열어주는 듯해서 말이다. 그런데 드라마 소개 부분을 잠깐 봤는데, 연산군과 중종과 채경(중종의 아내)을 거의 삼각관계 분위기인 것처럼 보이던데... 그게 맞나? 어차피 드라마이니, 소설을 읽는 것처럼 보면 그만일지도 모르지만, 기록된 역사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심한 바람이 있네 그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럼에도 우리는
박정아 지음 / 청어람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이상하게도, 금기에 끌리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싶다. 그 본성의 근거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살면서 그 금기를 궁금해하지 않았던 적이 드물다. 굳이 금서라고 하니 더 찾아보고 싶고, 절판이라고 하니 더 궁금해지는 마음에 보태어, 금지된 사랑이라고 하니 더 확인하고 싶어진다. 어쩌면 형부가 되었을지도 모를 남자와 어쩌면 처제가 되었을지도 모를 여자의 만남이라는 설정이 더 듣고 싶은 건 그래서인지도...

 

내가 만나던 남자가 며칠 후에 약혼한단다. 나와 만났던 반년의 시간은 뭐란 말이지? 그의 약혼녀가 찾아와 서윤의 마음을 흔든다. 아니, 처음부터 서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가 약혼녀를 두고 자기를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마음을 더 단단히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사랑했던 시간과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녀의 결정이 옳다고 믿어야 했다. 더는 그를 마주할 생각이 없으니까. 마지막 기회조차 그는 거짓말로 서윤을 실망하게 했으니까.

 

그런 서윤에게 지금과는 다른 시간, 환경이 필요했다. 그래서 떠난 여행, 그렇게 자리 잡은 청주. 새로운 직장을 구했고, 작은 집도 얻었다. 거기에서 인연이 시작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바로 옆집에 사는 남자가, 한때 형부가 되었을지도 모를 기주였다니. 서윤이 미안한 마음을 사람이기도 하다. 언니의 선택에 조언했다는 이유로... 그런 남자와 이웃사촌으로 마주하면서, 오가며 마주할 일이 생기고, 그런 시간이 쌓여가는 그때.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은 서로에게 건너가 버렸다. 그렇게 움직이는 마음이 단속한다고 멈추거나 머뭇거리지는 않는 거겠지. 안다. 법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이임을. 하지만 남들이 흔히 말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어긋나는 관계가 될 수도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서윤은 온 힘을 다해 고백하고 기주를 붙잡으려 하지만, 기주는 그의 마음을 꼭꼭 숨기고 서윤에게 거짓으로 행동한다. 너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 마음에 두어서도 안 되는 존재다, 이대로 서로에게 모르는 존재가 되어버리자. 웃기게도 진심이란 건, 감춘다고 감춰지는 게 아니라는 거.

 

설정 자체가 독자의 호기심을 끌 만하다. 드라마 <눈사람>과는 다른 시작이고 다른 내용이니 혹시나 그런 분위기를 예상한 독자가 있다면 접어두시길. 그저, 형부와 처제로 엮일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는 거다. 그러니 시작도 진행도 마침표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주변의 많은 사람이 던지는 시선이 관계를 흔든다. 시작도 하기 전에. 하긴, 말이 많이 나올 수 있는 사이이기는 하다. 기주의 부모에게도, 서윤의 부모에게도 핵폭탄이 투하된 것 같을 거니까. 서윤과 기주 사이에 일어날 문제는 이게 전부다. 오직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 미안한 대상에게 또 한 번 미안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

 

읽기 전에는 막장이라고 부를 이야기가 아닐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고, 읽는 동안 계속 마음이 술렁였다. 과거의 인연이었지만 이웃사촌으로 그저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한 부분에 자리할 줄 알았는데, 점점 마음이 가는 걸 붙잡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하고 싶어서다. 누굴 좋아한다는 건 계획적으로, 작정하고 이뤄지는 일이 아니므로. 그래서 더 괴로웠겠지. 전혀 그럴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흘러가는 마음을 붙잡을 수 없어서 고통스러웠겠지. 이제 어쩌겠어. 쏟아낼 수밖에. 그런 면에서 보면, 서윤의 용기가 이 사랑을 성공시키는 힘이 되지 않았나 싶다. 안 된다며 물러서고, 급기야 도망가고 말았던 기주에게 항복의 선언을 끌어냈으니 말이다. ^^

 

우연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기주의 말처럼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 더 눈여겨보고 싶은 건, 허락된 사랑을 얻기 위한 그들의 간절한 기다림이었다. 이들의 힘든 사랑의 결실이 더 예뻐 보이는 건,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랑으로 풀어갈 줄 알았더니만 감정이 바탕이 된 이들의 이야기에 이성적 판단과 이해를 보태어 잘 그려진 그림으로 완성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사랑 때문에 힘들고 아플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도 놓치지 않더라. 작가의 전작 한 편을 읽었는데,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서 평범하게 이뤄가는 사랑이 담백하면서 공감하게 하더라. 그 이유로 이 작품 궁금했는데, 비슷한 분위기이면서도 그들의 로맨스에 더 설레게 한다. 외면한다고 사라질 마음이 아니라는 걸 거듭 확인하게 된다. 가독성도 좋고, 가슴이 콩닥거리기에 충분한 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따뜻하게 안아줘
김선민(하니로) 지음 / 청어람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충분하다... 『따뜻하게 안아줘』

 

3년 정도 같이 살아줄 남자가 필요했다. 엄마에게 남은 시한부 인생이 조금 더 밝고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남자를 찾았다. 빨리 결혼할 수 있는 사람, 이왕이면 엄마에게 다정하게 대해줄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리는 결혼을 준비했다. 근데 뭐, 그게 쉽나. 마음처럼 그런 상대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은 남자는 마리의 구역에서 바람이 났고, 마리는 다음 남자를 찾아 나섰다. 그때 마리의 앞에 맞선 상대로 나타난 남자는 기승언. 어렸을 적 같은 동네에서 오가다 얼굴 보면 인사하는 정도였고, 동창인 정언의 형이었다. 그런 그가 왜 맞선남으로 자기 앞에 앉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엄마를 위해 결혼을 해야 한다고, 그냥 한 번 만나볼 사람이 아니라 결혼할 사람이 필요한 거라고. 그에 승언은 답할 수 없다며 거절했고, 마리는 다른 사람을 찾기 위해 맞선 자리에 또 나간다. 거기서 다시 승언을 만난다. 이번에는 승언도 어느 정도 결심을 하고 나왔다. 같은 자리, 두 번째 만남. 상대의 요구를 알아듣고 나온 자리이니, 그냥 한 번 맞선보다는 생각은 아닐 터. 그의 제안은 하나였다. 어차피 결혼을 목적으로 만난 사이, 이제 연애를 하자고.

 

김선민의 글을 좋아한다. 모든 작품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취향 맞고 분위기 좋아서 좀 심심한 글이었어도 다른 작품 보이면 읽어볼 수 있는 마음이 드는 호감. 그런 작가의 19금 소설이라니. 그 전에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접한 김선민의 19금 소설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 궁금했던 듯하다. 말랑하면서도 담백하고, 큰 악역 없이도 지루하지 않게 읽었던 기존의 글에서 더해진 19금의 조화는 어떨까 하고. ^^

 

처음에는 맞선이란 소재에 결혼과 연애가 바뀐 이야기일 거로 생각했는데, 결혼 전에 이미 마음을 풀어놓은 상태로 연애하는 두 사람을 보니 괜히 실실 웃음이 쪼개진다. 거칠 것 없어 보이는 마리가 품고 있는 약한 면을 보면서, 누구나 앓이 하나쯤 갖고 산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엄마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할머니를 인간적으로, 어른으로 존경할 수 없었다. 강해지고 싶었던 건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였고, 그렇게 지키고 싶은 사람이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시한부라니. 더 사랑해도 부족할 시간에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니 뭐라도 해야 했다. 잘 사는 모습, 행복한 모습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게 결혼이다. 좋은 사람 만나서 이렇게 잘살고 있다, 태어난 아기들의 예쁘고 싱그러운 모습 보면서 엄마도 기운을 냈으면 좋겠다, 싶은 바람으로 살아가던 즈음 승언을 만났다. 그를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인 건지, 심성이 반듯한, 좋은 사람에게 좋은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번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하고 진심으로 대할 줄 아는 사람. 내 사람의 마음을 당연하게 우선하는 사람인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거 아냐?

 

승언의 매력을 참 예쁘게 그려놨는데, 특히 태도 분명하게 보이며 거절을 잘하는 이 남자가 너무 맘에 든다. 나는 말을 직선적으로 하는 사람이 좀 부담스러울 때가 많은데, 그에 반해 어떤 일을 앞에 두고 분명한 결정-그게 거절이라 할지라도-을 하는 사람이 좋다.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지지부진하게 끄는 한 마디는, 결국 어장관리밖에 안 된다. 그의 곁에서 후배랍시고, 같은 아픔을 가진 동지라고 해도, 그 선을 넘는 경우를 받아들일 수 없던 그가 뱉은 한 마디, "짐 싸서 나가라"고 했을 때는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아, 거절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군더더기 없이 간단명료하게, 한 마디로, 내가 아닌 마음을 강요당하지 않게, 더는 오해의 여지 없이. 아닌 걸 알았을 때 분명하게 말하는 법을 이 남자에게 사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 없이, 어떤 상황에서 거절하기 미안해서 우물쭈물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니 결과가 좋은 적이 없었다. 결국은 그 미안함이 또 다른 상황, 오해, 상처를 남기던 걸 보면, 미안함에 단호하지 못했던 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었던 거다. 이렇게 또 하나를 배운다. 내 것을 지켜야 할 때는 그것만 볼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을 것, 옳다고 여기는 일, 내 마음을 전하고 싶은 일에는 온 힘을 다하면 될 것.

 

거기에 당찬 마리의 성격도 매력적이다. 거칠기만 할 것 같은 그녀가 마음을 전하는 상대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부드러워지는 모습이 선해 보인다. 어떤 조건으로 사람을 선택해야만 했던 그녀의 의도가 불순해 보이지만은 않는 게 그런 것 같다. 그 진심이 통했으니 승언 같은 남자 만나서 보듬고 안아주는 포근함을 알게 되는 거고. 따뜻함이란 이런 거구나, 싶은 거 제대로 배웠을 그녀의 마음을 열어보고 싶다. 얼마나 따뜻해졌는지 그 온도 한 번 재보게 말이야.

 

세상이, 사람이, 마음이 따뜻해지는 건 순식간인 듯하다. 어느 순간 통해버리고야 마는 진심이 부리는 힘이 대단하다는 것도 증명하는 것 같고. 착하게 살아서 그런가 보다. 착하게 사는 게 바보처럼 보이기 쉬운 세상에서, 착하게 살다 보니 인간미 넘치는 남자 만나서 제대로 따뜻함을 알아가며 사는 이야기가 이렇게 훈훈할 수가 없다. 등장인물 대부분 선해서 그런가, 이런 결과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걸 보면...

 

큰 거부감 없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 너무 술술 풀려가는 이야기에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겠다. 큰 사건이나 별다른 기복 없이 흐르면 또 심심함 느낄 독자가 있을지도 몰라서... 중반부터 두 사람의 스킨십이 제대로 드러나는데, 개인적인 생각은 그 씬의 절반을 줄이고 다른 에피소드로 극의 긴장감을 더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앞뒤 맥락 없이 등장하는 씬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더 단단하게 쌓이는 일들이 등장했으면 싶었다는 개인적인 바람 같은 거. ^^ 사람이 좀 웃긴 게, 누군가를 눈에 담는 순간, 상대가 궁금해지는 순간 이미 마음을 돌리기에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이대로 직행하는 게 진심일까 싶은 의심과 검열이 생긴다는 거다. 아니라고 한마디 보태면서 주춤거리고 싶은, 그렇게 해야 마음이 안심된다 싶은 거. 그래서 처음에 아니라고 말했던 승언의 태도가 2주 만에 변한 모습이, 그 후로 계속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마음 드러내는 게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데, 그건 그냥 그런대로, 그의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더는 문제가 아닌 게 된다. 그래서 단호박 같은 승언의 진심이 더 빛나 보였던 시간.

 

크게 취향 타지는 않을 듯하다. 무난하게, 적당하게 잘 읽히는 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어의 윙크
김지운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곳에 가고 싶다, '작은 책방 잠'... 『악어의 윙크』

 

도서 기증 때문에 단체의 담당자와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 기증하던 곳이기에 기존에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그러다 몇 달 전 택배 예약 문제로 한 번 통화했는데, 세상에나... 분명 내가 알고 있던 바로 그 이름의 담당자였는데, 그분과 통화를 하고 두 번 놀랐다. 그동안 담당자가 여자인 줄 알았고, (나는 왜 그 이름이 당연히 여자일 거로 생각했을까?) 남자였던 그 담당자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놀랐다. (남자 목소리 좋은 게 그리 놀랄 일이냐고?) 아, 괜히 더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조금 더 선할 것 같고, (좋은 일이니까) 괜히 더 친절할 것은 이상한 선입견? ^^ (그게 직업의식이라고 해도!) 담당자의 목소리가 좋았다는 별것 아닌 이유로, 그다음부터는 조금 더 챙겨 보낼 책이 없나 찾아보기도 한다.

 

사람에게 있어 장점으로 작용하는 게 참 많을 텐데, 그중 하나가 목소리다. 다을의 이상형은 목소리 좋은 남자라고 하던데, 굳이 이성이 아닌 동성이라고 해도, 나도 목소리 좋은 사람이 좋다. 좋은 목소리가 주는 편안함이나 즐거움이 있다. 사람은 얼굴 보고 눈 마주치고 이야기해야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데 그에 못지않게 어감은 중요한 거니까. 응?! ^^

 

'작은 책방 잠'에 손님이 두고 간 휴대폰이 발견된다. 손님은 밤새 머무르고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여자. 손님의 휴대폰을 열고 마땅한 연락처를 검색하던 중, 특이한 단축번호 연락처 세 개가 뜬다. 1번 악어, 2번 늑대, 3번 들개. 누구에게 연락할지 몰라 고민하던 세 사람, 다을의 친구 명지, 다을의 동생 소을, 그리고 다을. 가위바위보로 정해진 순서로 세 명의 동물남(?)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기로 한다. 그 첫 번째 주자로 선택된 다을. 다을은 1번 악어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악어 권석주는 '작은 책방 잠'으로 휴대폰을 찾으러 온다.

 

아, 정말... 이런 우연으로 인연이 시작되는 건가? (나에게 잘못 걸린 전화가 오는 건, 말 그대로 잘못 걸린 전화로 끝나기만 하던데, 쩝~) 목소리가 좋은 남자와 여자. 여자는 목소리 좋은 남자가 전화를 받자마자 호감(분명 인간적인 호감을 넘어선 호감일 테지)이 생기고, 남자는 귀찮은 걸음을 했던 그곳에서 마주한 다을에게 마침 준비하려던 기획에 딱 맞는 목소리를 발견한다. 대형 출판사의 임프린트 '다름'의 출간작을 좋아했던 다을은 석주가 '다름'의 대표인 것을 알고 더 호감이 생기지 않았을까? ^^ 책을 좋아하는 여자의 게으름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북카페 '작은 책방 잠'이란 이름에서도 풍기듯이,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조용하고 편한 공간에서 책과 함께하는 시간을 더 좋아하는 여자가 다을이다. '잠'을 찾아주는 손님들이 그렇게 책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먹고 쉬어가는 걸 뿌듯하게 보는 여자에게서 석주는 자신의 출판사 기획에 딱 맞는 적임자인 다을에게 팟캐스트를 하자고 유혹(?)한다. 왜 유혹이냐고? 일을 빙자한 연애 걸기잖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결과를 낼 거잖아!! 하긴, 그 타이밍을 잡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해 보인다. 후훗~

 

반달곰이란 별명을 가진 다을의 이미지가 딱 맞다. 책 좋아하고, 조용한 곳에서 늘어지기 쉬운 그녀의 캐릭터가 별명 그대로 부르면 입에 착 달라붙어 어감이 좋다. 오직 귀로만 듣는 팟캐스트에서 중요한 건 역시 목소리겠지만, 다을과 석주가 주고받는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녹음실에서 느껴지는 건 설렘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그 책을 매개로 한 흐름을 잊지는 않는다. 연인 사이에 같은 취향의 취미와 호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나는 이런 책을 좋아하는데, 너는 어때?'라는 눈빛의 물음 같은. 굳이 권하지 않아도 상대가 관심 있어 하는 책을 한번은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드는 거, 그런 게 있어서 이 연인은 더 돈독해질 것 같다. 알게 모르게 끈끈함 더 생길 것 같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 역시 연인 사이의 관계를 끌어가는 데 중요하니까.

 

이 소설은 책이 중심이 되어 꾸려가는 이야기인 듯하다. 책카페 여자와 출판사 대표, 요즘 흐름에 맞는 팟캐스트를 통해 전달하는 책 소개와 느낌들. 거기에 얹어지는 책과 관련된 사람들, 다을의 가족과 석주의 형제들까지. 진지함과 발랄함이 적당히 섞여 읽는 재미를 준다. 특히 내가 선택하고 싶지 않았던 3번 동물남 들개의 캐릭터가 생각 외로 재밌어서 흥미로웠다. 또명지와 권철주의 숨은 이야기도 즐거웠고. 팔을 부러지게 했던 기억이라면, 나라도 잊지 못할 듯. ^^

 

밀당이나 썸이 아닌, 마음 그대로 드러내는 이야기여서 좋았다.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상대에게 예의 있게 표현하면서 진행되는, 진짜 연인이 되어가는 이들에게서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묻어난다. 무엇보다 사람, 남자와 여자의 연애가 흘러가는 그 감정의 일렁임이 묻어나서 설렌다. 아, 우리 연애를 할 때는 이랬지, 싶은 설렘 같은 거... 기분 좋은 떨림이다. 작은 책방, 커피, 맛있는 음식, 쉼, 사람, 사랑, 책. 팟캐스트가 누군가의 책 선택과 공감에 얼마나 힘을 발휘하는지 독자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책과 어울리는 편한 공간인 ‘잠’의 분위기도 잊지 않고 떠올려본다. 그런 곳,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찾아가고 싶겠지? 거기에서 늘어지는 자세로 책에 파묻혀 있을 다을을 상상해본다. 나도 딱 그러고 싶으니까...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러니
훈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 그려, 안 그려?! 응?! 『아이러니』

우연히 재방송으로 본 <1박 2일> 이화여대 특강에서 차태현이 그러더라. 이제껏 자기 인생이, 하나도 계획한 대로 가지 않더라는... 강당에 모인 많은 학생이 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었다. 거의 두 배의 나이 차가 있는 서로에게 얼마나 공감할까 싶었는데, 그 학생들의 나이에서는 그 나이에 해당하는 만큼의 경험으로 그의 말에 알아들었을 거다.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에게는 또 그만큼 쌓인 연륜으로 공감했을 것이고. 정도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 그 말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13년 전에 원수로 인연을 끝맺었던 준과 세진이도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 듯하다. 산다는 게 알 수 없는 것투성이라고. 세진의 마음속 외침은 ‘내 인생 계획에 이 녀석을 다시 보는 일은 없었거든?!’ 이라고.

방송국에서 라디오 피디 세진의 입지가 점점 줄어간다. 맡은 프로그램이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기본이고, 청취율까지 저조하다. 국장은 매일 험한 소리를 하며 이를 득득 갈고 있다. 이러다 언제 패대기쳐질지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라디오 CP로 경쟁 방송사의 유능한 인재가 스카우트됐단다. 그 피디 때문에 세진의 방송 청취율이 바닥을 기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 사람이 이곳에 모셔져(?) 왔다니 기분이 영 꽝이다. 그런데 이거 웬일? 스카우트됐다는 피디가 김준이었어? 아, 진짜 되는 일 하나도 없다. ‘어떻게 저 인간이 여길 와? 왜 내 앞에 보이는 거야?’ 김준은 국장의 애정을 한몸에 받는 것도 모자라 세진의 갑이 되어버린다. 아, 진짜 자존심 상해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마음만 그래, 마음만). 설상가상 같은 방송국에서 만나던 연인 현민은 헤어지자고 한다. 사내 공개연애를 했는데, 공개로 망신당하게 생겼다. 개차반 애인에게 까여, 원수 같은 동창생은 상사로 와, 국장은 잘라낼 틈만 보고 있어, 휴... 인생 제대로 꼬여간다.

방송국이라는 배경, 그것도 한밤의 라디오가 주는 묘한 매력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했던 책이다. 작가의 전작을 한 번도 못 만난 터라 그 분위기를 알 수도 없었지만, 아마 나는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작품이라고 해도 한번은 읽어봤을 듯하다. 아무래도, 아직도 아날로그의 분위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라디오가 배경이 되는 이야기에 관심이 생긴다. ^^ 만약, 무인도에 TV를 가져갈래, 라디오를 가져갈래, 하고 물으면 고민도 없이 라디오라고 대답할 거다. 그만큼 그 분위기를 좋아한다. 한밤중에 라디오 켜 놓고 책 읽는 거 누가 방해하면 짜증이 날 정도로 싫어했는데, 요즘엔 그 시간에 눈이 피곤해져서 누워있거나, 아니면 PC를 켜놓고 라디오 듣느라 책이 자주 제외되지만, 어쨌든 나도 그 아날로그 감성이 주는 매력을 맛보며 자란 터라, 어쩔 수 없이 그 정서를 잊을 수는 없다. 요즘은 휴대폰으로도 듣고, 바로바로 신청곡을 전송하기도 하는, 아날로그지만 디지털 방식이 되어버린 라디오지만, 전파 타고 흐르는 그 공감대를 생각하면 괜히 더 훈훈해진다. 그 공간에서 함께할 남자와 여자의 케미가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던 거다.

얘네들은 왜 그랬을까? 1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이렇게 원수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성장했기에 여자는 쌈닭이 되어 있고, 남자는 검사를 때려치우고 나와 방송국에 터를 잡은 걸까. 방송국에서 서로 부딪히며 하루하루가 쌓여가고, 각자 자기 방송에 대한 애정과 프로의식이 탄탄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지금 상대의 모습이 왜 그런 건지 알아지는 시간이 보인다. 그 와중에 상대를 향한 눈빛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물론이고. 세진에게 방송국은 더는 스트레스와 눌림을 당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 꽃밭이자,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배워야 할 태도를 가르쳐주는 학교나 다름없다. 그동안 꼬여왔던 인생이 이렇게 풀리려나 보다. 오해가 풀리고, 사람을 보는 눈이 키워지고, 마음을 풀어놓으니 세상을 사는 법이 이렇게 달라지나? (아, 이 긍정마인드 어쩔껴. 내가 배워야긋다.)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을 왜 그렇게 아득바득 싸우려는 자세로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죽일 듯이 미웠을 정도로 서로를 봤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들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서로가 원했던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경쟁자였음은 인정하자. 가정의 무너진 경제에 더 열심히 달릴 수밖에 없었던 세진이나, 세진에게 뒤지지 않으려 치열하게 공부했던 준이나... 드라마 <닥터스>에서 국일 병원 부원장 김태호(장현성)는 진서우(이성경)에게 ‘유혜정(박신혜) 선생은 진 선생에게 좋은 경쟁 상대가 될 거야’ 라고 말했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가 어느 정도 호흡의 흐름을 잡아주는 것처럼 어떤 분야에서든 좋은 경쟁자는 그 자신을 한 뼘 성장하게 해주는 듯하다. 『아이러니』의 두 주인공에게도 마찬가지. 김준에게는 세진이 그랬고, 세진에게는 김준이 그랬다. 서로 1, 2위를 다투면서 그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겠지만, 그래서 더 학업에 매진하는 정신력을 키워준 게 아니었을까. 물론 그 이면에는 서로가 알지 못했던 오해가 쌓여있었지만, 어쨌든 이제 와서 그 시간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의미도 없다. 지금이 좋으니, 됐다. 서로 열심히 달려서 지금 자기의 자리에 안착했고, 그 자리의 일을 좋아하고, 또 더 좋은 라디오 방송을 위해 애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니 말이다. 오해를 쌓은 채로 살아왔던 13년이 아깝고 억울하기보다, 지금의 상황과 마음이 더 애틋하고 감사하니 저절로 풀렸을 거라 믿는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연인이 될 거로 생각하지 않았던 이들처럼, 우리 앞에 놓인 많은 것도 마찬가지. 그냥 오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마음을 채우며 살아가는 일이면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